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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案山 : 朱雀)은 주산(主山 : 玄武)·청룡(靑龍)·백호(白虎)와 함께 풍수학상의 네가지 요소 중 하나이다. 조선의 주산은 북악산이고 청룡은 인왕산, 백호는 낙산이며 안산은 남산이다. 수락산과 불암산은 한성의 동북쪽에 남북으로 마주 서있다. 전설에 의하면 "수락과 불암이 조선의 도읍지 한양 땅 안산(案山, 남산)이 되기 위해 금강산에서부터 쉼없이 달려왔다"고 했다. '용 꼬리보단 뱀의 머리'라고, 천하절경 금강산에서 홀대를 받느니, 신도(新都) 한양에서 대접 받는 봉우리가 나으리라 해서 였다고 하지요. 한양에 임박해 남쪽을 바라보니 어느 봉우리가 한양의 남쪽을 차지하고 있는 게 아닌가 비로 남산이다. 화가 난 두 산은 울화통이 터져 다시 금강산으로 갈수는 없고 그냥 한양을 등지고 돌아섰다는 이야기 입니다. 하긴 그런 희망도 사라졌으니 무슨 면목으로 다시 금강산으로 돌아가겠습니까?. 그때부터 두산을 보고 사람들은 반역의 산이라 했답니다.
대성에서 만난 사람들의 번개모임에서 오산종주를 계획했다 했다. 그것을 하루에 하는것은 무리이고 대충 3회에 나누어서 한다는 계획입니다. 첫 구간을 불암산과 수락산으로 정했졌고. 공릉역에서 원자력병원을 옆으로끼고 공릉산 백세문이라 쓰여있는 게이트를 통과하면서 산행이 시작 되었습니다. 그리고 불암산 정상 덕릉고개 도솔봉 수락산 정상을 거쳐서 도정봉 동막봉 그리고 회룡역까지 서울에서는 쉽지 않은 긴 코스를 산행하였습니다. 사실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해보니 어렵네요 당일로 오산종주하시는 분들 대단합십니다.
한마디로 어마어마 했습니다. 만보계에 산행포함한 어제 걸은 걸음수가 4만보를 돌파했다고 나오지요. 그만큼 힘들었답니다. GPS상 거리가 18.69Km 시간은 7시간30분이 소요 되었습니다. 집에가서 잠을 자는데 옆사람 말이 자면서도 힘들다는 말을 3번이나 했다네요 정말 힘들었답니다.
오산종주는 불암산 부터 시작합니다. 예전에는 갈비집이 많은 45번 버스 종점 앞 남양주 별내에서 시작했지만 공릉역도 길이로 보면 그곳에 못지 않지요 그리고 대원들을 만나기 쉬운 곳은 전철역이 제일이잔아요.그래서 공릉역 2번 출구를 택했답니다. 이곳에서 약 1.5Km정도를 걸어올라가면 산입구가 나옵니다.
무슨 절의 일주문인가 생각했는데 글을 보니 "공릉산 백세문"입니다. 공릉산은 불암산의 다른 이름이고요 이곳을 통과하여 불암산에 오르면 100세까지 살수 있다고 해석해봅니다.
우와~~~
고속도로입니다
경사 좋고 포장도 살짝되어있고
산행치고는 감탄입니다
좌우로 철망으로 막어 놓았네요
좌측은 한전 연수원이고요 오른쪽은 태릉 선수촌입니다
예전 70년대 불암산 남쪽 태능 일대는 돼지갈비와 먹골배로유명했답니다. 물론 지금은 몇 집만남아 그 명맥을 시원찮게 유지하고 있지만 말이다. 영월로 쫓겨나 살고있는 단종에게 사약을 갖고 간 금부도사 왕방연은 단종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으로 한양으로 돌아오자 마자 벼슬길에서 물러나 봉화산 중랑천가 먹골(먹굴, 현재의 묵동으로 먹을 만들던 동네)에 자릴 잡고 살면서 필묵을 벗하며 배나무를 키웠다고 합니다. 왕방연은 단종이 승하한 날이면 수확한 배를 광주리에 담아 영월 쪽을 향해 놓고는 절을 올렸다 전하고 있습니다. 혹 백성들의 단종에 대한 애끓는 동정이 왕방연에게 향할까 보아서 집안에서 그럴 듯하게 먹골배 얘길 포장했는 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봉화산 아래 먹골에서 재배되던 배나무가 일제 말기 신내동, 중화동, 성북동으로 옮겨 가더니 해방 후 태능과 구리 방향으로 퍼집니다. 이제는 모두 아파트가 되었으니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내일모래가 설날인데아직도 추울줄 알고 옷들을 껴입고 왔는데 산행은 다르지요.
