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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熙九 著書 반용동의 역사를 기록한 " 洞記 동기( 門記薄略 문기박약)를 그대로 옮겨 기록하였습니다.
단, 한자는 한글표기를 첨가하여 병행하기도 하였습니다.
著者 희구(熙九)는, 全羅北道 井邑郡 甘谷面 桂龍里 盤龍洞에서 태어나 살았고, 현재는 전주에서 살고 계시며,
1985년 12월 "반용동 풍양조씨 가승보"를 만들어 각 후손 가구당 1부씩을 배부하였으며, 海자 輔자 할아버지의
자손이 반용동에 정착한 史籍을 기록한 “洞記(門記薄略)”를 출판하셨습니다.
족보(族譜)나 옛 도서를 읽고 이해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님을 항상 느끼고 있습니다. 족보나 옛 도서의 내용을 인터넷에 기록하여 족보 등을 접할 수 없는 후손들에게 쉽게 전달할 수 있게 되고, 이러한 기록을 통하여 생소한 단어와 한자 등에 친숙해 질 수 있게 되리라 믿으면서 소개합니다.
○ 序 言
여기 종제 熙九가 쓴 洞記(門記薄略)를 읽고 우선 그 노고를 칭찬하고 싶다.
우리 盤龍洞 趙門은, 海자 輔자 할아버지의 羅州정착도 정착이지만, 고령신(고령신)씨 할머니께서 그곳을 떠나 “반룡동에 오시게 된 것과, 이 고장에 정착하신뒤 鎭․永․秉․夏․東․九․南․衍․誠의 九世 子孫들이 발전과 번영을 이루면서, 家門의 명예를 지키려는 노력을 나름대로 하고 있음을 보아왔다.
이 洞記(門記薄略)를 읽어보니, 단순한 傳言과 그에 따른 생각으로 쓴 것이 아니고 수 많은 자료와 현지를 둘러 본 정열을 읽을 수 있으니 참으로 후대에 남길 좋은 자료라 생각한다. 이로하여 우리 종중에 귀중하게 보존하면서 각자가 자손된 道理와 根本을 잊지말기를 바랄따름이다.
또 하나, 금년 春節에 盤龍洞 宗中 남녀노소들이 咸平과 羅州에 성묘가서 보니, 우리 志衍 將軍이 先山에 정성을 다하여 山城을 청결하게 다스려 놓은 것을 보고 그 공도 크려니와, 그 곳 주민들에게 다시 한번 海자 輔자公 자손들을 높이 평가받게 한 점은 바로 조상님들의 명성을 되살린 일이 되어, 다시 한번 고맙고 높이 칭찬하고 찬양하여야 할 일이다.
이런 점들은 우리 종중 각자는 마음에 새겨서 자손만대에 귀중한 근원이 되게 하고, 우리 조상님들의 명성이 끝침없이 살아 있도록 도무 힘을 모아야 할 일이다.
종중의 번영과 발전이 항상 같이 하기를 기원하면서 몇자 기록한다.
1996년 7월
海輔公 九世孫 小軒 應九 씀.
○ 시작에 앞서
1985년 4월 한식날 盤龍洞 염사(念蓑 東信) 종숙(從叔)댁에 들린 일이 있다.
마침 종백(從伯) 順九형님께서도 자리를 같이 한 자리였는데, 절을 올리자 근황(近況)에 대한 말씀을 하시다가 한 동안 말씀을 멈추시었다. 이윽고 하시는 말씀이, 객지에서 살고 있는 후손들의 수가 이곳 盤龍洞보다 많은데, 그들이 집안 내력을 모르고 있다는 것과, 지난 해 추석에 한 아이가 찾아와 집안 내력을 묻기에 을유년(乙酉年, 1945)에 우사(又蓑, 東俊)께서 손수 쓰신 가승첩(家乘牒)을 그 아이대(代)까지 보완해서 써 주셨다는 말씀 가운데에 요지음 붓적 눈이 흐리시다는 것이시다.
그 말씀을 듣고 어떤 책임감 같은 것을 내가 느낀 것은, 그 아이는 나와 초등학교를 같이 다녔던 내 종질(從姪), 이미 고인이 된 南天씨의 아들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얼마뒤 다시 종숙댁에 들려 뵙고 내 작은 계획을 말씀 드렸더니 퍽 가상타고 말씀하시면서, 고서(古書) 한권과 고문서(古文書) 10여장을 주셨다. 다른 말씀은 계시지 않고 다만 “이것은 네가 간직하라”하셨을 뿐이다.
그 해 10월경 우리집안 가승보(豊壤趙氏 家乘譜, 회양공-한평군-풍안군 계)의 초고(草稿)를 작성하여 교열(校閱)을 청한 바 있다. 1주일 뒤 들려 뵈었더니 우사(又蓑) 종숙의 을유첩(乙酉牒)보다 상세하고 연대를 헤아리기 쉽게한 점등이 좋다고 하시면서 반룡동 문중의 후손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이 계셨다.
마침 자리를 함께 한 종백 順九 형님께서도 적극 찬동하신 바 있어 뒷날 盤龍洞 문중의 노장(老壯)분들이 협의하여 발간 부수와 경비를 문중에서 부담하고 각 후손 가구당 1부씩 무료로 제공하기로 한 바 있다.
이 가승보(家乘譜)는 1985년 12월경 인쇄 되어 이듬해에 나누어 갖기에 이르렀다.
어렸을 때 아마 내가 초등학교 시절의 어느 해 추석절, (그 뒤에도 몇차례 반복되었지만) 우헌(愚軒, 東玹)백부님, 아버지(겸산(謙山)․동윤(東玧)(悞오), 계부(東烈)님, 그리고 위아래 숙질손들이 모여 차례(茶禮)를 마치고, 성묘길에서 들려주신 이야기는 지금도 동화속의 어떤 그림처럼 떠오를 때가 있다.
생각하면 더 자세히 열심히 새겨 둘 것을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은, 그 분들 모두 가시고 이제 쓸쓸한 기억을 더듬고 있는 처지에서 날이 갈수록 절실해 질 뿐이다.
큰감배(大甘山)와 네거리 산소(山所)에서, 이 분은 누구시며, 어떤 분이라고 말씀 주신 가운데에 고령신씨(高靈申氏)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그 설명이 길었고, 나주(羅州)라는 땅 이름, 서울(漢城)의 큰 댁등의 알 수 없는 이야기에, 盤龍洞에 우리 一家가 뿌리하게 된 시원(始原)을 연 할머니임을 강조하셨다.
盤龍洞, 이 곳은 어떤 곳이며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있어 무엇이며, 또 무엇 때문에, 또 무엇이 중요한 것인가. 그 안에는 어떠한 선조(先祖)들의 혼과 땀이 퇴적 되었는가.
또한 경도(京都, 서울)와 나주(羅州)는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어서 정신적인 영향을 주었는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차 례
○ 序 言
○ 시작에 앞서
1. 반룡동(盤龍洞), 주변에 관한 이야기
2. 옛날의 명칭 고(考)
3. 또하나의 變化
4. 사적(史籍)의 자취
5. 盤龍洞은 언제부터 쓰였는가
6. 羅州 그 곳은
7. 羅州에서의 定着地
8. 서울을 향하여
9. 저 마을에서 쉬었다 가자
○ 뒷말
○ 부록(盤龍洞 서사(敍辭) 一部分)
1. 盤龍洞, 그리고 그 주변에 관한 이야기
1996년 현재, 行政組織상의 명칭은 全羅北道 井邑市 甘谷面 桂龍里 盤龍洞(里)이다. 여기서 桂龍里는 법정리(法政里)이며 盤龍洞은 행정리(行政里)이다.
洞․里는 最下部 地方行政의 구역(區域)이다. 市의 洞은 관할행정기관(管轄行政機關)이 설치되어 있으나 郡의 洞里에는 일종의 명예직(名譽職)인 동리장만이 있는 바, 그 性格을 달리하고 있다. 運營에 있어서도 市의 洞을 공부상(公簿上)의 洞․里 또는 법정동리(法政洞里)라 하고, 郡의 洞里를 행정운영상(行政運營上)의 洞․里, 약해서 행정동리(行政洞里)라 통칭하고 있다.
