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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부 아프리카 사바나 아프리카 아프리카 땅에 첫 발을 들여놓는다. 작년 이맘때 중남미를 다녀왔고 6대륙 중 마지막이 되는 아프리카지만 가장 가슴이 설렌다. 문명생활에 길들여진 나의 일상 습관이 문명과 판이한 자연 그대로의 냄새를 흠뻑 취하게 될 것 같은 기대감 때문이리라. 아프리카 투어는 거리와 경비의 부담도 크지만 준비 또한 별나다. 말라리아 예방 주사를 맞기 위해 최소 출발 10일전에 국립의료원을 찾아가야했고 주사 맞고 복용할 약도 보험처리가 안된다하여 십만여 원 정도를 따로 부담했다. 출국하는 날 예정보다 두 시간 앞서 인천공항을 이륙하였다. 3시간 반 정도 날아서 홍콩, 세계 5대 미항이라지만 아름다운 시가 풍광은 내려다보이지 않고 안개 같은 스모그 자욱한 공항주변의 착륙순간이 무척 불안했다. 아프리카를 가기위한 일반 관광으로는 인천공항에서 직항이 없어 홍콩을 거쳐 요하네스버그로 가는 항공노선을 이용하게 된 것 같다. 요하네스버그는 남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공항이 있다. 연결 편 항공기 탑승을 위해 홍콩에서 무려 다섯 시간을 대기하였다. 홍콩 공항 내부를 샅샅이 훑고 다녀도 시간이 남아돌았다. 세계 3대 공항이라는 홍콩이기에 관심이 갔다. 우리 인천 공항이 첫 개항되었을 무렵 말레시아 홍콩과 함께 세계 3대 공항으로 인정받다가 세계 1위가 된지 3년이 지난 것 같다.(현재는 8년 연속1위) 국제 공항연합회가 시설, 규모, 능률, 서비스 등을 해마다 종합 평가하여 발표하는 세계 8백여 공항중에 제일가는 우리 인천공항이다. 홍콩공항도 훌륭했다. 그러나 내가 둘러본 바로는 시설 면에서 우리보다는 한 수 아래로 느껴졌다. 요하네스버그로 13시간 비행 끝에 이튿날 아침 7시(현지시간) 촉촉이 비가 내리고 있는 공항에 안착 성공, 요하네스버그 안스마츠 국제공항 활주로를 질주하며 속도를 줄여가는 항공기의 창가에 점점 굵어지는 빗줄기를 느끼면서 여느 선진국 도시처럼 녹색 도시로서의 공항 주변은 여기가 과연 아프리카인가 생소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그 곳은 적도를 기준으로 우리나라와는 정 반대 남반구에 위치한 곳이었다. 다시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로 가기위해 대기 서너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날씨가 제법 여름 같은 느낌이었다. 우리와는 계절이 정반대의 날씨다. 공항 탈의실에 가서 옷을 바꿔 입고 겨울 내의를 벗어 비닐봉지에 담았다.
카렌 브릭슨 박물관 아프리카를 면적(3천3십만6천㎢:한반도의138배)으로 볼 때는 아시아에 이어 두 번째 큰 대륙이지만 국가수로는 54국으로 아시아(46국) 유럽(45국)보다도 많은 지역이다. 검은 대륙, 미개한 나라들, 빈곤과 기아와 독재로 몸살을 앓고 있는 것으로 쉽게 생각하기도 했던 아프리카에 대한 나의 인식은 극히 일부의 현장이나마 직접 밟아보고 나서 관심 깊은 생각을 해보며 개괄적이나마 느낌을 정리해본다. 먼저 아프리카를 대충 4개 권역으로 구분하여 살펴보고 이해하였다. 지중해 문화권에 속해있는 이집트 리비아 튀니지 알제리와, 모로코 세네갈 가봉 등 서아프리카 대서양권 국가들, 세 번째로 남아공 짐바브웨 케냐 등이 있는 인도양쪽 동남아프리카 그리고 니제르 중앙아프리카 수단 등 내륙 사막지역으로 되어있다. 대륙의 거의 중심부를 적도가 관통하고 있는 관계로 사막과 열대, 아열대지방이 많고 그래서인지 열대지방의 기후에 적응할 수 있는 피부를 가진 흑인들의 터전으로 되어 있는 것 같다. 이집트를 비롯한 지중해권 국가들은 유럽역사와 아랍문화권으로 느껴질 뿐 순수 아프리카로 보기에는 다소 거리감이 느껴진다. 남아공 케냐 탄자니아 잠비아 짐바브웨 보츠와나 등 동남 아프리카 지역이 일반 패키지투어가 가능한 지역으로 되어있는 것은 천혜의 관광 자원을 가진 자연조건에 유럽인들의 조기 진출로 그만큼 발전이 타 지역보다 앞섰기 때문인 것 같다. 케냐의 암보셀리와 마사이마라, 탄자니아의 킬리만자로, 옹고롱고로(세계 8대 신비의 분화구(크레이터)로써 응고롱고로 분지는 동서가 19km이고 남북이 16km인 고립된 평원이다. 이곳은 약한 초식동물인 가젤로부터 백수의 왕인 사자에 이르기까지 약 2만 5천 마리의 동물이 서식하고 있는 야생동물의 보고다. 수많은 동물들이 서로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이 되어 살아가고 있는 자연의 법칙이 참으로 신기하다. 분화구 표고 1800m 주위의 산들이 2300m 정도로 이 안에 사는 동물들은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않고 거기서만 살아간다. 기후가 온난하고 순식간에도 많은 비가 내리며 다양한 동식물이 분포되어있다. 아프리카 물소 검은 꼬리 누 사바나 얼룩말 그랜트가젤 얼룩하이에나 등이 많다.)와 세렝게티의 사파리투어, 나쿠루의 홍학떼, 잠비아와 짐바브웨 사이의 빅토리아폭포, 남아공의 테이블마운틴, 보츠와나 초베 국립공원 등 대단한 관광자원을 가진 나라들은 복 받은 나라들이다. 아프리카는 기아와 질병 그리고 독재정치에 시달리며 의식주 해결의 고통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하는 나라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척박한 땅에서 흑인으로 태어났기에 그들의 삶이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은 문명인으로 자처하는 우리들의 일방적인 생각일지 모른다. 그들은 바깥세상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들 방식대로 평화롭게 살아가는 일상의 나날이 있을 뿐이다. 나이로비 공항에 내려진 우리는 먼저 카렌브릭슨 박물관을 찾았다. 덴마크 출신 카렌브릭슨 여사는 1914년에 나이로비에 거주하면서 커피농장을 경영했다. 수익금으로 흑인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그는 "Out of Africa"라는 자전적 수기를 썼는데 그것이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세계에 알려져 아프리카에 대한 세계인들의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킨 동기가 되었고, 오늘날 수많은 관광객이 아프리카를 찾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브릭슨 여사는 1931년 본국으로 돌아갔으며 농장은 케냐 정부에 의해 보존되다가 덴마크 정부가 나서서 주변 일부를 더 매입하는 등 600에이커(약 73만 4500평)의 땅에 정원을 꾸미고 박물관을 만들어 케냐 정부에 기증한 것이다. 