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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어버려진 사람의 넋두리
-여건이 허락된다면 드버르작/Dvorak의 심포니 No.9, "From the New World", 특히2악장 'Largo'를 들으시기를 부탁한다. 나는 전곡을 들으며 이 글을 쓴다-
참으로 놀라운일이 나에게 일어났다. 꼭 40년 만에 "넋두리" 기회가 왔으니 말이다. 솔직히 말해 초기에 그래도 사람도리와 옛정을 가지고 다가 갔을 때는 면박(面駁) 당한 느낌이 들었었다. 그 동안 반세기 가까이 "잊어진 사람"으로 지났는데 출면(出面)과 회고의 기회가 온 것이 놀랍다는 말이다.
나는 1968년부터 1972년 까지 기성 총회본부 '출판부 간사'라는 직책으로 일했다. 그러나 내가 선택한 교단이 아닌 교단, 내가 선택한 신학의 길이 아닌 서울신학,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총회본부의 일 터... 그리고 그 간사자리 떠날 때, 아무도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는 것은 결코 예사롭지 못한 뒷소리를 뒤집어쓴 것이 분명하다는 반증이 되지 않을까. 그 당시 내가 활천을 떠날 때 서류가 전달되었던 것도 아니고 이해정리 이루어진 순탄한 헤어짐이 아니었다. 마치 비밀리에 큰 죄목을 받고 사약(死藥)을 받은 심경이었던 것이 이제 생각난다. 그러므로 가히 "넋 두리"란 말이 적당할 터...
북치고 장구치고
활천사 주간 홍 목사님의 글 청탁서에, "책 기획 편집, 취재 인터뷰 기사작성 교정 그리고 (경우에 따라) 발송에 이르기까지 모든 단계마다 손때를 묻힌 그들..."이란 글귀는 나의 옛 보람, 기쁨과 함께 아픔을 상기시켜주었다. 그러나 그의 글귀에 빠진 것이 하나 더 있는 것을 지적하고싶다. '수금(收金)'이다. 전국에 산재한 교회들과 직접 연락하며 책 대금을 거두어 드리는 일까지 해야 했던 것이다. 그렇게 인생에 있어 돈과 사람관계개념을 그 때에 조금은 익혔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간사인 나를 돕던 L양이 북키핑(book-keeping)을 맡아주었기에 다행이었다. 그녀가 내 사무실에서 일하기 전까지는 내가 "북치고 장구치고" 홀로서기에 참으로 용감했었다. 차라리 흥미를 가지고 도전하는 면도 있었다. 젊음으로 부딪친 것이었다.
"북치고 장구치고" 일인십역(一人十役)은 전근대적인 인생 사물관리 방식이라 말하고싶다. 반세기 전, 교단은 많은 면에 일인십역이 통용되던 것을 자타가 인정할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위대(?)한 사람이 되었고 어떤 이는 바보가 되어야하기도 했었다. 자리를 차지했던 선택함 받은 사람마다 일 인 십역으로 사람이 더 이상 필요치 않으니 다른 사람을 찾지도 않았을 뿐더러 "누이 좋고 매부 좋도록" 끼리끼리 북치고 장구치는 일을 나누는 것이었다. 고국의 다른 교단들에 비해 성결교단은 인물 키우는 일에 뒤졌던 이유를 이 면에서 찾게 된다. 나만이 할 수 있다 장담하는 자칭 수퍼 맨(Super Man)들이 참으로 많았던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각광을 받으면서 지나지만, 조그만 우물 안에서 자신을 가누기에도 정신이 없는데 다른 일, 특히 후배 생각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었다.
북치고 장구 친 주역들은 하나 둘이 아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무교동12번지 그라운드 레벨에서는 북치고 장구치는 사람들이어야 했다. 그것이 능력이요 은사요 전사(戰士)요 사랑이었다. 딴은 '교단사랑'이란 말이 나돌 수 없는 때였다. 교단사랑 키재기가 시작되면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결투할 용사들이 많았을 터이므로 그나마 자기자리가 위험천만인지라 북치고 장구치는 데 더욱 충실한 것이었다고 생각해 본다.
