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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의 무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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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림(崔湖林) 시인
장신대(서울), 선교신학대학원을 수학하고
1978 년「시문학」2회 1979년 「현대문학」각 2회 추천으로
문단에 나와 전통적인 시풍을 지켜 일상에서 얻은 소재로
시를 쓰고 있다.
E_mail-: wom15@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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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인간으로 태어난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열심히 살고 사랑하고 행복을 가꾸며 좋은
흔적을 남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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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제ㅣ부
시인.1
사는 법
목마른 강
웃음 꽃
물고기에게 묻다
노란 리본
목탁
절벽
흔적 1
달팽이
미루나무의 무게
아름다운 죄
조국 1
부탄의 행복
달에는 바람이 불지 않는다
어디서 휘파람새가 울었다
뿌리는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뿌리로 살다
찻잔의 뿌리
사과를 깎다
행복의 무게
머리 숙이다
2 부
귀로
기다림의 집
갈대의 밤
봄길
담 밑의 채송화
작은 풀꽃의 노래
연꽃
다시 피는 꽃
젖은 세상이 아름답다
물도 목마르다
장미를 읽다
주머니
낮달 1
쑥부쟁이
버려지는 아이들
겨울날
겨울나무1
겨울나무2
겨울 산 나무들
종이컵
잠은 아니 오고
보따리
제 3 부
낮 꿈 1
엉겅퀴
첫사랑
젊은 날의 초상
겨울 여자
느티나무 사내
호수
흠집
황토
길은 살아 있다
삼 거리
아버지의 집
아버지
어머니
반성
성냥
어머니의 손칼국수
이 시대를 살다 1
소리
자화상
노을 2
서쪽
제 4 부
기적을 살다
산딸나무
틈
골목
포에지
약속
노을
별 1
당신 2
종달새
고향
풀잎의 꿈
사랑
이명
못 박기
선택
허공의 나무
시인의 행복
이야기 속으로
신 인간 시대 1
신 인간 시대 2
질문의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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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부
시인
누가 우주의 동산을 거닐고
하늘을 품에 안는가
누가 번개의 눈물을 보고
구름의 속살을 만지는가
누가 태양의 얼음을 꺼내고
바다의 갈비뼈를 먹는가
누가 별들의 숨소리를 듣고
개미허리를 재는가
누가 바람의 그림자를 그리고
시간의 이빨을 낚는가
그 누가,
이승과 저승을 드나들며
무지개다리를 놓는가
사는 법
이다음에 태어나면 나무가 되리라
어느 생의 소망이 이루어진 줄 모르고
평생을 한 자리에 붙박였다 답답하다 하는가.
한 시도 쉴 새 없이 헤매 다니다 보니
세상 볼 것 안 볼 것 다 본 역마살의 생이
이제 푹 쉬며 수양하는 중이다
어떤가, 부질없는 꿈을 잡으려
동분서주 땀내 나는 몸부림을
나보다 누가 더 잘 알겠는가.
가끔 옛 버릇이 잡초처럼 돋아나면
손 내밀어 지나가는 구름도 슬쩍 잡았다 놓고
바람 더불어 신나게 춤도 추지만 아무래도
다음 생을 생각해서
명상에 들어 잡념의 잎을 떨구는 것을
또 외로워 보인다고 동정하지 말라
나는 지금 그지없이 행복한 순간에 있다
목마른 강
눈 먼 물고기와 곱사등이 물고기가
이웃 되어 서로 도우며 산다.
세상을 잘못 만난 거지
우리 죄는 아니라고
눈 먼 물고기는
애꾸눈이 새끼들 줄줄이 낳고
곱사등이 물고기는
등 굽은 새끼들 줄줄이 낳고
잡아도 먹지 못하지만
병신도 소중한 생명인데,
좋은 세상 올 때까지
이 강에서 기다리자고
눈 먼 물고기와 곱사등이 물고기가
어깨동무 하고 놀빛에 취해서
흥얼흥얼 집으로 간다.
웃음 꽃
길을 걸어가며 기분 좋은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피운 꽃 때문이다
너와 내가 반갑게 만나
얼굴 가득 함빡 터뜨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밝은 꽃 때문이다
그 순간 향기가 사방으로 퍼져
지나가는 이웃까지 즐겁게 한다.
가까울수록 크게 피고
오랜만일수록 더욱 놀라움에
덥석 손잡고 흔들 때마다
연달아 피는 꽃에 향기가
더욱 진하게 풍겨 나온다.
이 거리가 이렇게 환한 것 또한
그리운 사람들이 서로
아낌없이 눈빛을 건네는
웃음 꽃 때문이다
물고기에게 묻다
낚시 바늘은 교묘한 물음표다
미끼로 위장해 물속에 던져놓고
물고기에게 계속 묻기만 한다
맴돌며 입질만을 할꺼냐?
의심 않고 덥석 물꺼냐?
선택은 물고기의 자유지만
물음 뒤에 숨긴 내용이 궁금해서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겁쟁이라서 아니다
비겁해 보이기는 더욱 싫다
진짜 비겁한 건 낚시꾼인데
물고기가 안절부절이다
대답할까 말까, 마침내
물음에 성큼 다가 선 순간
기다린 듯 잽싸게 낚아 챈 희비가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린다
노란 리본
깃발이 아니다
마음이 고픈 사람들의 부황 뜬 얼굴
한도 설움도 많은
살아서 기 한번 펴지 못하고
시들어 가는 떡잎이다
솟구처 피가 되지 못한 절규
이 강산에 널린 몸살이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간 억울한 넋들
얼마나 사무치게 아픈가
대합실 목 의자에 새우 잠 든 그대는
나뭇가지마다 노란 헝겁을 매다는지
입가에 번지는 미소가 노랗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손사래 치는
유채 꽃 같은 그리움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면
우린 왜 그토록 목멘 함성이 되는가
노란 리본
그냥 지나치지 말라
마지막 잎새인 것이다
목탁
한 그루 박달나무로 태어나
해와 달, 별빛들을 골고루 받으며
이 소리 저 울림 다 삼키고
이 모습 저 흔적 다 새기고
비바람 눈보라에 수심을 다져
키가 크고 몸이 자라는 동안
쌓이고 굳어진 옹고집이
어느 장인의 눈에 들어
능숙한 솜씨에 사로잡히자
거친 숨결은 골라내고
불순물 찌꺼기는 걸러내어
비워서 가득 차고 버려서 넉넉해진
햇볕에 바랜 옥광목 눈부심 같은
그중 좋은 소리 하나만 갖게 되었다
두드려 불러내면 언제나
영혼의 그윽한 울림으로
백 팔 번뇌를 씻어주는
샘이 되어 솟아난다
절벽
얼마나 사무쳤으면
켜켜이 바위로 굳었겠는가
모진 마음 다지고 다진
네 삶의 전부가 침묵이다
틈마다 혼신의 힘으로 짜낸 눈물로
잡초와 이끼를 키우며
산 그림자에 바짝 다가 선
너는 깎아지른 천 길 벼랑
굽어보면 두렵고 떨린다
너의 힘이다
늘 가벼운 언행으로 부끄러운 나는
네 모습을 닮아보려 애써도
돌아서면 여전히 말이 많다
간혹 너는 느닷없이 아픈 흔적을
돌이나 자갈로 몸 바꾸지만
어느새 아찔한 키로 우뚝 서서
커다란 귀를 여는 생활이다
네 앞에서 세상사 구시렁거리면
한결같이 듣기만 한다
그것이 곧 대답이라는 듯.
흔적 1
나무에 나이테가 그려지듯이
오늘도 삶의 흔적이 새겨진다
나이테가 그려지는 줄 모르듯
새겨지는 삶의 흔적을 모른다
나이테를 보고 세월을 알 듯이
누구나 새겨진 수많은 흔적들이
한 생을 살아온 발자국이 된다
날마다 대수롭지 않게
사랑과 미움의 행위가 남긴 것들
더하거나 덜하지도 않고
아니라 도리질 칠 수 없도록
한 번 새겨지면 고칠 수가 없다
무심코 던진 말 한 마디나
스쳐 지난 생각조차 얼룩지고
마음 깊이 숨겨도 소용없는 비밀까지
그대로 다 새겨지는 것이다
신은 다만 새겨진
흔적대로 심판하실 뿐이다
달팽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에
아직도 그 걸음이다
움켜쥐려 눈에 불을 켜는 세상에
아직도 그 걸음이다
남에게 뒤처질까 기를 쓰는 세상에
아직도 그 걸음이다
이름 하나 남기려 생을 거는 세상에
아직도 그 걸음이다
이 시대의 성자인가 바보인가
달팽이.
미루나무의 무게
그냥 있기가 심심했던 지, 어느 날
미루나무가 제 몸무게를 알고 싶어 움찔
그림자를 늘어뜨렸으나
저울추가 꼼짝도 않는다
햇빛의 속살, 별의 반짝임으로도
여전히 미동 하지 않는다
할 수 없이
바람의 발목을 잡고 늘어졌으나
겨우 가볍게 꿈틀할 뿐이다
잎들을 다 떨구어도 마찬가지다
어둠은 너무 무거워
밤새도록 생각하고 생각했다, 이튿날은
눈이 내리고
가지마다 눈이 매달린다
미루나무의 무게가 눈 속으로 들어간다
비로소 서서히 일어서는
쌓인 눈만큼 무거웠던 것이다
아름다운 죄
초목에게 죄를 묻는다면
한 가지 옷만 입고 산 죄
바람의 춤사위와 어울리고
해와 달, 별빛을 품은 죄
무성한 숲을 키워 짐승들과
새들에게 보금자리를 내어준 죄
땡볕에 그늘을 드리운 죄
물 따라 뿌리를 뻗어가며
메마른 땅을 푸르게 살찌운 죄
가을이면 고운 단풍을 물들이고
땅을 쓰고 낙엽으로 갚은 죄
겨울의 눈꽃을 피워 감탄하게 한 죄
시시비비 할 줄 모르고
인간을 부끄럽게 한 가장 큰 죄
죄가 이리도 아름다운가
조국 1
밤낮 없이 입고 벗고
정이 듬뿍 든 옷이다
소매로 쓱쓱 닦아도 좋은
땀 냄새 나는 옷이다
대륙의 등살에 눈물 밴 옷이다
상처의 흔적들이 무늬가 되어
아름다운 맵시가 자랑이다
제 맘에 안 든다고 미련 없이
바꿔 입는 사람들 더러 있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간교한 이웃을 잘못 두어
허물없이 착한 옷이
넝마가 된 수모를 당했다
그 일로 다친 허리 아물지 않고
아직도 잠을 설친다
두레상에 앉은 얼굴들 닮았다
한 깃발 아래 모이면
왜 서로 젖어드는가
부탄의 행복
히말라야 산맥의 동부
열악한 환경의 산악 지대에
우리의 60 년대가 옮겨 가
그곳에서 오순도순 살고 있었다
서로 도우며 허물없이 어울리는
영혼이 곱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두 벌 옷이 없어도 낡은 신발에도
오염되지 않은 공기를 마시며
자연과 함께 살고 있었다
왕이 아끼는 백성의 나라
천금으로 살 수 없는 넉넉한 마음으로
나보다 너 잘 되기를 빌며
불타의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우리가 먼저 순수하게 지녔다가
소중한 줄 모르고 쉽게 버리고
언제 잃었는지 무심했던 정(情)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우리보다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달에는 바람이 불지 않는다
지구의 미친바람을 모두 달로 보내면
귀 밝은 달의 나무들이 여기저기 자라
몰려간 바람을 흔들어 잠재우지 않을까
평화를 깨뜨리는 테러의 무리를
거름 쓰레기로 달에다 부려 놓으면
바람과 어울리는 잡초로 무성하지 않을까
아직은 나무가 없고 풀도 없으니
달에는 바람이 불지 않는다
달려가 매달릴 그림자도 없고
골목이 없고 길도 없으니
무슨 재미로 바람이 몰려다니겠는가
더구나 사랑하는 사람이나 친구
미운 사람 하나 없으니
꽃향기를 날리고 먼지를 뿌릴 일 없다
잘 익어 탐스러운 천 년의 과일
바람이 불지 않아 떨어지지 않고
아무도 따거나 훔쳐가지 않으니
지금도 여전히 달려 있는 달이다
어디서 휘파람새가 울었다
그림자가 허공의 층계를 올라
꿈의 통로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았다
그때 어디선가 휘파람새가 울었다
대낮을 송두리째 저당 잡은 강물이
수심을 환히 밝히느라 햇살의 발자국을
미처 챙기지 못해 어리둥절 하는 사이
바람이 한 옥타브 높게 숲마다
악보를 그리고 가면 잎새들이 그걸 따라
음표만큼 반짝이며 뛰어 다녔다
그때 어디선가 휘파람새가 울었다
첫사랑을 떠나보낸 간이역에서
기적소리를 삼킨 산자락처럼
그녀의 향기를 들꽃에서 줍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휘파람새가 울었다
시가 어려우면 산문을 읽고
산문이 그리우면 시를 쓰고
낡은 책갈피에서 기어 나온 개미 떼의
긴 행렬을 따라 한나절을 죽이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휘파람새가 울었다
뿌리는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땅속 깊이 뿌리 내린 나무도
바람이 거칠면 불안하다
바람은 가지와 잎만 흔드는 게 아니다
뿌리까지 통째 흔들 때는 아프고
뿌리가 뽑힐 듯하면 두렵다가
막상 뿌리가 뽑히면 공포에 떤다
감싸 안아도 휘어지는 둥치
꼿꼿이 세워도 꺾이는 가지
그때마다 더 깊이 뻗어가는
뿌리도 벽에 부딪칠 때가 있고
부딪쳐 눈물 흘릴 때가 있다
더 이상 내려 설 수 없는
막막한 어둠 앞에서도
아직 물기 남아 있는 가슴이라면,
가장 어두울 때 빛이 터지고
가장 아플 때 꽃들은 핀다
천지에 아픔 아닌 삶이 어디 있으며
삶 아닌 슬픔이 또 어디 있는가
뿌리만 믿고 매달리는 가지와 이파리들
뿌리는 결코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뿌리로 살다
주름살 하나 제대로 그리고
검버섯 한 송이 피우는 데도
예순 해를 기다려야 한다
물고기를 키우며 강물이 흐르는 동안
아이는 자라서 어른이 되고
어른은 나이만큼 중심을 딛고
흔들리지 않을 뿌리가 된다
먼 산도 한 걸음 씩
속세로 내려 설 때마다
한층 밝아지는 숲의 이목구비
천 년 기다림이 바위를 키우고
만 년을 우뚝 선 하늘이다
찻잔의 뿌리
주인이 나를 애지중지 하는 것은 입에 혀 같은 봉사를 바라서다 때마다
나를 물 가 득 먹여놓고 하나 뿐인 귀를 잡고 헌신을 요구할 때는 출렁이
는 파도를 온 몸으로 안는다 찢어질 듯 아픈 귀를 쓰다듬을 새 없이 부
드러운 입술에 가장자리를 내어주는 이때가 가장 긴장 되는 순간 다시
접시에 착지하기까지 허공에 떠 있기도 한다 이런 나를 보다 못한 고양이
가 도와주겠다고 한 짓이 실수인 척 주인의 팔꿈치를 툭 치고 가자 나를
놓친 주인의 난처한 손, 바닥에 곤두박질 쳐 산산이 부셔지는 아픔이 전
신을 훑고 갔지만 몇 가닥 숨은 뿌리가 드러났을 뿐이다 내게도 뿌리가
있어 땅으로 돌아가면 생명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희망이
생겼다 몹시 아까워하는 주인과는 달리 이제 더는 막막하지 않게 되었다
사과를 깎다
꼭지 가까이 어디 쯤
칼 등으로 툭 처서 상처를 낸 후
잘 익어 때깔 고운 옷을 벗기면
속살에 스며든 상처를 삼킨
흔적이 상처를 물고 나온다.
