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이야기
재치 넘치는 오소리의 복수
오소리와 벼룩 <글 안도현, 그림 김세현>
2019. 4. 향기 이영란
벼룩들이 아슬아슬 나무토막 타고 떠내려가고 있었어
강둑에 사는 오소리가 발견했지.
단숨에 뛰어들어 구해 주었지. 가여웠던 거야.
아등바등 매달린 벼룩, 와글와글 떠드는 벼룩,
피둥피둥 살찐 벼룩, 호리호리 마른 벼룩,
오들오들 떠는 벼룩, 열이 펄펄 나는 벼룩,
오소리는 나무토막 물고 발뒤꿈치 들고
조심조심 강둑 밑 굴속으로 돌아왔어.
굴속이 어두워 동그란 두 눈에 불을 켰지.
오소리 두 눈에서 푸른 불빛 노란 불빛 흘러나왔지.
물에 젖은 벼룩 입김 불어 곰실곰실 말려 주고,
뚱뚱 벼룩 밑에 깔린 납작 벼룩 빼내 주고,
발길질에 차인 벼룩 일으켜 주고 세워 주고,
오소리는 벼룩들을 아기처럼 안고 잤지.
벼룩들은 오소리 털을 이불처럼 덮고 잤어.
오소리 품에 새근새근 자던 벼룩, 드렁드렁 코 골던 벼룩,
한밤중에 배가 고파 살금살금 파고들었어.
오소리 살 속으로 파고 들었어.
할아버지벼룩, 할머니벼룩, 아빠벼룩, 엄마벼룩, 누나벼룩,
동생벼룩, 며느리벼룩, 사위벼룩, 고모벼룩, 이모벼룩, 사촌벼룩,
팔촌벼룩, 안사돈벼룩, 바깥사돈벼룩, 처제벼룩, 처남벼룩
모두 깨어 오소리 피를 빨아먹기 시작한 거야.
오소리는 가려워서 뒤척이다 한숨도 자지 못했지.
오소리는 아파서 뒤척이다 한숨도 자지 못했어.
아니 아니 잘 수 없었지.
견디지 못한 오소리 마침내 굴속을 뛰쳐나갔어.
발톱으로 박박 긁었지. 털을 북북 쥐어뜯었지.
바위에 쓱쓱 몸을 비볐지. 언덕을 데굴데굴 굴렀지.
네 발을 마구마구 흔들었지.
그래도 벼룩들은 떨어지지 않았어.
떼 놓으면 달라붙고 잡으려 하면 튀어 달아나고.
이튿날 아침 견디지 못한 오소리, 한숨도 자지 못한 오소리,
벼룩들이 타고 온 나무토막 입에 물고 쏜살같이 강가로 달려갔지.
강물에 꼬리를 담갔지.
벼룩들이 에구머니나, 허리께로 올라왔어.
다음엔 허리를 강물에 담갔지.
벼룩들이 나 살려라, 목덜미로 올라왔어.
그다음엔 온몸을 강물에 담갔지.
벼룩들이 허겁지겁 나무토막으로 옮겨 앉았어.
이제야 살았구나.
벼룩들이 춤추고 노래 부르고 휘파람 불 때......
때는 바로 이때다.
주둥이만 물 밖으로 내민 오소리, 갑자기 나무토막을 뱉어 버렸어.
물속으로 쏙 들어간 오소리, 강 언덕으로 혼자 풀쩍 뛰어올랐지.
벼룩들이 아슬아슬 나무토막 타고 떠내려가고 있었어.
멀리멀리 둥실둥실 떠내려가고 있었어.
하루 24시간, 학교를 다니면서 바짝 긴장하며 근무하는 시간은 온전히 8시간이다. 그러면 수치상으로 잠자는 시간 7시간 정도를 빼고 나면 9시간의 여유시간이 나와야 하는데, 나는 그걸 가져 본 적이 없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그 시간은 어디로 분해되었단 말인가?
