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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국립도서관에 소장중인 조용옥 작 "목천 시문집"에 실린 나의 선친 농은 이 재승 선생과 선생의 한시 일부
차재동생행 사진의 글은 농은선생께서1954년 40세 경, 6,25 피난을 한 김해군 가락면에 살 때, 맏딸 이영혜의 대사 국민학교 졸업장 후면에 기록해 둔 것으로써,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한유의 글 嗟哉董生行(차재동생행) 을 필사한 것으로 보이며,후손들이 살아가야 할 길을 한시로 예시 한 것으로 보인다.
농은선생 이야기
농은: 고려시대 삼은인 목은, 포은, 야은에 필적한다고 부친의 친구분들이 부쳐 준 것입니다 農隱선생 이야기
2015년은 아버지 농은선생께서 태어나신지 100주년 되는 해이다. 종가의 단절로 종2품 가선대부 齊麟(제린)공의 직계 8대종손을 물러받은 初名 孝天으로써, 農隱이라는 호는 오랜 세월을 함께한 知己들께서 “자연 속에 숨어있는 은자(隱者)”라는 뜻으로 지어줬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오래전에 본 카페에 등제된 기린이야기의 후속 요약본으로써, 100여 년 전에 여항산 자락 속으로 옮겨 와 여러 가문과 혼인맥으로 자리 잡고 살아 온 우리 선대의 이야기를, 1909년부터 시작된 민적부의 내용과 실존인물들의 이야기를 근거 한 대하다큐 가족사의 일부이다.
嘉善大夫 齊麟공의 6대종손이신 증조부 廷源께서는, 1728년 3월에 일어났던 무신정변 관련자들이 사면 복권이 된 1908년(순종2) 4월 30일 전후에, 역모의 땅 진위인근에서 살았었고 성인(聖人)의 이름자를 가졌다는 이유로, 180여 년 동안 대를 이어 유배생활과도 같은 장기은둔을 한 구산면을, 총 3남 6녀의 조부형제들과 몇몇의 가족들을 이끌고 떠나, 1912년쯤에 함안군 산인면 입곡리에 자리 잡고 약 12~15년의 세월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조부이신 권규(權揆)는 증조부의 셋째아들로써, 1891년생으로 제적등본 기록에는 익규(翊揆)로 되어 있으며 초명은 석두(碩斗), 字는 주형(周亨)인데, 옛 부터 호(號)는 친구들이, 자(字)는 글을 쓸 나이가 되면 부모나 스승께서 작명해준다고 한다.
할머니의 본명은 李水晶이며, 1897년 1월 4일, 이삼열당(李三悅堂)과 만묵당(晩默堂) 두 선생을 모신 여양서원이 있던 여항산의 동쪽이자 광려산의 서쪽기슭 함안군 병곡면 두릉리(현 여항면 외암리)의, 영남 최고명문가인 여주李씨 사직공파 종해(鍾海)의 둘째 딸로 태어난 후, 출가 전부터 가문 내 에서 많은 교육을 받았고 서양 선교사를 통하여 신학문도 배워 참으로 박학다식 하였다고 전한다.
1914년 10월 25일 18세에는, 함안군 산인면 입곡리에 살던 당시 24세의 할아버지와 결혼하였으며, 1915년 10월 24일에는 아버지를 낳으시고, 1919년생 숙부 단 두 분 만을 낳았는데, 할머니 이름 수정(水晶)에서 착안하셨던지, 두 형제의 이름을 합치면“하늘에서 가장 빛나는 옥(玉)”이라고 지었다. 아름다운 옥소리와 다름없다는 “如玲” 또한 근원이 옥(수정)이다.
1924년에는, 함안군 산인면 인근을 지나는 경전선 철로 부설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강제징발을 피하려고 했던지 방계가족들은 다시 뿔뿔이 흩어지고, 증조부와 조부와 아버지 형제는 함안에서 가장 큰 동내로 기록이 남아있는 함안군 대산면 부목리 889번지(목지마을) 다시 옮겨 간 후,
할아버지께서 37세인 1927년 음력 6월 24일, 증조부와 큰할머니와 할머니 그리고 12세 아버지와 8세 숙부를 남겨두고 돌아가셨는데, 1926년에 완전 개통된 경전선 철도 부설공사에 인근의 수많은 인력이 징발된 강제노역과, 1927년 6월 장마철에는 낙동강 제방이 붕괴되는 물난리가 나서 모든 인력이 동원되기도 하였다고 하며, 전국적으로는 천연두가 창궐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당시 동아일보의 기록을 살펴볼 때, 이러한 몇 가지 사유들이 조부형제 두 분의 죽음과 어떤 인과관계가 있어 보인다.
