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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14일 주일 메시지 (예비 묵상과 연구)
시리즈 주제: 에베소서 강해
첫 번째 설교
제목: 에베소 교회에게
에베소서 1장
본문 연구
1~2절
하나님의 뜻으로 된 사도
사도라는 직분을 바울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는 확신을 표현한다. 사실 바울에게 사도권은 언제나 아킬레스건처럼 따라다니는 족쇄와 같은 것이었다. 그는 예수님을 육신으로 알지 못했다. 그는 예수님의 열두 사도단에 속하지 못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난 것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다른 체포조와 함께 경험한 일이다. 그것도 그 음성을 직접 들은 것은 바울 자신이며 그와 동행한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있을 따름이었다(행 9:7). 즉, 그들은 바울이 겪은 일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몰랐다. 그러면 이제 바울이 사도라는 것을 입증할 사람은 누구인가? 그는 졸업장이 있는 것도 아니요, 사도들의 천거를 받은 맛디아 같은 사람은 더욱 아니다. 도리어 그는 견제의 대상이 되었다. 오직 그가 사도라는 직분을 가지고 활동한 까닭은 자신이 직접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으며 그 임무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확증해 주시는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이로써 바울은 자신이 사도된 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았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면 사도라는 직분이 하나님의 뜻으로 된 것임을 바울이 확신하게 된 것과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게 된 것은 유사한 데가 있다. 베드로가 말한 바,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8)라고 한 것처럼, 우리들도 사도 바울도 사실은 예수를 베드로처럼 육신의 눈으로 뵌 것은 아니다. 바울도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때 그의 눈이 멀었다. 그리고 그가 받은 사명을 확신하기 위해서 그는 아라비아 사막에 들어가 하나님의 뜻을 연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를 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뜻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도 그런 것 아닌가? 우리는 그리스도를 육신으로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며 믿고 말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기뻐한다. 그 까닭은 주님이 하신 일을 알고, 주님이 우리를 어찌 생각하시는지를 알며, 나아가 주님이 어떤 계획 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하시려고 부르셨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만약에 우리에게 이런 깨달음이나 지식이 없다면 우리는 금방 시들어버리는 풀과 같이 무기력한 신앙생활을 할 것이다. 새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그루터기와 같은 우람한 나무로 성장하려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확신해야 한다.
바울이 반대하는 사람들로부터 들은 말은 다음과 같다:
l “네가 사도냐? 너는 정식 사도가 아니다!”(고전 9장)
l “너는 미쳤다! 네가 너무 많이 알고 있어서 그 지식이 너를 미치게 하였다!”(행 26:24-베스도 총독)
l “이 자는 전염병 같은 자다! 이 자는 유대인들을 어지럽게 하는 자다! 이 자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다!” (행 24:5)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가 된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한 바에 대하여 끊임없는 공격을 받았다. 마치 옥에 갇힌 세례 요한이 그렇게 갈등할 수밖에 없어서 괴로워했던 것처럼, 바울은 동족들과 동료 그리스도인들과의 시기심과 미움을 받았다. 그의 직분에 대한 정체성과 그가 추구하고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혹과 질문 그리고 반대의 말을 던지는 사람들과 그가 가는 곳마다 부딪쳤고 그는 그것에 대해서 해명을 해야 했다. 그런 과정이 신앙의 길이다. 누군가 우리에게 말할 것이다. “네가 하나님을 보았느냐?” 그 때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할까? “너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느냐? 그 근거는 무엇이냐? 너는 미친 것 아니냐?” 이런 질문 앞에서 우리는 걸어가야 한다. 그 질문은 세례 요한의 경우처럼 우리의 내면에서부터 솟아나는 의심의 목소리로 들리며, 바울의 경우처럼 외부로부터 공격적인 목소리의 형태로 들려온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에 대하여 대답할 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것을 알아가는 과정이 바로 우리가 걸어가는 구도자의 길이다.
그리고 마침내 바울은 감옥에 갇혀서 이렇게 편지를 시작한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사도가 된 나 바울이 편지하노라!” 그는 감옥의 세례 요한과는 다르게 글을 쓴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을 예수께 보내어 자신의 의심을 풀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전갈을 보내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들을 보고 들은 대로 전하라고 일러주신다. 내가 하는 일을 보면 내가 누구인지 알 것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바울은 감옥에 갇혀서 교회들이 돌려볼 수 있도록 글을 쓴다. 그것은 믿음의 글이요, 그것은 교회들을 세우기 위한 진리의 반석이며 기둥이 될 것이다. 이처럼 확고한 믿음은 옥에 갇혔어도, 환경이 열악하여도 그것을 뛰어넘고 그것에 구애(拘碍)되지 않는다. 그런 믿음을 위하여 주님이 우리를 오늘도 다메섹으로 인도하시며 아라비아 사막으로 인도하시며, 때로는 고향 마을에서 기다리게도 하신다. 그리고 때가 되면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실 것이다.
