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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노인 일기.
치매노인 일기의 프롤로그
오늘도 아파트 뒷산에 오른다. 야트막한 산길을 지팡이에 의지하여 보행 장애인 다리를 끌며 힘겹게 30여분을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한발 한 발 걸어 오르면 전망대가 있고 몇의 벤치가 있는 쉼터가 있다.
오솔길에는 언제나 낙엽이 계절에 따라 붉은 황토를 덮고 있다. 가을이면 발목을 덮을 정도 싸여있지만 이른 봄이 지나면 황갈색의 병든 낙엽들이 한 장 두 장씩 황토위에 덮어간다.
나는 한번 씩 손바닥만 한 떡갈나무낙엽 을 주워들고 치매와 중풍으로 병든 자신과 너무나 유사함을 살펴본다. 낙엽은 생명을 다한 주검 그자체이다.
벌래먹은 노란색의 낙엽에 있는 조그마한 구명사이로 세상을 본다. 산 까치 한마리가 날개짖을 하며 앞산으로 날아간다.
나뭇잎은 새싹으로 움터 자라면서 햇빛을 받아 나무를 자라게 하는 광합성을 하는 공장이다. 그 기능이 병들어 상실되면 내 얼굴과 같이 검은 점의 반점을 남기며 황갈색으로 변하여 아침서리에 몰아치는 찬바람에 오솔길 위를 떨어져 흩날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한겨울 삭풍에도 떨 구지 않고 바싹 마른 많은 나뭇잎 은 잔류영양을 빠짐없이 회수한 다음 이듬해 봄에 싹을 틔울 눈이 마르지 않게 보호해주기 위해서다.
우리는 이것을 그냥 참나무라고 부르며 가을철에는 아주머니들이 도토리를 주어라고 가끔 나무아래를 헤치고 있는 것 을 볼 수가 있다.
치매 장기요양 3등급에 중풍과 심부전의 시한부 인생을 앞둔 내 인생도 낙엽처럼 검은 점의 반점을 남기며 떨어져 죽음을 받아들어야 함은 당연한 자연의 섭리 인 것이다.
나는 작년겨울 초 처음으로 심한 심부전의 고통을 겪었다. 운동을 하지 않아도 호흡이 곤란하고, 발등과 발목이 부어오르며 음식의 섭취와 배변에 불편을 느꼈다.
변비약의 복용에도 배설되지 않아 글리세린과 고무장갑으로 수지관장을 해도 출혈만 되어 병원으로 찾아가기도 하고, 중풍의 유휴증인 보행 장애 때문에 지팡이에 의지하여 두 다리를 끌면서 걸어야했다.
그때부터 더욱 힘들게 뒷산에 오르며 오솔길 사이사이 있는 한 아름 드리 높은 떡갈나무를 두 손으로 붙잡고 잠간씩 쉬면서 쉬면서 올라갔다. 앙상한 가지에 몇 개씩 붙어있는 나뭇잎을 보면서 저 것이 따 떨어지기 전에 이 황토 오솔길에서 내심장박동이 멈추어 달라고 염원하면서 걸었다.
오 헨리 마지막 잎새 를 생각을 하였다. 나의 염원과 젊은 화가 존시의 희망과 서로 반대의 입장인 것은 나는 고통과 절망으로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게 하여” “내생명이 끝나게” 해 달라는 것 이고,
화가 존시는 심한 폐렴으로 사경을 헤매면서 창문 너머로 보이는 담쟁이덩굴 잎이 다 떨어 질 때에 자기생명도 끝난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같은 집에 사는 늙은 화가는 이 사실을 알고서 비바람에 견디어내는 모조 나뭇잎을 그려 “떨어지지 않게 하여” 존시에게 “희망을 주어 회생 하게”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마지막 잎새가 빨리 떨어져서 이 고통스러운 삶을 끝내고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염원인 것이지만, 겨울 삭풍에도 떨어지지 않고 바싹 마른 많은 나뭇잎 을씨년스럽게 매달고 있는 것은 나에게는 오히려 원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누구인가 그 마지막 나뭇잎까지 다 떨어지게 한다면, 나 또 이 고통을 잊고 흙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라고 생각하였다.
산 높고 물 맑은 우리 마을. 1부
1.나의 어린 시절.
산 높고 물 맑은 우리 마을 에 움 터고 꽃 피는 봄이 왔어요.
높은 덕유산과 지리산에 둘러싸인 우리 마을은 물이 맑았다. 봄이 오면 뒷동산 진달래는 어우러지게 피었고 맑은 시냇물 속에는 피라미 들이 때지어 돌아다녔다.
여름한철 아이들은 맑은 시냇물 따라 물장구치며 뒹굴었고 황금빛나락들이 물결치는 가을에는 살찐 메뚜기를 잡으러 온 들판을 해매였다.
은빛 백설이 온 세상을 하얗게 덮은 겨울에는 미끄럼 타는 아이들의 소란으로 뒷동산이 한참 시끄러웠다.
거창읍 고택은 내가 태어난 집으로 노인들은 이방집이라고도 불렀다. 본체가 넓은 마루와 4개의 방으로 되어있으며 할아버지가 계시든 아래채 사랑방은 넓은 광으로 연결된 드높은 기와집이다.
본체와 아래채 사이의 넓은 마당은 항상 마사토가 깨끗이 깔려있었고 본체 부엌 앞에는 넓고 깊은 우물 샘이 자리 잡고 있었다. 본체 뒤에는 넓은 터 밭이 있어 철따라 풍성한 푸성귀를 길러 먹었고 이를 둘러싼 돌담장에는 가을이면 황금빛 호박이 주절이 달려있었다.
그렇게 넓고 큰 고택 때문인지 6.25 인민군에게 점령되었을 때 그들의 병원으로 사용되었고 그 결과로 미군의 수차례 폭격을 받았으며 우리 집 근처는 허리깊이의 넓고 깊은 웅덩이가 되어버렸다.
아버지는 일본운수회사의 간부로 부산 대구 등으로 출장을 자주 다니는 직장인으로 경제적으로 안정된 가정을 꾸렸었다. 나는 이집의 장남으로 어릴 때부터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뛰어놀며 자랐다.
그 당시 아버지는 상당한 자산을 모아 거창읍의 부자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지금 이야기로 주식도 많이 투자하여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며 주식배당금으로만 생활을 할 정도였다 한다.
6.25 부산 피난시절 당시 부산보수동에 있든 한전 주주 총회에 내가 대신 주주로 참석하여 은수저 두벌을 받아온 것을 아직 기억 하고 있다.
그리고 부산진시장 입구 2층 상가건물을 사서 세도 놓았고 읍에는 상당한 논과 밭도 소유 하고 있었다. 가을철 이면 농산물로 광이 가득 하였다.
쌀가마와 큰 독 몇 개 안에 주먹만한감이 가덕 쌓여 있었고 동이 몇 개는 개암이 한 독식 담겨져 있었다. 헛간 재속에는 밤과 고구마가 가득 묻혀 있었고 어머니는 덕석위에 온갖 나물을 말리고 있었다.
철없이 뛰놀든 45년 8월15일 내가 5살 때에 우리 집 앞 초등학교에 세워진 일본신사가 시벌 것 게 불이 타오르는 것을 보았고 앞집일본인들이 당황하며 이삿짐을 싸는 것을 보고 그저 이상하게만 생각했다.
평소 이웃인 일본인과 잘 지냈다. 일본 본국에 다녀온 부인이 일본에서 가져온 반투명의 주먹 만 한 푸른색 찹살떡 을 몇 개 주고 구워 먹으라 했다.
석쇠에 얹어 노랗게 구운 다음 두 쪽으로 가르면 하이 얀 속살이 나오고 당기면 길게 늘어진다. 설탕에 찍어 먹으면 정말 맛있었다. 이것이 일본 떡 인가 하고 어머니에게 물어본 기억이 아직 남아 있다.
앞집에 살고 있든 일본인들이 관사에서 물러가고 난 다음 신탁이나 반탁의 머리띠를 두른 청년들이 고성을 지르며 군청 앞에 모여 있는 것이 신기하여 따라다니며 구경하였고 큰집이 교회 앞 작은 집을 비우고 우리 집 건너편 학교사택인 큰집으로 이사 온 것 을 보고도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것을 적산 가옥이라 하였고 적산이란 적들의 재산이란 뜻 이였다. 학교교장을 하다 돌아가신 큰 아버지의 전직 이력이 선점할 수 있는 요건이 되었다는 것을 후일 알게 되었다.
8.15일 큰 태풍이 읍을 휩쓸어도 우리 집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아버지의 회사는 적산이 되어 국유화 가 되었고 능력을 인정받아 경영의 일부를 받게 되었다. 후일 이것이 대한통운의 모체가 된다.
