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은 즐거운 게임이다. 대국자가 정해지면 각자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자유롭게 전략을 구사하여 승부를 겨룰 수 있다. 판을 설계하고 논리를 펼치며, 자기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하게 된다. 아무리 하수라 하더라도 여러 갈래로 확장되는 '경우의 수'가 흥미롭고, 자기주장을 판 위에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이 매혹적이다. 그것은 철저히 일회적이며, 한 판 한 판이 절대적 가치를 지닌다. 그래서 한 판의 바둑은 인생 행로의 축소판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하지만 바둑은 단순한 게임이 아니다. 파고들수록 복잡하고 머리 아픈 카오스의 세계다. 한 점 한 점 착점하는 돌은 객관적 실체이지만 그 돌이 생성하는 영역은 무한하다. 흑백의 돌들은 같은 편끼리 유기적 연결망을 형성하며 공격과 방어, 집짓기를 부단히 시도한다. 이렇다 보니 한 판 바둑이 끝날 때까지 바둑판 위에 놓인 돌들은 고정되지 않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린다. 꿈틀거리면서, 우주보다 넓은 세계를 꿈꾼다.
따라서 바둑 두는 행위는 '생각의 힘'으로 자기 세계를 구현하려는 고차원적 정신활동이라 힐 수 있다. 그 경지를 즐기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수련이 필수적이고, 그것은 실전을 통해 기리(棋理)와 기도(棋道)를 몸에 익히는 일이다. 이 수련에 필요한 내용들은 위기십결(圍棋十訣)이나 바둑 격언 등을 통해 전수되는데, 곧잘 인생사에 비추어 풀이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바둑 정신은 시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시 역시 사고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정신활동이므로 바둑 정신에서 발견되는 미적 요소들은 시의 주제나 장치로 활용하기에 효과적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약 이것이 입증된다면 우리는 '바둑시'라는 새로운 영역을 유형화할 수도 있다. 다분히 실험적이지만, 이 글에서는 바둑과 관련된 시들을 톺아보면서 이 문제를 가늠해 보고자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