무엇이 목사를 목사가 되게 하며, 무엇이 장로를 장로 되게 하며, 무엇이 권사를 권사 되게 하며, 무엇이 집사를 집사 되게 하며, 무엇이 성도를 성도 되게 하는가? 목사의 가운과 목사 안수패가 목사를 목사 되게 하는가? 사람들 앞에는 그럴지 모르나 그가 하나님 앞에서 분명한 소임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의 직분에 자긍심이나 확신은 없을 것이다. 우리의 정체성은 옷이나 임명장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요,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진리의 말씀과 그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감동하심으로부터 우리의 정체성과 소명감은 나올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제대로 살아가고자 한다면 그의 정체성과 삶의 목적에 대하여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끊임없이 사람들에 의존하거나 환경에 매인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대리인적 사명에는 동참할 수 없을 것이다. 옥에 갇힐지라도 병으로 고생할지라도 빈핍한 환경에 빠질지라도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도리어 그런 환경이 복음의 진보를 위해서 더 유익하다는 관점을 가질 수 있는 새로운 눈, 곧 삶과 환경을 해석하는 눈이 필요하다. 그래서 마침내 우리는 그렇게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목사입니다!” “나는 장로입니다!” “나는 성도입니다!” “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성도와 그리스도께 신실한 사람들
바울이 편지의 발신자라면 수신자들은 누구인가? 특정한 인물의 이름을 말하지 않고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이라고 말한다. 바울이 편지를 쓰면서 자신을 소개할 때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사도가 된 사람’이라고 자신을 보여주며, 그의 편지를 받아볼 사람들을 생각할 때 무엇이라고 하는가? 그들은 성도 곧 거룩한 자들이요, 예수 그리스도께 신실한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말하는 바, 성도 또는 교우, 그리스도인,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는 말을 대신하여 바울은 거룩한 자들과 예수 그리스도께 진실한 사람들이라고 소개한다. 이 말씀을 생각해 보자.
한 지도자가 그 공동체의 구성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그의 지도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국민을 개돼지라고 발언한 공무원이 지탄을 받는 까닭은 무엇인가? 교인들을 우매한 양이라고 생각하는 목회자가 있다면 그의 목회는 무엇을 지향할 것인가? 교인들을 부를 때 내가 ‘교우’라고 부르는 까닭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 친구요,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에서 동반자들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교우(敎友)는 신앙으로 진리를 함께 알아가는 벗(친구)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대리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목적이 있으며 그 목적을 배우다 보니 하나님의 세계를 대리통치를 위임 받은 존재임을 분명하게 알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누군가를 무엇이라고 부를 때 그 호칭에는 그 호칭을 부르는 사람이 자신이 상대하는 사람들을 어떤 존재로 여기는가 하는 생각이 포함되어 있다.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부를 때 두 가지 단어를 사용한다. 그것은 먼저, 거룩한 자들이요,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 예수께 신실한 자들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 곧 그리스도인들을 어떤 존재로 여기는가에 대한 생각이 담겨 있다. ‘거룩한 사람들’이라는 말을 우리가 두 글자로 성도(聖徒)라고 부른다.
바울은 유대인이요, 구약의 율법에 대한 전문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가 거룩한 사람들이라고 말할 때 그 의미는 유대교적 바탕과 구약 율법의 개념으로부터 나온 말이라고 우리는 확신할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 즉, 율법에서 거룩함을 어떻게 사용하며 그 의미를 규정하는가 살펴보자.
l 하나님은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그것은 그 날을 별도로 구별하셨다는 말이다(창 2:3).
l 이스라엘의 첫 아들들은 모두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의 것으로 드렸다(출 13:2).
l 이스라엘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거룩한 백성이라는 이름을 가졌다(출 19:6).
l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대하여 거룩한 백성이므로 짐승에게 찢긴 동물의 고기를 먹지 말고 개에게 던져주어야 했다(출 22:31).
l 아론의 아들들은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할 수 있도록 기름을 부어 위임 받아 거룩하게 된 사람들이다(출 28:41, 29:9).
l 그들은 머리에 관을 쓰고 거룩한 패를 달게 된다(29:6).
