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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신도 봉화대 원문보기 글쓴이: 오우가
평신도들은 각성하자
민경석 : [한국교회 2000/권위주의와 교회중심주의를 넘어서]
-분도출판사-의 저자, 현재 클레어몬트 대학원 신학 교수
항상 회개하고 반성하는 생활,
이것은 우리 신앙의 본질이요, 모든 종교의 핵심이다.
불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의 삶이란 취생몽사, 즉 술에 취하여 살고, 꿈을 꾸면서 죽는, 다시 말하여 의식 없는 도피적 삶이라고 할 것이다.
그래서 불교는 삶과 만물의 진실을 깨우쳐 허황된 생각을 끊어버리고 항상 눈을 뜨고 깨어있는 삶을 살 것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무지, 환상 그리고 탐욕에서 해방된다면 지금 이곳에서도 열반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공생활을 시작하심에 있어서 제일 먼저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1.15)고 말씀하셨다. 이미 이 세상에 다가오고 있는 그 하늘나라에 참여하기 위해 첫째로 하여야 할 것은 바로 회개하는 것이다.
회개란 우리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옳은 길로 돌아서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신약성서는 이 회개의 방법과 내용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반성하고 회개하고 그리하여 삶을 개선하는 것은 그리스도적 신앙과 삶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신자 개개인에게도 단체로서의 교회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요구라 할 수 있다.
그래서 16세기 종교개혁당시부터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semper reformanada)고 하였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교회헌장'에서 "죄인을 가슴에 품고 있는 교회는 거룩함과 동시에 항상 정화되어야 하며, 끊임없이 회개와 쇄신의 길을 걸아야 한다."(8항)고 강조하고 있다.
잠자는 교회도, 깨어난 교회도 평신도가 만든다.
교회 내에서 쇄신을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부류가 있다면 그것은 단연코 평신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평신도에게는 쇄신의 기회가 많이 주어져 있지 않다. 수도자나 사목자는 숫자도 적고 특수한 목적으로 뽑힌 사람들이며, 구조적으로 배움과 쇄신의 기회를 항상 충분히 누리고 있다.
거기에 비하여 교회의 대부분인 평신도에게는 배우고 깨우치고 기도함으로써 쇄신할 수 있는 기회가 극히 제한되어 있고, 따라서 그만큼 쇄신을 더 필요로 한다고 할 수 있다.
둘째, 교회의 절대 다수가 평신도라는 사실은 평신도의 쇄신 없이 교회의 쇄신을 말할 수 없고, 특히 세상에서 복음을 실천하고 하느님의 나라를 증거 하여 이 세상을 거룩하게 하는 교회의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서 평신도의 자각과 쇄신은 절대 불가결의 요소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는 교회 자체를 위하여 존재하지 않고 세상의 구원과 해방을 위하여 존재한다. 그리고 평신도들의 특수성은 바로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추구하고 교회의 사명을 실천하는 "세속성"에 있다고 '교회헌장'은 가르치고 있다.(31장).
교회가 이 세상에서 어느 정도 빛과 누룩의 역할을 하고 있느냐는 것은 거의 전적으로 평신도들의 자질과 노력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셋째, 교회 내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평신도들의 책임은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공동체의 살림이 질서 있고 활력 있게 꾸려지고 있느냐 하는 것은 사목자의 지도력도문제려니와 공동체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협력하려는 평신도들의 의지와 자질에 크게 좌우된다고 할 것이다.
아무리 박력 있는 사목자라도 평신도들의 적극적 응답이 없다면 실망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그와 반대로 아무리 독재적인 사목자라도 신자들의 의식과 책임을 가지고 교회 일에, 때로는 제안도 하고 때로는 항의도 한다면 감히 독재를 할 수 없을 것이다.
훌륭한 사목자를 격려할 수 있는 것도 또는 실망시키는 것도, 그렇지 못한 사목자들의 공권남용을 방지하는 것도 또는 조장하는 것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동체 자체를 살아있는 공동체로 만드는 것도 또는 죽은 공동체로 만드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평신도들에게 달려있다.
국민들의 질보다 더 나은 대통령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그 국민에 그 대통령이라는 말이다. 사목자들의 질도, 공동체의 분위기도 결국은 평신도들의 책임이다. 신태민 선생의 말대로 "잠자는 교회도, 깨어난 교회도 평신도가 만든다"([만민의 빛], 1994, 82면).
