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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당선소감:시가 되는것들은 기쁨과 멀어, 그런데도 시를 쓰는건 ‘기쁨’
기쁘지만 겁도 난다면 배부른 소릴까요. 그래도 배고픈 것보단 나은 거겠죠? 당선 소식에 광막해지는 기분입니다. 이제부턴 네 글을 읽는 게 누군지 모를 수도 있어, 말하는 것 같았거든요. 그 이제가 지금이고요. 99.99%의 확률로 나는 당신이 누군지 모릅니다. 그래서 아무나 붙잡고 말해볼 겁니다. 읽어줘서 고마워요. 나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한때는 천재로 불리는 사람들을 부러워했어요. 일필휘지, 촌철살인, 영감과 미문. 근데 따라 해 봐도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나는 바보다 생각하고 쓰기로 합니다. 나는 제일의 바보다. 놓으면 놓아지는 두루마리 휴지처럼, 잡으면 잡힌다는 푸른발부비새처럼. 너무 무지해서, 누군가를 미워하는 방법도 모른다는 양.
알던 것도 모를 거고, 울면 안 되는데 울 거고, 이태리산 스파게티 면은 두 동강 내어 삶을 겁니다. 있지도 않은 원수들을 하나하나 찾아가 나는 당신을 용서해요, 라고 너무 쉽게 말하는 일을. 쟤는 어쩜 멍청한 말 하기론 제일이네, 소리를 듣는다면 칭찬으로 여길 겁니다. 뭔들 일등이면 좋은 게 아니던가요.
물론, 암만 생각해 봐도 시가 되는 것들은 기쁨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럼에도 시를 쓰는 건, 기쁨일 거예요. 나는 지금 푸른 발바닥을 신은 기분입니다. 어디로 가는지 몰라도 어딘가로 가고 있을 겁니다. 생각과 태도가 비슷해 편한 형준. 쓸수록 이어지던 글처럼 인연이 되어준 용준, 민성, 준형, 예은, 연덕. 마지막 퇴고를 도와준 지민. 나를 짚어주신 심사위원분들과 당선 자리를 내어준 수많은 문우들에게 감사합니다. 철딱서니 없지만 악함도 없어 자랑스러운 영찬, 태선, 선기와 윤곤. 천국을 본떠 만든 게 분명한 나의 가족. 그리고 기도하는 마음을 알려주신 이학순 여사께도 두고두고 감사합니다. -장희수△1992년 대전 출생
● 심사평:소소한 이미지로 삶-죽음에 대한 사유 성공적 이끌어내
조강석 씨(왼쪽)와 정호승 씨.시에 더욱 많은 것을 요청할수록 오히려 무게를 덜어내야 한다는 역설을 생각해 보게 하는 심사 과정이었다. 현대시가 그 어떤 때보다 ‘실재(혹은 실제)에 대한 열정’을 감당해 내야 하는 무게와 싸우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상당한 질량을 보유했으리라는 기대를 담은 관념어의 나열로도, 언어 경제를 잃은 장황함으로도 해결될 수 없다. 이번 본심 대상작을 중심으로 단적으로 말하자면 늘이고 포개는 것보다 오히려 줄이고 깎는 일이 더욱 관건이라는 사실이 확연히 눈에 띈다.
‘귓속’은 단정한 진술과 매끄러운 비유로 우선 관심을 끌었다. 경청의 무게와 깊이가 절실한 이즈음의 사정과도 잘 부합하는 주제다. 그러나 ‘이 대목이 반드시 필요한가?’ 하는 의문을 감당하기 어려워 보이는 대목들이 특히 시의 후반부에 여럿 눈에 띄었다. 시는 일자천금의 세계이기도 하거니와 절제를 화두로 언어와 씨름하는 장르이다. ‘결심과 결실’의 경우도 사정은 비슷했다. 시의 내적 논리가 무리 없이 전개되며 종반부의 전언을 독자가 수긍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그러나 종반부로 치닫기 직전에 제시된 부분의 느슨함과 평이함 그리고 장황함이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을 법하다.
‘사력’은 그런 점에서 최종적으로 검토의 대상이 될 만했다. 할머니의 죽음을 중심 소재로 하되 사건을 세세히 묘사하는 대신 소소한 이미지들을 그러모아 사건에 육박하게 하는 자연스러움이 돋보였다. 이를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한 독자의 사유를 이끌어내는 것에도 성공하고 있다. 군더더기 없이 능숙하게 쓰인 작품이다. 그 숙련에 더 많은 모험이 함께하기를 기대하며 축하의 악수를 건넨다.
정호승 시인·조강석 문학평론가(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2025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아름다운 눈사람/이수빈
선생님이 급하게 교무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신다 나는 두 손을 내민다 선생님이 장갑을 끼워주신다 목장갑 위에 비닐장갑을 끼우고 실핀으로 단단히 고정해주신다 나는 손을 쥐었다 편다 부스럭 소리가 난다 마음 편히 놀아 선생님이 말씀하신다
운동장 위로 얕게 쌓인 눈 새하얗고 둥글어야 해 아이들이 말한다 눈을 아무리 세게 쥐어도 뭉쳐지지 않고 흩어진다 작은 바람에 쉽게 날아간다 흙덩이 같은 눈덩이를 안고 있는 아이들 드러누워 눈을 감고 입을 벌리는 아이들 나는 조심스럽게 눈을 다룬다 개를 쓰다듬듯 품에 안은 채 몇 번이고 어루만진다 눈덩이가 매끈하고 단단해진다 아주 새하얗고 둥근 모양의 완벽한 눈덩이를 갖는다
눈덩이가 내 품속에 있어서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고 그 세상이 아름다운 것도 같고 서툴지 않은 피아노 연주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한데
하고 있던 목도리를 푼다 모자를 벗는다 장갑은 잘 벗겨지지 않는다 내 눈사람은 너무 잘 챙겨입어서 더 이상 눈사람 같지 않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이들은 교실로 돌아가고 없다 밟히고 파헤쳐져 더 이상 하얗지 않은 운동장을 본다
선생님 제 눈사람이 가장 새하얗고 둥글어요 그리고 또 커요 나는 말하고 선생님은 오랫동안 내 눈사람을 바라보신다 어찌할 수 없어서 울고 싶은 듯한 표정으로 선생님이 서 계신다 나는 선생님을 이해할 수 없지만 같이 울상이 된다 이 순간을 지워버리려는 듯이 하늘에서 눈이 펑펑 내린다
당선 소감:수많은 손이 날 다독이며 ‘잘 쓰고 있어’ 말해준 기분
고등학교 수업 시간에 수업을 듣는 대신 몰래 시집을 읽곤 했다. 어느 날은 읽고 있던 시집이 너무 좋아서,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아쉬워 눈물이 고였던 적이 있다. 그때 교실에 두근대던 내 심장 소리가 종소리보다 크게 울려 퍼졌다. 그 순간이 지금 나를 여기까지 데려다 놓은 것 같다.
나는 아직도 좋은 시가 무엇인지, 시를 쓰는 일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멋있게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시를 사랑한다고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하루에 백 편이 넘는 시를 읽어도 지치지 않는다고, 단 한순간도 시를 쓰는 일이 지겨웠던 적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해준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다.
나 글 쓰고 싶어. 그 한마디에 지원을 아끼지 않은 엄마 아빠에게 고마워. 내가 이뤄낸 게 아니라 우리가 함께 이뤄낸 거라고 믿어. 서로가 서로의 팬이었던 스터디 사람들, 전부 다 잘될 거야. 언제나 내 가장 큰 힘이 되어주었던 고양예고 15기 친구들아, 너희의 사랑이 나를 키워냈어. 내 가장 오랜 친구 정연이 가연이 그리고 민정이,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었던 승주 언니, 정말 사랑해.
저를 가르쳐주신 모든 선생님, 교수님께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 제가 시를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김기형 선생님, 저를 믿어주시고 아껴주신 유계영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제게 좋은 선생님이 되어주신 오양진 교수님, 언제나 마음 써주시고 제가 더 재밌게 시를 쓸 수 있도록 도와주신 김언 교수님, 정말 감사해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부족한 제게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님들께도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 온 마음, 온몸으로 쓰겠습니다. 지켜봐 주세요.
기적이 일어났다고밖에 표현을 못 하겠다. 수많은 손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잘 쓰고 있어’라고 말해주는 기분이다.
마침내 사랑이 눈에 보이는 것만 같다. 이 사랑에 끝까지 충실하고 싶다.
이수빈-2004년 서울 출생, 고양예고 문예창작과 졸업, 추계예대 문예창작과 2학년 재학 중
심사평:시단에 신선한 바람 불어넣을 ‘감각의 사용’ 갖춰
시는 구르고, 잠시 멈추고, 다시 움직인다. 시장과 광장, 평원과 대양(大洋)과 우주로 나아간다. 사람들의 말 속에 들어 있고, 뿌리와 내일의 새잎, 발톱과 단단한 근육에 깃들어 있다가 시의 바퀴는 구동한다. 시는 모든 곳에 있고, 도달하지 못할 곳 또한 없다. 시인은 이 시적 에너지를 자유롭게 풀어놓고, 때로는 붙들어 앉히느라 매 순간 아픈 사투를 벌인다. 우리가 시를 읽으며 기대하는 것은 솟구치는 힘과 고요한 정려(精慮)가 교차하는 특별한 경험이다. 그러나 시는 헤쳐가며 구르는 것이어서 기저가 없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 기저는 관계의 접면(接面)이라고 할 수 있고, 기저로 인해 시적 비전이 제시될 수 있다.
본심에 올라온 열한 분의 작품을 세심하게 읽었고, 최종적으로 숙의한 작품은 「주머니 자라기」, 「중력」, 「아름다운 눈사람」이었다. 「주머니 자라기」는 ‘나’를 구성하는 것의 내용을 감각적인 표현을 통해 상술했다. 시적 화자가 키우고, 모으는 것의 목록을 제시했다. 그것들은 대체로 불완전한, 멀쩡하지 않은 것이었는데, 이 구성물들이 내포하거나 환기하는 것이 다소 모호했다. 「중력」은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한 시였다. 시행 곳곳에 묻어둔, 곧 터질 굉음은 마치 묵시록적 느낌을 무겁게 줬고, 현실에서 끄집어낸 시의 언어는 매우 힘이 있었다. 아쉬운 점은 공간의 이동이 눈에 띄게 계획되고 짜여 있다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눈사람」을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에 의견을 모았다. 이 시는 풍요로운 서정이 돋보였다. 시의 보행(步行)이 차분하면서도 감각의 사용이 단순하지 않았다. 하얀 눈과 둥글고 큰 눈사람이 상징하는 것은 순백과 순수의 세계임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시의 매력은 운동장에, 즉 교실 바깥에 펼쳐져 있거나 세워져 있는 그 세계가 다가올 미래의 시간에 곧 짓밟히고, 녹아내려 울상을 보이며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암담한 예감에 있었다. 어떤 막막함과 뭉클한 슬픔이 길게 여운으로 남는 시였다. 미성(美聲)을 잃지 않고, 시심을 잘 지니고 키워서 우리 시단에 신선한 바람을 계속 불어넣어 주길 고대한다. 당선을 축하한다.
-심사위원 - 정끝별, 문태준 시인
2025,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디스토피아/백아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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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스틱 인간을 사랑했다. 손등을 두드리면 가벼운 소리가 나는. 그는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말할 수 없었다. 그 대신 자기가 피우는 카멜 담배의 낙타가 원래는 이런 모양이 아니었다거나 레몬청을 시지 않게 만드는 법 같은 것들을 말해줬다. 나는 그의 말들을 호리병에 넣어두었다. 언젠가 그것들로 유리 공예를 하고 싶었다.
매일매일 그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의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에는 항상 쇼윈도 불이 꺼지고, 조명 상가들도 문을 닫았다. 집에 돌아가면 투명한 호리병을 한참 바라보다 잠이 들곤 했다. 그의 작은 이야기들을 모아둔 호리병을.
그와 있다 보면, 아주 잠깐이지만, 세상이 진짜라고 믿어졌다. 그도 마찬가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망가진 두 사람이 서로에 의해 회복되는 우울한 로맨스 영화처럼.
우리 사이에 아이가 태어난다면요, 내가 엄마를 찾아볼게요.
어느 날은 그늘에 있기엔 너무 추웠다. 날씨는 좋았지만 바람이 찼다. 당신도 춥지 않아요? 물어보려던 것을 꾹 삼키고 말았다. 나는 그 공원에서 덜덜 떨며 그가 얘기하는 것을 들었다. 오랜만에 행운목에 물을 주고 왔어요. 행운목은 물을 자주 주지 않아도 잘 살지요. 나는 가만 듣다가
당신은 왜 이렇게 나에게 관심이 없어요? 나라고 아무런 사연도 없는 줄 알아요? 화가 치밀었다. 그동안 그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한 건 아니었다. 나는 그의 사연이 알고 싶었고, 그 역시 나의 사연에 대해서도 궁금해하길 바랐다. 그늘에서 바깥으로 걸어 나갔고 그는 벤치에 그대로 앉아서 텅 빈 손을 흔들었다.
그를 정면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의 플라스틱 피부에 덧칠된 이목구비와 단 하나의 표정을 보았다.
가까운 미래에 사랑이 있을 거라고 줄곧 생각해 왔는데. 지금껏 그와 나 둘 중 누구도, 서로에게 안기지 못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나는 우리가 제조 일자가 쓰인 전구처럼 동시에 빛나고 동시에 꺼지길 바랐다.
저수지에 가서 호리병을 거꾸로 들고 바닥을 두드렸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깨뜨려보려고 주먹을 쥐었을 때, 어디선가 엄마를 찾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고 나는 호리병을 그대로 버려둔 채 바깥으로 달려갔다.
도망친 곳에는 메시지가 있었다. 그가 폐기되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것이었다. 내가 가짜였더라도 당신은 적당히 건강하게 지내요. 이따금 사람들과 핑퐁을 치기도 하고. 오래된 불안과 결핍은 나를 더 아쉽게 할 테니까요. 당신의 이마는 부드러웠어요.
나는 그가 닫아준 몇 줄의 감상과 조용한 꿈들을 기억하려고 했다.
당선소감:사랑을 이해하려 계속 썼습니다
단지 사랑하려고 했을 뿐인데 함부로 사랑한 일이 되는 때가 많았다. 쓰러져 가는 주변을 너무 많이 목격하고서 나는 함부로를 멈추고 싶었다. 멈추려 할 때마다 헐거워졌고 생명의전화는 연결 중이었으며 수많은 사랑은 빈집의 나를 구하러 왔다. 또다시 함부로를 저지르는 사람이 되었다가 용서받고 싶은 사람이 되기를 반복했다. 그러니까 훼손되지 않는 맑은 슬픔이 나를 이끌어 줬다는 이야기. 운동화 끈을 꽉 묶은 채로 걸었다. 때때로 비틀거렸지만. 내 사랑이 그곳에 닿으려면 어떤 속도와 무게가 안전한지, 속눈썹에 맺힌 얼음을 떼어 주는 게 좋은지, 흔들리는 어깨를 잠시 도닥여 줘도 괜찮은지. 사랑을 이해하려고 계속 썼다. 나는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곁들을 사랑한다. 당선 전화를 받고서 소중한 이들에게 소식을 알렸다. 모두가 나 대신 울어 주고 있었다. 내리는 눈을 맞으며 사랑하는 것을 품에 가득 안은 사람처럼 뜨거워졌다. 다음 생에도 사랑을 가르쳐 줘, 엄마, 아빠. 용감해질게, 이모. 시작을 선물한 가족들. 하나뿐인 강아지, 망고. 오직 우리 두 사람, 정우. 명랑함은 너의 오랜 무기가 되어, 백아. 어려운 시절의 나무들, 주아, 재경, 선영. 봄날 여고에서, 주형, 경하. 넘치는 언어로 혜원, 선우, 송이, 채령. 아픔을 덮는 다정으로, 영은. 열아홉의 애틋한 마음가짐 정화, 채연, 재연, 찬연. 너희와 오래 웃고만 싶어, 수연, 경은, 서현. 가까이에서 만나, 유진, 영재. 반짝이는 친구들아, 수빈, 본진, 재인, 주혁, 세은, 채은, 예상, 윤경, 선경, 주빈, 하주. 존경하는 배정원, 이원, 강성은, 하재연, 윤은성, 윤성희 선생님. 그리고 저를 호명해 주신 세 분의 심사위원님께 감사합니다.
-백아온 시인: 1998년,서울 출생,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 졸업
심사평:안정적 전개·시의성 있는 소재 빛나
이번 신춘문예에는 예년보다 많은 작품이 투고된 만큼 눈여겨볼 좋은 작품이 많았다. 다만 예년과 달리 기후 위기나 전쟁 등 기존 투고작들에서 자주 보이던 시의성 있는 주제를 다루는 작품이 줄어들었으며 일상적이고 사소한 것을 다루는 내면의 이야기가 주조를 이루고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실감하는 세계가 그만큼 줄어든 것은 아닌지 우려되기도 했다. 그러한 가운데 영상이나 텍스트를 경유하는 간접적 체험을 다루거나 인공지능(AI)이나 게임적 상상력을 소재로 하는 작품이 늘어났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오늘날 문학이 다뤄야 할 이야기는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는 문학을 통해 어떤 질문을 던져야만 하는지 이런 고민을 안은 채 심사를 진행했다.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 가운데 네 명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살펴봤다. ‘운동 상태 유지’ 외 2편은 표제작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버려진 피아노를 소재 삼아 사물을 다양한 방식으로 살피고 접촉하며 어긋난 운동을 유지하는 과정이 흥미로웠으나 결국 이 이야기가 설명으로 그쳐 버린다는 점이 지적됐다. ‘디오라마’ 외 4편은 사물과 시적 주체를 끊임없이 이동시키며 의미를 지연하려는 듯한 말하기 방식이 개성적으로 여겨졌다. 다만 투고작 중 일부가 지나치게 늘어져 긴장감이 떨어지는 점이 아쉬웠다. ‘마주 보는 구조의 전시장’ 외 2편은 매력적인 상상력 덕에 읽는 즐거움이 있었다. 다만 작품의 씨앗이 된 상상력이 확장되거나 전개되는 대신 멀지 않은 자리에 주저앉은 채로 있어 모처럼의 좋은 소재가 충분히 가능성을 펼치지 못했다는 인상을 줬다.
당선작으로는 백아온씨의 ‘디스토피아’를 선정했다. 안정감 있는 전개와 시의성 있는 소재 선정 등 실력이 가장 돋보였기에 당선작을 합의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플라스틱 인간’과의 사랑이란 사랑이 불가능한 이 시대의 은유이자 사랑을 꿈꾸는 결연한 다짐이기도 할 터이다. 이 시가 그리는 ‘디스토피아’야말로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사랑의 모습이리라. 절망하는 대신 조용히 이 세계를 기억하고 재현하려는 시적 주체의 태도에 믿음이 갔다. 앞으로도 그 결연함으로 시와 더불어 나아가시길 바란다.
전에 없는 하 수상한 시절을 보내는 지금이야말로 더 나은 세계를 꿈꾸는 장치인 문학이 그 역할을 다해야 할 것이라 믿는다. 이번 심사를 진행하며 그러한 믿음을 가진 이가 나뿐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어 기뻤다. 문학은 나의 꿈을 당신에게 맡기는 일이자 당신의 꿈을 이어받는 일이기도 할 터이다. 귀한 작품을 투고한 모든 분께 깊은 감사와 응원의 마음을 전한다.
