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재일 : 2003년 11월 20일 [30면] 글자수 : 1874자
기고자 : 하재식 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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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26년째 국선도 수련 중 일흔에도 목소리가 '청년'
'정심(正心)·정시(正視)·정각(正覺)·정도(正道)·정행(正行)!'.
지난달 24일 오후 충북 영동군 영동읍 국선도대학 2층 수련장. 국선도의 다섯가지 '훈(訓·가르침)'이 우렁찬 목소리에 실려 창문을 타고 퍼져나갔다. 밖으로 내다보이는 영동천을 따라 길게 줄지어 서 있는 감나무에 매달린 붉은 감들이 가을의 운치를 더해주고 있었다.
이윽고 지난 3월부터 국선도 세계연맹 총재로 활동해 온 안응모(安應模·73) 전 내무부 장관이 수련생들 맨 앞에 앉아 엉덩이를 바닥에 댄 채 두 다리를 양 갈래로 길게 쭉 폈다. 그리고선 가슴을 바닥에 바짝 대고 약 2분간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단전호흡을 했다.
국선도 기본동작 시범이 끝난 뒤 기자가 다가가 "연로하신데도 몸이 매우 유연하다"고 말했다. 그는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30년간 국선도를 수련한 덕분"이라며 "건강만큼은 내 나이 또래 누구한테도 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安총재는 이날 오전 서울에서 이곳으로 내려와 올 초 국내에서 처음으로 국선도학과가 개설된 영동대학(총장 채훈관)과 향후 국선도 공동연구 및 국선도학과 졸업생의 사회진출 등에서 협력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협정서를 체결했다.
그가 국선도와 인연을 맺은 것은 치안본부(현재의 경찰청) 기획감사과장으로 재직했던 1977년.
"당시 한달간 감기가 떨어지지 않아 고생했는데 아는 사람이 국선도를 해보라고 권유했어요. 그래서 서울 종로3가에 있는 국선도 본원을 찾아갔어요. 그때 7세 때부터 20여년간 산중에서 국선도를 수련한 뒤 67년 세속으로 나와 국선도를 전파했던 청산선사(본명 고경민)를 만났죠. 청산의 지도 아래 한달간 수련하니까 감기증세가 사라지고 기분이 아주 상쾌해졌지요."
그는 "국선도 덕분에 요즘도 목소리가 아이처럼 청량하고 맑다는 말을 들어요. 집에 걸려온 전화를 받으면 집사람 친구들이 나에게 '어머니 바꿔라'라고 해요. 그러면 남편이라고 말하는 게 귀찮아 '네, 잠깐 기다리세요'라고 한 뒤 아내에게 전화기를 건네주죠"라고 말했다.
특히 安총재는 정시 출퇴근을 전혀 모르고, 아내와 여행 한번 제대로 못했을 만큼 숨가빴던 자신의 공직생활에서 국선도가 건강에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황해도가 고향인 그는 53년 순경으로 경찰 근무를 시작, 29년 만에 경찰 최고위직인 치안본부장까지 승진했다. 이후 조달청장·안기부 1, 2차장·내무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맑은 마음과 높은 도덕성을 갖지 않으면 머릿속에 잡념이 생겨 국선도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어요. 국선도에는 어떤 마술이나, 비법이 없습니다. 오직 수련을 통해서만 일정한 경지에 오를 수 있죠. 돌이켜보면 국선도 때문에 성실하게 국민에게 봉사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安총재는 "85년 홀연히 산중으로 돌아가 세속과의 인연을 끊은 청산은 초능력을 가졌던 분"이라며 "청산선사의 국선도만이 진짜 국선도"라고 강조했다. 또 "최근 청산의 국선도를 변형시켜 사리사욕에 이용하려는 이들이 있어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청산은 눈에서 광채가 났어요. 한번은 제 손으로 그분의 손가락 하나를 잡고 팔씨름을 해봤는데 손가락이 어찌나 단단한지 마치 강철 같았어요. 그분이 84년 초 저를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저에게 '앞으로 국선도를 발전시켜 달라. 꼭 국선도의 울타리가 돼 달라'고 당부하더군요."
그는 "국선도는 우리 민족 형성과 함께 시작된 민족 고유의 심신수련법"이라며 "역사적으로 보면 국선도가 성하면 국가가 부흥했고, 국선도가 사회에 받아들여지지 않고 겨우 명맥만 유지하면 국가가 쇠락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