평신도 쇄신의 지침으로 다음의 네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평등의식을 함양할 것,
둘째 교회 내에서 책임과 권리 행사에 적극적일 것,
셋째 책임과 권리에 상응하는 지식을 습득할 것,
넷째 성숙한 신앙을 기를 것 등이다.
그리스도 안에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
첫째, 평신도 쇄신에 가장 근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평등의식이라 할 것이다. 다시 말하여 교회 안에서는 사목자나 평신도나 '평등'하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오랫동안에 걸친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과 한국적 권위주의 문화의 영향으로 평신도들은 '성직자'들보다 더 낮고 비천한 존재로 스스로를 평가하여 왔고, 그 결과로 교회 내의 모든 결정과 책임, 권한을 사목자들에게 맡기게 되었으며, 그 반대로 평신도들은 완전히 피동적인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따라서 평신도들이 교회 내에서 능동성을 되찾고 맡은 바 책임과 권리를 행사하기 위하여서는 무엇보다도 평등의식을 길러야 할 것이다.
마치 민주 국가의 시민으로서의 첫째 조건이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듯,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첫째 조건은 하느님 앞에,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의 모든 구성원은 직분이나 기능의 상이성에 관계없이 품위와 사명의 평등성을 누린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모든 신자들은 사목자이건 평신도이건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여 그분과 한 몸이 되고, 아들이신 그분 안에서 하느님'아버지'의 아들딸로서 새로운 삶을 살도록 불림을 받은 사람들이며, 이것이 곧 세례성사의 의미이다.
세례를 통하여 삼위일체적인 삶으로 초대받은 신자들에게는 따라서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은 모두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갈라 3.28).
이러한 평등성은 직분이나 역할의 차이를 논하기 전에 교회 안의 모든 이들-평신도, 사제, 주교, 교황, 수도자 등-에게 해당되는 것임을 특별히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서품되었다고 또는 수도 서원을 하였다고 평신도보다 더 '거룩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교회 안에서의 새로운 역과 직분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평신도들도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직접 사도직으로 불림을 받았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늦게나마 이것을 다시 깨우치게 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모든 이들의 품위와 사명의 평등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교회헌장'에서 삼위일체 신비의 한 부분으로서의 교회(제1장)와 삼위일체적 삶으로 불린 하느님의 백성 모두의 예언직, 사제직, 왕직 등을 먼저 다루고(제2장),
그 다음에 교계제도, 평신도, 수도자 등을 다루었으며, 교회 안의 직분과 역할의 다양성을 논하면서도 그것이 결코 품위의 고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하면서 모든 이들이 교회의 사명에 "똑같이"(30항) 책임감을 가지고 참여하기를 강조하고 있다.
교회의 모든 공직은 공직자들의 사익이나 지배욕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오직 교회의 "공동성"을 위하여 존재하며(18항), 교회의 모든 구조는 교회에 생명을 주시고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켜 주시는 성령께 "봉사"하는 데(8항) 그 목적이 있다.
사목자들의 역할은 교회의 모든 사명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신자들이 스스로의 은사를 인식하고 교회의 "공동 과제"에 한마음 한 뜻으로 참여하도록 깨우치고 조정하는 것이다(30항).
모든 하느님의 백성들이 한 분의 주님, 하나의 신앙, 하나의 세례를 소유하듯이, 그 모든 구성원들 사이에는 직분의 차이에 관계없이 "공통의 품위", "공통의 은총" 그리고 완전성으로의 "공통의 소명"이 있을 뿐이다.(32항).
거기에는 신앙의"평등한 특전"이 있고, 품위와 교회사명 참여에 있어서 "진정한 평등"이 존재한다(32항). "모든" 신자들은 "차별 없이"(40항) 누구나 그리스도적 생활의 완덕으로 불림을 받았으며 오직 그 방법이 다를 뿐이다(41항). 그리고 교회법 제208조도 이러한 평등성을 재확인하고 있다.
모든 신자들이 사목자나 평신도라는 직분의 차이에 관계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등한 품위를 누리고 교회 사명 완수에도 똑같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은 신약성서의 기본적인 가르침이요, 이것을 다시 발견하고깨우친 것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특별한 공헌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은 바로 하느님 앞에 누구나 평등한 존재라는 그리스도교의 혁명적 교리로 복귀하는 것이다.
