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과 남신라(南新羅)의 멸망(滅亡)
신라(新羅)는 차차 문약(文弱)에 흐르고 임금(賃金)이 황음(荒淫)하여 정사를 돌아보지 않으니 민심(民心)이 흩어지고 사방(四方)에서 반란(叛亂)이 일어 나니라. 진성왕(眞聖王) 2년에 양길(梁吉)은 북원(北原)(죽산(竹山))에서 일어나고 견훤(甄萱)은 무진주(武珍州)(전주(全州))에서 일어나 서남(西南) 여러 고을을 쳐서 이기고 효공왕(孝恭王) 3년에 도읍을 완산(完山)에 정(定)하고 국호(國號)를 후백제(後百濟)라 하여 형세(形勢)가 자못 강대(强大)하였고 궁예(弓裔)는 주천(酒泉)(철원(鐵原))에서 일어나 북원적(北原賊) 양길(梁吉)을 죽이고 명주(溟州) 삭주(朔州) 등 여러 고을을 쳐 항복받고 장수 왕건(王建)의 힘으로 사방(四方)을 평정(平定)하여 효공왕(孝恭王) 7년에 철원(鐵原)에도 도읍을 정(定)하고 국호(國號)를 후구려(後句麗)라 칭(稱)하다가 다시 태봉(泰封)이라 고치고 서북일대가(西北一帶)가 다 궁예(弓裔)의 차지한바 되어 천하(天下)가 크게 어지러워진지라. 경애왕(景哀王)이 포석정(鮑石亭)에서 견훤(甄萱)에게 죽고 문성왕(文聖王)의 후손(後孫)인 경순왕(敬順王)을 세웠더니 이때 국경(國境)이 점점 축소(縮小)되어 겨우 경주(慶州) 일우(一隅)뿐이라. 왕(王)이 또 무능(無能)하여 회복(回復)의 희망(希望)이 없는지라. 고려(高麗)에 항복코자 하니 왕자(王子) 일(鎰)이 련(鍊)하되 충신(忠臣) 의사(義士)가 한번 배성(背城) 일전(一戰)하여 본 후(後)에 귀부(歸附)하자 하되 왕(王)이 듣지 않고 고려(高麗)에 붙이니 역세(歷世)가 56왕이요 역년(歷年)이 992년 이러라.(박(朴)씨 10왕 석(昔)씨 8왕 김(金)씨 30왕)
- 한글
신라는 점점 문약해지고 임금이 방탕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자 민심이 흩어지고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진성왕 2년에 양길이 북원(죽산)에서, 견훤이 무진주(전주)에서 봉기하여 서남쪽 여러 고을을 점령했고, 효공왕 3년에 견훤이 도읍을 완산에 정하고 국호를 후백제라 하며 세력을 키웠습니다.
한편 궁예는 주천(철원)에서 일어나 양길을 죽이고 명주, 삭주 등지를 항복시켰고, 장수 왕건의 힘을 빌려 사방을 평정한 뒤 효공왕 7년에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후고려라 하다가 태봉으로 고치며 서북 일대를 차지하여 천하가 크게 어지러웠습니다.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견훤에게 죽자 문성왕의 후손 경순왕을 세웠으나 국경이 점점 줄어들어 겨우 경주 일부만 있게 되었습니다. 경순왕 또한 무능하여 회복의 기회가 없자 고려에 항복하려 했으나, 왕자 일은 한 번 배수진을 치르자고 주장했으나 왕은 듣지 않고 고려에 투항하였습니다. 신라의 역대 왕은 56명이었고, 역년은 992년이었습니다. (박씨 10왕, 석씨 8왕, 김씨 30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