法政里는 通說에 따르면, 里가 최초로 법적 근거를 갖게된 것이 1917년6월 總督府制令 제1호 “面制“에서 비롯되었고, 區域이 확정된 것은 같은 해 土地調査事業의 결과에 의한 것이라 하고 있으나, 여기에 대한 이론(異論)이 있다. 즉, 1909.6.25. 법률제20호 ”지방구역과 명칭의 변경에 관한 건“의 공포를 계기로 다음 해인 1910년 2월부터 各道의 道令으로 ” 面內 洞里村의 폐치분합(廢置分合)과 그 명칭 및 경계의 변경에 관한 건“이 공포되었고, 이에 근거하여 많은 洞․里․村의 정비가 있었음을 상기(想起)시키고 있다.
아울러 1914.4.1부터 시행된 府郡의 구역과, 동년 4.1부터 시행된 面의 구역에 관한 大改編과 때를 같이하여 洞․里의 구역도 크게 정비되어 새로운 명칭과 관할구역의 확정을 보게 되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고부(古阜)․태인(泰仁)․정읍군(井邑郡) ..... 井邑郡으로
감산(甘山)․은동(銀洞)․사곡면(沙谷面) ..... 甘谷面으로
계봉(桂峯)․학촌(鶴村)․신삼(新三)․반룡리(盤龍里) ..... 桂龍里로
대구(大仇)․소구(小仇)․농촌(農村)․신흥리(新興里) ..... 大新里로
※ 新三里.... 현재 盤龍洞里 남쪽에 두어집 남아있어 반용동에 흡수 되었다.
원래는 이곳과 현재 장무리에 두 뜸이 있던 것을 합하여 신삼(新三)이라 했다.
※ 大仇․小仇.... 이 두개의 짝(仇)동네는 역사가 긴 것 같다. 나중에 원수구(仇)를 떠올려, 대구리(大仇里)
동남쪽의 구릉길 즉 지름으로 가는 고개 이름을 따 지름(油)으로 하여 유치(油峙)가 되었다.
※ 新興里.... 현재 하느멀, 天村을 말한다. 원래 인의현(仁義縣)에 속했다.
그 마을 서쪽 고개를 넘으면 원터(院)라는 곳(현재의 진교(眞嬌)마을 부근)이 있었는데, 그 곳에서
이 마을을 새터 즉 신흥리라 불렀다.
원래 洞․里는 지방에 따라 그 명칭이 구구하였다. 조선조(朝鮮朝)시대만 하여도 洞․里외에 浦․坪․村․鄕․峴.店․谷․峙․橋․芳․海․川 등등 다양하게 불리었다고 한다.
도 그 조직은 지방의 傳統과 慣例에 따라 유지되어 왔으며, 이들 洞․里에는 주로 주민들이 추천으로 수령(守令-군수․현령․현감)에 의하여 임명되는 洞長․區長(里正․尊位)이 있었으며, 재산도 자체적으로 소유 관리하여 왔다. 따라서 이때의 洞․里는 慣習에 의한 준자치적 법인(準自治的 法人)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大韓帝國 말에 있었던 정비를 거쳐서 1914년을 전후하여 단행된 行政區域의 大改編을 계기로 대개 오늘의 명칭과 規模를 갖추게 되었고, 1917년에는 법률적으로 더욱 명확한 근거를 갖게 되었으나, 1931년 4월 1일부터 시행된 “邑面制“에 의하여 邑․面이 法人格을 갖게 됨으로써 洞․里은 法人能力을 喪失하게 되고 邑․面의 단순한 하부 행정구역이 되었으며 洞․里의 재산도 邑․面에 吸收되기에 이르렀다.
1949년 지방자치법은 종래의 동리제도를 그대로 계승하여 市․邑․面을 두되 그 구역은 自然部落을 기준으로 當該 지방자치단체의 條例로써 정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法定里의 모태다.
2. 옛날의 명칭 고(考盤)
이곳에 언제부터 사람들이 사는 취락(聚落)이 형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盤龍洞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 순덕봉(산)(順德峯, 山, 해발 56m)을 정점으로 북쪽을 길게 가려 덮은 두 서너개의 날개와 남쪽으로 좀 짧게 가린 날개가 에워 쌓고 있는 아담한 동천(洞天), 그리고 천아산(天娥山) 골짝 골짝에서 내린 물이 동천 앞을 동출서류(東出西流)하는 들(野) 넘어 그리 높지 않은 산과 들이 스멀대고 있으니. 가히 農耕에 적합한 땅임을 볼 때 아마 아득한 옛날부터 어떤 사람들의 흥망성쇠(興亡盛衰)가 일고 사라졌을 것이라 짐작된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우리 집안에 관한 고문서(古文書)에
「嘉慶九年(가경구년) 月 日泰仁縣(일태인현)
考甲子式成籍戶口帳內甘山面弟大二虎狸岩里第十統二號....(以下 略)」
고갑자식성적호구장내감산면제대이호리암리제십통이호
라는 당시의 호적등본을 볼 수 있는 바, 가경9년(嘉慶九年)은 순조대왕 4년(甲子年, 1804)으로 당시의 이 마을의 이름이 제대이호리암리(弟大二虎狸岩里)임을 알 수 있다.
9년 뒤의 기록에는
「嘉慶十八癸酉泰仁縣甘山面弟大二虎狸岩里第三統第四號」
「가경십팔계유태인현감산면제대이호리암리제삼통제사호」
로 표기되고 있는 바, 1813년(가경 18, 계유 순조 13년)에는 제3통 제4호로 나타나고 있음을 볼 때 그사이 戶口의 增減 등으로 統의 정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60년대,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의 번계수록에 의하면 「鄕里凡五家爲統 有統長 十統爲里 里有里正 每十里 京則爲坊外則爲鄕(즉 今之面) 置鄕正一人, 즉 다섯 가구로 統을 이루고 통장을 두며, 10통으로 里를 이루고 里正을 두며, 每10里를 서울에서는 방(坊), 지방에서는 향(鄕 - 지금의 面)으로 하고 향정 1인을 둔다」라는 기록이 있다.
다시 말하면 조선왕조의 방리(坊里)의 조직은 5가작통(五家作統)을 근간으로 하고 있음을 인식하면 쉽게 짐작이 가는 일이다.
호적의 정비는 정다산(丁茶山 1762~1836)의 牧民心書에서 보듯이 모든 부세(賦稅)의 근원이며, 모든 요역(徭役)의 근본으로 그 정확한 파악이 요청되는 것으로, 당시 수령(守令)들이 세심히 마음을 써야 했던 일이다.
또 이 호적의 정비는 가좌(家坐 - 즉, 오늘날의 주민등록부와 같은 것)의 장부를 기초로 했는데, 그러므로 호적의 기초가 되는 가좌부(家坐簿)를 소홀하게 다룰 수 없다고 하였다.
대이호리암리(大二虎狸岩里), 대이호리암리가 있으니 대일호리암리(大一虎狸岩里)도 있었는가? 호리암리, 무슨 뜻이 있으며 어떻게 붙여진 이름인가?
옛날의 마을 또는 地名을 살펴 보면, 대개가 그 주변의 地勢와 地形 또 땅위의 큰 물건, 뚜렷한 무슨 시설물 또는 風水說 등등을 들어 지은 흔적을 많이 感知할 수가 있다. 가령, 나무다리(木橋), 대실(大谷), 대사리(大寺里), 자시내(尺川), 모래실(沙洞), 회암리(回岩-바위 돌이), 서당골(書堂谷) 등등.
盤龍洞의 배산(背山) 즉, 순덕봉(산)(順德峯, 山, 해발 56m)에서 서쪽을 향하여 조망(眺望)하면 우선 발아래 널어진 고니들(반용동 앞들) 바로 코앞에 화봉(花峰 해발 26m)이 눈에 들어온다. 직선거리 약 1,500m.(개념도 참작)
이 花峰은 학독을 엎어 놓은 형상을 하고 있는 둥실한 덩치모양이다.
東․南은 급경사(急傾斜)를 이루고 있으며, 西쪽은 좀 완만하여 北쪽은 느릿하게 흘러내려 현재 지방도(地方道)를 건너 下甘․上甘으로 이어지는 한가닥이 바로 순덕봉의 북방지맥(北方支脈)에 이어지고 있다.
이 화봉 바로 서쪽 기슭에 회암리(回岩里)가 있다.
花峰里는 법정리(法定里)로 개편 당시 川谷里, 回岩里, 新基里(아래감메), 小二里(윗감메)를 합쳐서 중간에 있는 이 花峰(山)의 이름을 따 지은 것이다.