1935년 쯤, 증조부께서도 돌아가시고 두 세대에 걸쳐 돈과 명예와 인명을 휩쓸고 간 광풍(狂風)이 점차 수그러들 즈음에, 최소 두 분 이상의 할머니와 동생을 데리고, 전부 12년 정도를 산 것으로 보이는 대산면 부목리 목지부락을 떠나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 1188번지로 이사한 아버지께서는, 이때부터 30년 정도 기나긴 유랑의 세월을 보내게 되는데...
이 때 쯤, 동아일보 군북 지국장을 하였다는데, 당시 지국장은 지방 주재 기자도 겸직하였다 하며, 구전에는 보급소였다고 하나, 1975년 발행된 동아일보사史(1권)의 기록에 의하면 함안군에서는 함안과 군북, 칠원 3개의 지국이 있었으며, 1929년 한문성 군북지국장 다음에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아버지의 행적을 확인할 수 없으나, 동아社史에 기록된 함안 총지국장 조용희와 아주 가까웠다고 하며, 1940년 폐간과 동시에 그만 둔 것으로 보인다.
얼마 전부터, 함안 군북면과 마산 진전면 사이에는 1029 지방도가 개통 되어 자동차가 다니지만, 옛날에는 차도가 없어 남쪽으로 반나절 정도 비실고개를 넘어가면, 곽데미산이라 불리는 여항산의 서남쪽 기슭 심심산골 속에, 여항면 고사리(현 마산시 진전면 고사리 148번지)가 나오는데, 아버지는 1938년 24세 쯤, 이곳의 전주崔씨 泰鎬의 3녀와 결혼하여, 1939년 음력에는 맏딸을 낳았으며, 1942년에는 맏아들을 낳았다.
1940년부터 1945년 사이에, 함안수박의 주산지로 유명한 군북면 월촌리로 잠시 이사하고, 1946년 12월 20일에 둘째딸을 낳고 출생신고도 하였으며, 인물이 굉장히 잘 생겼었다고 하나, 손가락으로 육갑(六甲)을 집는 등 이상한 행동을 하곤 했으며, 오래 살지 못하고 죽었다고 하는데, 항상 죽었다고 하지 않고 잃어버렸다고 하였다.
해방 직 후, 숙부께서 일본에서 철공 기술을 배우고 돌아오면서 동경(東京)에서 만난, 울주군 온양면이 고향인 영월 엄 씨 두영의 5녀인 숙모와 함께, 월촌에서 남강 바로 건너편 지금의 한일합성 의령공장이 있는 의령읍 만천리에 양말 공장을 차린 후 온 가족이 이사 하였다.
이곳에서 양말기계를 부지런히 돌리던 두 형제는, 부녀자들의 보퉁이 장사를 이용하여 판매하고 받아 온 돈의 대부분은 시골 장롱 속에서 흘러나온 일본돈 이었지만, 짧은 시간에 상당한 돈을 모았으나, 1945년 미 군정청의 57호 일본은행권 예치명령으로 모든 일본 돈을 예치한 후, 채권으로 보관하다가,
1975년 경 에, 대일청구권 보상금으로 일부 보상을 받았다고 하나, 터무니없는 보상을 준다고 전국적으로 시끄러웠고, 박정희는 이 돈을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 등을 건설하는데 쏟아 부었는데, 전두환 시절에 관련법들이 모두 폐기 되었다고 한다.
피와 땀과 눈물에 절인 예치금 증서를 담배 갑 속의 포장용 은박지로 감싸서 품속에서 30년을 보관한 것을, 1970년 경 어느 날 딱 한번 보여주었는데, 평생을 간직한 마지막 희망이 물거품이 되면서 운명을 더욱 더 재촉 하였을 거라고 본다.
의령 만천에서,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전후의 좌, 우익 대결 시절에, 동아일보의 전력과 우익활동 등의 이유로 인하여 의령지방의 좌익들로부터 집중공격을 받기 시작하였는데, 밤마다 집 뒤로 몰려와 돌을 던지고 바윗덩이를 굴려대고 하여 온 가족의 생명에 위협을 느낄 때, 살려면 아주 멀리 달아나라는 스승(곽 선생)의 말씀에 따라, 양말공장 등 모든 재산을 내팽개치고 충남 대덕군 기성면 평촌리 345번지로 이주하였다.
