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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기쁨 / 홍속렬
내가 한글을 깨우친 건 열한 살이 넘어서입니다.
6.25피난으로 망태기를 메고 산에가 나무를 하며 고달픈 삶을 살다가 가족이 한데 모이는 원주 피난민촌으로 이사를 와서 교회가 세운 학교에 처음 입학했던 때가 열한 살이었습니다
산을 넘고 들을 건너 한 참을 걸어야 도착하는 천막교실 산과들을 건널 때 불발탄은물론 가끔 사람시체도 발견하곤 했습니다.
휴전이 막 성립된 시기라 생각되어지는데 처음 교과서를 받았을 때의 그 감격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되어집니다.
코를 찌르는 잉크냄새는 기분 좋았고 영이야 놀자 바둑아 이리와 놀자 부터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한글을 깨우치고 나서부터 만화책을 읽었는데 어찌나 재미가 있던지 밤샘을 하며 읽었던 아름다운 추억이었습니다.
그때 읍사무소라는 국어의 단원이 있었는데 “하였읍니다 ” 이렇게 교과서에 써있었지만 “하였습니다.” 라로 읽었던 기억 이 나며 “읍사무소” 라는 단원에서 아이들은“습 사무소” 라 읽었고 나도 “습사무소”라 읽었습니다.
쌍시옷에서 하나가 뒷소리로 발음이 되며 “습니다” 로 발음되는 걸 우린 습사무소로 읽었던 겁니다.
나중 선생님이 고쳐 주셔서 바로 읽기는 했지만 지나고 나니 기억되는 웃지 못 할 일로 오래 오래 기억됩니다.
그때부터 책읽기를 좋아해 시방까지 책읽기를 계속 하고 있습니다.
그때 당시는 학원이라는 좋은 학생잡지가 있었는데 중고등학생이 읽는 책이었지만 초등학생인 나는 그 책을 읽었습니다.
책을 살 돈이 없어 책방에 가 통로에 주저앉아 읽기 시작하면 한권을 다 읽어야 일어나곤 했는데 책방 주인은 오히려 가끔 간식을 사주며 아무 말도 안 고 책 읽는 걸 용인해 주곤 했습니다. 당시 25시와 죄와 벌을 읽었으니까요
그 후로 부터 책 읽는 것이 습관이 돼 오늘에 이르렀고 목표는 일주일 한 권의 책 읽기를 계속했습니다.
나는 나이가 많아 두 번을 월반을 했습니다.
3학년에서 4학년으로 5학년에서 6학년으로 …
비가 오거나 바림이 심하게 불면 천막교실에서 공부를 할 수 없으니 책보를 싸 갖고 그만 집으로 돌아가야 했고 책상은 물론 한 겨울에도 천막에서 공부를 해야 했는데 음악교육은 받아보지 못 했습니다 학교에서 주는 우유죽을 먹고 설사를 심하게 했는데 시방도 장이 나빠 많은 고생을 합니다.
배급으로 나오는 분유와 밀가루로 죽을 쑤거나 그냥 배급을 주면 집으로 가져가 밥 지을 때 양재기에다 담아 밥 위에 올려놓으면 돌덩이처럼 딱딱해져 이빨 자리만 남고 먹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도 책만 있으면 나는 매우 행복했던 겁니다.
6학년 때 만난 담임선생님은 문학과 시를 얘기해 줬습니다.
시방 생각하면 좀 특별한 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 세상에서 그 분을 수용할 수 없는 그야말로 아웃싸이더 같은 분… 그때 어린 나였지만 그 선생님을 존경하고 이해했습니다. 책을 소개받았고 동시공부를 했습니다.
그때 쓴 나의 첫 동시입니다
고양이
야옹 야옹 고양이
얼룩 고양이
우리 집 쥐
혼자 잡고요
우리 집 사랑
독차지해요
배고프고 힘든 시절이었지만 책만 있으면 이겨 나갈 수 있었고 조그만 고무공을 따라 다니며 공차는 재미로 어린 시절은 그야말로 천국이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초등학교 때나 중학교 시절 축구선수로 활약을 했고 운동이나 싸움이나 못 하는 것 없는 그야말로 꿈으로 가득 찬 소년시절이었습니다
정의파로 약자를 괴롭히는 강한 힘에 대항을 하다 보니 싸움을 많이 해야 했고 어느덧 쌈패가 됐습니다. 시방도 남의 억울한 사정을 보면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피난 나가서 피난민이라고 원주민 아이들이 때리는데 처음은 맞고 있었으나 매를 맞다보니 이왕 맞는 것 죽을힘으로 맞서 싸워보자 결심을 하고 그중 가장 힘이 쎄고 대장격인 아이를 머리로 받아 한 방에 쓰러뜨려 버렸더니 그때부터 내가 대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정환경은 어린 소년의 꿈을 이루어 줄 수 있는 환경과 여건은 아니었기에 중학교를 졸업하는 열 여 덜 살에 소년병으로 군에 입대를 합니다.