-나희덕·이병률·황인찬
2025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구인>광명기업/김용희
외국인 친구를 사귀려면 여기로 와요 압둘, 쿤, 표씨투 친해지면 각자의 신에게 기도해줄 거예요 한국인보다 외국인이 더 많은 글로벌 회사랍니다 요즘은 각자도생이라지만 도는 멀고 생은 가까운 이곳에서 점심 식사를 함께해요 매운맛 짠맛 단맛 모두 준비되어 있어요 성실한 태양 아래 정직한 땀을 흘려봐요 투자에 실패해 실성한 사람 하나쯤 알고 있지 않나요? 압둘, 땀 흘리고 먹는 점심은 맛있지? 압둘이 얘기합니다 땀을 많이 흘리면 입맛이 없어요 농담도 잘하는 외국인 친구를 사귀어봐요 쿤과 표씨투가 싱긋 웃습니다
서서히
표정을 잃게 되어도 주머니가
빵 빵 해질 거예요 배부를 거예요
소속이란 등껍질을 가져봐요 노동자란 명찰을 달아주고 하루의 휴일을 선물해 드릴게요 혼자 쌓고 혼자 무너뜨리는 계획에 지쳤나요 자꾸 삐걱대는 녹슨 곳이 발견되나요 이곳에서 기름칠을 하고 헐거운 곳을 조여보아요 감출 수 없는 등의 표정을 작업복으로 덮어 봐요 작업복을 입으면 얼룩이 대수롭지 않고 털썩 주저앉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 거예요 툭툭 털고 일어나는 털털함을 배워보세요 먼지 풀 풀 날리는 공장이지만 한 뼘씩 자라는 미래를 그려봅시다 동그란 베어링을 만들다 보면 자꾸 가게 될 겁니다 긍정 쪽으로
밝은 빛이 이곳에 있습니다 일종의 상징이지요 바람이지요 떠오르는 해를 보며 출근길에 몸을 실어보세요 터널을 좋아하나요 터널이 좋아지게 될 거예요 끝엔 항상 빛이 있다는 사실로
어둠에 갇혔나요
이곳의 문은 활짝 열려 있습니다
분류 : (중소기업) 제조업 - 선박 부품 제작
임금 : 최저시급, 일 8시간(잔업 1시간), 격주 토요일 근무
깔 깔 깔
쿤이 땀 흘리며
너트를 조이는 래칫 렌치를
이곳 사람들은 깔깔이라 부릅니다
웃음 많은
이곳으로 와요
당선소감:늦은 시작 조급함 있었지만… 쓰다보면 아무 생각도 안나
저는 2025년 1월을 보고 있었습니다. 듣고자 하는 강의를 고르고 2개의 공모전을 준비하던 참이었어요. 당선 연락을 받고 “와… 이런 일이 다 있네”라는 말을 오십 번도 넘게 했던 일이 기억납니다. 이름을 불러주신 나희덕, 문태준, 박형준 심사위원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시는 멀리 있다 생각했습니다. 시를 쓰는 건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나 특별한 사람들의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활과 일상만을 쥐고 지내던 때가 오래였습니다. 이제니 시인님을 만나고 늘 몸과 함께하는 그림자처럼 시가 곁에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모두가 빛을 바라볼 때 그림자를 보는 마음을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영주 시인님의 강의를 들은 것이 제게 가장 큰 행운이었습니다. ‘시 쓰기는 재밌다’는 말을 요즘도 자주 떠올립니다. 시를 더 아끼게 되었고 두려움을 이겨내고 시를 쓰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고 느낄 때 김연덕 시인님을 만났습니다. 다정하고 섬세하게 알려주신 방향으로 가다 보니 한 걸음 나아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시의 넓고 풍요로운 세계를 가르쳐주셨던 박소란, 이현호, 김소형, 안태운, 정현우 시인님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제게 사랑을 알려주신 부모님께 사랑의 큰절을 올립니다. 저를 아껴주시고 응원해주신 분들에게 어떻게 다 감사의 인사를 전할 수 있을지, 행복한 고민이 깊어집니다. 깊은 밤, 떠오르는 얼굴들. 만나서 함께 웃을 날을 기다립니다.
시작이 늦었다는 생각으로 초조함을 안고 지냈습니다. 그 조급함으로 인해 쉽게 실망하고 심하게 몸살을 앓기도 했습니다. 쓰다 보면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쓸 때에는 제가 밉지 않았습니다. 초조함은 슬픔이지만 원동력이 되어주기도 했습니다. 백지를 가득 채운 글들은 자주 백지 상태가 되었지만 설원을 뛰어노는 기분을 느끼게도 해주었습니다. 눈 위에서는 넘어져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백지 위에서 넘어지고 구르는 연습을 많이 했습니다. 저의 크고 작은 실패들이 저를 여기까지 이끈 것 같아 놀랍고 새롭습니다. 새롭고 놀라운 시를 쓸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실패를 거듭하며 써 나아가겠습니다.
하나의 과정을 통과하였다 하여 어제는 시인이 아니었다가 오늘은 시인이 되는 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시를 붙잡고 있다면 매 순간이 시인이 되는 과정이란 생각으로 노력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김용희. 1982년 경남 거제 출생. 조선 관련 기업에서 현장직으로 일하고 있다.
심사평:노동문제 발랄한 문장으로 녹여내… 우리 시대의 진화된 노동詩
암울한 코로나19 시기를 지나 자신과 세계의 관계를 재정립해 나가는 탄력적인 상상력과 경쾌하고 발랄한 목소리를 우리 시의 뜨거운 현장에서 만나는 즐거움이 컸다. 심사 내내 젊은 층의 투고가 두드러진다는 인상을 받았다. 삶 속에서 얻어지는 문장들과 상상화된 것을 통해 역으로 깊이 있게 현실을 성찰하는 시편들에서 ‘나’를 관찰하고 ‘나’를 정립하고자 하는 활달한 시적 의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응모작들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겠다. 첫 번째로 생활시편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여기에서 눈에 띄는 것은 일상의 감정이나 사건을 나열하는 방식에서 탈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가족에 대한 시편들도 어머니나 아버지뿐만이 아니라 고모, 이모 등 폭넓게 소재를 확장하여 가족 관계를 성찰한다. 또한 인간 아닌 유령 같은 비인간적인 존재들, SF나 우주를 끌어들인 묵시록적인 분위기, 반려동물과 반려식물들을 활용하는 등 일상 속에 중간중간 끼어들어 오는 타자에 대한 관심을 증폭해낸다. 두 번째로 이상기후나 지구 환경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면서 인간이 다른 존재와 맺는 생명 관계를 설정하려는 시도이다. 세 번째로 현실을 내면화하여 드러낸다는 점이다. 즉, 사회적인 문제를 내면화하여 바라보려는 시적 통찰을 밑바탕에 둔다. 몇 차례의 토론과 고심의 시간을 거쳐 당선작과 경합을 다툰 작품은 아래와 같다.
‘랜드’는 문명 세계가 가지고 있는 그림자나 위험성을 반어적으로 경쾌하게 제시한다. 자본이 자리를 잡기 전 세워지다 만 놀이공원을 통해 묵시록적으로 반문명적 상상력을 전개한다. 주제가 클 수도 있는데 그것을 담담한 이미지로 전달하고 있기에 다정한 듯하면서 쓸쓸하게 다가온다. ‘완벽한 인사’는 잘 짜인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다. 가족에게 남자 친구를 소개시켜 주는 서사적인 상황을 시적인 것을 놓치지 않으면서 전개한다. 서로 소통하는 듯하지만 단절되고 마는 관계를 어긋나는 대화를 이어나가는 방식으로 맛깔나게 표현한다. ‘집이 납작해질 때마다’는 말과 침묵의 관계를 리드미컬하고 절제 있게 전개할 뿐만 아니라 시적 여백을 최대로 효과 있게 사용하는 시적 전개가 인상적인 작품이다. 말의 운용과 함께 빚어내는 상상력이 산뜻하고 새로우며 안정감과 숙련된 느낌을 준다. 하지만 ‘랜드’는 몇몇 시행이 다소 평이하고 긴장감이 떨어진다는 점이, ‘완벽한 인사’는 세밀하게 전개되는 리얼리티가 장점이나 시적 구성이 다소 단조롭다는 점이 지적되어 제외되었다. ‘집이 납작해질 때마다’는 당선작과 끝까지 경합을 벌였다. 다만, 일상의 공간이 상상 공간으로 넘어가는 데 있어 세련된 품격을 보여주지만 그 시적인 이미지들이 모여서 의미의 구심점을 만드는 데까지로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시를 쓰는 솜씨가 돋보여 앞으로의 미래가 기대된다는 점을 부기한다.
당선작으로 선정된 ‘<구인> 광명기업’은 오늘날의 현실에서 직면한 노동의 문제를 밀도 높은 리얼리티의 사회적 지형도로 구현한 작품이다. 자신이 매일매일 현장에서 피부로 경험하는 노동의 현장을 무겁게 문제화하지 않고 가볍게 경량화해서 다룬다. 구인 공고 형식을 활용하여 현장 노동자의 입을 통해 한국인을 포함, 외국인이 함께 일하는 ‘광명’기업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 이곳이 얼마나 유토피아 같은 곳인지 소개하고 있지만 그게 얼마나 반어적인지를 발랄한 문장 속에 녹여낸다. “소속이란 등껍질” “동그란 베어링을 만들다 보면” ‘땀’과 ‘웃음’의 병치 등의 위트 있는 겉이야기를 통해 그 이면의 노동자가 현장에서 직면한 고통과 사회적 문제를 씁쓸하면서도 수가 높은 아이러니로 드러내고 있다. 무거운 것을 가볍게 하여 어떻게 현장감과 공감력을 획득할 수 있는지 우리 시대의 진화된 노동시의 한 모습을 여실히 제시한 작품이다. 당선작에서 보여준 현장감과 기량이 앞으로 써 나갈 작품에서 어떻게 더 뻗어 나갈지 새로운 노동시의 면모가 기대되며, 당선을 거듭 축하드린다.
-나희덕·문태준·박형준 시인
2025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토마토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안수현
윗집은 오늘도 많이 더운가 보다
아무렇게나 잘라두어 우리 집 창문에 아른거리는
에어컨 실외기 호스에서
물이 뚝뚝 떨어진다 엄마는 시끄럽다면서도
마른 토마토 화분을 물자리에 밀어둔다
새순 발끝을 받치고 있는 큰 줄기
손끝이 새파랗다
너를 이렇게밖에 밀어올리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는
누군가와 닮았다
왜 자꾸 안쓰러운 표정을 짓는 걸까 ,
그냥 그렇게 된 건데 우린
순진한 토마토일 뿐인데
어차피 충분히 어른이 되면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자신을 떨어뜨려야 할 텐데
땅에서 났으면서도
먼 하늘만 보고 자라
땅에 묻히기를 두려워하는
엄마 없는 엄마와 엄마밖에 없는 딸
토마토는 어디에서든 뿌리를 내린다
홀로 오래 있었던 토마토 과육에선
제 심장을 디디고 선 싹이 자라곤 한다
해묵은 양수를 받아마시며 ,
그것은 꽤나 외로운 일이다
그래도 토마토는 그렇게 한다
[당선소감 ]
‘그만 써야지 ’하며 쓴 글 ···힘내어 다시 쓰겠습니다
얼마 없는 목돈을 털어 덜컥 적금을 들어버린 기분입니다. 심사위원 선생님들께서 끌어올려 주신 당선작은 제가 ‘시를 그만 써야지’ 생각하고 쓴 글이었습니다.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으면서도 충분히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답답함을 느끼는 제가 싫었습니다. 시의 기초도 모르면서 대단한 것을 써내고 싶은 욕심이 저에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부끄럽고 화가 났습니다. 그럼에도 일상에서 기억해 두고 싶은 순간들, 다양하게 오래 불러보고 싶은 이름들이 있어서 시를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루하루 조금이라도 행복해지고 싶어서, 솔직해지고 싶어서. 그래서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저를 믿어주시고 붙들어 주신 정끝별 선생님께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격려를 들으면 제가 아주 소중한 존재가 된 것처럼 힘이 생깁니다. 제가 감히 시를 써볼 수 있도록 가르쳐주신 서울여대 국어국문학과 선생님들과 문예창작전공 문우들에게도 고맙습니다. 늘 선의를 가지고 저를 지켜봐 주는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 선후배동료들과 선생님들께 특히 감사합니다. 저를 살게 한 모든 순간들, 풍경들, 인연들에 고맙습니다. 누구보다도 우리 캡틴, 진심 어린 사랑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게 해주시는 엄마에게 감사합니다. 아빠, 언제나 건강하게 지내시길 바랄게요.
제 곁에 머물러주는 친구들에게 ‘시가 어렵기만 하지는 않음’을 이야기할 기회가 생겨서 기쁩니다. 제가 생각하는 시문학은 쓴 사람의 진심이 담긴 삶의 궤적입니다. 오래 지켜보면 사랑하게 되고 믿어보고 싶게 되고 의지하게 되는 것이 시이고 사람입니다. 어떤 모임에서도 ‘잘’ 쓰는 축이 아니었던 저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하게 하고 이 세계에 정붙이게 한 것이 문학입니다.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특별하지 않은 줄 알았던 것을 특별한 관심으로 새기는 일, 그것이 시쓰기라고 믿습니다. 시의 순간으로 하여금 여러분 모두의 일상에 희망과 위안이 깃들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저도 힘내어 정직하고 성실하게 글쓰며 살겠습니다.
안수현
△ 1998년 출생.
△ 서울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문예창작학과 졸업
△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 졸업, 박사 수료.
[심사평]
미안하다고 말하는 마음과 외롭고 질긴 생명의 온기
난데없는 비상계엄령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탄핵 소추안 가결을 하루 앞둔 날, 네 명의 심사위원이 한자리에 모여 앉아 온종일 신춘문예 시 응모작을 읽고 있던 풍경이 문득 현실감 없이 느껴졌다. 저물어가던 2024년이 전혀 다른 성격으로 다가왔기 때문일까.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덮을 만한 사건이 한 달이 채 남지 않은 2024년 이 땅에서 일어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현실이 문학을 압도해 버린 낯선 분위기 속에서 시 응모작들을 읽었다. 기후 위기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강세였고, 슬픔과 우울의 감정을 자기 고백적으로 드러낸 시가 자주 눈에 띄었다. 고단한 현실의 무게에 짓눌린 외롭고 무기력한 주체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듯했다.
응모작들 중 네 명의 작품이 마지막까지 심사위원들의 눈길을 붙들었다. ‘개의 춤’ 외 4편, ‘테라스’ 외 4편, ‘테레민’ 외 4편, ‘토마토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외 4편을 두고 숙의의 시간을 가졌다. ‘개의 춤’ 외 4편은 공간을 구축하는 방식이 매력적이었다. 특히 자유자재로 공간을 구축하는 ‘방’의 상상력이 흥미로웠는데 예측 가능한 마무리가 다소 아쉬웠다. ‘테라스’ 외 4편은 오래 시를 써 온 공력이 느껴졌다. “수없이 늘어선 토르소가 울타리로 일어나고 있었다.”처럼 시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문장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대상을 호명하거나 인칭을 사용하는 방식이 어딘지 익숙하다는 점은 아쉬웠다. ‘테레민’ 외 4편 중에서는 ‘백자 앞에서’가 눈에 띄었는데 기시감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다는 점에서 우리를 망설이게 했다. ‘토마토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외 4편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소소한 일상에서 빚어지는 생활의 감각이 돋보이는 시들이었다. 어머니로부터 유전되는 돌봄과 성장의 문제를 식물의 상상력을 통해 그려내는 시선이 믿음직스러웠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마음과 외롭지만 끝끝내 살아내는 질긴 생명의 온기가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단 하나의 작품을 고르는 심사의 과정은 늘 어렵다.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과정이지만 사실상 마지막 몫은 당선자에게 달렸다. 호명되지 못한 응모자들의 새해도 너무 춥지 않기를 바란다. 시를 쓰며 지금 여기를 견디고 어디 먼 곳에 가닿고자 하는 당신들은 이미 시인이다. 머잖아 지면에서 꼭 만나기를 바란다. 그 어느 때보다도 따뜻한 온기가 그리운 시절이다. 시를 읽는 시간 동안 잠시나마 느꼈던 온기를 새해에는 더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다.
-심사위원 김선오·이경수·이제니·황인숙 (가나다순)
2025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가담/박연
우, 너는 언젠가 영가들은 창문으로 다닌다는 말을 했지. 그 뒤로 밤이 되면 커튼을 쳐두었다. 낯선 영가가 갑자기 어깨를 두드릴까 봐.
두려운 일은 왜 매일 새롭게 생겨날까. 가자지구에서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 소년들은 처음 보는 사람을 쏘았겠지. 총알이 통과한 어린 이마와 심장. 고구마 줄기 무침 먹으면서 봤다. 전쟁을 멈추지 않는 나이 든 얼굴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빌미로 이익을 얻으려 한다는 말을 들었어. 맨발로 거리를 걷고 싶다. 너는 내가 추워할 때 입김을 불어줄 테지. 거리에서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입혀 둔 스웨터를 보자. 보라색 바탕에 웃는 얼굴이 수놓아져 있던 스웨터를 기억해?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음흉해서, 음흉이라는 이름을 붙였잖아.
세상에 그런 음흉만 있다면 어떨까. 나무를 따뜻하게 해 줄 거라는 속셈이 이 세계에 숨겨진 비밀의 전부라면. 나는 여전히 좁은 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빛을 본다. 그리고 그런 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스스로를 오래 미워하고 있어.
어디로 걸어야 할까. 방향이란 게 있을까.
어디든 사람을 살리는 쪽으로. 더 많은 숨을 살릴 수 있는 쪽으로. 와중에 스스로를 사라지지 않게 할 수 있다면. 너는 뭐가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생각해? 흩날리는 게 눈송이인 줄 알았는데 실은 이웃의 뼈를 태우고 남은 재였던 날?
갚을 것이 없는데도 자꾸만 갚으러 오는 아이들이 즐비했던 문구점
그곳에서 우리는 소란스러운 귀를 훔치는 아이들이었지. 더 이상 훔칠 귀가 없는데도 서성이기를 멈출 수 없는
어째서 세계의 비밀을 듣는 놀이를 즐겼을까
옆 나라의 수장이 계속해서 무기를 사다가 결국 소년들을 팔아버렸다는 거
어떤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이 조용히 잊힌다는 것
말을 아끼는 동안
너는 산뜻한 손짓으로 엉덩이에 묻은 흙을 털었다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넘어지기를 결심한 얼굴이었다
자꾸 밭은 숨을 쉬게 돼
우리 심장은 우리의 가슴이 아니라 죽어가는 이들에게 있으니까
*
우리의 얼굴을 한 영가가 창문을 두드린다
당선소감:울고 있는 사람의 곁에, 소리치는 사람의 곁에 있다
눈을 꾹꾹 눌러 밟으며 걸었다. 소복이 쌓인 눈 위로, 몇몇 사람들이 먼저 발자국을 남기고 지나갔다.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밟힌 눈은 단단한 얼음이 되어갔다. 몇몇 나뭇가지가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진 것 같았다. 나뭇가지는 눈 속에 파묻혀 있다가, 눈이 얼음이 되어 투명해지자 모양새를 드러냈다. 나뭇가지는 말랑말랑하다. 나뭇가지는 휘어진다. 이리저리 휘어질 나를, 부러지더라도 말랑말랑하게 허물어질 나를 상상했다. 다시 눈을 헤치고 걸을 때는 종아리에 눈이 닿아 차가웠다.
아주 오랫동안,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일은 결백한 사람이 되는 일 같기도 했다. 주위에 폭력이 만연하고, 우리는 오늘도 몇몇의 죽음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사이에서 인간은 도저히 결백할 수 없다. 폭력은 조밀하다. 그런 끔찍함과 공존하는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아름다움은 허상일까. 그러나 한 사람이 타자를 만나 사랑하는 순간, 함께 살아가기 위해 더 나은 세계를 만들고자 다짐하는 순간은 아름다움에 가까운 쪽이라는 생각을 한다.
눈송이들은 단단해질 결심을 하고서 하늘에서 내려왔을까? 모르는 자의 이마 위로 떨어져 그를 사랑하게 되고, 녹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게 될 것이라는 걸 알았을까? 눈송이로 이 세상에 온 친구들에게. 너희가 점점 단단해지고 있다는 것. 결국 투명해져, 오랫동안 휘어보고 허물어뜨린 마음을 보여주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다.
내가 사람이라는 사실을 때때로 되새긴다. 사람은 사랑하는 존재.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 존재. 울고 있는 사람의 곁에, 소리치는 사람의 곁에 있고 싶다.
무너지려 할 때마다 옆에서 나를 일으켜 계속 걷게 해 준 친구들에게 갚을 수 없는 고마움을 전한다. 친구들의 마음이 오래 간직하며 쓸 빛이 되었다. 바로 보고, 끝까지 쓰는 방법을 알려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처음으로 나를 사랑해 준 미복씨, 미복씨를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이 될게요. 나의 곁 량곤, 환한 밤을 함께 통과하자. -박연
△1998년 서울 출생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 졸업·미디어창작학부 졸업 예정
2025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예의/최경민
옆자리가 그랬다
살아있으면 유기동물 구조협회구요
죽어있으면 청소업체예요
나도 알고 있다
지금 나가면
누울 자리를 뺏긴다는 걸
그래도 가야 한다
새벽에 하는 연민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반대편은 견딜 수 없을 만큼 불쌍했다고 말했다
불행히도 고양이는
새벽에 일어난 우리들보다
조금 더 불쌍하다
그래도
다 보고 올까요
죽어있는 것도
살아있는 것도
우리는 그러기로 했다
관할구역 끝까지 갔다
사실은 좋아하지 않는 걸 하는 게
기본 예의가 아닐까
생각하면서
◆당선소감 - 최경민 “민원 현장 그려내… 일상, 詩 내부로 들어와”
시를 쓰는 일이 절박하지 않아졌을 때 응답을 받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시가 다만 일상의 한 부분이 되는 것. 시를 무엇보다 우선했던 순간들이 빚었던 과잉들이 씻겨나가고 쓰는 행위만 남았을 때, 일상의 다른 부분들이 시의 내부로 들어올 수 있었다.
