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승리하는 한해가 됩시다. / 2016년 1월 3일 주일 예배
본문 / 야고보서 4:1-10
2016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사람들은 연말연시가 되면 세월의 빠름과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게 됩니다. 세월과 함께 자신의 인생이 빨리 흐르고 있다는 두려움을 갖게 되고 그 허무함을 잊기 위해 인생들은 함께 모여 슬픔을 노래하고 술과 오락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허무하고 무상하지 않습니까? 나는 이 세상에 사는 게 너무 좋아 라고 말하는 사람은 세상에 소망을 두고 세상이 주는 즐거움에 취해 있는 사람인도 모릅니다.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는 성도에게 세상은 그렇게 살기 좋은 곳은 아닙니다. 시편 기자는 89편 47절에서 “나의 때가 얼마나 짧은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사람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 이르고 94편 11절에서는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신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세상에 소망이 없는 존재입니다. 타락한 인생들이 세상에서 짧은 인생을 살다가는 동안 허무함과 절망과 심판을 잊기 위해 세상의 썩어질 가치와 영광과 힘에 소망을 두고 그것을 얻기 위해 열심을 내지만 다 헛짓에 불과합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 권세를 누리다 죽어서 그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르고 역사에 기록이 된다면 그 인생이 죽어서도 영광을 받겠습니까? 평생 돈 걱정 없이 재벌로 부귀영화를 누리다 성공한 인생으로 존경을 받다 죽으면 그 인생이 영화를 받겠습니까?
다 쓸데없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수 만 명이 모이는 교회의 담임목사가 된다면 그것이 저를 몇 날이나 기쁘게 할 수 있을까요? 제가 정욕과 탐심을 비운 것은 아니지만 영원한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세상은 허무함 뿐입니다.
집에 대한 욕심도 사라지고, 더 좋은 차도 필요 없고, 그저 내게 허락하신 삶에 감사하며 언제 주님이 날 불러 주실지 그 날을 소망하게 됩니다. 이 허무하고 소망 없는 세상에서 죄악으로 고통 받는 인생이 그 육체를 벗고 영원한 자유를 누리는 구원을 소망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2016년 한해를 맞이하며 어떤 계획을 세우셨습니까? 어떤 소망을 갖고 계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인생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까요? 벌써 지난해가 되었습니다. 2015년 12월 31일 새벽 기도회를 마치고 아침 기사를 읽다 또 한 번 인생의 무상함을 보았습니다. 2015년 마지막 날 어떤 젊은 20대 임신부가 택시를 타고 가다 음주 운전가가 일으킨 교통사고로 만삭의 엄마와 아이가 사망한 사고입니다.
신혼부부가 첫 아이를 갖고 얼마나 기뻤을까요? 태어날 아이를 기다리며 행복한 삶을 그렸을 것입니다. 그들은 새해에 어떤 계획을 세웠을까요? 그러나 자신의 의지와 계획과는 관계없는 일들이 인생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알지도 못 하는 사람과 그 불가항력적인 힘에 의해 인생의 모든 것을 내려놓을 줄은 아무도 알 수 없었습니다.
세상에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인생의 꿈과 희망을 노래하던 사람들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 인생을 끝내야한다면 그들은 억울하지 않을까요? 세월호에 갇혀 기울어져 침몰해 가던 객실 안에서 학생들이 절규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꿈이 있는 데, 왜 배를 이렇게 조정해서, 나는 하고 싶은 일이 많은 데! 라며 절규하는 그 모습을 보지 않았습니까?
나는 지금까지 죽지 않고 이 나이까지 살았으니 운 좋은 사람,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인생을 창세전에 계획하셨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세계관으로 인생을 보면 죽고 사는 것은 다 하나님의 계획이며 뜻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시고 인생들을 역사 속에 던지셨습니다. 이 역사의 시간 안에 왜 인생을 던져 넣으셨을까요? 무엇을 하라고 이 소망 없는 세상에 집어넣으신 것입니까?