세월이 금 긋고 간 주름살이며
새소리 날아들어 박힌 옹이
어둠에 떨던 두려움과
햇살의 손길에 눈멀고
달빛 별빛이 수놓은 그리움의 흔적들
스쳐 지난 바람의 상처는 또
내 가슴에 설렘으로 파고든다.
상처를 내면서 상처를 따라가면
얼마나 멍들고 아파서 울었는지
아직도 흥건히 눈물이 고여 있다
칼을 쥔 손에 한사코 매달리는 상처는
어느 누구에게 위로 받을 것인가
만남의 순간부터 그대와 나는
서로에게 깊은 상처가 된다
제 2 부
행복의 무게
겨우내
장바구니 가득해도
행복이다
배부르고 넉넉해지는
행복이다
세상에는
하루 세 끼를 못 먹는 사람들
얼마나 많은가
욕심을 버리면
하루 벌어 하루 먹어도
행복이다
이 순간까지 살아있어
행복이다
인간으로 태어난 생이
행복이다
행복은 그림자도 밝다
머리 숙이다
낮아지려면 목이 먼저 풀린다
꼿꼿하다가도 밀가루 반죽처럼
아래로 굽어진다 덩달아
허리도 활처럼 휘어진다
눈은 아래로 내리 깔고
표정은 풀잎처럼 부드럽다
더 낮아짐의 모습은
바닥에 무릎을 꿇는 것
기도하는 자세로
더 이상 내려앉을 수 없다
용서와 뉘우침과 애원할 때도
서로 사랑하고 존경할 때도
나보다 먼저 생을 마감한
사자(死者)앞에서도
절을 할 때 꿇는 무릎은
꽃처럼 향기롭고 은은하다
목이 있어 나를 낮추고
무릎이 있어 겸손해지는 것이다
귀로
수척한 그림자가 하나같이 닮았다
꽃 진 대궁의 노을빛이 닮았고
뒷모습의 쓸쓸함이 닮았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발걸음이 닮았다
속절없이 놓쳐버린 아쉬운 세월
아득한 그리움에 사무치는 아픔이 닮았다
구성진 가락으로 뽑는 노래가 닮았고
굽이굽이 바람에 부대끼는 외로움이 닮았다
사랑과 미움이, 마주치는 눈빛이
풍기는 냄새가 닮았다
행복한 표정도 불행의 흔적도 형제처럼 닮았다
먹고 마시고 춤추는 것
나사 풀린 말솜씨가 닮았다
앉고 서는 것이 닮았고 손잡고 흔드는 것도
건네는 안부가 닮았다
닮지 않고는 절대로 저 문으로 들어갈 수 없다
지름길로 숨 가쁘게 왔든 넓은 길로 넉 넉
하게 왔든 또는 좁은 길로 거칠게 왔든
통로는 하나뿐이다
마지막 들 숨이 가장 닮았다
기다림의 집
빈집의 기다림은 어둠으로 익는다
적막이 무겁게 내려앉는
시간의 층계 켜켜이 쌓여
낮보다 밤이 깊어지는 수심
누군가 들어와서 새로운 기다림을 낳고
점차 몸과 마음이 자란다
잠긴 문이 기다리는 건 열쇠지만
빈 집은 속살 환한 불빛이다
그 불빛 사이로 아늑히
딸그락 숟가락 내려놓는 소리
두런두런 말소리 흘러나오고, 그때마다
길 하나가 또 떠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항시 기다림은 활짝 열려있지만
그렇게 느리고 더디 오는 걸음
밤에도 잠을 못 잔다
마지막 불빛이 꺼지고
하루치의 기다림이 사라지면
내일에다 키 큰 뿌리의 그림자를 내려놓고
또 다른 어둠에 안겨 잠드는
모든 집은 기다림으로 쓰러지지 않는다
갈대의 밤
물간 생선처럼 구미가 당기지 않는
추억을 끌어올 수는 없지만
갈대밭에 숨어든 달덩이
유난히 출렁이던 그날 밤
갈대는 전신으로 울어
달빛에 속살 내주고 있었다
곧추 선 갈잎의 귀에 들킬세라
바람은 숨죽여 기어들고
주름 잡힌 밤은
꽃잎 지는 줄 모르고
환하게 익어가고 있었다
누구는 한 번쯤
남몰래 훔친 비밀이 없으랴
몇 번인가 뜨거운 몸 뒤척이며
강물은 짐 짓 모른 채 웃고 있었다
봄길
가뭄에 발목 드러난 징검다리로
앙감질로 건너오는 여린 바람보다
먼저 당도한 정겨운 햇살이
머뭇거리는 꽃망울을 죄다 불러내고 있다
자존심 강한 매화는 미리 와서
흐트러짐 없는 몸가짐이 돋보이고
산수유가 실눈 뜨고 세상으로 나가는 길 따라
개나리도 수다 떨며 뒤를 따른다
벚꽃이 무더기로 불밝히는 소리에
심봉사가 듣고 환하게 놀라 번쩍 눈 뜬다면,
어머니 같은 목련의 미소는 넉넉해서 좋다
진달래가 산자락에 퍼질러 앉아서
지나는 발길을 불러 모으는 동안
강마을 어딘가 복사꽃 수줍게 피어
사랑에 막 눈 뜬 누이의 연지볼을 물들이고
라일락 향기에 취해 비틀거리는 골목
울타리마다 가득 타오르는 장미여
너를 여왕이라 부르지 않을 수 없다
담 밑의 채송화
강아지처럼 졸졸 따르던 뒷집 순이가
오늘은 큰 맘 먹고 나를 꼬드긴 것이다
'오빠, 니캉나캉 신랑각시하자'
이미 신혼살림으로 크고 작은 사금파리
납작한 돌상과 명아주 잎에 질경이 뿌리까지
조촐하게 장만해 놓고
각시라고 다소곳해 한다
나는 졸지에 신랑이 되어 의젓하게
잘 차린 밥상을 받는다
맛있게 냠냠, 후루룩 국도 마신다
끼니때는 자주 돌아오고
상 차리는 일이 전부지만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제법
살림하는 새댁이 다 된 듯
발그레한 볼이 무척 고운데
담 밑의 채송화가 방긋거리며
소꿉놀이에 끼어들고 싶은 눈치다
하마터면 두 집 살림을 할 뻔했다
작은 풀꽃의 노래
무엇이 그리운가 묻지를 마라
내 생은 모두 다 그리움이다
가슴이 작아도 누구나 품고
그림자조차 기다리는 설렘이다
꽃을 피워 남루를 가리고
벌 나비 찾아 들지 않아도
마음을 비우면 외롭지 않다
눈길 끄는 아름다움은 못 되어도
향기의 길은 은은하고 깊다
바람도 꺾지 못하는 부드러움이
강한 것에 맞서는 용기가 되고
빛나는 것들이 이슬 속에 타듯
작은 적선 하나가 세상을 밝힌다
소중한 것은 작은 것에 있다
무슨 낙으로 사는가 묻지를 마라
내 생은 모두 춤의 흔적이다
연꽃
더는 실망하지 않고
두 번 다시 들먹이지 말고
그대를 품을 수 있도록
나를 비우고 비운다
뼈를 깎는 아픔으로
상처를 삭이고 미움을 죽이고
푹, 썩어 문드러지도록
마침내 한없이 부드럽고
더없이 살가워진 진흙 밭에서
깊이 뿌리 내리고
진정 용서하는 마음이
밝고 아름답게 피어나면
저와 같지 않을까
오므린 두 손이 만나듯
만월의 합장, 성스럽다
다시 피는 꽃
우린 그때 만났던가요?
햇살 눈부시고
바람 무늬 곱던
어느 전생의 길목
낯익은 길동무 되어
그렇게 사랑하다
헤어졌나요?
인연의 오랏줄은
천 년도 한순간
차마 못 잊어
그리움을 수놓다가
우린 이승의 뜰에서
다시 만나게 된 건가요?
젖은 세상이 아름답다
세상을 적실 수 있는
눈물이 있어 안심이 된다
눈에 눈물이 고이지 않아도
세상엔 젖어 있는 것들 많다
새벽부터 피어올라 한나절을
물기 머금은 안개가 시야를 가린다
그만큼 세상은 젖고 싶은가
울고 싶어도 참고 견디는 것들 많다
조개의 상처가 진주를 키우듯이
나뭇잎들은 물기를 모아 이슬을 굴리며
더욱 싱그럽게 일어선다
길바닥에 축축이 물기 스며있다
한 번 뒤척일 적마다
혼신의 힘으로 짜낸 길의 눈물이다
마르지 않고 눈물 같은 물기가 있어
눈시울 적시듯 흐려진다면
아직은 살만한 세상 아닌가
세상 한쪽은 늘 젖어 아름답다
물도 목마르다
메마른 땅에 고인 물웅덩이에
온갖 생명들이 우글거리고 있다
물을 안고 있는 가슴이라면
비록 그것이 조그만 눈동자라도
포기할 수 없는 물은 살아 있다
모래도 삼키지 못하는 물이
사막 어딘가를 적시고 있어
낙타의 발길을 한층 가볍게 하듯
하늘이 외면하지 않는다면
수심을 키우는 물 또한
쉽게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이 더욱 아름다운 것이다
슬픔이 때로 물이 되고
억울함이 더러 눈물을 쏟아낸다
그래서일까, 기적처럼
세상을 적시고 싶은 물이다
물도 때로 목마르지만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내어준다
장미를 읽다
이 책은 매우 아름답고
쉬운 문장으로 쓰여 있어
누구나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미로 같은 은유의 길 따라
비밀의 행간을 헤매지 않아도
쉽게 다가서는 설렘이다
피처럼 뜨겁게 일관된 내용을 따라가면
어느새 몸 바꾼 이해의 방식에 이르고
그 눈부신 몸짓이 눈 속 깊이 박혀
오래토록 기억되는 메아리로 남는다
주(註)가 필요 없는
줄기마다 가시 돋은 문장
벌 나비가 잉잉거리며 매달리면
마침내 뿌리 내린 사랑이 익는다
언제나 미지의 문 앞에 서듯
한 송이를 제대로 읽어도 한 권이다
페이지마다 그 향기를 즐겨 맡지만
나는 아직 장미에게 멀다
주머니
주머니가 비어 있다면
너는 주머니를 외롭게 하는 자다
손이라도 자주 넣어야 한다
몇 년 만에 만난 친구 앞에서 슬펐던 주머니
친구의 주머니도 비어 있었다
깊을수록 안심이 되지만
휴대폰은 들고 다닌다
너는, 애인의 찬 손을 몇 번이나
주머니 속에 넣어주었는가
오늘은 이것저것으로 채웠더니
몸에 착 달라붙어 허기진 주머니는
모처럼 배가 불러 트림을 했다
낮달 1
제 몸 아낌없이 내어주다가
날 새는 줄 모르고
아직은 서러운 이 나라
상처뿐인 강산을 잊지 못해
속살 키운 눈빛으로 꽉꽉 채운다
서리 꽃 피고 이 한낮
갈 곳 아득히 두고 붙박인 발걸음
시린 등이 유난히 커 보인다
더는 묻지 말라
하늘의 부스럼 딱지 같지만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다
쑥부쟁이
가을의 자락을 딛고 서서
오가는 사람의 눈길을 끌려고
한껏 발돋움하고
무심한 눈망울 속으로 뛰어들다가
하루해를 다 보낸다
별빛 같은 이야기가 하 많아서
귀 기울여 들어줄 누구인가
마냥 참고 기다리는 몸짓
무시로 지궂은 바람이 뒷덜미를 치고가도
울음을 배우지 못해 배시시 웃고
주저 없이 걸어온 길 후회하지 않는다
줄기 끝에 자주 꽃 한 송이 피울 수 있어
얼마나 좋으냐고, 이 세상
사는 일이 아름답지 않느냐. 고
거듭 거듭 고마워하는 것이다
버려진 아이들
이 겨울 들어
화초들 줄줄이 버려진다
생활이 한층 더 어려워졌는지
어제는 고무나무
오늘은 10년 생 벤자민
그리고 이미 버려져
생명 줄을 놓고 있는 관음죽까지
하나같이 비틀거린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눈길 던지면
울음이 말라버린 몸이
애처롭게 안겨온다
버리는 손 오죽했으랴
아무도 데려가지 않은 채
그 아이들의 하늘이 지금 쯤
노을을 적시며 떨고 있겠다
겨울 날
미친 여자가 아이를 가졌다
스쳐 지나간 바람이라
애비가 누구인지 아무도 모른다
제 살기 바쁜 사람들이
볼 때마다 혀를 찼으나
만삭이 되도록 병원에 간 적 없다
먹고 싶은 것 오죽했으랴
굶기를 밥 먹듯 하면서도
뱃속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
남산만한 배를 안고
어느 문전이나 헛간에서 몸을 풀었다면
누가 탯줄을 자르고 미역국을 끓여 먹였을까
앞을 분간 못해서 행복한 그녀의 춤사위가
눈발이 되어 펄 펄 펄 날린다
어찌 되었을까
마흔 해 전의 일이다
겨울나무 1
잎들이 떠날 때마다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하여 지금
빈 가지만 남아도 더는 외롭지 않다
가진 것 없으니 잃을 것이 없고
마약 같은 열정에 매달려
단 잠 빼앗길 일 더욱 없다
마음 비우니 영혼 한결 가볍고
주저 없이 물러서니 시시비비가 무색해
비록 여윈 손이지만 길게 내밀어