영화에도 긴장감 넘치는 소품으로 등장했던 브릭슨 여사의 생활가제도구와 농기구들이 전시되어 있어 당시의 시대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암보셀리의 사파리투어 마라톤으로 유명한 케냐는 한국의 5.8배 면적에 약 3천5백만의 인구로 영국의 식민지에서 1963년 12월 20일 독립하였다. 초대 대통령 케냐탸는 나이로비 북부지방의 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흑 백인간의 불공평을 위해 투쟁하다가 주동자로 몰려 7년의 옥고를 치르고 1959년 출감되어 4년 후 71의 나이로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며 임종 때까지 16년 동안 통치한다. 그가 통치하는 동안 케냐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안정적이고 성공한 국가로 자리 잡았다. 나이로비는 약 3백만의 인구가 모여 사는 케냐의 수도이며 70여개의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북아프리카의 카이로와 남아프리카의 요하네스버그에 이어 중간쯤 큰 도시이며 백인을 거의 볼 수 없는 흑인 천국에 온 느낌이었다. 나이로비와 요하네스버그는 치안이 불안하여 시티투어가 안된다고 하며 필히 야간에는 외출을 삼가라고 당부한다. 복잡 무질서하고 먼지투성이 나이로비 시내를 벗어나 암보셀리로 향한다. 시 외곽으로 통하는 길가에 싱싱하게 피어있는 빨간 꽃들이 울타리처럼 이어지는 길은 퍽 인상적이었다. 검은 인파에 대비되는 색상의 조화로 꽃송이들이 더더욱 아름답게 느껴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첫 사파리 투어로 출발한다. 사파리는 스와힐리어(아프리카 원주민들의 대표적인 토착어)로 “여행”이란 뜻이다. 그런데 이 말이 현대는 모험과 탐험의 의미가 추가되어 본래의 뜻과는 달리 맹수를 관찰한다는 활동을 사파리라고 부르고 있다. 사파리투어 전용차량에 6명씩 4팀으로 나눠 타고 끝도 없이 펼쳐지는 평지 남으로 남으로 달린다. 오장육부가 요동치는 비포장 길 350㎞를 6시간정도 달린다. 중도에 잠시 휴식을 위한 목각 인형가게에 들렸다. 목각 공예품은 목걸이와 함께 가는 곳마다 쉽게 볼 수 있는 기념품이었다. 이 목각들은 킬리만자로에서 자생하는 “에보니” 라는 나무로 만든 것으로 대충 깎아서 사포로 문질러만 주면 윤택이 나며 아주 단단한 공예품으로 아프리카의 특산품이라고 자랑한다. 그러나 소품들이 너무 조잡하여 예술성을 느끼기에는 미흡하나 값이 싸다는 장점은 있다. 나는 나중에 다른 가게에서 빅파이브 사진이 그려진 타조 알 하나만 샀다. 잠시 쉬었으나 4호차가 앞서가다가 결국 타이어 펑크가 나고 만다. 한 길가에 차를 세우고 모두는 도로변에서 잠시 휴식시간이고 흑인 운전기사 4명은 협력하여 타이어를 갈아 끼우는데, 한 차례 이동 때마다 이런 일 한 두 번씩은 상식이란다. 일제 도요다 고물차에 형편없는 도로 사정 때문에 당연한 결과라는 말이었다. 롯지에 도착 방 배정 후 현지(롯지)식으로 점심 먹고 암보셀리 국립공원 사파리 투어에 들어간다. 역시나 비포장 먼지투성이길 먼저 첫 손님으로 타조가 보인다. 야! 타조다, 코끼리다. 얼룩말도 있다. 하는 소리와 함께 사진 찍기 바쁘다. 누우떼도 있고 멀리서 가젤이 귀엽게도 꽁지를 흔들며 풀을 뜯는다. 끝없이 너른 초원이 전개되고 아스라이 기린의 무리가 시야에 잡힌다. 코끼리 떼가 연이어 세 무리 느릿느릿 지나가고 몽구스 코뿔소도 보인다. 표범과 사자는 언제쯤 나타날 것인가?
킬리만자로의 만년설 잠시 후 킬리만자로 만년설이 구름 속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숨었다를 반복한다. 암보셀리 국립공원은 동물보호구역이라는 말이 더 적합할 것 같다. 무차별 포획하던 사냥꾼의 시대가 지나고 이제는 줄어드는 동물의 보호를 위해 각국이 하나같이 국립공원이라는 명칭으로 포획을 금하고 그 대신 관광 상품으로 변신 돈벌이를 하고 있다. 시대가 달라진 것이다. 코끼리 떼가 또 지나간다. 같이 다니는 무리들이 한 가족이며 반드시 두목이 있다. 풀을 뜯다가 웅덩이에서 물을 마시기도 하고 사자나 표범이 덤비면 코를 휘둘러 쳐버린다. 공격을 당하면 우선 새끼들을 가운데 놓고 어미들이 울타리가 되어 둘러싼다. 새끼보호본능이 대단하다. 롯지는 열대지방의 현지 전통을 살린 방갈로 같은 곳으로 우리입장으로 보면 여행객에게는 호텔이나 여관인 셈이다. 주변에는 작은 원숭이들이 우글거린다. 열대식물과 꽃 이름 모를 새들이 지저귀는 열대지방의 현장감을 물씬 느낄 수 있는 풍경이다. 신성한 산 킬리만자로는 스와힐리어로 “빛나는 산” “하얀 산” 이란 뜻으로 아프리카의 지붕이라 불리며 위도상 적도에 가깝지만 고지대여서인지 별로 덥지 않고, 정상(우후루피크)의 만년설이 아침햇살에 더욱 빛난다. 서쪽으로 시라봉(3778m), 중앙에 가장 높은 키보봉(5895m), 가장 흥미로워 보이는 마웬지봉(5149m)으로 세 개의 봉우리가 늘어서 있다. 최고봉은 만년설로 덮여있고 마웬지봉은 겨울에 눈으로 덮여 있다가 여름에는 녹는다고 한다. 전문 산악인이 아니어도 최고봉까지 오를 수 있는 산이라는 특징이 있으나 고산증에 견딜 수 있는 체력단련과 준비는 필요하다. 정상은 눈에 덮인 둥근 지붕처럼 보이지만 분화구에는 너비 1.9㎞ 최고 수심 300m의 칼데라 호수가 있다. 정상의 만년설과 마웬지봉을 넣고 붉은 망토를 걸쳐 입은 마사이족과 함께 기념사진을 남겨본다. 나는 사자왕국 마사이마라 마사이족을 아프리카 원주민의 대명사처럼 알고 있었다. 마사이족은 키도 크고 용맹하여 창칼 하나로 사자를 때려잡고 전사의 칭호를 받는다는 용감한 종족이다. 상쾌한 아침 맑은 햇살 받아 빛을 발하는 만년설 머리에 이고 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아프리카의 지붕 킬리만자로는 본래 케냐의 소유였으나 독립과정에 국경이 정비되면서 탄자니아 소유가 되었다고 한다. 탄자니아는 독일의 식민지였으며 당시 독일의 빌헬름 2세가 영국여왕의 조카 벌 되는 관계로 영국 여왕이 생일선물로 빌헬름에게 주었다는 설도 있다. 다시 나이로비로 돌아오는 비포장 길은 몸바사로 통하는 480㎞, 우리로 말하면 경부고속도로 같은 남북을 관통하는 중요한 길이다. 그러나 길이 좁고 군데군데 망가져있는 누더기 길이어서 먼지는 기본이고 전신이 요동쳐대는 현장을 피할 수는 없었다. 몸바사는 케냐의 가장 큰 항구도시로서 유럽으로 통하는 관문이다. 대형 트럭으로 나이로비를 왕복하는 엄청난 물류이동 통로가 된 도로는 몸살을 앓고 있었다. 바퀴가 26~28개까지 달린 트럭도 보았다. 