젊은 나이(35세 전후)에 서울을 오가면서 자유당 최고권력자와 일족이라는 연줄로 많은 교분을 하면서 정치활동에 관심을 가진 것으로 보이며, 1950년 6,25로 인하여 피난 중이던 이승만대통령과 이기붕을 대전에서 영접하게 되었는데, 대통령 일행은 사흘 후 7월 1일 대전을 떠나 이리를 거쳐 목포로 간 후, 배편으로 부산으로 피난 갔다고 한다.
대덕에서 낳은 어린 둘째아들을 업고 6,25를 피난한 어머니는, 김해군 가락면 대사리에서 임대한 농장에서 채소농사를 지었는데, 셋째아들을 낳은 후에도 업고 채소를 국제시장 옆 충무동시장으로 이다 날라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고 한다.
충무동시장은 특별히 피난민이 많았고, 부산 경남 간을 오가는 시외버스의 교통부가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이러한 고생 때문인지 세 번째 딸을 사산하기도 했지만, 번 돈으로 자식이 입학한 대사초교에 교재를 기증하기도 했으며, 아버지는 서양에서 밀려온 新文明을 접하며 오랜 세월 입어 온 한복을 벗고 수염도 자른 후, 의관(衣冠)을 최신식 양복으로 바꿔 입은 후, 기념사진을 남기고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시작하였고 한다.
1957년 경 진주 망경북동을 거쳐 아버지 45세가 넘어, 1959년 음력 정초에야 고향과 가까운 북마산역 부근 교원동 철둑 아래로 이사한 후, 실제 생존한 둘째 딸을 낳았다. 이 후, 1967년 교원동 19번지로 마지막 정착하기까지는 월영동과 회원동 무학농원 아래 등 몇 차례 더 옮겨 다니게 된다.
1961년 4월에는, 소련의 유리 가가린이 보스토크 1호 인공위성을 타고 한반도의 밤하늘을 지나갔으며, 이후 “지구는 푸른빛이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으며, 5월 16일에는 박정희 소장이 군대를 이끌고 한강 다리를 건너 5.16 군사혁명을 일으키는 등, 안팎의 세상은 밤하늘의 유성보다 더 빨리 흐르며 변해 가고 있었고, 주변의 일가친척 지기(知己)등 참으로 많은 분들의 왕래가 시작되어, 덕분에 온가족이 많은 발품 손품 귀동냥을 하였다.
1962년에는, 맏딸이 내서면 구암리(마산시 구암동)로 시집을 갔고, 63년 경 에는 심한 흉작이 때문에 미국의 원조로 강냉이 죽을 먹고 지내던 시절에, 할머니께서 1963년 마산 회원동 647번지에서 병환 후 돌아가셨다.
31세의 젊은 나이에 홀로 되신 할머니는, 또 다른 청상과부인 큰 할머니와 오랜 세월 밤마다 호롱불 아래에서 곰방대를 친구삼고 어린 손녀, 손자에게 이차돈 이야기나 삼천갑자 동방삭(三千甲子 東方朔)이나 항아(姮娥)의 이야기, 조선왕조실록이나 왕비열전, 전승되던 종가의 옛이야기, 집 안팎의 대소사 등 수많은 이야기를 전하여 주었다고 하며, 그 얼마 뒤에는 불가로 출가하고 진해 영산법화사 창건주가 된 증조부의 막내딸 난(蘭)이 입적하기도 했다.
할머니는 종부는 아니었으나 종손의 어머니로써, 청상과부로 홀로 되신 후에도 심신을 정갈하게 하였으며, 일례로 버선을 삼일 동안 신어도 먼지 하나 묻지 않을 정도로 용모가 단정하고 기품이 있었다고 하며, 1948년 정부수립 후 이승만대통령으로부터 훌륭한 어머니로써의 표창을 받았다고 하나 지금은 사실여부를 확인 할 길이 없다.
여자는 태어나 출가를 하면, 첫째는 며느리의 역할, 둘째는 아내로의 역할, 셋째는 자식을 낳아 어떻게 키우고 가르쳤나 하는 어머니의 역할, 이 세 가지 기준으로 평가를 받는다고 하는데, 할머니는 불행한 시집살이를 하였지만 아들 역시 평범한 삶을 살지 못해 많은 고생을 하였고, 돌아가신지 10년이 지난 뒤에도 아버지와 숙부님은 할머니 이야기만 나오면, 30세에 홀로 된 어머님을 편히 모시지 못했다고 눈물을 지었는데, 비록 남편은 일찍 떠나보내고 수절하면서도 며느리의 도리나 어머니의 역할은 훌륭하였을 거라고 생각된다.