47년 부모의 교육에 대한 극성으로 남보다 1년 앞당겨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넓은 운동장에 나란 이 서서 입학식을 마치고 교실에 들어가고 있는 그때가 아스라이 떠오른다.
1학년의 학교생활 에 기억에 남는 것은 젊은 선생님의 결혼식을 읍 변두리 시골집에서 하게 되었는데 신부를 실고 가는 등 의 일체의 택시비를 아버지가 부담하는 것을 보았다.
그때에는 상당한 비용으로 읍에 일본이 경영하든 택시가 2-3대밖에 없었다. 자식을 위한 큰 배려가 학교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망아지처럼 들과 산으로 그리고 강변으로 쫒아 다니든 나의생활에 올무가 걸린 것이다. 학교가 가기 싫었으나 어
머니의 빗자루 몽둥이 때문에 울며가기도 했다.
2. 할아버지 엄한교육으로 천자문을 다 떼었다.
그나마 선생님의 배려로 학교 가는 것이 적응 되는 과정에 나는 날벼락을 맞았다. 무서운 할아버지의 엄명이 내려 졌든 것이다.
학교에 다녀와 점심을 먹고 좀 쉬다가 앞집 3살 위의 사촌형과 천자문을 공부시키겠다는 것이다.
다음날부터 학교에 다녀와 점심을 먹은 뒤 잠간 쉬다가 넓은 대청위에 상을 놓고 무서운 할아버지 앞에 형과 나란히 앉아 천자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천개의 한자로 250개 문장으로 구성된 천자문을 외우고 쓰기를 했다.
일요일도 없었다. 늦거나 개으름 을 피울 수 없었다. 학교서 뛰놀든 피곤함과 식곤증이 겹쳐 졸기가 일수였다. 그 때마다 대청을 울리는 큰 고함소리에 자지라지듯이 깨어났다.
언젠가 공부 중에 졸고 있는 사촌형 머리를 할아버지는 장죽의 담뱃대로 내려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사촌형은 뒤로 쓸어 지면 서 두 손으로 머리를 잡고 도망쳤다. 담뱃대 끝이 부러 지면서 박이 터 진 것이다.
할아버지는 사촌형을 불러 머리에 조금 흐르는 피를 딱 고 된장을 바른 뒤 다시 천자문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지금생각하면 어이없는 일이라 하겠지만 그때에 우리는 그렇게 살았다. 머리 피부가 조금 찢어지면 박이 터졌다하면서 생된장을 조금 붙이는 것이 최선의 치료방법이었다.
그 후 몇 번 사촌형은 나에게 너는 할아버지가 사랑하여 매를 맞지 않고 공부했지만 나는 담뱃대 꼭지가 날아갈 정도로 맞아 박이 터졌다고 하면 나는 더 큰 벌을 받았다고 되받아 치면서 대청 위 대들보에 거꾸로 달렸든 것을 안보 앗느냐 하면서 반박했다.
오후 피로와 식곤에 의하여 졸고 있는 나에게 할아버지의 무서운 체벌이 떨어 졌었다. 아기 포대기 끈에 두발을 묶어 대들보 에 거꾸로 한참 달려있었다. 누구도 말릴 수 없었지만 나는 울지 않고 체벌을 참고 있으니 할아버지는“ 요놈 봐라 하듯이” 다수 어아 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이러한 엄한 교육에 의하여 3개월여 만에 우리는 천자문을 다 떼었다. 그 동안 우리는 단순이 외우기보다 붓으로 쓰고 문장 하 나 하나의 의미도 배웠다. 이 과정 에서 나는 학교서 배우는 한글을 먼저 깨우쳤다. 한글을 언문이라 하고 한문을 진문이라 하며 한문을 더 공부하라고 훈계하셨다.
여름방학 전날 옛날 서당의 관례 되로 떡을 하여 이웃집에 돌리며 축하해주었다. 나는 떡 보다 이제 살았다싶은 해방감을 느끼기 시작하였으나 그것도 잠시 뒤였다.
3. 나는 빨갱이를 보았다.
이 무렵 48년 7월 이 승만 대통령선거를 한다고 여름 한동안 읍내를 트럭에 마이크를 달고 머리띠를 하고 쏘다니든 민보단 청년들에 의하여 온 동내가 시끄러웠다.
끌께나 하고 하는 일 없든 동내 건달이 와 무식한 머슴들까지 제 세상 만난 것이다. 일제36년 조용하고 평화롭든 읍은 이때부터 시끄럽고 불안한 세상을 맞이하였다.
읍을 둘러싼 지리산 넘어는 전라도에 빨갱이들이 몰려와 경찰을 죽이고 부자들을 약탈했다는 소문으로 동내의 민심이 흉흉하게 되었고 읍에서 조금 떨어진 위천 과 북상 이라는 곳까지 에 빨갱이들이 몰려와 파출소경찰을 죽이고 부자 집을 약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어른들이 모여 걱정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
초가을 어느 날로 기억하고 있다. 요란한 총소리에 놀라 깨어났다. 아버지는 평소 마련한 광속의 대형 대나무 소쿠리 안에 들어가 몸을 숨기고 우리는 이불을 둘러쓰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대형 소쿠리는 평소에 말린 시래기 등을 보관하는 것으로 두 개가 있었다.
동이 틀 무렵 걸어서 10분 거리의 군청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군청과 경찰서 가 붙어있는 읍의 중심지다.
어두움이 거치는 경찰서 앞 신작로에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빨갱이 6명 정도가 보였고 한참 앞에 30여명 정도가 산재하여 그들도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길로 곧장 걸어가면 대구 쪽으로 덕유산에 가는 길목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 가고 있는 그들을 잘 볼 수 없었으나 뒤에 가는 7명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거지같은 남루한 회색빛이나 국방색의 옷을 입은 머리가 터부 럭 한 작은 체격이었는데 두 명은 뒤로 머리를 묶은 여자 빨갱이였다.
남자 여자 전부가 일본99식 장총을 들고 있었으며 대부분 검은색 마대와 같은 배낭을 메고 당황하는 기색이 없이 3명씩 짝지어 가고 있었다.
그들이 멀리사라질 때에 나는 경찰서마당 입구에 서서 3-4구의 피투성이 시체를 보았는데 그중에 한명은 경찰복을 입고 있었든 것 같았다.
처음으로 보는 시체에 혼이 빠져 돌아서 올 때에 3-4명의 어른이 오다가 멈춰 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빨갱이들 다 갔나 ? 저기 누가 죽 엇 노? 다 갔어요. 손가락으로 그들이 간곳을 가리키며 겁에 질린 나는 두말 하지 않고 집으로 뛰어 왔다.
4. 육군중사 최 빈호
아침밥을 먹고도 아예 학교 갈 생각도 않고 있는데 밖이 시끄러웠다. 동내 친구하나가 문을 열고 국군이 왔다고 소리쳤다.
신작로 큰길에는 무장한 군인들이 군청 쪽으로 가고 있었다. 가까이 가보았다. 철모와 등의 배낭에는 풀과 잔나무가지를 잔뜩 꼽고 땀을 흘리며 흩어진 전투대형으로 군청 쪽으로 가고 있었다.
한 둘 동내사람둘이 나오면서 물통과 양철통에 물을 가득히 붙고 바가지를 뛰어서 길가에 두었고 군인들은 바가지로 물을 마시고 나서 웃으며 손을 들어 고마움을 표시 하고 갔다. 백여 명 이 넘는 군인들이가고 뒤이어 군 트럭 2대가 천천히 따라갔다.
이 소식을 듣고 나서 아버지는 회사에 출근을 하고 나는 동내 친구들과 학교로 갔다. 학교 문 앞에는 두 명의 군인이 총을 메고 서 있다가 손 짓 으로 우리들보고 오라고 했다. 잠시 후 운동장 안에서 군인 한사람이 걸어오면서 웃는 얼굴로 다가왔다.
육군중사 최 빈호 그 사람의 얼굴은 아직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작은 키에 이목이 두렷한 흰 얼굴의 인상이 좋았다.
어디에 살며 몇 학년이냐 물어보며 우리들 등을 쓰다 더 며 교실 가까이 데리고 가서 우리를 세워놓고 교실로 들어가 건빵 3봉지를 들고 나와 갈라주며 또 놀러오라고 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우리부모들은 고구마와 밤을 큰 소쿠리 두 게에 가득 담아 저녁을 먹은 뒤 학교 문 앞에 서 있는 군인들에게 전해주었다. 최 빈호 중사도 나와 “고맙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허리 굽혀 부모님들에게 인사했다.
3일 동안 학교를 점거했든 군인들은 어 너세 트럭을 타고 떠나버렸다. 우리는 최빈호 중사를 한 번 더 봤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 긴 체 떠나버렸다. 한쪽으로 밀쳐 노 앗 든 책걸상을 제자리 노 앗고 바닥도 깨끗이 청소를 하고 떠난 군인 아저씨 들이 고마웠다.