"우물 안 개구리" 안 되려고
내가 일할 때는 총회본부 직원 몇 사람 중에 여사무원들을 제하고 내가 제일 나 어린 입장이었다. 이 입장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었다. 나빴던 것을 먼저 말하면, 때마다 일마다 어린애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어린애 취급이 무능으로 치부될 때 포부로 부풀린 한 젊은이에게 어떤 반응이 되었을까. 그러나 학사출신 젊은이로서 영어이해를 바탕으로 세계와 인류, 문화 문명을 내다보는 꿈을 가진 것은 더없이 좋은 면이었다. 60년대 말, "TIME"과 "Christianity Today"(첫 번 신학교 선택은 이 곳에 난 광고를 보고 시작됨)잡지를 신청해 매월 우송된 그들을 첫 장부터 끝장까지 다 읽기도 여러 번 했다. 편집구조 특집구성 문화트렌드 시사기사 문명 종교 사회 정치 경제... 미국을 향한 사대사상(?)이 나도 모르는 사이 자리잡았던 기간으로 생각된다. O.M.S. 소속 선교사들과 외국인 모교대학교수들, 미8군 교회 출석 성도들과 장교클럽/식당출입... 그들과의 사귐도 나에겐 귀한 체험이었다. 특히 Dr. Van Lierop/반피득박사는 나의 은사로서 내가 친구들과 시작한 아가페클럽의 지도교수였는데 자신의 사택 리빙룸을 모임장소로 기꺼이 배려해주었었다. 이렇게 그들의 생활을 가까이에서 볼 기회가 적지않았었다. 피부 희고, 코 높고, 벽난로/Fireplace 화장실 매력과 함께 식탁에서 창과 칼을 쓰는 그들에게 마음이 점점 더 사로잡혔다. 그 당시 한국적인 것을 미국적인 것과 비교할 때마다 서러움 같은 것, 창피함 같은 것, 울분과 낙후 감 같은 것들이 범벅되어 가슴 안에 치밀어 올라오곤 했었다. 그것을 캄펜세잇 할 방도와 기회를 찾으려 노력했다. 우물 안 개구리를 뛰어넘기 위해.
O.M.S.세계대회 때, 친구 장로를 만나려고 인디애나 주까지 찾아간 때가 있었다. 그 때 세계대회라는 소식에 한껏 기대를 갖고 17시간 낡은 차/치디치디뱅뱅을 운전해 달려가 반나절동안 스케줄 드려다 보며 몇 시간 참석하다가 크게 실망했었다. 내가 참석했던 미 감리교/United Methodist Church의 전국대회/총회와 너무나 큰 차이가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 뒤 넉넉하지 못한 교회살림에서도 몇 년 동안 뒷 대던 선교 비를 끊게 된 동기가 되었다. 또 다른 실망은 내가 가까이 했던 Z선교사의 선교특별집회를 여름방학여행 중에 주일예배 드렸던 교회에서 참석했다가 한국에 대한 그의 보고를 듣고 분노를 느꼈던 일도 있다. OMS를 한꺼번에 너무 많이 알게 되었던 듯 하다. 미국을 사는 동안 종종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이 곳의 대교단들- 침례교 장로교 감리교 총회 소식들이 흥미로웠고 한국의 그것과 비교되었다.
하지만 이미 한국과의 채널이 끊긴 상태여서 내가 끊은 것은 결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학비보조를 위해 손을 내밀 마음 추호도 없었지만, 연락이 두절되었고 40여 년 지난 후 금번에 원고청탁이 온 것이었다.