호리암리(虎狸岩里)라 했으니 필시 이 근동에 이름 있는 바위가 있었음을 짐작하기에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어디쯤에 표지할 만한 바위가 있었을까? 그것도 弟1, 弟2의 큰 마을(里) 이름을 따 붙일만한 그런 바위가 말이다.
이 花峰 동편 낭떠러지에 거대한 바위가 서 있었다. 그 형상이 호랑이 머리 모양이라고 先人들은 말하였었다. 두 쪽으로 이루어 졌는데, 아래 부분은 가슴 밑 부분으로, 배(復)) 아래는 땅에(해발 10m 정도) 묻혀있는 형상이고 머리부분이 꼭 호랑이 머리라 하여 이 바위를 호랑이 바위(虎岩, 虎嚴)라 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에 가끔 花峰에 들려 절(寺, 그때에 花峰 정상에 초라한 절이 있었다) 구경도 신기하게 하고, 좀 내려와 그 바위-호랑이 머리에서 수작도 하고 놀았으며, 가끔 그 밑 소로길을 갈 때면 곧 떨어지지 않을까 두려워서 곧장 달려 가곤 한 기억이 새롭다.
이 호랑이 바위 바로 앞, 웅덩이 물속에 개의 등처럼 부드럽고 반반한 모양의 바위(磐石) 하나가 엎드려 있었는데, 그 모양을 두고 先人들은 말하기를, 구석들(아래감메 앞의 좁고 후미진 들) 뒷산에서 굶주린 삵괭이(狸)가 물구덩이의 먹이를 보고 쏜살같이 달려 나가다가, 巨大한 호랑이 얼굴을 보고 기겁하여 달삭 엎드려 숨을 죽이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이를 삵괭이 바위(狸岩, 巖)라 했던 것이다.
이 근방에 툭 튀어난 천연적(天然的)인 이 호랑이와 삵괭이 형상의 바위 즉 호리암(虎狸岩). 그래서 이 근동의 땅 이름을 호리암리(虎狸岩里)라 하였음이 틀림없다. 이 근방에 제일 오래된 방죽, 盤龍洞 뒷방죽의 이름이 호리제(虎狸堤)이며, 옛날 태인지(泰仁誌) 및 현재의 지도(地圖)에도 그렇게 표기되고 있다.
아쉬운 것은 이 호랑바위(虎岩)는 1945년경 구들돌 상인들에 의하여 46~48년 사이에 완전히 파괴되어 자취를 감추고 패인 자리만 덩실하게 남아 있다.
리암(狸岩)은 근년까지 있었는데 1994년 그 도량의 경지정리(耕地整理) 때에 폭파했다고 들었다. 그것은 農事上 배수(排水)에 불가피했다는 뒷 말을 들었다.
3. 또 하나의 變化.......
우리 先祖께서 지금의 盤龍洞에 정주(定住)하신 뒤의 어느 해의 住所가 甘山面 大二虎狸岩里 第10統 2號였는데 9년 뒤의 호적장표(戶籍帳票)에는 제3통 제4호로 된데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고로(古老)들의 전하는 말을 빌면, 현재의 큰감메 서쪽 끝, 감산제(甘山堤) 동쪽 언덕 위 부근에 양씨촌(良氏村)이 있었고, 그 마을은 대단한 부자마을이며 아주 큰 마을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 부근을 우리집에서 밭으로 경작하던 1950년대에도 그 주변에서 기와 조각(瓦片), 사기그릇 파편을 많이 볼 수가 있었다. 지금도 아마 더듬어 파헤치면 그러한 것들이 나오리라 생각된다. 이 마을이 깡그리 자취를 감춘 이유는 차치하더라도, 그 때가 언제인가? 나는 가끔 궁금해하곤 했다. 호리암리 10통(1804)에서 같은 마을의 지점(地點)이 호리암리 3통(1813)으로 바꾼 바, 아마도 1804년 이후 어떤 시점에서 1813년 이전의 사이에 그 마을이 한꺼번에 사라진 것이라 推定한다. 어떤 병고로 망했을까 지금도 궁금하다.
1800년 이후 나라에는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1800년(正祖 24년) 6월에 正祖大王께서 서거(逝去)하신 뒤(一說에는 暗殺이라고도 함), 천주교(天主敎)를 금하면서 신유사옥(辛酉邪獄)이 일어났고, 아울러 천주교도 색출을 위하여 오가작통(五家作統)법을 강화하여 나가는 가운데, 1803년 11월에 사직악기고(社稷樂器庫)에 불이 났고 이어 12월에 창덕궁(昌德宮)의 선정전(宣政殿)과 인정전(仁政殿)에 큰 불이 나 소실되었으며, 이듬 해인 1804년 3월에 平壤에 대화재로 民家 5,000여호와 공청(公廳) 107개소 소실, 같은 달 강원도에 대화(大火), 산불이 삼척 강릉 양양간성 고성 통천 등지에 번저, 민가 2,600여호가 소실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806년(순조 6년)에는 湖南에 절양민(絶糧民) 56만여명이 발생하여 구호곡 2,500여섬을 긴급 분배하는 일이 일어난 것을 비롯하여 해마다 재해가 끊이지 않았으니,
- 1807년 2월 西海에 해일, 3월에 영흥부에 大火, 5월에 영남에 절양민 9만여호 발생
- 1808년 北靑府使등 폭동, 단천(端川) 사람등의 폭동
- 1809년 2월 함흥에 큰불로 민가 1,800여호 소실, 7월 황해도에 폭우 민가 3,000호 이재민 발생, 8월 흉년으로 금주(禁酒)를 시행.
이렇게 뒤숭숭한 가운데 1811년(순조 11, 辛未) 12월 용강(龍崗)사람 홍경래(洪景來)가 란을 일으키기에 이른다.
한편 홍경래난을 진압한 조정에서는 부패한 관리를 척결하기 위하여 각 지방에 암행어사(暗行御史)를 파견하는 바, 1816년(순조 16년)의 기록에 의하면,
- 호서(湖西) 암행어사 이우수(李友秀)는 10개 군수의 부정을 보고하고 있고
- 호남(湖南) 암행어사 조만영(趙萬永)은 25건의 官吏不正을
- 영남 암행어사 이화(李華) 9건
- 북도 암행어사 정기선(鄭基善) 관리부정 8건 등등, 이도(吏道)를 바로 잡고 민심을 수습하려는 의지도 나타나고 있었다.
1827년(순조 27 丁亥)에 호적법(戶籍法)을 정비한 이후, 그해 12월에 전국의 호구조사가 있었고, 1831년(순조 31 辛卯), 1835년(헌종 1 乙未), 1843년(헌종 9 癸卯), 1844년 (헌종 10, 甲辰), 1848년(헌종 14, 戊申), 1849년 헌종 15, 乙酉), 1850년(철종 1, 庚戌) 등 23년 동안 8번의 호구(戶口)조사가 있었음이 기록에 나타나고 있으며, 期間中에 순조대왕이 1833년에, 헌종대왕이 1849년에 서거한 사실을 주의 깊게 살펴볼 일이다.
이 한 세대(世代)를 역사속의 격동기(激動期)라 할 수 있으리라.
4. 戶籍의 자취
호적(戶籍)이란 집 또는 家族單位로 戶主 및 가적(家籍)에 속하는 가족과 그 身分關係 등을 기록한 公文書이다. 이는 행정상의 목적에 의한 것으로 상당히 일찍부터 시행됐을 것이나 자세한 기록은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아마 삼국시대 말기 律令을 시행하면서 이 호적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日本의 나라(奈良) 정창원(正倉院)에서 발견된 新羅의 戶口帳籍은 그 좋은 자료이다.
신라장적은 신라통일시대 서원경(西原京, 지금 淸州)부근의 4개 촌락에 관한 기록으로, 촌락의 연호(姻戶,집)를 호구의 다소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고 있으며, 연령별에 의한 구등분(口等分).가축.과수.토지의 결수(結數).부락 주위의 보수(步數)등을 상세히 기록하여 담세력(擔稅力)의 우열을 나타낸 듯하다.
3년마다 다시 작성하여 그 변동을 정확히 나타낸 총괄적인 帳籍으로, 당시의 행정사무가 매우 치밀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신분 계급에 따라 제도의 내용도 달랐던 것 같다.