‘예의’를 쓰던 당시에 나는 주변 동료들로부터 수많은 민원의 사례들을 들었다. 그 사건들로 비롯된, 채 지면에 적을 수 없는 감정들을 소화해야만 했다. ‘예의’ 외 수록된 다른 작품들에서도 마찬가지의 과정이 있었다. 나는 일상에서 현장들을 맞닥뜨리고 그것들을 적어 보여주는 일에 몰두했던 것 같다. 시의 내부로 들어오는 생활을 밀어내지 않았다. 시 쓰기의 내부에 갇혀 있을 때의 고통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것은 필요한 일이었지만 반드시 그래야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일들은 아침에 눈을 쓸어내는 일, 식탁 위에서 맥주를 마시는 일, 소파에 누워 평소보다 일찍 눈을 감는 일. 시 쓰기는 이들 사이 어딘가를 횡단하고 있을 뿐이다. 시의 무게가 가벼워질 수 있어서 나는 오래 시를 쓸 수 있었다.
제 시의 가능성을 알아봐 주시고 기본기를 다듬어 주셨던 권박 선생님, 대학 생활을 이끌어주셨던 방민호 선생님께 감사를 표합니다. 또한 나의 문학 생활을 함께 해주었던 대학 친구들, 이 지면에 밝힐 수 없는 영감의 원천이 되어 주었던 많은 사람들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이름을 다 밝혀 적지 않더라도 나의 정신은 이들로부터 만들어졌음을 알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뒤에서 응원해 주었던 가족들 고맙고 사랑합니다. 또 무엇보다 내가 다시 시를 쓸 수 있게 해주었고,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내가 무너지지 않도록 도와주었던 아내 수진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전합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은 당신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리고 제 작품을 선택해 주신 심사위원분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앞으로도 살아가는 일과 시 쓰는 일을 함께 해나가겠습니다.
-최경민:●1995년 서울 출생 ●서울대 국문과 졸업 ●현재 서울시 공무원으로 재직
◆심사평 - 안도현·유성호 “삶의 양면성 모두 품으려는 의지 담은 명편”
2025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는 많은 작품이 투고되었다. 예심을 거쳐 올라온 작품들은 저마다 구체적 경험과 언어를 특권으로 삼고 있었다. 참신한 발상과 언어에 정성을 기울인 시편들이 다가왔고, 그 가운데 시상의 완결성과 시인으로서의 삶을 이끌어갈 가능성을 갖춘 최경민씨의 ‘예의’가 당선작으로 선정되었다.
‘예의’는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삶의 양면성 가운데 어느 것도 소홀치 않게 대하려는 의지를 보여준 명편이다. 삶과 죽음의 현상 모두를 껴안고, 그 경계를 넘어, 모두 다 품고 넘어서는 것이 삶에 대한 예의임을 시인은 말한다. 이해하지 못하는 연민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나아가고, 좋아하지 않는 것을 하면서도 끝까지 가보는 것은, 스스로와 타인을 동시에 향하는 예의일 것이다. 행간마다 큰 공간을 유지하면서 그 안으로 삶을 향한 특유의 연민과 의지, 인내와 애호를 놓지 않으려는 마음을 단단하게 들려준 시편이다. 앞으로 훨씬 더 좋은 작품을 써갈 잠재적 역량을 구비하고 있는 시인이라고 판단해 본다.더불어 ‘상어에게 지느러미 달기’와 ‘유리 식탁’이 최종적으로 거론되었는데, 비교적 익숙한 어법과 소재로 인한 참신성 부족이 크나큰 아쉬움을 주었다.이 밖에도 자신만의 사유와 감각을 개성적으로 구축한 시편들이 많았음을 부기하고자 한다. 당선자에게 커다란 축하의 말씀을 드리고, 응모자 여러분께는 힘찬 정진을 당부 드린다.
[2025 현대경제신문 신춘문예 - 시 대상]
파밭/엄경순
하얀 다리를 걷어 올린 푸른 대궁
채마밭 굵은 파들이 쑥쑥 자란다
대궁 안은 한 숨 두 숨 잔뜩 부풀었는데
속내를 알 수 없는 통통한 옆구리를
청개구리 한 마리가 발가락으로 간질인다
세상을 머금은 듯 단단히 여민 대궁
아무리 흔들어도 속을 보여주지 않는다
꺾지 않으면 속을 들여다볼 수가 없다
속을 보려고 대궁을 꺾을 수도 없다
대궁 안에 들어 있는 작은 세상
가만히 숨죽여 귀 기울이면
아무리 생각해도 도통 답을 찾을 수 없는 일들이
끙끙 속을 태우며 들어앉았다가
말문이 터지듯 어느새 쑤욱 답을 밀고 올라와
파바밭! 꽃대 위에서 하얀 꽃망울로 터진다
파밭에서는 꽃이 필 때마다
나비랑 벌 무리 좋아라 야단법석이다
대궁은 여전히 무슨 궁리 그리 깊은지
하얀 꽃 속 까만 씨알이 응어리처럼 영근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비밀이 있던가
작은 세상이 일일이 영그는 이치를 다 알 수는 없지만
백제의 향로 같은 깊은 침묵이 피워 올린 꽃대는
푸른 속내를 감추며 더욱 단단해져가고
꽃씨는 벌써부터 파 밭 파 밭 아우성인데
나는 생각이 여무는 그 침묵이 좋아라
발뒤꿈치 들고 조용조용 서 있는 파뿌리들
[대상 당선소감]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습니다. 마룻바닥이 차서 발바닥이 얼얼했지만, 한참을 서서 눈을 바라보았습니다. 세 살, 제 첫 기억입니다. 그날 아빠는 리어카에 산더미 같은 짐을 싣고, 엄마는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건넛마을로 이사를 했다는데, 이삿날 풍경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엄마는 제 기억이 거짓말 같다고만 합니다.
“어떻게 눈 오는 것만 기억난다냐?”
그날의 기억처럼, 어떤 순간들은 어제인 듯 선명한데 어떤 순간들은 눈 녹듯이 사라집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 그런 순간들이 사라질까봐 그 기억들을 하나둘 조약돌 모으듯 글로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중에서도 무겁고 단단한 것들이 쌓이고 쌓여 저에게 가슴을 울리는 시가 되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아무도 읽어주지 않아도 언제나 시의 자리에서 시를 썼습니다. 그렇게 삶의 순간순간마다 시적인 순간을 붙잡으려고 노력하며 작은 기억에도 의미를 찾고 이야기를 불어넣고자 노력했습니다. 때론 어둡고 힘든 길을 혼자 걷고 있다는 생각에 포기하고 싶은 적도 많았지만, 그럴때마다 저의 시가 다시 저를 다독이고 일으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당선 소식을 들었을 때, 그동안 힘들었던 모든 순간들이 머릿속에서 잠깐 빛으로 반짝였습니다. 제 첫 기억부터 지금까지 써온 모든 글들이 함박눈처럼 하늘에서 펑펑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부족한 제 시에서 가능성을 보아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긴 시간 한결같이 응원해 준 가족들께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이런 기적 같은 순간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 압니다.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지금까지 걸어왔던 것처럼, 그렇게 한 걸음 한걸음, 다시 걸어가겠습니다.
힘들 때마다, 오랫동안 포기하지않고 묵묵히 걸어왔기에 이런 날도 있는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다시 처음처럼 시를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엄경순 시인
1977년 충남 청양 출생
2014년 제12회 삶의향기 동서문학상 시 부문 가작
2020년 제15회 삶의향기 동서문학상 동시 부문 동상
[2025 현대경제신문 신춘문예 시 우수상]
새벽배송 공작소:김선욱
잠든 사람이 더 많을 열두 시 반
작고 노란 봉고차에 이형화물처럼 올라타서
접이식 의자를 펼치고 졸음과 함께 앉아서
로켓도 쏘아 올릴듯한 기지에 도착해서
거대와 명령과 굉음에 쪼그라들어서
너도 나도 그냥 입고 온 대로 입고서
무심한 컨테이너벨트 앞에 서서
잘못 건드린 도미노처럼
쏟아지는 토트박스 토트박스 토트박스
왼손은 청기 오른손은 백기
청기 백기 함께 올려
청기 백기 함께 내려
반복하다가 가끔
청기가 어딘가에 끼어서
박스와 박스사이라거나 선반의 틈,
깜빡하고 가져와버린 마음에도 끼어서
십오 분의 쉬는 시간에
끼었던 손을 빤히 바라보는 것
내가 나한테 이래도 될까?
하고 물어보는 것, 그때
여러분은 이곳에 돈 벌러 온 것 이라며
줄줄 새는 욕으로 우리를 부리는 사람이 있다
모두가 토를 달지 않고 묵묵하게
청기백기 청기백기를 반복하는 것으로
능숙한 백기를 든다
집에 있거나 있었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너무 큰 옷을 입은 물품들이
롤테이너에 실려 도크 밖으로 빠져나갈 때마다
새벽이 닳아간다
병렬로 놓인 무수한 트럭 틈 사이로 햇빛이 스며든다
혹시 꼭 안가셔도 되는 분 있습니까
조금 더 일하실 수 있는 분 있습니까
힘 빠진 청백기 대여섯 개가 죄처럼 들려지고
나는 옆 사람 얼굴을 쳐다보고
그 사람도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우리가 우리한테 이래도 될까?
[우수상 당선소감]
잘 알지도 못하면서 “모르겠어요.”라고 솔직히 말하는 게 어려웠습니다.
그 말을 잘하지 못해서, “내가 알아서 할게.” 라고 아는 체하며 멀리멀리 돌아 걸었습니다. 홀로 걸어온 길은 많이 외롭고 괴로웠습니다. 무엇보다 사람들로부터 자꾸 멀어져, 아는 사람들에게 몰라도 될 감정들을 얹곤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빼곡한 감사로 소감을 채우던데, 저는 지면을 빌려 다정했던 분들에게 죄송한 마음을 고백합니다.
앞으로는 잘 모르면 모르겠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래서 알고 싶다고 말하고, 괜찮다면 함께 걸어도 되는지 묻겠습니다.
미안하단 말보다 고맙다는 말을 많이 할 수 있을 때까지 그리하겠습니다.
다만, 이렇게 다짐해 놓고도 “모르겠어요.”하고 말할 자신이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사랑해서, 알고 싶어 안달 나는 것들. 그 앞에서 “모르겠어요.”라고 말하는 건 너무 무책임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럴 때는 한참을 모른다 해도 “믿습니다.”라고 돌려 말하겠습니다.
먼저, 제가 가진 모든 믿음을 모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매일 성경을 읽는 부모님, 현명한 두 누나와 든든한 매형들, 사랑하는 조카 효린, 희원, 효주, 희재, 강민 그리고 늘 기도해주시는 할머니와 친척들의 무한한 사랑을 믿습니다.
시가, 포기와 좌절로 얼룩져있던 저를 일으켜 줬다고 믿습니다.
사계절의 나무와 제 앞에 멈춰주던 길고양이들과 파타고니아의 양과 무릎을 믿습니다.
시간을 믿지 않습니다. 시간은 정말 모르겠어서 생각만 하면 숨이 막히고 눈을 감게 됩니다. 그런 저를 안아준 건 늘 공간이었습니다.
하여, 이곳에 소중했던 사람들과 함께 했던 공간들을 열거해봅니다.
주현동과 남중동, 서소문의 평안교회와 알라딘빌딩, 327호와 습작실, 산귀래와 의송빌라, 서정다방, 언양알프스시장, 서울쌈냉면, 쿼츠, 창천동과 행복동, 써니룸과 브이맨션, 여의도와 예스24, 선릉 애플트리타워, 켄터키와 테네시, 종각의 바니, 용산역의 옥상, 차병원, 그래서 책방, 씀방, 12월의 파주와 이천과 김포, 그리고 벼리와 방배동 꽃집과 용눈이오름.
새해엔 위의 공간에 다시 가서 그때의 사람들에게 늦은 편지를 쓰고, 오래갔으면 하는 시를 짓고, 나눌 수 있는 행복을 찾아보려 합니다.
시의 세계로 초대해준 정균이형과 제 작은 글그릇에 아낌없는 가르침을 부어 주신 이영광, 김명인, 신용목, 이혜원, 박형서, 박유희, 홍창수, 권혁웅, 김이듬, 행고님, 그리고 1월만 되면 생각나는 최정례 선생님께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감사드립니다.
믿어지지 않는 사회에서, 믿고 싶은 시를 쓰겠습니다.
아프고 지쳐 고립된 사람이 돌아올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시인이 되겠습니다.
-김선욱 시인 1989년 전북 익산시 출생, 고려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졸업
심사평:깨끗한 시심, 삶에 밀착한 시
정치적 직접성의 시가 새해 시작을 알리는 신문 지면에 오르내리는 것을 불편하다. 문학은 정치를 함축하면서도 정치를 초월한다. 시의 독자는 삶의 깊이와 넓이에 ‘상응’을 이룰 수 있는 시를 원한다.
현실의 호흡이 가빠지고 각박해지면 시도 따라서 대체로 거칠고 빨라진다. 그런 경향이 있다. 때가 지나면 그 유효성은 쉽게 말라버린다. 반대로 그런 세상살이에, 일상의, ‘심정’의 시만에 만족할 수도 없다. 시는 인심의, 민심의 표현일 수도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젖혀 놓고, 시는 무엇보다 언어의 예술임을 다시 한번 생각한다. 언어적 구성과 표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이 속에 사유가 있고 세계가 놓여 있다. 무엇을 베려 하든 칼끝을 날카롭게 벼리지 않으면 안된다.
「안부」·「보리수나무 아래」·「파밭」·「마두금」·「유언」을 출품한 엄경순 씨. 「새벽배송 공작소」·「폭설」·「문래동 장마」·「공덕역 1번 출구」·「평화와 시장」을 내신 김선욱 씨. 시의 경향과 특질이 각기 달라 심히 고민하게 한다.
자신의 삶의 중심에서 솟아나는 시, 시어와 시행의 구사에서 보다 숙련된 시, 비록 시대의 가파른 흐름에 뒤진 듯해도 시인으로서의 수행 흔적이 더 돋보이는 시를 어렵게 승인한다. 이번에는 그렇다.
「파밭」외 4편의 시인은 깨끗한, 비운 마음의 상태, 수준에서 시적 발화를 이룰 수 있는 사람이다. 세상을 맑은 눈으로 보는 사람이다. 다섯 편 시가 모두 깨끗한 시인적 감성을 바탕으로 시적 대상을 오롯이 직관한 경험을 숙련된 시적 리듬의 언어로 갈무리해내는 솜씨를 발휘했다. 특히,「파밭」은 시인의 시의 언어에 함축된 정화된 시심, 탈속한 심성을 한껏 맛볼 수 있게 한다. 요즘과 같은 혼탁한 시대를 맑게 씻어낼 수 있는 감성의 시다.
대상 수상작으로 선정한다.
다음으로, 작금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시는 느려지거나 아예 더 빨라져야 한다. 「새벽배송 공작소」외 4편의 시를 내신 분은 시가 현실에 보다 밀착되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새벽 배송 작업 현장이나, 문래동, 공덕역 같은 삶의 현장을 ‘떠돌며’ 오늘의 삶의 살아 있는 소리에 귀기울이고자 한다. 비록 언어적 세공을 위한 수련이 더 있어야 한다 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기교를 넘어서는 의식일 것이다. 우수작으로 선정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교수)
2025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산사
범종 소리에
겨울 은사시나무가 흔들리고
송백에 남아 있던 가느다란 푸른 선이 흔들리고
밤을 지켜보던 소쩍새 눈동자 흔들리고
범종 소리는
옹송그리며 가지에 점으로 앉은
꽃봉오리를 툭 하고 건드리고
툭 하고 밀치다가 서로 얼싸안기도 하고
그리하여
범종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란 매화나무는 가지에
꽃을 점점이 피워낸다.
고요가 있고, 적막이 있고
그 속에 소란이 있고
달빛이 돌그림자를 움직이는 동안
범종 소리에
계곡은 파문을 일으키고,
바람 따라 그 소리 배회하다가
팔상도 쓰다듬으며
부처님 안전에 매화향 전해주면
범종 소리에
밤은 끝을 비추고
동쪽 산은 붉은 점안식 준비를 재촉하였다
당선소감 : 죽비 한 아름 받은 기분
직장 생활을 하며 두 번 큰 고비를 맞이한 적이 있습니다. 마치 십 년 주기처럼 10년 차에 한 번, 20년 차에 또 한 번이었는데 그때마다 주저앉은 저를 일으켜 세운 것은 바로 시 창작이었습니다. 첫 번째 고비 때는 덜컥 대학원에 진학해 김명인 선생님과 밀도 높은 시간을 보냈고, 두 번째 고비 때는 정근과 함께 글자 하나하나 새기며 잠시 놓았던 시를 썼습니다.
아직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부족한 저를 당겨주신 심사위원님께 많은 죽비를 받은 것 같습니다. 세상이 참으로 시끄럽지만 잡스러운 말이 없는 부처님 세계, 그 세계에서 조그마한 울림이라도 듣기 위해 정진하라는 말씀으로 죽비 한 아름을 받겠습니다. 또한 초보 불자로서, 생활인으로서, 시를 공부하는 사람으로 불교 문학에 조그마한 보탬이 되겠다는 다짐도 해 봅니다.
시를 놓고 방황하던 저에게 화두를 던져준 김덕근 시인, 박순원 시인, 이재표 시인 등 충북고 벽문학회 회원들, 그리고 넓고 깊은 생각을 나눠준 충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소모임 동료들과 정효구 교수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화를 잘 내고 예민했던 저를 둥글게 다듬어 주시는 청주 혜은사 관세음보살님과 부모산 연화사 미륵존불께 이번 주에 꼭 찾아뵙고 감사의 인사를 드리려 합니다. 엇나가는 저를 시시로 바로잡아 주는 무일 우학스님의 금강경 강의도 늦지 않게 챙기겠습니다. 그리고 저를 지금까지 키워 주신 자애로운 어머니 조 여사님께 사랑한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저는 부족한 사람이었기에 고마운 분들이 참 많습니다. 이제는 제가 조금씩 스스로 걸어가야 할 시간인 것 같습니다. 시재가 없고 서툴지만 앞으로 나아가겠습니다. 자비심을 갖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겠습니다. -최원준
심사평 : 구도심으로 바라본 세계
올해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는 많은 분들의 응모가 있었다. 구도(求道)의 시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불교시의 특징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시편들이 주를 이뤘다. 욕망의 제어, 내면의 평정(平靜)과 빛, 사찰 풍경 등을 다루었고, 특히 열암곡 마애부처님을 소재로 한 작품들도 눈에 띄었다. ‘숨은꽃’, ‘만휘 진리’, ‘바람의 여정’, ‘반가사유상’, ‘만화경’, ‘산사’, ‘윤필암에서’, ‘신륵사’ 등의 작품에 주목했고, 당선작 선정을 두고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바람의 여정’, ‘반가사유상’, ‘산사’였다.
‘바람의 여정’은 숙련된 시조 창작의 솜씨를 보여주었다. 이 작품은 벌판에서 산기슭, 봉우리와 능선을 지나 다시 하강해 강물에 스며드는 바람의 행로를 시종 따라가면서 결박됨이 없는 바람의 자유자재함을 표현했다. 그러나 “허허로운”, “요란하게”, “헉헉거리며” 등의 시어 선택에서 보여주듯이 공간과 주체를 수식하는 시어를 조금만 더 정교하게 다듬을 필요가 있었다.
‘반가사유상’은 견고한 고요와 고고함을 읽어내는 시안(詩眼)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절대적 지복의 얼굴”이라고 쓴 시구나 “모든 경계를 허무는 순간/ 주고받는 것이 유리처럼 맑다”와 같은 시행은 독창적이었다. 언어를 절제하고, 언어를 거듭하여 덜어내는 퇴고 과정이 오래 있었더라면 보다 완성도를 높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선작은 ‘산사’로 결정했다. 이 시는 산중 사찰 공간에서의 범종 소리의 울려 퍼짐과 부처님을 향한 예경을 노래했는데, 무엇보다 대상과 대상 사이에 이루어지는 상호 작용을 간파하는 시적 인식이 빼어났다. 하나의 움직임 속에 있는 밀침과 끌어안음, 적요와 어수선함을 동시에 읽어내는 안목도 높았다. 특히 “달빛이 돌그림자를 움직이는 동안”이라고 쓴 대목은 수일(秀逸)했다. 여기에는 일순과 시간의 경과, 평면적인 것과 입체적인 것, 정적인 것과 역동적인 것이 미려하게 뒤섞여 있었다. 이러한 능력이라면 앞으로 마음밭을 일궈 불교시, 그리고 한국시의 일신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했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문태준 시인
2025 한국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가작
정중동(靜中動) / 대활스님
고개 걸린 흰구름
걷힐 생각 없고
솔향 실바람
열린문 닫는다
깊게 타든 촛불
꼬리를 흔들고
게으른 山僧(산승)
긴하품 몰아 쉰다
다리다 만 녹차향
골방을 맴돈다
【당선소감】
연일 계엄 사태로 서울 지방 할 것 없이 데모대가 시가지를 점령했다. 추위에도 아랑곳 없이 수많은 군중의 구호가 전국을 뒤덮고 있고 뉴스를 도배하고 있다.