살아 있는 뜨거움을 서로 나눈다
무시로 적막을 깨며 날아드는 새들
햇살도 엷은 미소 거둔 게 아니다
어슷비슷한 모습 어울려 숲을 이루어
간밤의 별빛 안부도 건네고
지나던 구름도 잠시 머물러
먼 데 소식을 귓가에 풀어 놓는다
겨울나무 2
온 산천이 단풍 곱게 물들이던
그때만 해도 내 나이가 어때서
세상은 아름다운 노래였다
열린 길 따라 발자국들 넘치고
10월의 마지막 밤도 흥겨웠다
시나브로 지는 낙엽들 서걱이며
먼 길 가는 뒷모습을 작별하면서 부터
옆구리가 허전하고 등이 차고
사라진 길 대신 먼 산이 다가섰다
허물을 주고받으며 맞장 뜨던
그 좋던 계절은 가고
바람 불지 않아도 삐걱이는 관절
빈 가지마다 시린 별빛들과
낡은 몸에 옹이 박힌 상처들
그 사연만큼이나 서럽게 우는
문풍지의 긴 겨울밤은
구석마다 거미줄에 걸린 적막 뿐
당신과 나 사이를 뜨겁게 출렁이던
강물도 바닥을 적시며 흐른다
겨울 산 나무들
먼 길 나선 순례자들이다
거치장스럽게 두 벌 옷이나
일용할 양식을 지니지 않고
낯과 밤 , 엄동설한에
바람의 채찍이나 유혹에도
구름 같이 스쳐 지나는
가벼운 그림자로 내려서서
산하나 거뜬히 들어 올릴 뿌리와
빈 몸과 마음으로 침묵을 다진다
날개 단 산의 비상을 잠재우고
명상의 먼 길 가면서
한 걸음 내디뎌 천 리를 보고
두 걸음 물러서서 세상을 품는다
바위와 마주 한 침묵과
수척해진 키를 하늘에 기대어
틈이 난 사이사이를 메우고
나를 버리고 우리로 만나는
숲의 덕목을 산다
종이컵
한 사람의 손에 안겨
한 사람에게 입술을 허락하고
한 사람에게만 마음을 다 주면서
잠시 동안 행복했던
그런 사랑 한 적 있다
하고 있다
잠은 아니 오고
초저녁잠에 빠졌다가
깨어나니 자정을 지나고 있다
그새 초승달은 떴다가
눈썹에 스며들었는가
두 눈이 보름달로 밝다
가로등 불빛이 어이 알고 달려와
함께 가자고 창을 두드리고
이마를 적시는 적막이 차디찬데
떠나간 여인의 뒷모습 같은
지난 세월이 새삼 아득히 그립다
열 손가락에 겨우 걸리는
친구들은 안녕하신가
분꽃 같은 우정을 다져도 본다
잠은 아니 오고 이 밤
주마등처럼 지나간 서러운 나이가
잦은 헛기침처럼 아프다
한잔 술에 시름을 녹일 수 있다면
잡히지 않는 시의 꼬리를 잡고
산사의 종소리를 기다려나 볼까
보따리
그의 보따리에 무엇이 들었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한시도 손에서 놓지 않고
자나 깨나 꼭 껴안고 있어
다가서거나 눈길이라도 던지면
비수를 앞세운 표정으로 경계했다
세상에서 기댈 수 있고
자신을 지켜주는 것은
오직 보따리뿐이라고 믿는 게 분명했다
날이 갈수록 보따리가 커지고
보따리를 지키기 버거울 때 쯤
무거운 보따리에 깔려 그가 죽자
죽음을 애도하기보다는
너도나도 궁금했던 보따리에 매달렸다
얼마나 꽁꽁 묶었는지 풀 수가 없어
사방에서 잡아당겨 찢어야 했다
차곡차곡 쌓인 그의 일생이 드러났는데
심술과 고집과 밑 빠진 욕심이 푹 썩은
역한 냄새가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제 3 부
낮 꿈 1
동해의 깊은 곳을
한 조각 떼어다가 벽에 걸어 놓았다 해풍과 숨죽인 파돗소리 이젠 바다로
가지 않고 방에서도 수시로 발 적시며 지낸다. 쉬는 날은 낚싯대를 던져
놓고 기다린다. 내가 낚으려는 것은 원앙어선에서 잡는 고래나 상어, 참치
가 아니다 수중궁궐 용왕의 막내 딸 갓 물 오른 열일곱 소녀 인어다 팔등신
의 몸에 빼어나게 아름다운 얼굴 화산보다 뜨거운 관능의 입술 보기만 해도
온 몸이 녹아버릴 것이다 잡기만 하면 곁에 두고 지상의 어느 여인보다
소중히 아끼고 사랑할 것이다 인어와 사랑을 나눈 최초의 남자, 인어에게
자식을 얻은 최초의 아버지, 기네스북이 놀라 기절할 것이다 바다와 육지
를 번갈아 오가며 사는 가정을 이루고 오래도록 행복하리라 인어의 눈물
한 방울이면 지상에서 몇 십 케럿의 다이아몬드, 그러나 나는 인어를 울리
지 않을 것이다 다시 바다로 돌아가고 싶지 않도록, 갑자기 낚싯대가 부러
질 듯 요동친다.
인어공주다?!
엉겅퀴
그 여자
노숙의 냄새가 짙게 배지 않고 화장끼 체 가시지 않은 얼굴 아직 앉고 설 자리를
두리번거리며 강물 따라 온 울음보따리를 안고 울컥 치미는 울분과 허기를 달랜
다 스스로 배신하지 못해 아픈 몸짓 무겁게 망설이는 체념이 슬프다 아름답기 위
해 꽃을 피웠고 절벽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생이 참 막막하고 부질없다 바닥
을 치면 다 상처가 되는가 가시를 품은 현실 이 참 못났다 파경을 지나왔다 해도
잘못 살아온 길이라 해도 대명천지에 날개 꺾인 새라니, 애써 노 저어도 갈 곳 없
는 있을 자리가 아닌 여기는
서울이다
첫사랑
상현달이
지그시 곁눈질로 부러운 듯 바라보다가 구름으로 살짝 몸을 가린 순간 들뜬 숨을
달래느라 곱게 익은 그녀의 얼굴이 달 대신 떴다 아름다워서 계속 보고 있으면 눈
이 멀 것 같았다 다소곳 핀 꽃이라면 향기 또한 은은한 메아리로 퍼져 갈 것이었다
처음 만나 마주친 눈과 눈 사이에 자석이 끼어들었던 게 분명했다 필이 꽂혔다 그
날 이후 눈부처가 되었다 강변에 이르는 길 따라 발길이 먼저 알고 앞장 서 걸었다
손을 잡고 포옹하기까지는 얼마나 설렘의 시간이었던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
의 품으로 뛰어들었고 긴 입맞춤이 불붙어 뜨거운 밤이었다 그때 우리의 약속이 싹
트는 소리가 속삭이듯 들려왔다 내 생의 반쪽을 채워
만월이다
젊은 날의 초상
여자에게 번번이
첫 인상에서 밀려났다
못생겼다는 것이다
부모를 원망하랴
나를 탓하랴
그렇게 태어난 것이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얼굴만 보지 말고
꾸밈없고 변함없는
마음은 아름다우니
몇 번 만나자 했다
오래지 않아
달빛 같은 정을 느꼈던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더니
어느새 내 여자가 되었다
겨울 여자
눈발 펄펄 날리며 낯설고 후미진 길가에 당도한 여자 응달의 옹이로 박혀
동안거에 든 듯 세찬 바람이 꽝꽝 대못을 박는다 한 때는 부드럽게 춤추던
무희 사랑은 뜨겁고 아름다웠지만 그리움을 도려낸 고행이 시작되고 차디
찬 사슬을 몸으로 묶고 꽁꽁 언 아픔을 다지면서 퍼렇게 멍들도록 앙다문
입술 더러 넘어진 행인의 욕설을 얻어먹으며 담배꽁초와 먼지가 쌓여 앞
을 분간 못해 별빛들이 달려와도 매달릴 자리가 없다 바짝 마른 젖가슴을
잊고 산 여자 불거진 뼈마디로 날개를 꿈꾸었을까 퍼덕거린 흔적이 발밑에
남아있다 겨울이 떠나도 한참을 더 바위로 버티며 골다공증에 푸석 허물어
질 때까지 햇빛 한 줌 받지 못하다가, 어느새 가고 없다
느티나무 사내
어디서 살다 왔는가
정자 옆 거처를 마련한 사내
이곳에 오기 전 그는 이미
중년을 지나고 있었고
세파를 겪을 만큼 겪었는지
여간해선 흔들리지 않을 모습과
단단한 둥치와 철근 같은 뿌리,
근육질의 몸 여기저기
훈장처럼 달린 상처의 흔적들
더는 두려울 게 없어 보였다
무성한 그늘을 펼치고 정자를 지키는
단순한 일거리지만 만족한 듯
단조로움은 그의 몫이 되었다
풍경의 들러리로는 그만이었고
정자를 찾아 드는 얼굴을 반기며
수다를 들어주는 일은 덤이었다
소문이야 바람과 새들의 독점,
가끔 그의 듬직한 등에 기대어
열 오른 머리를 식히기도 한다
호수
당신이 찾아온 줄 알면서
난 모른 척해요
당신이 내 주변을 돌면서
머물고 싶어하는 줄도 알고
당신이 왔다 간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지만
바람이나 구름 또는 새소리처럼
내 맘을 흔들어 놓는
그림자는 잊을 수 없어요
그런 당신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 줄 알기에
마냥 기다려도 지루하지 않아요
보세요, 놀 빛 적신 그리움
아름답지 않나요.
흠집
흠집이 날까 두려운
흠 없는 물건보다
이미 흠이 나 있어
부담 없는 물건이 좋다
흠 없는 과일은 탐스럽지만
제대로 익어 맛 나는
까치가 지레 쪼아 먹거나
벌레가 집을 짓고 들어앉은
흠집 난 과일이 좋다,
실패를 거듭하고
절망의 바닥을 치다
훈장처럼 달린 흠집에
풍기는 사람 냄새가 좋다
잘난 것 하나 없어
자꾸 밀리기만 하는
그런 물건들,
그런 과일들,
그런 사람들,
선뜻 다가서게 한다.
황토
황토를 떠올리면
남도 냄새가 난다
황톳길을 그리면
놀 빛 황소걸음
고난과 한이 쌓인
아픔과 피 냄새가
녹슨 눈물과 함께
그리움이 된 남도의
색깔이 분명하다
속속들이 황토인
남도의 슬픈 사랑
우리 피부를 닮아서
친근하고 부담 없는
황토의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 더욱 좋다
길은 살아 있다
이토록 옷이 구겨졌다면
마음은 얼마나 주름졌을까
기진맥진 녹초가 되어 쓰러진
바지를 다림판에 편안히 뉘여놓고
안 간 데 없이 골고루 손질을 한다
남몰래 흘린 눈물자국이
군데군데 얼룩으로 남아 있다
부딪쳐 멍든 흔적과 상처를 닦아내고
생기 불어넣듯 물을 먹인 다음
그 위에 뜨거운 피가 돌도록
온도를 높인 압박기 다리미로
멈춘 심장의 길을 찾아 나선다
단번에 펴지지 않는 주름만큼
얼마나 무릎 꿇고 머리 조아렸을
한번 오달지게 살아보자는
포기할 수 없는 몸부림이 보인다
다짐하듯 몇 번이나 다림질 끝에
파김치의 길이 벌떡 일어선다
삼거리
꼬리를 곤두세우고
가파르게 내려오던 길이
벽이 막아서자
주춤 머뭇거리더니
두 팔을 좌우로 쫙 뻗는 것이다
삼거리가 되었다
아버지의 집
아버지,
오늘은 어디로 가시나요?
병든 몸으로 식구들 걱정 뿌리치고
어느 거리를 헤매 다니실까?
가진 것 다 털어주고 나서
비로소 당당해지시는 아버지
그래도 우리 아버지인데 미워할 수는 없고
그저께는 술 취해 들어 오셨는데
어제는 무당을 만나셨나요?
너무 싫은 무당 냄새가 났어요.
오늘은 또 사기꾼이라도 만나실 건가요,?
사기꾼 냄새를 갖고 오시려고,
한 꺼풀 벗기면 병이 깊은 아버지
오지랖이 넓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내일은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눈에 밟히실까,
식구들 고생은 안중에도 없는지
아버지를 말릴 수가 없네요
우리 집 수입이 고작 어머니의 삯바느질과
공장에서 고사리 같은 손으로 벌어오는
누이의 월급으로 근근이 연명하는데
한 달 외상값을 갚고 나면
이 달도 푸성귀를 뜯으며 살아야 해요.
가끔 거울을 들여다보면
거기 나는 없고
고질병의 아버지가 비틀비틀 걸어 나와
소스라쳐 놀라 비누를 떨어뜨리죠
이미, 낡아서 군데군데 금이 가
아버지의 모습을 닮은 우리 집
서까래 같은 식구들이 불안에 떨면서도
대들보인 아버지가 지켜주실 것을 믿는
그래도 우리 아버지인데
늦게 까지 안 들어오시면 걱정 되어
잠도 못 자고 기다리는데...