일반 서민은 주군현(州郡縣)의 지방관이 매년 호구를 조사하여 戶部에 보고하였으며, 양반은 3년마다 호적 2건을 작성하여 하나는 관청에 두고 하나는 자기 집에 두었다. 내용은 戶主․世系․동거하는 자식․형제․질서(姪壻)등 족파와 노비를 기록하였다. 奴婢는 그 소전종파(所傳宗波).소생(所生).이름.나이.노처(奴妻).비부(婢夫)의 양천(良賤)의 구별 등을 자세히 적었다.
이와 같은 호구조사는 국역(國役)의 복무와 공부(貢賦)의 부담자 등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왕조 시대에는 대체로 고려의 제도를 답습하여 태종․세종을 거쳐 성종(成宗)에 이르러 점차 개정 정비되었으나 본질에 있어서는 고려와 큰 차이가 없었다. 호구조사는 3년제(式年 - 子, 午, 卯, 酉, 年)를 따라 개편하여 그 대장을 호조(戶曹)․본도(本道)․본읍(本邑)에 비장하고, 5가1통(五家一統)제와 함께 병행하였다.
호적을 작성할 때에는 각호의 가장이 戶口單子로서 신고케 하였다. 이 호구단자에는 居地.職役.성명.年甲.本貫.四祖.妻 및 처의 연갑.본관.四祖.솔거자년(率居子女).노비와 그 연갑 등을 적었다. 지방수령地方守令)은 그 호구에 의하여 帳籍을 편성하고 감영.한성부.호종에 각각 보냈다.
이 戶口單子는 오늘의 호적등본에 해당되는 것으로 입적자는 반드시 호적을 가져야 하게 되었다.
1896년(건양 1)에 호구조사규칙 급 세칙(戶口調査規則及細則이 제정되면서부터 호적은 해마다 수정되고, 거적(居籍)을 원적(原籍)으로 하고 각 호에는 호패(戶牌)를 달게 하였다. 그 사무취급을 서울은 통주(統主), 지방은 이동장(里洞長)이 장악하고 계통을 따라 보고되었다.
1908년(융희 2)에 이 사무는 경찰관서에 옮겨지고, 이듬해 즉 1909년(융희 3)에 민적법(民籍法)이 제정되었다.
그 주요내용을 보면 신고의무자는 본적지의 소관 面長에게 신고하게 되었고, 신고사항은 출생.사망.호주변경.혼인.이혼․양자.파양(罷養).분가일가창립(分家一家創立).入家.폐가(廢家) 등등이었다.
이에따라 종래의 호적과는 완전히 그 목적이 바뀌게 되어 호주와의 신분관계를 기재한 유일한 공정증서(公正證書)가 되고, 법의 영역에 속하게 되었다.
일제 강점시 이를 다시 보충하여 1922년에 조선호적령(朝鮮戶籍令)이 반포된 이래 많은 획기적인 개정이 있었다.
5. 盤龍이란 洞名이 언제 쓰였는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조선왕조에 있어서 호구조사는 3년의 식년제(式年制), 즉 십이지(十二支)의 子년.年년.卯년.酉년에 실시되었다. (특별한 경우는 있었음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1861년인 신유식년(辛酉式年)의 우리 집안 戶口單子에
「泰仁 甘山面 盤龍里 辛酉式 戶口單子 鰥 弟○統○戶 幼學 趙秉愚...」
「태인 감산면 반용리 신유식 호구단자 환 제○통○호 유학 조병우...」
라는 기록이 보인다. 統과 戶는 붉은색으로 쓰인 흔적이 있으나 너무 바래어 읽을 수가 없다. 호구단자를 기록하여 관가에 내면 관에서 통.호를 편성하면서 기록할 때 쓰인 것이다. 환(鰥)이란 아내를 여윈 사람이라는 뜻이고, 유학(幼學)은 아직 벼슬하지 않은 선비(학생)라는 뜻이다.
병자 우자(秉愚) 할아버지는 반용동 조문(趙門)의 南자 行列을 기준하여 4대조(四代祖)이시다.(代와 世의 계산법은 代下 不身, 즉 代의 경우에는 父子간이 一代이고 世의 경우는 二世다)
大二虎狸岩里라 기록된 1828년인 戊子년의 호구단자가 보존되고 있고, 盤龍이라 기록된 1861년인 辛酉년의 호구단자 사이는 33년의 간격이 있는 바, 이는 3년 식년의 조사가 10번이 있었을 것인데, 이 기간중 언제 盤龍이라 고쳐 불렀는지는 자세히 살필 수 없다.
앞서 3.(또 하나의 변화...)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임시조사까지 23년동안(1827~1850)에 8번이라는 빈번한 호구조사가 있었음이 특히, 史書에 기록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당시의 세상을 짐작할 수는 있느나, 우선은 기록이 남아 있는대로 1861년(辛酉) 이전에 마을 이름을 盤龍이라 이름한 것만은 틀림없다.
운중반룡(雲中盤龍) - 구름 사이에 용이 서리고 있는 형상, 장막처럼 꽉 쳐진 구름이 아니라 솜털처럼 둥싱 둥실 너울대는 구름 사이에서 보이는 듯 살아진 듯 용(龍)이 굽어 감싸며 서리는, 그런 형상이다.
이 곳에 定着한지 60여년, 그동안 열심히 살아 재물도 상당수준을 마련했을 노진사(老進士, - 秉자 愚자) 할아버지 때, 명실공히 이 마을의 중심세(中心勢)였으리라. 지금도 盤龍洞은 自他가 공인하듯 조문(趙門)의 마을로 指稱되고 있다. 어떤 이는 반용동 조씨라 불러주기도 하면서 先代 할아버지분들의 말씀을 들려 주기도 하는 분들이 더러 있다.
당시 많은 풍수지사(風水地師)들이 사랑(舍廊)에 들렸음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으니, 60여년 살면서 돌아가신 분들의 장지(葬地)가 지금에도 썩 좋은 자리라고 남들이 말하고 있음을 감안할 때 그렇게 믿어지는 것이다.
정리하면, 盤龍이라 동명을 정한 당시 老進士 할아버지의 나이 39세, 지금으로부터(1996년 기준) 실로 135년 이전의 일이다.
이후 일구월신(日久月新) 나날이 새롭게 융성하여, 名實 공히 農者大本일 때인 50~60년대에는 60여호의 집성촌(集性村)을 이루기에 이르렀다.
6. 羅州, 그 곳은
盤龍洞 조문(趙門)에서는 매년 한식(寒食)날을 전후하여 세일제(歲一祭, 時祀, 時祭)를 모시어 왔다. 지금은 그 날짜를 가을철로 새로 정하여 모시고 있지만.
한식날 - 함평군 평릉면 구산리(현 나산면)에 유택(幼宅)이 계시는 해보공(海輔公 - 南자 行列에서 9대조)과 配 陽城李씨 할머니.
寒食후 2日에는, 羅州 복암면(伏岩面) 복암리 세칭 복바위 산소에 계신 상채공(尙綵公 - 南자 行列에서 8대조)과 配 善山柳씨 할머니.
寒食 다음날에 큰감베(大甘山)에 유택(幼宅)을 모신 반공(磐公 - 7대조)과 配 高靈申씨 할머니, 이런 순차에 따라 시사(時祀)를 모셔왔다.
磐자 할아버지는 원래 유택(幼宅)이 羅州 투화동 서당골에 계셨을 때, 한식 다음날 이곳과 큰감메 고령신씨 할머니의 시제(時祭)를 두 곳에서 동시에 모셨는데 1986년 큰감메 할머니 유택옆에 쌍분으로 모신 바 있어, 羅州에서의 시사(時祀)도 이틀 卽, 한식날에 海輔公, 한식 다음 날에 尙綵公 할아버지의 시사(時祀)를 순차로 모시고 있다.
예기(禮記)에 군자는 종신의 상(喪)이 있는 것이니, 기일(忌日)을 이르는 것이다. (記曰 君子有終身之喪 忌日之謂也라 했다). 忌日이란 조상의 사망일, 이 날 기일제사(忌日祭祀)를 행하므로 보통 기제(忌祭)라고 부른다.
忌祭는 부모.조부모.증조부모.고조부모, 이렇게 4代 祖上의 제사를 각기의 휘일(諱日, 사망일)의 첫새벽(子時경)에 모신다.