5. 죽창을 들고 설치는 민보단
태풍과 같은 충격이 읍에 큰 충격을 주고 간 후 이제는 큰 바람이 찾아왔다. 선거 때부터 설치든 민보단들이 경찰의 하부조직으로 죽창을 들고 읍내를 설치고 돌아다녔다. 경찰서 마당에 30여명 모여 훈련을 받고 있는 것을 우리는 신기하게 구경했다,
경찰의 구호에 따라 찔러하면 일제히 죽창을 내밀고 “얏” 하고 큰소리 쳤다. 우리가 곧잘 흉내 내는 “정지. 누구 민보단”이라 하면서 제식훈련 하는 것도 구경을 하였다. 그들은 밤이면 자경단으로 2명이 1조 가되어 나막신 같은 것을 “ 탁” 탁치며 밤새 읍내를 순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오늘날 향토예비군 같은 경찰하부조직으로 99식 일본 소총을 가진 조장 밑에는 죽창을 든 3인으로 구성되며 경찰의 잔심부럼 을 하면서 기부금을 강요하거나 빨치산 토벌 중에 죽창으로 민간인을 찔러 죽이기도 하였다한다.
주민들은 민보단의 죽창 꺼려하였고 야경을 하며 치는 나막신 소리와 야경 중 그들의 월권행위는 우리를 한층 불안하게 하였다.
우리친구들이 모이면 어른들에게 들은 민보단 이야기를 하였다. 빨치산 토벌에 따라간 민보단은 99식 장총에 5발의 탄환을 배급받은 조장에 3사람의 죽창을 든 민보단은 껌은 고무신을 새끼줄로 동여매고 산 능선 위로 따라가다가 숨어있든 빨치산의 갑작스러운 저격을 받았다했다.
조장은 그래도 엎드려 5발 총알로 응사를 할 동안 죽창의 민보단은 개구리처럼 납작 엎드려 있다가 죽창을 버리고 죽기 아니면 살기로 도망가다가 고무신은 벗겨져 나가버리고 맨발로 십리 길을 달려왔다는 일화는 읍내에 퍼져 우리들도 듣고 웃음을 터드렸다. “잘 했다 잘했다.”
민보단이란 쥐꼬리 같은 권력으로 주민을 괴롭히다가 빨갱이를 찔러 죽이라는 죽창으로 민간인을 협박하다가 빨갱이를 만나면 고무신이 벗겨질 때 까지 달아나났다는 민보단의 이야기를 듣는 우리는 흉내 내면서 배꼽이 빠지도록 웃었다.
48년 7월 동내에서도 하는 일 없이 주차장에서 건들거리든 건달이들, 장터를 돌아다니든 품팔이들, 소작하든 머슴들까지 민보단에 가입하여 선거부정행위를 하다가 이제 남보란 듯이 죽창을 들고 설치며 경찰의 잔심부름을 하면서 기부금을 강요하고 월권의 야경활동 할 지음 우리는 밤에 또 한 번의 총소리에 놀라 깨었다.
6. 빨갱이가 빨치산인가?
3-4시간의 총성이 계속되다가 멈 추웠지만 읍내가 아니고 보다 먼 곳에서 들리다가 일찍 끝이 났다. 안도의 한숨 을 쉬고 밖에 나가알아보니 지리산 쪽 변두리의 지서를 습격하여 전투경찰과 민보단을 죽이고 빨갱이도 많이 죽었다했다.
두 번째의 빨갱이 습격에 동내 민심도 흉흉하였고 광속 대나무 소쿠리 속으로 피신했든 아버지의 불안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후에 알았지만 이때에 지리산 쪽에 5백 명 이상의 빨치산이 활동을 하고 있었다했다. 처음은 인근의 함양읍에서 해방 전 43년 십여 명 좌익계열 독립 운동가들이 일본 주재소를 덮쳐 무기를 탈취하고 지리산으로 숨어들어 함양 거창 등에서 약탈을 하다가 45년 해방의 혼란을 틈타 그 세력으로 경찰을 사살하고 우익분자와 지주를 약탈했다 하였다.
이와 함께 46년 10월 대구항쟁으로 구속을 피해 많은 학생과 노동자들이 지리산 빨치산에 합류 하였다 한다.
해방 후 처음민주항쟁으로 "배고파 못살겠다며"시민 수천 명이 시위하였고 미군정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무력진압을 하여 2-3만 명 시민이 학살되었으며, 인근에서 2천명 경북지방에서 7천명 이상을 검거하는 과정에 학생과
노동자들은 지리산으로 피하여 들어갔다 했다.
이어서 48년10월 여수 순천 반란사건으로 하급 장교와 군인 2-3백 명 이 지리산으로 들어갔고 같은 해 48년 그 유명한 공산당 활동을 하 든 이 현상이 지리산으로 내려와 총사령관으로 취임함으로 2-3만 명의 빨치산들을 통합관리하게 되었다했다.
읍에서 우리가 겪은 2번의 빨갱이의 난동이 이 무렵 이였으며 국군의 토벌도 그때에 시작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현상이 거느린 5만 여명 막강한 빨치산 위력 앞에 죽창을 들고 설치든 민보단 건달이 의 행패를 믿고 살든 읍민들이 불어리석기보다 불쌍하였다.
7. 일본 운수회사 과장 아버지
다행이 우리 집은 이러한 세파를 피해갈 수 있었다. 45년 해방으로 아버지가 근무하든 일본인 운수회사는 적산이 되었다.
적산은 한문 뜻은 적의 자산이라는 것이다. 일본인의 철수로 사실상 아버지가 경영의 일부를 맡았다. 후일 국영기업인 대한통운으로 흡수되었다. 따라 행정관청의 보호로 민보단의 간섭을 받지 않았으며 후일 보도연맹가입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에 만일 빨치산이 읍을 점령한다면 우익반동분자로 제거의 일 순위가 될 수 있기 때문 누구보다 신경을 많이 썼다.
광에 있는 큰 대나무 소쿠리는 평소 무시래기 등을 담는 것으로 성인 한사람이 들어앉아도 될 만큼 컸다. 총소리가 들리거나 비상상태가 되면 아버지는 늘 상 이곳에 숨는 것 이였다.
아버지가 회사에 갈 때는 단정한 양복차림으로 항상 자전거를 타고 다녀 시고 퇴근 후에는 가끔 전축으로 음악을 듣거나 라디오를 들었다.
부근에는 우리 집 만큼 큰 전축을 가진 집이 없었다. 어른 키만큼 큰 전축의 위 부분은 레코드판을 넣는 부분이고 아랫부분은 진공관식 라디오로 되어있다. 다뉴브강의 잔물결, 라콤파루시타, 베사메무초 등을 즐겨 들어섰다. 때로는 악보를 펴놓고 기타로 이를 연주도 하였다.
아버지는 친구가 없었다. 우리 집을 찾아온 친구는 가수 고 복수였으며 그와는 초등학교 동기 동창으로 친했다고 했다.
읍에는 극장 이 있어 한번 씩 신파연극을 하면 유명가수가 노래를 했다. 이때에 고복수씨는 부인 이난영 씨와 극장무대에서 노래를 끝난 후 우리 집에 찾아와 아버지와 저녁을 같이 먹는 것을 두 번 봤다.
8. 무성영화 홍도야 우지마라
나는 가끔 이 극장에서 무성영화를 보았다. 장터 옆에 있는 극장은 큰 창고와 같았다. 천정과 벽은 양철로 지어졌고 바닥은 시멘트 포장이 되지 않은 흙바닥그대로이다.
공연이 있는 밤이면 대낮같이 훤하게 불을 밝혀 극장주위를 비추었지만 지금같이 선전간판도 없고 입구에는 상영하는 포스터 3-4장만 달랑 붙여있다.
그러나 이 극장은 읍민의 유일한문화의 공간으로 상영을 하는 밤에는 제법 사람들로 붐볐다.
주로 그때의 무성영화를 밤에만 상영하였지만 신파연극과 함께 유명가수의 공연도 있었다. 공연이 있는 낮에는 포스터2장을 합판에 붙인 지게를 진 사람이 먼저 걸어가면 되에는 징을 치고 마이크로 외치는 사람이 따라 간다.
대부분사람들은 하는 일을 멈추고 그들을 유심히 처다 보았다. TV나 라디오가 없는 그 시절 무성영화는 그들의 가장 큰 관심의 대상 이 되었고 형편이 되면 저녁을 먹고 가족과 함께 극장에 간다.
겨울이면 외투를 한 장더 걸쳐 입고 가고 여름이면 부체를 들고 가서도 땀을 벌벌 흘리면서 무성영화를 보고 울고 웃었다.
1948년 초등학교 2학교년 때에 검사와 여선생은 온 군민들의 화제의 대상이 되어 몇 번의 연장공연을 하였고 우리가족들도 함께 보며 울고 온 기억이 아직 생생이 남아있다.