아버지.1
공원 벤치에
누가 두고 갔는지
아무도 주워가지 않는
보따리 하나 놓여 있다
무엇이 들었는지
허술하게 묶여 있어
소중해 보이지 않지만
분명 버린 것은 아닌데
종일 기다려도
주인은 나타나지 않고
땅거미가 지도록 후줄근히
그대로 앉아 있다
어머니1
조센징이라고 얻어맞고 온 날도
어머니는 장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배고프것다, 어서 들어가 밥 묵어라'
된장찌개에 보리밥 한 덩이
뚝배기에 담긴 조국이 울고 있었다
사무친 설움에 얼룩진 아들의 마음을
아무 말 없이 쓰다듬어 주었다
한결같이 가르마 곱게 빗고 단정했던
종종 아내에게서 살아 계신 어머니를 본다
성냥
불을 품고 태어나
건드리면 확
터지는 붉은 울음
스치기만 해도
그냥 타오르는
한번 뿐인 사랑을
기다리며 산다
책임질 수 없다면
제발 건들지 말라
함부로 장난이나 칠
가벼운 생이 아니다
혼신의 힘으로 불태운
흔적도 뜨겁다
반성
손톱 밑의
가시 하나가
온몸을 괴롭히듯이
지극히 작고
사소한 말이나 행동이
깊은 상처를 줍니다
나는 누구에게
손톱 밑의 가시가 된 적 없는가?
가시를 뽑아내며
거듭 물어봅니다
어머니의 손칼국수
농사지어 수확한 밀을 맷돌에 갈아 채로 처서
껍질을 걸러낸 가루로 반죽해서 밀대로 밀어
어머니가 손수 해준 국수를 먹고 싶었다
어머니의 손맛이 그리우면
나는 손칼국수를 생각했다
그러나
자식의 입에 들어가는 국숫발처럼
명줄이 길어지라고 염원을 담은
어머니의 손국수를 한번도 먹어보지 못했다
나 어릴 적
어머니 돌아가셨다
이 시대를 살다 1
요나라의 허유가
지금 우리나라에 태어났다면
귀를 씻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귀 씻은 그 물이 더러워
소에게 먹일 수 없다고 상류로 간
소부도 없었을 것이다
더러움을 넘어서서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머리들이 되겠다고
다투어 이간질 모함을 일삼는
입만 열면 거짓말 뿐인데도
백성들의 이목구비가 건재하다니
허유와 소부가 아니더라도
맹고불이 없는*
얼마나 살기 좋은 세상인가?
*조선 세종 때 정승 맹사성
소리
고요는 소리의 어머니입니다
고요가 깊고 튼튼할수록
건강한 소리가 태어납니다
소리는 아버지가 없습니다
어디를 가도 소리는 공통으로 들립니다
무슨 소린지
누구나 들으면 다 압니다
소리는 이름이 하나뿐입니다
시시각각 다르게 들려도
기후의 변화처럼
감정의 기복처럼
희로애락을 연출합니다
소리는 현재진행형이
가장 아름답거나 몹시 두렵습니다
어디선가, 뚝
물방울 하나 떨어지는 소리
고요의 품이 얼른 받아 안습니다
우주의 실핏줄이 꿈틀 합니다
자화상
화살을 맞고 피 흘리는
사슴 한 마리가
피하는 곳이
달아나 숨는 곳이
가시울타리로 뛰어든다
치명적인데도
울지도 않고
원망도 못하고
하루에 열두 번 더
상처를 주고받으며
서로에게 깊이 사무친다
사랑과 미움이
팽팽하게 마주하고
가장 가까이서 당기는
화살 끝엔 언제나
프리다 칼로*의 사슴이 있다
*멕시코 출신 화가
노을 2
태초의 말씀 같은
신의 정원을 펼쳐놓고
영혼들이 몰려나와
지상이 그리운 몸짓을 하면
하늘도 몸살 앓는다
가시를 잃어버린 장미의 반란
터진 홍시가 등성이를 흠뼉 적시고
수혈 받은 실핏줄은
영원으로 뻗어가는 데
홍학이 떼로 내려앉은 강가
갈대의 수런거림이 뜨겁다
얼얼한 세월의 뒷모습 같은
신전의 돌기둥에 매달린
누천년의 아우성이 퍼져가고
거대한 입을 벌린 불가사리
한색으로 동화되어
더욱 깊어진 사랑이다
서쪽
지는 해를 바라보는 눈은 거룩하다
한꺼번에 터져 나온 종소리가
세월의 뒷모습을 만나는 순간이다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
오래 기억되는 까닭에
사후에 더 별 같이 빛이 난다
하늘이 읽는 문장은
시작보다 끝이 아름답고
비로소 그림자를 내려놓은 듯
이 땅에 살던 사람들 모두
서쪽으로 간 것 같다
그 너머로 가면 만날 것 같다
한곳으로 몰리는 저 행렬은
신의 계시를 받은 순례자들인가
아득한 그리움을 수놓으며
만발한 장미의 강물 따라
황혼의 새가 거대한 날개를 편다
제 4 부
기적을 살다
내 가슴이 너무 좁아서
세상을 안을 수 없었고
내 마음이 너무 작아서
너를 용서하지 못했다
그것이 두고두고 아프다
후회 없는 건
사랑 뿐이라고
말들은 쉽게 하지만
이제 겨우 생의 그림자 하나 읽는다
그때는 왜 그랬을까
해답 없는 질문을 수없이 던진다
이만큼 살고 나서
비로소 눈 하나 또 열린다
지난 후 돌아보니
하나같이 애달프고 부끄럽다
해가 뜨고 지는 것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다
천지에 가득 차 있는
우주의 기적을 살고 있는 인간은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가
산딸나무
다 자라면 높이가 7m
지름이 40cm 정도
딱딱한 재질에다
딸기 모양의 열매는 먹는다
2천 년 전 골고다 언덕
메시아를 못 박을 때
선택된 순간부터
신의 아들의 영광을 입고
팔 다리 가슴에 못이 박혀
흐르는 피를 죄다 마시고
나사렛 예수의 고통과 죽음
시신이 내려질 때까지 함께 하여
성스러운 이름을 얻은
십자가의 나무
틈
아무리 튼실한 뿌리도
바위를 뚫지 못한다
틈이 있어야 한다
공기와 바람이 드나들고
습기가 배고 먼지가 쌓여
뜨거운 가슴이 사는 곳이어야 한다
틈이 될 금이라도 생기면
큰 일 난듯 황급히 메우는 사람은
틈을 보이지 않으려는 완벽함으로
누구도 다가설 수 없게 하고
틈 없는 울타리를 쌓아
개미 한 마리 얼씬 못하게 한다
틈은 너와 내가 손잡고
사랑이 싹 트는 기회를 만들고
틈을 낼 줄 아는 사람만이
세상을 여유롭게 이끌고 간다
콘크리트 바닥을 뚫고 풀 한 포기 자라고 있다
틈이 키운 생명이 경이롭다
골목
뉴ㆍ타운의 청사진이 걸리자
현수막이 당당하게 펄럭였다
시력 잃은 가로등이 더듬거리고
한 집 건너 한두 집이 이 빠진 듯
캄캄한 창문들이 늘어갔다
들고양이 불안하게 기웃거리는
한때는 바쁘게 종종걸음 치며
불빛들이 다투어 반기기도 했다
어깨 높이로 낮은 담장에 솟은
목련도 벚꽃도 정이 넘쳐흘렀다
울타리의 개나리도 살가웠다
아기 울음소리 별로 뜨는 밤
식구들의 웃음이 달을 낳기도 했다
앉고 서고 기대어 살던 이웃들
오늘도 몇 가구가 쫓기듯 떠나고
다시 만날 기약은 없었다
언덕 위 종 탑의 불이 꺼진 지 오래
하나 뿐인 미장원도 문을 닫았다
굴삭기의 거친 손은 막무가내
골목은 갈수록 수척해졌다
포에지
1
아침에서 한나절 가던 길이
정오쯤에서 고개를 팍 꺾었다
뒤따라가던 그림자도
고개를 팍 꺾는 것이다
그걸 본 나도 고개를 팍 꺾었다
한동안 태양도 어안이 벙벙한 모양이다
2
부드러운 흙 가슴에
철근 시멘트가 파고들어
숨구멍을 꽉 막아버리자
아얏!
자지러지는 비명
내 사랑은
그렇게 태어난다
약속
지구의 가슴에 살기 위해
나무는 새의 날개를 접고
한자리에 뿌리를 내린 새다
새는 뿌리를 포기한 나무
온종일 날아도 머물 곳 없어
지상에 날아들어 나무에 기댄다
애초 나무는 우주를 떠돌던
새의 실핏줄을 한 생명체였지만
우주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어
헤매 다니다가 만난 땅이
그대로 품을 열어 준 것이다
그래서 뿌리가 된 생명이다
생명도 안정될 때가 아름답다
나무가 깃털을 달면 녹색 근위병
지구를 지키는 숲은 사라지고
사막이 아프게 펼쳐질 것이기에
새는 하늘을 나무는 땅을 지키며
하늘과 땅을 동시에 살기에는
새는 나무를 대신하여 날고
나무는 새를 대신하여 머무는
서로 약속을 지키고 있다
노을
술 몇 잔 마시고
지는 해 바라보니
곁의 느티나무도 붉어진 얼굴로
기대어 서 있다
함께 술 마시지 않았지만
나만큼 저도 취해서
나처럼 비틀거리며 흥얼거리고 있다
우리는 금방 친구가 되어
어깨동무 하고
흠뻑 취해 인사불성이 되어 주저앉은
산등성이 하늘을 향해
손짓하며 박장대소 했다
별 1
밤이 좋아 산책 나왔다가
하늘에 주저앉고 만 것이다
곧 돌아가리라, 고
가벼운 차림에
눈빛만 달고 나온 발걸음이
이제는 돌아가고 싶어도
그새 사귄 그만 그만한 이웃들을
차마 떨칠 수 없어
정에 붙박인 세월
아들 딸 며느리 손자까지 거느리고
그 녀석들 재롱에
날 새는 줄 모른다
당신 2
막 차를 놓치고
산길 이십 리를
터덜터덜 걷다가
앞 서 걷고 있는
댕기머리 소녀를 만났다
열여섯 살이라 했다
나의 반쪽이 된
당신이었다
종달새
보리밭 밀밭 떠나간
밭둑에 앉아
할 일 없는 이 봄 날
먼 산보며 운다
배고파도 가난해도 함께 넘던
보릿고개 사라진 들판
인정의 샘은 어디로 갔는가
이 나라 서러운 산천
눈물 닦아주며
대신 울어주던 종달새가
들을 귀 없는 세월이
아쉬워 운다
고향
고속버스나 열차로 다섯 시간 거리에
낯선 고향을 지나고 지나쳐 가면
버선발로 반가운 얼굴이 달려 나온다
사랑이 싹튼 동구의 느티나무를 끼고
순이가 연꽃으로 피어 웃던 작은 못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을까
서낭당을 돌아 삼신각 앞에 서면
무당 할멈이 귀를 밝혀주던 방울 소리
서른 해 만에 찾아가는 길이다
풀잎의 꿈
풀잎들도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때가 있어
여기저기 방향을 정해보고
바람 따라 한 걸음 씩 내딛는 연습도 한다
저 산 너머 저 강 건너
한번 가보고 싶다고
가서 다른 삶 살아보고 싶다고
풀잎들도 꿈꾸는 세상이 있어
구름 따라 그 어딘들 못 가랴
나 없어도 되는 이곳에서
할 일 없어 부끄럽고 너무 지루해
메마른 황무지나 거친 벌판
불모의 땅이라도 달려가서
한껏 땀 흘려 기름진 땅 만들고 싶어
몸과 맘으로 다짐하고 다진다
마음 먼저 떠나 보내고
몸이 뒤따라가는
그런 몸짓을 산다
사랑
바람은 필사적이다
나무를 놓치면 죽기라도 하듯
젖 먹은 힘까지 쏟으며 매달린다
나무 또한 바람을
결코 놓지 않으려는 듯
긴 팔로 부등켜안고
틈이라 곤 전혀 없다
사랑하면 할수록
함께 있고 싶은 마음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끝까지 서로 믿고
서로 포기하지 않는
사랑은 그런 것이다
이명
소리의 무덤에
매미가 와서 운다
내가 울어야 할 자리에
매미가 대신 운다
내가 죽으면
울지 못할 거라며
미리 문상하듯
때로 몰려와 운다
여름이고 겨울이고
낮이나 밤이나
쉴 새 없이 목 놓아 운다
매미가 울어
나의 귀는
아직 건재하다
못 박기
자주 망치를 들다 보면
못 박는 일에 익숙해진다
그 익숙함이 지나쳐서
남의 가슴에다
꽝 꽝 대못을 박는다
인정사정없이
선택
행복하다는 사람과
불행하다는 사람 사이에서
행복한 사람보다는
불행한 사람에게 다가서리라
행복한 사람을 만나면
나도 더 행복해 질 수 있고
불행한 사람을 가까이 하면
불행에 젖어들 것 같지만
누구에게 도움이 되겠는가
가진 이에게 별 볼 일 없는 내가
못 가진 이의 이웃이 된다면
넓고 평탄한 길을 두고
가시밭길을 택한 것이지만
배부른 자에게 진수성찬은
당연해서 고마운 줄 모르고
배 고픈 자에게 밥 한 그릇은
두고두고 은혜로 남는 것을
나는 불행한 사람 편에 서서
십자가를 함께 지기로 했다
허공의 나무
울타리 없는 허공의 집에는
측은지심으로 자비를 베풀며
작은 자의 이웃 되어 살다간
영혼들이 평화롭게 모여 산다
양식은 생명나무 열매인데
지상에서 말하는 황금이다
더러 돌덩이로 떨어져 뒹굴지만
허공의 양식이니 탐 내지 말고
그냥 돌멩이로 보라 해도
눈 밝은 사람들은 한사코
산이나 강을 다니며 찾아서
욕심의 곳간에 가득 쌓아 놓고
썩어 버려도 나누어 먹지 않고
자자손손 독식하기도 한다
그 나무에 깃들어 사는 새들은
황금에 연연하지 않고 생을 마친
마음이 고운 영혼 들이다
나는 가끔 꽃길을 따라가서
나무 아래 떨어진 열매를
보따리 가득 주워오는 꿈을 꾼다
시인의 행복
시인이란 이름으로 어연 마흔 해
낮은 지명도로 여기까지 왔으니
보란 듯이 내세울 이력이 없네
가지런히 엮은 굴비가 부러운
고등어, 꽁치, 명태, 갈치, 양미리......
