76. 우리가 가는 길
고린도전서 12장 끝
체부동(体府洞)
11월 16일
人生而有行路, 自朝至暮, 是爲一日, 自生至死, 是爲一生. 流汗勞苦, 邁邁不休者, 是人生行路也, 不可免者此路也. 勿論老少, 無論貴賤, 皆行此路也. 雖臥食之人, 亦行此路, 日御萬機之人, 亦行此路也. 人而無路則非人矣. 然此世多路, 羊腸九曲, 何者是正路, 何者是斜路乎? 不辨東西, 茫茫浩浩, 何處是我路乎? 故阮籍哭窮途, 齊景公泣落照皆是也. 吾等擇一正路, 行行重行行, 雖死不改, 如保羅之馳盡善路也. 人濛然不覺, 捨此正路, 而彷徨于無益之路, 孟子之發歎眞不虛矣. 吾欲行路, 行路之中, 有三個條路也. 一生活, 二職務, 三事業也. 此三者之中, 以信仰爲路, 運此三事可也. 一生活, 昔야곱請나반分家, 나반富也, 야곱은貧乏, 貧而依富可也. 然야곱有信仰可自活, 不必架虛鑿空, 而能自治自給, 少無疑慮也. 有如此之信, 故不可食者不食, 不可衣者不衣, 皆從眞理. 又有知源, 可以致富, 使羊蕃殖. 今朝鮮人, 生活皆虛榮也. 生活難到處皆然. 余入金剛, 登萬物相, 險險不可形言, 眺望雖美, 其危不可言. 噫今吾人之生活皆如此, 彼高坮錦衣, 美則美矣, 而其危甚於萬物相也. 故有自縊死者, 溺水死者, 皆以此生活難也. 然扶吾救出者耶蘇也. 超出此塵網中, 而把主之手則可活也. 如昇馬可之超出也. 知識亦生活之一種, 今吾知識之難, 亦至絶頂也. 有子何以敎, 有校何以學? 朝鮮人之死亡, 比日本人多三割, 或言榮養不足故也. 不但生命也, 知識亦榮養不足也. 誠哉言也! 日光瀑布, 學生溺死者 亦以此也. 二職業, 古語曰 爲君難, 爲臣難. 古詩曰 巫峽之水能覆舟, 若比君心是安流. 人心險於山川, 誠哉是言也! 此修職之路甚難. 爲父難, 爲先生難, 爲妻難, 此等之路, 皆吾人之難行. 詩二十三章, 雖行陰谷, 不畏受害, 主偕我矣. 且爲朝鮮人亦難, 一言不可放心. 一擧手一投足, 不可自由. 主在處有自由云, 余在裁判長之前, 裁長曰 汝出獄後欲何爲也? 余對曰 若出獄, 則我朝鮮人, 願如他國人獨立生活, 以是祈禱于神也. 裁長曰 政治變化不可任意. 余曰 不可任意, 故祈禱云矣. 三事業也, 人各有事業, 此路亦難. 古語曰 十歲樹之以木, 百歲耒之以德. 敎子成家亦難, 古者人有之子, 遊浪不學, 其父席藁代罪, 其子成功. 孟母亦然, 樂羊之妻斷機, 人刱一家亦難, 況一國乎, 況一世乎? 孔席不暇暖, 墨突不得黔, 其難可知也. 鷄鳴而起, 孜孜爲善者, 舜之徒也. 僉位不見吾敎會之形便乎? 自初至今, 諸位勞力果何如也? 經無限波瀾. 僉位欲爲富者乎? 願主偕之. 僉位欲爲學者乎? 願主偕之. 僉位欲何人也? 願主偕之可也. 主不偕之, 破産而已也. 僉位欲行此三條路, 而欲誰同行乎? 保羅欲示好路于고린도, 人欲示行路乎? 主曰 我卽路也, 以主爲路, 運此三事, 則可成工也. 生而行盡此路, 死而無悔, 僉位聞鄭夢周之悔乎, 朴堤上之悔乎? 金致万之春丈, 臨死而懼受罰故受洗, 生前行此三條路, 而勿爲中途改之可也. 主曰 生命之路狹, 死亡之路廣, 又有針孔門, 僉位欲乘락타而不能入針孔門, 僉位之前, 有多馬邑之城(Damascus), 又뼤덜之邑, 又有西乃之山. 多馬雖險, 勿趑趄, 뼤덜이雖險, 亦勿逗留, 西乃雖險, 亦勿棄也. 主向예루살넴而往, 已知有危險, 而不辭也. 願僉位勿取安逸, 與主同苦同樂, 進進不已可也. 吾等之苦難, 皆主之餘也. 以鈍脚踏破, 冒險而往可也.