시사(時祀) 또는 시제(時祭), 세일제(歲一祭)는 대진(代盡)한 선조의 묘에서 한 해에 한번 지내는 제사로, 대진(代盡)이란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代의 수효가 다했다는 뜻이니 즉, 5대조 부모부터 그 윗대를 이름이다. 대개 이 시제는 봄(3월) 또는 가을(10월경)중 한 날을 지정하여 제사를 모시는 것이다.
海輔公 할아버지의 忌祭가 대진(代盡)한 때는 노진사공(老進士公 秉愚公) 할아버지 代이니 盤龍洞 조문(趙門)의 시제가 그때에 시작된 것이다. 물론 서울의 始祖 할아버지의 세일제 등을 제한 直系 5代祖의 시제를 이른 것이다.
海輔公 할아버지는 어찌하여 서울의 큰댁을 떠나 羅州에 오셨으며 유택(幼宅)까지 그곳에서 머물었을까. 家系를 살려볼 필요가 있다.
公의 祖父는 휘(諱)는 흡(翕), 호(號)는 서창(曙窓) 또는 죽소옹(竹所翁), 분충찬모정사공신(奮忠贊謨靖社功臣 즉, 仁祖 反正功臣)으로 경목공(景穆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으신 풍안군(豐安君)이시다.
1591년(선조 24, 辛卯) 12월 22일에 낳으시고 1661년(현종 2, 癸丑) 정월에 돌아가시니 壽 71이었다. 海輔公이 출생하시기 3년 전이다.
풍안군(豐安君) 경목공(景穆公)께서 돌아가신지 6년 뒤인 1667년((崇禎紀元숭정기원 四十年 현종 8, 丁未)에 송시열(宋時烈, 좌의정, 奉朝賀봉조하) 선생께서 지은(述) 묘표음기(墓表陰記)를 보충하여 손자(孫) 聖輔公(1634~1692)이 추기(追記)한 글 중에, 중운공계(仲耘公系)에 송보(松輔)가 보이는 바, 1664년(현종 5, 甲申)생인 海輔公의 兒名이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비(碑)는 1686년(숙종 12, 丙寅)에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부터 약 10년 뒤, 1679년(崇禎周後숭정주후 五十一年, 乙未라 표기되고 있다) 5월에 세워진 풍안군 조공 신도비(豐安君 趙公 神道碑 - 宋時烈 撰(찬)-)의 추기(追記)는 曾孫인 상경공(尙絅公, 당시 判書)이 지은 바, 그 내용에 “海輔二子, 상신 절형(尙紳 折衡), 상채일자(尙綵一子)”가 보이는데, 尙綵一子가 곧 반(磐, 1735년 乙卯 영조 11년)이시다.
표1. (代數는 南자 기준)
11代組 | 10代組 | 9代組 | 8代組 |
翕 景穆公 豐安君 (1681~1746) (71제1) | 伯耘 | 聖輔(1634~1692) ※1687.8.8~1688.7.21 羅州牧使 公輔 光輔 會輔 | |
仲耘 宰四邑 止信川郡守 | 道輔 | -尙絅 -尙綱 -尙記 | |
弘輔 | |||
海輔 (1664~1728) 56세 | -尙紳 -尙綵 (1704~1768) (65才) |
상경공(尙絅, 景憲公)은 1681년(숙종 7)~1746(영조 22) 기간을 살으신 점을 볼 때 이 추기(追記)는 1735년 이후의 기록이라 짐작된다.
海輔公의 아버지(考)의 휘(諱)는 仲耘, 1616년 (光海 8, 丙辰)에 낳으시고, 1654년(효종 5, 甲午)에 생원(生員)이 되신뒤 4개 고을의 수령을 지내시다 신천군수(信川郡守, 황해도)를 끝으로 관직을 물러났다. 1671년(현종 12, 辛亥) 2월 19일에 세상을 떠나셨으니 형년(亨年) 56세이셨고, 公의 나이 8세 때의 일이다.
다시 살펴보면 海輔公은 당시 23세였고, 백부(伯父) 백운공(伯耘公)이 59세, 종백형(從伯兄, 사촌큰형) 聖輔公이 38세였다. 聖輔公께서는 이미 1660년(헌종 1, 庚子 ) 27세에 사마(司馬, 일명 小科)시와 같은 해에 문과(文科, 일명 大科)에 합격한 바 있어 朝廷에 나가 있었다는 여러 정황을 새겨보면, 伯耘公은 종자(從子) 형제들을, 聖輔公은 종제, 특히 여덟살의 막내 사촌 동생에 대한 연민(憐憫)의 정이 컸으리라는 것은, 聖輔公은 不幸하게도 배 한산이씨(配 韓山李氏)께서는 자식이 없이(无育무육) 돌아가시고, 후배(后配) 연안이씨(延安李氏)께서는 딸 한 분뿐으로 돌아가셨고, 뒤에 맞은 삼배(三配)이신 남원윤씨(南原尹氏)도 무육(无育)이란 기록이 짐작케 하는 바가 많다.
이로하여 聖輔公께서 1687년(숙종 13) 8월, 54세에 나주목사(羅州牧使)로 부임하실 때 從弟 海輔公(당시 24세)을 同伴하게 된 것이다.
1년 임기를 마치고 聖輔公께서는 경도(京都, 서울)로 올라가시게 되었으니 海輔公께서는 계속 羅州에 계셨는지의 문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당시 24~5세의 나이로 새로운 세상을 개척할 뜻을 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때 즉, 1687년 무렵의 큰댁 사정은 道聖公이 당시 38세로 외직(外職)에 나가 있었으며, 아버지 仲耘公이 돌아가신 뒤의 집안성세가 아직은 큰 융성에 미치지 못한 상태에서, 海輔公께서는 羅州에 남기로 결정하신 것이 아닐까.
7. 羅州에서의 정착지(定着地 )
사촌형님이신 聖輔公이 羅州牧使로 도임(到任)할 때 같이 내려 온지 36년이 지난 1723년(景宗 3, 중국연호 옹정 1)의 戶口帳籍의 기록을 보면,
擁正元年癸卯七月 日 羅州牧
考癸卯成籍戶口帳內新村大興龍里住弟十統弟二戶痛德卽趙海輔年六十甲辰本豐壤...(中間 略)
率子尙紳年二十六戊寅子尙綵年二十甲申
仰役婢叔只年四十二壬戊奴太先年十八丙戊等庚子戶口準檢者.
인바 끝 부분의 노비(奴婢) 기록에 경자호구(庚子戶口) 준검(準檢)이라 하고 있다. 이 경자년은 1720년을 말한다. 조선조의 호구조사가 3년 주기(三年周期)로 실시되었다는 것은 앞서 살핀 바 있다.
스물 넷의 나이에 서울 쌍동(雙洞, 아버지가 살던 곳) 집을 떠나온지 36년, 이제 환갑(還甲)의 나이를 앞둔 처지에서, 이 戶口帳籍을 영원히 남기라 하셨을까.
273년이 지난 1996년 7월, 9世孫인 나(熙九)는 이 장적을 다시 한 번 만저보며 한 동안 눈을 감고 있다.
羅州에 오셔서 30여년, 그동안 수 많은 호구조사가 있었는데 다 버리고 오직 이 호구장적만을 남기신 마음을 짐작할 것같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 너그럽고 두터운 사랑으로 항상 깨우쳐 주신 아버지의 사랑, 그 아버지의 운명이 준 상처는 아직도 뚜렷이 떠오르고 있었으리라.
大小家가 어깨를 붙이고 살던 쌍동(雙洞) 집들과 고샅길, 두고 온 고향 30년 전에 돌아가신 聖輔형님..... 이순(耳順)에 들면서 어찌 그립지 않겠는가. 나는 이제 틀렸지만 후대(後代)에서는 기필 서울의 고향집을 “찾아 갈 일이니라”하시며 이 帳籍을 꼭 간직하라 하셨던가.
羅州에서의 定着地 新村의 大興龍里, 그곳은 지금 어디쯤인가.