두 서 없이 섞어 엮듯이
스토리 없는 시를 써 왔네
경험의 폭이 좁아 빈곤한 주제와
어떤 명제도 없이 전전긍긍
개성 없는 단편적인 시만 써 왔네
삶의 상처와 고통에서 승화된 반성으로
보편적 의미도 부여하지 못하고
인식과 정서, 미학적 가치도 결여된
즉흥적이고 깨달음 하나 얻지 못한
강변의 자갈 같은 시만 써 왔네
스승이나 친구도 없이 혼자서
지름길도 모르고 험한 밤길을
무작정 걸어 걸어서 왔네
가만히 들여다보면 빈손이네
그래도 이룬 것 없어
계속 꿈꾸며 쓸 수 있다는 것이
마냥 행복하네
이야기 속으로
삼동, 강 가까이
땅거미 수만 마리 둘러싼 외딴집
아궁이에 군불 때는 아낙네가
천 년 전 내 여인 같네.
불빛에 언 강 녹아 배 뜨면
소식 없는 임이 행여 오실까
구둘 목을 데우는 것이네
지네발로 지나가는 세월마다
그리움은 강가의 자갈로 뒹굴고
활활 타오르는 불빛을 보며
어둔 밤길 탈없이 찾아오시라고
도포자락 날리는 바람도 거드네.
솔가지를 통째 밀어 넣으며
마음도 뜨겁게 지피네.
생솔 타는 냄새가 연기를 몰고
임을 마중하듯 버선발로 달려가네.
별들도 이빨이 시린 밤
산 같이 쌓인 회포 풀리라고
연지 볼 복숭아도 무르익어가네
신 인간 시대 1
동물은 수치를 모르기에
벌거벗어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인간만이 수치를 알아
부끄러운 짓은 몰래 숨어서 합니다.
그런데 근래 와서부터
동물을 닮아가는 인간이
부쩍 늘어나고 있습니다.
철면피에다 입을 열면 거짓말 뿐이라서
동물도 피해 다닌다고 합니다.
인간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신 인간 시대 2
전쟁으로 잃은 지아비를
자결로 뒤따른 지어미나
끝까지 오랑케의 마수에서
절개를 지킨 여인에게
나라에서 내린 열녀비는
가문의 영광으로 빛났습니다
아직도 그 하늘 아래 살건만
배우자를 두고 딴짓을 일삼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열녀비가 세워진 자리에
러브호텔이 들어서고
드나들 때마다 바뀌는 짝이
1 순위 애완동물이라 합니다
질문의 방식
귀를 열면 흥하고
입을 열면 망하는
세상의 이치 아닌가
초나라 항우는 입을 열어
내 생각이 어떠냐? (何如)물었고
한나라 유방은 귀를 열어
그대들 생각은 어떠냐(如何)들었다
그 차이는 하늘과 땅
귀를 연 유방이
입을 연 항우를 이겼으니
지도자라면
입보다 귀를 열어야 하리
세상이 이토록 시끄러운 것은
귀보다 입을 많이 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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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해설
* 시인은 작품으로 말해야 한다 * --시인, 평론가들의 시평--
살아있는 언어와 상상력 / 이 혜 선(시인, 문학평론가.문학박사)
시의 언어는 일상의 언어 속에서 나오면서도 일상어와 구분된다. 시의 언어는 일상생활과의 접촉, 일상어와의 접촉을 잃지 않으면서 일상어가 가진 한계와 고정화를 넘어서는, 존재의 비의秘義를 캐내고 감동을 주는 살아있는 언어이다.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는, 이미 주어진 것과 이미 굳어진 의미의 껍질을 탈각하여 새롭고, 서로 연결되지 않은 낯선 의미의 언어와 이미지를 찾는 노력을 항상 기울여야 한다. 끊임없는 관찰과 체험과 사유 속에서 낯설게 하기, 비틀어보기, 새롭게 보기, 흔들어보기, 거꾸로 보기 등의 방법으로 새로운 언어를, 새로운 객관상관물을 발견해내는 시도가 필요하다. 이미 주어진 것이나 굳어진 것, 이미 알고 있어서 남들이 다 쓰는 이야기 속에서 자신만의 개성적인 글을 쓰기는 어렵다. 새로운 언어 찾기를 위해 시도하는 노력 못지않게 상상력을 기르는 노력 또한 중요하다. 시인은 언어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언어의 창조자이며 언어의 신神이기에, 언어를 질료로 하여 어떤 새로운 세계도 상상력으로 창조할 수 있다.
그동안 계간 시평을 써오면서, 좀 더 치열하게 살아있는 언어를 찾고, 상상력 속에 새로운 시 쓰기, 독자를 감동과 매혹 속에 끌어들이는 시 쓰기를 하는 시인과 시를 찾기 위해 노력해왔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러한 치열한 시 쓰기를 위해 전력투구한 작품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았다.
시는 질투심 많은 연인과 같다. 오로지 저만 바라보며 저에게만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거나 딴 곳에 한 눈 파는 기색이 보이면 뒤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리는 매정한 연인이다. 필자도 시를 쓰고 있지만, 시에 전력투구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살고 있지만, 앞으로는 우리 모두 기왕 시를 쓰는 데에 발 들여놓은 이상, 좀 더 새로운 언어 찾기와 상상력 기르기, 그리고 오로지 좋은 시, 감동적인 시, 훌륭한 시, 위대한 시를 쓰기 위해 붓을 벼루어야겠다.
누가 우주의 동산을 거닐고
하늘을 품에 안는가
누가 번개의 눈물을 보고
구름의 속살을 만지는가
누가 태양의 얼음을 꺼내고
바다의 갈비뼈를 먹는가
누가 별들의 숨소리를 듣고
개미의 허리를 재는가
누가 바람의 그림자를 그리고
시간의 이빨을 낚는가
그 누가,
이승과 저승을 드나들며
무지개다리를 놓는가
「시인」전문
‘누가 우주의 동산을 거닐고/ 하늘을 품에 안는가’ 시작부터 우주적 세계관이 펼쳐진다. 당나라 소동파가「적벽부」에서 일찍이 노래하였듯이 저 푸른 바닷 속의 좁쌀 한 알 같은 우리의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가 시적인 상상력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우주적 상상력으로 우주의 동산을 거닐 수 있겠는가. 시인이 아니라면 누가 ‘번개의 눈물’을 볼 수 있으며, 누가 ‘구름의 속살’을 만질 수 있겠는가. 시인의 무한한 상상력은 태양에서 얼음을 꺼낼 수도 있고 시간의 이빨을 낚아서 붙잡을 수도 있고 멈추게 할 수도 있다. 오로지 시인의 상상력만이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며 무지개다리를 놓고 상호교통相互交通할 수 있는 것이리라. 시인의 이러한 시안詩眼과 세계관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대의 발자국 소리를 따라/ 숨겨둔 길을 찾아가듯이/ 눈빛 세우고 난해한 문장 속으로 뛰어든다’ ‘그대 속에서 꺼내는 반짝이는 언어들/ 천 년의 침묵으로 다가올 때마다/ 가장 완벽하게 소화하고 간직하기 위해/ 그대 속으로 들어가는 긴 통로를 마다치 않는다’처럼, 같이 수록된 시「그대의 문장」에서 볼 수 있듯이, 「최호림」 시인의, 등단 40년이 다 되어가도록 아니 그보다 더 긴 시간동안 끝없는 독서와 끝없는 노력과 상상력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처럼 시인의 길이란 ‘성스럽고 아름다운 생명의 탄생을 위하여’ ‘더 배고프고 목’마르도록 우물을 파고 또 파야하는 끝없는 고독과 노력의 길이다. 그 노력의 끝머리 어디쯤에서 평생토록 모은 물방울과 향기로 자신과 독자를 감동시키고 매혹시킬 수 있기를 기원하는 것이 시인의 삶이다.
이 여름, 나무야 고맙다 /오 광 수(시인 기자)
사는 법
이다음에 태어나면 나무가 되리라
어느 생의 소망이 이루어진 줄 모르고
평생을 한자리에 붙박였다 답답하다 하는가
한시도 쉴 새 없이 헤매다 보니
세상 볼 것 안볼 것 다 본 역마살의 생이
이제 푹 쉬면서 수양하는 중이다
어떤가, 부질없는 꿈을 잡으려
동분서주 땀내 나는 몸부림을
나보다 누가 더 잘 알겠는가
가끔 옛 버릇이 잡초처럼 돋아나면
손 내밀어 지나는 구름도 슬쩍 잡았다 놓고
바람 더불어 신나게 춤도 추지만 아무래도
다음 생을 생각해서
명상에 들어 잡념의 잎을 떨구는 것을
또 외로워 보인다고 동정하지 마라
지금 나는 그지없이 행복한 순간에 있다
* 이 여름, 나무가 고맙고 고맙다. 온 힘으로 피워낸 무성한 잎들로 만든 나무그늘 아래서 사람들은 행복하다. 숲에 들어서면, '부질없는 꿈을 잡으려/동분서주 땀내 나는 몸부림'을 잠시 접고 '다음 생을 생각해서 /명상에 들어 잡념의 잎을 떨굴 수 있으니. 어디 사람뿐이랴. 숲에서는 매미도 열반에 들고, 귀뚜라미는 악성(樂聖)이 된다. 뜨거운 햇살들도 순해지는 여름 오후의 한때, 아담을 유혹하던 뱀들까지도 잠시 낮잠을 청한다. 저리 많은 나무들이 서로 껴안고 평화로울 수 있는 건 그네들의 심성이 순 하디 순하기 때문이다. 이 여름이 지나 모든 잎들을 다 벗어 대지에 골고루 나눠주고 나무는 또다시 맨몸으로 겨울의 추위를 견딜 것이다. 어쩌면 나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몸에 두르고 살았다. 다 주고 나서 어머니인 대지가 주는 더 푸른 옷으로 갈아입는 나무를 보고도 나는....:
생명의 존엄성/ 한명수 (시인. 문학평론가. 종교학 박사)
애꾸눈이 물고기와 곱사등이 물고기가
이웃되어 서로 위로하며 산다
세상을 잘못 만난 거지
우리 탓은 아니라고
애꾸눈이 물고기는
눈 먼 새끼들 줄줄이 낳고
곱사등이 물고기도
등 굽은 새끼들 줄줄이 낳고
잡아도 먹지 못하지만
병신도 소중한 생명인데,
좋은 세상 올 때까지
이 강에서 기다리자고
애꾸눈이 물고기와 곱사등이 물고기가
어깨동무 하고 놀빛에 취해서
흥얼흥얼 집으로 간다
「목마른 강」 전문
*최호림의 목마른 강은 기본적으로 생명의 존엄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불구의 물고기들은 지구환경 문제에 따른 결과적 현상으로 일차적으로는 자연환경의 생명적 변이 현상에 대한 인간의 성찰을 촉구하기도 하고, 그 이면에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소외된 인간의 모습을 구상화한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인간의 모습들은 얼마나 많은가? 단순히 불구의 물고기들이 보여주는 신체상의 문제로 인한 소외를 넘어 사회-심리학적으로나 경제-심리학적으로나 혹은 다양한 사회 집단이 지닌 정체성에 안에 합류하지 못하고 소외된 약자의 모습,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상처 입은 사람들이 치유되지 않은 채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모습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 상황 그대로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고 높은 곳에서 현실을 바라보며 좋은 세상을 기다리는 희망으로 서로를 격려하고 있다. 물고기들이 처한 그 불구의 상황이 유전적으로 이어진다고 해도 생명 자체는 소중하지만 이 사회가 그 상황을 방관하고, 차별의 시선으로 바라보거나 더 나아가 아예 무관심 하는 일련의 현상들을 꼬집고 있다. 시상의 핵심은 '이 강에서 기다리자'에 있다. 무엇을 기다리는 걸까? '좋은 세상'을 기다리는 것, '목마른 강'은 애타게 좋은 세상을 갈구하는 이 땅의 소외 현상에 대한 객관적 상관물이다. 강이 강으로서의 구실을 다 하려면 물이 흘러야 하고, 흐르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흘러야 하며 풍성하게 흘러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강은 있으되 물이 없다면 그 강은 목이 마를 수밖에 없다. 소외된 사람들끼리 어깨동무하는 세상을 넘어 '함께 어깨동무'하는 세상이 될 때 그 강에도 풍요의 강물이 흐르지 않겠는가?
시인들이 뽑는 좋은 시(김윤하 시인)
얼마나 사무쳤으면
켜켜이 바위로 굳었겠는가
모진 마음 다지고 다진
네 삶의 전부가 침묵이다
틈마다 혼신의 힘으로 짜낸 눈물로
잡초와 이끼를 키우며
산 그림자에 바짝 다가 선
너는 깎아지른 천 길 벼랑
굽어보면 두렵고 떨린다
너의 힘이다
늘 가벼운 언행으로 부끄러운 나는
네 모습을 닮아보려 애써도
돌아서면 여전히 말이 많다
간혹 너는 느닷없이 아픈 흔적을
돌이나 자갈로 몸 바꾸지만
어느새 아찔한 키로 우뚝 서서
커다란 귀를 여는 생활이다
네 앞에서 세상사 구시렁거리면
한결같이 듣기만 한다
그것이 곧 대답이라는 듯.
최호림 절벽 전문
며칠 전 방송에서 미국 켈리포니아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있는 암벽 ‘엘캐피탄’ 의 등정에 성공한 두 사람의 얘기를 들었다. 깎아지른 천 미터 가까운 거대한 암벽을 그것도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자유등반 루트인 ‘ 여명의 벽’ 을 손과 발의 힘만 가지고 엘캐피탄 정상에 올랐다는 것이다.