무엇이 틀린지 무엇이 맞는지 도무지 판단하기 어렵다. 시간이 지나면 또한 알 수 있을까? 이 또한 지나갈 거라고 위로하면서 큰 기침 한 번 해볼 뿐이다.
한통의 낯선 전화로부터 시작된 감동과 감사가 동시에 몰려왔다. 다름 아닌 한국불교신문사 주최 신춘문예에 출품한 작품이 당선되었다는 소식을 편집국장편으로 전해왔기 때문이다.
출가자가 점점 줄어가고 불자가 줄어가는 이때에 절에서 산다는 게 그리 만만하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부처님 잘 모시고, 또 신도를 부처님으로 대하면서 지내고 있다. 날이 갈수록 여여해지는 걸 보니 체질인 듯하다.
소승이 시를 쓴다는 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니다. 간혹 시를 쓰려고 책상 앞에 앉으면 점 하나도 찍을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 나의 모습이다.
그냥 일상 속에서 문득 떠오르는 시상을 얼른 메모를 하는 것이 나만의 요령이며 순간 포착이다. 지나가 버리면 다 지워지기 마련이다.
대부분의 스님들이 그렇지만 조용하게 산 속에서 지내는 것이 일상이다 보니 소재가 부처님과 산, 그리고 밤 야경이 주를 이루는 것 같다. 생활 속에서 찾기 마련이고 생활이 곧 시가 되는 것이니 그럴 수밖에 다른 소재가 없기 때문이다.
‘정중동’(고요 속에 움직임)을 쓰는 그날도 늦은 봄 어느 날 혼자 차 한 잔 하면서 졸린 눈에 잡힌 저 멀리 흰 구름을 보고 시상을 떠올린 후 돌아본 모습을 시로 옮긴 것이다.
소승의 졸작을 당선작(가작)으로 선정해 주신 심사위원 이하석 시인에게 감사드린다. 부처님의 정법을 널리 전하며 창작활동에 매진하겠다.
-대활스님-한국불교태고종 울산교구 종무원장-울산불교 문인협회 이사
【심사평】간결하고 단아한 모습 높이 사
예심을 거쳐 올라온 본심 작품들은 예년과 수준이 비슷했다. 주변의 사물과 풍경묘사를 통한 생의 성찰과, 그 고통의 각인이 예사롭지 않은 질문처럼 느껴졌다. 우리 삶의 소외된 상태를 떠올리면서도 이를 어루만지는 연민의 시선이 가슴을 치기도 했다. 삶과 시간의 인식이 갖는 누추를 광휘의 꿈빛으로 떠올리는 시선도 눈길을 끌었다. 때로는 현실과 꿈의 간격이 커서 비유가 헐거운 경우도 있고, 처음의 촘촘한 언어 밀도가 뒤에 가서 풀어지는 단점이 발견되는 경우가 있지만 현실 인식과 이를 떠받치는 연민의 기둥이 단단하여 우리 시의 고통스러우면서도 숭엄한 현재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다른 데서 불거졌다. 신춘문예는 신인 등용문으로서의 위상을 가지는 만큼 이미 문단 활동(공모전 수상, 시집 발간 등)을 하고 있는 이들은 제외한다는 원칙이 있다. 이번 수상 대상 시인들이 그 점에서 결격 사유가 있는 것이 확인됨으로써 수상에서 제외된 것은 안타깝고 유감스러운 일이다. 수상 대상을 좁히는 과정에서 이 문제가 계속 불거져 부득이 당선작을 내지 않기로 했다.
다만 본심 작품 가운데 스님의 작품 한 편을 가작으로 선정한다. 시 ‘정중동’은 선시 특유의 분위기로 소리와 정적, 움직임과 멈춤, 그리고 시각과 후각의 미묘한 파동이 어우러지는 깔끔한 세계를 드러낸다. 핏기 없는 맑은 세계만을 다소 고답적으로 떠올리는 미흡감을 느끼면서도 지금 우리 시들에서 보기 힘들어진 간결하고 단아한 모습을 산 것이다.
-심사위원/이하석(시인)
2025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URL 복사 이웃추가
모란 경전 / 양점순
나비는 비문을 새기듯 천천히 자수 병풍에 든다
아주 먼 길이었다고 물그릇 물처럼 잔잔하다
햇빛 아지랑이 속에서 처음처럼 날아오른 나비 한 마리
침착하고 조용하게 모란꽃 속으로
모란꽃 따라 자라던 세상사랑채 여인 도화의 웃음소리
대청마루에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운 아이
모란 그늘 흩어지는 뒤뜰
흐드러지게 피는 웃음소리
그녀가 갈아놓은 먹물과 웃음을 찍어 난을 치고
나비를 그려 넣는 할아버지
상처를 감춘 꽃들이
할머니 손끝에서 톡톡 핏빛으로 핀다
어떤 날은 긴 꼬리 장끼와 까투리가 태어난다
어디서나 새는 태어나고 어디서나 날아가 버리곤 한다
모란이 핀다, 모란이 핀다
붉은 꽃잎을 따서 후하고 불어 보는 아이
꽃잎은 빙빙 돌며아랫집 지붕 위로 날아간다
그 집 할아버지가 죽었다고 한다
모란 꽃잎 불어 날리는 날이면
어디선가는 사람이 죽고 부음이 날아든다
도화도 죽었으면 좋겠어 좋겠어
차마 꽃잎을 뜯지 못한 어린 손가락이 붉다
한밤중 아무도 모르게 사라진 도화
가지런히 벗어놓은 신발 속에는 붉은 말들이 무성했다
제 신발 속에 가시를 잔뜩 집어넣었을 때도
아이의 두 손을 따뜻하게 쥐고 웃었다
죽음을 이해하는 일
떨어진 꽃잎 한 장이
바람도 없이 날아간다는 것
모란이 핀다, 모란이 핀다
병풍 속 나비는 물처럼 고요하다
[당선소감] “붙잡아 주시고 용기로 등 밀어주신 분들께 감사”
누군가의 등에 기대 자전거를 타고 풀밭을 달립니다. 보랏빛 도라지꽃들이 물결처럼 갈라지자 그 사람은 내 손을 앞으로 끌어당겨 자전거 핸들 위에 올려놓고 페달을 힘차게 밟아주고 사라집니다.
파도가 넘실대는 방파제를 달립니다. 나는 바다로 굴러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페달을 힘껏 밟습니다. 희고 빛나는 커다란 유빙으로 가득 메워진 넓은 바다 달리고 또 달리는 깨고 싶지 않은 새벽녘 황홀함.
당선 통보를 받아 들고 간단한 물음에도 눈물이 먼저 대답하며 혀가 꼬였습니다. 그날은 밥도 물도 넘어가질 않았습니다. 부족한 글 환한 세상으로 끌어내 빛을 보게 해주신 심사위원님과 농민신문사에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
어쩌다가 제집에 다니러 오신 그분은 시력 약한 딸이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있는 걸 못내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이게 다 당신이 건네주신 긴 고삐 때문이지요’라며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면서도 마음은 즐거웠습니다.
때로는 내 길이 아닌 것 같아서 도망치려고 할 때마다 붙잡아 주시고 용기로 등 밀어주신 그분들께 이 자리 빌려 감사와 고마움을 전합니다.
저보다 더 기뻐해 주실 사랑하는 분들과 이 기쁨을 모두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2025년 1월 1일’ 새로운 기념일이 생겼습니다.
온몸으로 사랑하고 더욱 튼튼하게 가꾸겠습니다. -양점순 1958년 전남 함평 출생
[심사평] 말·생각 버무리는 솜씨 안정적…전통적 서정성 돋보여
농경 문화적인 소재와 가족 서사를 기반으로 한 시들이 꽤 많았다. 이러한 시들은 시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이전과 다른 지평을 열어 보이는 일에 대체로 소극적이다.
현명한 독자는 익숙한 것들의 다정한 목소리가 반복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단 한 편만을 선택해야 하는 독자의 마음으로 심사위원들은 꽤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당선작으로 고른 ‘모란 경전’은 첫 행부터 독자를 끌어당기면서 한 폭의 따스한 풍속화를 그리는 데 성공하고 있다.
말과 생각을 버무리는 솜씨는 안정돼 있고 과하게 감정을 노출하지도 않는다. 최대한 전통적인 서정에 가까워지려는 이러한 노력이 요즘 시단에서 보기 드문 것이어서 귀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함께 응모한 작품 대부분이 과거에 기반을 둔 서정이라는 점은 조금 우려스럽다. 능숙한 문장이 능사는 아니라는 점을 알고 좋은 시인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주머니에 해바라기 씨앗이나 넣어둬요 당신이 이 땅에서 쓰러지면 해바라기가 자랄 테니’라는 긴 제목의 시는 현실 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폭력 속에 ‘아이들’로 상징되는 연약한 생명의 자리를 만들어 사유하는 점이 눈에 띄었다.
다만 거친 비유와 잡다한 인용은 한시바삐 걷어내야 할 것이다.
‘죽음을 다 쓰면 삶을 써도 될까요’는 죽음에 대한 묵직한 탐구가 믿음직스러웠고, ‘요요’는 상승과 하강의 이미지를 교차하면서 주객전도의 세계를 상상하는 능력이 뛰어났으나 다음 기회를 보기로 했다.
2025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책가도* / 이수국
나는 살았지만 죽은 사람
오크 향 원목 책장을 창문 앞에 세웠다
책을 좋아한 왕이 책가도(冊架圖)를 세워 일월오봉도를 가렸듯
햇살과 달이 가려진 방
창틈으로 들어온 빛이 어둠을 가른다
박물관 유리문 너머 책가도
가로와 세로의 배열 속, 그림 위에 꽂힌 천년의 페이지들
그림 속 책을 보던 왕과
유리문 안을 보는 내 눈이 책가도 위에서 만났다
그림 한구석 은밀히 쓴 화공의 이름이 흔들렸다
책장 바닥에 그늘 한 권을 괴자 몸이 중심을 잡는다
무너지던 중력을 다시 세운 건 한 권의 책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기대고 있는 책을 꺼내면
그들의 체온이 손끝을 타고 가슴으로 전해오고
작가를 지우며 작가를 꽂는다
이럴 때 사전을 거역하는 것은 유쾌한 일
문장이 자라는 시간
스위치를 켜면 책과 나는 조도가 같아져
수백 년 전 죽은 우린 서로 이마를 맞대며 이야기한다
눈감은 순간에도 새로운 이름이 눈을 뜨고
서로 다른 시계들이 태엽을 돌리면 한 곳에서 만나는 페이지
나는 죽었지만 살아있는 사람
바람과 함께 써가는 연대기
이곳에도 낱장 사이 기압골이 있어 새로운 바람이 분다
내 안의 책장을 만지면 나는 가끔 살아 있는 것 같다
*책가도- 책을 비롯한 여러 가지 물품을 그린 그림. 정조가 책거리에 대해 강한 의지를 보이자, 양반계급은 이 새로운 유형의 회화를 수용하며 같이 향유한다
당선소감:침묵 속 더 넓어진 나를 만나다
시를 쓰지 않고는 그 무엇도 할 수 없을 무렵, 당선 소식이 도착했다. 늦게 시를 시작하는 내게 어느 시인이 말씀하셨다. 먼저 자신만의 노트북을 준비하라고, 그리고 하루 한 편씩 시를 쓰라고. 자신만의 방에서 홀로 바깥을 바라보면 그동안 보지 못한 또 다른 세계가 보일 것이라고.
혼자 가야 하는 그 무섭고 아득함에 시를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다. 성장한 아이가 떠난 빈방에 뒤늦게 책장을 마련하고 외부와 차단된 공간을 한동안 침묵으로 채웠다.
그럴 때마다 백지에 쌓인 고요가 조금씩 밀려 나갔다. 갇혀서 더 넓어지는 나를 만나는 중이었다. 책을 읽고 목록을 정리하고 세상의 뒤편에 숨은 시를 찾는 일상으로 어지러운 호흡이 가지런해졌다. 책을 펼치면 낯선 길은 끝없이 이어지고 가보지 못한 먼 곳까지 갈 수 있었다. 오늘도 내일도 묵묵히 나는 그곳에 있을 것이다.
시의 길을 열어준 박지웅 선생님, 흔들릴 때 버팀목이 되어주신 마경덕 선생님, 박남희 선생님, 김이듬 선생님, 조정인 선생님, 이승희 선생님,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 전문가과정 교수님들 존경과 감사를 올립니다.
문우들과 ‘시에게’ 동인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겠습니다. 격려를 아끼지 않는 가족에게도 사랑을 전합니다.
문을 열어주신 강원일보와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님께도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이수국:△전남 보성 生,△한국방통대 대학원 문예창작콘텐츠학과 졸업
심사평:정조가 좋아한 물건 중심 상상 펼쳐 ... 완성도도 높아
올해는 역대 최대 규모의 응모작이 몰려 강원일보 신춘문예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최종까지 남은 작품은 김영희의 시조 ‘함박눈’, 박승균의 시 ‘묵호 4’, 이수국의 시 ‘책가도’ 등이다. 김영희의 시조 ‘함박눈’은 시조의 멋과 매력이 잘 스며있어 거듭 읽게 됐다. 시조 특유의 정제된 표현과 호흡, 그리고 현대적 감각 등이 잘 어우러진 작품이었다.
박승균의 시 ‘묵호 4’는 묵호를 제목으로 삼은 연작시 일곱 편 중 하나로, 시를 풍요롭게 만드는 낭만적 서정성이 두드러졌다.
당선작으로 선정한 이수국의 시 ‘책가도’는 정조가 좋아한 책가도를 중심으로 상상을 펼쳐나간 작품으로 전체적인 완성도가 높았다.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기대고 있는 책”을 통해 “나는 살았지만 죽은 사람”, “나는 죽었지만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얻어가는 과정에서 응모자의 내공을 느낄 수 있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낸다.
이영춘·이홍섭 시인
2025 중부광역신문신춘문예 시 당선작
이끼의 날들/이승애
흩어진 뼈를 일으키는 건 습기입니다 수억 년 전 물에서 태어나
기댈 곳 찾아 뭍으로 온 우리는 태초의 냄새를 기억합니다
음지는 우리의 몫이지요
음습한 골목길, 물에 젖은 하루가 절뚝이며 지나갑니다
언젠가 불렀던 곡조는 밟히고 또 밟혀도 살아납니다 노래가 아닌
그 한 소절을 흘리며 골목 끄트머리로 사라질 때 멀리서 바라본 혼
자만의 은밀한 기억을 녹이면 어둡고 축축한 그늘 맛이 납니다
막막함에도 내성이 생기는 걸까요
빛은 어차피 우리의 핏줄이 아니기에
더는 숨길 수 없는 조짐이 파랗게 피어오르면 하나가 됩니다
눅눅하고 미끄러운 예감으로 같은 종족을 알아봅니다
세상에서 소외된 분노는, 짓밟는 발목을 뿌리치거나 썩은 나무나
그늘진 바위를 덮기도 하지요 이때 우리의 피는 온통 뜨거운 녹색입
니다
한 사내가 끊어진 노래를 기타 하나에 담아두고 뒷것이 되었지요
잎과 줄기 구분 없이 바닥이나 틈을 붙잡고 납작한 숨을 쉽니다 피가
마르면, 끝내 사라질지라도
[당선소감]
해변으로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보았습니다.
물결의 등을 잇대어 밀어붙이는 물결로 바다는 쉬지 않고 출렁이고 한사코 달려온 파도는 하얗게 물거품을 쏟아내며 모래톱에 엎어졌습니다.
거대한 바다를 움직이는 저 에너지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작은 물결이 바람을 타고 진폭을 증가시켜 큰 파도를 만들며 바다를 끊임없이 가동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물의 표면을 스치는 바람의 동력으로 바다가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저 하나의 큰 호흡이 물고기를 키우고 지구를 움직이게 한다는 것을.
바다의 힘은 꾸준함이었습니다. 시가 보이지 않을 때 그만 멈추고 싶었습니다.
이 지루한 게임에서 지치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 묻고 또 물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파도를 생각했습니다. 끝까지 가보는 것 도착지점이 어디인지 나를 밀고 가보는 것. 그 터무니없는 결심이 앞장섰습니다.
뜻밖의 당선 소식에 한동안 가라앉았던 파도가 일렁이기 시작했습니다.
기회를 주신 중부광역신문사와 설렘을 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동안 응원을 보내준 선생님과 문우들, 소중한 가족들, 그리고 여러분께 꾸준함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이승애 시인
[심사평]
‘시는 고백에서 시작한다’는 말이 있듯이, 시를 쓰는 것은 개인적인 체험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신변잡기적 고백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사물과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사회적인 현상을 주시하며 확장해야 한다. 따라서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아 나서는 소외된 사람들에게 탈출구를 열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시인이다. 시인은 시를 통해 독자들을 위로하며 삶의 빛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시인으로서의 사명과 책무 중 하나다.
원고 뭉치를 받으면서 올해는 어느 해 보다 예사롭지 않을 것 같다는 감이 들었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작품 수에 주눅이 들기도 했지만 한 편 기대감과 반가움이 수반되었다. 역시 첫 대면한 응모작부터 침을 몇 번인가 삼켜야 했다. 그만큼 수작도 많았다. 대체적으로 선이 굵은 형상화와 이미지가 날카롭게 살아있는 시들이 많았다. 반면 압축의 미가 사라진, 마치 집을 나간 시가 숲을 헤매는 듯한 시들도 상당수 보여 이것이 요즈음의 트렌드인가 싶은 정도로 의구심을 품게 했다. 그러나 아직은 이러한 시적 형식은 시기상조가 아닐까 하는 마음으로 심사에 임했다.
삼고초려를 하듯 되 읽고 반복된 심사를 하며 고민 끝에 권서연의 ‘지브라 크로싱’, 이희경의 ‘해바라기’, 이승애의 ‘이끼의 날들’이 최종심에 올랐다. 어느 작품을 당선작으로 내도 흠이 없을 수작들이나 ‘지브라 크로싱’은 높은 문장력에도 너무 강한 디테일이 오히려 본연의 맛을 반감시키고 말았다. 또한 출품한 그 외의 작품들과의 큰 편차를 보여 아쉬움이 남았다. ‘해바라기’란 시 역시 이미지 디테일은 좋았으나 아직은 물이 끓기 전의 온도 같은 맛을 보여주었다. 다만 일정 수준에 오른 시적 표현은 추후 기대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반면 ‘이끼의 날들’은 시의 주제를 향해가는 언어적 의지의 구사는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현실에 반향하는 내면의 울림과 어찌 보면 세상이 무심히 흘려버릴 사소한 기미조차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게 그러쥐고 나온 자연스러운 언어 감각과 섬세한 묘사는 시의 완성도를 이루는데 성공하였다. ‘이끼’라는 작은 소재에서 세상의 음지에 머무르는 사람들의 아픔을 읽어내는 예리한 통찰력이 돋보였다. ‘태초의 냄새’ ‘축축한 그늘 맛’ ‘미끄러운 예감’ ‘ 뜨거운 녹색’ ‘납작한 숨’으로 이어지는 감각적인 표현도 오랜 숙련 기간을 방증하고 있었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에 띄지 않는 세계에 살고 있을지라도, 본성의 힘은 약한 것이 오히려 강한 것이 아닐까 하는 역설의 세상도 그려낸 마치 푹 고아 낸 사골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이끼의 날들’, ‘해바라기’ 두 작품은 뛰어난 형상화로 현대시의 든든한 시의 기틀을 이룬 어느 것을 당선작으로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되지만 깊이 들어가 시의 내면을 보면 비중의 차이를 바로 느낄 수 있었다. 당선 시 이승애 시인의 ‘이끼의 날들’은 몸성으로 이룬 형상화로 생생한 시의 맛을 느낄 수 있어 시선을 끌었다. 이끼라는 평범한 소재로 자신의 특별한 감정을 놓치지 않아 글을 끌고 나기는 힘이 있는 시다. 소외되고 짓밟히기 쉬운 서민의 애환의 삶이 잘 반영된 면도 눈에 띄었다. 당선시 ‘이끼의 날들’에서 2연 한 연을 다 차지한 ‘음지는 우리의 몫이지요’란 간결한 시구가 압권이었다.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당선작으로 올렸다. 당선자에게 건필을 기대하며 진심으로 축하의 말을 전한다.
