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과 기자(箕子)와 위만(衛滿)
조선(朝鮮) 서북부(西北部)에 기씨(箕氏) 조선(朝鮮)이 있었는데 한참은 왕성하였더라.
처음 은인(殷人) 기자(箕子)가 나라의 난(亂)을 피하여 조선(朝鮮)에 와서 왕검성(王儉城)에 거(居)하여 백성에게 팔조(八條)를 가르치고 나라를 세우더니
후손(後孫) 기준(箕準)에 이르러 연인(燕人) 위만(衛滿)에게 속인바 되어 나라를 잃고 바다를 건너 남(南)으로 금마군(金馬郡)에 이르러 스스로 왕(王)이라 칭(稱)하고 위만(衛滿)은 기준(箕準)의 땅을 빼앗아 한때 웅(雄)을 칭(稱)하다가
손자(孫子) 우거(右渠)에 이르러 한무제(漢武帝)의 멸(滅)한바 되고 그 땅에 사군(四郡)을 두니 낙랑(樂浪)(평양(平壤)) 임둔(臨屯)(강릉(江陵)) 현도(玄菟)(함흥(咸興)) 진번(眞番)(압록강류상(鴨綠江流上)) 등(等) 고을들이라.
이때에 북(北)에는 부여(扶餘)와 사군(四郡)이 있었고 남(南)에는 삼한(三韓)이 있어 서로 싸움이 쉬지 않았느니라.
<한글>
제3과 기자와 위만
조선 서북부에 기씨조선이 있었는데 한때 매우 강성했습니다.
처음에 은나라 사람 기자가 나라의 난리를 피해 조선에 와서 왕검성에 거주하며 백성들에게 8가지 교훈을 가르치고 나라를 세웠습니다.
그의 후손 기준 때에 이르러 연나라 사람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바다를 건너 남쪽 금마군에 이르러 스스로 왕이라 칭했습니다.
위만은 기준의 땅을 빼앗아 한동안 패권을 휘둘렀다가 그의 손자 우거 때 한나라 무제에게 멸망당했고 그 땅에 낙랑(평양), 임둔(강릉), 현도(함흥), 진번(압록강유역) 등의 고을이 설치되었습니다.
이때 북쪽에는 부여와 사군이, 남쪽에는 삼한이 있어 서로 계속 싸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