여주인공 남편이 오해로 그를 찌르려다 실수로 스스로 찔려죽어 그는 살인죄로 재판을 받는다. 이때에 나타난 검사는 그가 학교선생시절 극진히 돌봐주든 가난했든 학생이었다. 검사는 그 선생님을 무죄로 풀어준다는 눈물 없이 볼 수 없다는 대표적인 무성영화로 가족들과 함께 보았다.
그에 앞선 영화로 “홍도야 우지마라 오빠가 있다는” 무성영화는 두고두고 읍민들의 가장 큰 화제의 대상이 되었고 무성영화의 기념비 작품으로 그 주제가인 노래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며 우리도 줄 곳 그 내용도 모르고 따라 부르며 돌아다녔다.
사랑을 팔고 사는 꽃바람 속에 너 혼자 지키려는 순정의 등불
홍도야 울지마라 오빠가 있다 아내의 나갈 길을 너는 지켜라
구름에 싸인달을 너는 보았지 세상은 구름이요 홍도는 달빛
하늘이 믿어시는 내사랑에는 구름을 걷어주는 바람이 분다.
홍도야 우지마라 노래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서민의 노래였다.
그리고 해방이 되고 학교 입학 전으로 생각나는 것은 귀신영화 장하 홍련전이다. 초여름 어느 날 나는 이 영화를 보며 손바닥을 꽉 쥐며 무서움에 떨고 있었다. 변사는 이 화면을 더 무섭도록 큰소리로 읍민들을 이끌어가고 있었다.
변사는 이 흑백 무성시대 화면에 나오는 배우들의 음성을 흉내 내어 그대로 말하면서 그 이야기의 줄거리를 설명하는 사람으로 영화의 흥행 성공여부를 결정한다고 했다.
이때에 변사는 실수를 한 것이다. 화면 보다 배우의 대사를 한참 앞서서 말한 것이다. “그렇게 하면 또 그렇게 하는 것이다” 화면 보는 우리는 전혀 다른 변사의 말에 어리둥절하고 있는 사이 변사는 잽싸게 이상한 대사로 분위를 바꾸었다.
화면의 귀신 때문에 가뜩 겁을 먹고 있든 우리는 변사의 실수와 잽싸게 바꾼 대사에 웃음이 터져 나오며 크게 박수를 쳤다.
공포영화가 순식간 희극으로 바꾸었지만 변사의 임기응변으로 다시 귀신영화로 돌아갔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우리들은 한때에 변사의 실수를 흉내를 내고 돌아다녔다.
“그렇게 하면 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 영화가 다 끝난 후에 소동이 일어났다. 우러러 쏟아져 나온 여자들은 같은 동내 사람들을 서로 이름을 부르며 삼삼오오 짝지어 가는 것이다. 어두운 길거리에 귀신이 나올까 겁이 난 것이다.
이 영화 후 에 읍내 곳곳에 귀신소동이 나서 우리 친구들은 밤길을 조심해 걸었다.
홍도야 우지마라, 검사와 여선생 그리고 이수일과 심순애, 장화 홍련의 귀신영화는 그 때의 기념비적 무성영화로 아직도 그 장면이 아련히 기억에 남아있다.
TV도 없고 라디오 신문도 없든 그 시절 어두워 오면 들어오는 전깃불 밑에서 저녁을 먹고 난 후에 여자들은 설거지를 하였고 방에 그냥 우드거니 앉아있을 수 없는 남자들은 뒷짐을 지고 어 설렁거리며 산책에 나선다.
어두운 밤에 혼자 걸어가는 그들은 곧잘 노래를 잘한다. 쉽게 따라 부르는 신라의 달밤 그리고 “홍도야 우지마라”는 단골 노래다.
컴컴한 저쪽 어슴푸레한 어둠속에 인기척이 나타나면 “그 누구요?” 하면서 노래를 멈춘다. 기다렸든 그들은 서로안부를 물어 면서 외등이 환하게 켜진 신작로의 한전과 금융조합 앞 긴 나무의자 앞으로 간다.
나이 어린 우리의 친구들도 학교에서 배운 노래보다 어른의 흉내를 내어 신라의 달밤 그리고 홍도야 우지마라를 곧 잘 따라 부르며 돌아다녔다. 나와 싸워 머리를 맞아 박이 터졌든 3살 위 꺼출이는 어른들 앞에서도 그럴듯한 변사의 흉내를 내며 홍도야 우지마라를 곧 잘 불렀다.
밝게 켜진 외등 앞에 달려 붙는 날 버러지처럼 어른 아이 가릴 것 없이 모여든다.
마을 건너 저쪽동네 누구의 집에서 초상이 나고 누구의 집에서는 며느리를 봤다고 이야기하다가 빨갱이 이야기만 나오면 바짝 긴장해서 듣고 사실을 다시 확인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극장에서 돌리는 영화 이야기가 나온다. 젊은이 한사람이 그럴듯하게 배우와 변사의 흉내를 내면서 입담 있게 홍도야 우지마라를 이야기하면 모두 이야기하는 사람을 둘러싸고 열심히 그이야기를 듣는다. 이러한 입소문들이 그들이 세상사를 알게 되는 유일의 길이였다.
그러나 1948년 선거가 끝나고 죽창을 든 민보단이 밤낮 동내를 휘젓고 다니기 시작한 후부터 어른들은 보이지 않고 아이들만 그 자리에 와서 놀 고 갔다.
9. 보도연맹
한편 민보단이 살쳐 되는 1948년을 보내고 49년 초부터 보도연맹이란 광란이 읍을 휩쓸었다. 보도연맹은 해방 후 만연되는 극좌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전향시켜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취지에서 만든 이 승만 정권의 반공기관으로 이에 가입하면 과거의 행적에 대하여 면책특권을 준다고 선전했다.
처음에는 극좌 사상에 물든 자들이 자진 가입했으나 그 후에 반공단체로 바뀌면서 정권의 압력에 의하여 공무원에게 머릿수를 할당하여 기하급수로 가입시켜 전국에 2십만 명 이상이 가입했다.
보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으면 협박을 하고 가입하는 농부에게는 비료와 고무신을 나누어주고 가입도장을 받기도 했다.
군청 옆에 있는 보도연맹사무실에는 간판이 없어도 항상 젊은 청년들이 쉴 새 없이 들락거리고 트럭이 서있었다. 죽창을 들고 설치든 민보단은 볼 수 없었고 야경을 돌며 치는 나막신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이때부터 아버지는 보도연맹에 가입하라는 끈질긴 유혹과 협박을 받아 며칠 씩 외삼촌 집에서 자고 오기도 했다. 그러나 단연히 거절할 수 있었든 것은 적산회사인 국유회사의 운영자로 보호를 받고 있었고 평소 정치모임에는 가입하지 않는 다는 확고한 소신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때에 가입 했다면 6.25직후 총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보도연맹에 전국적으로 30만 명이 가입되었고 이중에 10만 명이상이 6.25이후 몇 일만에 학살되었다고 추정하였다.
이유는 남침하는 인민군의 수족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가입 여부를 따지지 않고 가입 된 자는 무조건 집단 학살되었다.
후 에 사실을 알았지만 아버지에게 가입하라고 한 보도연맹 간부대부분이 학살 된 것을 소문을 듣고 알게 된 후 아버지는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나는 집단 학살하러가는 현장을 볼 수 있었다. 6월 28일 경 피난길에 손을 뒤로 묶고 가늘게 쪼갠 대나무로 엮은 둥글고 긴 원통인 용수를 씌운 50여 명의 죄수를 꿇어앉힌 트럭에 총을 들은 전투경찰이 같이 타고 가고 그 뒤 20여명의 전투경찰이 타고 가는 2대의 트럭을 봤다.
10. 이방의 3대 독자 할아버지
이야기를 다시 할아버지에게 천자문을 배우든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여름이 지나고 시원한 가을이 되면 다시 동문선습 이라는 책을 공부 할 것이라고 엄명을 내리신후에도 어수선하게 돌아가는 세상 때문인지 두 번 다시 말이 없었다.
동문선습 은 천자문 다음단계로 아동들의 교재를 위해 지은 책이다.
지금생각해도 할아버지의 손자에 대한 교육의 집념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집요했다. 올바른 길로 이끌어 놓겠다는 의무감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보다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한집념은 조선말 그리고 일본 강점기를 통한 그의 오랜 칩거에 그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구시대 조선말기 읍의 이방 3대독자로 태어나 군민의 선망의 대상으로 영화로운 성장과정을 거치며 자기 손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로지 학문에만 매진하며 일생을 살아오셨다 했다.