사람에게는 가야 할 길 곧 행로가 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를 바로 하루라고 하고,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를 한 평생 곧 일생이라고 합니다. 이 기간 동안 쉼 없이 애써 땀 흘리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인생의 행로입니다. 이 길은 누구도 면할 수 없습니다. 늙은이든 젊은이든 귀한 사람이든 천한 사람이든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이 길을 가야합니다. 비록 가만히 누워서 편히 사는 사람이라든지 만 가지 일에 쫓기어 바쁘게 사는 사람도 이 길은 가야합니다.
사람이 되어 갈 길이 없다면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염소의 창자처럼 구불구불 구부러진 길들이 수 없이 많습니다. 이 많은 길 중에 어떤 것이 바른 길이고 어떤 것이 좋지 못한 길입니까? 동서남북의 방향도 분간할 수가 없이 아득하고 넓은 가운데 어느 것이 내가 가야할 길이겠습니까?
그래서 옛날 동진(東晋) 시대 죽림칠현(竹林七賢) 중의 한 사람인 완적(阮籍)은 더 이상 갈 수 없는 막바지 길을 만나면 울음을 터뜨렸고, 중국 춘추시대 때 제 경공(齊景公)은 서산에 지는 해를 보고 인생의 허무함을 한탄하여 울었다고 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이는 바로 가야할 길을 잘 몰라서 하는 한탄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올바른 길을 선택하여 죽는 한이 있어도 고치지 않고 가고 또 가야합니다. 이는 마치 바울이 올바른 길만 달려 나간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와 같이 바른 길을 까맣게 깨닫지 못하여 버려두고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는 길에 방황하고 있습니다. 맹자가 인의(仁義)의 길을 바로 가지 못하는 제왕들을 한탄한 것도 진실로 헛된 말이 아닙니다.
내가 가려고 하는 길이 있습니다. 내 앞에는 3 가지 할 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생활이고, 두 번째는 직무이며, 세 번째는 사업입니다. 이 3 가지의 일을 신앙의 길로 운전해 나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생활에 대하여
옛날 야곱이 나반에게 분가(分家)해서 나가겠다고 하였습니다. 나반은 부자였고, 야곱은 가난하였으므로 가난한 이가 부자에게 의지하는 것이 옳겠지마는 야곱은 신앙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 생활할 수가 있었습니다. 안 될 일을 억지로 하지 않더라도 능히 스스로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에 대하여 조금도 의심하고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신앙이 있기 때문에 애초에 먹지 못할 것은 안 먹고, 입지 못할 것은 입지 않은 채 모두 진리만 따랐습니다. 그리고 또 부자가 될 수 있는 근원을 알고 양떼를 번식시켰습니다.
지금 조선 사람의 생활은 모두 허영뿐입니다. 생활의 어려움은 어디가나 똑 같습니다. 내가 금강산에 가서 만물상에 올라가 보았습니다. 그곳의 험난함은 이루다 형용할 수가 없습니다. 멀리 바라보면 비록 아름답지마는 그 위태로움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의 생활이 모두 이와 같습니다. 저기 우리가 바라보는 높은 누대와 비단 옷이 아름답게 보면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곳을 향하는 위험은 만물상보다 더합니다. 스스로 목매달아 죽는 사람, 물에 빠져 죽는 사람들은 모두 이러한 생활의 어려움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에서 우리를 붙들어 구원해 주실 분은 예수님입니다. 속세의 어려움에서 벗어나 주님의 손을 잡으면 살 수 있습니다. 마치 올라가는 말이 세상을 벗어나듯 하는 것입니다.
지식도 역시 생활의 일종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지식이 어려움을 겪는 것도 역시 절정에 달하였습니다. 자식이 있으나 어떻게 가르칠 것이며, 학교가 있으나 어떻게 배워야 합니까?
우리 조선 사람의 사망률은 일본인의 사망에 비하여 3할이나 많습니다. 어떤 이는 영양 부족 때문이라고 합니다. 생명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식도 역시 영양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실로 그 말도 맞는 말입니다. 일광폭포에서 학생들이 익사하는 일들은 역시 이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직업입니다.