카메라 렌즈를 거쳐 본 고국, 사람들
활천은 내가 간사/편집할 때엔 작은 싸이즈였었다. 그 안에 전국 교회들과 목회자들, 교단 지도자들의 동태를 소식으로 알리는 몇 쪽 소식기사 난을 채워야 했었다. 자연 사진이 곁들여야 했기에 나는 사진기자까지 역할연장을 감당했었다. 한 번은 육군본부에서 구내 교회를 새로 짖고 봉헌예배를 드린 때가 있었다. P대통령께서 참석하신다는 소식까지도 들렸다. 교단본부 총무님께서 초청받아 참석하셨다. 나도 따라 나섰다. 그 때도 내 손에는 Nikon F-3가 들려 있었고 그 무게 만큼이나 내 마음이 눌려 있었다. 왜냐하면 중앙정보부에 목회자들이 초청받아 방문했었을 때, 야산을 철책으로 둘러치고 방목하는 너무나 귀엽고 순진해 보이는 사슴들이 나를 청순하게 쳐다보기에 카메라셔터를 눌렀다가 당했던 공포감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그렇게 대한민국은 사진 못찍는 구역이 많았는지... 비행장 주변, 군대관계 모든 것, 산업시설과 단지들, 정부기관 빌딩과 구조안팎..., 민주주의를 말하면서도 자유를 허락지 않았던 많은 것들이 떠오른다. 총무님은 대통령과 악수한 자기 오른손을 들고 다니며 "이 손은 나라님과 악수한 손이다. 그래서 씻을 수 없다"떠들썩하게 몇 날이 갔다. 그가 그 오른 손을 들 때마다 "차 전도사가 사진을 박아 놓았으면 너무나 좋았을 텐데..." 남의 속도 모르고 아쉬움과 꼬리표를 달았음으로 그 때마다 나는 실소했다.
유학 오는 날 KAL비행기를 같이 탔던 은사 H박사님을 호놀루루공항 입국 수속을 마치고 화장실에서 만났는데 완전 케주얼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시면서, "차 목사, 이제부터는 자율세. 맘껏 자유를 누리게나." 그 때는 그 말의 뜻을 완전 이해할수 없었지만 미국을 살만큼 산 지금은 충분히 이해한다. 사실상 자유를 맘껏 누리며 살고 있다. 그 자유 누림이 진정 감사하다. 자유를 저당잡힌 고국 민주주의를 생각하면서..
사진 찍을 때 보면 재미있는 일들이 일어난다. 자신을 주요인물처럼 보이게하려는 생각에서 "가운데 자리" 다툼이 언제나 파도친다. 피비린내는 아닐지라도 음흉한 다툼모습을 렌즈를 거쳐 보았다. 카메라에 담긴 기독교 지도자들의 개인, 단체사진은 언제나 엇 비등했다. 넥타이 맨 정장에 굳은 얼굴표정, 차려 자세,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처럼 자기의 혼을 뺏기는 것으로 생각하는지 긴장된 모습들 만이었다.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자유로움마저 포기한 듯한 슬픈 모습들이었다. 실로 대통령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굶주림에 지쳐 있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는 영상이었다고 하면 과장일까. 가끔 옛 사진을 대할 때 만감이 밀려와 언어상실증에 걸린 사람처럼 멍해진다.
편집(編輯)위원장의 편집광(偏執狂)적 나무람
어느 날 편집위원장 C목사님이 나에게 심한 나무람을 흉한 인상과 함께 퍼부으셨다. 교단 중진인사요, 목회성공자요, 교단 요직을 줄줄이거친 분이요, 1년 미국유학(?)을 다녀온 지체 높은 분이신데 나에게 화를 퍼붓는 것이었다. 나는 호랑이 앞에 쥐새끼였다. 그 어른의 말씀은 편집위원회가 결정하지 않은 내용을 간사 마음대로 글을 쓰고 편집하여 책임자인 자기가 욕을 먹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편집위원회 회의록을 가져다 보여 드리며 "이렇게 의사결정에 따라 특집기사를 편집했다"고 주장했으나 끝끝내 그 분은 "그렇게 결정하지 않았다"는 말씀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참으로 나는 곤란했다. 어떻게 피할길이 없었다. 그 뒤로 그 어른을 뵐 때마다 내 마음과 태도가 불편해 한동안 고생스런 기간을 보내야 했다.