도로포장기술도 형편없는 나라에 그 무거운 짐들이 쉴 새 없이 이동하고 있으니 내 상식으로는 아무리 잘 만들어진 도로라도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나쿠루 홍학의 천국 다음날은 나쿠루 호수 공원을 가게 된다. 나이로비에서 북쪽으로 빅토리아 호수 쪽으로 가는 듯 했다. 역시나 비포장 길이 많아 먼지 밭을 질주하게 되는 구간이 많았다. 호수를 끼고 있는 공원답게 경치가 아름답다. 호수주변 숲속에는 페리칸 물소 가젤 얼룩말 등이 보였고 호숫가 물결이 찰랑거리는 바닥에는 소금을 뿌린듯한 허연 바닥이 사각사각 밟혔다. 물가에 길게 이어져있는 수평선이 보인다. 구름 같은 기나긴 수평선은 바로 홍학떼였다. 이 홍학떼를 보기위해 나쿠루 국립호수공원에 온 것이다. 200만 마리가 넘는다는 세계 최대의 홍학떼는 케냐의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홍학은 황새의 일종으로 다리가 유난히 길고 부리가 붉은색을 띠고 있다. 소금새우를 먹고 산다하니 이 호수에는 무진장 많은 소금 새우들이 서식하고 있는 모양이다. 동물들이 모여 사는 곳에는 반드시 그들의 먹잇감이 그 곳에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내일은 마사이마라로 간다. 아침 7시 출발, 밝고 맑은 햇살 강열한 태양, 나쿠루 시가지를 벗어나 먼지 자욱한 교외 길로 빠진다. 먼지가 안개구름이구먼,/ 10㎞는 넘겠는데,/ 비포장에 산이 없어,/ 야산도 하나 없이 끝없는 들판/ 작은 나무와 풀도 그리고 흙구덩이 웅덩이만 보이네,/ 멀리 아스라이 모래벌판, 고여 있는 물웅덩이에서 목을 축이는 야생동물들, 호수인가 제법 큰물이 보이네. 마사이마라로 가는 길에 차창 밖을 내다보며 한마디씩 주고받는다. 우리나라 7월초쯤의 계절이라는 이곳 케냐의 날씨는 1800고지라서인지 적도근처라는 말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덥지는 않았다. 여름이라지만 에어컨도 없는 차에서 기후 온도 차에 대한 시달림은 없어 다행이었다. 끝도 없는 초원의 길 이따금씩 보이는 검은 주민들 마을이라기보다는 길 양편으로 난민 정착촌 같은 판잣집과 양철집들이 보인다. 마을근처가 풀 나무는 하나도 없고 민둥 벌판으로 볼썽사나운 풍경이 나타나면 근처에는 어김없이 염소 떼가 몰려다닌다. 우리나라의 염소와 양의 중간쯤으로 보이나 염소에 더 가까운 동물이다. 염소는 식성이 너무 왕성하여 풀 나무는 물론 뿌리까지도 파먹어치우는 지독한 동물이다. 마사이마라에서 세렝게티 까지 마사이마라 국립공원으로 가는 중이다. 마사이마라는 나이로비에서 서쪽이며 탄자니아의 세렝게티로 이어지는 출발지이기도 하다. 사파리 전용차량이 끝없이 달리는 길 하나를 사이에 놓고 우측은 케냐 좌측은 탄자니아라 하니 이 길이 국경인 셈이다. 그러나 동물들에게는 국경이 무의미 하다. 제주도 면적의 8배나 된다는 세렝게티 국립공원은 동쪽 지역을 마사이마라 국립공원이라 한다. 인간들이 붙여놓은 명칭일 뿐 동물들에게는 국경이 없는 똑같은 풀밭일 뿐이다. 세렝게티(마사이어로 끝없는 평원)는 보츠와나의 초베 국립공원과 함께 세계최대의 동물보호구역으로 유명하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육상동물의 대대적인 이동이 일어나고 있는 유일한 곳으로 세계적인 관광명소가 되어있다. 해발 900~1800m 고지대인 이 공원은 1941년 설정되었으며 광대한 아카시아 수목, 사바나 아프리카에서 가장 좋은 초원을 포함한 총 면적이 약14800㎢에 이른다.) 사파리 게임드라이브에서는 빅파이브(사자,표범,코끼리,코뿔소,버팔로)를 만날 것인가? 가슴이 설렌다. 빅파이브는 가죽 상아 뿔 등을 팔아서 돈이 되는 가장 값진 동물 5종이란 뜻이다. 사자와 표범의 가죽은 카펫으로 이용되며 부의 상징으로 부르는 게 값이었다. 당구공과 도장재료 등으로 쓰이는 상아도 비싸게 팔렸고 버펄로 코뿔소 등은 장식용 칼자루 만드는데 쓰였다. 7시간이 넘게 달렸다. 1시간 반쯤 남은 거리에서 개울을 건너야하는데 다리가 끊어졌다. 가까스로 우회하는데 40여분의 시간을 낭비하였다. 이틀 후 다시 나올 일이 걱정이다. 길고 지루한 야산길 비탈길 흙먼지 날리며 찾아간 롯지에서 오후 3시에 점심을 먹고 1시간정도 휴식을 취한 후 숙소 롯지에서 4㎞정도의 거리에 있는 공원 안으로 들어간다. 사자와 표범을 볼 수 있을까? 킬리만자로를 보기위해 갔던 암보셀리와는 달랐다. 초원이 훨씬 넓고 푸르고 촉촉한 느낌이 난다. 짙은 자연의 녹색에 신선한 공기부터 맛이 달랐다. 누떼와 가젤이 먼저 보였고 얼룩말과 자카 톰슨가젤 그랜드가젤과 코끼리도 보인다. 사자는 50㎞밖에 있다는 정보, 그러다가 화급한 목소리, “사자발견!, 사자발견!” 운전기사들의 무선 마이크에서 나오는 다급한 목소리다. 기사들은 차 안에 아마추어 무선사들처럼 준비하고 다닌다. 근거리에 한 쌍의 사자가 무언가를 노리고 있는 듯 앉아있었다. 빅파이브 게임드라이브가 시작된 현장이라나. 가까이 다가가 사진 찍기 바빴다. 그까짓 동물원에 가면 떼거지로 보는데 겨우 한 쌍을 보고 호들갑이냐니까 자연 상태에서 야생 사자를 만나보는 것은 그 차원과 맛이 다르다나? 사파리 게임드라이브를 나간 오후 한나절은 코끼리 가족을 가장 많이 보았다. 얼룩말도 심심찮게 뛰어다닌다. 한 건 올리기 위해 숨어있던 사자가 일어나 어슬렁어슬렁 자리를 옮긴다. 4호차 기사가 먼저 발견하고 사자발견을 알렸으나 흰색사파리투어 전용차 5~6대가 몰려드니 사자가 가만 앉아있겠는가. “표범발견! 표범이다.” 누군가 외친다. 차들이 그쪽으로 마구 달리기 시작. 그러나 멀리 달아난 표범, 망원경으로 본 사람이 몇 안 되고 끝내 더는 본 사람이 없이 그날은 그렇게 해가 졌다. 어둠이 깔리는 저녁6시 무렵 숙소인 롯지로 돌아온다. 내일은 도시락을 준비하여 아침부터 마사이마라에서 세렝게티까지 종일 사파리투어만 하게 된다. 롯지의 아침, 아직은 동이 트기 전 새벽 같은데 문밖에서 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큰 동물은 아닌 것 같지만 특이한 그 울음소리가 새벽 모닝콜로 들린다. 동물출연에 위험할 수 있으니 롯지에서는 야간에 숙소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주의사항이 적혀있었다. 일어나 손전등을 켜보니 4시 반이었다. 아직도 한 시간은 더 남았는데 더는 잠이 오지 않았다. 아침운동을 나가기 전 샤워 먼저 하고 밖으로 나오니 부지런한 몇 분이 벌써 조깅을 즐기고 있었다. 아직은 어두운 조용한 새벽 열대의 숲이 우거진 야산! 동 터올 아침을 여는 새소리 산 냄새 풀냄새 나무냄새와 자연이 함께 어우러져 인생의 무한한 행복을 알리는 교향서곡 특유의 나무 향을 품어대는 이름 모를 꽃과 나무들 꼬르륵 꼭꼭 끄르륵 온갖 새소리 나를 반겨주는 롯지의 아침은 그렇게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해가 중천에 오르기 시작한다. 