모두들 껍질을 벋겨내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전망이 좋은곳은 서울을 잘 보여줍니다. 그곳에서 바라본 남쪽입니다. 아마 아차산? 그산 너머로 랜드마크 롯데타워가 보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가야할 불암산 정상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많이 올라 왔나 봅니다
삼육대 내려가는 이정표입니다
아마 이곳이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가 되는곳일 것입니다
조금더 올라서니
서울의 북쪽 신내동에서 상계동 아파트 숲들이 끝이 없네요
그리고 다시 바라보는 불암산 정상입니다. 불암산 (佛巖山, 508m) 은 정상의 바위능선이 부처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불암산은 筆岩山, 天寶山 등으로도 불려지기도 했는데 이는 우리나라가 儒佛仙의 도량이었던 까닭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토속신앙에 불교사상이 합쳐지고 거기다 새로운 학문인 유교가 접목되면서 천보산은 도교, 필암산은 유교, 불암산은 불교 등으로 각 종파에 따라 산이름을 다르게 부르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보입니다.
이곳은 불암산 봉수대 터입니다.
사실 이곳은 불암산성지 터이지요
불암산성지(佛巖山城址), 백제한성 시절, 고구려 장수왕은 백제의 개로왕을 죽이고 한강 유역을 차지하며 '남평양'이라 했다지요. 개로왕의 아들 문주왕이 웅진(현 공주)으로 천도한 후 세월이 흘러 부여로 다시 천도한 백제 성왕은 신라와 연합해 다시 한강 유역을 차지하지만 이내 신라 진흥왕의 배반으로 한강유역을 신라에 내주고 맙니다. 신라는 이 지역을 '한산주'라 명명하며 북한산 비봉에 순수비를 세워 경계로 삼으니 그 이후론 한강 유역은 신라의 영토가 돼지요. 테뫼식 산성인 불암산성을 누군가는 고구려의 보루 형태의 진지라 하기도 하고 또 신라의 성이라고도 했답니다. 고구려가 보루로 쓰던 곳에 신라가 성을 쌓으니 이 말도 옳고 저 말도 옳겠네요. 불암산성은 몇 해 전에 발굴조사가 이뤄져 신라시대 산성으로 규명합니다. 당시 발굴조사 때 고구려와 신라의 유물이 다량으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이제 바위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정상이 다가 온다는것이지요
움막산장인 거북산장이 보이네요
그럼 거북바위가 있어야하는데
여기가 거북바위랍니다. 앞쪽에 살짝 보이는 것이 머리부분이고 넓찍한 등이 나타나는데 전체적으로 보니 영락없는 거북모습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쉬는 곳인데 그냥 올라가는 사람들이 더 많았지요
이곳은 몇년전만 해도 밧줄에 의지해 힘들게 올랐던 암벽이었지요. 때로는 무서워서 산행을 포기하고 돌아 가는 사람도 있었지요
요즘은 목계단을 만들어 오르기 편하게 되어 있지지요.
등산하는 사람이 많으니 나라에서 그만큼 서비스 해주는것입니다
오산종주하는 우리식구 들도 나란히 계단을 오르고 있는 모습입니다
저 멀리 불이 났나요?
이제 마지막 계단을 통과합니다
바위 전체가 부쳐를 닮았다는 불암산 정상입니다
508m 이정상석은 만든지가 얼마안되지요
예전에는 이국기봉에 올라 인증하고들 했는데
이제는 꼭 그럴 필요까지도 없지요
이제 가야할 수락산 방향을 조망해봅니다
쥐바위도보며 내려옵니다
정상을 내려오니 석장봉 삼거리입니다 석장봉은 봉우리 전체가 한 덩어리의 돌이고 정상이 긴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서 바위의 기세가 장수와 같아 그렇게 이름 붙여졌다 합니다. 석장봉 정상 주변 바위엔 온통 민간 신앙을 표현한 구멍과 알터와 감실로 뒤범벅이니 그냥 평범한 바위는 아닐듯하다. 우리 박석창대장님이 자기이름과 비슷하다고 갔다가 되돌아 왔지요
이제는 덕릉고개로 향합니다
덕릉고개에는 군부대가있지요
제가알기는 주로 예비군을 훈련시키는 부대가 안닌지?