그런데 다음달 편집위원회 때 내가 전여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구세주가 되셔서 나를 살려 주신 편집위원 한 분이 계셨었다. Dr. C로 전 교단적으로 첫 Ph D., 교단신학교학장, 한국신학계에 뜨는 별, 교단의 위상을 높이시는 능력자께서 내 손을 들어주셨다. "차 전도사는 우리 편집위원회에서 결정한 사항을 집행했을 뿐입니다. 그 외에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이 말씀에 아무도 말하는 분이 없었다. 신기하게도 그 순간부터 그 문제는 영원히 침묵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위원장 목사님도, 다른 위원들도 그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는 분이 없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비쳐졌었다. 그러나 세상일, 교단 일들은 결코 영원한 침묵으로 끝나지 않는 것을 나는 그런 일들을 거쳐 배웠다. 상처받은 조무래기 나에게는 직접 다가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발없는 말이 천리 가듯" 멀리 퍼졌을 것이었다. 낮말로, 밤 말로 새들이 듣고 노래하며 쥐들이 듣고 찍찍거렸을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그들의 도마에 오른 가련한 물고기와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혹시 밀려나는 동기의 하나가 되지 않았을지-
교단 어른이 내 글을 꿀꺽
이름을 밝히면 교단 안에서 다 아는 천국 가신 O목사님께서 책을 내셨다. 고국방문 때 아우목사의 서재에서 그 책을 보고 몇 페이지를 읽었는데 첫 부분에 내 글이 실려 있음을 알게 되었다. 토씨 하나 바뀌지 않은 내 글을 활천 특집기사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인용안내나 꼬리표도 없이, 그 글을 실은 동기나 설명이 없으니 그 글을 읽는 사람들은 O목사님께서 쓰신 것으로 알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참으로 당황하고 기분이 개운치 않았지만 아우에게 말하지 않았고 오늘까지 입 조심하며 지내 온다. 내가 존경하던 어르신께 누를 끼치지 않기를 바랄 뿐, 하나님께서 아시는 것만으로 나에겐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나는 "감사한 일이다"라고 자위하며 그 문제를 넘겼고 오늘에 이른다. 그렇게 덮었던 책장은 다시 열어 볼 기회가 없었다.
유학 가도록 해요
K교수님은 내가 대학에서 학생운동 할 때, 지도교수였고 나에게 관심을 많이 베풀어 주신 어른이시다. 가끔 뵈올 때마다, 노래 후렴처럼 나에게 하신 말씀이 있었다. "차군- 자네 선배 S.C.A./Student Christian Association 회장들은 다들 외국유학을 갔어요. 차 군은 안 가나요? 부지런히 유학 준비해 빨리 다녀오도록 해요." 그런데 나에게 문제가 있었다. 내가 좋아하던 여성이 약혼없이 결혼하기로 약정했었는데 한가지 조건은 "목사가 된다면 결혼 안 하겠어요"를 노래하는 여권(女權)이었다. 자신의 장로부친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했었던 듯 하다. 아니면 가난하고 힘없는 목사에 대한 낙제점수를 머리에 담고 있었음이 틀림 없다. 이화여대의 직업인기도 투표에서 목사가 엿장수 다음으로 17번(?) 정도였을 때니까. 나의 부모님께서 딸처럼 큰 며느리 감으로 아끼셨던 예쁜 규수, 나를 사로잡은 여성이었는데 결혼약정의 해 식목일 날 헤어졌다.