그래도 그칠 줄 모르는 새소리는 숲속의 평화스러움을 한껏 토해낸다. 아! 시원한 이 가슴속 깊은 폐부까지 생명수가 채워지는 것 같도다. 이런 롯지에서 1주일이나 한 달쯤 쉬어간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라는 대목에서는 먼지 마셔가며 옆구리 아팠던 엄청난 고통도 일순간 다 사라져버린다. 지나간 고통은 잊기 마련인가 인간은 고통인지 알면서도 자꾸자꾸 앞으로 전진 하고자 하는 속성 때문에 사는지도 모른다. 최후의 짜릿한 순간을 맛보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일까? 내가 없어져도 이 세상의 조화와 아름다움은 지속될 것이다. 내일도 모레도 롯지의 평화스러운 아침은 계속 될 것이다. 점심 도시락까지 준비한 오늘 하루는 마사이마라에서 세렝게티까지 종일 사파리투어에 들어간다. 8시 20분 입장했다. 약 20분 후 아침 식사중인 사자 한 쌍을 발견했다. 가까이 아주 가까이 가서 사진을 찍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도독 뼈다귀 씹는 소리를 내면서 맛있게 먹는다. 하늘 끝으로 멀리멀리 드넓은 초원으로만 이어지는 세렝게티를 향하여 달린다. 동물들이 풀을 뜯거나 이동하는 모습이 멀리 혹은 가까이 보인다. 씨크리트리버드(비서새)가 한 쌍 지나간다. 까만 치마에 흰 브라우스를 입은 비서 새는 상큼한 소녀처럼 머리핀도 멋있다. 아무리 달려도 끝이 안 보이는 푸른 초원 가슴도 마음도 기(氣)도 뻥 뚤린 듯 시원하다. 5시간 이상을 달려 탄자니아의 국경이 되는 곳 강물에서 하마와 악어를 보았다. 숲속을 지키는 군인들이 총을 들고 우리를 안내하고 있었다. 돌아 나오는 길에 세렝게티 초원에 나무 한그루가 그늘을 만들어주는 곳이 있어 돗자리들을 펴고 점심을 먹었다. 아직도 되돌아오는 길은 계속 쉬지 않고 달리기만 해도 2시간 이상 걸린다고 했다. 오는 길에 치타(표범)를 보았다. 작은 새끼도 두세 번 보였으나 이렇게 큰 놈은 처음이었다. 늘씬하게 잘 생긴 모습을 사진기에 담았다. 오늘 우리는 빅파이브를 다 보았다. 이제 사파리는 전부 끝났다. 그러나 나는 실망했다. TV에서 보았던 동물의 왕국 같은 기대를 하고 갔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자신을 스스로 달랠 수밖에 없어 동물의 왕국 CD 한 장을 롯지 카운터에서 구입하는 것으로 보충위안을 삼았다. 오후 시간이 여유가 있어 원주민 마을 방문을 하잖다. 전에는 옵션 10불이라더니 돈맛을 알았는지 이번에는 20불이란다. 원주민들은 우리에게 1인당 20불씩 선납 받고나서 간단한 소개와 함께 환영 공연을 시작한다. 청소년 또래들이 노래를 부르며 환영행사에 들어간다. 마사이마라 원주민 마을에서의 환영행사는 그들 고유의 전통춤 단순하고 반복되는 그들만이 아는 언어로 떠드는 소리의 노래인 것 같다. 내용을 물으니 결혼할 때 환영하는 의식이란다. 껑충껑충 뛰며 소리를 지르는 단순한 동작 소년 소녀 두 팀이 보여준 공연은 내용이 비슷하나 약간은 다른 것 같다. 나는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참가비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냄새가 역겨워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숙소에 들어갔다가 희망자만 나오는 것으로 알고 불참한다했는데 차에 나만 남겨진 채 진행되는 행사로 나는 지루하였고 쇠똥 태우는 냄새로 머리가 아파 죽을 지경이었다. 이날부터 나의 건강상태는 이상 징후가 생기게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케입타운 호텔에서 정전으로 인한 에어컨이 켜진지도 모르고 자다가 감기증세로 머리가 아프고 어지럼증이 계속 따라다녔다. 귀가하여 몸에 열이 나고 배가 아프고 심한 불면증을 겸한 고통에 병원에 입원까지 하는 등 2주정도 시달려야 했고 시차적응이 정상상태로 돌아오기까지는 거의 한 달이나 걸렸다. 그래서 여행기 정리도 한 달이 지난 후에 겨우 마쳤다.
타고 파고 날고, 온 종일 일곱째 날은 종일 차와 비행기 타는 일로 하루를 다 보내게 된다. 마사이마라 소파롯지에서 나와 나이로비로 가서 요하네스버그 행 비행기를 타야하는 날이다. 나이로비까지 장장 7시간 들어왔던 길을 다시 나가야 한다. 롯지를 출발 1시간쯤의 거리에서 개울에 놓여있는 작은 다리가 끊겨 올 때 애먹었는데 그게 걱정이었다. 올 때처럼 우회 하려고 그 길로 갔으나 상황이 달라졌다. 간밤에 비가 많이 내렸는지 물이 불어 도저히 건널 수가 없었다. 다시 끊긴 다리 쪽으로 와서 질퍽한 곳에 나뭇가지와 돌과 풀들을 채우고 가장 성능 좋은 4호차로 건너려고 했으나 차는 진흙탕 속에 쳐 박히고 말았다. 비행기 탈 시간대에 늦을까 걱정이었다. 삽으로 파고 돌을 더 넣고 밀고 어찌어찌하여 빠져나왔다. 이번에는 밧줄을 꺼내 묶어서 다른 차들을 차례로 건너게 되기까지 1시간이상을 소모하였다. 차들은 흙탕 범벅이 되었다. 고생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또 한곳이 있었다. 4호차는 그곳을 거뜬히 건넜으나 다른 차들 때문에 여기서도 한 30분을 허비하였다. 요하네스 행 비행기 탈시간이 촉박하여 식당에 도착 했지만 점심 먹을 시간이 없어 도시락을 싸들고 공항으로 직행했다. 이날은 7시간 넘게 차타고 비행기 5시간 타고 종일을 보내게 되었으니 남은 것은 잠자는 시간뿐 내일 빅토리아폭포를 보기위한 준비로 하루를 다 까먹은 셈이었다. 아프리카 사파리 투어는 엄청난 고통이었다. 고통자체를 즐긴다고 마음먹고 긍정적인 해석을 내리기에는 심신이 많이 피곤했다. 잠베지강 강상의 크루즈 요하네스버그 안스마츠 국제공항에 내려 짐가방이 나오지 않아 무려 1시간가량을 기다렸다. 컨베어 벨트가 멎었다. 나를 비롯한 3명의 가방이 끝내 나오지 않았다. 가이드가 확인을 요청하고 뛰어다니며 몇 번을 항의해보아도 끝내 나오지 않았다. 수 십 번의 해외여행에 비행기도 많이 타보았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아마도 빅토리아 공항으로 먼저 가버렸는지도 모른다고 누군가 말했다. Air port grand Hotel은 깨끗하고 격이 높은 좋은 호텔이었다. 케냐에서 지친 피로를 풀기에 충분한 분위기였다. 아침 식사도 풍성하고 과일이 많았다. 딸기와 파인애플 청포도 등 10여종이 넘는 싱싱한 과일 그 중 청포도가 달고 맛이 좋아 많이 먹었다. 오전 9시 비행기로 빅토리아폭포 가는 날이다. 빅토리아 공항에서 내 가방은 찾았으나 한 사람은 다음공항까지 더 가서 찾았다. 공항시스템이 엉성하여 사무착오라는 결론이었다. 빅토리아 공항에 내린 우리는 버스를 타고 짐바브웨 잠베지 강 크루즈로 이어졌다. 배에 타자마자 소나기가 퍼부었다. 