교회 내에 직분이나 역할의 차이는 있어도 봉건주의적 계급의 차이는 있을 수 없으며, 상호 존중은 있어도 어느 특정한 직분에 대한 신격화나 우상화는 있을 수 없다. 모든 신격화나 계급주의적 관행이나 사고는 교회 안에서 추방하여야 한다.
노예 해방의 가장 큰 적은 노예들이라고 한다. 오랫동안의 노예생활을 통하여 노예생활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노예 자신들이 노예 해방의 큰 걸림돌이라는 말이다. 평신도 해방의 가장 큰 걸림돌도 우리들 평신도 자신일지 모른다.
오랫동안 교회 내의 성직주의 문화와 한국의 권위주의 문화에 젖어온 우리들은 우리들의 지위를 스스로 비하하고 우리들의 책임을 과소평가하는데 익숙하여 왔다.
그래서 평등사상이비록 성서의 가르침이요, 현대 교회의 최고 권위인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가르침이라고 강조해도 많은 평신도들은 그것을 오히려 이단인 듯 착각하고 스스로의 평등한 품위와 책임을 거절하는 대단히 유감스런 현상이 현재 한국 평신도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모든 하느님 백성들의 평등성을 문헌에는 적었으면서도 실제 강론이나 교리교육을 통하여 적극적으로 홍보하거나 또 교회적 관행의 혁명을 통하여 실천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은 교회 당국자들의 책임이 절대적임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교회 쇄신은 하느님 백성의 절대 다수인 평신도들의 쇄신 없이 있을 수 없고, 평신도들의 쇄신은 품위와책임의 평등성에 대한 의식의 개혁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모든 평신도들은 그리스도 안에 사목자들과 함께 '평등한' 품위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교회 사명 완수에 있어서도 사목자들에 못지 않은 책임이 있음을 인식하고 행동하여야 할 것이다.
하느님과 예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비하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사목자들 앞에 우리를 비하하는 것은 봉건주의적 비굴은 될지언정 그리스도적 겸손은 아니다.
우리는 사목자들을 존중하면서도 저들을 신격화하지 않고, 저들을 신격화하지 않으면서도 저들을 존경하며, 겸손하면서도 우리 자신의평등한 품위와 책임을 의식할 줄 아는 성숙한 평신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사목자들의 '동반자'들이지 '종'이 아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동업자"들(sunergoi, 로마 16.3;9.21)이다.
적극적으로 책임과 권리를 행사하자
둘째, 평신도들의 평등의식은 공동체생활에 있어서 보다 적극적인 권리 행사와 책임 완수로써 실천되고 구체화되어야 한다. 공동체는 사목자들만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목자들은 공동체의 '종'이요 공복이다. 공동체의 대다수인 평신도들은 공동체의 손님이나 방관자가 아니고 사목자와 함께 공동체에 똑같이 책임을 지는 주인이요 주체라고 할 수 있다.
교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교회이다."("We are the church.")라는 의식을 가지고 공동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야 한다. 모든 것을 사목자에게 일임하고 무슨 일을 하려면 사목자의 눈치만 살피는 타율적이고 피동적인 자세는 하루속히 척결되어야 한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로 교회 내에서의 평신도들의 발언권이 크게 신장되었어도 한국 공동체들에게는 이 기쁜 소식이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음은 크게 유감이 아닐 수 없다.
공의회는 사목자들에게
평신도들의 품위와 책임을 인정하고 촉진할 것,
평신도들의 제안과 권고를 기쁘게 받아들일 것,
교회의 봉사를 위하여 신뢰를 가지고 저들이게 직분을 맡길 것,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와 여지를 줄 것,
저들의 고유한 은사, 경험 그리고 자격을 인정하고 교회의 공동선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줄 것
그리고 저들의 시민적 자유를 철저하게 존중할 것 등을 강조하고(교회헌장, 37항 사제직무교령, 9항),
또 평신도들에게는 사목자들에게 저들의 의견과 희망 사항을 자유롭게 개진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교회헌장, 37항),
현 교회법은 이러한 공의회의 가르침을 명문화하여 제 212조에서는 신앙과 윤리에 어긋나지 않고 사목자들에 대한 존경심, 공동선과 인격의 존엄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교회당국자들과 다른 신자들에게 교회 문제에 관하여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언론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고, 제 215조는 '가톨릭'이라는 공식 명칭을 사용하지 않는 한(이 명칭을 쓰려면 교회 관할권자의 명시적 또는 묵시적 동의를 얻어야 한다.) 종교적인 목적으로 모임을 만들고 회의를 할 수 있는 결사의 자유를 명시하고 있다.