엄친 목회지 교회출신 한 여성이 나와 결혼하고파 엄친자친 뵙고 진언했지만 거절받았다 한다. 미국에 1971년에 온 동기다. 그녀는 73년 11월 유학시험 본다는 내 소식 듣고 "목사안수 받고 오는 것이 좋다"했고 유학생활 뒷바라지를 자청했다. 유학 오자마자 첫 학기 전에 결혼하고 곧바로 책 속에 파묻혔다.
활천에 대한...
"활천과 나"에 대한 글이 개인적인 것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나 이외의 누구를 말하고 기관이나 단체를 말하겠는가. 나 자신을 나 자신이 모를 때도 있는데..., 너와 그를, 그리고 그 곳을 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내심 깊은 곳에서 활천향한 사랑이 자리함은 꼭 말해두고 싶다.
이제 생각하면 활천을 위해 일할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기회주심이었고, 나의 일생이 보다 넓은 세계로 향할수 있도록 징검다리 되게하셨던 하나님의 사랑이셨다. 감사감격한다. 45년 전에 5년동안, 함께 총회본부에서 일할때, 나를 이해해주셨던 여러 총회장, 실무진, 활천운영위원, 활천대금을 정성껏 보내주시면서도 "미안하다"말하셨던 선배들...커피와 점심 사주셨던 분들에게 감사한다.(나는 끼어든 보릿자루이긴 했지만) 내가 섬겼던 후암동교회 K목사님(편집위원)의 배려와 지도를 잊지못한다. 여러 어른분들께 늦게나마 감사함을 전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드린 심경으로 큰아들을 교단에 연결시키시려 때마다 일마다 마음쓰신 엄친께 감사를 드린다. 모든 어른분들께 엎드려 감사를 드린다.
이제 그 옛날을 회상하며 더 연구하고 더 노력하고 더 정진했었더라면..하는 아쉬움이 있다. 한국전란때 순교한 성결인들 가족을 찾아가 인터뷰한 것과 특집으로 편집했던 일, 갈라진 교단의 통합을 위한 물밑작업을 하던 분들을 만나던 일, 주말에 교회들 찾아가 예배참석, 목회자 인터뷰하고 교회탐방 기사를 썼던 일, 그 때마다 비싼 돈내고 택시로 운전연습하던 일, 목회자수양회 참석, 말통하는 전도사들과 어울리던 일(이제는 그들이 교단중진으로 일한다), 모두가 아쉬움 일깨우는 젊은 날의 추억이다. 하나 사족(蛇足)을 더한다면, 활천의 생일 날을 찾아 축하하는 일이었다. 활천가족들이 모여 축하잔치를 벌이며 대회를 갖는 일과 1년 1차라도 해외여행이나 성지순례를 계획할 수 있다면..하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단지 나의 기도와 기대를 말할 수 있다면, 활천의 앞날을 위해 "건전, 건강, 진선미의 가꿈, 성결인 깨우침, 믿음 소망 사랑 실현, 하나님께 영광"이 성취되기를 기대하며 기도하는 것 뿐이다.
활천이 지령700호에 이름은 진정 아름다움이다. 앞으로 한 세대(30년) 후에는 1000호에 이를 것 아닌가. 그 날까지 오늘의 많은 증인들이 살아 있어 축하하는 경사를 꿈꾸어 본다. 나도 그렇게 꿈꾸는 사람중의 하나, 백세 수/Centerinarian이 되는 것을 꿈꾼다. 활천 지령700호를 진심으로 축하한다.
필자: 뉴욕 한샘교회 목사, 1974년 George Fox Univ. 신학부에 유학 M.Div.(1977), Princeton신학교 Th.M.과정 세 학기 연수(1978-9), 1980년 1월 뉴욕 한샘교회 개척 현재까지 담임, 2011년 한샘 선교회 설립. 주소: Rev. P. Paul Tchah, 154-14 25th Drive, Flushing, NY 11354-1510, 전화: 718-463-8745
*Daum.cafe "뉴욕 한샘교회" 목회자 소개 란을 참고하시기 바람. 요청하신 사진은 나의 개인 사정으로 보내지 못하오니 양지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