점심을 먹기 위해 준비 중 유람선위에서 내리 퍼붓는 소낙비에 환호성이 터졌다. 강상의 크루즈는 잔잔히 흐르는 잠베지 강 하마들이 머리를 들쭉날쭉 하는 것을 구경하면서 현지식 점심을 먹는다. 잠비아로 넘어가서 폭포 일부를 보는데 사진 찍기도 어려울정도로 비가 퍼부었다. 저녁은 현지에서 나는 각종 고기로 요리한 보마식이란다. 식당입구에서 모두에게 보자기를 어깨에서 가슴으로 둘러주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관광객은 대만원이었고 식당 내부는 예약손님으로 꽉 차고 있었다. 악어, 타조, 임팔라, 버팔로 고기와 굼벵이 튀김 요리도 있었는데 굼벵이 튀김을 먹는 사람에게는 요리사가 직접 싸인한 증명서를 발급해주어 그것을 받아와 자랑하는 사람도 있었다. 식사 중에는 원주민들의 전통 춤 공연이 진행되어 식당분위기는 더욱 화려한 밤으로 장식되었고 영원한 추억으로 남을만한 볼거리였다. 이 식당에서는 목각 공예품을 비롯한 기념품도 전시하여 팔고 있었다. 원주민들로 보이는 흑인들이 가져온 기념품이 우리말로 떨이를 할 만큼 잘 팔려나갔다. 룸메이트인 백 가이드는 검정색 목각 코뿔소 한 마리를 선물할거라면서 샀다. 그런데 가지고 다니다가 비행기 하물 운송 중에 눌려서 그랬는지 뿔이 한 개 끊어졌다. 숙소에 돌아와 짐가방을 풀고 싸고 할 때마다 만져보며 한숨을 내쉬며 걱정한다. 부드러운 스폰지나 헌옷가지로라도 감싸서 짐가방에 넣었으면 안전했을 것을 그랬다고 후회께나 한다. 신이 만든 폭포 빅토리아 다음 날은 짐바브웨 쪽 폭포를 보러 가는데 이 날은 철저히 준비하여 비를 피할 수 있었고 사진도 그런대로 많이 찍을 수 있었다. 가던 길에 1700년 된 바오밥나무 앞에서 잠간 내려 기념사진을 찍었다. 바오밥나무는 신이 세상을 만들 때 가장 처음 생겨난 나무였는데 그 다음으로 야자수, 불꽃나무, 무화과 등을 만드니까 그때마다 자기도 늘씬한 야자수처럼, 빨갛고 아름다운 꽃도 피우게 해주고, 무화과처럼 열매도 맺게 해주라는 등 계속 탄원하니까 대단히 화가 난 신이 이 나무를 뿌리채 뽑아서 더 이상 말을 못하게 거꾸로 심어버렸다고 하며 그 결과 지금과 같이 우수꽝스러운 모습을 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당근을 거꾸로 심은 것 같이 생긴 아프리카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이 나무는 보통 높이가 18m 지름 9m 정도에 수령이 2000년 넘는 것도 있으며 나무 자신의 욕심만큼이나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된다. 단단한 열매는 용기로, 종자 주위의 펄프 질은 주석산 등을 함유하여 달콤새콤하여 그대로 먹거나 우려내어 청량음료를 만든다. 비타민 C도 많고 해열제로도 이용되며 종자를 빻아서 끓여 죽을 쑤거나 기장과 섞어서 먹기도 한다. 또 종자는 오일을 짜기도 하고 비누원료 로프나 말고삐 민속악기의 현으로도 사용된다. 빅토리아 폭포는 잠비아와 짐바브웨 사이에 있으며 1855년 영국의 탐험가이자 선교사인 리빙스턴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는데 원주민들은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영원히 솟아오르는 연기” 라고 부르며 경배의 대상으로 삼아왔다고 한다. 리빙스턴은 이 폭포를 영국여왕의 이름을 따라 빅토리아폭포라 명명했고 데블스폭포, 메인폭포, 호스호폭포, 레인보우폭포, 이스턴 폭포의 5개 이름을 붙였다. 잔잔하게 흐르는 잠베지강물은 1688㎡ 넓이의 빅폭에서 갑자기 108m 아래로 힘차게 떨어진다. 1분당 약 55만 톤의 물이 떨어진다 하며 깊은 곳은 120m에서 낮은 곳이 70m정도로 되어있고 이 폭포는 약 1억5천 만 년 전에 생성된 것이라고 지리학자들은 말한다. 물의 양으로 보아도 이과수와 별 차이가 없을 것 같으나 조망이나 주변시설 편의점들이 관광객의 입맛에 맞게 잘 정비되었는가라는 종합적인 평가로 보면 이과수가 앞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세계 3대 폭포를 말할 때는 이과수, 빅토리아, 나이아가라로 불러주는 것 같고. 지각이 이동하면 강은 방향을 바꾼다는 현장 같았다. 리빙스턴 동상이 두 곳에 다 있는데 남쪽인 짐바브웨의 동상이 더 잘 만들어졌고, 잠비아 쪽의 동상은 나중에 만들었다고 하며 좀 조잡하게 보였다. 이날 아침부터 리빙스턴 동상을 기점으로 돌아보게 되는 빅토리아 폭포는 도보 약 3㎞를 관람하는데 소낙비가 내렸다 그쳤다 하며 안개 자욱한 물보라 때문에 좋은 작품을 찍기가 쉽지는 않았다. 세계에서 낙차가 979m로 가장 큰 베네수엘라의 엔젤폭포는 4대폭으로 우리 백두산의 장백폭포는 세계 6대 폭포에 들어있다. 아프리카의 부국 남아공으로 가다. 요하네스버그는 이집트의 카이로와 함께 아프리카 최대의 공항이 있는 세계적인 큰 도시다. 남아공투어 5일간은 요하네스에서 2박, 케이프타운에서 3박을 하게 된다. 요하네스버그에서의 2박은 미스티 힐스 컨트리 호텔에서 하게 되는데 The misty hills 호텔은 호텔의 격이 전혀 아니었다. 광활한 대지위에 롯지에 가까운 형식의 단층 건물로 120여개의 객실을 갖추어 자연환경을 잘 살린 숙소였다. 마치 정글 숲속 미로를 거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약도를 들고 다녀도 식당을 찾기가 힘들었고 자기방을 찾아가는데도 몇 번씩 딴 길로 가기 일 수였다. 가이드에게 방을 바꾸어 달라 항의 하는 이들도 있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위상 여행 오기 전 상식적으로 남아공 하면 떠오르는 것 노벨평화상 수상자 넬슨만델라다. 만델라(1918.7.18~ )는 노벨상 수상 이듬해 대통령에 당선(1994)된다. 남아공에서 평등선거 실시 후 뽑힌 최초의 대통령이 된 것이다. 백인정부 치하에서 반역죄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26년만인 1990년 2월 11일 출소한다. 만델라는 대통령 당선 후 용서와 화해를 강조한다. 흑인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탄압하고 화형 시키는 등 잔악한 방법으로 살인 행위를 한자라도 진심으로 죄를 고백하고 뉘우친다면 사면하는 등 과거사 청산을 철저히 도덕적으로 실시한다. 1994년은 교민들도 초비상 사태였다고 한다. 흑백갈등은 일촉즉발의 내전에 돌입 할 만반의 대치상태에 이르게 되었고 이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만델라는 백인 대표와 최후의 협상 테이블에 마주하게 된다. 만델라의 요구조건은 모든 분야에서 흑인지분으로 25%를 인정해주면 백인의 기득권을 다 지켜준다는 것이었다. 