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일요일(10월 13일) 하루 집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을 다녀왔습니다. 집으로 주말 나들이를 온 바로 아래 동서와 막둥이 처남이 요맘때 할 일을 도와준 덕에 여유가 생긴 것이지요. 들깻잎이 노르스름해져서 벨 시기인데 일어나자마자 이른 아침부터 들깨를 벴습니다. 들깨는 벨 때 낱알이 쉽게 떨어져 나갈 수가 있어서 이슬이 듬뿍 내려서 들깨가 눅눅해진 이른 아침에 베는 게 좋습니다. 자욱하게 낀 안개 때문에 해가 얼굴을 내밀기도 전에 일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좀 늦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남쪽을 향해 길을 나섰습니다. 무섬마을은 경북 영주로부터 약 10Km의 거리에 있는 산간 오지마을의 하나입니다. 영월 집으로부터 약 100km를 주로 중앙고속도로를 달려 2시간이 채 안 되는 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 무섬마을의 유일한 식당이자 토속 맛집이기도 한 ‘무성식당’은 청국장이 잘 알려져 있다고 했습니다. 한창의 러시아워는 지난 시간이지만 고택 바깥의 식탁까지도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청국장정식을 주문하니 고등어 조림과 경상도 토속 음식인 배추전 따위의 밑반찬에 구수하지만 칼칼한 맛의 청국장이 비빔 산채 모듬과 함께 나왔습니다. 개운한 맛의 점심을 들고 무섬마을 여행에 나섰습니다. 강물이 불은 한여름 풍경의 무섬마을 전경(자료: kbmaeil.com) 사람들은 예로부터 이곳을 무섬마을이라고 불렀습니다.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마을의 공식 지명은 물섬마을이라는 뜻의 수도리(水島里)입니다. 소백산에서 흘러내리는 서천(西川)이 마을 북쪽의 두물머리에서 태백산에서 이어지는 내성천(乃城川)으로 합수하여 산과 물이 태극 모양으로 돌아나가는 형세가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섬과 같다고 해서 무섬이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그 ‘물섬’ 마을이 어느 날부터인가 ‘무섬마을’로 불리게 됐다고 하고요. 한편 이 마을의 이름에 물을 뜻하는 ‘무’자가 들어가 있다는 것이 나의 흥미를 자극하기도 했는데요. 내가 태어난 농촌의 고향 마을인 수백리(水白里)라는 곳을 사람들은 물 수(水), 흰 백(白)의 물이 맑고 흰 마을, ‘무리’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서울의 수유리(水踰里)도 물 너머에 있는 고개라는 뜻의 ‘무너미고개’에서 온 말이라고 하지요. 여기에서도 무는 물을 뜻하는 말입니다.
강의 북동쪽 좁다란 언덕을 따라 형성된 무섬마을에는 약 50명의 주민이 40여 호의 오래된 기와집과 초가집, 일부는 개량된 농촌주택에서 소담하니 모여 살고 있습니다. 360여 년 전(1661년) 반남박씨 가문의 박수라는 선비가 이곳에 만죽재(晩竹齋)를 짓고 들어오고 이후 그의 증손 사위인 성선김씨가 처가로 장가를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무섬마을에는 이 두 성씨의 집성촌이 형성되어 이제까지 오랜 역사와 전통의 삶이 오롯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마을이 매화꽃이 떨어진 모습의 매화낙지(梅花落地) 또는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연화부수(蓮花浮水)의 길지인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과거에는 100여 호의 집에 500여 명의 사람이 무섬마을에 살았다고 합니다.
서편을 향해 물 위에 떠 있는 섬 형상의 무섬마을 뒤쪽은 울창한 산 숲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한편 무섬마을은 태극 또는 복주머니 모양으로 북에서 서로, 서에서 남으로 내성천이 마을을 휘감아 돌아나갑니다. 마을은 내성천의 언덕을 따라 서편을 향해 형성되어 있고 마을 앞 내성천의 넓은 곳은 약 200m의 폭에 물이 많은 여름철에는 모래사장이 약 50m의 폭으로 줄어들고, 갈수기에는 그 폭이 150m쯤으로 늘어납니다. 지금은 갈수기가 시작되는 가을이라 드넓은 은갈색 백사장이 휘돌아 펼쳐져 있습니다. 마을의 지세가 이런 형상이고 보니 마을 안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환경이 못 됩니다. 4면이 모두 단절되어 고립된 협소한 공간입니다. 어찌 이런 곳에 터 잡아 살아갈 수 있었을까요? 무섬마을 외나무다리 그래서 사람들은 강 건너의 마을로 나갈 수 있는 외나무다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리를 통하여 바깥세상과 소통을 하고 강 건너 쪽에 있는 농토를 경작하여 생계를 이어 나갔습니다. 1980년 마을 북쪽 내성천의 양 연안을 연결하는 콘크리트 교량(水島橋)이 건설되기 전까지는 이 외나무다리가 마을로부터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습니다. 여인네들은 이 다리로 꽃가마 타고 무섬으로 들어와 평생을 살다 꽃상여 타고 이곳을 나가야만 하는 애잔한 길이기도 했습니다.