하여간 이 톱니 바퀴를 본지가 20년은 넘는듯합니다
'덕릉'이란 이름은 조선 제14대 왕인 선조의 아비 덕흥대원군의 묘소를 높여 부른 이름인데, 아비를 왕으로 추존하고픈 선조의 소원을 조정이 거부하자 이곳 고개에 있는 주막에 밑에 마을에서 오는 객들에게 "어디서 오셨우"하고 물으면 "덕릉에서 왔어요" 하면 국밥을 공자로 주었답니다. 국밥 때문에 모두들 덕릉이라 했다지요. 그 기간이 오래되자 자연스럽게 백성들이 덕릉으로 부르게 되었답니다.다.
덕릉이 있는 덕릉마을 이고개에서 약800m 아래에 있는데 동편 능선엔 산신각이 있고, 서편 능선엔 덕흥대원군과 그 후손들의 묘들이 놓였다. 산신각과 묘소 사이 평탄하고 아늑한 골짜기에 덕릉마을이 자릴 잡았답니다. 덕릉마을 앞으로 불암산, 뒤론 수락산 등 사신령(四神靈)이 마을을 잘 보호하는 명당지처가 분명하다 합니다.
덕릉고개능 지금은 수락산과 불암산을 연결하는 생태다리로 연결되어
야생동물들이 로드킬로 부터 보호 역활을 합니다
덕릉을 지나면 이제부터는 수락산입니다
수락산도 역시 처음에는 철망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철망은 군부대 방어시설이구요
천수장? 수목장의 표시를 이렇게 한듯하네요
기왕이면 만수도 있고 억수도있는데 왜? 천수로 했을까?
만수는 중국 황제가 쓰는 말이랍니다
조선의 왕들도 가장 길게 쓸수있는 기간이 천수랍니다
그러니 이분도 중국황제의 눈치를 보느라 천수를 사용한듯하네요
즐거운 식사시간입니다
우리 모임은 잘 먹기로 유명합니다
오늘따라 정말 푸짐합니다
배를 채웠으니 다시 산행을 합니다
날은 참 좋네요
우측으로 내려가면 흥덕사와 덕릉마을이 나옵니다. 덕릉마을에는 덕릉이있는데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의 무덤을 이컷는 무덤이지요 덕흥대원군의 이름인 이초는 중종과 창빈 안씨 사이에 3남, 중종에겐 7번째 막내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이초는 13세 때 정인지의 증손녀와 결혼해 하원군 이정, 하릉군 이인, 하성군 이균(훗날 선조 임금) 3남을 둡니다. 명종 14년(1559년) 30세에 죽어 지금의 자리에 묻혔답니다.
덕릉 근처에는 천년고찰 흥국사(興國寺)가 있는데 흥국사는 신라 진평왕때 화랑의 세속오계를 쓴 원광법사에 의해 창건됐답니다. 원광법사는 절 이름을 '수락사'라 짓고, 산도 '수락산'이라고 명명했다. 흥국사란 이름은 선조가 아비 묘소의 원당사찰로 지정하며 흥덕사(興德寺)로 개명했고, 인조 때 이르러 지금의 이름인 흥국사로 또 개칭했다.어쩌거나 수락산이란 이름이 탄생한 근본이 흥국사 였다는 말입니다
미륵보살의 주재처라는 도솔천과 수락산 남단 봉우리인 도솔봉, 그 둘은 같은 의미일까? 나는 같다고 본다. 왜냐하면 도솔봉 기슭에 학림사, 용굴암, 수암사, 도선사, 영원암, 불일암 등 중생구제를 목표로 하는 종교시설이 수없이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도솔봉 입구에는 이런 주술적 석조물들이 보이지요
미처 구원을 받지 못한 중생을 제도(濟度)하기 위해, 석가모니불 사후 56억 7천만년만에 지상에 내려와 세 번의 법회 후 Happy World(용화세계)를 만든다는 미륵부처, 그 미륵부처가 부처가 되기 전 주재처가 바로 도솔천이다. 아마 예부터 이곳은 종교의 자유지대로 온갖 신앙들이 풍요를 누렸을 일이다. 그래서 당고개역이란 이름도 생기지 않았을까?
도솔봉 정상석입니다
멀리 북한산과 도봉산 선인봉이 아스라하다. 미세먼지? 황사인데 언제부터 미세먼지가 되었다.고려와 조선 시대엔 '흙비'라고 하여 지배층에 대한 하늘의 진노로 여겨서, 하늘이 진노해 흙비를 내리면, 조선의 임금들은 근신의 의미로 감선(減膳, 수랏상에서 반찬 가짓수를 줄임) 또는 철선(徹膳, 수랏상에서 고기반찬을 뺌)을 명하고 하늘의 진노를 푸는 제를 올렸다는데 지금 우리임금은 도데체 뭐하는 사람인지?.