구약성경에서 거룩함이라는 말은 구별되었다는 의미요,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이며, 하나님이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선택하셨다는 말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제사장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구별된 사람들이며 그렇게 된 사람들을 거룩한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구별된 제물은 성물이며, 구별된 장막은 성막이 된다. 그리고 구별된 사람들을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부르며 그것을 신약성경에서는 성도(聖徒, saints)라고 한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에베소서 1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부르는 호칭인 성도들은 거룩하게 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실제로 고린도전서 1장 2절에서는 이 사실을 더욱 자세히 보여준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우리말에 ‘동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늘 친하게 어울리는 사람’이다. 본래 ‘동모’에서 온 말로, 사람을 가리키는 ‘모’와 복둥이, 쌍둥이, 문둥이에서처럼 사람을 가리키는 ‘둥’과 비슷한 ‘동’이 합쳐진 말이다. 그러나 동무라는 말은 북한에서 주로 사용하는 말이다. 지난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북미정상회담에서 어떤 북한 기자는 외국의 기자에게 길을 비키라는 말을 하려고 부를 때 “기자동무!”라고 외치는 소리가 방송 카메라에 잡힌 바 있다. 이 경우에서 보듯이 북한에서는 동무라는 말이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우리 남한 같은 경우 이름을 모르는 어떤 기자를 부를 때, 기자 선생, 또는 기자 양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북한 사람들은 기자 동무라고 부른다. 그들은 공산주의의 사상에 동조(同調)하여 함께 하는 사람들을 동무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들과 반대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반동’이라고 부른다. 어깨동무라는 아름다운 말이 있지만 남한에서는 친구나 벗이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동무가 사라지고 북한에서 주로 사용되는 말이 되었다. 이처럼 언어는 시대와 사회에 따라 달라지는 성질이 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도 이와 유사한 일이 벌어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생각대로 성경을 이해할 때 여기서 왜곡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는 성경에서 본래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를 살피는 작업이 필요하다. 성경 전체에서 그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그리고 그 어원은 무엇이었는지 등을 살피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교회 공동체에는 전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들을 가리켜 설교자 또는 말씀을 맡은 자들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성도’ 또는 ‘거룩하여진 자들’이라고 부를 때, 그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들이 말하는 것처럼 집사가 되기 이전의 신자를 가리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성경에서 성도라는 말은 구약의 제사장처럼 하나님이 특별한 임무를 맡기시려고 구별하고 선택하신 사람들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부름을 받은 사람들을 우리는 성경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성령을 부으시고 사명을 맡기신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대리인이라고 부른다. 성도는 일반 신자를 가리키는 말처럼 사용되고 있지만, 실은 나실인이나 제사장 또는 선지자들처럼 그리고 사도들처럼 특별히 구별된 사람들이며, 그렇게 하는 행위를 거룩하게 한다고 말한다.
에베소서의 핵심 구절인 에베소서 2:10에서 바울 사도는 성도 곧 거룩하여진 사람들, 곧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구별된 사람들에 대하여 좀 더 명확하게 말해준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다윗에게 이스라엘의 왕이 되라고 예비하신 일을 수행하게 하시려고 미리 정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에게 명하시기를 뿔에 기름을 채워 하나님이 지정하신 사람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하셨다. 그렇게 다윗은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라는 임무를 수행하라고 하나님이 택하신 종이며 그런 택하심을 받은 자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러므로 기름을 붓는 행위는 제사장을 택하여 구별하는 행위요, 왕과 선지자를 택하여 구별하는 행위다. 그렇게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는 종들을 가리켜 기름부음을 받는 자라고 한다. 그 말은 곧 거룩하여진 자라는 말이요 이를 신약성경에서는 성도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제사장이 구별되어 기름 부음을 받듯이, 성도는 구별되어 거룩하게 된 사람이며, 그에게 액체의 기름을 붓지 않으시고 성령으로 인을 치신다. 또는 그것을 성령으로 기름을 부으신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기름부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든 성도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그런 이유로 베드로 사도는 교회에 편지하면서 다음과 같이 성도들의 신분을 재확인시켰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인은 성도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족속이다. 그러므로 성민(聖民)이다. 하나님께 속했으며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특별한 임무를 위해 구별된 나실인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을 주의 종이라고 부른다. 목회직을 위해서 특별하게 전임사역을 하는 사람들만을 주의 종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성도가 주의 종이요, 모든 성도가 제사장이요, 모든 성도가 곧 기름 부음 받은 사람들이다.
