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단지리 앞 겨울을 버텨낸 너른 벌판에 서리발이 하얗게 깔렸다. 먼 성머리 주변으로 금강변에는 하얗게 새벽 안개가 피어오른다. 야산에 있는 나뭇가지마다 아직도 고드름처럼 만지면 뚝 부러질 듯한 냉기가 마치 내 몸도 부러뜨리려는 듯 딱딱한 기운으로 감돈다.
하루사이에 무슨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정신이 몽롱하다. 꿈 같다.
새벽에 대전 을지병원에서 동이 트지 않은 깜깜한 사위를 헤치고 단지리로 내달았다
“ 막내 네가 먼저 가서 집 주변 좀 치우고 맞을 준비 좀 하거라”
큰형은 기운 없는 목소리로 특 던지듯 한마디 하고 응급실로 이내 들어갔다
어제 일요일 마침 학교 일직이라 주말인데도 쉬지 못하고 출근해 반칸 교무실에 홀로 앉아 컴퓨터만 이리저리 두드리고 있었다 크게 할 일도 없다 일직이라는 이유로 학교에 출근했지만 한바퀴 도는 동안 넓디 넓은 학교 안에 인적이라곤 하나도 없다 시골 동네에 있는 학교로 폐교를 하느니 마느니 시끄러운 지경에 있는 곳인지라 학교 주변에도 집이 두 서너 채 밖에 안된다 평일 학생이 등교했을 때도 20여 명 보이는 조그만 초등학교 분교이다 보니 오늘 같은 일요일엔 주변에 거의 인적이 없다 그런데다 학구가 농촌 마을에 있고 한 집마다 2만에서 4만평 정도 농사를 하는 곳이다 보니 넓은 들판 간간히 한 두 채 집들이 떨어져있고 그 사이 우두커니 홀로 세워져 있는 학교교사는 더욱 을씨년스럽게 보이는 겨울을 갓 보낸 3월 초순이다
“띠리띠리띠리 띠리리 띠리리리 띠리리리...”
적막을 깨는 핸드폰 소리, 모토로라 폴더로 된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빼서 폴더를 열고 귀에 가져간다
“여보세요, 아 형수님이세요. 웬일....”
수화기 건너에서 심각한 기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도련님 큰일 났어요 아버님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계시대요 형님이...”
“예? 얼마나 크게 났대요? 병원은 어디에요? 언제 그랬대요?”
상대의 소리도 들을 생각 없이 따발총처럼 입으로 궁금한 것이 튀어 나왔다
“상태가 엄청 안 좋대요 형님은 전화 받자마자 병원으로 가시고 저한테 전화하라고 해서 지금 이리저리 연락하고 있어요 을지병원 응급실이라니까 그리로 오시면 되요.”
들리는 목소리가 심각한 정도를 넘어섰다
전화를 끊자마자 먼저 무얼 해야 하는지 정신이 허둥지둥댔다 때마침 퇴근 시간도 가까이 왔고 해서 학교는 문을 걸어 잠그기만 하면 되고 우강집에 전화연락을 한 후 이내 차를 몰고 대전으로 내달렸다
집에 있는 아내와 2살 4살된 애들은 어떻게 오게 할까? 도대체 어떤 상황에서 교통사고가 났을까? 어디를 통해 대전으로 갈까? 장모님이 돌아가신지 보름도 안되었는데 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가? 아버지가 오늘 누구 결혼식 집이 있다고 했던가? 엊그제 아버지 동갑네 계모임에서 제주도로 여행을 떠나신다고 해서 용돈까지 드렸는데....
갖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치며 당진부터 대전까지 가는 2시간 내내 오만가지 잡생각이 가득하다 눈 앞에 보이는 내포평야도, 차등고개의 구불구불 고갯길도 언제 통과했는지 모르겠다
우성을 들어서니 동대리부터 차가 막힌다 한쪽으로 흐르는 유구천의 흐름보다도 느리게 차들이 거북이걸음이다 둑길로 통해 농로로 나갈까 순간 뇌리를 스친다
국도 32호선 공주 전막에서 동대리를 잇는 이곳은 언제나 지긋지긋 차들이 막히는데 다른 곳은 4차선으로 잘도 뚫리드만 여전히 내려가지 않는 음식물마냥 꽉 막혀 답답하다 이쪽 마을에 번듯한 인물이라도 한명 정치권에 있다면 쉽게 뚫릴 수 있을텐데 하는 푸념을 가졌던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단지리를 거치는데 평상시와 똑같다 옛날에 살던 집터에 깔린 아스팔트 주차장에도 차 한 대 없이 한가했고 멀리 보이는 지금의 시골집에도 정지된 영상인 듯 고요하다 이곳에서 오늘 어떠한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어느덧 주위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고 공암을 거쳐 대전에 들어서니 이미 저녁의 어둠이 자욱하다
시내의 혼잡함에 마음만은 계속 빨리 당도하였으면 하고 조바심 중에 겨우 도착했다
병원응급실 정문 유리를 젖히니 한쪽 소파의자에 엄마는 머리마저 헝클러진채 기운 빠져 나에게 눈길 한번 주고는 푹 고개를 숙인다
“왔냐.”
먼저 온 둘째 형이 아는체 하며 아버지한테 한번 가 보라고 일러주며 안내한다.
