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문화교류, '최치원 선생'으로
다시 트이다
22일 안동대에서 한·중 문화교류 협약식 개최
by호서비 글쓰기Jul 23. 2023
코로나19로 여러 해 차단됐던 한중 문화교류가 신라 최치원 선생의 사상과 학문을 계기로 다시 시작되고 있다. 신라 최치원 선생은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이름난 학자로 여겨진다. 선생은 천 년 이상의 시간이 지난 현대까지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2007년에 개관한 중국 양주시 최치원기념관은 중국 외교부가 건립을 승인한 중국 내 최초의 외국인 명인기념관입니다. 최치원 선생은 지금도 중국 사람에게 숭배받고 있는 대학자입니다."
중국 양저우 최치원기념관 이빈(李斌) 관장은 지난 22일 안동대와 경북불교문화원 등과의 '문화교류 업무 협약식'에서 최치원 선생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 문화 교류 증진을 위한 업무협약식 안동대, 중국 양주시 촉강-수서호 풍경명승구 관리위원회, 양주 최치원기념관, 경북불교문화원 업무협약 체결 ⓒ 이호영
안동대학교(총장 정태주)에서 열린 문화교류 협약식은 국립안동대와 중국 양저우시 촉각-수서호 풍경명승구 관리위원회(심백굉 당서기), 양주 최치원기념관(관장 이식), 사단법인 경북불교문화원(이사장 도륜 스님) 등이 함께한 '한중 우호증진을 위한 업무협약'으로 상호 문화교류 활동과 함께 최치원 학술 연구 등을 공동 수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추진됐다.
한중 양국의 관계자들이 최치원 선생에 관한 학술 연구와 공동 콘텐츠를 함께 하기로 한 것은 최치원 선생이 사상과 학문이 1200여 년 전 당시는 물론 현대까지도 한국과 중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이전부터 한국 방문을 원했던 중국 양주시 최치원기념관은 한국에 남아있는 최치원 유적지를 돌아보고 이를 계기로 한중 문화교류의 가교를 구축하기 위해 방한에 힘썼으나 그동안 코로나 때문에 성사시키지 못하다가 일상생활이 정상화되면서 지난 7월 둘째 주에 한국을 찾았다고 한다.
▲ 한중 우호증진을 위한 업무협약식 (좌부터) 정태주 안동대 총장, 최병주 고운국제교류사업회 이사장, 도륜 경북불교문화원 이사장 스님, 심백굉 중국 양저우시 촉각-수서호 풍경명승구 관리위원회 서기, 이빈 중국 양저우시 최치원기념관장 ⓒ 이호영
안동대학교는 앞으로 '고운국제인문학연구소'를 건립해 최치원의 사상과 학문 세계를 학술적으로 재조명하고 중국 양주시와 상호 협력을 통해 인문학 국제화와 유학생 유치 등에 노력할 계획이다. 경북불교문화원도 최치원과 관련된 '화쟁(和諍) 정신'을 현대적인 사업으로 계승하고 불교문화 발전을 도모할 예정이다.
한국과 중국에서 이처럼 최치원 선생을 기리는 것은 선생의 뛰어난 사상과 학문이 양국에 미친 영향력 덕분이다. 최치원은 뛰어난 천재였다. 당나라 유학을 통해 신라 진흥에 이바지하고 싶었으나 진골, 성골도 아닌 6두품이란 신분적 제약에 막혀 좌절한 대표적인 인물로 여겨진다.
최치원은 868년 12살 때 부모의 곁을 떠나 유학길에 올랐다. 그때 아버지 최견일은 "10년 안에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어디 가서 내 아들이라고 하지 말라. 나도 아들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겠다"는 말과 함께 유학에 나선 아들을 독려한다. 최치원도 "남이 백의 노력을 하는 동안 나는 천의 노력을 하겠다"라며 '인백기천(人百己千)'의 정신으로 열심히 공부해 6년 만인 18세의 나이로 당나라 빈공과에 합격한다.
최치원은 880년 24살 때 당나라 관리인 고변(高騈)의 종사관으로 들어가 황소의 난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운다. 이때 쓴 유명한 문장이 '격황소문(激黃巢文)'이다. 난을 일으킨 황소가 이 격문을 읽다가 너무 놀라 침상에서 굴러 떨어졌다는 일화가 지금도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지금도 중국에서 최치원 선생을 뛰어난 문장가로 추앙하는 계기가 된다.
최치원은 885년 28살에 통일신라로 귀환했지만, 6두품이란 신분의 벽을 넘지 못하고 그가 추진한 개혁이 좌절되며, 통일신라는 궁예와 견훤, 왕건 등의 등장으로 후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에 망하게 된다. 최치원은 고려 현종 11년 1020년에 고려 문묘에 오르고 3년 뒤 문창후의 시호를 받게 된다. 조선 시대에도 설총과 함께 신라인으로 문묘에 배향됐고 무성서원, 서악서원, 용강서원 등 여러 서원에 배향되었다.
신라말 불우한 시기에 활동한 최치원은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여 조'를 건의하고 '계원필경', '부석존자전', '천부경' 등 무수한 서적과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등에 뛰어난 문장을 남겼다.
▲ 의성 최치원 문학관 전시실 최치원 문집 계원필경(조선순조 34년, 1834년) 복제 ⓒ 이호영
최치원 선생을 기리기 위해 전국 각지에 최치원과 관련된 유적지가 많다. 조계종 제16교구 의성 고운사 사찰도 그중의 하나다.
최치원 선생은 벼슬자리를 잃고 전국을 유람할 때 찾았던 사찰이다. 이후 고운사는 사찰 이름을 높을 고(高), 고운사에서 선생의 호 고운(孤雲)을 따서 고운사(孤雲寺)로 바꿨다. 또 사찰에는 선생의 학문 정신을 기리는 '최치원 문학관'이 운영 중이다. 2019년 개관한 최치원 문학관에는 선생의 문집 '계원필경'과 '고운집' 등이 전시돼 있고 선생의 사상과 학문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다양한 유물을 만날 수 있다.
▲ 의성 최치원 문학관 관람 의성 고운사 부설 최치원 문학관을 찾아 관람 중인 한중 관계자ⓒ 이호영
신라 대학자 최치원 선생을 계기로 한국과 중국의 문화교류가 예전처럼 다시 활발하고 전국에 흩어져 있는 선생의 발자취가 재조명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