미국 교회에서는 이러한 공의회의 가르침에 힘입어 본당과 교구 차원에서 사목협의회가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고, 많은 평신도들이 적극적으로 공동체의 일에 참여하고 발언함으로써 저들의 권리와 책임을 행사하고 있다.
또 전국적 차원에서 많은 평신도들의 자율적 단체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고 평신도들이 발간하는 다수의 주간지들도 교회 내의 여론 조성에 크게 공헌하고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평신도들이 사제나 주교들을 비판한다고 이상스럽게 생각하거나 주제 넘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주교들도그러한 비판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그러한 비판을 교구 신문에 싣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한국 공동체에도 평신도들의 자발적 권리 행사와 책임 완수를 고무하고, 언론과 결사의 자유를 통하여 평신도들을 활성화하는 분위기와 풍토가 하루속히 조성되어야 하며, 이러한 풍토 조성에 평신도들 스스로가 앞장서야 될 것은 물론이다. 평신도들은 스스로의 권리를 행사할 줄 알아야 하고 스스로의 책임을 이행할 줄 알아야 한다.
모든 일에 본당 신부의 동의나 허락에 의존하는 의타적이고 유아적인 사고방식을 청산하고 정당한 절차를 통하여 결정된 사목적 결정 이외에는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제안하고, 스스로 협력하며, 스스로 행동하는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모습을 보여야한다.
열심히 배우자
셋째, 교회 내에서 평신도들이 사목자들과 평등하게 책임과 권리를 행사하려면 그 책임과 권리에 상응하는 지식을 습득하여야 한다.
교회생활은 그 나름대로의지식을 요구한다. 그 동안 사목자들의 권위가 절대적이었던 것은 신품성사에 대한 권위주의적 해석에도 기인한 바 있지만, 교회에 대한 지식을 사목자들이 독점하고 평신도들에게는 문답 암기식의 최소한의 지식만을 전달하였던 것에도 크게 기인한다.
지식의 독점은 권력의 독점이나 마찬가지이다. 지식은 곧 힘이기 때문이다. 교회에 대한 지식은 교리, 성서, 윤리, 성사, 예절, 교회법, 교회사, 교회 조직, 교회 전통 등 특수한 지식을 포함하며 이러한 지식은 사회나 일반 학교에서 습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동안 이러한 지식은 신학교에서나 가르쳤고 따라서 사목자들만이 습득할 수 있는 그런 지식이었다. 비록 근래에 와서 여러 연수회나 교회 출판물의 보급을 통하여 평신도들도 그런 지식에 접할 기회가 많아졌다 하더라도, 아직도 그런 지식이 사목자들에 의하여 거의 독점되고 있음이 사실이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사회적으로 전문인의 지식을 가졌어도 일단 교회 안에 들어오면 모든 것을 사목자들에게 의존하는 유아적 행태를 보이게 된다.
따라서 평신도들이 교회의 사명 완수에 사목자들과 평등하게 책임과 권리를 행사하려면 우선 교회생활에 필요한 지식부터 습득하는 데 적극적이어야 할 것이다. 아무것도모르면서 권리를 주장하는 것처럼 우스운 것도 없다.
그런 주장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 엉뚱한 주장이 되기 쉽고 그런 주장들끼리 부딪히면 필요 없는 충돌을 낳아 공동체를 혼란에 빠뜨릴 수도 있다.
일반 사회의 교육 수준의 향상과 함께 평신도들의 교육 수준도 많이 향상되었고 고등학교 졸업은 물론 대학 졸업자들도 흔할 뿐 아니라 대학원 교육을 마친 전문인들의 수도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평신도들도 자기의 사회적 교육 수준에 맞게 교회생활에 대한 지식도 습득하여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평신도들의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오직 올바른 지식에 기초한 권리 행사만이 공동체생활에 대한 책임 있는 참여가 될 것이다.