「절벽」을 읽으며 잠시 엘캐피탄이란 암벽을 떠 올렸다. 절벽은 서 있는 위치에 따라 상승과 하강이라는 서로 상반된 의미의 장소이며 도전정신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이기도 하다. 정신적 육체적 도전정신의 절벽 위에서 시인은 “ 천길 벼랑/굽어보면”두렵고 떨린다고 한다. 그것은 단순히 무서움이라는 공포심 때문이 아니라 “삶의 전부가 침묵” 이며 “잡초와 이끼” 를 키우는절벽의 힘을 알아채는 시인의 통찰력 때문이다. 사무쳐 바위로 굳어진 절벽. 그래서 시인은 그 굳건해 보이고 무서울 것 없는 절벽을 “닮아 보려고 애써” 본다. 우뚝 서서 듣는 것이 대답이라는 듯 절벽은 커다란 귀로 여전히 듣기만 한다. 그리고 가끔씩 “아픈 흔적” 을 돌이나 자갈로 드러낸다. 시인은 이렇게 높고 단단한 천길 벼랑의 섬세한 마음까지 읽어내고 있다. 이 시에는 “커다란 귀를 여는 생활” 을 하며 다부진 바위 닮아 “혼신으로 짜낸 눈물로” 시를 쓰고자 하는 삶과 시를 향한 열망이 잘 나타나 있다
*행복의 조건ㅡ임영석 (시, 시조 시인)
겨우내
장바구니 가득해도
배부르고 넉넉해지는
행복이다
세상에는
하루 세 끼를 못 먹는 사람들
얼마나 많은가
욕심을 버린다면
하루 벌어 하루 먹어도
행복이다
이 순간까지 살아 있어
행복이다
인간으로 태어난 생이
더욱 행복이다
행복은
그림자도 밝다
「행복의 무게」 전문
행복의 밑천은 마음이라 한다. 마음이 가난하면 불행하고 마음이 부자면 행복하다 하는데, 세상을 살며 그 행복의 주머니 하나 어디에 차고 다니는 지도 모르고 사는 사람이 많다. 행복의 주머니는 살아가는 마음 한가운데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눈뜨면 바라 보이는 그곳에 행복의 주머니가 있다는 것을 알면 불행한 생각을 그나마 적게 할 것이다. 행복해지려면 첫째 이해하야 한다.둘째 용서해야 한다. 셋째 배려를 해야 한다. 이해하고 용서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 사람은 행복의 근처에 갈 수 없다. 재산을 아무리 많이 가져도 행복하지 못하는 게 모두 이해와 용서 그리고 배려하는 마음을 갖지 못 하기 때문에 불행한 것이다. 최호림 시인의 행복의 무게는 사람이 사는 가장 기본적인 덕망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 할 때 '행복은 그림자도 밝다' 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란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세상을 살면서 어떤 사실을 확인 시켜주는 일들이 그 얼마나 어렵고 힘드는 지 세상을 그만큼 오래 살아보아야 알기 때문에 연륜으로 쌓인 지식의 말은 도덕과 인격의 나이테라 본다 .행복의 무게도 세월이 흐름이 꽃 피우는 향기라 믿어진다.
삶의 근본이 되는 시 (임영석 -시, 시조시인)
낮아지려면 목이 먼저 풀린다
꼿꼿하다 가도 밀가루 반죽처럼
아래로 굽어진다 덩달아
허리도 활처럼 휘어진다
눈도 아래로 내리 깔고
표정도 풀잎처럼 부드럽다
더 낮아짐의 모습은
바닥에 무릎 꿇는 것
기도하는 자세로
더 이상 내려앉을 수 없다
용서와 뉘우침과 애원할 때도
서로 사랑하고 존경할 때도
나보다 생을 먼저 마감한
사자死者.앞에서도
절을 할 때 꿇는 무릎은
꽃처럼 향기롭고 은은하다
목이 있어 나를 낮추고
무릎이 있어 겸손해지는 것이다
「머리 숙이다」 전문
최호림 시인의 시는 삶의 근본을 지키는 예禮가 배어 있다. 그만큼 시를 쓰는데 있어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정도를 내세우는 詩心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요즘 시인들의 시에서는 詩風을 중요하지 않는 경향이 많은데도 최호림 시인의 시는 그 시풍을 줄기차게 지켜내고 있다.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굽은 길은 굽어 있다. 라는 말이라도 해 주어야 그 길을 걷는 사람이 조심하고 바르게 걸을 수 있는데 그 말을 하는 것을 주저하는 세상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그만큼 개인주의 적인 사고와 간섭을 외면하고 있는 것을 사회적 현실로 치부하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지만, 그러나 모순된 사회적 예禮를 지켜내려는 노력이 최호림 시인의 시에서는 향나무 속의 향기처럼 짙게 우러나온다. '머리 숙이다'는 머리 숙이는 순간 모든 것이 관용 속에 베풀어진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삶의 질서는 내가 먼저 배려하고 수긍하는 마음에 있음을 엿보게 하는 시이다.
사람이 되었건 식물이 되었건 익을수록 속이 꽉 차면 고개를 숙인다고 했다. 최호림 시인의 시 머리 숙이다 에서 머리를 숙인다는 것은 복종이 아니다. 더 많은 것을 듣고 더 많은 것을 포용하기 위한 마음의 행동인 것이다. 요즘 겸손의 아름다움이 사라져가는 세상이다. 자신을 낮추면 낮출수록 업신여기고 깔보는 세상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시인은 왜 우리가 고개를 숙여야하는가를 말하고 있다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일은 내 몸을 낮추어 겸손을 지키는 일이라 했다. 겸손은 남을 존중하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태도를 말한다. 그러나 이 겸손을 스스로 지켜가며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 본다. 세상에는 수많은 꽃들이 있다 .그 꽃들이 모두 한 시기에 피지 않는다. 모두 제 꽃을 피우는 때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의 삶은 일생 동안 자신이 빛나기를 원한다. 내 얼굴을 씻기 위해서는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세수를 할 수 없다. 고개를 숙여야만 내 얼굴을 씻는다. 그러나 어떤 이는 사워를 하며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씻는다고 말한다. 내 몸을 다 벗지 않고는 내 몸의 흉을 가리지 않고는 고개를 숙여야 얼굴을 씻는다. 머리를 숙인다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씻는 겸손을 아름답게 닦아내는 일이다. 최호림 시인은 그 아름다움을 두 무릎에 가르쳐야 한다고 일갈하고 있다.
창작태도와 시인의 의식-채수영(시인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에
아직도 그 걸음이다
움켜쥐려 눈에 불을 켜는 세상에
아직도 그 걸음이다
남에게 뒤처질까 기를 쓰는 세상에
아직도 그 걸음이다
이름 하나 남기려 생을 거는 세상에
아직도 그 걸음이다
이 시대의 성자인가 바보인가
달팽이,
「 달팽이 」전문
나는 인간의 문화에 변화를 지금 두 가지 기(期)로 나눈다. 두 발로 걷기 시작한 인류가 4만 년의 도구 사용으로 오늘에 이르렀다면 21세기는 이른바 인공기계(AI)의 출현으로 새로운 기계 인류와 인간의 인류가 공존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뜻이다. 수술을 위시해서 지금 인간의 영역 34%를 기계가 정리하고 처리하는 시대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인간의 마인드와 기계 마인드가 교류하는 변화는 언젠가 기계가 인간의 문화를 모조리 장악하는 시대로 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종교 또한 변하고 학교는 없어지는 이른바 신원시사회의 도래를 예언한다. 물론 인간의 문명의 변화--18세기에 증기기관차로 시작하는 산업 혁명과 전기발명으로 다시 구축된 인간의 문화는 경천동지의 세상에서 변화하는 길을 열었고 다시 20세기에 컴퓨터의 출현으로 나타난 현란한 변화는 아날로그 문화를 창고로 몰아넣는 효과를 가져왔다. 하기 사 로봇기계가 인간과 대적해서 이기는 바둑의 승리는 무서운 예언을 가능하게 한다.
인간은 변화를 주도하지만 미물인 달팽이는 항상 무변화의 걸음이다. 물론 달팽이를 통해 서 인간의 변화를 꼬집는 시인의 시적 의도를 모를 바 아니지만 급변하는 변화의 물살에 자기를 지키는 사람도 없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질이 변해서는 안 되는 것은 진리이기 때문이다. 눈에 불을 켜는','뒤질세라 기를 쓰는'은 악착한 삶의 가파름에 염증을 느끼는 시인의 마음은 체온을 유지하고 그리워하는 아날로그 문화에 향수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느린 것은 느린 것이 아니고 빠른 것은 빠른 것이 아니라는 '거기'에 대한 애달픔이 심한 변화 앞에 멀미를 호소하는 일이기도 한 것 같다
시의 상상력 -정성수(시인. 문학평론가)
지구의 미친바람을 모두 달로 보내면
귀 밝은 달의 나무들이 여기저기 자라
몰려간 바람을 흔들어 잠재우지 않을까
평화를 깨뜨리는 테러의 무리를
거름 쓰레기로 달 에다 부려 놓으면
바람과 어울리는 잡초로 무성하지 않을까
아직은 나무가 없고 풀도 없으니
달에는 바람이 불지 않는다
달려가 매달릴 그림자도 없고
골목이 없고 길도 없으니
무슨 재미로 바람이 몰려다니겠는가
더구나 사랑하는 사람이나 친구
미운 사람 하나 없으니
꽃향기를 날리고 먼지를 뿌릴 일 없다
잘 익어 탐스러운 천 년의 과일
바람이 불지 않아 떨어지지 않고
아무도 따거나 훔쳐가지 않으니
지금도 여전히 달려 있는 달이다
「달에는 바람이 불지 않는다」전문
다분히 환상적인 시다. 시인의 상상력이 빚어낸 결과이다. 상상력은 두말할 것도 없이 시인들이 지닌 자산중의 하나이다. 어디 시 뿐인가, 인류에게 상상력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 지구 별 위에 지금과 같은 눈부신 문화나 문명의 꽃을 피우지 못했을 것이다. 이 시의 화자는 '지구의 미친바람을 모두 달로 보내고 싶어한다' '미친바람' 뿐만 아니라 '테러의 무리'도 모두 '거름 쓰레기'로 '달에다 부려놓'고 싶어 한다. 달에서 바람이 불지 않는 이유를 화자는 그곳에 '사랑하는 사람이나 친구' 미운 사람 하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시에서의 '바람은 긍정적 바람과 부정적 바람' 두 가지의 상징적 의미로 쓰이고 있다. 마지막으로 화자는 '잘 익어 탐스러운 천 년의 과일''여전히 달려 있는 달이다. 라고 상상력의 극적 반전의 기지를 발휘, '달'이 허공 속으로 추락하지 앉는 이유를 멋지게 표현한다.
그의 보따리에 무엇이 들었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한시도 손에서 놓지 않고
자나 깨나 꼭 껴안고 있어
다가서거나 눈길이라도 던지면
비수를 앞세운 표정으로 경계했다
세상에서 기댈 수 있고
자신을 지켜주는 것은
오직 보따리뿐이라고 믿는 게 분명했다
날이 갈수록 보따리가 커지고
보따리를 지키기 버거울 때 쯤
무거운 보따리에 깔려 그가 죽자
죽음을 애도하기보다는
너도나도 궁금했던 보따리에 매달렸다
얼마나 꽁꽁 묶었는지 풀 수가 없어
사방에서 잡아당겨 찢어야 했다
차곡차곡 쌓인 그의 일생이 드러났는데
심술과 고집과 밑 빠진 욕심이 푹 썩은
역한 냄새가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보따리 전문
시적 발상이 재미있고 개성적이다. 사람의 허망한 한 평생을 '보따리'에 비유한 것이 신선하다. '무거운 보따리에 깔려 그가 죽자/죽음을 애도하기 보다는/너도나도 궁금했던 보따리에 매달렸다' 지상의 한 사람이 사망했는데, 주변 사람들은 그의 '죽음'에 대한 '애도'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타인의 죽음에 대한 일종의 무관심, 차가운 세상인심에 대한 은근한 고발이다.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그 '보따리'에는 '그의 일생'이 들어있다.
그의 '보따리'를 풀자 '심술과 고집과 밑 빠진 욕심이 푹 썩은/역한 냄새가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심술과 고집과 밑 빠진 욕심'!이것이 보통 인간들의 삶의 정체, 그에 대한 신랄한 풍자이다.
