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강미경 옮김, 느낌이있는책, 2018.
“자유로운 삶이란 무엇인가?”
나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50대 초반에 처음 읽었다. 몸뚱이 하나로 세상과 부딪히며 살아간 조르바의 삶은 펜대를 굴리고 사변적인 정신노동자 유형의 내 역정과는 판이하게 달랐지만 묘하게 끌리는 면이 있었다. 왜 그랬을까? 가족 또는 유교적 가치, 국가, 이념, 학교, 종교 등 기존 제도의 틀에 맞추고 안주해 사는 것은 답답하고 숨 막히고 심심하고 참 재미없다는 자각이었을까? 모든 억압에 대한 자유를 본 것일까? ‘현재의 삶을 즐기고, 본능에 충실해야 한다’는 정도의 느낌이 남았다. 당시는 공직을 사직한 직후라서, 여전히 의무적으로 해야 할 일들이 많고,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처지라서 그렇게 지나갔다.
지난 해 늦가을 독서 모임에서 첫 나눔 텍스트로 선정되어 다시 꼼꼼히 읽게 됐다. 이제 60대 중반이 되어가는 나이에 나는 작품 속 화자(‘두목’으로 불리는)처럼 조르바의 인생을 훔쳐보듯 관찰했다. 분명히 예전과는 또 다른 느낌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인생 참 별거 아니야.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자기 하고픈 대로 하고, 만나는 여인 마다 사랑하고, 산투리 켜고, 춤추는 삶.’ 으로 요약되는 조르바의 삶과 함께 화자의 변화에 주목하게 되었고, 화자에게서 일체감을 느꼈다.
“그 친구가 나를 책벌레라고 불렀을 때, 불쑥 솟아오르던 그 분노의 순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내가 살아온 인생이 그 순간 그 말로 집약될 수 있다는데 몹시 화가 났다. 그토록 인생을 사랑하던 내가 어쩌자고 책 나부랭이와 잉크로 더럽혀진 종이에 그토록 오랫동안 나를 내버려둘 수 있었단 말인가? ... (중략) ... 나는 나의 원고 나부랭이를 내팽개치고 행동하는 인생으로 뛰어들 구실을 찾았다. 새로운 인생에 책 나부랭이를 동참시킬 생각은 없었다.”(18쪽)
“나는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까지 너는 그림자로만 만족하며 살고 있었지, 자, 이제 내가 너를 본질 앞으로 데려다 줄 테다.’”(19쪽)
작가 카잔차키스는 그리스 문명의 발상지인 지중해 크레타 섬 출신이다. 이 소설의 무대도 크레타이다. 이 섬의 아름답고 독특한 풍광이 소설 곳곳에 묻어난다. 한번 꼭 여행하고픈 곳이다. 젊은 시절 방학 때가 되면 친구들을 만나러 가던 부산대학교 앞 카페 이름이 “오렌지향기는 바람에 날리고”였다. 참 낭만적이라고 느꼈는데, 나중에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을 배경으로한 오페라(마스카니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를 감상하다가 이 노래가 나와서 더 큰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영화 ‘대부’에서 마이클이 거사를 치르고 은거한 곳도 마피아 보스였던 아버지의 고향 시칠리아 섬이고, 그 아름다운 풍경이 엔리오 모레꼬네의 음악과 함께 기억 속에 남았다. 시칠리아도 지중해 섬이며 크레타처럼 패권을 놓고, 수 천년간 침탈의 대상이 된 곳이다. 아름다운 곳이나 고립된 섬의 지리적 한계로 전쟁과 약탈, 강간, 인신매매 등 아픈 역사적 상흔이 소설 곳곳에서 느껴진다.