우리는 이방이라고 하면 염소수염을 쓰다 더 면서 예......하고 허리 를 굽실거리며 군수에게 아부하면서 군민들을 착취하는 잘못된 영상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착취당하는 서민들의 관료에 대한 저항의식으로 비난의 화살을 지방아전의 대표자인 이방에 꼽은 것이다.
지방의 군수는 원님이라 하며 한양에서 지명하는 데 대하여 이방은 그 지방의 학덕이 있는 유력한 양반을 원이 지명하는 지방아전의 대표자 인 것이다. 그 지방의 행정은 군수책임에 있으나 실무에 어두웠기 때문에 이방이 행정을 처리하는 실권자로 농간도 심했다 했다.
사실상 읍의 모든 권한을 다 쥐고 있는 군수가 수위이고 그 밑의 이방이 읍의 차석으로 사실상의 실권자이라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이러한 사실상 실권자의 3대독자로 영화로운 젊은 시절을 보낼 수 있었으나 그러나 그를 은둔자로 만든 것 은 조선말 극도로 부패한 세상과 이어진 일본의 강점기로 온 절망을 울분과 술로서 허송세월하다가 일절의 외출을 삼가고 술도 끊고 오로지 독서로 세월을 보내는 은둔자가 되었다한다.
한때에 할아버지는 술 한독을 지고는 못가도 마시고 갔다는 동내의 소문들도 있었다.
일본강점기 할아버지는 수차래 헌병대에 불려가 인지도 가 높은 학식과 유창한 일본어 구사로 헌병대 차석보조로 행정에 협조하라는 협박을 받았으나 그때마다 단호히 거절했다는 이야기를 들어왔다.
차석보조는 일본인 헌병대장 아래 사실상 전권을 행사하는 직위였다 했다.
그 시절 주재소의 순경에 의한 치안담당을 특별법에 의한 헌병대로 바꾸면서 정보를 담당하는 조선 사람을 고용하여 통치의 강도를 강화시켰다.
큰아들을 사범학교에 보내고 큰딸도 고등교육을 받게 했지만 기우러지는 가세에 아버지부터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스스로 직업을 구하러 나가야 하는 고통을 겪어야했다.
그 후 아버지의 일본회사 중견간부로 취업은 다시 안정된 가정을 이끌어 할아버지를 모시게 되었고 그때 큰 아버지는 읍에서 떨어진 벽촌의 교실하나인 학교 교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다시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자. 읍의 실권자인 이방의 3대독자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독선생을 모시고 학문에만 매진하는 선비로 성장을 하다가 청년기에 들면서 세상이 뒤바뀌는 큰 충격을 받았다.
나라에서는 흥선 대원군에 의해 고종이 왕에 오르고 이에 따라 매관매직의 부패된 조선말 격동정치를 보면서 학문만 하는 그의 자신을 되돌아보며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을 것이다.
곧이어, 1895년 을미사변으로 민비는 시해당하고 왕인 고종도 폭행을 당하고 세자 순종은 맞아서 실신상태가 되었다가 살아났다. 이어 고종은 생명의 위협을 느껴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가는 이관 파천을 소문으로 전해 들었을 때 선비로서 그의 청운의 꿈은 사라져 버리었다.
이러한 변화는 할아버지를 외부와 담은 쌓는 은둔자로 만들게 되었고 외출을 끊고 술과 담배도 끊고 오로지 독서를 하면서 파란곡절의 생활 속에서 다 못한 자신의 꿈과 미련을 손자인 나와 사촌 형에게 쏟아 붓게 한 것이다.
지금 말하는 스파르타식 교육 인 것이다.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이런 훈계를 하였다. 호랑이는 5마리 이상의 새끼를 낳지만 그 새끼를 물고 높은 곳으로 가 떨어트려 살아난 새끼 한 두 마리 만 키운다고 했다.
그 뜻은 할아버지 직계 손자로 우리 외 5명이 더 있으나 너의 둘은 살아난 새끼처럼 강한 손자가 되라는 뜻 이였다.
스파르타식 교육은 사자의 새끼선택과 유사하다. 남자아이가 출생하면 5명의 검사관이 골격이상, 빈약, 그리고 작게 태어난 아이들을 절벽으로 데려가 떨어뜨려 죽였고 7살이면 합숙훈련을 시작하며 벌겨 벗겨 채찍질 을 의도적으로 시작한다고 했다.
이러한 손자에 대한 엄한 교육에 대하여 큰어머니나 아버지 어머니의 만류는 절대 없었다, 그의 엄한 체별이 지극한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1. 독립 운동하는 교장 큰아버지
50대초에 일찍 세상을 버린 큰아버지에 대한 깊은 자식에 대한 애정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읍 주변의 적은 학교교장으로 전전하든 큰아버지는 그때에 독립운동을 주도하게 된 사실을 알게 된 할아버지는 곧 불러 따귀를 크게 때리며 꾸짖었다한다.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너는 형무소에 갈 것이며 그 보다 너의 집사람과 자식들은 어떻게 되겠느냐?
그 후 큰아버지는 술로서 자신을 달래면사 살았다하며 학교출근 전에 아침밥대신 막걸리 한사발로 끼니를 때우시고 갈 정도로 알코올에 중독되어 간경화로 타계하셨다한다.
할아버지는 몹시 상심하여 한때는 식음을 전폐하고 며칠 을 몸 져 누워 있었다한다. 내가 초등학교 3학 년 때 추석 전 벌초를 할아버지는 다른 선조들의 무덤은 친지들에게 부탁을 했지만 큰아버지의 묘는 꼭 자기 자신이 하였고 사촌형과 나는 따라다녔다.
말총갓과 흰 두루막에 안경 통을 허리에 찬 의관을 정제하고 낫을 들고 앞장서면 사촌형과 나는 꼼작 없이 십리 길을 따라 걸어갔다.
정성 끝 손수 벌초를 한 후에 우리들에게만 절을 하라고 하고 할아버지는 그냥 멍하게 하늘을 쳐다보고 앉아있는 모습이 지금도 선하게 떠오른다.
할아버지가 그렇게 정성 드린 무덤은 이제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6.25 동난 후 큰어머니는 변두리의 묘를 찾아 하루 종일 해매 다가 못 찾고 돌아오신 후 사촌도 묘 찾기를 포기하였다.
그는 부산에서 의사로 근무하다가 2달 여전 폐렴으로 유명을 달리하였다. 나는 장례식에 이 불편한 몸을 끌고 참석하지는 못하고 집사람만 다녀온 후에 이제 우리세대는 다 사라지고 없다는 허무감으로 몇 칠을 우울하게 보냈다.
할아버지는 자기의 아버지인 이방에 대하여 우리에게 한 마디의 말씀도 없었으나 퇴계선생의 15대손이라는 것은 몇 번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며 퇴계선조의 가리킴을 설명하였다.
나는 이방 할아버지의 선행을 큰어머니가 모시고 있었던 사촌형의 늙은 이모에게 가끔 이야기를 들었다. 훨씬 한 용모에 항상 웃음지어며 말을 타고 관아에 출근 하면 동네사람들이 모두 공손하게 절을 하였다한다. 군민 한 사람 한사람의 어려운 일을 찾아 가며 해결해주는 향리로 존경을 받았다하였다.
그러면 왜 우리에게 이방할아버지에 대하여 한마디 말씀도 없었든가? 지방아전의 실권자로 군민들에게 가렴주구하고 농간을 하였든 사실이 있어 부끄럽게 생각해서일까?
나는 이해할 수 없는 할아버지의 강한성격과 그리고 오랫동안 같이 지나면서 평생 대문 밖으로 나가시는 것을 잘 보지 못하였다.
큰아버지의 벌초를 위한 외출로 2번 대문 밖으로 나가시는 것밖에 외출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언제나 사랑방에 계시다가 식사 후 뒤뜰에 가서 푸성귀 심은 밭고랑을 둘러보는 것밖에 볼 수 없었다. 찾아오는 친구도 없었으나 할아버지의 글과 그림을 받으러 오는 노인은 한 둘 있는 것으로 기억된다.
12. 꺼출이와 치고받은 싸움
그러나 나에게는 사랑과 엄한 가르침이 있었다. 나는 남 보다 강한 성격과 집착력은 할아버지의 훈육에 의한 것으로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아이들이 밖에서 뛰어 놀다가 가끔 싸움질을 하면 맞는 아이는 울면서 집으로 가서 누구 가 날 때렸다고 부모에게 하소연을 한다. 부모는 뛰어나가 꾸짖는 소동을 하다 자칫 어른들 싸움으로 번지기도 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맞고 들어오는 나를 용납 하지 않았다. 맞고 들어오는 손자를 못 난놈 이라고 고함을 치며 쫒아낸다. 몇 번 이러한 꾸중을 듣고 난 후부터 나의 성격은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동내에 꺼출이라는 별명을 가진 3살 많은 아이가 있어 항상 우리들을 괴롭혔다. 나는 꺼출이와 치고받는 싸움을 벌려 실컷 뚜드려 마잤다. 코피가 나고 입술이 터져도 이를 숨기며 집으로 와서 삽자루를 들고 다시 나갔다.