응급실 홀에서 한번 더 불투명유리문 안으로 들어가니 응급환자들 병실이 따로 있다. 신음하는 소리, 처치하는 소리, 움직이는 소리, 잡소리 등이 짬뽕되어 귀에 스치고 눈에는 커튼으로 둘러친 응급실 여러 구역들이 들어오는데 한쪽 복도같은 곳에 뎅그러니 이동침상 하나만 놓여있다
간호사도 없고 의사도 없이 산소호스 등 호스 줄만 어지러운 채 얼굴 반쪽을 붕대로 감싼 아버지만 홀로 누워있었다
조금의 미동도 없는 아버지, 눈은 이미 감겨있어 누가 왔는지도 모르는 아버지. 가녀린 숨을 내시는 것 같기도 하지만 또 그렇지도 않는 아버지. 눈물도 나오지 않고 그저 새롭고 당혹한 이곳이 계속 낯설기만 하고 어찌 해야할 줄을 모르겠다
저예요 아버지 속으로만 외치는 한마디와 함께 한쪽 손을 잡아보니 노동으로 군살이 단단한 거친 느낌의 살갗 속으로 그래도 아직 온기가 느껴진다
어떻게 된 거예요 계속 입밖으로 나오지 않는 말만 되뇌이며 과연 인간의 삶과 죽음이 무어길래 그렇게 생동하던 육체가 이렇게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인가
응급실에서 환자보호자들은 필요이상 있지 말고 밖에 나가서 대기하라는 말들이 계속 이어져 다시 한번 눈길만 아버지 얼굴에 들이밀었다 나왔다
작은 아버지가 오셨고 당숙들도 오셨고 하나 둘 소식을 듣고 걱정과 슬픔으로 가득한 기색의 친척들이 모여들었다. 그래도 바쁘실텐데 어떻게 오셨을까 고마운 마음도 속으로만 묻어둔채 눈인사만 간단히 하고 병원 응급실과 바깥 광장만 왔다갔다 했다. 어디 앉아 있는다는 것도 이상하고 바깥에 나가 왔다리갔다리 어슬렁대는 것도 이상하고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
찬 3월의 한밤중 공기만이 살갗을 시리도록 파고들었다
늦게 둘째 작은 아버지께서 오셨는데 전체적인 전말을 듣게 되었다 둘째 작은 아버지는 우리 시골집에서 근 100여 미터 떨어진 곳 같은 마을에 사신다 어머니도 사정을 아실만 한데 이미 기운이 없어 쓰러질 지경이라 말 한마디 떼어놓지 않으셨다
오늘이 어머니 먼 친척 조카의 결혼식날이란다. 아버지께서 아침에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이셔서 먼 친척이고 하니까 안 가도 그만이라고 가지 말라고 아침에 어머니는 붙잡으셨단다. 그래도 가시겠다 하여 그러면 가까이 있는 매형한테- 참고로 나의 매형은 8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공주시내에 사셨다- 태워다달라고 해서 다녀오시라 했다는데 그만 이를 뿌리치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출발하셨단다. 아마도 오랜만에 보는 안면들이 많다보니 그 정으로 여기서 저기서 한잔씩 붓고 따르고하며 술들이 오고가신 것 같다 더욱이 시골에서는 그래도 자식들을 잘 키워 이제는 어엿한 집안으로 되어서 더욱 그러한 담소들로 기분이 한층 좋아지셨을 터이다 그렇게 한잔술 걸치고 좋은 마음으로 다시 대중교통을 타고 동네 어귀 승강장에 내렸는데 역시나 오늘도 공주가는 한쪽 도로가 꽉 막혀 차들이 서있는 지경이라 버스가 막혀 서있는 틈을 타 횡단보도로 건너시려 버스 한쪽으로 들어서 상대차선 도로를 살필 때 난데없이 관광차가 들이치고 만 것이다
반대차선은 뚫려있는 곳이니 관광차도 생각없이 달리다가 미처 발견이 늦었던 것이다 운명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이 탈이 날려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조화가 판을 벌인다 눈으로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사고는 한순간 짧은 찰라, 그렇게 생명은 이 세상에 태어난 후 또 이 세상을 떠난다
동네 사람 한 명이 사고를 보고 결국 둘째 작은 아버지집으로 먼저 알려져 둘째 아버지께서 같이 앰브란스를 타고 공주에 도착했는데 큰 병원으로 가라해서 현재의 병원으로 온 것이란다 그런데 차들이 막혀 있었으니 그 시간이 또 얼마나 길었을까 생각하니 더욱 미어오는 아픈 마음이 더했다.
응급실에선 밤새 별 다른 이야기가 없었다. 환자 보호자들은 밤새 따로 보호자숙소가 있으니 가 대기하라하여 오신 친척분들이 뜬 눈으로 밤을 새우듯 하며 새벽을 맞았다
새벽녘에 응급직 당직 의사가 부른다 하여 형제들이 들어갔다 자세한 환자 상황 및 앞으로의 상태를 브리핑하는데 결국 의학적 연장 장치만 제거하면 돌아가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랴부랴 상 치를 일을 시골에서 모실 것인가 병원 장례식장에서 모실 것인가 의논하여 시골집에서 치르기로 결정을 보고 나는 시골집으로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