*시의 대중성과 전문성을 융합할 미학적 장치-부서져 땅으로 귀화하는 찻잔의 희망적 미학
노 창 수(시, 시조시인. 문학비평가. 문학박사)
요즘 문학의 매체들은 대체로 양면성을 보이는 듯하다. 양면성이란 선을 명확하게 긋는 것은 어렵겠으나, 대체로 대중성에 기반을 둔 일반 시류(詩類),전문성을 견지하는 특정 시류들이다. 첫째, 대중성 시류란 '나도 감'' 너도 밤'의 입장이다. 비유나 상징 미학등을 소흘히 한, 어쩌면 행과 연만 바꾸었을 뿐 형태와 내용면에서 가벼운 수필문 같은 서정, 기행서정, 고향서정, 원초적 감상(정)문, 군자연하는 모럴 시 등을 양산해 내는 시인들의 작품으로 지면이 꽉 채어져 있다. 이들은 시적 긴장이 떨어진 다량 작품으로 시 풍년을 구가하기도 한다. 평생교육 창작 반 출신들이 대체로 무대에 올라 선 듯하다. 소위 신인 장사를 하는 삼류 이하 문예지에 돈을 주고 대거 등단함으로써 '너도나도 시인입네' 행세를 하는 수가 있다. 시를 범람 시키는 한 아마추어 같은 주류이지만 일견 문단 잔치를 풍성하게 조성하는 이점도 있다. 둘째, 시를 함부로 넘보지 못할 만큼 난해하게 쓰는 이른바 '전문가입네'하여 스스로 프로급으로 분류한다. 삼류를 깔보는 차별화, 그러나 발표된 시를 보면 시인 자신도 잘 이해하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독자 이해와는 멀어져 있다. 이들은 대학의 문창과 출신이라는 비호 아래 전위적(前衛的)문예지나 특정 메이저급 신춘문예 매체를 통해 등단된 자칭 젊은 시인군의 일단으로 2000년대에 들어 부쩍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 시인군은 대중적이고 아마추어적 시인과는 구별해야 한다는 의도성도 갖고 있다. 그들은 전통적 형식과 내용을 거부한 반시, 췌설, 성도착미학, 관념주의, 패쇄적 자의식, 정신 이상 징후 기록, 규범의 파괴, 체제의 거부, 각주 남발 등을 전위시를 배설해 놓기도 한다. 이때 현대성, 나태성, 방임성, 자동기술성이란 그들에게 편리한 시적 장치이자 독자로부터 즐거운 도피처가 된다. 시를 누가 읽어 주건 읽어 주지 않건 관계하지 않는 소신주의도 배태되어 있다. 시의 독자가 적다는 인식에도 괘념치 않는 경향마저 있는 것 같다. -생략-
이 마당에서 대중화와 전문화 이 양자를 함께 운위할 시는 없는가에 대한 질문이 남는다. 그것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대상에 대한 탐미 즉 주제의 미(학)적 성취에 있다고 감히 말한다. 시가 노리는 바 미적으로 성숙된 작품을 희구한다면 시어를 유의미하게 선택, 재편성하고 전달체계에 독창성을 발현한다는 요구로 돌아가게 된다. 시인이 사물에 청구하는 품의요구서가 탐미의 기준에 과연 적합한 영수증을 써 줄 것인지는 논의의 고구(考究)를 필요로 하는 점에서 그렇다. 고(考)를 거듭하다보면 시인이 바라는 서술의 청구서나 묘사의 영수증엔 자학적 언어가 기록 될 듯하다. 미(학)적 성취에 대한 시인의 자학적 태도는 대상을 깎고 다듬고 날카롭게 빚어내거나 벼리어 종내는 시인과 대상이 함께 사디즘으로 융합, 자신과 독자의 가슴을 겨냥하여 함께 칼을 내미는 일이다. 그런 미학적 성취 때문에 더욱 치열한 자학성(自虐性)이 수반 되는데 그것은 좋은 시를 위한 복수극의(復讐劇)의 필요불가결한 일이기도 하다. 이른바 '시인은 작품으로 말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와 같은 맥락이다. 그런 관점에서 이 총평에의 대상은 미학의 중심을 겨누면서, 시의 대중성과 전문성 양측에서 읽히는 작품을 고를 수밖에 없었다. -생략-
주인이 나를 애지중지 하는 것은 입에 혀 같은 봉사를 바라서다
나를 물 가득 먹여놓고 하나 뿐인 귀를 잡고 헌신을 요구 할 때는
출렁이는 파도를 온몸으로 안는다 찢어질듯 아픈 귀를 쓰다듬을
새 없이 부드러운 입술에 가장자리를 내어주는 이때가 가장 긴장
되는 순간 다시 접시에 착지하기 까지 허공에 떠 있기도 한다 이
런 나를 보다 못한 고양이가 도와준다고 한 것이 실수인척 주인의
팔꿈치를 툭 치고 가자 나를 놓친 주인의 난처한 손, 바닥에 곤두
박질 쳐 산산이 부셔지는 아픔이 전신을 훑고 갔지만 몇 가닥 숨은
뿌리가 들어났을 뿐이다 내게도 뿌리가 있어 땅으로 돌아가면 생
명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희망이 생겼다 몹시 아까
워 하는 주인과는 달리 이제 더는 막막하지 않게 되었다
「찻잔의 뿌리」전문
순간적으로 깨어지는 찻잔을 생태적 땅에 귀환시키는 미학으로 잠재된 그릇의 생명성을 부활시킨다. 차를 마시는 "부드러운 입술에 가장자리를 내어주는 시간을 지나 잠시 팔에 들려'허공에 떠 있"을 때 "팔꿈치를 툭 치고"가는 고양이의 도움으로 찻잔은 산산이 부서진다. 아픔과 함께 도기(陶器)의 숨은 뿌리는 여실히 드러나고 만다. 그러나 그릇은 그 뿌리가 있어 땅으로 돌아가 생명을 키울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된다. 찻잔의 전환점이 부서지는 순간 불안을 떨치고 희망적인 믿음을 주는 데 이 시의 미학적 초점이 있다. 존재의 파괴가 비극이 아닌 새 세계로 나아감을 적시함에서 공감도 얻는 작품이다.
사유思惟의 내적 충만과 상상력의 확장/엄창섭 시인(문학 박사. 국문학자. 관동대 명예교수, 국제펜클럽한국본부 고문)
그림자가 허공의 층계를 올라
꿈의 통로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았다
그때 어디선가 휘파람새가 울었다
대낮을 송두리째 저당 잡은 강물이
수심을 환하게 밝히느라 햇살의 발자국을
미처 챙기지 못해 어리둥절 하는 사이
바람은 한 옥타브 높게 숲마다
악보를 그리고 가면 잎새들이 그걸 따라
음표만큼 반짝이며 뛰어다니곤 했다
그때 어디선가 휘파람새가 울었다
첫사랑을 떠나보낸 간이역에서
기적소리 삼킨 산자락처럼
그녀의 향기를 들꽃에서 줍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휘파람새가 울었다
시가 어려우면 산문을 읽고
산문이 그리우면 시를 쓰고
낡은 책갈피에서 기어 나온 개미 떼의
긴 행렬을 따라 한나절을 죽이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휘파람새가 울었다
「 휘파람새가 울었다」전문
흙이면 아무데나 퍼질러 앉고
물이라면 막걸리 같아도 마시는
풀은 귀족이 못 된다
흙에 뿌리내려도 흙빛을 닮지 않고
속살까지 푸른 것이 자랑이지만
손에 손 잡고 정으로 어울려 사는
풀밭이 밝히는 세상은
얼마나 눈부시고 아름다운가
아무리 거친 땅도 불도저로 파헤치고
시멘트로 숨통을 막지만 않으면
한두 해 지나면 부드럽게 바꾸어 놓는다
귀족이 드나드는 대리석 바닥에
얼씬도 못하는 풀이지만
골프장을 누비던 발길들이
가장 가까운 이웃으로 찾아와
풀의 세상을 약속하며 안심하라고
덥석덥석 손을 잡을 때면
구둣발에 허리가 꺾여도 풀은
끝내 아프다 못하고 반겨 맞는다
「풀」전문
파스(Octavio Pazz)는 “종교의 문제는 신이 아니라 시간이다.”라 고 제시하며 미로의 출구로 통하는 길과 출구 밖의 세계는 시간의 직선적 개념의 산물임을 천명하였듯이 그 자신의 시편 -어디선가 휘파람새가 울었다>와 -풀>을 발표하고 있는 최호림 시인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잔잔한 어조와 섬세한 감수성으로 기독교에 깊이 침잠沈潛하고 있는 그의 견고한 고독의 시편들은 생명외경의 창조자와의 운명적인 만남에서 비롯되는 까닭에 신으로부터 허락된 나날이 정신적으로 행복한 그 자신은 기도와 시 쓰기에 열중하다보면 항시 새벽과 만나는 필연성을 지닌다.
이 같은 현상은 하늘을 우러러 두 팔 벌려 기도하는 나무처럼 그의 시적 대상은 신에게 드려지는 ‘절박한 영혼의 기도’로 해석된다. 필립 라아킨이 “시란 맑은 정신의 문제, 즉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으로 지적하였듯이, “첫사랑을 떠나보낸 간이역에서/ 기적소리 삼킨 산자락처럼/ 그녀의 향기를 들꽃에서 줍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휘파람새가 울었다 -어디선가 휘파람새가 울었다)”에서와 같이 화자는 가끔 시적 상상력을 확장하여 놀랍게도 ‘그림자가 허공의 층계를 올라 꿈의 통로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짐짓 흘려 보다가도 “풀의 세상을 약속하며 안심하라고/ 덥석덥석 풀의 손을 잡을 때면/ 구둣발에 허리가 꺾여도 풀은/ 끝내 아프다 못하고 반겨 웃는다 -풀)”라는 지극히 섬세한 서정의 발현으로 전통적 소재를 보편적 정서와 소우주의 표징으로 형상화 시켜 한층 중후 감을 신선하게 안겨주는 「최호림」 시인의 생산적 결과물은 담백한 시격으로 처리되기에 그의 시사詩史를 빛나는 성채城砦로 정리하여도 결코 거부감이나 지나침이 따르지 않는다.
죽음의 애도방식 -죽음을 마주보다/박지영(시인.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최호림 시인은 인간에게 다가오는 거역할 수없는 죽음과 그에 따른 비애를 담담히 그려냈다.
수척한 그림자가 하나같이 닮았다
꽃 진 대궁의 노을빛이 닮았고
뒷모습의 쓸쓸함이 닮았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발걸음이 닮았다
구성진 가락으로 뽑는 노래가 닮았고
굽이굽이 바람에 부대끼는 외로움이 닮았다
사랑과 미움이 마주치는 눈빛이
풍기는 냄새가 닮았다
행복한 표정도 불행의 흔적도 형제처럼 닮았다
먹고 마시고 춤추는 것
나사 풀린 말솜씨가 닮았다
닮지 않고는 절대로
저 문으로 들어 갈 수가 없다
지름길로 숨 가쁘게 왔든 넓은 길로 넉넉하게 왔든
또는 좁은 길로 거칠게 왔든
통로는 하나뿐이다
마지막 순간 들숨이 가장 닮았다
「귀로」 전문
이 시에는 늙음에서 오는 비애와 슬픔이 진하게 배어있다. 사람은 다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쌍둥이도 다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닮은 구석이 있다고 시인은 말한다. 이 시에는 노년의 눈으로 바라보는 삶이 잘 드러나 있다. 젊어서는 제가 잘났다고 어깨를 으쓱거리기도 하지만 인생의 노년기를 맞으면 모든 게 같아진다는 말이 있다. 학력 평준화, 외모 평준화, 경제력 평준화의 시기가 온다고 한다. 배웠건 못 배웠건, 잘났건 못났건, 돈이 있건 없건 마찬가지라는 거다. 제목도 귀로이다. 귀로의 뜻은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간다는 의미이다. 태아의 모습이 비슷하듯이 늙어서 갈 때가 되면 같은 모습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시 인은 수척한 그림자, 노을빛, 뒷모습의 쓸쓸함, 발걸음, 구성진 노래, 외로움에 떠는 눈빛과 풍기는 냄새까지도 닮았다고 한다. 행복해 하는 표정도, 불행한 모습도 다 닮았고 먹고 마시고 춤추는 것과 나사 풀린 말솜씨까지도 닮았다고 한다. 시인은 이렇게 닮아야만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있다고 한다.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아주 마음이 가난해져야 가는 문이다. 그 통로는 같이 갈 수도 없고 혼자만이 가야 하는 문이다. 그 문을 통과하려면 이렇게 닮아져야 갈 수 있는 것이다. 기억까지도 다 내려놓고 들어가야 하는 문이다. 그 문턱을 넘어 갈 때의 마지막 깔딱 숨까지 모두가 닮았다. 인간이 늙어 저 세상으로 건너 갈 때 누구나 겪게 되는 과정들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야만 저 문을 지나 저 세상으로 갈 수 있다. 이런 과정을 겪어 보지도 못하고 태어나자마자 문을 지나가야 하는 운명도 있다.
특별한 느낌의 시/ 김 종 (문학박사. 시인)
이 겨울 들어
화초들 줄줄이 버려진다
생활이 한층 더 어려워졌는지
어제는 고무나무
오늘은 십 년생 벤자민
그리고 이미 버려져
생명을 놓고 있는 관음죽 까지
하나같이 비틀거린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눈길 던지면
울음도 말라버린 몸이
애처롭게 안겨온다
버리는 손 오죽했으랴
아무도 데려가지 않은 체
그 아이들의 하늘이 지금쯤
노을을 적시며 떨고 있겠다
「버려지는 아이들」 전문
버려지는 아이들은 느낌이 특별한 작품이다. 그렇잖아도 필자는 평소 버려지는 것들의 문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왔었다. 이것이 최호림 시인에 의해 한 편의 시가 되었다. 시대가 헤픈 탓인지 도대체 소중한 것이 없다. 세상 인심에 따라 모두들 기회 잡기와 점수 따기는 능한데 꽃다발이나 화환등 생명을 띤 것들이 무참히 꺾이고 일회용으로 내팽개처지고 있다. 이처럼 마구잡이로 버려지는 것들뿐인 세상에서 막장으로 아이들까지 버려지고 있다. 작품에서는 '버리는 손 오죽했으랴' 라 했고 '아무도 데려가지 않은 채'라는 단어를 달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데 심각성을 더한다. 이 작품의 마지막에 '그 아이들의 하늘이 지금 쯤 /노을을 적시며 떨고 있겠다'는 표현이 독자의 가슴에 한결 처연하게 젖어 내린다.
노년의 한 살이 / 이돈배(시인, 문학평론가)
공원 벤치에
누가 두고 갔는지
아무도 주워가지 않는
보따리 하나 놓여 있다
무엇이 들었는지
허술하게 묶여 있어
소중해 보이지 않지만
분명 버린 것은 아닌데
종일 기다려도
주인은 나타나지 않고
땅거미가 지도록 후줄근히
그대로 앉아 있다
「아버지1」 전문
" 최호림은 아무도 주워가지 않는/보따리"에서 한웅큼 인생에 대한 노년의 한 살이를 읽는다. 각처에서 모여든 종묘공원 벤치에서 해질 때까지 "허술하게 묶여"있는 두고 온 세월에 누군가를 기다리는 「아버지」를 연상한다. "분명 버린 것은 아닌데"도 그들에게 드리워진 "땅거미가 지도록 후줄근히" 간직한 삶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지"화자는 궁금하다. 시인은 우리가 겪은 전쟁의 참화에서 분단국의 현실을 형상화하기도 하고 시작품 「아버지」를 통해 노인들의 경제적 사회적 배려에서 소외되는 현실을 인지한다. 한편에는 이념논리와 보혁의 논쟁이 한창이고 다른 편에는 아랑곳없는 허공을 응시하는 허술한 의자에 앉아 있다. 공터에는 장기와 바둑의 진법陣法론에 차車포包로 조영造營하는 초楚한漢의 영역을 지키며 다스린다. 마馬상象위에서 내달리는 용맹장수들의 전략과 사士관의 역할에서 병兵졸卒의 게릴라 병법은 물러서고 나아갈 줄 아는 진퇴의 지혜를 노래한다.