학교 앞 토담근처에 다른 아이들과 놀고 있는 그의 뒤로 돌아가 머리통을 향하여 힘껏 내려 쳤다. 풀썩 주저 않아 머리를 감싼 후 일어나서 뒤돌아보지 않고 도망갔다. 퍽 하는 손의 느낌으로 박이 터진 것 을 알 수 있었다.
코피는 닦았으나 부르튼 입술을 숨기며 삽자루를 들고 들어온 손자를 보고도 할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었다. 못 본 척 하시었다.
이틀 후 학교를 다녀오다 멀리서 꺼출이가 오는 것을 보고 가슴이 출렁했으나, 가슴을 떡 벌리고 다가갔다. 첫 느낌이 그가 힘이 빠진 모습 이였고 박이 터진 뒷머리에 붙어있는 된장 조각을 볼 수 있었다.
이때에 우리는 머리가 찢어지면 박이 터졌다 하고 생된장을 붙이고 손발이 찢어져 피가 나면 흙을 놓고 “후” 하고 불어 지혈하고 치료 했다. 고무신을 뚫고 발바닥에 못에 찔리면 피가 나는 부분을 망치로 치면 지혈이 되고 치료되었다.
그는 나의 삽자루에 박이 터졌고 나를 본 순간 겁에 질려있음을 알고 의도적으로 가깝게 다가서 “한번만 더 까불면 죽여 버린다고” 힘주어 협박했다.
눈을 내려 깐 꺼출이는 나를 비껴 빨리 걸어 도망가고 나서는 동내 그 소문이 돌아 그 후 나에게 선배가 되는 아이들도 나를 두려워하여 한때에 내 어깨가 으쓱함을 느꼈다.
이것이 할아버지의 가리킴 이었다. 두드려 맞고 집에 들오는 손자를 좇아내는 그의 훈육은 나를 강하게 만든 것은 틀림이 없었다.
13. 우리 집 족보의 행방
왜 그렇게 엄하시고 손자를 호랑이 새끼처럼 키우려는 할아버지가 평생을 사랑방에 은둔하며, 읍의 실권자인 이방할아버지에 대하여 언급이 없었든 것을 나는 우리 집안족보의 행방에서 그 이유를 찾게 되었다.
파란만장의 조선말 일본군이 진입하여 왕인 고종을 밀어 던지고 세자순종을 구타하여 실신시킨 다음 명성화후를 찔러 죽여 불에 태웠다.
고종은 생명의 위협을 느껴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간 을미사변 전후 이방할아버지는 읍 이방으로 재직하며 파란만장의 격동을 겪은 것으로 알게 되었다.
이 시절 우리는 선비가 족보를 팔아먹는 다는 구전을 가끔 들어왔다. 돈 있는 관리가 빈곤한 명문 선비의 족보를 사서 자기 이름을 등재시켜 명문 양반행세를 해왔다고 했다.
이 세대에 읍 군수는 매관매직하여 투자한 돈을 회수하는 데 급급하여 지방행정의 실권자인 이방을 앞세워 가렴주구 하였다하며 군수는 실무에 어두웠기 때문에 이방이 맡아 했으나 이방은 한술 더 떠 농간이 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군수는 그의 가렴주구에 더하여 명문가인 이방의 족보까지 탐하여 바치라고 명하였으며 이방 할아버지는 어쩔 수 없어 밤을 세어 사본을 남기고 고이 간직했든 족보를 상납했다한다. 족보를 판 것이 아니고 빼앗긴 것이다.
나는 우리 집 족보가 책자의 형태가 아니고 접지 식 으로 되어있으며 한사람의 매우 숙달된 글씨체로 된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으나 그것이 이방할아버지가 족보를 빼앗기고 사본으로 남긴 것이며 그 족보의 마지막 기록된 사람이 이방 할아버지고 우리 할아버지는 그 기록조차도 거부한 사실을 그 후에 알았다.
군수의 앞잡이가 된 이방이 한술 더 떠 군민을 농간한다는 세평을 받는 것도 억울한 일인데 집안의 족보까지 빼앗기는 것을 보고 있든 할아버지의 마음은 거부감을 느끼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의 회피 행위는 은둔하며 독서 삼매경에 빠지는 것 이였다.
14. 일본 헌병경찰 차석보조원
1910년 한일 합방 후 읍은 외관상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으나 칩거 하는 할아버지에게 다시 한번 의 곡절을 겪어야했다.
일본의 헌병경찰의 보조원으로 채용하겠다는 통보를 받은 것이다. 읍 헌병대장의 차석보조원으로 회유하다가 압박을 하는 과정에 몇 번 헌병대에 불려갔다.
한일 합방 후 헌병경찰을 창설하고 천왕의 직속으로 입법 사법 행정 및 군대의 통솔 까지 장악하는 초 월권 기관으로 본국에서 직접 지명한 헌병대장 아래 조선인 으로 구성하는 억압통치기관 이었다.
할아버지가 지명된 것은 전직이방의 아들이라는 것과 그때에 일본어를 해독하고 자유롭게 구사한다는 것 이였다. 한일 합방 후 조선인 중에는 일본어를 잘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지만 할아버지는 독학으로 공부를 한 것이다.
어릴 때에 그의 사랑방에 들어가면 50여권의 한서가 있었는데 그중에 몇 권의 일본어 고서가 있는 것을 보았다.
할아버지는 단연코 거절했지만 그 후 반항하는 조선인 즉 불령선인 으로 는 취급되지 않고 원만한 관계를 가졌으며 장남을 사범학교에 보내고 딸을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는 개방적인 생활을 하였지만 항상 세상일을 피하는 은둔자로 살아갔다.
할아버지의 어린 시절을 큰집에 같이 살았든 큰어머니의 늙은 언니로부터 우리는 가끔 이야기를 들었다.
이방어른은 훌륭한 어른으로 말을 타고 관아로 출근 하며 군민들이 선망하였다고 하며 이와 함께 동년배인 할아버지는 어릴 때에 몹시 “헤찰굿다”라고 하셨다. 이 뜻은 작란 질이 심했다는 것으로 한번은 상것을 데리고 놀다가 심술이 나서 가지 밭에 꺼 구로 누어 기면서 한 고랑의 가지를 입으로 물어뜯었다 한다.
항상 근엄하며 은둔자로 살아가는 할아버지의 어린 시절에 이러한 일도 있었구나 하고 우리는 웃었다.
할아버지와 생활한 20여년의 세월 속에 나의 성격이 형성 된 것이다. “절대 남에 지지 말라”, 옳다고 생각하면 포기하지 말라는 것으로 “끝까지 물고 늘어지라는 것이다.”
그 할아버지의 마지막 가는 길을 나는 정성으로 다했다. 두 번의 이장을 하고 다시 이장하라는 통보를 받고 파묘하여 마지막 몇 개의 유골을 한줌의 가루로 만들어 허공에 뿌리며 무릎 꿇고 영민 을 빌었다.
15. 쌀가마를 집어 던졌든 외할머니
다시 옛날로 돌아가서 내가 초등학교를 들어갈 무렵부터 명절이면 외갓집에 인사를 하러 가야만했다. 강변에 오두막에 사는 외할머니 집은 평소에도 들락거려 부담 없이 가지만 두 분 외삼촌 집중 큰 외삼촌 집은 가기 싫었다.
시장터 옆에 자리 잡고 있는 큰 외삼촌댁은 규모가 엄청 컸는데 일본식 기와집으로 5개 이상의 방이 달렸고 넓은 마당 건너편 에 있는 창고에 소달구지와 가마니로 포장된 건어물 등이 가득 쌓여있었다.
큰 외삼촌 외모는 외할머니를 닮은 사각형 얼굴에 부리부리한 눈망울은 위압적이고 별로 말이 없었다. 젊어서부터 외할아버지에게 읍에서 제일 큰 건어물 점을 유산 받아 잘 운영하고 있었다. 나는 잠시 중학교에 다니는 외사촌 병준이 형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작은 외삼촌 집은 학교 뒤 동산 앞에 있는 30여 평정도 일본식 기와집으로 넓은 마당 끝에 돼지우리가 있고 그 옆에는 작은 꽃밭이 있었다. 그는 큰외삼촌과 달리 후리 한 몸매에 항상 웃는 용모로 잘 생긴 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외할아버지를 닮았다한다.
그는 아버지와 동연배로 친하며 몇 번 집으로 와 담소하는 것을 보기도 했다. 아버지와 같이 운전면허를 받아 트럭으로 운송업을 하고 계시었는데 그때에 운전수는 지금같이 천한 직업이 아니고 상위계급의 직종으로 수입이 좋았다.