결선에서 눈에 들어 오는 시가 몇 편 더 있다. 이미경의 ‘벚나무가 보이는 중환자실’, 최인걸의 ‘그날 밤’, 민은숙의 ‘성인여드름’, 서상규의 ‘감자에게, 감사로’, 김창식의 ‘가을을 깁는다’가 여운을 남기는 시였다. 당선된 이승애 시인과 우수상 수상자인 이희경시인 등외로 밀린 모든 분들의 강건과 문운을 기대한다.
-도종환 시인, 성낙수 시인
2025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애도 / 이희수
거대한 알이 깨지고 흰자처럼 달이 흘러나왔다 어둠이 왔다
여자는 폐건전지를 투명하고 긴 통에 모은다 위험한 유리 기둥이 나타난다 고요로 쌓은 돌무덤과 따로 함께였다가 함께 혼자인 구석이 생겨난다 주석이 본문보다 더 긴 하루이다 분리 수거를 마친
여자는 댓글을 읽는다 잘근잘근 씹으며 누군가를 죽이는 잔뜩 벌린 입이 있다 냉장고 문 손잡이를 잡고 여자는 가만히 얼어붙는다 쥐도 새도 모르게 누군가 죽어가는 꾸욱 다문 입이 있다 거대한 얼음이 냉장고에서 걸어나와 빙수 기계에 올라앉는다 뼛가루가 수북해질 때까지 돌리고 돌려도 끝끝내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갔을까
여자는 새발뜨기를 한다 새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발자국을 찍고 시접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닫힌다 옷감은 희고 발자국은 푸르다 끝단이 닫히고 쌀무더기에 새발자국이 찍힌다 바느질을 끝낸
여자는 부러진 손톱을 금 간 식탁 유리에 올려놓는다 추억을 새기듯 꽃물을 들여도 길어난 시간은 잘려 나간다 손톱을 깎는 동안 곰팡이가 빵을 먹어버린다 좋은 빵인 줄 알게 된 순간 버려야 할 빵이 된다 좋은 사람일지 모른다는 예감은 둘 사이에 균열이 생기고 난 뒤에야 찾아온다 여자는 식탁 유리를 갈기로 한다 차가운 유리 기둥 안에 장기를 기증한 시신이 들어 있다 제대로 버리는 일이 남았다
당선소감: 이제 시인으로 마음껏 울겠습니다
만남과 이별을 끊임없이 반복하지만 만남도 이별도 늘 낯설고 어렵기만 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 사이의 만남과 이별. 저의 시 쓰기는 제대로 잘 이별하기 위한 연습일지도 모릅니다.
교직에서 물러난 저에게 대학 동기인 소설가 강미가 모과 두 덩이를 건네며 ‘시 쓰시오’라고 했습니다. 용기를 낼 수 있었던 데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한몫했습니다. ‘나의 광산에서 광석을 채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나이므로.’ 중앙대 문예창작전문가과정에 입문하여 일주일의 반은 서울에서 반은 진주에서 지냈습니다. 비록 한 학기밖에 다니지 못했지만 서울과 진주를 오가는 그 길이 저에게는 시 그 자체였습니다. 큰 가르침 주신 선생님들과 그리운 문우님들 감사합니다. 사십여 년 이어진 아버지에 대한 애도를 이제야 제대로 마무리할 수 있게 해 주신 심사위원분들과 부산일보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마음껏 울어보라고 시인이라는 이름표를 달아주신 그 믿음에 보답할 수 있도록 쓰고 또 쓰겠습니다.
저는 심약하고 소심하여 사는 게 대체로 심심한 편이지만 시만큼은 다채롭고 담대하게 쓰고 싶습니다. 저의 꿈을 존중하고 지원해주는 남편, 내 인생의 보물 민창, 민수와 서영, 민석, 호정, 늘 믿고 아껴 주시는 아버님과 어머님, 걱정이 마를 날 없으신 어머니, 응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시누이 부부와 시동생 부부, 그리고 친애하는 동생들에게 감사와 사랑을 전합니다. 봄 햇살 같은 친구 다남과 저의 시의 광맥에 섞여 있을, 그토록 난해하고 오묘한 라캉을 오랜 기간 함께 읽어내고 있는 목요심심 선생님들 고맙습니다.
읽고 쓰고 읽고 쓰고 무한 반복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조민 시인님, 권영란 시인님, 모영화 시인님 덕분입니다. 앞으로도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면서 보석 같은 시를 캐는 시인이 되겠습니다. 그 보석이 위로와 공감을 불러올 수 있기를 감히 바라봅니다. -이희수
약력: 1967년 경남 진주시 출생. 경상국립대 국어교육과 졸업.
심사평: 사랑을 폐기할 때는 애도가 필요한 세상
잘 쓴 시들이 참 많다는 생각으로 원고를 넘기는 동안 마음이 점점 가벼워졌다. 따로 챙기는 원고가 수북했다. 그중에서도 뚜렷하게 변별이 생기고 있었는데 이미 소비된 소재인가, 새로운 소재인가, 하는 지점이었다. 좋은 시를 고르는 기준이 소재의 문제는 절대 아니지만 신춘이라는 무대는 모든 진부함을 벗고 새로움의 얼굴을 드러내는 장이 아닌가. 어쩌면 새로움이라는 말이야말로 진부하지 않은가, 라고 반문할 정도로 우리는 새로움의 정체를 벗기고 싶을 때가 있다. 아무려나 시를 쓰는 사람이 늘어갈수록 시적 언어의 바깥은 지평선처럼 물러서며 또 다른 언어를 채집할 방랑자를 기다리는 것이다.
가장의 퇴직, 청년실업은 특히 요 몇 년 새에 많이 소비된 소재였다는 점이 새로운 표현들에도 불구하고 어떤 클리셰에 묶여버리는 것이 아쉬웠다. 선자들은 그 점이 가혹하다고 읊조리며 ‘저 별들은 내가 닦기로 되어 있다’는 가슴 아픈 문장과 이별해야 했다. 우리의 삶이 커다란 ‘대삼각형’을 그리며 사는 구조라면 더 큰 범위로 확대할 수 있으리라, 믿기로 했다. 실험적이고 모던한 시들도 몇 편 눈에 띄었지만 그 시들이 발표될 지면도 곧 있을 것 같았다.
‘애도’ 외 7편의 시를 읽는 시간은 즐겁고도 흥분되었다. ‘따로 함께였다가 함께 혼자인’ 시들을 동봉해 버린 시인의 심정이 흥미로웠고 각 시편들은 혼자서도 좋은 시였다. 존재하는 모든 사람과 사물들에게는 살아 있을 때의 존중과 존엄도 중요하지만 죽음 이후의 애도란 삶과 죽음, 산 자와 죽은 자에 대한 존엄 그 이상이다. 거기서부터 산 자의 삶이 다시 시작되기도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랑을 폐기할 때는 애도가 필요한 세상이기에 그 시의성을 은근히 드러낼 줄 아는 시인의 애둘러가는 마음도 읽혔다. 그렇게 애도할 준비가 안 된 사람들의 구업에 대해서도 멈춰 생각해 볼 수 있는 시였으므로 우리는 당선자에게 진심 어린 축하를 보내기로 한다.
심사위원 조말선, 신정민 시인
2025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적당한 힘 /김정미(필명 김도은)
새를 쥐어 보았습니까?
새를 쥐고 있으면
이 적당한 힘을 배우려 학교엘 다녔고 친구와 다퉜고
매일 아침 창문을 열고 온갖 소리를 가늠하려 했었던 일을 이해하게 된다
온기는 왜 부서지지 않을까.
여러 개의 복숭아가 요일마다 떨어지고
떨어진 것들은 정성을 다해 멍이 들고 꼼지락거리는
애벌레를 키운다
서로 다른 힘을 배치하는 짓무른 것들의 자세
새로운 패를 끼워 넣고 익숙한 것을 바꿔 넣으면
손을 빠져나간 접시가 깨졌고
칠월이 손에서 으깨어졌고
몇몇 악수(握手)가 불화를 겪었다
세상의 손잡이들과 불화하든
친교를 하든
모두 적당한 힘의 영역이었을 뿐
몰래 쥐여준 의심과 아무렇게나 손에 쥐고 있던 새의 기록에서
별똥별을 본다
적절한 힘을 파는 상점들이 있었으면 해
포장도 예쁘게 해서
심지어 택배로 보낼 수 있었으면 해
평평하고 고요한 힘
고요해서 막다른 골목만큼 지루하고 착한 힘
모자라거나 딱 맞는 힘이 아니라
오르막을 오를 때 내리막 힘을 딛고 올라가려 하는,
내가 알지 못하는 모든 일들을 데려오거나
데려간 그 힘.
손닿는 곳마다 손잡이가 있는 건 아니니까
하루를 조금 더 올라가 보려는 거겠지
한 발 한 발 올라간다고 해서 다 볼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삐딱하게 어둠이 잡음으로 끼어들어도
멈추지 않으려는 거겠지
불편한 새를 손에 쥐어 보기 전에
적당한 힘 하나 손금으로 열어두어도 괜찮은
2025년 경인일보신춘문예 시 당선작
넝쿨은 집으로 가요/김지민
꿈이 쳐들어와 며칠째 끌고 가요
뿌리가 박혀 있는 재건축지구로
굴러다니는 벽시계 옆 이불과 옷가지 사이 사하라 장미는 피어
태엽을 작동하고 고양이가 고양이 꼬리를 잡고 무너진 담장을 친친 감아요
마침표를 찍었어도 빈집과 빈집 사이로 길이 지나가요
세발자전거와 두발자전거 사이에 있던 들뜬 목소리
그 소리가 어디로 갔을지 궁금하지만
살아있는 것들은 살고
넝쿨은 집으로 집으로 또 집으로 가요
갈라진 벽으로 들어온 찢어진 햇빛
빛과 함께 살아나는 먼지
벽지에서 헤매다 색을 잃어가는 색연필
메뉴판에서 썩어가는 토마토를 불러와 요리해요
어제와 다름없는 지붕을 만들어요
오르톨랑이 차려진 식탁
먹어본 적 없는 맛이 불러온 우리 집
이곳의 하늘이 가라앉을 동안
그늘이 그늘을 부풀려 발이 그늘 속으로 사라지고
우리의 과거는 해체되고 있어요
우리만 떠나고
여기엔
아침이 오고 쓰레기도 생기고 꽃이 피고 길이 지나가고
고양이는 거실에서 짝짓기를 하고
살아 본 적 없는 세상에서
살아 본 적 없이 사는 것들이
이끼가 나무 의자를 점령한 시간의 길이를 재면서
있어요
우리는 아직도 집으로 집으로
당선소감:“예측 못한 소나기 같던 ‘당선’… 詩 앞에 늘 겸손할 것”
전국적으로 눈이 내릴 거라는 예보가 있었습니다.
바람은 회색이었고 올해도 기다리는 소식은 없나보다 하고 책 한 권을 펼쳤습니다. 자꾸 바깥을 내다봤습니다. 눈을 기다렸는지 아니면 혹시 모를 어떤 소식을 기다렸는지 헷갈리기도 했네요. 아무것도 오지 않았으므로 마음은 점점 휑해졌네요. 페이지는 습관처럼 넘어가고 읽었을 내용이 아득해 다시 앞으로 돌아가고 눈에 들어오지 않는 문장과 종일 옥신각신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오후 다섯 시, 여느 날처럼 별일 없이 오늘이 가고 있을 때 연락을 받았습니다. 당선은 예측하지 못한 소나기였습니다. 흠뻑 맞으면 시원하면서도 온몸을 누르는 알 듯 말 듯한 무게감, 설레면서도 겁났습니다. 여전히 저는 시가 뭔지를 잘 모르겠는데, 시인이라니 그때부터 머릿속은 흰색이 휘몰아쳤습니다. 뭐가 뭔지 모르는 것들로 마음도 휘청댔습니다.
지금까지 시가 저에게 힘이었듯 앞으로도 힘이 돼 줄 걸 믿습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조심스럽게 끌어안아 봅니다.
많은 인연이 스쳐 지나갑니다. 길게 또는 짧게 가르침을 주셨던 모든 시인께 지면을 빌려 감사함을 전합니다.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 창작 전문가 과정을 통해 조금씩 성장을 한 것 같습니다. 이승하, 송승언, 하린, 김근, 황인찬, 김성규, 류근, 정홍수 교수님께 감사함을 전합니다. 김명철 시인님께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시를 만난 곳이자 최고의 놀이터인 노작홍사용문학관을 빼놓을 수 없네요. 손택수 관장님과 직원분들께 감사함을 전합니다. 서로에게 힘이 되어준 다,시다 동아리 회원들과 중대 문우님들 함께 이 길 걸어줘서 감사해요. 사랑하는 가족들과 이 기쁨을 마음껏 나누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의 길을 걸을 수 있게 길을 터주신 경인일보사와 심사위원님께 고개 숙여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제 몸을 눌렀던 무게를 잊지 않고 시 앞에서 늘 겸손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김지민
심사평:“무너진 옛집서 찾은 삶의 흔적… 마지막까지 울림 지속”
정치적 격랑을 거치면서, 계속 되는 불황을 견디면서, 우리들의 시심은 더 높아지고 더 깊어졌음을 응모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시를 쓰기 시작하면 누구나 시인입니다. 시인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슴 속 깊이 숨어 있는 서정을 사물에 투사하여 사물의 본질을 드러낼 수 있다면 훌륭한 시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시인이 될 수 있다면 아름답고 기쁘고 담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심은 연민입니다. 이 사회가 연민으로 가득 찬다면 시편들은 사회 병리를 치유하는 치료제가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기쁜 일은 응모작품의 수가 늘어났으며 작품의 수준이 높아졌다는 사실입니다.
작품의 경향은 대체로 일상생활에서 느꼈던 감정을 섬세하게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또한 철학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사유의 깊이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들이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두 심사위원은 오랜 토론 끝에 김지민을 당선자로 밀었습니다.
김지민의 당선작 ‘넝쿨은 집으로 가요’는 재건축지구의 폐기물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삶의 흔적들에 깊은 시선을 보내는 시입니다.
굴러다니는 벽시계는 사하라 장미가 그려져 있고, 빈집과 빈집 사이에는 길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사라진 아낙의 목소리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고, 오르톨랑, 즉 멧새 요리가 차려진 식탁이 있기는 하지만 먹어본 적이 없으니 상상속의 음식일 뿐입니다.
온갖 폐기물들 사이에 자라나는 넝쿨은 끈질긴 생명력의 상징입니다. 이미 무너져버린 옛집을 향해 뻗어나가고 있는 넝쿨은 재건축지구에 살던 주민들의 마음일 것입니다.
버려진 메뉴판은 재건축되기 전, 그곳에서 음식점 영업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그리하여 주민들과 정담을 나누던 업주의 마음일 것입니다. 재건축지구의 하늘이 가라앉고 그늘이 커지면 그늘 속으로 발을 옮기던 사람들이 떠나고 주민들의 과거가 해체되는 것입니다. 결국 주민들은 재건축지구를 떠납니다. 서럽고도 슬픈 일입니다.
‘우리들만 떠나고’라는 마지막 행의 울림이 오래 계속됩니다. 부디 한국 시단의 미래를 예인하는 능력 있는 시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김명인 시인·김윤배 시인
2025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백야 / 원수현
창을 하나 갖고 싶다고 말했다
아주 작아서 내 눈에만 보이는 창을
사람들은 으레 그랬듯 그저 스쳐 지나갈 것이고
나는 그 작은 곳에 눈을 대고 밖을 보기로 했어
틈 사이로
가진 것들이 보였다 너무도 많고 때로는 아무것도 없고
많아서 우는 사람들
없어서 우는 사람들
우리 모두는 이렇게 불행함을 하나씩 눈에 넣었지
이곳을 떠나면 행복해질 거라는 사람들
그들은 지금 어디에?
빙하를 뚫고 도달한 곳이 빙하라니요!
그곳도 돌았다 빙글빙글 꼭짓점도 결국에는
그대는 미치어 있는가
그대는 미쳐 있던가
아 다르고 어 달라서 우리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아프리카의 한 부족은 뱀을 피해 장대에 올라간다고 했다
점점 더 길어지는 그림자들
우리의 그림자가 세상을 덮을 때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놓치고 싶지 않아,
깨진 창문을 다시 기우는 사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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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불안과 위로하는 詩 사이서 고군분투할 것
제게 시는 애증의 대상이었습니다. 너무나도 사랑해서 너무 미웠죠. 처음 시를 써야겠다고 다짐했던 날도 두 마음을 동시에 품었던 것 같습니다. 살아야겠다 결심했지만 나는 누군가에게 위로를 줄 수는 없으리라는 마음.
글쎄요. 조금은 막막합니다. 이제 막 신발을 신었고 우리는 늘 앞으로 나아가는 일에 익숙하지만요. 어쩌면 발자국만 남긴 채 사라질 수도 있겠지만, 제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는 그 누구도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웃음이 납니다. 움트는 불안과 그것을 위로하는 시 사이에서 저는 매일 고군분투할 테니까요. 그 잔해가 켜켜이 쌓이면 언젠가 당신에게 듣고 싶습니다. 수고했다고.
추운 겨울입니다. 마음 둘 곳 하나 마땅치 않은 계절이지만 소란을 삼키는 흰 눈이 내리기를. 간절히 기원하겠습니다.
제 이름을 보시고, 제 글을 읽어 주시고 또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해 주실 분들께 미리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한 분 한 분 적지 못했지만 우리의 만남이 시가 되었습니다. 옆에 있어 주어 고맙습니다. 제 사랑이 더 넓어지기를. 제가 더 큰 그릇이 되기를 기도해 주십시오. 저는 계속 쓰겠습니다.
-원수현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심사평:주제 향해 언어를 끌고가는 솜씨 뛰어나
심사를 하며 혹시 놓친 시가 없는가 몇 번을 반복하면서 응모작을 읽었다.
최종까지 선자에게 남은 작품은 4편으로 압축되었다. 최종까지 남은 네 분의 작품들은, 저마다의 색깔이 분명하면서도 소소한 일상을 아름다운 서정의 언어로 건져 올리거나, 은유에 의한 부드러운 이미지의 시편들로, 자신의 내면을 시로 잘 형상화하는 테크닉이 돋보이는 작품들이었다.
고심 끝에 선자는, 198번의 ‘백야(白夜)’를 당선작으로 낙점했다.
당선작 ‘백야’는 우선, 언어의 소통이 잘 되고, 메시지가 분명해 설득력과 안정감을 주었다 그리고 주제를 향해 언어를 끌고 가는 솜씨가 뛰어났다. 백야는 우리 시대 삶의 은유다. 불확실한 현실에 대한 우리의 막막한 삶을, ‘백야’라는 감각적 현상을 통해 우리 삶에 비유하면서 잔잔한 이미지로 형상화시키는 능력이 눈길을 끌었다.
또한 다른 응모작들 보다 수사적 화려함은 덜하지만 삶에 대한 깊은 성찰과 부드러운 이미지가 돋보였다. 그리고 당선자의 작품들 모두가 시적 완성도 면에서 다른 응보자들보다 월등하게 높아서 오랜 창작의 내공을 느끼게 했다는 점, 이 점 또한 선자에게 깊은 신뢰감을 주었음을 밝힌다
-심사:김성춘]
-1974년 시 전문지 <심상> 제1회 신인상
-시집 <방어진 시편>, 시선집 <피아노를 치는 열개의 바다> 등
-전 국제펜한국본부 경주펜 회장, 수요시 포럼대표, 동리목월 기념사업회 이사
2025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날개/박봉철
날개에 바닥이 있다. 어둠을 안고 일어선 곳에 깃털 냄새가 났다
어깨 둘둘 말며 방향을 잡아간다
바람은 심장을 꿰뚫듯 그림자를 비켜선다
새를 연상하며 새의 가벼운 뼈들을 통과한다
무게를 줄이는 새에게 구멍이 뚫려있다는
고고학적인 소견이 귓등을 강타한다
생각을 횃대 삼아 이렇게 가벼운 분위기는 처음이야,
상황만 점점 무거워지는 거지
무게를 덜기 위해
기낭이 풍선처럼 부푸는 듯 위를 갈아먹었던 게지
거품처럼 붉은 강물들이 몸속 번갈아 우거진 체액을 삼켰던 게지
가쁜 숨이 펼쳐진 입김들이 타원형처럼 포개졌고
빛의 멱살을 찾아 길을 낼 수 있을까
방향을 재면서 동시에 꼬리가 돋아났다
그때 주저앉는 평형의 몫은 없을 것이다
꼬리를 빙빙 돌려보내는 하마, 위험할 때 철썩, 철썩 보내는 비버, 방향을 틀 때
긴꼬리로 균형을 잡는 치타,
꼬리가 날개로 들.어.간.다. 거꾸로 들.어.간.다.