아름다운 지구와 자연을 위한 시 /이혜선 (시인,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지구의 가슴에 살기 위해
나무는 새의 날개를 접고
한자리에 뿌리를 내린 새다
새는 뿌리를 포기한 나무
온종일 날아도 머물 곳 없어
지상에 날아들어 나무에 기댄다
애초 나무는 우주를 떠돌던
새의 실핏줄을 한 생명체였지만
우주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어
헤매 다니다가 만난 땅이
그대로 품을 열어 준 것이다
그래서 뿌리가 된 생명이다
생명도 안정될 때가 아름답다
나무가 깃털을 달면 녹색 근위병
지구를 지키는 숲은 사라지고
사막이 아프게 펼쳐질 것이기에
새는 하늘을 나무는 땅을 지키며
하늘과 땅을 동시에 살기에는
새는 나무를 대신하여 날고
나무는 새를 대신하여 머무는
서로 약속을 지키고 있다
「약속」전문
최호림 시인의「약속」은 지구를 지키는 파수꾼으로서의 ‘나무와 새’의 ‘약속’을 노래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둘의 성격을 서로 바꾸어, 서로가 약속을 지키며 지구라는 푸른숲 (에코토피아:Ecotopia)의 지킴이로 살아가는 아름다운 이야기로 읽는 이들을 상상력의 세계로 인도하여 새로운 꿈을 꾸게 하는 점이다.
위의 시에서는 ‘지구의 가슴에 살기 위해’ 새의 날개를 접고 뿌리를 내린 ‘나무’와, 뿌리를 포기하고 푸른 하늘을 나르다가 지상으로 날아들어 나무에 기대는 ‘새’가 등장한다. 우주를 떠돌던 ‘실핏줄 같은 생명체’가 우주 어디에도 따뜻하게 머물 곳이 없어 한없이 헤매다가 만난 땅이 ‘그대로 품을 열어’주어 안정된 생명을 누리는 나무의 ‘뿌리’가 되었다. 즉 새와 나무로 제유提喩되는 ‘뭍 생명’들을 위한 ‘따뜻하고 안정된 품’이 바로 지구라는 의미에서 지구는 생태적 이상향을 뜻하는 에코토피아라고 할 수 있다.
나무와 새가 서로 자기의 꿈을 접지 않고 실현시키면서, 날개와 깃털을 달고 날아오르는 같은 꿈을 공유하면서 ‘약속’을 지켜내어 ‘지구를 지키는 근위병’인 ‘녹색 숲’이 되고 거기 깃들인 새가 되어 서로 돕고 서로 의지처가 되어 안식을 누리는 아름다운 사회를 이루어가는 것이다. 이 지구상에 생명을 받고 살아가는 풀과 나무와 새와 곤충들, 그리고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들 중 어느 누구도 상대방의 영역을 침범하거나 훼손시키지 않고 서로가 자기의 꿈을 펼쳐가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안식처가 되고 의지처가 되어 약속을 지키며 살아가는 평화로운 삶의 모델을 제시해주는 작품이다. 자연을 파괴하고 환경을 오염시키며 오로지 인간중심주의의 이기적인 생각으로만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에코토피아가 추구하는 참모습, 자연친화적인 삶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한상훈(문학평론가)
초저녁잠에 빠졌다가
깨어나니 자정을 지나고 있다
그새 초승달은 떴다가
눈썹에 스며들었는가
두 눈이 보름달로 밝다
가로등 불빛이 어이 알고 달려와
함께 가자고 창을 두드리고
이마를 적시는 적막이 차디찬데
떠나간 여인의 뒷모습 같은
지난 세월이 새삼 아득히 그립다
열 손가락에 겨우 걸리는
친구들은 안녕하신가
분꽃 같은 우정을 다져도 본다
잠은 아니 오고, 이 밤
주마등처럼 지나간 서러운 나이가
잦은 헛기침처럼 아프다
한잔 술에 시름을 녹일 수 있다면
잡히지 않는 시의 꼬리를 잡고
산사의 종소리를 기다려나 볼까
최호림의 「잠은 아니오고」 전문
요즘같이 코로나로 집콕 생활이 일상화 되면서, 우울해지거나 잠 못 드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일조량이 적은 겨울엔 더욱 그렇다. 수면을 유도하는 생체 호르몬인 멜라토닌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북유럽 사람들에게서 불면증 환자가 많은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의사들의 불면증은 병이 아니라고 하지만 , 잠을 못 이루게 되면 사람들은 극도로 피곤해진다.
이 시의 화자는 초저녁에 잠깐 잠들었는데, 깨어보니 자정이 지난 것이다. 피곤했는지, 몇 시간, 정신없이 잠이 들어버린 것. 그러니 "그새 초승달로 떴다가/눈썹에 스며들었는가/두 눈이 보름달로 밝다" 처럼 눈이 말똥 말똥지고, 전혀 잠이 오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이 구절에서 '초승달'이나 '보름달'의 비유적 표현은 좀 엉뚱스럽지만, 무척 재치 있는 표현이다. 즉, 같은 뜻이라도 참신한 언어구사력에 독자들은 시적 재미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시를 읽는 묘미가 거기에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러나 시적 감각은 "가로등 불빛" 이 달려와서 "함께 가자고 창을 두드리고/이마를 적시는 적막이" 차디차다는 데서, 절정을 이룬다. 시적 화자는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되니, 지나간 세월이 주마등처럼 떠오르고, 그 흘러간 세월이 새삼 그리워진다. 그러다보니, 나와 암울한 시대를 함깨 해온 "열 손가락에 겨우 걸리는"친구들은 요즘 같은 세상에, 잘 지내고 있는지, 새삼 떠오르기도 한다.
청춘의 방황기를 지나, 중년의 바쁜 시절도 순식간에 가버린 후, 어느덧, 노년에 접어들었는데, 그들을 자주 만나지도 못하는 터에, 친구들은 별 탈 없이 잘 지내는지, 무척 궁금한 것이다. 몸을 뒤척이며 이런저런 잡념이 드는 가운데, 근심만 늘어 가는데, 시름 잊으려고 술 한 잔도 생각나지만, 이왕 잠 못 이룰 바엔, 꼬리를 무는 쓸데없는 생각에 밤새지 말고, 시인은, 멋진 시나 한편 떠올랐으면, 간절한 희망을 가져보는 것이다. 일상에서 그냥 넘겨 버리게 될 수 있는 작은 에피소드를 예리하게 포착하여, 시공간에 쉽게 재미있게 펼쳐나갔다. 독자들의 미소를 머금게 하며, 따뜻한 인간미가 작품의 바탕에 깔려 있다.
원로와 중진,신예의 시적 풍경-(조명제/시인, 문학평론가)
더러움을 넘어서서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머리들이 되겠다고
다투어 이간질 모함을 일삼는
입만 열면 거짓말 뿐인데도
백성들의 이목구비가 건재하다니
허유와 소부가 아니더라도
맹고불이 없는*
얼마나 살기 좋은 세상인가?
*조선 세종 때 정승 맹사성
최호림의 「이시대를 살다」 부분
고대 중국 요나라의 허유(許由)와 소부(巢父)는 세속의 명리(名利)를 탐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았던 고결한 선비였다. 요(堯)는순(舜)과 함께 이상정치의 상징으로 일컬어지는 성군인데, 자신의 후임으로 당시 최고의 명망에 오른 허유에게 왕위를 선양(禪讓)하려 하자, 허유는 즉시 거부하고 기산(箕山)이라는 곳으로 숨어들어 갔다. 이후에도 재차 요 임금의 선양 제의가 들어오자 허유는 다시 그 소리조차 듣고 싶지 않아 기산의 영천(潁川)에 귀를 씻고 있었다. 소를 몰고 나와 물을 먹이던 친구 소부가 귀를 씻는 허유의 사유를 듣고서는, 허유가 자신의 몸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어 스스로 명예를 구한 것이나 마찬가지니, 내 소의 입만 더럽혔다며 소를 끌고 상류로 더 올라가서 소에게 물을 먹였다는 고담(古談)은 두루 아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고결한 은사(隱士)의정신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정치권력이나 정치판이라고 하는 것은 온갖 몰염치와 탐욕으로 얼룩져 어차피 더러운 세계이며, 참된 선비는 결코 근접할 곳이 못 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것도 가장 태평성대했다는 요 임금 시대의 이야기이고 보면 더욱 그러하다. 최호림 시인은 요나라의 고사(高士)허유와 소부가 지금 우리나라의 사람으로 태어나 살고 있다면, 결코 귀를 씻고, 소의 입이 더러워졌다며 소를 상류로 끌고 가서 물을 먹이는 일은 아예 없었을 것이라는 날카로운 풍자를 하고 있다. 썩은 냄새가 진동하고, 입만 열면 거짓말이요 모함과 이간질뿐인 정치꾼 행태에도 국민들의 이목구비가 멀쩡하다니, 소부 허유, 조선의 청백리의 상징인 고불 맹사성이 없는, 얼마나 살기 좋은 세상이냐는 것이다. 패륜적 정치를 거부할 선비, 스스로 콧대 높은 선비, 온몸으로 비판하고 저항할 선비 하나 없는, 참담한 오늘의 현실에 대한 시니컬한 풍자가 극한의 팬덤 정치로 몰락해 가는 시국을 생각하게 한다.(최호림 부분 발췌)
우리 시대의 정곡을 찌르는 도전-(정명 시인) 동물은 수치를 모르기에벌거벗어도 부끄럽지 않습니다인간만이 수치를 알아부끄러운 짓은 몰래 숨어서 합니다그런데 근래 와서부터동물을 닮아가는 인간이부쩍 늘어나고 있습니다철면피에다 입을 열면 거짓말뿐이라서동물도 피해다닌다 합니다인간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최호림의 「신 인간 시대」 전문 - <다시올文學> 2023 봄호 - 구구하지 않다. 인간이 그렇다는 사실만 담백하게 전달한다.문학의 기교가 '솔직 담백'을 해치는 것은 결코 순기능이 아니다.그런 의미에서, '新인간'의 어느 단면에 대한 고백은 가장 적나라하게 우리 시대의 정곡을 무찌르는 도전 같다.'아하, 그럴 수도 있지' '그래서 뭐?' - 와 같은 느낌이 드는 수도있을 것이다.그게 바로 病이다. 송곳으로 찔러도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는,이런 증상이 동반되는 병이다.그러면 죽어가게 된다. 그걸 안타까워하는 게 바로 詩人과 의사의특질일 것이다.
사랑과 행복의 시학- 한상훈(문학평론가)
시인이란 이름으로 어언 마흔 해
낮은 지명도로 여기까지 왔으니
보란 듯이 내세울 이력이 없네
가지런히 엮은 굴비가 부러운
고등어, 꽁치, 명태, 갈치, 양미리...
두서없이 섞어 엮듯이
스토리 없는 시를 써 왔네
경험의 폭이 좁아 빈곤한 주제와
어떤 명제도 없이 전전긍긍
개성 없는 단편적인 시만 써 왔네
삶의 상처와 고통에서 승화된 반성으로
보편적 의미도 부여하지 못하고
인식과 정서, 미학적 가치도 결여된
즉흥적이고 깨달음 하나 얻지 못한
강변의 자갈 같은 시만 써 왔네
스승이나 친구도 없이 혼자서
지름길도 모르고 험한 밤길을
무작정 걸어 걸어서 왔네
가만히 들여다보면 빈손이네
그래도 이룬 것 없어
계속 꿈꾸며 쓸 수 있다는 것이
마냥 행복하네
「시인의 행복」 전문
최호림 시인은 1970년대 후반 「현대문학」과 「시문학」의 추천을 통해 등단하신 분이다. 그 시절의 순수문예지도 손꼽을 정도로 적었고, 등단하기 위해선일상적 삶의 욕망을 거의 포기하고, 끊임없는 습작과정을 거쳐야했기에 중도에서 포기했던 문학도들이 많았던 시기이다. 즉 지금처럼 시인으로 등단할 수 있는 방법이 가깝고 넓었던 시기가 아닌 것이다.
이 시를 읽고 나서,지난 시절 문학과 관련된 나의 추억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1980년대 초반 신춘문예에 두어 번 떨어지고 나서, 「현대문학」에 두 편의 원고를 보냈는데 한동안 소식이 없다가 1986년도 후반에 「현대문학」편집장으로 계시던 감태준 시인의 연락을 받았다.「현대소설에 투영된 안개 이미지」가 추천됐다는 말을 듣고 나서, 그 순간 놀랍고 설던 감정이 지금도 가슴 깊이 화석처럼 남아 있다. 더구나 대학과 문단의 거목이신 김윤식 교수가 추천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한동안 어덜떨하기만 했다. 하지만 추천의 영광도 잠시였고, 바쁜 교직생활로 인해 20년 가까이 평론을 못 쓰고 있다가 50대 초반에 들어서야 시간의 여유를 내어 가까스로 2권의 평론집을 연속적으로 낸 후, 교직 정년 몇 년을 앞두고 명예퇴직을 했다. 그러고 나서 새로운 각오로 등단을 하고 출발해야겠다는 생각에, 2013년 겨울 「문학미디어」에서 신인상을 받으면서 젊은 날의 글쓰기를 다시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분야는 다르지만, 최호림 시인의 "삶의 상처와 고통에서 승화된 반성으로/보편적 의미도 부여하지 못하고/인식과 정서, 미학적 가치가 결여된/즉흥적이고 깨달음 하나 얻지 못한 "내면적 자의식이 전혀 낯설지 않게 나에게 다가온다. 이 시는 직설적으로 토로해낸 시인의 진술로 말미암아 비록 미학적인 시적 수사를 별로 갖추고 있지 않지만, 고단하게 살아 온 시인의 진솔하고도 고백적인 말투에 오히려 독자들에게 친밀하게 다가가는 장점이 있다. "시인이란 이름으로 어언 마흔 해/낮은 지명도로 여기까지 왔으니/보란 듯이 내세울 이력이 없네" 란 구절은 자칫 자조적인 느낌을 주고 있으나 시인으로 살아온 겸손의 표현일 것이다. 어쩌면 시종 자신을 낮추어 드러내는 화자의 어조를 통해 시인은 야만과 교만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일침을 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 인으로 40년 꿋꿋하게 살아온 그 삶의 과정 속에는" 스승이나 친구도 없이 혼자서/ 지름길을 모르고 험한 밤길을/무작정 걸어 걸어서 왔네/가만히 들여다보면 빈손이네"에서 드러나듯이 거친 세파를 가로질러 온 삶의 쓸쓸함과 고달픔이 묻어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계속 꿈꾸며 쓸 수 있다는 것이/마냥 행복하네" 라는 시인의 언술은 무엇을 의미할까, 시인의 낙천적 태도일 수도 있지만, 시가 지닌 원천적인 매혹에 있는 것이다. 그 매혹은 젊은 날의 인생보다도 노년에 접어들어 더욱 보석처럼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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