아버지의 스승으로는 용강 곽** 선생이 계셨는데, 裵文旭의 집안으로 출가한 왕고모의 사위로 짐작되며, 벽사 이우성(李佑成) 저(著) 벽사관문존(碧史館文存)에는 곽**(郭**) 본-현풍(玄風) 자-내홍(乃洪) 호-용강(龍岡) 제 일부(一部) 시(詩)55 56 57이 있다고 전한다.
동문으로는 마산 오동동에서 이제한의원을 하던 웅천 출신 朱*포, 그리고 가야면의 조*옥 안*열과 같이 수학하였으며, 대한민국 건국시기에는 최고 권력자를 비롯하여, 창녕 출신 S국회의원, 지금은 재벌이 된 M기업인, 김해녹산 출신 조*갑, 정치인 성*현 등과 활발하게 교류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동양철학과 풍수지리학 한의학 등을 배우기 시작한 걸로 알고 있지만, 수학(修學)한 시기는 각자 다소 다를 수 있다.
일족(一族)으로는, 現 신라대학교의 전신인 부산여자대학 2대학장이던 이*응과 마산대학과 제일여고 이사장이던 이*규도,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자주 내왕하며 학교행사에도 초청받아 참석하였고, 만년(晩年)에는 마산에서 유명한 시인 월초 정진업과도 절친하였다.
곽선생에게 전수한 한의학(韓醫學)과, 漢學者로 이름난 증조부의 영향으로 한학과 유학(儒學)에도 뛰어났었고, 중후(重厚)한 복성(腹聲)을 지녔던 아버지의 생전에 수많은 사람들이 주변을 스쳐지나갔지만, 결코 남녀노소, 빈부귀천,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며 서로 모두가 좋아하였다.
10대조 시절이래, 선대 여러 이름자 속의 특별한 것은, 왕조의 이름이나 공맹과 노장(孔孟과 老莊)등 성현을 상징하는 글자나, 왕실의 육판서와 관련 있는 글자가 이름 속에 많이 등장하는데, 이는 효령대군의 후손이라는 자부심과 한학과 유학을 가문의 근간(根幹)으로 삼고 살았다는 징표로 보이며,
연작(燕雀)이 대붕(大鵬)의 깊은 뜻을 어떻게 알겠으며, 얇은 지식으로 아버지 학문의 깊이를 論한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30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그 깊이와 그 넓이를 유추해 볼 수 있는 단 한 가지 잣대는, 직접 작명한 형제들의 이름에서나 찾아 볼 수 있다. 연세 20세 초반부터 태어난 자식들과 주변 일가들 이름에, 고대 중국의 통일왕조가 세워진 순서대로 사용한 점과, 후에 출생한 형제들의 이름자 속에는 춘추시대 제왕이나 제후국을 의미하는 특별한 부수(部首)자를 사용한 것을 알게 되었는데,
우연의 일치를 너무 비약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으나, 아버지께서 가슴속에 품었던 원대한 꿈을 자식들을 통하여 이루어 보려고 하셨던지, 아니면 가까운 미래에 다가올 새로운 세상을 향한 염원이 아니었을까 한다.
1977년 정초에 새해운수를 보면서, “석양에 집으로 되돌아가는 나그네의 발걸음이 무척 바쁘다”라고 하였고, 제나라의 기린, 무관의 제왕이신 공자를 상징한다는 8대조 기린(麒麟)형제의 후손이자 제린(齊麟)할아버지의 8대종손께서, 63세 젊은 연세 그 해 생신을 하루 앞 둔 시월 이십삼일 새벽에, 3남 2녀의 자식들과 몸으로 지고 있던 수많은 짐들을 내려놓고, 꽃상여를 타고 여항산이 가까이 바라보이는 함안 삼봉산 증조부 옆으로 되돌아가, 뒤따라 간 어머니와 함께 태어난 곳인 산인면 방향으로 누어있다.
연작(燕雀)이 대붕(大鵬)의 깊은 뜻을 어떻게 알겠느냐!!!
* 2015년 1월 22일 요약편집하다. 위글 요약은 고 이재승선생 3남 이순용님이 요약 편집한 글입니다 나의 아들,며느리, 손녀와 함께선친의 묘소를 다녀오다 (2018.5.5일) 감사합니다 [명상음악] 무명속의 등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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