꼬리의 배후는 날개였을까
분주하게 묻어온, 허공을 짚어낸다
날개를 치켜들며 여긴 바닥이므로, 일어섰을 즈음
날것의 대의를 위하여
출렁이는 지평선 너머
반쯤 넘어진 표면으로 뿔뿔이 내미는 깃털
겨드랑이에 혁명을 물고 허공을 헹구던 어깻짓
기슭을 앓아, 바깥의 몸살이다
당선소감:내 삶에서 신춘이 얼마나 치열한지 깨달아
하루 전날 너무 궁금해서 타로를 봅니다. 당선될 것인지 어떤지를 몰입하면서….
컵 투 카드에 들은 잔 2개를 보며 승리의 잔인가 아니면 아! 또 이등인가를 속엣말로 쓸쓸한 기분을 밤새 느끼며 무거운 몸을 이끌었습니다. 다음날 월요병을 극복하며 전화를 받았습니다, 당선이라는 밝고 이쁜 목소리에 무덤덤한 인사로 화답했습니다. 누군가가 들을까. 늦깎이에 함부로 벅찬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습니다.
지난 목요일(12일) 최종심에 올랐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최근 최종심에는 몇 번 올라간 터라 그리고 저보다 나이 어린 응모자들이 되리라는 것을 예상하면서 큰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신춘문예니까요. 하지만 주말 내내 손에 일이 잡히지 않아 늘 뒤숭숭했습니다.
사실 신춘문예는 신인들 등용문이라 큰 기대를 하지 않은 채 여러 해를 보냈으며 신진 기대주들이 당선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신춘문예라는 간판에 최선을 다하는 나 자신을 볼 때 그 과정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며 실망했을 때를 대비하여 나름의 핑계를 가졌습니다.
매번 신춘문예는 절대 안 할 거라고 다짐했지만, 결국 시간이 다가오면 미련을 갖게 되고 하루 이틀 전에 급기야 최선을 다해 글을 적는(?) 나 자신을 어리둥절하게 보면서 삶에서 신춘이 얼마나 치열한지 깨닫기도 했습니다.
저에게 신춘(新春)은 형용사이면서 싱싱한 말줄임표인 것 같습니다
싱싱하지 않은 시는 그냥 하소연이나 다름없는 시로 전락하는, 발전이 없는 상투에 젖은 글, 안주하는 글일까요,
제게 시는 열정적으로 시작하고 끊임없이 겸손하게, 언제나 초심으로, 시구 하나하나 펼치는 몰입의 과정이리라, 늘 다짐하곤 합니다.
제게 글을 계속 쓸 수 있는, 무심(無心)의 매진이 이번에는 저에게 행운과 축복으로 다가온 것 같습니다. 앞으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신춘문예 당선자에 걸맞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저의 모자라는 작품에 마지막까지 손을 놓지 않은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기회를 주신 경남신문사와 관계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박봉철 시인 1962년생, 부산 거주
[심사평]: ‘날개는 바닥이다’… 시인만의 은유로 빛나
무엇이 시인가? 라는 질문에 앞서 시를 쓰는 사람은 자기의 시에 시적 언술이 있는가부터 먼저 살펴야 한다. 시적 언술이란, 사물과 인간의 삶을 다르게 표현할 줄 아는 능력이다. 이 능력은 오랜 습작과 읽기, 그리고 사유에서 나온다.
수많은 투고작 앞에서 단 한 사람의 시인을 선하는 일은 언제나 곤혹스럽다. 그럼에도 선자들은 투고작들을 열심히 읽고 설레는 마음으로 시다운 시를 찾는 데 집중했다.
올해는 지난해보다 많은 1329편의 시가 투고되었다. 최근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국민들이 한국문학에 많은 괸심을 가지게 된 계기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투고작들의 전체적인 성향은 가족을 다룬 시편이 대폭 증가했다는 사실이다. 취업, 전쟁, 실업, 가난의 풍경들을 살핀 시들도 없지 않았으나, 예년에 비해 줄어들었고, 가족 간의 이별, 병마, 가족 해체에 대한 시들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전체적으로 투고작들의 수준이 고르게 높아진 것은 매우 고무적인 사실이나, 특별한 한 편이 없었다는 것은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투고작 중에서 선자들에게 끝까지 남은 작품은 총 4편. 이 네 분의 작품 4편 중 어느 작품을 당선작으로 내세워도 무방할 정도로 수준이 비슷했다. 마지막까지 선자들에게 고민을 안겨준 작품은 박봉철의 〈날개〉와 박설하의 〈무를 주세요〉 2편. 선자들은 박봉철의 〈날개〉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축하드린다. 시 〈날개〉는 ‘날개는 바닥이다’라는 시인만의 은유와 함께 ‘겨드랑이에 혁명을 물고 허공을 헹구던 어깻짓/기슭을 앓아, 바깥의 몸살이다’처럼 날개, 라는 대상을 분명하게 파악하고 여기서 뜻밖의 발견을 끌어낸 수작이다. 동봉한 다른 시편에서 언뜻 보이는 상투적인 표현만 지워나간다면 무겁고도 진중한 시인으로 거듭날 것으로 보인다.
투고작 중에서 가장 신선하고 발랄한 작품은 박설하의 〈무를 주세요〉 등 3편이다. 선자들이 오래 망설였던 작품이다. 다만 같이 투고한 작품 〈끈끈한 가족〉에서 자연스럽지 못한 언술이 걸려 아깝게 탈락했다. 이미 기성 시인 못지않은 세련된 시적 어휘와 신선한 눈을 가진 분으로 얼마 안 가 다른 지면에서 만나게 될 것임을 믿는다. 이 외에도 서미경의 〈브루클린의 날씨는 좋다고 전해주세요〉는 발상과 시적 전개가 활달하고 좋았으나 ‘할렐루야’라는 찬양어가 조화롭게 들어가지 못해 아쉬웠고, 강은미의 〈탐조〉는 담백한 시상 전개가 인상적이었으나, 특별한 시적 발견이 눈에 띄지 않았다. 당선자를 비롯해 투고하신 분들의 문운을 빈다. -김언희, 성윤석 시인
[2025 매일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
폭설 밴드/ 노은
팝콘은 함성이라서 우리는 스네어 드럼을 밟는다
산과 하늘의 경계가 흐려지는 시간이 오면
저 멀리서 늑대의 우두머리가 하울링하는 소리가 들렸다
교실 안 아이들의 핸드폰에 폭설 경보음이 울리고
뒤적거리다 발견한 서랍 속에서 눅눅해진 팝콘
밴드 합주실은 꼭대기 층에 있어서
아이들은 지붕 없는 교실에서 자습을 했다
쿵, 쿵
우리는 무언가를 떨어뜨리기도 하였는데
무언가와 바닥이 부딪히는 소리는 생각보다 커서
옥상에서 어떤 아이가 얻어터진다는 소문이 학교에 돌았다
누군가 죽은 게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너는 그렇게 말할 것 같았다
퓨즈가 나가고 모두 조용해지는 한 순간
기억 속의 학교는 영원히 어두울 것만 같아,
내가 말했다
셀 때마다 달라지는 계단의 수
잡히는 대로 꽉 쥘 수밖에 없어서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하얗게 질린 손에 온기가 돌아오길 바라며
우린 완전히 고립된 거야
둘 중 누군가 그렇게 말하기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열차가 운행하지 않고 교문이 눈에 묻혀도
이곳은 폭설 밴드
너와 나는 깨진 전구와 베이스 기타 줄을 들고
학교를 한 바퀴 돌았다
신발장을 지날 때마다 교실에서 이탈한 아이들은 배로 늘어나서
일렬로 늘어선 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오지 않는 담임 선생님께,
추워서 옷을 벗었어요 우린 아직 힘이 넘치고 유순하답니다 서로의 입에 팝콘을 넣어주곤 겨드랑이에도 손을 넣어요,
구두 소리가 마룻바닥을 두드리면 학교는 움직입니다 교시음은 필요 없어요 베이스도요
너는 머리말을 이렇게 장식하기로 마음먹었고
늑대들이 산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아이들이 울기 시작했다
당선소감 / 노은
7살 무렵 "왜요?"라는 질문을 입에 달고 살던 저는 쉽게 확신을 내릴 수 없는 어른으로 자랐습니다. 지난 몇 년간 "모르겠다"라는 말을 계속했습니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내가 하는 모든 행위에 이유가 필요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르겠습니다. 미래에도 미래를 알 수 없듯, 불안정한 것들을 쌓아올리는 방식으로 세계가 흔들립니다. 그들은 저를 두렵게 합니다.
첫 투고에 덜컥 당선되어 놀라움은 금세 부채감으로 바뀌었습니다. 시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또다시 모르는 것이 제게 찾아온 것입니다. 다이어리 앞장에 써놓은 '올해가 가기 전에 해보고 싶었던 일'에 줄을 그었습니다. 선명한 힘이 뒷장까지 새겨있습니다. 모르는 힘은 그런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꾹 누른 자국 같은 것이요. 지금껏 그래왔듯 두려워하며 부딪히는 힘으로 떨릴 것입니다. 눈을 열고 귀를 넓히며, 그러한 힘이 앞으로도 저를 땅에 발붙이게 할 것 같습니다. 그러길 바랍니다.
시를 읽어주신 심사위원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무엇이든 가능성을 열고 격려해 주시는 학교의 선생님들께도 감사합니다. 같이 읽고 쓰는 학우들의 따스한 온기가 문학을 가득 채우고 있음을 느낍니다. 불가해한 이야기들에 대해 고민하며 함께 시간을 견딘 나의 친구들, 문우가 되어준 사람들에게 깊은 애정과 경의를 표합니다. 앞으로도 잘 살아냅시다. 그리고 시의 세계를 처음으로 보여주신 선생님, 손을 잡아 바깥으로 끌고 나와준 Y, 인생의 많은 시간을 뭉쳐 지나온 긴밀한 친구들과 희연, 소담에게, 사랑합니다. 마지막으로 애정하고, 미워하고 또 미안한 엄마, 아빠, 가족들에게 감사합니다.
어두워진 기운이 가시도록 마음에 촛불을 밝히고 다시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쓸 준비의 준비를 합니다. 오래된 노트북이 무사히 켜지길 기다리며 장바구니에 담긴 책들을 주문합니다. 노트북의 모니터가 환해질 때까지, 얼마간 이러한 공상이 떠올랐다 금세 사라집니다.
-노은 2003년 서울 출생.서울예술대학교 재학 중.
심사평
예심과 본심이 동시에 진행된 이후, 최종심에서 거론된 작품은 노은 씨의 '폭설밴드'와 방성원 씨의 '이사할 때는 누구나 호구가 된다', 두 편이다. '폭설밴드'에서 폭설이라는 고립 공간에서 음악성에 기대어 현실과 환상이 조립되었다면, '이사할 때는 누구나 호구가 된다'의 생활은 일상어의 발화이다. 전자가 시적 장치로 다채로운 발상을 사용한다면 후자는 관찰의 시선이 돋보인다. 당연히 전자는 활발하고 후자는 페이소스에 근접한다. 한 발짝 더 들어가 보면 서로 다른 이 두 작품이 얼마나 좋은지 알게 된다.
'폭설밴드'에서 "쿵, 쿵 / 우리는 무언가를 떨어뜨리기도 하였는데 / 무언가와 바닥이 부딪히는 소리는 생각보다 커서 // 옥상에서 어떤 아이가 얻어터진다는 소문이 학교에 돌았다 / 누군가 죽은 게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 너는 그렇게 말할 것 같았다"라는 부분은 거대 폭설 군락이라는 상징이 에워싼 교실의 분위기와 감정에 대한 빛나는 묘사이다. 그런 시간 그런 장소에서 시가 왜 필요한가를 충분히 증명하고 있다. 폭설이라는 썸네일을 가진 기묘하고 역동적인 한 편의 영상이 아닌가. "퓨즈가 나가고 모두 조용해지는 한 순간 / 기억 속의 학교는 영원히 어두울 것만 같아"라는 어두운 반전 또한 이 시의 매혹이다. 폭설 속의 다채로운 수다는 어떤 감정으로도 번안 가능한 노은 씨의 고유한 영역이다.
이사할 때는 누구나 호구가 된다'의 정경은 누구나 겪음직한 삶의 귀퉁이라는 일상이다. 이 소소한 이야기의 마지막은 "문은 닫히니까 괜찮죠? // 문을 닫았다가 열었다가 다시 / 닫다가 자꾸 내가 걸리는 것 같아 // 그냥 열어놓고 지내야죠"라는 구절이다. 이 결말은 느리지만 진솔하고 단순하면서 비범하다. 또한
이 진술에는 신산한 보통 사람의 하루가 고스란히 맺혀 있다. 사실이 아니라 공감을 추구하는 시적 언술이 몸에 베인 창작 습관을 가졌다고 짐작한다.
단점보다 장점이 많은 두 작품 사이에서 주저하면서 어떤 선택도 괜찮다는 논의가 오갈 때쯤, 결론을 위해 우리는 다시 숙고했다. 전자와 후자는 좋거나 더 좋음이 아닌,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 현대시의 섬세하고 다양한 포즈이기 때문이다.
폭발하는 시적 감수성의 넓이와 깊이야말로 심사위원들이 '폭설밴드'의 손을 들어준 타당한 이유이겠다. 언어와 음악이 에워싼 폭설이라는 늑대의 울음은 이 시가 당선작으로 선정되는데 결정적이었다. 당선된 노은씨는 20대 초반, 우리 문학의 전면에 낯선 확장성을 가져주리라 예감한다. 축하를 드린다.
사족이지만 일정한 수준을 보여준 십 대 청소년의 투고작도 잠깐 화제였다.
-심사위원 : 송재학 이병률 김기연
2025 영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침목/김미정
스위스 빙하 열차의 기울어진 유리잔을 생각했다
버틸 수 있는 각도, 그런 거 있잖아
결빙 구간이 자주 반복되었다
나는 선로를 따라 쩍쩍 갈라지고
아무렇지 않다는 말이 물이 되어 몸이 몸으로 늘어지고
완전히 누우면 각진 하늘이, 조금 측면으로 기울이면 삐죽이
솟아있는 아파트 옥상과 낙상주의가 적힌 사물함이 보였다
신은 나를 물속에 둔 채로 자주 자리를 비웠다
그럴 때마다
몸을 최대한 동그랗게 말고 그 속에 얼굴을 파묻었는데
나랑 같이 있자
사이프러스 큰 나무들은 비켜서 있다
철 지난 비둘기를 부르고 솟대를 걸고 손톱을 물어뜯고,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열두 번 모으면 사랑해 한번
커튼이 열리면 각자의 성호를 긋고 밥상을 마주하는 사람들
비릿한 철 냄새와 밥 냄새가 섞이고
열차는 제시간에 들어오거나 연착되었다
내 자리는 콘크리트가 대신하고, 폐목이 되어 공원으로
옮겨질 거라는데
부유하는 법을 배운 건 그때부터
신은 나를 통과하게 될 것이다
기다림은 다시 기다림으로 연결된다
누구든 꾹꾹 밟고 지나가길
그렇게 홀가분해지도록 나를 분리하기 시작한다
당선소감:"버티려면 단단해져야 하는 침목 같은 시간 지나…이제는 맘껏 시 쓰려 해"
침목, 물에 잠긴 나무가 떠올랐다. 꾹꾹 눌러진 누군가의 삶이 느껴지기도 했다. 검게 타들어 간 나무색, 재에 가까워지는 나무, 버티려면 단단해져야 하는, 침목과 같은 시간을 지나왔다. 그런데도 내게 기다리라고 말하는 순간들은 자주 반복되었다. 읽고 싶고, 쓰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그 끊어진 시간을 찾아 거슬러 오르는 중이다. 철로는 휘지 않도록 간격을 둔다. 비록 나의 간격은 길었지만, 이제는 맘껏 휘어도 좋다는 생각으로 시를 쓰려고 한다.
수상 전화를 받았을 때 기쁨과 동시에 겁이 났다. 이제는 그 순간의 떨림을 기억하겠지. 잘할 수 있을까를 고민할 때마다, 자괴감이 들 때마다 '未定之天, 美貞스럽게'라고 스스로 위안했었다. 그 시간들이 앞으로도 반복되고 바뀌지 않을 거란 걸 안다. 늦게 시작한 공부에 조바심이 날 때마다 잘하고 있다고 응원해준 버팀목 같은 사람이 많아서, 요즘의 나는 가진 게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이 든다. 시를 보면서 채워지는 느낌이 행복해서, 오롯이 나를 욕심내는 시간이 채워져서 좋았다. 나는 아직 배워야 할 게 많다. 책상에 앉아 나를 마중하는 시간을 위해 시를 만나는 삶을 계속 이어갈 것이다.
내 안에 시가 있다고 말씀해주신 고명재 교수님의 열정을 따라가려고 애썼다. 계속 쓸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신 신용목 교수님, 소중한 은인, 두 분께 진심으로 너무 감사드린다. 시의 곁을 내어준 경은 쌤, 수연 쌤. 감사해요, 쓰면서 행복하기를 바라는 계명대 교수님들과 문우들(미미새와 우리 쌤들), 추억을 공유하는 끈질긴 친구들, 야야패밀리, 쌤이라고 불러주는 아이들, 그리고 해바라기 같은 나의 지인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다. 무엇보다 공부하는 아내를 인정해주고 응원해준 남편, 소중한 보물들 승준, 승원, 예진. 항상 고맙고 사랑해! 오늘을 있게 해준 나의 할머니와 엄마, 예쁜 동생 숙이에게 찐한 애정을 전한다. 은서, 파이팅! 항상 내 편이라는 마음을 갖게 해준 가족과 시월드, 모두 감사드린다. 마지막으로 이제는 시를 쓰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게 이 지면을 마련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김미정 시인 1972년 강원 황지 출생, 경북 칠곡 거주
계명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재학
심사평: "유니크한 발상·언어 구성력 뛰어나…삶 원리를 침목 속성에 은유한 가편"
2025년 영남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는 예년에 비해 많은 투고작들이 들어왔다. 한강의 노벨문학상의 긍정적 여파가 예비 문인들의 활황으로 이어졌다고 생각된다. 예심을 통과한 작품들의 내실도 더욱 탄탄해졌는데, 역량 있는 신인들이 이렇게 많은 작품을 응모해준 사실이 매우 기쁘게 다가왔다. 심사위원들은 꽤 많은 작품들이 빼어난 시선과 언어를 보여주었다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이들이 개진한 언어는 시단의 관습이나 주류를 따르지 않고 경험적 구체성을 가지고 있어 이 분들의 정성에 의해 한국 시의 미래가 밝으리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오랜 숙의 끝에 상대적으로 유니크한 발상과 언어적 구성력을 가진 김미정씨의 시편들에 주목하였고, 그의 '침목'을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다. 이 시편은 철로에 놓인 침목의 외관과 생태와 속성을 삶의 깊은 원리로 은유한 가편이다. 그 안에는 기억의 구체성과 함께 오래도록 버티고 갈라지고 기울어지고 낡아온 시간이 담겨 있고, 나아가 타자를 품은 채 내면으로 신성을 안아들이는 과정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나머지 시편들도 균질성을 거느리고 있어서 더욱 성숙한 시편으로 영남일보 신춘문예의 위상을 높여주기를 기대하게끔 해주었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당선되지는 못했지만 예술성과 구체성을 견지한 사례들이 많았다는 점을 기록하고자 한다. 우리 주위에서 살아가는 타자들을 큰 애정으로 응시한 작품들도 많았는데 다음 기회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더 빛나는 성과를 기대하면서 투고자 여러분의 힘찬 정진을 당부 드린다.
-장옥관 시인 · 유성호 문학평론가
2025년 전북일보신춘문예 시 당선작
카카리키 앵무/이주경
조용히 우는 아이를 창살에 가둔다 주전자 물 끓는 소리보다 작게 울어도 가둔다 미풍에 머리카락 날리는 소리보다 작게 울어도 가둔다 창문보다 낮게 목소리를 죽이는 아이, 이웃집엔 중문도 방음벽도 없단다 얌전히 울면 해바라기 씨를 가득 줄 테야
호기심 많은 아이를 창살에 가둔다 탁자 위에 놓인 꽃병을 쪼아대도 가둔다 짧고 단단한 부리로 백합 꽃잎을 쪼아대도 가둔다 동글동글한 눈빛으로 수도꼭지를 툭툭 건드려도 가둔다 집안에서 제일 예민한 각도로 웅크리는 아이, 이웃집엔 꽃병도 수도꼭지도 없단다 너의 호기심을 잠그면 해바라기 밭을 줄 테야
혼자 놀기 좋아하는 아이를 창살에 가둔다 오후 햇살이 올리브색 깃털 위로 미끄러져도 가둔다 건반 위를 콩콩 뛰어다니기만 해도 가둔다 깨지지 않는 거울을 보고 혼잣말을 해도 가둔다 방안에서 깃털을 고르는 아이, 이웃집엔 햇살도 거울도 없단다 방안 가득 네 꿈을 펼친다면 새장을 통째로 줄 테야
아파트 밖을 나서는 아이를 창살에 가둔다 창문 여는 소리만 들려도 가둔다 놀이터에서 들리는 웃음소리가 높아져도 가둔다 마오리족의 깃털처럼 가벼워지려는 아이를 가둔다 창살 안에서 노란 깃털을 뽐내는 아이, 이웃집엔 너 같은 아이도 악보도 없단다 내 앞에서만 노래하면 새장을 요람처럼 흔들어 줄 테야
당선소감:치열하게 꿈꾸는 시인이 될 것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배 한 척, 넘실대는 파도를 가로질러 수평선으로 향합니다. 때론 기우뚱 방향을 잃기도 하지요. 시에 대한 갈증과 물음을 가득 싣고 떠난 배처럼, 시는 가까이 존재하지만 확 잡히지 않는 또 다른 나였습니다.