그 9시간의 시간을 분해해 본다. 나는 늘 퇴근이 늦었다. 출근은 8시 30분, 퇴근은 4시 30분이다. 얼핏 보면 그런 꿈의 직장이 없는 듯 싶다. 그러나 나의 퇴근은 늘 6시가 다 되어야 했다. 최근 몇 년간의 시간을 돌이켜 보면 물리적으로 퇴근을 하였다 하더라도 교실에서 있었던 불편한 감정을 연장하면서 아이를 미워하거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나 자신과의 모순에 시달렸다. 항상 납득되는 상황에서 살 수만 없는 현실에서 도망갈 수 없어 버티느라 용을 써야 했다. 혹은 섭섭하거나 화나는 감정을 여과 없이 쏟아 붓는 학부형으로 인해 두렵기도 했다. 다음 날 수업을 머리로 그리거나 구체적인 학습자료를 찾아서 준비해야 했고 기획을 해야 할 업무는 한참동안의 예열을 거쳐야만 윤곽이 대충이나마 잡혀졌다. 그렇게 나의 9시간은 여기저기서 모두 뜯어먹힌 채 너덜거리고 있었다. 사는 일이 나만 고달팠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은 제각기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산 위로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하는 시지프의 운명을 지니고 있다. 나는 내가 밀어올린 바위의 힘겨움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그 힘겨움이 좁은 소견의 이기주의자를 그나마 조금 다듬어 놓았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는 끊임없이 기대치를 낮추게 되었고, 살면서 겪을 수 있는 최악의 경우를 직간접으로 보면서 경험의 수치를 쌓아올렸다.
안간힘을 쓰느라 이마에 내 천(川)자를 무던히 그렸던 날들을 뒤로하고 나는 고요하게 내려앉은 시간의 선물을 받고 있다. 지금 보내고 있는 순간이 그렇게 깊숙이 내려앉았던 시간들에 대한 당연한 보상이라는 건방진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런 시간이 없었더라면 이 귀한 시간의 고마움과 절절함은 없었을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다.
습관처럼 일상으로 서두를 시작한다. 글의 논리성으로 치면 핵심에서 벗어난 이야기가 더 많은 나의 글은 예선탈락감이다만, 당장 쓸모없는 것에 대한 집착의 나의 역사는 오래 되었다. 학교 성적과 혹은 승진과 다수의 흐름에서 비켜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을 때 나는 나다울 수 있었다. 즐겁고 편안했다.
학교를 다닐 때보다 그림책에 손이 덜 간다. 도서관을 제 집처럼 들락거려도 책갈피에서나 학부모동아리 모임에서 다룰 기회가 없다보니 용불용설의 법칙이 적용되어 그림책 코너에 발길이 잘 가지 않는다. 쉬는 기회에 그림책 정리도 생각을 해 두었건만 뭐든지 마음대로 되지는 않는다.
‘아는 작가의 법칙’은 그림책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새로운 작가를 발견하는 수고로움 때문에 이미 알고 있는 작가의 작품에 손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안도현 시인이 쓰고, 김세현 화가가 그림을 그린 <오소리와 벼룩>은 조선의 문인이자 실학자인 이덕무의 <청정관전서>에 나오는 서너 줄의 이야기에 살을 붙여 만든 그림책이다. 원작에서는 오소리 대신 족제비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데, 구해준 은혜를 모르는 벼룩을 물리치는 이야기이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집은 본채에 그나마 쓰레트 지붕이 대강 얹혀져 있었고, 별채는 변소간, 마굿간과 아주 허름한 방이 있었다. 집의 위치가 낮아서 여름철 비가 오면 부엌 아궁이에 들어찬 물을 퍼 내느라 소동이 일었다. 이는 주변에 흔했지만, 나와는 그리 상관이 없었고, 엄마는 그걸 자랑으로 여겼다. 벼룩은 더더욱 잘 모르는 일이었다. 있었을 수도 있지만 벼룩으로 힘들었던 기억은 없어 오소리의 고통에 감정이입은 다소 어려운 감이 있다.
서자 출신의 이덕무는 오랫동안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을 보내었다.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맹자 책을 팔아 양식을 샀던 그는 현실적 삶은 고달팠으나 그의 깊은 학문과 그것을 나눌 수 있었던 홍대용, 유득공, 박제가, 박지원, 무사 백동수 등이 있었고, 그를 알아준 정조임금이 있었다. 깊은 학문과 근엄한 세계에서 발견한 유머와 재치 넘치는 오소리의 행동은 오늘날의 아이들에게 들려 주어도 세월의 더깨를 느낄 수 없을 것 같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오소리의 복수가 유쾌하고 통쾌하다. 너무 비극적이지 않은 결말, 열린 결말에 도덕적 죄책감도 덜하다. 유머는 상대에 대한 벽을 허물어 주고 경계하는 마음을 단숨에 무장해제 시킨다. 유머를 갖춘 인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마지막으로 그림책을 읽는 팁 하나만! 소리내어 리듬을 살려 읽으면 더 맛이 난다고 한다. 이렇게 멋진 동화로 만들어 낸 안도현 시인과 김세현 화가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