1750년(英祖 26, 乾隆 15 庚子)의
乾隆 十五年 月 日 羅州牧
考庚午成籍戶口帳內新村面大興龍里住弟十一統弟三戶痛德卽趙尙綵年四十七甲申..... (中略) ..... 率子完年十六乙卯 ..... 以下 略
또한 1780년(正祖 4, 乾隆 45 庚子)의
乾隆 四十五年 五月 日 羅州牧
考庚子成籍戶口帳內新村面松峴里住弟一統弟一戶幼學趙磐年四十六乙卯七 .... 中間略 ..... 妻申氏年四十二己未乙籍高靈 ..... 中略 ..... 曾祖挑源道察訪善泳 .... 中略 ..... 率子鎭誠二十辛巳子鎭泰十六乙酉 ..... 以下 略
이상 세 문건에 나타난 住居를 정리하여 보면,
1723年 新村(面) 大興龍里 10통2호
1750年 新村面 大興龍洞里 11통3호
1780年 新村面 松峴里 1통1호
등으로 변천되었음을 볼 수 있다. 짐작컨대 이 興龍洞里가 人口의 증가로 나뉘어 지면서 송현리(松峴里) 1통1호가 되었으리라. 이는 다음에서 다시 생각키로 한다.
완사천(浣紗泉 ), 全南 羅州市 松月洞 1096-1(古興龍洞)의 기록은 현재 羅州市가 지방기념물로 정비 보존하고 있는 완사천의 안내판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에서 大興龍里 = 大興龍洞里 - 松月洞(古興龍洞)의 명칭 변천을 볼 수 있다. 즉, 같은 地點의 이름이 時代에 따라 변한 모습일 뿐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의하면 그 불우(佛宇)에서,
興龍寺 在錦江津北 高麗太祖莊和王后吳氏 ... 中略 ... 父多燐君世家州之木浦
... 中略 ... 后嘗(상)夢浦龍來入復中 ... 中略 未幾太祖以水軍將軍出鎭 羅州泊舟木浦 望見州上有五色雲氣 至則后浣布 太祖召幸之 ... 中略 ... 于寢席 后卽吸之 遂有娠生子 是爲惠宗 ... 中略 ... 基地建大寺曰興龍寺. 前有泉名浣絲泉 諺云卽 吳氏浣布之泉
“흥용사는 금강진(錦江津) 北에 있다. 고려 태조와 장화왕후가 만난 곳이다. 오씨의 아버지 다린군(多燐君)은 고을안 木浦의 世家이다. 오씨는 일찍이 浦龍이 와 배속에 들어가는 꿈을 꾼 바 있었다. 얼마 뒤 태조(王建)가 水軍 장군으로 羅州의 木浦에 배를 대고 물위를 바라보니 오색찬란한 구름빛(雲氣)이 일어 가 보니 오씨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 불려 침석을 같이 하니 드디어 아이를 뱃다. 이 분이 惠宗이다. 그땅에 큰 절을 지어 興龍寺라 이름하였다. 그 앞에 샘이 있으니 그 이름이 완사천(浣絲泉)이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오씨가 베(布)를 빨던 샘이라고 이른다.”
대개 이런 내용이 적혀 있는 바, 현재 완사천이 남아있는 곳이 古興龍洞이라 했으니 앞에 인용한 설화의 내용에 따라 지어진 “興龍寺”에서 연유하여 지어진 이름이 분명하다.
아울러 금강진(錦江津)은 금천(錦川), 목포(木浦) 또는 남포(南浦)라 불리던 곳 즉, 광탄하류(廣灘下流)라 하고 있으나 지금은 거의가 육지가 되어 도시 주변의 쓸모 있는 용도로 이용되고 있다.
羅州를 옛날에 금성(錦城)이라 하기도 하였다.
1996년 4월 5일 식목일자 한식날에 盤龍洞 趙門, 海輔公 後孫 70여명 일행이 두 분 조상의 유택(幽宅)에 성묘를 드린 바 있다.
趙志衍 將軍(육군소장, 31사단장)의 격별한 정성으로 이루어진 이 성묘길은 前代에는 없었던 처음 일로 참가자(參加者, 어린이로부터 7~80대까지의 남녀노소가 고루 참가한) 모두가 고마워 하였다. 그 때 이 興龍洞이 있었던 地域을 밟아 본 것이다. 실로 300여년만의 일이다. 조장군의 정성에 마음 깊이 고맙게 여겨야 할 일이다.
羅州에서 마지막으로 살으신 반(磐)할아버지는 1735년(英祖 11, 乙卯)에 낳으시고 1784년(正祖 8, 甲辰) 4월 18일, 50세의 일기로 세상을 마쳤다. 고령신(申)씨 할머니의 당시 춘추는 46세, 아들 진성(鎭誠(厚)) 24세, 진태(鎭泰) 20세 때의 일이다.
1786년(正祖 10, 丙午) 4월 대상(大祥, 死後 2年 忌日)을 마치고나니 지난 세월이 허무하고 앞날이 아득하기만 하셨으리라. 더 늙기 전에 어린 아이들을 위하여 큰 작심을 해야할 일이라 굳게 다지고 “내가 어리고만 있을 때가 아니다” 하셨으리라. 수 많은 궁리가 머리에 떠오고, 앞뒤를 셈하여 보고 ....
서울 쌍동 판서댁(雙洞 判書宅), 큰댁은 당시 도보공(道輔公) - 상경공(尙絅公) - 엄공(嚴公)으로 이어져 살고 있는 곳이다. 도보공(道輔公)은 海輔公의 큰 형님이니 1724년(경종 4, 甲辰)에 76세로 돌아가시고,
상채공(尙綵公)의 사촌 형인 상경공(尙絅公), 이분은 1681년(숙종 7)에 출생하신 英祖 때의 文臣이다. 호(號)는 학당(鶴塘), 시호(諡號)는 경헌(景獻). 28세에 사마(司馬)에 30세인 1710(숙종 36, 庚寅)년에 文科에 급제하였다. 이후 조정(朝廷)에 나아가 여러 기복(起伏)이 있었으나 40년 동안에 병조판서 4번, 이조판서 5번 등의 요직을 지냈다.
1746년(英祖 22, 丙寅)에 세상을 떠났다. 관직에서 물러나 집에 있을 때 주위에서 부르기를 쌍동 판서공(雙洞 判書公), 쌍동 판서댁(雙洞 判書宅)이라 불러온 것이, 그 분의 둘째 아들 엄(曮)을 이은 진관(鎭寬) - 만영(萬永) ...으로 이어 왔다.
뒷날 신정황후(神貞皇后) 조대비(趙大批)께서 “吾之子孫은 雖(수)之百代라도 莫稱從氏하고 呼兄呼叔하라. - 우리 풍양조씨의 자손들은 비록 백대에 이를 지라도 종씨라고 일컫지 말고, 항영을 따져 형님이라 부르고 아저씨라고 부르게 하라” 하셨으니 이를 우리는 先祖의 유훈(遺訓)으로 간직하고 있다.
또한 세보(世譜) 4중간보(四重刊譜) 범례(凡例)에 의하면 각파의 항열은 금상 무진년(今上 戊辰, 고종 5, 1868)의 조령(朝令)에 의하여 모두 쌍동파(雙洞派)에 따르기로 한다는 기록이 있다.
쌍동은 지금 어데쯤인가?
한글학회에서 펴낸 “韓國地名總攬”을 보면 재동백송(齋洞白松)이란 항목이 있다. 풀이를 옮기면, 재동 창덕여중고 교정에 있는 백송(白松)으로 수령(樹令) 600년, 우리나라 백송중 제일 아름답고 뛰어난 백송이다.
이 곳은 풍양조씨(豐壤趙氏)의 터로 학당(鶴塘) 조상경(趙尙坰) 이후 7세(世) 판서(判書)가 났고, 익종왕비 신정황후가 살았으며 현재는 창덕여자 중고등학교의 터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말의 격동기를 지내며 많은 제도적 변혁에 따라 쌍동(雙洞)의 마을 이름도 재동(齋洞)으로 변한 기록을 읽을 수 있게 한다.
8. 서울을 향하여
1786년 8월 신(申)씨 할머니는 추석절사(秋夕節祀) 준비를 서들었다. 침채(沈菜, 김치)도 새로 담고 숙채(熟菜), 과실, 유과, 약과(藥果)도 마련하였다.
포(脯)와 게젓 조기젓 그리고 어물(魚物)을 친정에 호남(虎男, 奴)이를 보내서 마련하기로 했다. 친정은 시오리(十五里)길인 회진 고현(會津 古縣)에 있었다.