“바다, 가을의 따사로움, 빛에 씻긴 섬, 그리스의 영원한 나신 위에 투명한 베일처럼 내리는 상쾌한 비. ...(중략)... 태양은 구름 속에서 그 따사로운 얼굴을 내밀고는 그 빛으로 사랑스러운 바다와 대지를 씻고 닦고 어루만졌다.”(32쪽)
“아프리카 해안 까지 엄청난 갈증으로 으르렁대는 검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고 멀리서 불어오는 뜨거운 남풍 리바스가 이따금 사막을 태웠다. 아침이면 바닷에서는 수박 냄새가 났고 정오에는 안개에 덮인 채 조용히 있었는데, 조용히 일렁이는 파도는 마치 덜 익은 젖가슴 같았다. 저녁이면 바다는 한숨을 쉬며 장밋빛이 되었다가 자줏빛, 포도줏빛, 그리고는 짙푸른 색으로 변했다.(115쪽)
이 소설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자유”다. 화자는 조르바의 삶을 근접 관찰하면서 인간이 추구해야할 진정한 자유인의 모습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한 이상적인 모델을 만들어간다. 화자의 생각이나 조르바의 말과 행동을 통해 구체화되는데, 페이지를 넘길수록 추상적 물음에서 각론적 방법론으로 해법을 찾아간다. 화자가 조르바 삶을 긍정하고, 마침내 이성 보다는 감성적 느낌에 따르는 선택을 하게 된다. 매력적인 과부와의 하룻밤을 정사를 치르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나는 마침내 먹는다는 게 숭고한 의식이며, 고기, 빵, 포도주는 정신을 만드는 재료임을 깨달았다.”(117쪽)
“나는 오랜 시간 잠들려고 애쓰며 생각했다. 내 인생은 낭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배운 것, 내가 보고 들은 것을 걸레로 모두 지워 버리고 조르바라는 학교에 들어가 저 위대한 알파벳을 배울 수만 있다면, 내 인생은 아주 다른 길로 들어설 수 있을 것이다! 내 오관과 육신을 다시 제대로 훈련시켜 인생을 즐기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그러려면 달리는 법을 배우고 씨름, 수영, 승마, 노를 젓는 것, 차를 모는 것, 사격 등을 배워야했다. 육신으로 내 정신을 채워야 했다. 그렇게 하려면 내 속에 도사린 두 개의 영원한 적대자를 화해시켜야 했다.(130쪽)
“우리는 밤늦게까지 묵묵히 화덕 옆에 앉아 있었다. 또 한번 나는 행복이라는 게 포도주 한 잔, 밤 한 알, 허름한 화덕, 바닷소리 같은 단순하고 소박한 것임을 깨달았다. 필요한 건 그뿐인 것이다. 필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뿐인 것이다.”(138쪽)
“나는 아무 말도 못했다. 나는 이 조르바라는 사내가 부러웠다. 그는 싸우고 죽이고 사랑하면서 내가 펜과 잉크 속에서 배우려던 것들을 고스란히 몸으로 살아온 것이다. 내가 의자에 붙어 앉아 고독과 싸우며 풀려고 하던 문제를 이 사나이는 산속의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칼 한 자루로 풀어 버린 것이었다.”(388쪽)
“그렇다. 바다, 여자, 술, 그리고 고된 노동! 일과 술과 사랑에 자신을 바치고, 하느님과 악마를 겁내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젊음이라는 것이다!”(402쪽)
소설은 조르바 인생에 대한 구체적 묘사를 통해 ‘이성 보다 감성’ ,‘정열’,‘야성’,‘원시적 자연미’ 등 지식인 사회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인간상을 강력하게 드러낸다. 즉 관념적 자유가 아닌 실제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실천적 생활 양태를 가지고 ‘자유’를 묘사 했다. 한마디로 요즘 많이 회자되는 ‘카르페 디엠’(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적 삶의 진수라고 하겠다. 은퇴를 앞둔 한국 50대 남자가 가장 많이 읽고 사랑한다는 이 소설은 MBN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이 롱런하는 이유와도 유사한 면이 있을 것이다. 주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눈치 보지 않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자기만의 독립적 삶을 영위하는 것, 원시적인 생활 등에 위안을 얻었응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닥치는 대로 아무 일이나 하죠. 발로도 하고 손으로도 하고 머리로도 합니다. ...(중략)... 당신도 물레방앗간 집 마누라 궁둥짝 보고 철자법을 배우겠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물레방앗간 집 마누라 궁둥짝 말이야, 인간의 이성이란 그런 거지 뭐.”(23쪽)