성경은 이처럼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을 위해 택함을 받은 사람을 ‘기름 부은 자’라고 한다. 또 하나의 예를 들자면,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던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시 본국으로 돌아오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한 사람을 택하셨다. 그런데 그 사람은 이방인 고레스 왕이었다. 그는 페르시아의 왕이다. 느부갓네살의 강력한 바벨론은 세월이 지나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페르시아라는 나라에 정복된다. 그리고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임무를 맡기셨다. 그것을 성경 이사야서는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그 앞에 열국을 항복하게 하며 내가 왕들의 허리를 풀어 그 앞에 문들을 열고 성문들이 닫히지 못하게 하리라(이사야 45:1).
여기에서 고레스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고 소개된다. 그렇게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구약성경의 히브리어로는 메시아라고 하고 헬라어로는 그리스도라고 부른다. 하나님이 특별한 임무를 위해서 택하신 사람이라는 의미다.
고레스는 어떤 일을 했는가? 에스라서 첫 부분을 보면 더 자세하게 언급된다:
바사(페르시아)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에스라 1:1~3
이처럼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은 얼마든지 많이 있다. 그들이 택함 받았다는 징표로 기름을 붓는다. 그리고 그렇게 택하여 구별하신 사람들을 거룩하게 된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성경에서 거룩한 자는 행실이 깨끗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구별하시고 택하신 사람이라는 의미다. 그들을 신약성경은 성도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처럼 택함을 받아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들은 제사장 아론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제사장들과 모든 왕들, 그리고 선지자들 그리고 심지어 고레스라는 이방인 왕도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그리스도라는 말로 성경은 표현한다.
그러면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의미에서 기름 부음 받은 분이신가? 무엇을 위해서 택하심을 받고 구별되신 분인가? 왜 하나님은 예수님을 마리아의 태중에서 구별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셨는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말의 의미는 세상을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에서 마지막 시대에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 것의 머리로 삼으셔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실 분,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완성하실 구원자라는 의미다. 그래서 김세윤 박사는 그리스도라는 말의 의미를 ‘종말의 구원자’라고 소개한다. 그리고 그 임무를 위해서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드려 죽기까지 충성하셨고 신실하게 그 임무를 다하셨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시작하신 하나님 나라의 일에 동참하라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셨고,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고 외치셨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하려고 고난 중에 참으며 소망 중에 즐거워하면서 그리스도께 신실한 사람들이 바로 성도들이다. 하나님의 나실인들, 하나님께 구별된 사람들,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충성이다. 그것이 맡은 자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이다. 이런 이유로 바울 사도는 그의 편지를 받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그들의 정체성을 일깨워주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엡 1:1).
바울은 지금 옥에서 갇혀 있다. 그리고 옥중에서 그리스도인들, 곧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편지한다. 그런데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성도들이다. 거룩하게 된 자들이다. 구별된 자들이며, 택함을 받은 자들이며, 하나님의 임무에 동참하라고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신실하며 충성을 다한다. 우리 교회는 그런 사람을 가리켜 ‘하나님의 대리인’이라고 부른다. 성경은 그런 사람을 가리켜 기름 부음을 받은 종이라고 한다.
제사장이 자신의 사명을 모르면 그릇된 행동을 하거나 백성들을 위험에 빠트린다. 아론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제단에 사사로이 불을 켜다가 하나님의 불에 타 죽었다. 제사장 엘리의 가문은 자신의 사명을 모르고 법궤(法櫃)도 빼앗겨버리고 말았다. 왕들도 기름 부음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다. 그러나 많은 왕들이 자신의 정체성과 임무를 망각하고 또는 그에 대하여 무지하고 형편없는 삶을 살아갔다. 그것이 구약의 성도들의 삶이다. 그러나 어떤 성도들은 환난과 핍박 중에도 신앙을 지키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신하고 소임을 명확하게 깨닫고 하나님께 충성을 다했다.
오늘날 우리가 읽는 에베소서는 감옥에서 피 끓는 소원을 가지고 살아가던 사도 바울의 편지다. 그가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교회에 보내는 편지다. 한 단어 한 문장 소중히 여기고 그 뜻을 살피고 배우며 마음에 새기면서 살아간다면 우리들도 성도와 그리스도께 신실한 종들로 기억될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에 보내는 편지를 읽을 사람들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예수님은 바울을 누구라고 생각하시는가? 그리고 오늘 우리는 스스로를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우리는 왜 우리 자신을 성도라고 부르는지 깨닫고 있는가?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구별되었고 기름 부음을 받았으며 택함을 받았는지 우리는 알고 그 일을 맡겨주신 주님께 신실하고 충성된 사람들인가? 에베소서를 읽으면서 이런 것을 생각해 보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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