제 인생이 믿음이 약해져 방황할 때에는 삶의 의미와 목적을 잃어버립니다. 그때 저는 육체의 정욕과 세상의 탐심을 쫒아 인생을 살아갑니다. 헛짓을 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정욕과 탐심을 이루기 위한 그 죄악 된 삶이 잠시 육체에는 쾌락과 희열을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짧은 인생의 만족을 위해 영원하고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대가로 지불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거래이며 미련한 짓입니까? 요즘 위안부 협상 때문에 여론이 들끓고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100억으로 역사를 팔아먹었다고 말입니다. 그 값이 너무 싸서 분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나라의 아프고 수치스런 역사를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는 자들에게 돈 몇 푼에 자존심까지 넘겨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도는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더 형편없는 거래를 하기도 합니다. 마치 막대사탕 하나로 유혹하는 유괴범을 따라가는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엄마가 단단히 일러도 소용없습니다. 너 이상한 아저씨가 사탕이나 과자 사 준다고 따라가면 절대 안 된다. 엄마의 훈계에 대답은 잘하지만 유혹을 만나면 엄마의 말씀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예쁜 아이구나, 말도 잘 듣게 생겼네, 아이스크림을 건네주며 손을 내밀면 그 손을 잡고 따라가는 겁니다. 저는 아직도 영적으로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어린아이가 아닌 가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때때로 그 달콤한 유혹에 손을 잡았기 때문입니다. 그 죄악을 따라가 타락하여 주님이 나를 다시 찾느라 얼마나 해매이게 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 죄악의 자리까지 찾아오신 주님을 보고 회개하게 됩니다.
안목의 정욕과 탐심 때문에 말입니다. 성도는 마귀의 유혹을 따라갑니다. 찾아오신 주님을 만나 회개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죄악에 끌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앞에서 왜 하나님은 인생을 계획하시고 그들을 역사 속으로 던지셨을까요? 질문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택한 성도들을 드러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사는 법을 배우길 원하십니다.
성경은 이 세상에 던져 진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성도가 있다고 증언합니다. 그들은 세상이 창조되기도 전에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로 예정된 사람들입니다. 로마서, 에베소서, 베드로의 증언이 그렇습니다. 그 택한 성도들은 세상의 역사에서 반드시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잃은 양을 찾아 구원하기위해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복음의 진리는 그들을 찾아내어 그들 안에 있는 어둠을 몰아내고 생명의 빛을 비추이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예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택한 성도이면 우리는 그런 과정을 통해 이 자리,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부름이 단순히 교회생활을 하고 직분을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외적인 증거들은 내적 증거를 보증하지 못합니다. 성도에게는 내적인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성도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그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성도 안에 들어와 역사합니다. 그 은혜는 이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그 말씀을 믿게 하고, 그 나라를 소망하게 하고, 인생의 고난을 인내하게 하며, 믿음으로 승리하게 하는 능력으로 역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지배 받고 그 은혜에 순종하는 삶이 택한 성도의 믿음입니다. 성도는 그런 삶을 통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성도의 삶을 배우게 됩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소망을 향해 가는 성도에게 여전히 정욕과 탐심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은혜가 없는 사람들은 정욕과 탐심만을 섬깁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는 사람은 세상 사람입니다. 양심은 그들에게 도덕과 윤리적인 삶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그것을 버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에 속한 자들은 오직 자신을 위해 살고 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도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에도 이 세상에 대한 정욕과 탐심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죄는 정욕으로 발생됩니다. 야고보는 싸움과 다툼이 정욕과 욕심에서 나오며 그 정욕에서 살인, 시기, 다툼이 일어나고 있다고 증언합니다.
정욕은 세상을 사랑하게 하고 그것은 결국 자신을 섬기는 죄악을 낳게 하여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을 향한 모든 인간의 꿈, 소망, 기대와 욕심이 다 타락한 인간의 정욕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인생을 주시고 그들의 정욕을 이루라고 세상에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좋은 꿈과 소망이 있던 어떤 사람이 그 꿈과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고 못 이룬 그 인생과 꿈 때문에 슬퍼할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머리 좋은 인재가 그렇게 떠나면 더 크게 슬퍼합니다. 그가 이루지 못한 꿈을 아쉬워합니다. 여러분의 꿈과 소망은 무엇입니까? 이 소원만 이루어지면 죽어도 좋다 하는 소원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성도라면 여러분은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소망으로 기뻐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자랑하며 그것으로 기뻐하는 사람은 또 그것 때문에 절망하는 사람은 성도가 아닙니다.