아우성처럼 쏟아지는 많은 말들을 마음속으로 다시 밀어 넣습니다. 10대 때부터 함께 한 ‘시’이지만, 모든 것이 치열하지 못했던 아쉬움과 핑계일 테니까요. 차곡차곡 접어 둔 못다 한 언어들은 앞으로 써야 할 작품 속에 녹여내면 되지 않을까요.
시를 쓰면서 조금 깨달은 게 있습니다. ‘시’는 언제나 그 과정 속에 놓여 있기에, 매 순간 새롭고 치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 어렵고 힘들지만 참 설레이고 행복한 일이기도 합니다.
특별한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넘치게 받은 당선 소식에 감사하고 기쁜 마음입니다. 부족한 제 자신을 다독이면서 더 힘을 내라는 메세지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먼저 부족하지만 가능성을 보시고 선택해주신 김사인 시인님, 박남준 시인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창살에 갇히지 않고 훨훨 날아갈 수 있는 시인이 되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조말선 선생님, 시의 내밀성을 찾지 못하고 추위에 떨고 있는 제가 많이 안타까우셨죠. 시의 바닥과 그 깊이를 채워주시려고 하신 마음 알기에,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선생님께서 늘 강조하신 사유와 인식, 그리고 대상의 속성으로 새로움을 발견해내는, 이미지와 묘사를 잃지 않는 시인이 되도록 애쓰겠습니다.
시를 쓰는 과정에서 함께 한 신정민 선생님, 강영환 선생님께도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시’에 대해 함께 고민하며 많은 이야기를 끊임없이 나누던 다정한 지평 선생님들, 저보다 더 많이 기뻐해 주시는 모습에 울컥했습니다.
애정어린 잔소리로 응원해 준 사랑하는 남편과 딸 시현, 기뻐해 주시는 아버님, 버팀목과 안식처인 김경남 나의 엄마, 현승, 현준 사랑하는 가족을 비롯해,
진심으로 기뻐해 주시는 소중한 지인분들과 나의 사랑하는 벗들에게도 감사하는 마음을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딸이 글쓰는 걸 늘 응원해주셨던 그리운 아버지, 아직 늦지 않았지요, 치열하게 꿈꾸는 시인이 되겠습니다. -이주경 시인, 부산 출생
심사평:고요한 영혼의 시위를 당겨라
‘신춘 병’이라는 오직 문청이라 분류 지칭되는 종족에게만 대책 없이 전염되고 일사불란하게 치유를 거부하는 지독한 병이 세대를 초월해서 아직도 유효한가 보다.
일천여 편이 넘는 투고 시가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왔다. 모두 열두 분의 44편이었다.
“필락경풍우 시성읍귀신(筆落驚風雨 詩成泣鬼神), 붓을 들어 떨치면 비바람이 놀라고 시를 지어 이루면 귀신도 울고 가는 이라며 두보가 이백을 일러 존경을 표한 헌사가 있다.
모름지기 시를 짓는다면 적어도 이 정도의 문장을 꿈꾸어야 하지 않는가.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이라고 젊은 날 시마에 빠져 시의 날을 벼리기도, 그렇지 못한 남루한 시적 재능을 자학하던 시절이 있었다.
발칙 풍부하고 패기 넘치는 상상력, 갓 건져 올린 물고기의 비늘에 파닥거리는 윤슬, 우주를 들이마신 숨을 멈추며 이윽고 고요한 내면의 시위를 당긴 숨 가쁘도록 팽팽한 긴장, 수면을 차고 튀어 오른 물방울에 비친 영혼의 무게.
신춘문예 심사를 하다가 위와 같은 문장을 만날 때가 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기쁨을 누리는 순간이다. 잊고 있었던 호승심이 일기도 부러움에 눈꺼풀이 가만히 내리 감기기도 한다.
「카카리키 앵무」외 2편과 「컨베이어 벨트」외 3편, 두사람의 작품을 두고 아주 잠시 머리를 맞댔다.
기성의 시문법, 감각을 안정적으로 운용하는 훈련도 쉽지는 않지만, 그보다는 심사위원으로 대표되는 기성의 미적 감각과 안목을 돌파 해주는 그러한 신선함 속에 시적 설득력을 발휘하는 새 목소리, 새 힘을 우리는 기다리는 것이다. 적어도 그런 의욕과 모험의 열정을 기대하는 것.
기준이 그러했다. 「자석 수평계」, 「새점」, 비록 완성도가 높은 수준작이기는 하지만 기성세대와 크게 다를바없는 작품은 적어도 신춘에서는 보류하기로 했다.
당선작은 왜 꼭 한사람이어야 할까. 「들깨꽃 부각」은 시대상황과 맞물려 무릎을 치게 만들었다. 시란, 시인이란 내일을 향한 날카로운 예각의 안테나를 갈고 닦고 기다려야 한다. 뮤즈의 샘물이 가득 차오르기 까지.
「카카리키 앵무」는 사회문제로 떠오른 층간소음문제, 육아, 가족, 교육문제등을 반려동물을 통해 바라본 작품이다. 당선작을 받쳐주는 다른 작품의 수준이 조금은 고른 이에게 마음이 더 기울였다. 또한 시를 끌고 나가는 뒷힘과 함께 당선자 쪽의 발랄과 생기가 우리의 의도에 더 맞는 것으로 여겼다. 부디 당선작이 대표작이 된 시인으로 머물지 않기를 바라며 당선을 축하한다.
-박남준·김사인 시인
2025년 전북도민일보신춘문예 시 당선작
소가 라디오를 먹는다/임수율
라디오를 켜놓고 소머리를 감긴다
단단한 이빨 속에 곱씹은 풀들이
이끼가 되었다
부릅뜬 눈으로 저녁 너머를 되새김하는,
머리만 남은 소가 싱크대에 식은 울음을 쏟고,
두꺼운 혀와 솟아오른 귀를 씻기다가 나는,
한 줄기 바람이 되기도 하고
익을수록 쫑긋해지는 귀에서 흘러나오는
천둥소리, 풀벌레 소리,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
우우 끓는 한낮
뽀얗게 우러난 사태를 국자로 휘휘 젓는다
씹을 때마다 혓바닥이 입천장에 붙어 쩝쩝거리는
국밥 속에서 흰 눈 밟는 소리도 들은 것 같아,
발 담근 소의 냇물과 옥수수, 질경이, 개망초와
억새를 꾸역꾸역 건져 먹는다
소 울음소리에 주파수 맞추면,
라디오는 소와 놀던 풀밭의 새들과
꽃잎 열리는 소리를 쏟아놓고
[당선소감]
오래 잤습니다. 햇빛이 암막 커튼 속에서 기어 나와 동공을 건드려도 자는 척 누워있었습니다. 머리맡엔 어둠이 흩트려 놓은 A4 용지도 납작 엎드려 자는 것 같았습니다. 깨어나면 작별의 슬픔이 날카로워서 나는 계속 커튼 속에 숨어있기로 했습니다. 이 별은 사람만 아픈 게 아니란 걸 알았습니다. 시를 배반하기로 한 밤과 늦은 아침의 일이었습니다.
전화기는 언제나 기습적으로 울어 재치고, 잠결에 전화를 받았습니다. 목소리를 가다듬으려 했지만, 목이 잠겼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니 지난 계절 폭폭 고아 먹은 소 울음소리가 비집고 나왔습니다. 난생처음 산타가 찾아온 아침이었습니다. 반가움에 목이 잠겼고 정신이 들자 두려움이 부풀었습니다. 그 떨림을 앞세워 나는 시의 집으로 가는 중입니다. 엄동에 돌아온 자리, 쉬이 불이 들지 않지만 따뜻해지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시를 등지려던 순간 파랗게 언 손 잡아준 손,‘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당선 소식이었습니다. 마음 붙잡아주시고 이름 곁에 시인이란 새 이름 붙여주신 신문사와 심사위원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열심히 듣고, 꾸준히 바라보면서, 사물에서 못다 들은 말에 귀 기울이며 낮은 목소리들 받아 적겠습니다.
감히 부르기도 벅찬 이름 많습니다. 시와 만나게 해주셨던‘시와 찻잔’백담 김희광 선생님, 꼬인 문장과 사유를 풀어주시려 따끔한 가르침 주신 김산 선생님과‘문장 강화’문우들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그리고 마경덕 선생님과‘솜다리 문학’을 알찬 강의로 열매 맺게 하시는 전문수 교수님 감사합니다. 더불어 가족 같은‘모던포엠 시나무’동인들‘詩.作.시그널’과‘시좌’‘시납’‘문장콘서트’문우님들 고맙습니다. 시 앓이에 몰두한 나를 지지해 주는 내 삶의 은인과 하늘에 계신 부모님 고맙고 사랑합니다. 특히 암 투병도 이겨낸 아들, 친구 같은 딸 나의 빛, 영광의 자리에서 불러본다. 그리고 만학도의 꿈을 돕는 경희사이버대학교 교수님들 감사합니다. 고등학교 때 국어 담임이셨던 성열호 선생님 “넌 꼭 글을 쓰라”시던 말씀 잊지 않겠습니다. 더불어서 저를 기어이 살게 했던 어둠과 물 자국들까지 고맙고 사랑합니다.
-임수율 시인
심사평:“이질적인 소재를 서두르지 않고 안내하는 내공”
전북도민일보의 신춘문예는 작년보다 응모 편수가 상당히 많았다. 심사를 하는 일이 한국 시단의 가능성 내지는 응모자 개개인의 잠재태를 확인하는 일이기도 해서 기쁜 과정이었다.
수백 편의 심사 대상 작품에는 시적 구성과 긴밀도 문장을 다루는 솜씨가 좋은 작품들이 많았다. 반면에 작품의 흐름에 상관없이 어려운 문장이나 어울리지 않는 수사를 끼워놓은 듯한 응모작도 좀 있었다.
이번 심사의 요목은 응모한 편수가 모두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지가 첫 번째였다. 이는 응모자가 앞으로 이룰 시적 성취를 가늠해보는 일이기도 했다. 다음으로는 신춘문예 응모작다운 패기나 당돌한 상상력 등을 우선순위에 두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최종까지 남은 작품은 이인희의 ‘우산, 날개를 펴고’와 신양옥의 ‘망설이는 동안’, 임수율의 ‘소가 라디오를 먹는다’와 신동신의 ‘벽의 문진’ 그리고 이영화의 ‘소금이 오다’였다.
다섯 분의 작품을 반복해서 읽었다. 최종까지 남은 작품은 임수율의 ‘소가 라디오를 먹는다’였다. 같이 보내온 ‘그릇을 읽는다’도 수작이었다. 둘 중 한 작품을 고르는 일은 어려웠다. 쉽게 읽히지만은 않겠다는 불통과 술술 읽히는 소통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신춘문예라는 특성을 참작하여 ‘소가 라디오를 먹는다’를 당선작으로 정했다.
‘소가 라디오를 먹는다’는 우리가 흔히 먹는 소머리 국밥 한 그릇이 얼마나 많은 과정으로 완성되는가와 소머리 국밥 한 그릇 속에는 얼마나 많은 과거가 들어있는지 차근차근 짚어보게 한다. 과정과 과거를 다 겪어내고 내게로 온 소머리 국밥 한 숟가락이 신앙처럼 경건해지기까지 한다.
‘소’와 ‘라디오’라는 이질적인 소재 둘을 연결하는 과정을 작가는 서두르지 않고 소처럼 느릿느릿 안내하는 내공도 지녔다. 또한, 소의 상징이 얼마든지 확장될 여지를 남겨둔 채로 이 작품을 마무리했다. 심지어 작품 안에서 약간 터덕거리는 수사나 연결조차 작가가 의도했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 오래 정진하시기를 바란다.
김영(시인, 석정문학회 회장)
2025년 광남일보신춘문예 시 당선작
아오키가하라*/이지우
외로움이란 자꾸 발견되는 이상기후
나는 지금부터 나를 고백하는 것으로
숲에 도달할 수 있다
여름이 덜컹거리며 지나가는 어떤 날, 나는 스스로를 바꿔 보기로 했다 노력과 사랑을 뒤섞어서
밥과 함께 삼켜 보기로 했다 문장 속으로 회피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새벽을 참 좋아하고
이것은 글로 포기할 마음을 먹는다는 것
창 너머로는 고장난 실외기가 소음 없이 돌아간다
다리 사이로 차오르는 땀과 찝찝함이 아름다워지는 순간이
내게는 있다
사람이 너무 좋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미안한 마음이 지속되면 어떻게 해야 할까
녹아버린 빙하처럼
외로움은 누군가가 주목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중요해지는 것이다
나는 선풍기로 외로운, 혼자인, 함께는 불가능한 스스로를 견뎌낸다 곧이어 풀과 꽃을 기록했다
푸르다, 푸른 것이다 나무는 나무라는 이름으로 죽어간다
아직 나 살아있어요, 하고서
당선소감:오로지 시인이 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창작
처음 보는 번호로 걸려 온 전화부터 지금까지 실감이 잘 나지 않습니다. 항상 바라던 것이었음에도 손에 쥐어지니 만져지지가 않아 곤란한 기분입니다. 당선을 축하해 주는 친구의 울먹임이 아직까지도 생생합니다. 일주일 전에 피를 흘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온몸에서 솟구치는 피를 내뱉으며 울었는데, 그 울음이 제가 쏟을 눈물을 미리 쏟아 주었다 생각이 듭니다.
항상 무기력함에 이끌려 방에 박혀 있던 제가 활력을 되찾은 건, 중학생 때 홀로 글을 쓰기 시작한 뒤부터였습니다. 단지 현실에서 도망가고 싶어 쓰기 시작한 제가, 이 활자를 업으로 삼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요. 생각하다보면 마음이 가느다라지는 것만 같은 감각에 저는 창문을 열고 겨울 바람을 맞습니다. 다시 마음을 부풀게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어떤 것이든 단면을 들여다보면 어둡고 축축한 부분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슬리퍼 밑창처럼 죽죽 끌어당겨지는 슬픔도, 몸 이곳저곳에서 숨쉬는 흉터들의 분주함도 나의 단면의 일부입니다. 쓰고 읽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단면에 숨겨진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으면 싶기도 합니다. 세계의 단면에는 과거와 미래가 있고, 여름의 이중성이 있으며, 살다와 살아간다가 혼동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단면들은 감각이 되고, 비유가 될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들을 자주 하며 글을 썼습니다.
오로지 시인이 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이곳까지 발을 올렸습니다. 앞으로 나아갈 길이 기대되면서도 두려운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문예창작과라는 곳에 다다를 수 있도록 도와주신 제 하나뿐인 선생님, 내가 살아있도록 마음을 준 친구들, 외로울 때마다 소통해 주던 책들… 모두 사랑하는 마음이 차오릅니다. 제 당선 소감을 읽으시는 분들께도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앞으로도 시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제 글을 읽어 주신 많은 분들과 읽게 되실 분들께 감사를 표합니다.
-이지우 시인 서울 출생, 한양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 재학 중
심사평:언어·감정·의미 잘 다스려…시적 짜임새 좋다
한 편의 시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언어와 감각과 사유와 통찰을 풀고 맺고 잇대느라 얼마나 많은 시간과 자기와의 싸움을 견뎌내야 하는 걸까? 응모된 1200편이 넘는 공들여 쓴 시들을 읽으며 드는 생각이었다. 다양한 세대의 ‘일상과 시화’라 할 만한, 우리 삶 속에 시가 있다는 서정시의 뿌리를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그 경향은 크게 고금리와 고물가로 인한 생활고, 늙음과 질병으로 인한 돌봄과 죽음, 현실 정치에 대한 비판과 풍자, 그리고 구어나 방언에 담긴 모어의 시적 실현으로 나뉘었다.
특히 한강의 노벨상 수상식이나 비상계엄령 선포 등을 시제로 다룬 시들도 간간이 있었는데, 시대의 첨예한 첨병으로서의 시의 역할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예비 시인들의 시를 읽는다는 건 늘 기껍고 설레는 일이다. 거기에는 우리 시의 과거와 미래, 그러니까 정전화된 시적인 것과 가능태로서의 시적인 것이 충돌하면서 내뿜는 에너지가 꿈틀거리며 뭉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와 현재의 시가 무엇이었고, 미래의 시가 무엇이어야 할까에 대한 고민을 담보하는 시들이 눈길을 끌었다.
또한 신인에게 기대하는 시적 에너지로서의 열도(熱度), 시적 도전으로서의 신선도(新鮮度), 그리고 시적 훈련으로서의 완성도(完成度) 또한 심사의 기준이었다. 자신의 체험이나 현실적 서사에 함몰되어 시적 긴장과 응집력을 놓치는 작품들을 먼저 놓았다.
최종적으로 시적 개성이 뚜렷한 네 분의 작품이 남았다. ‘순환도로’ 외 4편은 순환도로, 회전교차로, 콘크리트, 주차선, 바퀴와 같은 도시 문명의 상징적 오브제들을 통해 도시인의 삶을 통찰한다. 굵고 간결한 직진의 시적 사유와 그 전개에 호감이 갔다. ‘나무 안에 소리가 산다’ 외 4편은 서정적 통찰을 발견의 묘사에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시 쓰기의 연륜이 읽혔다. 잘 조율되고 다듬어진 고백의 숨결이 자연스럽게 독자를 끌어당기곤 했다. 그러나 이 두 분의 시편들에서 아쉬웠던 것은 신인에게 기대하는 시적 도전으로서의 새로움이었다.
‘테트라포드’ 외 4편은 마지막까지 손에서 놓지 못했던 작품이다. 사물의 물질성과 구도를 투시하는 감각과 사유를 현실과 잇대 놓는 튼실한 연결고리가 미덕이었다. 그러나 다소 설명적이었던 다른 작품들과의 편차가 아쉬웠다.
최종적으로 ‘아오키가하라’ 외 4편을 당선작으로 내놓는다. 언어와 감정과 의미를 다루고 다스릴 줄 안다는 믿음이 갔다. 그것들을 엮는 시적 짜임새에 군더더기가 없고, 감각과 상상력은 물론 시적 시선이 새로웠다. “외로움이란 자꾸 발견되는 이상기후”, “외로움은 누군가가 주목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처럼, 감정과 의미와 묘사와 통찰이 어우러진 밑줄을 긋고 싶은 발견의 문장들 또한 매혹적이었다. 다른 작품들에서 보여주는 균질하면서 안정된 시적 열도와 완성도가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비록 당선권에는 들지 못했지만 최종 심사 대상자를 비롯해 응모자 모두에게 힘찬 정진을 당부한다.
-정끝별 시인 · 이화여대국문과 교수
2025년 무등일보신춘문예 시 당선작
화산리 보물선/이수하
그가 어떤 파랑도 타고 넘는 보물선을 만든다
담벼락 밖으로 삐져나온 보일러 연통은 좌표
개나리 꽃가지는 방위를 살피는 나침반이다
턱선의 땀방울을 향해 양어깨가 번갈아 오가며
오후를 스패너로 조인다
기름통을 싣고 와 기계실에 연결했으니
골목에서 얻은 메트리스를 선실 바닥으로 삼고
커튼은 돛으로 쓴다
눈썹에 와닿는 입김
문턱에 가는 실금 따라 살얼음이 생긴다
아귀가 맞지 않는 곳에서 갈매기 울음이 새어 나온다
유모차는 뭐 하려고?
엄마를 밀고 가려고
부러진 선풍기는 내놓아야지
거기 푸드덕 새가 살아
의자는 도로 갖다 놔 애들도 올 텐데
발 뻗을 곳이 없잖아
그는 제 식구 찾아가겠다고
삐걱대는 의자를 타고 헌 옷가지들 챙긴다
의자 다리가 구부러진 못을 물고 기우뚱거린다
잠가도 들리는 물 흐르는 소리
쇠 파이프의 긴 그림자가 기울어지는 들보를 받쳐 든다
나무 벌레 구멍 속에서 금가루 같은 햇볕 쏟아내면
갯벼룩이 기어 나온다
벼락바람이 불고
얼룩무늬 골목이 스멀스멀 방문을 밀쳐둔다
당선소감:꿈결 속에서도 글귀 하나 쥐고
아버지 산소 가는 길에 보았습니다. 환삼덩굴이 칭칭 감아 오른 나무를. 환삼덩굴이나 사위질빵 덩굴이 나무를 오르며 촘촘한 그물을 짜기에 작은 새들이 비바람과 천적을 피해 살아갑니다.