무섬마을에서의 여정을 우리는 마을의 북서쪽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말발굽 편자와도 같은 모양으로 형성된 촌락의 북서쪽 맨 끝의 일제 강점기 시절의 사설 교육기관이자 애국 활동의 거점이기도 했다는 곳 아도서숙(亞島書塾)이 그 시작점입니다. 무성식당과 접한 고택 해우당(海愚堂)은 한때 파락호 시절의 흥선대원군이 머물렀다는 곳으로 이후에 의금부도사를 지낸 김낙풍의 집이었습니다. 흥선군이 쓴 해우당이라는 당호 현판의 글씨가 돋보였습니다. 해우당 고택 현판 고택 해우당 해우당 옆의 晩雲古宅(만운고택)은 시인 조지훈의 처가로 그의 대학 시절 그의 아내가 되기 전 김난희를 찾아와서 시심을 키우고는 했던 곳이라 합니다. 만운고택은 유실되었던 가옥을 복원한 것으로 독립운동가인 김성규의 집이라고 합니다. 만운고택을 지나면 민박을 운영하기도 하는 수춘재(壽春齋)라는 현판이 걸린 아담한 담장의 고택, 무섬마을의 옛 이름인 ‘섬계(剡溪)‘라는 이름이 들어간 섬계고택(剡溪古宅)도 볼 수 있습니다. 하늘거리는 코스모스 꽃 무리가 오래된 기와집과 담장, 파란 가을 하늘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집 앞뜰에는 마침 피어나는 구절초, 쑥부쟁이 따위의 꽃들도 마을의 정취를 더 하고 있었고요.
반드시 둘러보아야 한다는 고택인 만죽재(晩竹齋)는 마을 중간 뒤편의 야트막한 언덕에 있습니다. 만죽재는 무섬마을 입향시조인 박수가 1666년에 건립한 집으로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수수하면서도 단아한 고택이었습니다. 처음의 당호는 섬계당, 이후 섬계초당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가 이 집이 중수되면서 지금의 당호인 만죽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건립 당시의 ‘ㅁ’자 집 구조가 그대로 유지된 고택으로 무섬마을에서 가장 오래되었으며 조선 후기 양반 사대부 집안의 가옥 구조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만죽재 고택 현판 고택 만죽재 만죽재에서 마을 아래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吾軒(오헌)이라는 편액이 걸린 고택을 만나게 됩니다. 조선 말기 병조판서를 지낸 오헌 박제연이 고향으로 돌아와 지은 집으로 자신의 호를 써서 현판을 달았는데, 당대 최고의 개화사상가인 박규수가 그 글을 쓰고 吾軒이라는 글씨 사이에 그 현판의 의미를 적어넣은 특이한 형태의 것입니다. 吾軒하면 말그대로 나의 집이란 뜻이지요. 현판의 여백에는 그 집을 오헌이라고 명명한 의미가 작은 초서로 적혀있습니다. 그것은 중국 진나라 도연명(陶淵明)의 “衆鳥欣有托 吾亦愛吾廬(중조혼유탁 오역애오려), 뭇 새들도 깃들 곳이 있어 좋겠지만 나도 내 오두막집을 사랑하노라”라는 시구에서 인용한 것으로 세속의 부귀영화에 연연하지 않고 나 역시 즐겁게 살아간다는 의미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고택 오헌 현판 고택 오헌 오헌 고택의 마을 안길을 걸어 올라가면 마당이 꽤 넓은 고택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爲堂(위당)이라는 편액이 걸린 이 고택은 집도 마당 앞 정원도 아름답습니다. ‘마당 넓은 집’이라는 문패가 붙은 이 집은 이곳의 또 다른 입향시조 예안김씨의 고택으로 지금은 민박집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마을의 오른쪽에는 옹기종기 초가집들이 모여있습니다. 집집마다 주황색으로 익어가는 감이 주렁주렁한 나무들이 있구요. 마을의 맨 오른편 위쪽에는 무섬자료전시관이 있습니다. 무섬마을의 역사와 이야기를 전해주는 여러 사료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마을 답사를 마치고서는 마을의 강 언덕 아래의 모래밭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강물이 남쪽으로 굽이쳐 흐르는 곳에도 외나무다리가 하나 만들어져 있습니다. 농사를 짓기 위해 오가던 다리 같았습니다. 이번엔 모래밭을 걸어서 마을 한중간 앞쪽에 놓여있는 외나무다리까지 와서 그 다리 위를 걸어 물을 건넜습니다. 다리는 통나무를 잘라 야트막한 다릿발을 세우고 그 위에 30cm 남짓한 직경의 통나무를 반으로 쪼개서 연결해 놓은 것입니다. 다리의 중간중간 오가는 사람이 간신히 비켜설 수 있는 배려의 보조 다리가 마련되어있기도 합니다. 초가와 코스모스 초가집 감나무 외나무다리를 건너 강 건너편에서 산기슭을 이어 만들어진 데크 오솔길을 걷다 보면 한옥과 초가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무섬마을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수도교에 이르러 그 다리를 건너면 여행을 출발했던 무섬마을로 돌아오게 됩니다. 걷기를 시작해서 이곳저곳을 답사하면서 되돌아온 시간은 약 3시간이 걸렸습니다. 경주의 양동마을이나 안동의 하회마을처럼 크지도 않고 이름다운 강을 끼고 있어서 외암마을이나 선암마을처럼 밋밋하지만은 않은 작고 소담한 마을입니다. 집마다 작은 화단이나 텃밭 하나씩은 있지만 농토가 없는 마을, 배와도 같은 섬에 구멍이 나면 안 된다고 해서 우물을 파지 않고 강변 웅덩이에서 물을 길어다 먹던 사람들이 살았던 곳, 서로가 일가이다 보니 높은 담장이나 대문은 만들지 않고 이웃 간에 마음과 공간을 터놓고 살았던 마을, 양반과 평민이 사이사이 집을 짓고 오순도순 살았던 아름다운 마을이 바로 이곳 무섬마을이라는 이야기가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2024.10.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