성도의 슬픔과 괴로움은 자기 안에 있는 정욕이 내 안에서 세력을 키워 나를 지배하고 내 몸 밖으로 죄가 되어 나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가 소멸되어 가는 그 모습을 지켜볼 때, 그때 성도는 괴로운 것입니다.
바울은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입니다.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십시오” 기도합니다. 성도라 할지라도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죄의 지배를 받으면 나중에는 죄에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어둠의 권세 아래 있게 됩니다.
성도의 괴로움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거룩한 은혜가 있음에도 정욕이 여전히 도사리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왜 하나님은 성도에게 생명의 은혜를 주실 때 정욕을 완전히 제거해 주시지 않으시는 걸까요? 성도는 자신 안에 있는 정욕과 탐심을 완전히 뽐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성도는 죄의 종노릇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금식 아니라 그 어떤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도 안에 있는 정욕과 탐심은 이 세상에 있을 동안 완전히 제거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십니다. 그러면 어떤 믿음의 싸움에도 정욕과 탐심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성도의 기도와 믿음의 싸움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성도에게 은혜를 주시면서 정욕을 그대로 두시는 것은 생명의 성령의 법인 그 은혜로 사망의 법인 그 정욕과 싸우는 삶을 살게 하기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믿음을 연단하기 위해 가나안 땅에 이방인을 남겨놓은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전쟁을 통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배우는 겁니다.
자신 안에 있는 죄의 근원인 정욕과 싸우는 그 싸움이 은혜 받은 성도의 믿음입니다. 야고보는 두 마음을 품은 성도들을 향해 말씀합니다. 성도는 두 마음을 품은 사람입니다. 한 마음을 품으면 세상 사람입니다. 성도에겐 두 마음이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하는 거룩한 마음과 내 뜻과 정욕을 이루고자하는 죄악 된 마음이 존재합니다. 그 두 마음이 성도 안에서 전쟁을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 내시고 그들을 군대라고 말씀하십니다. 군대는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군사입니다. 내 안에 생명과 은혜로 와 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내 안에 남아있는 정욕과 탐심과 치열한 영적 전쟁을 행하는 믿음의 군사입니다.
바울은 그 싸움을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고 증언합니다. 성도 안에서 일어나는 그 믿음의 싸움이 얼마나 치열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슬퍼하며 애통하라 웃음을 애통으로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꾸라 명령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벌이는 영적 싸움을 통해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내 안에 생명과 은혜로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의지하지 않으면 곧바로 정욕으로 타락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언제라도 주님을 붙들지 않으면 타락할 수 있는 연약한 인생임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잠시라도 은혜를 떠나면 죄의 노예와 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의 역사에 던져진 성도의 인생은 내 안에 생명과 은혜로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의지하며 섬기고 순종하는 믿음으로 살아야 승리함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믿음을 배우고 오라고 성도를 세상에 보낸 것입니다.
육체의 꿈과 소원을 이루기 위한 인생이 아닙니다. 성도 안에 있는 은혜와 정욕은 성도의 순종을 먹고 자랍니다. 성도가 정욕에 굴복하지 않고 은혜에 순종하면 정욕은 아무 힘과 능력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성도가 은혜에 순종하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가 정욕에 굴복하면 그 정욕이 성도의 은혜를 소멸하게 되고 성도는 기쁨과 평안을 잃게 됩니다.
야고보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라 말씀합니다. 그 마음에 예수님의 은혜와 생명이 없는 인생은 세상을 다 가져도 허무하고 불쌍한 인생입니다. 그런 인생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안에 은혜와 생명이 있나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은혜에 순종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정욕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은혜를 외면하고 정욕을 받들면 소망 없는 인생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해에는 정욕에 굴복하는 그 연약함과 불신앙과 싸워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의 은혜와 그 생명의 말씀에 순종하면 올 한해도 승리의 영광이 있을 것입니다.
2016년 저와 여러분 모두가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그 치열한 영적 전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말씀으로 승리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고 경외하는 믿음을 배우는 복 된 한해가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