이 약속을 철저히 지켜온 만델라의 위기 극복으로 전쟁 없이 흑백 공존의 남아공을 만들었으며 5년 집권 후 퇴임하였다. 두 번째는 비서출신 타보 음베키(1942.6.18~)가 10년째 집권하였고 현재는 제이콥 주마(1942,4,12~)대통령이다. 흑백 공존을 위한 만델라의 정책은 칭찬받을만하지만 현지의 분위기로 느껴볼 때 흑백 갈등은 아직도 잠재해 있는 것 같다. 심하게 표현하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만이 쌓여간다고도 말한다. 현재는 경제권과 기술이 백인들만의 전유물이아니라 흑인 중에도 유능한 사람은 상당수가 상류층에 진입해있다고 한다. 그러나 80% 이상의 흑인 인구 중에는 가난과 빈곤 게으르고 문맹자가 많아 범죄자의 그늘에 있는가 하면 불평 불만자들이 문제라는 것이다. 주변국보다 가장 잘 산다고는 하나 해마다 3500여명의 불법 밀입국자들 때문에도 문제라고 한다. 남아공의 국토는 남한 면적 12배에 인구는 4천8백만으로 우리와 비슷하다. 이 나라는 땅만 파면 뭐든지 다 나오는 자원 부국이다. 내륙에 두 개의 독립국가(스와질랜드:강원도면적정도, 레소토:강원도+전남면적정도)가 있고 2개의 국가(백인통치 때와 만델라 집권이후)가 있으며 9개의 주로 구성되어 있고 아프리카 심장부 역할을 할 만한 강력한 나라라지만 GNP는 3700불 정도라 하니 고루 잘 살지는 못한 것 같다. 이 나라의 수도는 3곳(프레토리아(행정), 케이프타운(입법), 블룸폰테인(사법))이다. 대통령의 평소 집무실은 프레토리아(유니온빌딩)에 있으며 국회가 열릴 때는 케이프타운으로 가는 등 다른 두 곳에도 집무실이 있다. 프레토리아로 가던 도중에 가이드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아프리카의 가장 큰 고민거리중 하나는 에이즈다. 남아공도 인구의 35%가 에이즈 환자라 한다. 줄루족의 후예가 대부분인 이들은 여자는 보이프렌드가 3명 정도, 남자는 걸프렌드가 5명 정도가 상식이며 유능한 남자는 10명까지도 가능하다고한다. 이혼이 많고 자식은 여자가 보호하고 남자는 생활비를 보내줘야 한다. 결혼할 때 남자는 여자에게 소 11마리를 주고 예쁜 여자라면 15마리까지도 준다. 능력 있는 남자는 여러 명의 여자를 거느릴 수 있으며 18세가 되면 집을 나가야 한다. 선진 문명 사회인들이 에이즈를 무서워하지 현지 흑인들은 별로라고 한다. 그게 그냥 자기 팔자려니 하며 주어진 명대로 살면 된다는 편한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가장 잘 산다는 남아공의 통계가 이렇다면 여타 흑인국가들은 훨씬 심각할거라는 짐작이다. 대통령궁 유니온빌딩으로 가던 도중에 전쟁 기념관에 잠간 들려본다. 종교색이 느껴지는 독특한 건물이었다. 밖에서 보기에는 황토색 비슷한 흑 벽돌집 같은데 안으로 들어가 보니 박물관처럼 단단한 돌집이었다. 백인들의 역사를 돌에 새겨놓은듯하다. 네델란드계 백인들이 최초로 건너와 원주민들과 싸우면서 살아온 역사로 시작하여 엄청난 금맥이 발견되니까 영국인들이 끼어들어 보아전쟁(Boer War : 1899~1902)이 일어나게 되고 결국에는 영국의 식민지가 된다. 지금이야 독립국이지만 영국의 강력한 식민지배하에 살아왔던 흔적들이 현재까지도 많이 남아 있다. (보어전쟁:남아공의 네델란드계 백인을 보아인이라고 부른다. 보어전쟁이란 영국과 트렌스발 공화국 및 오렌지 자유국과의 4년간의 전쟁으로 이 두 지역에서 금과 보석이 발견되자 이를 탐낸 영국은 자국인의 참정권 요구의 거절을 구실로 싸움을 시작한다. 트렌스발, 오렌지 두 나라는 유격전으로 맞서 잘 싸웠으나 오래는 버티지 못하고 결국 영국에게 굴복하여 식민지가 되어 60여 년 간 지속된다.) 남아공의 라스베가스 선시티 남아공의 라스베가스라는 선시티로 간다. 요하네스에서 머지않은 곳에 미국의 라스베가스를 모방한 선시티라는 조그만 도시가 16년 전에 만들어졌다. 옛날에 고도의 문명을 자랑하던 한 도시가 지진에 의해 사라져버렸다는 전설을 토대로 선시티를 만들게 되었는데 선 그룹이라는 재벌이 그곳 흑인의 부족장을 찾아가 노는 땅이니 자기들에게 좀 팔면 흑인들에게 고용인원의 50%일자리를 주겠다는 등 원주민에게도 여러 가지 혜택을 약속하고 싼 값에 야산을 사서 도시를 만들었다. (흑인들이 게으르고 무식하여 문제를 야기하여 현재는 의무고용조건이 무효화되고 채용시험에 합격해야 취업시킨다함) 선 시티는 철저한 관광객용 도시다. 금요일부터 3일간은 차동차의 행열이 요하네스에서부터 길게 늘어서 거의 주차장을 방불케 할 정도란다. 한 백인 의사가 카지노에 빠져 폐인이 되었다는 말도 들었다. 카지노 대형극장 종합오락장 두 개의 골프코스 4개의 호텔 워터파크 등을 갖추었으며 아프리카 최고의 매머드리조트로서 동물상과 호화로운 장식품들을 구경할 수 있었고 2개의 인공 파도 속에서 서핑과 수영을 즐길 수도 있다. 나는 수영복을 준비해 가져갔지만 탈의실이 허술하고 불안하여 수영을 포기했다. 남아공에 사는 한국 교민은 3800여명이다. 성공한 사업으로는 사진관이나 가발공업이 있는데 이 도시에는 총 8개의 사진관이 있고 그 중 7곳이 한국인 경영 사진관이다. 한 사진관에서 잘못 실수로 사진이 좀 누렇게 나왔는데 대단히 좋아해 알고 보니 자기 얼굴이 실재보다 더 깨끗하고 밝게 나와 너무 좋아 하더라는 것. 그 후로 흑인들이 엄청나게 몰려들기 시작하여 식사할 시간도 없이 계속 작업을 하고 돈을 받아야 할 정도로 많이 벌었는데 월1억씩을 한국으로 송금한 사람도 있고 지금은 디카가 보급되기 시작하여 매출이 감소되고 잘 안된다고 해도 7~8천 정도는 가능하다고 한다. 가발은 미국에서도 성공한 사업으로 한국인들의 손 기술이 좋아 인기 최고란다. 의외로 흑인들이 가발을 좋아 한다. 그들에게는 가발을 갖는 것이 재산목록에 포함시킬 정도의 가치를 느끼게 한다. 어떤 흑인들은 가발 한 번 꼬아 한 달 정도 머리를 감지 않고 산다니 가렵고 냄새가 얼마나 심하겠는가 나는 흑인 냄새만 맡으면 머리가 종일 아프다. 금의 나라 금광 박물관 골드리프시티 금광박물관으로 간다. 남아공은 세계 금 생산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금이 많이 생산된다. 요하네스버그가 일찍이 유명한 도시가 된 것도 금맥의 발견 때문이었다. 7개의 금맥이 발견되었고 450개의 금 광산이 있는데 폐광된 한 곳을 박물관처럼 만들어 놓고 관광객을 불러들인다. 놀이동산을 겸하고 기타 관광 상품을 곁들인 금광 박물관을 만들어 골드리프시티라 하는 곳인데 우리들은 헬멧을 지급받아 쓰고 지하 250m갱도를 내려가 본다. 금을 많이도 파냈고 이제는 폐광된 곳이라지만 아직도 작업을 하면 가능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지하갱도는 수직으로 승강기를 타고 내려가다가 옆으로 나가는가하면 굴들이 층층이 개미굴처럼 잘도 만들어져 있었고 총 깊이는 1천m도 넘을거라 한다. 