품위와 사명의 평등화는 지식의 평등화 없이는 불가능하다. 특히 독신 사목자들의 수가 줄어들고 평신도들이 교회의 사목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야 할 시대적 요구가 점증함에 따라, 교회의 사목적 지도자로서 활동하는 데 필요한 기본 지식을 습득한 훈련된 평신도들의 필요성은 참으로 절박하다 할 것이다.
평신도들도 이제는 사목자들에 의한 지식의 독점을 불평할 때가 지났음을 알아야 한다. 자율적인평신도들은 누가 가르쳐주기 전에 스스로 배우려 노력해야 하고, 그럴 의지가 있는 평신도들에게는 그 동안 교회 내의 출판사업의 활성화로 말미암아 유익한 서적과 잡지들이 얼마든지 있음을 기쁘게 여겨야 될 것이다.
[신학전망], [사목] 등 정기 간행물에서부터 공의회 문헌, 교회법, 보편 교리서에 이르기까지 교회생활에 대한 기본 지식을 습득하는데 필요한 책들이 한국말로 번역되고 또는 쓰여지고 있다. 이제 기회가 없다고 탓할 시기는 지났다.
게다가 미국에 살면서 영어를 할 줄 아는 평신도들에게는 얼마나 많은 신문, 잡지, 서적, 비디오들이 저들을 기다리고 있는지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경제적 풍요뿐 아니라 지식의 풍요의 시대에 살고 있다. 필요한 것은 배우고자 하는 의지이다. 배울 것은 너무나 많다.
성숙한 신앙을 함양하자
넷째, 평신도 쇄신의 필수 조건으로 성숙한 신앙의 함양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성숙한 신앙은 무엇일까?
(1) 성숙한 신앙은 외형적, 형식주의적 신앙이 아니다. 외형적신앙은 겉으로 본명을 부르거나 묵주기도의 횟수가 많다거나 성모상을 모신다거나 하는 등 형식적인 것에 집착한다.
또 집안에 신부, 수녀가 많다고 자신의 신앙이 돈독한 것처럼 착각한다.
(2) 성숙한 신앙은 우물 안 개구리식의 폐쇄된 신앙이 아니다. 폐쇄된 신앙은 우리들 '끼리끼리'만의 신앙으로 만족하고 '우리' 본당, '우리' 교구, '우리' 교회에만 집착하고 '남'의 교회나 세상일에는 무관심하다.
(3) 성숙한 신앙은 유아적, 어린아이의 신앙이 아니다. 유아적신앙은 하느님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여 항상 불안하기 때문에 늘 기적에만 집착하고 교회의 성사생활을 미신으로 전락시킨다.
그런 신앙은 기적보다는 십자가를 지고 하느님께 신뢰하는 꾸준한 신앙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4) 성숙한 신앙은 의타적 신앙이 아니다. 의타적 신앙은 모든 결정을 신부나 수녀들에게 의존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마치 열심한 신앙인 것처럼 착각 한다.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할 줄 모른다.
(5) 성숙한 신앙은 말과 기도만의 신앙이 아니다. 기도는 열심히 하면서 또 말끝마다 "주님, 주님" 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 것은 기본 사고방식이나 삶의 바뀜이 없는 입만의 신앙이다. 그런 신앙은 가정이나 사회에서 크게 나쁜 짓을 하고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6) 성숙한 신앙은 교회 중심적 신앙이 아니다. 교회 중심적 신앙은 교회 일에만 몰두하고 집착하여 교회 자체가 사회와 세상의 구원과 해방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잊고 있다. 교회 자체가 목적이 되고 만다. 교회 안에서 모든 시간을 보내는 것이 마치 열심한 신앙인의 자세로 착각한다.
성숙한 신앙은 외형적인 것에 집착하지 않고 복음 정신과 그 실천에 충실한 신앙이요, 우리끼리 만의 신앙이 아닌 '남'에게 열려진 신앙이며, 어린아이의 신앙이아닌 어른의 신앙이고, 의타적 신앙이 아닌 자율적 신앙이며, 입만의 신앙이 아닌 실천의 신앙이며, 교회 중심적 신앙이 아니고 세상에 열려진 그리고 세상에서 역사하고 계신 하느님 나라 중심의 신앙이다.