고령신(高靈申)씨의 한 계열이 나주(羅州) 함평(咸坪) 등지에 살기 시작한 것은 단종 손위(遜位) 때 순창(淳昌)으로 내려온 신말주(申末舟)공의 후손들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나주목(羅州牧)의 성씨(姓氏)란에 회진(會津)땅에는 양(梁)․임(林)․신(申)․서(徐)가 주로 많이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기록에 회진폐현(會津廢縣)란에 「在州西五十里本百濟豆兮縣新羅改令名來屬高麗及本朝因之(재주서오십리본백제두혜현신라개령명래속고려급본조인지) - 회진현은 나주 서쪽 십오리에 있다. 본래는 백제의 두혜현인데 신라가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고려 대에 나주에 속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령신씨 할머니의 증조(曾祖)께서는 도원도(桃源道) 찰방(察訪)을 지내셨다. 찰방은 종(從) 6품관(六品官)으로 현감(縣監)과 동급이다. 각도(各道, 즉 노선)의 찰방은 대개 7~10여개의 역(驛)을 거느려 지휘 감독하는 관청이다.
高靈申씨 先代 여러분의 명성이 이어 왔음을 감지(感知)할 때 당시 회진땅에서도 명문(名門)이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된다.
추석절사(秋夕節祀)후 서당골과 함평 산소, 복바위 산소의 성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서 할머니는 중대한 의논을 시작했다.
진성(鎭誠(厚)), 진태(鎭泰) 두 형제 그리고 제구(祭具)를 짊어지고 오는 호남(虎男, 당시 28세)이 넷이서.
결론은 쉽게 나왔다. 서울의 큰댁을 찾아 가는 것이다. 여장부(女丈夫) 신씨(申) 할머니의 주도하시는 대로 모두가 따랐다. 이제 차분히 준비하는 것만 남았다. 가을걷이를 한다해도 다 짊어지고 갈 수는 없는 일이다. 친정에 맡기고 대신 환전(換錢)하기로 했다. 넉넉한 친정이어서 가능했다.
서당골 산소는 친정에서 돌봐주기로 했고, 함평 산소는 노(盧)씨, 복바위 산소는 이(李)씨, 모두 친정댁에서 정한대로 산직(山直)을 부탁했다.
奴婢(노비)도 정리해야 했다. 비(婢) 철매(哲每)는 나이가 이미 45세(1742, 壬戊)여서 친정에서 일하게 하고, 비(婢) 순매(順每, 1755, 乙亥)와 노(奴) 호남(虎男, 1759, 乙卯)이가 따라가기로 했다. 다소의 짐을 꾸리도록 했다.
로정(路程)도 살펴보아야 했다.
문헌비고(文獻備考)의 증보(增補)판 여지고(與地考) 12에, 당시 우리나라의 도로구분을 사방최긴지9대로(四方最緊之九大路)라 적혀 있다.
그중 경도(京都) - 소사(素沙) - 청호(菁好) - 천안(天安) - 영동(永同) - 공주(公州) - 삼례(參禮) - 금구(金溝) - 태인(泰仁) - 천원(川院) - 청암(靑岩) - 장성(長城) - 나주(羅州) - 영암(靈岩) - 해남(海南) - 수로(水路) .... 제주(濟州) 선이 제 7선(繕)으로 되어 있다.
나주에서 북창(北倉)이 40리, 북창에서 장성(長城)이 40리, 장성에서 청암(靑岩)이 10리, 청암에서 천원참(川院站)이 40리, 천원(川院)에서 정읍(井邑)이 40리, 정읍에서 태인(泰仁)이 30리, 태인에서 금구(金溝)가 40리, 금구에서 삼례역(參禮驛)이 50리의 이정(里程)이니, 나주에서 전라감영(全羅監營)이 있는 전주까지는 300여리가 된다. 3.4일의 일정이면, 우선 전주 감영(全州監營)까지 가서 다시 계획하기로 마음을 다졌다. 전주에서의 일이 잘 이루어지면 겨울이 오기 전에 서울에 닿으리라, 헤아렸다.
9. 저 마을에서 쉬었다 가자.
1786년(正祖 10, 丙子) 중양절(重陽, 9월 9일) 아침 일찍이 祖上에의 간단한 고제(告祭)를 올리고, 서문(西門)밖 서당골 산소에 성묘를 했다. 그리고 회진(會津) 친정에 들려 하직 인사를 올렸다. 그럭 저럭 오전이 다 가고 말았다. 진성(鎭誠, 厚)과 진태(鎭泰)를 따로 불러 앉히고, 외조(外祖) 신학해(申學海)공의 당부 말씀과 작별(作別)의 정담(情談)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1687년(숙종 13, 丁卯) 시할아버지께서 羅州에 내려오셔서 시아버지, 그리고 남편대까지 3대가 살아온지가, 오늘 즉, 1786년까지 만 99년, 햇수로 100년. 참 긴 세월이었다.
다음 날인 9월 10일, 백년의 터전을 뒤로 하고 길을 나섰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을 옮기기가 어려웠다. 세 살 위인 진성(鎭誠, 厚)이 더욱 그랬다. 아우 진태(鎭泰, 당시 22세)는 그래도 서울에 대한 아롱진 꿈을 새기는 듯 어머니의 뒤를 잘 따랐다. 호남이(28세)와 순매(32세)도 마음 한 구석에 섭섭함을 안고 있는 듯 가끔 뒤를 돌아보는 것이 눈에 띠었다. 친정에 두고 온 삽쌀이를 생각하는가.
구령신씨 할머니도 어찌 서운한 마음이 없겠는가. 그러나 겉으로 내보이지 않으며 길을 재촉한다. 의아하게 여기는 一行의 눈치를 아랑곳 없이 함평(咸平)의 가리역(加里驛)을 거쳐 곧장 영광(靈光)길로 접어 든다. 가리역(加里驛)은 羅州에서 북으로 22리 지경에 있는 역원(驛院)이다.
영광(靈光)에 닿아 쉬면서 하시는 설명 말씀은, 장성(長城)의 갈재는 깊고 험하니 조금은 돌더라도 순탄한 길로 가는 것이며, 더욱이 빈손도 아니니 미리 조심하는 것이 상책이라 하셨다. 영광(靈光)을 지나 무장(茂長), 흥덕(興德), 정읍(井邑), 태인(泰仁)에 이르렀다. 싸목 싸목 걸었지만 사흘째가 되니 고단도 하셨으리라. 장부(丈夫)의 기질(氣質)을 품고 있다 하더라도 나이 50에 가까운 처지로 계속되는 행군(行軍)이 어찌 고단하지 않겠는가.
이상에 밝힌 여로(旅路)는 내가 상상한 도정(道程)이다. 장성(長城)의 갈재는 노령산맥(蘆嶺山脈)이 급히 내려오다 거의 멈추는 부분으로, 주위에 내장산(763m), 방장산(733m), 문수산(620m), 태창산(593m) 등이 이어 있는 곳이다. 이러한 깊고 높은 산줄기 골짝을 더듬어 갈 수는 없었을 것이라 생각 되었기 때문이다. 함평과 영광군계에 있는 불갑산(506m)에서 서쪽으로 10km쯤 사이를 둔 평탄한 길 즉, 함평 - 영광의 길을 택하였으리라 짐작한다.
지난 5월 나는 실제로 이 길을 자동차로 지나 오면서 주위(周圍)의 山勢 등을 유심히 살피고, 내가 상상한 로정(路程)을 굳힌 것이다. 그 때 그 할머니도 나처럼 생각 하셨음이 틀림 없으리라 믿는다.
태인 대각다리(大角橋)를 건너서 一行은 읍내로 들어서지 않았다.
당시의 도로선(道路線)으로 따르자면(제7로선) 태인에서 소톤재(肅魚院峙숙어원치)를 넘어 금구(金溝)로 이어지는 길인데, 만일 이 길을 갔더라면 盤龍洞은 보지도, 알지도 못하고 그냥 지났을 것이다.
대각다리(大角橋, 지금 1번 국도상의 거산교에서 약 200m 하류)에서 시리뫼(甑山증산) 골짝을 따라 천아산(天娥山) 기슭 산지촌(山芝村, 옛날은 山直村이라 했다)을 지나 지름재마루에 이르러, 잠시 쉬면서 조망(眺望)했으리라.
이 근방의 지점(地點)은, 옛날 인의현(仁義縣, 골터가 잠멧산 동쪽 기슭에 있었다)에서 심방죽((蒪村박촌)을 지나 반곡(盤谷), 황새물(觀村) 옆을 건너, 귀미란(원평 쇠시장터 너머), 술을재를 넘어 임실(任實)의 오원역(烏院驛, 지금의 관촌부근)을 잇는 구로(舊路)가 있었다.