당시 5.16이 막 나고 기피자로 오래 도피생활을 했던 나이 많은 사람들이 잡혀 군에 입대하다보니 아버지 같은 분들하고 함께 훈련을 받았고 나이 어리다고 봐주는 것 없어 정말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너무 힘들어 철조망 울타리를 넘어 도망가려는데 보초를 서던 이등병이 ‘나도 힘든 것 잘 참으니 이렇게 기간 병이 됐어 조금만 참아“ 하며 말리는 것 이었습니다 잡아 보고만 하면 난 탈영병이 되는데 그 맘씨 좋은 이등병은 내 등을 다독거리며 위로해 주고 힘을 북돋워 주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군대생활이 삼십 년……
군 생활 속에서 축구를 했고 선수로서 누리는 여러 가지 특혜가 책을 읽을 시간적 여유와 선수로서의 기량을 키워 나가는 두 가지 유익이 있어 다른 병사보다도 더 좋은 여건에서 군 생황을 할 수 있었습니다.
유년시절부터 일기를 썼고 지금도 계속해서 일기를 쓰며 읽는 것과 쓰는 것에 대해 이제 일상이 되어 계속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참 좋은 습관을 갖게 된 것입니다.
매일 조선일보를 1면에서부터 끝까지 읽으며 좋은 기사는 스크랩을 합니다.
버스를 타고 어딜 가게 되면 신문 한 장을 다 읽으면 어느덧 목적지에 닿고 많은 정보와 지식과 시간을 버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얻습니다.
또 많은 독서량 때문에 일기를 썼던 필력으로 수필을 쓰고 시를 씁니다.
아직 등단은 안 했지만 등단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 마음을 한 편의 글로 표현했을 때 오는 자아도취감 생활 속에서 느끼는 감정을 글로 표현하는 것은 아마도 삶을 윤택하게 또 아름답게 채색하려는 의도이며 그래서 긍정적으로 삶을 보는 눈도 갖게 되는 겁니다.
베트남에서 전투를 할 때 배낭에 책을 넣어 갖고 다니며 읽었습니다.
낮에 매복을 나가 저녁 어스름이 질 때까지 숲속에서 기다리는 긴 시간 경계병을 배치 시켜놓고 책을 읽습니다. 낮 시간엔 활동을 못 하는 베트콩의 특성상 낮에는 전혀 적의 움직임이 없기 때문에 책을 읽어 시간을 잘 활용하여도 문제가 될 것이 없었습니다.
2차 대전 때 독일 병사들의 배낭에서 데미안이 나왔다는데 전장에서 읽는 책은 읽는 재미가 있고 평생 오래 기억되어지는 특성이 있습니다.
헬만헷세의 작품을 좋아해 그분의 책은 거의 다 읽었고 일정 특정 작가의 작품을 읽는 것이 나의 독서 습관이며 책을 선정하는 것은 목사형님이 정해주셨고 고국에서 부쳐주셔서 베트남 전투를 할 때 많은 독서를 했습니다.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는 20대의 내겐 새로운 언어였고 철학이었습니다. 인식에 불타고 있었던 그 시절에 읽은 것 등은 머리에 오래 남아있고 곧 내 언어가 돼주었습니다 또한 김형석 교수님의 “영혼과 사랑의 대화”는 나를 프라토닉 러브 의 숭배자로 만들어 주었고 철학에 대해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나이 들어 요즘은 주로 인문학에 대해 읽는데 강신주라든가 김정운의 “에디톨로지”를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철학에 대해서는 깊이는 모르지만 읽어 나가는데 문제가 없이 술술 잘 읽히니 읽습니다. 인생을 많이 살았고 전쟁터에서 숱한 죽음을 보았고 적을 무찌르기도 했고 훈장을 타 무공수훈자도 된 마당에 철학은 곧 내안의 갈등을 다독이는 다정한 손길이기도 합니다. 피가 끓고 용기 빼면 시체이듯 군인으로서 최고의 특수부대에서 용기와 사기로 살아온 젊은 날 ……
어찌 보면 만용일수 도 있었습니다.
나이가 들고 보니 사려가 깊어지는 겁니다. 남을 배려할 수가 있어 좋습니다.
안 된다면 뒤로 물러설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생기고 이번에 안 되면 다음에 하면 되지 하는 여유로움은 삶을 풍족하게 만들어 주는 조미료와 같은 것 이라는 걸 요즘에 깊이 깨닫습니다.