사목자들도 반성하자
평신도들의 이와 같은 쇄신은 평신도들에게 달려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 그것도 한국 가톨릭교회처럼 모든 실권이 사목자들의 수중에 집중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사목자들의 협력과 반성 없이 평신도들만의 쇄신이란 불가능하다 아니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사목자들에게도 다음과 같은 양심 성찰을 권고하고 싶다.
첫째, 사목자들은 과연 얼마나 강론이나 교리 시간에 사목자와 평신도들의 평등성을 강조하였는가?
오히려 사제직과 수도생활의 거룩함만을 말함으로써 평신도들의 열등의식을 조장하고 또 (죄송한 이야기지만) 그러한 열등의식을 속으로 즐거워하지는 않았는가?
또 사제직과 수도생활에 대한 성소는 강조하면서도 그에 못지않게 평신도들의 성소의 중요성도 강조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까?
교회 내에서 평신도, 수도자, 사목자를 의식적으로 차별하여 하느님 백성들의 기본적 평등성을 실제적으로 부정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예를 들어 명동 성당에서 무슨 행사가 있으면 성직자석, 수도자석, 평신도석이 따로 마련된다.
왜 평등한 하느님의 백성들이면서 따로따로 앉아야 되는가? 함께 앉으면 품위가 손상되나?
성사나 미사 집전 등 직분상의 필요한 구분을 제외하고는 모든 외형적인 특혜나 차별은 과감하게 철폐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신앙을 거스르는 봉건적 귀족주의의 잔재이기 때문이다.
둘째, 사목자들은 평신도들이 스스로의 권리와 책임을 행사하려고 하였을 때 그것을 고무하고 격려하였는가? 혹은 자기들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오히려 위협을 느끼고 방해하려고 하지는 않았는가?
과연 어느 정도 평신도들에게 스스로 활동할 수 있는 자유와 설 자리를 만들어 주었는가?
이 점에 있어서 교회 내에는 시정되어야 할 관행이 너무 많다.
예를 들어 피정에 참여하는 데도 본당 신부의 서명이 필요하고, 모든 단체에는 지도 신부가 있어야 한다. 도대체 피정가는 것까지 본당 신부의 허락을 받아야 하나?
또 지도 신부가 없으면 평신도들이 나쁜 짓을 할까 봐 걱정이 되는가?
본당신부의 동의가 없으면 본당 밖에서 시행되는 강연이나 모임에도 참석을 못하는가? 이제는 공동체의운영상 극히 필요한 결정 사항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평신도들의 자율에 맡기고 저들을 성인으로 대하여야 한다.
셋째, 본당, 교구 또는 전국 차원에서 평신도 교육을 위한 기회를 어느 정도 마련하였는가?
여기서 말하는 교육이란 순명만을 강조하는 그런 교육이 아니고 평신도들의 의식을 일깨워주고 저들의 책임과 권리 행사에 필요한 성숙한 교육을 의미한다.
옛날에 안중근 의사가 민 대주교에게 학교를 지어 평신도들을 교육할 것을 제안한 바 있다.그랬더니 민 대주교는 평신도들이 교육을 받으면 교만하여지고 순명하지 않는다고 그 제안을 거절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사목자들도 민 대주교처럼 교육받은 평신도들이 두려워 평신도들에 대한 적극적인 교육을 게을리 하는 것은 아닌가?
순명을 강조하는 피정의 기회는 많아도 평신도들의 평등성을 깨우쳐주고 저들로 하여금 성숙하고 자율적인 신앙을 갖게 하는 넓고 수준 있는 교육의 기회가 적어도 이민 교회에서는 거의 전무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사목자들은 강론이나 교리교육을 통하여 신앙을 가르침에 있어서 과연 성숙하고 자립적인 신앙을 가르치는가? 혹은 형식적, 폐쇄적, 의타적, 유아적 신앙, 다시 말하여 그릇된 신앙을 가르치지는 않고 있는가?
평신도들의 참된 성장과 쇄신은 사목자들의 쇄신과 반성 없이는 불가능하다. 평신도들의 각성과 사목자들의 각성은 병행되어야 한다.
사목자들이여, 그리스도 안에 '형제들'로서 또 하느님 사업의 '동업자들'로서 평신도들의 쇄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립시다! 아멘!
출처 : 사목 1996.9월호 (통권21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