이 길은 원래 백제시대(百濟時代)에 부안(扶安, 당시 皆伐개벌)에서 내륙(內陸)인 임실(任實), 남원(南原)을 잇는 주요한 요로(要路)였다. 백성들의 물물교환(物物交換)은 물론, 위급한 때는 군용(軍用)도 있었으리라.
내가 어렸을 때 까지만 해도 서지멀(新泰仁) 장을 보러 가는 길로도 이용되었음을 기억한다. 盤龍洞에서 산지동을 건너 지름재, 궁멀(朴山里)을 가는 소로길이라 일렀다.
이윽고 일어서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좀 이르기는 하지만 “오늘은 저 마을에서 쉬었다 가자” 하시었다. 그 때가 1786년 9월 어느날, 저 마을이란 당시의 대이호리암리(大二虎狸岩里), 지금의 반용동(盤龍洞)이었으니, 지금(1996)으로부터 210년 전의 일이다.
하루밤 쉬어 간다는 것이 210년을 살고 있는 셈이다. 어찌하여 그리 되었는지는, 나로서는 상상 또는 추리할 수 없다.
이제 고만 이 박략(薄略)을 줄이려 한다. 나머지는 먼 훗날 또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써질 수만 있다면 ......
○ 뒷 말
1900년(光武 4, 庚子7) 1월 23일 노진사(老進士, 秉愚公) 할아버지께서 작고(作故)하셨다. 할아버지께서는 1823년(순조 23, 癸未)에 낳셨으니 수(壽)가 78이셨다. 상당한 부(富)를 이루셨으며 슬하에 7형제를 두셨다.
참봉(參奉) 할아버지(鏞夏, 肇慶廟參奉 조경묘참봉), 호는 詩蓑시사)는 1854년(哲宗 5, 甲寅)에 낳으시고 1891년(고종 28, 辛卯)에 증광진사(增廣進士)에 급제 하셨다. 1924년(甲子)에 작고하셨다. 서울의 대문중(大門中) 및 요로에 출입하셨으며 시와 학문에 뜻을 두신 것 같다. 노진사 할아버지를 이어(큰형 寬夏(관하)공은 1889년에 45세로 일찍 작고) 집안을 살피셨다.
국운이 다하여 일제(日帝)가 이 나라를 강점(强占)한 시기에 나름대로의 진운을 개척하려는 祖上의 면모도 계셨다.
鳳九(봉구)공은(1890~1929), 개화사상에 깊이 심취하였으며, 일찍 기독교를 신봉하셔서 1923년경 신태인 제일교회 개설을 주도 하셨다.
東玹(종현)공(호 愚軒(우헌), 1892~1952)께서는 현실 참여에서의 개혁의지를 가지셨으며 일찍이 28세 무렵인 1920년대에 면장(面長) 등을 역임하면서 선진사회인 일본을 시찰 하신 바 있다.
나라가 망하니, 집안도 말 할 여지가 없었다. 기울어가는 집안 살림을 일으키기 위한 노력도 나름대로 발휘한 흔적도 보인다. 사회가 변하면 새활의 모습도 변한다.
성실한 농부가 되어 묵묵히 일하는 모습이 차차 부각되었다.
문중(門中)을 지키고 선조의 유훈을 실천하려는 노력도, 갖가지 의견 충돌을 딛고 다듬어 나갔다. 주로 東宣공(동선공, 1879~1953), 東俊공(동준공, 1894~1949), 東玧공(동윤공, 1899~1969), 駿九공(준구공, 1901~1952), 이 어른들의 노고가 기초되어 오늘에 이어지고 있다.
東烈공(동열공, 1907~1984)은 일찍이 금융조합을 거쳐 광산업에 투신한 바도 있었고, 초기 지방자치 시대에 면의회 의장도 하셨다.
금년 초에 작고하신 東信공(동신공, 1907~1996)의 공을 잊어서는 알될 일임을 끝으로 말씀드리고 싶다. 누군가 이 어른들에 대한 더 깊은 연구가 있어, 기록되기를 희망한다.
이 글에 序文을 주신 從兄 小軒 應九형님께 감사드리며, 아울러 이 글을 쓰기에 청량한 촉진제를 제공해 준 志衍 將軍과 각종 자료 열람에 큰 도움을 제공해준 全北大學校 중앙도서관 汽衍 과장, 井邑市廳 豐衍, 그리고 申龍玉, 蔡聖基 친구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이 엷은 책을 출판해 주신 馬韓文化社 정덕용 사장님과 직원 여러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 희구 합장 -
○ 부록 盤龍洞 서사(叙辭)
詩集 “오동나무 가지에 눈이 내린다” 中에서 발췌 전재함.
序
발소리가 들린다.
보이는 듯 감춰있고
나래 끝 바람 돌아도
속 차게 아늑하다.
터 잡아
숲을 돌리고
소망의 땅
걷는 길.
용(龍)이 따라와 서리고
동류수(東流水)
한 구비 부풀어
물결치는 바람 속을
손매디 여물었으니
사람들
그저 숫박이로
살아 왔고
살고 있다.
동기연지(同氣連枝)
벋어나
스멀대는 산과 들
즈믄해
즈믄해를
온전하게 보전하니
아이야
함께 있을 나
새롭게 다듬는
너와 더불어.
盤 龍 洞
반거(盤踞)로 터를 닦고
수를 놓아 가꾸어서
용탁(聳擢)을 이뤘으니
사방에서
바라 뵈우네
동천(洞天)에
용이 서리니
반용동(盤龍洞) 이더이다.
※ 용탁(聳擢) - 특출하다.
※ 반거(盤踞) - 단단하게 뿌리 뻗힘. 서리 서리 걸침.
순 덕 봉
순탄한
기복(起伏)이다
스멀대는 산과 들
덕문(德門)을 감쌓아
구름 불러 드리우고
봉황이 숨긴 높은 뜻
서리서리
돋아나리.
큰 감 뫼
큰 뜻이 담겼으니 어설피 말을 말고
감단(坎壇)을 쌓은 일은 한시라고 잊을손가.
뫼심에 정성 다하라 할아버지 말씀이네.
※ 감단(坎壇) - 제사지내기 위하여 판 구덩이와 땅에 쌓은 단.
坎 - 寒神과 川谷泉澤의 神에게 제사 지내는 일
壇 - 暑神과 山林丘陵의 神에게 제사 지내는 일
당 산 메
당산을 뫼신 뜻은 삼국(三國)이래 풍속이라
산리(山理)는
우거지고
검푸르게 가꾸어서
메아리
메아리로 오는
순한 바람
마시느니.
※ 산리(山理) - 민속에서 묏자리의 내용(來龍).방향.위치에 따라 재앙과 복이
좌우된다는 이치를 이르는 말.
여기서는 조상의 유훈을 잘 지켜야 한다는 뜻으로 썼음.
삼 청 샘(三井)
삼계(三界)는 일심(一心)이라
부처님 말씀이요
정화수 새벽으로
정성을 다 하심은
샘물로
새롭게 솟을 날을
보자
하심이네.
잔 등 재
잔잔한 표정인데
생각은 칼날 같다.
등정각(等正覺) 이르는 길이
이 고개에 있으리니
재품(才品)은
타고도 나지만, 그저
닦아야만 하는 것.
큰 새 암
큰 새암 물박 맛은
차고
달고
옹골 졌지
새 물내 흠벅 베어
언제나 한결 같고
암차게 큰 두리 둘레는
오백 식구
거두었으니.
모 정 등
모여서 두루 두루
의논하면 정명(正明)하고
정구(井臼)를 헤아리며
들돌도 메고 안고
등(燈) 밝혀
솜씨 벤 멍석에
북두(北斗)는
내려왔다.
※정구(井臼) - 정구지역(井臼地域)의 준말이다.이는 우물물을 긷는 일과 절구질 하는
일이라는 뜻으로 살림살이에 관한 일이라는 뜻.
※ 북두(北斗) - 북두칠성의 준말, 여기서는 길을 인도한다는 뜻으로 행운을 의미한다.
洞 記 (門記薄略)
1996년 7월 25일 인쇄
1996년 7월 31일 발행
著 者 : 趙 熙 九
印刷處 : 馬 韓 文 化 社
☎ 84-3112
(200부 한정판)
<비 매 품>
80쪽으로 만들어진 책 “洞 記(門記薄略)”를 옮겨 기록하는 일을 마칩니다.
2006년 4월 5일(수요일)
南 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