금강석(돌)을 1톤 실은 협궤열차 1칸에서 4g의 금이 나온다고 하나 그 돌을 파내어 싣고나와 깨고 분쇄하여 순금을 골라내기까지는 그 기술하며 인력이 얼마나 들어갔겠는가. 갱도를 나와 작업실로 가서 금덩이들을 불에 구워 금궤를 만들어내는 실연을 하였는데 금덩이 12㎏짜리(싯가 약 2억 6천만원정도)를 만들어 보여주고 우리는 만져보고 사진 찍고 하였다. 테이블 산과 희망봉에서 아침 7시10분 호텔식당에는 반 이상의 좌석이 차있었다. 우리 팀은 보이지 않아 식당 안을 한 바퀴 돌아보아도 한 사람도 없었다. 다른 식당이 또 있나? 분명 7시라고 했는데? 의아해하다가 애라 모르겠다. 먼저 먹자. 대부분의 식당 뷔페식 메뉴는 빵과 기름진 것 그리고 내 입맛에 맞지 않은 역한 냄새나는 죽과 음료수 등이다. 밥이 없어 나는 항상 심심한 수박과 사과 등 과일만 먹고 때우는 경우가 많았다. 그날따라 휘청휘청 순간적으로 현기증이 느껴졌다. 혹시 영양실조 아닐까 걱정도 되었다. 구름이나 안개가 끼는 등 일기불순으로 오르나마나 하는 경우가 될 수도 있어 날씨가 좋으면 테이블 마운틴부터 먼저 간다고 한다. 8시 30분 테이블마운틴 투어가 시작된 것이다. 버스로 산 입구에 가서 회전하는 케이블카에 올랐다. 아름다운 항구도시 케이프타운의 전경이 다양하게 시야에 펼쳐진다. Cape City는 1685년부터 어머니의 도시라 불렸으며 유럽인들에게 노후생활 희망지의 한 곳으로 80%가 흑인인 남아공에서 이곳만은 백인의 수가 더 많이 살고 있다. 더반과 함께 남아공 2대 항구도시로서 전력사정도 좋고 치안상태도 양호하고 시드니 나폴리 등과함께 세계적인 아름다운 도시로 인정받고 있으며 여기서 남극까지는 5천㎞란다. 평평하지만 바위산 테이블 마운틴은 케이프타운 뒤쪽에 솟아있는 산이며 산 정상까지 케이블카가 설치(1929년)되어 있고 최정상은 1086m이며 대서양과 인도양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로도 유명하다. 평평한 바닥이 반질한 바윗돌로만 되어 있는게 아니라 오톨도톨하여 키 작은 풀 나무들이 나 있고 자갈돌도 굴러다니는 흔하게 볼 수 있는 보통 야산바닥 같은 곳이었다. 식물의 종류가 많아 식물학자들이 많이 찾아오며 전설이 많은 산이기도 하다. 정해진 코스로 한 바퀴 돌아보고 케이블카로 다시 내려와 점심을 먹고 오후 희망봉이 있는 곳 남쪽으로 갔다. 케이프 반도의 끝이 뾰족하게 나와 있는 최남단의 희망봉은 1488년 포르투갈의 항해가 바루툴로메우 디아스가 발견 처음 이름은 폭풍의 곶(희망곶) 이라했으며 나중에 포르투갈 왕 주앙 2세가 희망봉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가장 높은 곳에는 희망등대가 있고 가장 남쪽의 낮은 봉우리가 희망봉이다. 모노레일 퍼니큘라(Funicular)를 타고 중간에 내려 등대까지 올라가보고 내려오면서 희망봉을 배경으로 증명사진들을 찍었다. 희망봉을 둘러보고 내려오면서 고래와 상어이야기를 들었다. 이 곳 고래는 보통 길이가 13m에 새끼는 6m이며 교미를 하여 새끼를 낳아도 새우 먹이가 없어 남극으로 간다. 새끼도 1일 1톤의 우유를 먹는다. 밀물 때 밀려왔다가 썰물 때 못 빠져나가면 온 마을 사람들이 나와서 공동 구제를 한다. 상어에 물렸을 때는 상어의 눈을 찔러야 한다. 사람이 서 있을 때 무는 게 아니라 물개를 너무 좋아해 수영을 할 때 물개인줄 알고 문다고 한다. 물개섬과 워터프론트 물개섬과 타조농장에 가는 날이다. 후트만(Hout bay)에 사는 펭귄과 물개를 보러간다. 대서양 연안 후트베이에서 내려 걷는데 해변을 따라 펼쳐져있는 백사장과 바위절벽 도로 줄줄이 이어진 별장들이 한 폭의 그림이다. 이 지역은 조용하고 편안한 삶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장소이며 집값도 우리나라 이상 비싸다고 한다. 케이프타운 아름다운 항구중 하나인 후트베이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호화 보트가 정착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배를 타고 15분정도 바다로 나가면 5천여 마리의 물개가 서식하는 물개섬에 가볼 수 있다는데 그날 우리는 배를 탈 수 없었고 해안에서 머지않은 곳 가까이 있는 바위섬의 물개와 펭귄들을 보았다. 물개의 해구신을 소주에 담그면 노란물이 우러나며 그것을 마시면 비아그라보다 훨씬 효과가 크다고 한다. 샌드비치(나체촌)이야기가 나왔다. 한국인 한 부부가 발가벗고 들어갔는데 어떤 서양 놈이 자기 부인을 유난히 계속 째려보니까 기분 나빠 나와 버렸는데 뒤에 남자 혼자 다시 갔다는 얘기. 나체촌에 들어가 보았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처음에는 어색하지만 한번만 가게 되면 자꾸 가고 싶고 그렇게 시원하고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고 한다. 인간이 도덕적 수치심으로 철저히 무장되기 전에는 본능에 충실하며 다들 벗고 살았을 것이다. 오스트리치(타조농장)으로 가본다. 타조는 7500만 년 전 공룡 멸종 후 살아남은 새란다. 타조 가죽은 악어가죽보다 더 질기고 영하 30도에도 견디며 한 우리에 수놈 1마리와 암컷 2마리를 넣어주는데 1일 교미횟수는 20~30회라 한다. 점심은 타조농장에서 먹었다. 저녁식사는 한인 식당에서 먹는다. 된장찌개와 백반, LA갈비, 회무침, 돔 생선 등 맛있게 잘 먹었으며 생일을 맞는 사람들이 있어 간단한 축하 파티와 노래와 박수를 쳐 주었다. 와인 시음장으로 간다. 말이 시음이지 맛보고 사라는 암시가 깔려있다. 와인을 시음할 때는 가격을 보지 마시오. 와인은 20점 만점에 모양, 색깔, 흔들어보고 당이 일정하게 잘 퍼져있는가, 색깔 3점, 향 7점, 맛 10점이라고 설명하며 잔을 여러개 주고 각종 와인을 조금씩 부어 주면서 맛보라고 한다. 나는 그게 그거라는 수준이라 구별을 못하겠는데 제법 아는 척 한마디씩 하는 이들도 있고, 벌써 사서 포장에 들어가는 분들 내게 카드 좀 빌려달라는 분도 있었다. 와인은 우리말로 포도주다. 프랑스가면 프랑스가 최고 이탈리아에 가면 그들이 최고 칠레에 가니까 자기들이 프랑스 다음으로 최고라더니 남아공에 오니까 또 자기들이 최고라 한다. 오후 자유 시간에 케이프 시티의 새로운 명소 워터프론트에 갔다. 빅토리아 알프레도 워터 프론트는 1652년부터 상선에 물자를 보급하던 기지로 사용되었으며 오늘날은 케이프의 새로운 명소가 되고 있는 백화점이 있는 부두의 화려한 모습이다. 단순한 부두였던 곳을 활기 넘치는 항구와 쇼 볼거리 지역으로 도시의 운치를 한껏 높여준다. 상거래가 성행하는 쇼핑가가 즐비하게 늘어서 남아공의 경제활성을 느낄 수 있었다. 그곳 워터 프론트에는 레스토랑 커피숍 뷰띠끄 멀티플렉스 영화관과 공예품을 파는 시장이 있는데 케이프타운 최고의 여가 지역이다. 거리에는 노령의 악사들이 악기로 노래 한곡씩을 연주하고 도움을 요청하기도 한다. 케이프타운에서 요하네스버그까지는 비행기 2시간거리다. 