그리고 신앙에 깊이 몰입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따라 살아가려는 노력으로 기도하는 시간이 많아 졌습니다.
잠언 말씀에서 “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낮고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 는 한 성을 빼앗은 자보다 낮다” 말씀으로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도 했는지 모릅니다. 내 이름 속에 속(速)은 빠를 속이기에 성격이 얼마나 급한지 참 많은 세월 공든 탑을 쌓았다가 한 번 혈기를 부림으로 인해 와르르 헐어버리기를 수 십 번……
경기장에서도 심판이 공정한 판정을 안 하고 편파적으로 경기를 고의로 패 하게 만들었다면 경기 종료 후에 심판실로 찾아가 죽도록 패 주고 징계를 받기를 수 십 번…
내가 장로가 될 나이가 훨씬 넘었는데 아내도 반대를 하고 나 자신도 장로감이 아니라는 확실한 생각 때문에 장로를 포기 하게 됩니다. 주먹을 잘 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고희가 넘고 보니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는 전도서 말씀과 같이 사려깊은 배려와 이해와 사랑으로 모든 것을 포용하게 되니 이제는 혈기를 부리는 일은 없어졌습니다. 인터넷에 내 이름을 치면 단지 나 혼자 내 이름만 동그마니 뜹니다.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내 이름 홍속렬……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해야합니다
늘 공동체 생활에서 살아오며 집단생활에 익숙해 돕고 돕는 생활을 해 오다가 이제 혼자 생활하게된 것이 일 년 여 …
혼자 살다보니 많이 외롭고 힘든 건 사실입니다
동키호테처럼 열정에 사로 잡혀 살아갈 때는 몰랐으나 이제 나이가 나이인 만치 가족이 그립고 ᅟᅩᆫ자 손녀도 안아보고 싶고 …
요즘은 인간적인 아픔대문에 밤잠을 못 이룰 때가 많습니다.
잠이 안 오면 책을 읽습니다.
요즘 읽은 책은 한비야의 “ 1g의 용기 ” 이분의 책은 발행될 때마다 다 읽어 이분의 성격 그리고 철학까지 너무 좋아해 책 내용대로 함께 웃고 울고 그리고 공감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분을 위해 기도하는 일 그 외에는 처음으로 카페에 가입 가끔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우리 청소년들이라든가 국민 모두가 우리 사회에서 정신적 지주가 돼주는 사상이나 지주가 없는 것이 우리 사회의 큰 약점이라 생각해 왔는데 한 선생님이야 말로 우리 젊은이들에게 길을 안내해 주고 정신적 지주 역할을 충분히 잘 해 주실 분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가슴이 따듯하고 불의를 보면 못 견디고 불쌍한 많은 사람들을 따듯한 가슴으로 품고 용기와 패기로 여자가 아닌 담대함과 과감함 산을 사랑하는 넓은 마음 그리고 하나님께 모든 걸 맡기고 기도하는 신앙인 …
그런데도 이분을 향한 악풀을 다는 어리석고 못된 인간들이 있다니 어이가 없습니다.
월드비전의 오재식 회장님과의 인과관계는 너무도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나는 우리세대에서 조수미씨와 한비야씨와 함께 한 세대를 살아가는 것을 큰 영광으로 알고 축복이라 믿습니다.
그밖에 여성으로 많은 위대한 일을 하신 분이 많지만 나는 이 두 분을 존경합니다.
육군대표 축구감독이 됐을 때 내 최종학력은 중졸 학력에 대한 콤플렉스도 있었지만 학교를 정식으로 다니며 공부를 하고 싶었습니다. 대학에 가 스포츠학도 공부하고 싶었고…
그래서 택한 것이 바로 방송통신고등학교 삼년을 잘 마치고 대학진학은 내가 전공하는 체육학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하고 있는 직업이 체육이니 어렵지 않게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아내의 도움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아내에 대한 깊은 사랑과 배려로 다 허물어져 가는 재개발 지역의 우리 집에 정원을 만들어 해 마다 꽃을 피우게 하고 과실나무를 심어 가꾸는 아내의 아름다운 정원을 노래하는 아내의 정원을 열 여 덜 편이나 썼습니다.
체육교사 자격증을 정식으로 받아들고 정식으로 아이들 체육 수업을 진행 하였고 축구수업을 통해 아이들이 씩씩하게 자라났습니다.
이제 고희의 나이를 넘어 인생의 말미를 장식하는 시기에 아직도 나는 건강하고 오십대의 건강과 삼십대의 패기를 가져 “1g의 용기” 에 나오는 기염복거 백락 같은 나를 알아봐주고 날 쓸 만 한 분을 만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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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생님의 삶이 고스란히 적혀있네요. 건강하세요^^
네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 주섰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