수락산엔 수락8경이 있다. 그 중 8번째가 '선인봉 영락대'다. 도봉산 선인봉을 바라 볼 수 있는 멋진 전망대, 그 곳에서 '선인봉을 즐겁게 맞이한다'는 의미다. 정말로 멋진 전망대이다.
수락산에는 바위의 이름을 붙이는 것도 해학적이 것이 여려개 있다 엄청 큰 바위속에 조그만 바위가 하나 붙어있는데 종을 닮았다나 그래서 종바위입니다. 또 코끼리바위라 해서 커다란 바위를 아무리 쳐다보아도 그모양을 그릴수 없는데 바위 꼭데기에 조그만 바위가 올려져 있는 모양이 코끼리를 닮았다나?
수락산 상봉인 주봉(主峰)의 정상 창문바위(관통바위), 우리 어렸을때는 창문바위 상단 움푹 패인 곳에선 늘 파리가 들끓고 막걸리 냄새가 진동했었다. 아마 무속인의 해원과 상생을 바라는 기도행위였을 법하다. 그 이유는 정상 관통바위가 모든 소원을 들어준다는 주술적 의미를 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음력 정월 초하루에서 보름 사이, 관통바위의 구멍을 통과하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신통방통한 설이 있었단다.
소원성취가 힘든것인가요. 창문바위 통과하기가 쉽지 않지요
소원이 많은 사람은 통과하기가 쉽지 않지요
작년인가 어떤 정신 이상자가 수락산의 시설물들을 훼손했다고 신문에 기재된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지도 모양을 한 수락산주봉이라쓴 흰색 돌비석을 그 정신이상자가 파네서 벼랑아래로 던져 버렸다네요, 그후 검은돌로 정상석을 세웠는데 정상에서 장사하시는분이 벼락밑에서 그 정상석을 찾아 제자리에 설치하여 정상석이 2개가 되었답니다
정상은 지났지만 수락산의 백미는 지금부터입니다. 수락산을 대표하는 명물인 기차바위입니다. 홈통바위라고도 부르며 100m가량 되는 대암벽 슬랩입니다. 매끈한 슬랩 가운데에 기찻길처럼 홈이 나있어 이름이 유래했나봅니다. 국내산 워킹 코스 중에서는 가장 긴 계단 없는 슬랩이라 초보 등산가들이 눈물을 터뜨리는 걸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만큼 고도감이 슬램입니다
정상석을 파손한 그정신이상자가 여기 로프도 끊어 버렸답니다
그래서 상당기간 기차바위의 등반이 폐쇄되었답니다
그후 의정부 시에서는 엄청 굵은 밧줄로 새로 설치했답니다
탱크라도 당길 수 있을 것 같은 굵은 고정로프를 붙잡고 서면 다 내려갈때까지 도망칠 곳이 없습니다. 지금은 중간에 듬성듬성 눈이 있어서 끝까지 조심해야 합니다. 눈이 없으면 압도적인 고도감을 쾌감으로 즐기며 내려설 수 있습니다. 놀이동산의 하이라이트인 롤러코스터처럼 수락산 산행의 즐거움의 정점에 있는 것이 기차바위입니다.
이제는 도정봉입니다
도정봉 옆 바위산입니다
아래 볼만한 바위가 있는데 남녀가 보기 좋아 그냥 통과하고
도정봉에 올라섭니다
도정봉 정상석 역시 그 정신병자에 의하여 훼손되었답니다
그래서 문패없는 정상이 되어 버렸네요
일부대원들이 저기보이는 불곡산을 보며 작당모의가 있지요
내일 저녁 비박과 위로 공연이요
추운데....
오산종주 원정대 9명의 기념사진입니다
총3구간중 첫구간이 마무리 되어가지요
그기념 사진입니다
동막봉을 지나고
하산길도 쉽지 않고요
짧지도 않아요
왜이리 동막골은 안나오는지
아직도 370M 남았다는데
다리는 풀리고요 힘은 빠지고
300m가 3Km같이 느껴지네요
그래도 사람의 다리가 대단함을 느끼며
드디어 동막골입니다
보기 힘든 물까치 떼가 우리 완주를 축하하러 오셨네요
고맙습니다
그리고 회룡역 기나긴 산행을 마무리합니다
모두들 수고 하셨습니다
다음주 도봉산구간이지요
여기서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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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참 멋지세요들~~~잘읽고 즐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