옛말에 ‘군주 되기도 어렵고, 신하 되기도 어렵다’고 합니다. 고시(古詩)에 ‘험난한 무산 골짜기[巫峽]의 물이 배를 전복시키기는 하지만, 군주의 마음에 비교하면 오히려 편안하다.’라고 했습니다. 사람 마음의 위험함이 산과 내보다 더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의 진실함이여! 이게 모두 직업의 길을 닦기가 어렵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아버지가 되기 어려움과 선생 되기 어려움, 아내 되기 어려움 등 이러한 길은 모두 우리 인간의 어려운 갈 길입니다. 시편 23편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께서 함께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조선 사람 되기도 어렵습니다. 마음 놓고 말 한 마디 할 수 없고, 손과 발을 움직이는 것도 자유가 없습니다. 주님 계신 곳에 자유가 있습니다.
내가 재판장 앞에 갔을 때, 재판장이 말하기를 ‘그대가 감옥에서 나간 뒤에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하기에, 나는 대답하기를 ‘나는 조선인이다, 내가 감옥에서 나간다면 다른 나라 국민들처럼 독립생활을 하고 싶다. 이것을 위하여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있다.’하였습니다. 그러자 재판장이 말하기를 ‘정치의 변화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기에, 나는 대답하기를 ‘마음대로 안 되기 때문에 기도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세 번째는 사업입니다.
사람은 각기 사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길도 역시 어렵습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십년 앞을 위하여서는 나무를 심고, 백년 앞을 위하여서는 덕(德)을 기르라’고 하였습니다.
자식을 가르쳐 가정을 이루게 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자식을 두었는데 놀고 방탕하며 학문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 아버지가 거적때기를 깔고 자식의 죄를 대신 받았답니다. 그 뒤 그 자식이 성공하였습니다. 아들을 위하여 세 번 이사 간 맹자 어머니도 이와 같았습니다. 옛날 전국시대 조(趙)나라 악양(樂羊) 장군의 처가 일찍이 남편의 학문이 미숙한 것을 보고 자기가 짜던 베를 잘라서 중간에 그쳐버린 학문이 중도에 끊어버린 베와 같이 쓸모없음을 깨우쳐준 것과 같습니다.
사람이 한 집안을 이루는데도 이렇게 어려운데 하물며 한 나라와 한 세계이겠습니까? 공자가 앉은 자리는 따뜻해질 날이 없었고, 묵자(墨子)가 묵는 집에는 온돌이 검어질 겨를이 없었다고 하니 그 어려움을 알 만합니다. 새벽닭이 울면 일어나서 좋은 일을 하는데 애쓰고 애쓴 사람은 옛날 순(舜) 임금 같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우리 교회의 어려움을 보지 않았습니까? 처음부터 오늘날까지 여러분들의 노력은 어떠하였습니까? 끝없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부자가 되고 싶습니까? 주님과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학자가 되고 싶습니까? 주님과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바라건대 주님과 함께하여야 옳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파산할 뿐입니다. 여러분은 앞서 든 세 가지 길로 가기 위하여 누구와 동행하시겠습니까? 바울은 고린도서에 좋은 길을 보여주려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내가 곧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으로 가는 길을 삼아 이 세 가지 일을 운전해 간다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살아서 이 길을 다 가면 죽어서도 뉘우칠 게 없습니다.
여러분께서는 고려의 충신 정몽주가 뉘우쳤다는 말을 들었습니까? 신라의 사신으로 일본에 가서 충절을 지킨 박제상(朴堤上)이 뉘우쳤다는 말을 들었습니까? 김치만(金致万)의 아버지는 죽음에 임하여 벌을 받는 게 두려워 세례를 받았습니다. 살아 있을 때 이 세 가지 길을 실행하되 중도에서 바꾸지 말아야 됩니다.
주님께서 ‘삶의 길은 좁고, 죽음의 길은 넓다’라고 하셨습니다. 또 바늘구멍 같은 문이 있는데 여러분은 낙타를 타고 그 바늘구멍에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앞에는 다메섹의 성이 있고, 또 베델이 있으며, 또 시내 산이 있습니다. 다메섹이 아무리 험하여도 머뭇거리지 말 것이며, 베델이 아무리 험하여도 머물러 있지 말 것이고, 시내 산이 아무리 험하여도 역시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셨는데 여기에 이미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사양하지 않았습니다. 바라건대 여러분께서는 안일만을 취하지 마시고, 주님과 함께 동고동락을 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또 나아가는 일을 그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고난은 모두 주님께서 짊어지고 남은 것입니다. 무딘 걸음으로 모험을 답파하고 가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