그때에 외사촌 한준이형은 중학생 축구부장으로 우리아이들의 우상의 대상으로 노부리 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나는 그를 형으로 생각하였고 그도 나를 동생으로 생각하며 어깨를 툭 친다든지 등을 쓰다듬는 애정을 표시했다.
큰 외삼촌 아들과 같은 나이로 친구가 되지만 몇 달사이로 동생이 되어 무엇인가 경쟁적 사이인 것 같았다.
그러나 6.25 이후 사촌 형들 한사람은 육군대위 헌병이 되었고, 다른 한사람은 지리산 빨갱이의 지대장이 된 것이다. 서로 총구를 겨누는 비극은 없었으나 읍내소문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했다.
외할머니가 살고 있는 강변 토담 초가집에는 과부인 큰 이모님이 함께 계셨다. 10평 남짓한 전형적 초가집은 읍에서도 잘 볼 수 없었다.
두 볌이 되는 두꺼운 토담 벽에는 어른 어깨 정도 낮은 출입문이 달렸는데 문짝은 쪼갠 대나무로 대칭적으로 엮고 그 위에 한지를 바른 옛날 서민들이 살았든 가옥의 전통적인 문으로 들어 갈 때는 허리를 굽혀 들어 가야했다.
출입문 옆에는 책장 크기의 구멍이 나 있 엇 는데 유리판을 넣고 한지로 테두리를 붙여 유리창구실을 하며 누구 가 들어오면 이 유리 판 으로 밖을 내다볼 수 가있었다.
방 안의 천정과 벽은 깨끗한 한지로 도배를 하였고 노란 장판은 들기름을 발라 반들거렸고 두 개의 나무 선반위에 침구와 가재도구가 나란히 올려 져있었다. 깔 금한 이모의 성벽으로 항상 티 하나 없는 깨끗한 방 이였다.
싸릿대 문을 밀치고 들어가 10평정도 붉은 마사 토 위에 걸어 들어가면 넓게 깍은 디딤돌 3개가 흙속에 묻혀 있고 그 위에 높다란 껌은 윤이 나는 좁은 마루가 있어 이를 딛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에 붙어있는 부엌 앞에는 한 평 정도의 장독대가 있어 크고 작은 반들거리는 장독이 놓여 있었고 그 밑은 깨끗한 검은 자갈이 깔려있으며 주먹만 한 검은 돌로 테두리를 해놓았다. 사철 봉선화 체송화가 피어있는 작은 하단위에 어른 키만 한 늙은 석류나무 한그루가 있었는데 봄에는 빨간 석류꽃과 가을이면 서너 개의 작은 석류를 볼 수 도 있었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면서 장죽을 물고 있는 외할머니는 손자가 오면 항상 웃으며 반겨주었다. 사각의 얼굴에 부리 한 큰 눈을 가진 할머니는 백설의 머리를 뒤로 단정히 묶어있고 흰 한복에 분홍색 쪼기를 걸치고 항상 단정한 인상을 주었다.
재산을 장남에게 물려주고 소박을 당한 후 큰이모와 함께 기거를 하고 있었다.
외할머니는 여장부라고 알려져 있었다. 장남에게 물려준 큰 건어물점도 외할머니의 장사 솜씨였다고 소문나 있었고 그보다 젊은 새댁시절에 창고에 불이 났을 때에 창고에 있든 벼 가마니를 번쩍 들어 담장 밖으로 던졌다는 일화가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체격도 작고 곱게 생겨 할머니에게 쥐어 살다가 첩을 얻어 딴살림을 함으로 할머니는 소박을 맞게 되었다고 했다.
언제인가 나는 외할머니 억센 힘을 직접보고 놀랐다. 이웃 아주머니와 한동안 다투다가 순간적으로 멱살을 잡고 밀어 붙였다. 뒤로 서너 발자국 밀리든 아주머니는 두발을 하늘로 치켜든 체 굴러 떨어졌다 다시일어나 도망가 벼렸다.
이를 한동안 우드거니 보고 있든 외할머니는 손을 털고 아무 일 없는 듯이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는 의아했다.
우리 어머니는 학교 운동회에 잘 뛰어봤자 3등하는 나를 보고 나는 어릴 때에 뛰면 일등 했다고 늘 자랑했다. 어머니 는 언젠가 단오명절 때에 군 운동회가 열렸고 그네뛰기에 일 등하여 푸짐한 상품을 받아 온 것 을 나는 보았다. 어머니는 그 여장부의 셋째 딸 이였다.
외할머니의 외손자에 대한 사랑은 유별났다. 강변에 친구와 놀다가 저녁이면 할머니 집에서 저녁을 얻어먹고 놀다가 할머니 옆에서 자고 온 일이 많았다. 어릴 때 남의 집에서 자고 온 일은 없었고 집에서도 밤에 내가 들어오지 않아도 이를 알고 찾지 않았다.
찬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이면 추울세라 이불을 끌어 덮어주고 한여름 모기장속에서는 잠들 때 까지 부체 질 해주시면서 “요놈은 클수록 꼭 저거 에미를 닮아간다고” 중얼 거리셨다.
16. 콩서리 팥서리
빨갱이도 가고 국군아저씨도 떠난 후 읍내는 잠시 조용해졌다. 우리친구들은 이제 익어가는 콩밭서리를 시작했다.
서리는 남의 곡식이나 과일 따위를 훔쳐 먹는 장난으로 그때에 우리들의 군것질이었다. 제일 많이 서리를 하는 것이 콩과 팥이 엇고 이따금 덜 익은 푸른 보리도 서리를 했다.
서리는 3-4명이모여 아직 푸른 잎이 붙어있는 콩대를 뽑아 흙을 털어놓고 부근의 나무잔챙이를 모아 불을 붙인 후 그 위에 수북 히 쌓아 놓으면 면 “확“하고 불길이 솟은 뒤 한참 불이 붙는다.
불이 꺼진 후 콩대를 들고 파랗게 익은 콩을 먹어보면 어떤 주점바리 보다 우리들 에게 인기가 있었다.
한동안 익은 콩을 정신없이 먹다가 숱 껌정이가 된 친구의 입을 보면 웃음이 터져 나온다. 어른들에게 혼나기 전 개울에 가서 깨끗이 입을 씻고 집으로 돌아간다.
17. 절컥 절컥 엿장수
때때로 우리는 엿 장수의 가위소리가 동내 개 짖는 소리보다 흔하게 듣는 다. 단것을 좋아하는 아이들은 기호품인 엿은 우리를 불러낸다.
엿은 돈 주고 사먹는 경우는 거의 없고 모두 집안의 헌 고무신이나 빈병, 못 쓰는 양은 냄비를 들고 나와 바꿔먹었다.
한번은 마루 밑 디딤돌에 있든 헌 고무신을 들고나가 엿을 바꿔먹고 어머니 빗자루 몽둥이에 도망간 일이 있었다.
절컥 절컥 엿장수 가위소리에 그냥 앉아있을 수 없어 어머니에게 돈한 푼 받아 쫒아나갔다. 학교 앞 프라타나스 그늘에 엿장수가 가위 소리로 아이들을 부른다. 리어카 위에 넓적한 엿판이 두 개있고 그 밑에는 양은 냄비 고무신 빈병 등 고물이 가득 실려 있었다.
엿장수 가위소리에 아이들이 몰려들면 엿장수는 또 다른 방법으로 아이들을 모은다. “잘 봤다 못 봤다 하지 말고” 요거 하나만 뽑으며 큰 덩어리 엿을 준다. 한지 열 개를 젓가락처럼 말고 그중 하나의 끝 은 먹물로 표시를 해놓았다.
아래쪽을 왼손으로 잡고 위쪽열개를 섞어가면서 “잘 봤다 못 봤다”를 하면서 아이들에게 한지묶음을 내민다. 나는 그 한지 묶음중 하나를 뺐다. 한지가락 꼬리에 먹물 표시가 있다. 와...... 아이들의 고함 속에 엿장수의 당황함을 볼 수 있었다.
어른들은 가끔 나를 보고 눈살미가 있다 고 했다. 눈썰미가 있다는 것으로 정확히 본다는 것이다. 그 후에 엿장수가 와서 엿판을 벌일 때에 내가 찾아가면 의심의 눈으로 나를 보았고 나는 손사래를 쳐서 한지묶음을 다시는 뽑지 않겠다는 마음을 전했다. 당황했든 그의 표정이 꺼림직 한 것이다.
아이들 숫자대로 나누어준 엿을 뜯어먹으면서 강변 우리들의 놀이터 로 갔다.
18. 은빛모래 위 씨름선수
읍을 가로질러 흐르는 영호 강은 덕유산에서부터 흐른다. 계곡의 상류는 높고 낮은 거북바위 위로 수정 같은 물길이 여울져 바위를 다스리며 세차게 흘러 주위의 노송과 어울린다.