당선 전화를 받고 그 나무가 내 안에 들어옵니다. 이른 새 떼가 날아오릅니다. 기쁨 반 무거움 반 섞인 어깻숨을 쉽니다.
입구가 긴 병 속이라 생각했던 삶이 시를 쓰게 한 원동력이었습니다. 집안일을 하다 물 묻은 손을 닦고서, 길을 걷다 어느 집 담장 밑에 서서 내게 온 문장을 놓칠세라 휴대전화에 메모했습니다. 꿈결 속에서도 글귀 하나 쥐고 잠을 들락거렸습니다.
독이 든 열매를 먹고 비상하는 새처럼 부자유한 상황을 디딤판으로 시를 쓰겠습니다. 돌멩이 하나를 꼭 쥐어봅니다. 어딘가에 굄돌같이 제 시가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시인의 길을 열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저보다 기뻐하실 분들이 떠오릅니다. 내 안으로 침몰하지 않게 칭찬과 격려를 해주신 존경하는 이승하 교수님. 오랜 인연이었던 동작 문학반 맹문재 교수님 끝까지 도움을 주셔서 너무너무 감사드립니다. 기대에 대한 마음의 빚을 조금은 갚은 것 같습니다. 굽은 터널이라 느낄 때 불빛이 되어주신 나비족장 박지웅 선생님과 이경림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랜 습작기 동안 좋은 인연으로 만났던 선생님들과 문우들 모두 감사합니다. 미완성 나의 시 당신과 아이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합니다.
이수하(본명 이선행) 시인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 창작 전문가과정 3년 수료
심사평:감춰진 현상 연관 따스한 시선···자연과 사물 신진대사 돋보여
시는 어디까지나 고착화되고 부절절한 이미지와의 싸움이다. 특히 그런 까닭에 깊이도, 유연성도 없는 동어 반복적이고 고정화된 이미지들의 반복과 재현은 창의적이고 자유분방해야할 시적 상상력을 질식시키는 조종(弔鐘)에 불과하다. 단적으로 상투적 세계인식은 우리에게 생각의 자유와 사유의 지평을 제한하는 악마적인 속삭임인 까닭이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구현해나가기에도 바쁜 우리의 존재를 다시금 순응과 훈육의 대상으로 길들여 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어디까지나 시는 그동안 우리가 믿거나 당연시해온 것들을 한정 짓거나 상대화하기보다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의 관계 맺기다. 특히 기존의 그 어떠한 담론이나 이념의 틀로 가둘 수 없는, 매우 다양하고 자유로운 언어적 유기체가 다름 아닌 시의 세계이다. 필시 과 에 대한 반복적인 질문과 회의, 의심과 반격이 시의 교두보이자 우리 모두가 기대하는 새로운 시인들의 출발점인 셈이다.
경향각지의 총 220여명의 951편의 응모작들 가운데 최종심에 오른 「럭키」외 2편과 「화산리 보물선」외 2편의 응모작들은 이러한 기준과 원칙에 부합되었다고나 할까. 먼저 「럭키」의 이른바 '세월호 대참사'를 배경으로 한 자유롭고 활달한 재난적 상상력이 눈길을 끌었다. 특히 기존의 주제의식이나 고루한 기법에 얽매이지 않는 점들이 눈에 띄었다, 다만 시적 집중도와 완성도에 아쉬움이 남아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솔직히 과연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는 시인될 수 있을까, 일말의 우려와 고심 끝에 당선작으로 결정한 「화산리 보물선」의 경우 응모작들 가운데 가장 안정되고 차분한 시적 전개가 인상적이었다. 그러면서 가상의 '보물선'을 완성해가는 작업의 과정에서 드러나거나 감추어진 일체의 현상을 이리저리 연관시켜 가는 따스한 시선 아래, 각기의 자연과 사물들이 단지 시적 부품이 아니라 엄연한 활물(活物)로 활발하게 신진대사하는 모습이 돋보여 당선작으로 결정했음을 여기 밝혀둔다.
응모자들 모든 분들께 큰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전한다. 아울러 오래 절차탁마의 시간을 보냈을 당선자에게도 큰 축하와 문운의 인사를 전한다. -임동확 시인
2025 전라매일 신춘문예 시 당선작
흙의 상소문 / 배은율
말 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고 싶을 때 흙은 붓을 들어 상소문을 올린다
얼마 전 흙속에 이름 모를 시체가 암매장 당한 적이 있다
이럴 때 흙은 운다, 울음이 붓을 키운다
흙이 밀어 올린 나무나 풀들은 보이는 붓이지만 아지랑이처럼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붓도 있다 그러나 보이는 붓보다 보이지 않는 붓의 힘이 더 세다
오래 전에 흙은 붓을 들어 낯빛이 다른 계절들이 서로의 낯빛을 훔쳐 달아난다고 쓴 적이 있다 이런 글은 기상이변이나 전쟁이 났을 때 쓰는 글이다 이럴 때 붓은 투박한 땅의 문체로 겁 없이 흙의 상소문을 쓴다
이따금 꽃가지 들 마다 이슬이 옮겨 앉는 일, 톡톡 터지는 이슬방울에 볼과 볼을 서로 맞대느라 바람이 물빛 아침을 잊곤 하던 일을 기억하기 위해 땅은 붓을 들기도 한다. 이럴 때 붓은 새의 귀에도 들릴 듯 말 듯 바위 틈 살꽃들의 신음소리처럼 섬세하게 글을 쓴다 하루를 건너온 빛바랜 기억들이 제 생각의 부피를 키우는 동안, 땅은 붓을 들어 날마다 흙의 상소문을 올린다
흙이 상소문을 올리는 곳은 바람이 오가는 허공이다
허공에는 수많은 소문이 살고 있다
그래서 붓은 늘 분주하다
당선소감
시를 쓰는 지인으로부터 걸려온 위로 전화를 받고 마음을 추스르다가 낯선 전화 한통을 받았다, 당선이란다. 연락이 더 늦었더라면 울렁증으로 목이 빠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무척 기뻤다.
내 삶의 모든 것인 내 시의 현주소, 그 언저리에는 늘 의문부호가 따라다녔다. 수많은 물음표들이 나를 이곳에 데려다 놓았다. 이제 시작이다. 그럼에도 나를 증명해 보일 시들은 아직 발아하기 직전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시를 쓰면서 나 자신을 사랑하는 새로운 길을 알게 되었고, 사물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되었다.
힘겨운 내 삶이 안착하는 곳마다, 잃어버려야 하는 것들이 하나 둘씩 생겨나면서 마음 한구석에 커다란 구멍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제는 그곳에 기거하던 검은 파도를 말끔히 걷어내고 저 멀리 수평선을 불러들여도 될 것 같다. 만약 잃어버린 그것들이 천개의 말이 되어 내게 안긴다면? 이니 그것들이 아름다운 시가 된다면 그곳엔 사계절도 없을 것이다.
시린 발을 갖고 있던 제 시를 따뜻하게 보듬어주신 김동수 선생님과 전라매일 신문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오래도록 애정으로 지도해주신 박남희 교수님 고맙습니다. 끝으로 입버릇처럼 힘들다 말했을 때 말없이 따뜻한 미소로 다가와 톡탁여주었던 나의 문우들, 동국대 시창작반 문우들(성은.은미.정희.현정.남희,주안)과 3년 동안 함께 해온 시전문지 <아토포스> 가족들과 함께 오늘의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그동안 외로웠을 나의 흙과 허공에게, 그리고 제시를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무한한 사랑을 보냅니다.
배은율: 부산 영도 출생. 동국대 행복한 시창작과정 재학. 시전문지 <아토포스> 편집 동인.
심사평:창조적 사유의 세계와 아름다운 율조 >
신춘문예 시는 세상을 새롭게 보는 안목의 깊이와 독창적인 문체 그리고 역경 속에서도 그것을 창조적 사유의 세계로 견인해 가려는 치열성이 아름답게 엮어져 있어야된다고 본다. 이러한 관점에서 네 분의 시를 최종심에 올렸다.
문현순의 「이생규장전」은 죽음을 초월한 남녀 간의 애절한 사랑을 다룬 김시습의 한문소설을 소재로 ‘잡힐 듯 잡히지 않고 모래알처럼 빠져 나가는’ 환상의 경계에서 ‘너를 기다리는’ 화자의 절절한 심정에 공감된 바 있으나 전반적으로 평이한 점이 아쉬웠다.
우병기는 「조약돌3」에서 ‘너를 ~ 이렇게 가꾸어 준 것은/ 햇빛과 달빛, 비바람과 물결’이라며 존재의 본질을 향한 인식의 깊이가 남달랐으나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도전의식이 좀더 요구되었다.
끝까지 조온현과 배은율의 시를 놓고 고민하였다. 조온현의 「신계(神界)로 가는 길」은 죽음에 대한 새로운 사유, 곧 ‘신계로 가는 길은 걸어 갈 수 없어 육신을 태워 하늘로 보낸다’는 아포리즘과 화장(火葬)을 또 다른 윤회의 성소로 표현한 대목이 인상적이었으나 몇 군데 산문적 서술이 끝내 마음에 걸렸다.
이에 비해 배은율의 「흙의 상소문」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미시의 세계, 이는 불교의 공즉색의 세계와 양자역학의 입자와 파동 그리고 질량·에네지 등가법칙과도 동맥을 이루면서 우주적 비의를 새롭게 읽어내고 있었다. ‘흙이 상소문을 올리는 ~허공에는 수많은 소문이 살고 있다’는 경이로운 표현이 그것으로 우리들의 정신세계를 한층 드높여 주고 있어 당선작으로 뽑았다. -심사위원: 이언, 김동수시인
2025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생각하는 나무/이 문 희
나는 몽상가답게 낙천적이죠
구름모자를 즐겨 써요
서서 먹고 서서 자는 동안에도 반짝반짝 사색을 즐기죠
이파리가 많다는 건 생각이 많다는 증거랍니다
그래서 외롭지도 외로운 줄도 모르죠
빽빽한 생각에 몰두하다 보면 궁금한 게 참 많아요
덩굴장미는 용암의 뿌리에서 분출한 식물성 화산일까
바다가 파도 창고라면 하늘은 구름 공장일까
누가 저 많은 구름들을 져 날랐을까
매미에게는 몇 마력 울음의 엔진이 장착된 걸까
또 이런 생각도 해요
하늘에 갇힌 별들은 자유로울까
물고기는 어디를 날아가려 지느러미를 가진 걸까
무지개는 하늘 놀이터의 미끄럼틀일까 아니면 하늘 바깥으로 나가는 통로일까
나는 새들에게 의자를 내어주는 게 취미라면 취미
노래를 하고 싶거나
한바탕 춤을 추고 싶을 땐 바람 몰이꾼이 되어요
매일매일 석양을 바라보며
서쪽이라는 당신에게 시를 지어 주죠
누구나 나의 친구가 될 수 있지만
길거리에서 배낭 메고 여행 중인 달팽이를 만났다고 해서
버스정류장에 데려다주겠다는 생각은 꺼주세요
오늘도 생각의 평수를 넓혀가는 나는 자유인이니까요
낮달에게 안개에게 늘 새로운 말을 걸어요
걷느라 생각에 물든 당신이라면
그늘에 잠깐 쉬어 가셔도 됩니다
나는 생각의 씨앗을 다 모아 땅에 뿌리려고 해요
파랗게 돋아나는 생각들을 환호하며 매만지게 될 거예요
나는 파란 마을 파란 집에 살아요
당선 소감:시와 이별하려 했는데…나의 시를 믿고 계속 쓰겠다
아무렇지 않게 멀어지고 아무렇지 않게 가까워졌다. 나와 시가 그랬다. 그리고 딱, 애인이 그랬다. 나는 당신을 잊으려했다.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깨끗이 손 털고 끝내려했다. 그렇게 당신에게 결별을 말하려는데 우리 다시 시작해, 라며 내 손목을 잡았다. 내가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순간에는 차갑게 외면하더니, 이제와 우리 못 헤어진대요. 오년만의 화해라니! 나는 이렇게 저녁식탁에서 당선전화를 받았다.
시의 언어들은 좀처럼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단어와 단어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부유하던 날들이 많았다. 잡히는가하면 어느새 미끄러져 달아나고 쓸 수 없는 절망이 머리 끝까지 차올라 더 이상 시를 쓰지 못하는 사람으로 살까봐 두려웠다. 몇 번의 최종심은 차라리 독약이었다. 희망고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독약을 삼켰고 그 희망고문으로 다시 도전했고 끝내 나의 시를 믿었다.
내 시의 최초의 독자인 사랑하는 가족들과, 나의 통증의 마디인 어머니 안종모씨, 30년도 훨씬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 이충선씨, 이름을 불러봅니다. 제 이름 가운데에 글월문(文)을 넣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영원한 내편, 영, 숙, 인, 경, 미. 동, 림, 지, 혜. 고마워요. 그대들을 떠올리며 생각하는 나무가 될게요. 시로 인해 인연을 맺은 ‘전주풍물시동인회’ 시인들께도 감사함을 전합니다.
끝으로 부족한 시를 선해주신 심사위원님들과 광주일보사에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푸르게 싱싱한 시 쓰겠습니다. 빚진 마음으로 세상을 읽겠습니다. 나는 계속 쓸게요.
-이문희
▲전북 전주 출생 ▲ 2015년 계간 ‘시와 경계’ 등단
심사평:시행을 끌고가는 능란함에서 내공 느껴졌다
요즘 삶의 빡빡함을 반영한 탓일까. 삶의 곤핍과 우울한 정조를 에두르지 않고 보여주는 시들이 주를 이루었다. 응모작을 읽는 내내 가슴이 답답했는데, 그것은 시에 현실의 중압감이 고스란히 삼투된 까닭에서일 테다. 막장 현실에서 떨어져 나온 사유의 파편들, 소상공인들이 현실과 맞서 고투하는 모습들, 일그러진 현실이 불가피하게 불러온 꿈의 좌초를 다룬 시들이 눈에 자주 띄었다. 응모자들이 다 진지했지만, 개성이 돋보이는 자기의 목소리, 산술적 평균을 깨고 솟구치는 이미지의 돌발성, 사유의 도약으로 독자의 의식을 내리치는 죽비 같은 시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는 점이 못내 아쉬웠다.
열 네 분의 작품들이 본심에 올랐는데, 최종심에서 검토한 것은 조지은 씨의 ‘이상한’ 외 2편, 이문희 씨의 ‘생각하는 나무’ 외 2편, 박시유 씨의 ‘엉겅퀴’ 외 2편, 김탄희 씨의 ‘쌍둥이자리’ 외 2편 등이다. 조지은 씨는 상투성을 깨는 이미지와 감각의 돌올함에서 단연 돋보이고, 박시유 씨는 핍진한 체험에서 길어낸 시적 진정성이 예사롭지 않으며, 김탄희 씨는 투고작 ‘921’을 읽을 때 눈이 번쩍 뜨였는데, 모호함을 뚫고 나오는 목소리에 묘한 매혹이 있었다. 헌데 ‘921’이 소품이고, 다른 응모작들이 이 시를 받쳐주지 못했다는 점이 안타까웠다.
다들 개성과 시적 수일함이 또렷했지만 심사자가 당선작으로 고른 시는 이문희 씨의 ‘생각하는 나무’다. 시행을 끌고나가는 능란함에서 만만치 않을 내공을 엿볼 수 있었다. 시편의 수준이 들쭉날쭉하지 않고 두루 고른 점, 다른 응모자들과 견줘 시의 완성도에서 앞선 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파리가 많다는 건 생각이 많다는 증거랍니다”, “바다가 파도 공장이라면 하늘은 구름 공장일까/누가 저 많은 구름들을 져 날랐을까” 같은 싯구들은 알아듣기 쉬우면서도 천진한 동화적 발상을 드러낸다. 각각의 시행들이 품은 사유의 조각이 시의 전체와 유기적으로 맞물린 데서 더욱 돋보였다는 걸 밝힌다.
당선자에게 축하의 박수를, 아깝게 떨어진 낙선자에게는 위로를 전한다.
-장석주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 ▲문학평론가·에세이스트 ▲‘에밀 시오랑을 읽는 오후’ 등 다수
2025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가작)
고등어 가족 / 장주호
이전의 삶이라면
분명 기요틴이 되었을
치밀하고도 잘 짜인 나무
그 반질반질한 제단 위에 올라선
모임에 어울리지 않는 입김의 뜨거움
오로지 죽어서 죽을 수 없는 존재만이
허공의 달과 눈을 맞출 수 있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가죽 채찍처럼 후려치던 짜디짠 마름쇠
이윽고 죽 찢어진다
구석구석 발려진다
각자의 영역을 나온 순간부터 비극
농축된 작은 금속들은 온몸의 살을 후벼 파는데
걸쭉한 피 한 줄기가 느껴지는 듯하여
구긴 초대장을 얼른 이마 위로 가져간다
요리를 기다리는 콩과 콩각지의 사이
아픈 멍을 스스로 눌러보는 것은 즐거운 일일까?
분쇄기들엔 의도가 있다는 것이 앵무새와는 다른 점
들어가는 입과 나가는 입을 구분할 수 없고
고등어의 가시는 꼭꼭 씹을 수 있다
그 자잘함에 표본이 되지는 못한다
얼굴 그림자 위로 젓가락이 곡예비행을 한다
그 짭짤함에 도무지 끊지를 못한다
당선 소감: 색을 더한 세상, 저만의 표현 길 고민할 것
대학 시절에는 물리학을 공부했고, 지금은 반도체 회사에서 근무하며 관련 인공지능 등을 공부합니다. 글쓰기와 여행, 그리고 바다를 좋아합니다. 세상에 대해 최대한 사유하고 싶었기에 천문학과 물리학 주제의 시, 아픔과 그 무의식에 관한 시, 여러 예술 작품의 오마주들, 그리고 바다, 우주, 심리, 역사 등에 관한 시를 써 왔던 것 같습니다.
덕분에 영화를 볼 때도, 소설을 읽을 때도, 누군가와 대화할 때도, 그 외에 양자역학 같은 분야나 여러 새로운 철학들을 접하는 순간까지, 한 번 더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Vouloir, c'est pouvoir. '원한다는 것은 가능하다는 것이다.'라고 했던가요? 전화에서 축하한다는 그 한마디에, 세상의 채색이 한 층 더 입혀진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공계 직종에서 일하는 제가 과연 시인이 될 수 있을지 조금 두렵기도 했지만, 이제는 저만이 할 수 있는 표현이 있지 않을까 좀 더 고민하겠습니다.
우선 그런 가능성을 열어주신 심사위원분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가족이라는 관계의 붕괴를 소재로 쓴 당선작과는 전혀 다른 제 부모님과 형제, 세상의 재미를 알려주고 대학까지 강제 졸업시켜 준 친구들, 매출 한껏 올려드리고 싶은 멋쟁이 책방 대표님들, 마지막으로 다양한 직종에 근무하며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문래, 홍대, 합정의 작업실 및 독서 모임 사람들까지. 모두 우주만큼 사랑합니다
-장주호 1987년 수원 출생
심사평;무난한 전개… 작품성의 균형도 중요
시부문에는 115명의 작품이 응모되었다. 우선 '주제와 소재의 신선함', '시적 상상력과 독창성', '새로운 비유와 상징', '시적 언어의 운용', '시적 구성의 이해' 등 5가지 기준을 토대로 심사했다.
이를 바탕으로 26편을 우선 선정하고 논의를 거듭한 결과 최종 4편으로 압축됐다. '소금이 오다', '광합성의 시간', '구름의 패턴', '고등어 가족' 등이었다.
'소금이 오다'는 서사적 내레이션이 매력적인 작품이지만 자칫 수다에 그칠 수도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구름의 패턴'은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읽히지만, 가벼움을 풀어내기 위해서는 가벼움을 털어내야 한다는 지적이 있었다.
'광합성의 시간'은 시적 체화의 측면에서 현실을 질박하게 잘 풀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시적 군더더기들이 약점으로 지적되었다.
'고등어 가족' 외 4편은 무난한 전개가 장점이지만, 투고된 작품들의 제목이 단조로우며 작품성이 균일하지 않은 점 등이 지적되었다.
최종 숙의 끝에 심사위원들은 '고등어 가족'을 가작으로 선정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당선작이 나오지 않아 아쉬웠다.
시적 구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작품들이 더러 있어 안타까웠다. 신선하게 주제와 소재를 다루는 시적 상상력과 독창성은 모든 창작의 생명력이라 할 수 있다.
-양영길(평론가), 윤봉택(시인), 김지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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