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 나는 강하다
학교에 있든 집에 가든 그 초록색 형체는 조금 마음을 놓을 만하면 나타나서 그 눈의 여왕이 어쩌구 하는 말을 하면서 내게 애원했어. 그때마다 눈도 안 마주치고 자리를 피했지만 내 방에서 갑자기 나타날 때면 어디로 갈 때도 없고 너무 곤란했지.
그럴 땐 그냥 눈을 감고 숫자를 셋다. 나는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다, 여긴 해리 포터의 세계가 아니다. 앞으로 다시는 판타지 소설을 보지 않겠습니다. 별의별 말을 속으로 다 하면서 눈으로 그 형체가 없어지길 기다리고 있다가 어느 순간 눈을 뜨면 내방은 다시 나혼자만의 것이 되어 있었어.
‘상담선생님의 말대로 정신과에 가봐야 하는 걸까? 이렇게 끝이 없다니. 나는 진짜 왜 이렇게 된 걸까? 엄마한테 괴롭힘 당하면서 사는 것도 억울한데 정신까지 이상해지면 너무 억울한데...’
정신과에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나는 그 존재와 한번 이야기라는 걸 해보기로 했어. 그게 내가 만들어낸 환상이라도 해도 뭔가 알아낼 게 있을 듯 했기에. 그리고 처음으로 그 존재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었지. 그리고 마침내 나타났다.
“눈의 여왕의 후계자시여, 제발 다음번 눈의 여왕의 탄생을 막아주십시오.”
“그래 알겠어. 네가 원하는 걸 신물나게 알겠다고. 근데 어떻게 해야 그게 가능하지?”
“당신의 어머니는 눈의 여왕이며 당신은 차기 눈의 여왕입니다. 눈의 여왕들은 이 세상에 한명이 아니고 아주 많아요. 어린 시절부터 훈련을 시켜서 눈의 여왕으로 만드는 거지요. 대개 그 훈련에 져서 눈의 여왕이 되버립니다. 이번 대에선 당신만이 아직 심장이 얼어붙지 않았어요. 눈의 여왕이 한명이라도 줄어들어야 우리 세계의 얼음이 줄어듭니다. 당신들의 세계와 우리들의 세계는 이어져 있거든요.”
우아, 역시 나는 짱 센 사람이었군. 엄마에게 그렇게 공격받고도 눈의 여왕 따위 되지 않았으니.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나에 대해 기특함을 느꼈어.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저와 함께 눈의 여왕의 공격에 대항하는 훈련을 하면 됩니다.”
“흠, 날 도와주겠다는 거지?”
“네, 당신은 굉장히 용감하고 강한 분입니다. 눈의 여왕의 딸로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남은 것은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나는 그 말을 듣자 갑자기 허를 찔린 기분이었어. 누군가에게 내가 살아있는 것 자체를 칭찬받다니 정말 마음이 간질간질하고 이상한 느낌이었지. 어떤지 울고 싶기도 했고 말이야. 그렇지만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그냥 입을 다물고 조금 눈물이 배인 눈으로 초록색의 난쟁이를 조용히 쳐다보았지. 그 존재의 얼굴을 제대로 보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어.
4회 - 마법 훈련
“도대체 넌 누구야?”
“저는 눈의 여왕의 세계에서 온 난쟁이입니다. 예전에는 눈의 여왕이 이 세상에 이렇게 많지가 않았어요. 적당해서 얼음과 봄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이 세계에 눈의 여왕이 많아지면서 우리 세계는 얼어붙기 시작했답니다. 우리들은 그걸 막기 위해 눈의 여왕의 후계자들을 찾아오기 시작했지요. 제 이름은 루아입니다. 그렇게 불러주세요.”
나는 이제 이 눈앞의 초록 난쟁이라는 존재를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어. 게다가 날 도와주겠다고 하잖아? 세상에 태어나서 날 도와준 존재가 하나라도 여태까지 있었냐고. 아무도 없었지.
“그럼 그 훈련이라는 건 어떻게 하면 되는 거야?”
“마법을 훈련하면 됩니다.”
“마법? 마법이라고?”
나는 어리둥절해서 큰 소리로 되물었어. 초록 난쟁이라는 존재를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마법까지는 좀 무리였거든.
“마법이라고 해서 아주 대단한 건 아닙니다. 이 세계에서 마법이란 건 상상력과 말로 이루어져 있어요. 다만 그걸 마법력으로 바꿔서 쓸 줄을 모르는 것 뿐이죠.”
상상력이라. 그건 내가 좀 자신 있는 분야이기는 했어. 언제나 머릿속으로 이곳이 아니고 다른 곳에 살고 싶어서 내가 살고 싶은 곳을 상상하곤 했거든. 내 머릿속에는 백 개도 넘는 살고 싶은 곳들이 있을 거야.
“상상력을 마법력으로 어떻게 바꿔야 하는데?”
“그걸 지금부터 제가 당신에게 알려드리겠습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죠?”
나는 어쩐지 이름을 쉽게 가르쳐주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 판타지 소설을 많이 보면 그런 상식쯤은 갖고 있기 마련이잖아?
“이름 알아서 뭐할 건데?”
“서로 이름을 알아야 신뢰를 할 수 있습니다. 외람되지만 앞으로 제게 당신의 마법 선생이 될 예정이니 제자의 이름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수긍이 가지 않는 말은 아니었어.
“내 이름은 오은수야.”
“그럼 은수님 지금부터 저와 함께 당신의 상상력을 마법력으로 바꾸는 훈련을 시작하기로 하겠습니다. 동의하십니까?”
“음... 동의해.”
초록 난쟁이는 빙긋 웃더니 내게 작은 손을 내밀었어. 아마 악수하자는 거겠지?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그 손을 잡았어. 조금 촉촉하고 따뜻한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어.
나는 학교에서도 다른 학생들이랑 이야기를 하지 않고 책만 봤어. 엄마 때문인지 인간이 싫었거든. 그래도 외롭거나 힘든 일은 없었는데 이상하게 이 작은 초록 난쟁이가 내 옆에 계속 있기 되었던 뒤로 그동안 내가 좀 외로웠었다는 걸 깨닫게 되어서 기분이 이상했어.
이 아이가 나타나는 게 처음만큼 불쾌하지 않고 기다려지게도 되고 심지어 어떨 땐 반갑기도 했거든. 내가 태어나서 한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존재인 ‘친구’가 이런 느낌일까 싶었어. 하지만 아직 그렇게 거창한 이름을 붙여주기는 싫었어. 초록 난쟁이가 말하긴 마법은 상상력과 말에 있다고 했잖아. ‘친구’라는 말에는 마법력이 있을지 어떻게 알아? 나중에 나중에 그렇게 말해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