귀국을 위해서는 요하네스버그 공항으로 가야한다. 아프리카동남쪽 인도양에 있는 마다가스카르 섬은 인구 약 1800만으로 우리 남한의 약 6배의 면적을 가진 큰 섬이 있고, 제주도만큼 작은 섬 모리셔스도 있다. 힘들었던 아프리카 동 남아프리카 15일간의 여행은 사파리투어와 빅토리아 폭포 및 남아공의 발전상을 돌아보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하고 싶다. 중남미의 역사 일부처럼 일찍이 선진 유럽의 진출로 강대국들의 텃밭 식민지 생활의 고통을 겪어내며 살아온 나라들이 대부분이다. 나라의 역사와 발전은 지리적 천혜의 요건과 자연환경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금광을 비롯한 막대한 지하자원이 발견되어 만들어진 요하네스버그, 물류 대이동을 위한 항구도시 몸바사와 더반 케이프타운 등의 발전은 15세기 유럽인들의 침략이 시작된 이래 현재까지도 계속 되고 있다. 그렇게 발전하면서 돈을 많이 번 재벌들이 생겨나고 그들은 또 고급 생활을 위해 휴양도시 케이프타운을 발전시켜왔을 것이다. 케이프타운의 워터 프론트에서 나는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여행을 할 때 여행사의 주문은 부부동반이나 룸메이트 등 짝지어오기를 전제조건으로 내 세우기 일쑤다. 나는 혼자 다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여러 나라를 다닐려니 혼자만으로도 경제가 어려운데 매번 같이 다닐 수 있겠는가. 문인단체에서 가는 곳에 묻혀 가면 전혀 없었던 질문이 일반관광으로 가면 만나는 사람마다 하는 같은 질문 “왜 혼자 오셨어요?”다. “혼자 다니니 편하시겠습니다.” 라는 말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초기에는 대답할 준비가 안 되어 안절부절 적당히 얼버무렸다. 너무 자주 받는 질문에 대답하기 귀찮아서 “혼자 다녀 보세요. 얼마나 편한지 모릅니다.” “챙겨주거나 간섭하는 신경 쓸 일 없죠” “경제적이지요” “시간 절약 아껴 쓸 수 있지요” “자유스럽죠”라고 정직하게 대답했지만 그들에게는 변명으로만 들렸을 것이다. 일반관광은 회원제 계를 하여 오거나 일가친척 혹은 부부나 연인끼리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들은 시시콜콜 함께 노닥거리며 다니는 즐거움이 있으니 나 같이 혼자 다니는 사람을 측은한 동정심의 대상으로 볼 수 도 있을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도 5명의 여자팀이 있었는데 사파리투어에서 6명의 팀을 만들어야하니까 자연스럽게 나 하나가 그들과 합류하게 되어 며칠 동안은 같은 차에 타야했고 식사도 한 테블에서 하게 되었다. 대전 대구 울산 광주에서 왔다는 이 여인들은 30대로 보이는 대전분이 가장 영계로 보였고 여행 중에 환갑을 맞았다는 광주의 한 분이 장 언니라 했다. 이들이 사파리 투어를 가던 차안에서 계속 떠들어댔다. 지루한 비포장 길 장기주행중이라 즐겁고 웃고 떠드는 즐거움이 피로를 잊게도 해주니 고마운 일이었다. 여행중에 만나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여행 클럽이라 했다. 전문여행길로 들어서 인생을 즐기며 사는 듯 보였다. 직업이 무언지 궁금하지만 묻지는 않았다. 사생활 보호차원에서 나는 누구에게든 직업을 묻지 않은 습관이 있다. 이런 나의 생각은 내가 말하기 싫기 때문에 남에게도 묻지 않을 뿐 다른 사람도 그래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들의 웃음보따리는 몇 시간이고 계속 된다. 만담 웃기는 질문 난센스 퀴즈 야한 이야기가 나오는 등 온갖 잡소리가 이어진다. 노래와 박수도 치는가 하면 노래를 시작했다하면 유행가로 시작하여 찬송가 동요 클래식에서부터 끝이 없다. 그야말로 여행 즐겁게 하는 꾼들인 것 같다. 여행을 할 때는 최대한 즐겁게 해야 한다가 그들의 목표였고 자랑거리였다.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교수부인 과부 노처녀가 아닌가 짐작 되었지만 확인 할 수도 할 필요도 없어 그냥 그렇게 보아왔는데 문제는 내가 그들과 끝까지 어울려주지 못하니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초기에 몇 마디 대응을 하다가 나의 미숙한 언변과 해학의 밑천이 바닥나 본성으로 돌아와 버렸다. 늘 하던 습관으로 말없이 창가를 내다보며 자연을 감상하며 상상하며 기록하는 것이다. 그들이 너무 시끄럽게 떠든다고 내 취미에 방해된다거나 그들의 약점을 들어 집어내서 내 입지를 꺾이지 않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저런 풍경도 있구나, 행복한 여인네들이다. 같이 어울려 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때부터 그중 말을 가장 많이 하는 한 사람의 입에서 무언의 공격적 에너지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무의식적으로 내 뱉는 언어 속에는 나를 비꼬는 투의 요소가 군데군데 배어 있다. 노골적이거나 직언이 아니어서 대응할 수도 없이 참고 만 것이다. 웃기는 말이든 야하고 속된 이야기가 됐든 타인에게 피해가 되는 말은 삼가야한다.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신사도가 있어야 진정한 문화인이요 지식인이 아닐까. 느끼고 씹히는 대로 마구 내 뱉는 언어는 불량식품 같이 해독 작용을 일으킨다. 자기들만의 일이 옳고 최고라는 오만을 버려야 한다. 당동벌이(黨同伐異)라는 말이 생각난다. 내용이야 속되든 말든 누구에게 피해가 가든 말든 아랑곳 하지 않고 저희들끼리는 좋아하고 떠들며 옳고 그름을 떠나서 무조건 동의해주는 무리들 그런 사람들을 빗대 나온 말이다. 누가 어느 장소에서 무슨 말을 하던 만장일치 동조하여 큰 소리로 웃고 박수 쳐주는 그들만의 즐거움 속에는 동참을 못해주는 주변에게 야유와 조크로 돌팔매질을 해대는 사람도 있다. 남의 말꼬리 잡고 비꼬며 잘난 채 하는 저속한 졸부들도 해외여행 중에는 심심치 않게 목격할 수 있는 장면들이다. 자기가 잘나서 잘 살아서 해외여행 다닌다고 생각할 그들에게 내 조국의 눈부신 발전으로 내 이웃 누군가가 피눈물 나는 노력으로 무진장 벌어들이는 외화 덕분에 해외여행도 쉽게 다닐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볼 수도 있는 수준인가가 의심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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