“ 산투리를 다루게 되면서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지요. 기분이 좋지않을 때나 빈털터리가 되었을 때는 산투리를 켭니다. 그러면 기운이 나지요. ...(중략)... 정열, 그게 바로 정열이란 거요.”(26쪽)
“그의 가슴은 살아있었고, 입은 크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내며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어머니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였다.”(28쪽)
“ 기분 내키면 켜지요. 내 말 알아듣겠소? 마음 내키면 켠다 그 말이요. 그리고 당신이 바라는 만큼 일하겠소. 거기에서 나는 당신 사람이니까. 하지만 산투리는 달라요. 산투리는 짐승이니까. 짐승에겐 자유가 필요해요. 제엄베키코, 하사피코, 펜토잘리도 출 수 있소. 하지만 처음부터 분명히 해두겠는데, 그건 마음이 내켜야 하는 거요. 또 분명히 말하지만 나한테 윽박지르면 그때는 전부 다 끝장이 나는 거요. 당신은 결국 내가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겁니다.”(30쪽)
“조르바는 학교 문 앞에도 가보지 못했고 그 머리는 오염된 적이 없다. 다만 온갖 것을 다 경험한 그의 마음은 열려 있다. 가슴은 원시적인 배짱을 그대로 갖고 있고 잔뜩 부풀어 있다. ...(중략)... 뱀은 늘 어머니인 대지와 접촉하고 동거한다. 조르바도 이와 같다. 우리들 교육받은 자들이란 공중을 나는 새처럼 골이 비어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110쪽)
이 소설은 그리스 지배종교인 그리스정교에 대한 비판의 끈을 늦추지 않고, 부타와 불교의 잠언으로 종교적 해탈을 찾아간다. 작가가 서양 기독교의 대안으로 불교를 공부하고 선택한 것은 분명하다고 느껴졌다. 이 대목에서 조금은 몰입되지 않은 점이 있었다. 예수나 부처의 삶은 위대하다. 그것이 권력을 만나 제도화, 통치이데올로기로 작동하면서 문제가 된 게 아니겠는가. 불교를 통치이데올로기로 세운 고려, 태국, 네팔, 라오스, 캄보디아 등이 이상국가라고 하기는 어렵다. 카잔차키스는 조르바가 참전한 잔학했던 전쟁 경험을 묘사한 후, 민족주의가 분쟁과 전쟁의 주원인이라고 정리하고, 조르바의 절규를 통해 탈민족주의를 강조한다.
“창조의 빛을 잃어 버린 종교에서 모든 신은 결국 인간의 고독처럼 시의 모티브가 되거나 벽면을 치장하는 예배 용품으로 전락했다. 말라르메의 시에서도 그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가슴 타오르는 열망이 씨앗이 되어 대지와 완벽하게 만난 것 같았지만 완벽하게 머리로만 씨앗을 키워내는 지적 놀음, 교묘하면서도 덧없는 구조물이 되어버린 것이었다.(229쪽)
“부처에겐 스스로를 비운 ‘순수한’의 영혼이 있다. 그의 내부는 비어있고 그 스스로가 바로 공空이다.”(230쪽)
“내게는 저건 터키놈, 저건 불가리아놈, 이건 그리스놈 하며 구별해 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두목, 당신이 들으면 머리카락이 곤두설 일도 나는 조국을 위한답시고 태연하게 했습니다. 나는 사람의 목도 따고 마을에 불도 지르고 강도짓도 하고 강간도 하고 일가족을 몰살하기도 했습니다. 뭣 때문이냐고요? 그들이 불가리아놈이나 터키놈이었기 때문입니다. ...(중략)... 요새 와서는 이 사람은 좋은 사람, 저 사람은 나쁜 사람, 이렇게 보지요. 그리스인이든 불가리아인이든 터키인이든 개의치 않습니다. 요새 내게 문제가 되는 것은 좋은 사람이냐, 나쁜 사람이냐 하는 것뿐입니다. 나이가 더 들게 되면-마지막으로 입어 들어갈 빵 덩어리에다 놓고 맹세합니다만-이것도 개의치 않을 겁니다.좋은 사람이든 나쁜사람이든 나는 모두 불쌍해요. 모두가 똑 같아요.”(385쪽)
과거 서양문명의 발상지였으나 강대국에 둘러 쌓여 헬레니즘 전성기 이후 2천년간 독립을 유지하기는커녕 침탈과 전쟁이 반복된 그리스, 대한민국의 지정학적 운명과도 유사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그에게 ‘자유’는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이었으리라.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는 나에게 인생에서 진정 자유롭다는 것은 무엇인지를 깊이 성찰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카잔차키스가 남긴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