일찍이 나의 17대 조상 퇴계 선생은 1543년 정월 이곳을 지나다가 다음의 시를 남겼다.
양산이 한줄기 물로 묶여 빠져나갈 문 없는 듯한데
쌓이고 쌓인 바위 절벽 속에서 차고찬물이 솟아난다.
흥 솟아 노래도 하고 싶고 그윽한 곳 낙원 열어 살고파라
흐르는 강 막일 길 없노니 흐르는 물 임하여 누구와 의논할까.
장마 때 강이 흘러 읍을 가로지를 때는 그 폭은 1Km가넘지만 보통은 100m정도의 물이 흐르며 수심은 우리의 무릎정도다.
흐르는 곳은 주먹만 한 돌이 있는 곳과 은빛모래가 펼쳐 저 있으며 수정처럼 깨끗한 물은 다리위에서도 깊은 웅덩이 밑바닥에 피리 때가 줄지어 다니는 것을 보일정도로 맑고 깨끗했다.
우리의 놀이터는 다리 밑 은빛모래장이다. 6월이 되면 우리는 벌써 찬 물속으로 뛰어든다. 개해엄치다가 물장구치다 따뜻한 모래위에 엎드려 햇빛 을 쪼인다.
온몸이 따뜻함을 느끼면 우리는 곧잘 씨름을 하며 두 명이 씨름을 하면 남은 두 명은 앉아 심판을 한다. 삿바를 하지 않고 손바닥에 모래를 바르고 발가벗은 맨몸그대로 씨름 을 한다.
씨름은 힘도 중요하지만 기술이 있어야한다. 어릴 때부터 시작한 씨름은 제법 어른의 흉내를 내며 기술로 상대를 제압한다. 상대의 무릎을 양손으로 당기는 당기기, 오른손으로 쳐서 넘기는 무릎치기, 오른발로 상대의 왼다리 안쪽을 걸어 넘어뜨리는 다리걸기, 배지기 등 초등학교 4-5학년이면 나름대로 씨름 기술을 익힌다.
삿바를 하지 않고 맨몸으로 하는 씨름은 미끄러워 붙었다 떨어지다 하면서 오래간다. 순간의 공격으로 상대를 쓸어 트리면 자빠진 친구는 두 손을 짚고 멍청이 앉아있지만 이긴 친구와 보고 있든 친구는 “와” 하고 고성을 지르고 다리위에서 보고 있든 어른들도 손 벽을 치면서 웃는다.
해질 무렵이면 집에 돌아가 “아직 밥 안 했 어요? 배가 곱아 죽겠다” 하고 저녁을 조른다. 저녁 한 그릇 먹고 나면 또 슬슬 마실 나간다. “이놈은 한 시라도 집에 안 있어”어머니가 자주 하는 말이다.
어두운 길을 따라 신작로에 있는 외등이 훤하게 켜진 금융조합 앞에
친구들이 모인다. 그런데 빨갱이가 소동을 부리고 국군이 며칠 있다가 간 후부터 어른들은 잘 보이지 않는 다.
19. 지리산 빨갱이들
이때에 지리산 쪽에 5백 명 이상의 빨치산이 활동을 하고 있었다한다. 처음은 인근의 함양읍에서 1945년 해방 전부터 십여 명 좌익계열 독립 운동가들이 일본 주재소를 덮쳐 무기를 탈취하고 지리산으로 숨어들어 함양 거창에서 약탈을 하다가 해방의 혼란을 틈타 그 세력으로 경찰을 사살하고 우익분자와 지주를 약탈했다한다. 그러면 내가보았든 빨갱이는 이들의 일부 인 것 같다.
우리들은 몰랐든 사실이지만 이때에 지리산 부근 지역에는 빨갱이 들이 주민의 지지와 지원을 받으면서 활동했다한다. 그들의 존속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지역주민 의 민심이다. 주민에게 정보를 얻고 은신처를 제공받으며 식량이나 인적자원도 얻는다.
이러한 것들이 빌미가 되어 51년 거창신원면에서 719명의 민간인을 무고하게 학살하게 된 것이다.
지리산 빨갱이들에게 46년 10월에 대구항쟁으로 구속을 피해 많은 학생과 노동자들이 지리산에 들어와 빨치산에 합류 하였다 한다.
해방 후 처음의 민주항쟁으로 "배고파 못살겠다며"시민 수천 명이 시위하였고 미군정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무력진압을 하여 2-3만 명 시민이 학살되었으며 인근에서 2천명 경북지방에서 7천명 이상을 검거하는 과정에 학생과 노동자들은 지리산으로 피하여 들어갔다.
이어서 48년 10월 여수 순천 반란사건으로 하급 장교와 장교 2-3백 명 이 지리산으로 들어가고 같은 해 그 유명한 공산당 활동을 하 든 이 현상이 지리산으로 내려와 총사령관으로 취임함으로 2-3만 명의 빨치산들을 통합관리하게 되었다했다.
읍에서 우리가 겪은 2번의 빨갱이침입이 이 무렵 이였으며 49년 봄 국군의 토벌도 그때에 시작의 단계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현상이 거느린 5만 명의 막강한 빨치산 위력 앞에 죽창을 들고 설치든 민보단 건달이 의 행패를 감수하면서 그들을 믿고 살든 군민들이 불쌍하기보다 어리석었다.
20. 우익 반동분자 아버지
다행이 우리 집은 이러한 세파를 피해갈 수 있었다. 45년 해방으로 아버지가 근무하든 일본인 운수회사는 적산이 되었다. 적산은 한문 뜻은 적의 자산이라는 것이다.
일본인의 철수로 사실상 아버지가 경영의 일부를 맡았으며 후일 국영기업인 통운으로 흡수되었다. 따라 행정관청의 보호로 민보단의 간섭을 받지 않았으며 후일 보도연맹가입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에 만일 빨치산이 읍을 점령한다면 우익반동분자로 제거의 일 순위가 될 수 있기 때문 누구보다 신경을 많이 썼다. 광에 있는 큰 대소쿠리는 평소 무시래기 등을 담는 것이지만 성인 한사람이 들어앉아도 될 만큼 컸다.
총소리가 들리거나 비상상태가 되면 아버지는 이곳에 숨는 것이다.
아버지는 회사에 단정한 양복차림으로 항상 자전거를 타고 다녀시었다. 퇴근 후에는 가끔 전축으로 음악을 듣거나 라디오를 들었다.
부근에는 우리 집 만큼 큰 전축을 가진 집이 없었다. 어른 키만큼 큰 전축의 위 부분은 레코드판을 넣는 부분이고 아랫부분은 라디오로 되어있으며 독일서 만든 것 이라했다.
아름다운 도나우강 물결 베싸매 무쵸 라콤팔시타 등을 즐겨 들어 시다가 뉴스는 라디오로 바꿔 들어 시었다. 때로는 악보 대에 악보를 펴놓고 기타로 이곡을 연주 할 때도 있었다. 악보를 보고 그냥 노래를 할 정도 음악실력 이 있었다.
21. 만년필 펜촉을 땜질 하나?
아버지의 양복 윗주머니에 항상 만년필을 꼽고 다녀 섰다. 어느 날 나는 그 호기심에 만년필을 감 추워 두었다가 공책에 그리고 쓰고 작란 질 하다가 문덕 펜촉이 갈라진 것을 알았다.
“큰일 났다 ”한동안 걱정을 하다가 장터의 땜질 할아버지에게 들고 갔다. 만년필펜촉을 내밀고 이걸 좀 때워달라고 했으나 한참 살펴본 후 고개를 저었다. 화덕용 땜인두로 그렇게 적은 것을 때울 수 없다는 것이다.
할 수 없어 퇴근 후 걸어놓은 아버지 양복윗주머니에 만년필을 꼽아 놓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 하루가 지나고 다음날이 되어도 기척이 없었다.
후일 갈라진 펜촉이 정상적 인 것을 알고 난 후에 나는 쓴 웃음을 웃었다.
나는 5살 되든 어릴 때에 동내가 시끄러울 소동을 피웠다. 아버지가 출장을 가신 후 그 자전거를 뜯어보려고 대문 앞 그늘로 끌고 와서 눕혀놓고 드라이버와 몽키로 풀기 시작했다.
페달 덮개를 빼내고 체인을 기어를 풀기위하여 왼손으로 후래임을 잡고 오른손으로 체인을 당기는 순간 모지가 날카로운 기어와 체인에 물려 돌아갔다.
날카로운 기어 끝은 모지손톱을 관통하여 체인과 함께 돌아가 버려 뺄 수 가없어 고함을 질렀다. “아이고 죽겠다.” 지나가든 아저씨가 달려와 페달을 돌려 손 고락 을 빼내었다.
놀 난 어머니와 할아버지도 뛰어나오고 지나가든 아주머니도 뛰어왔다. 어찌댓노? “이걸 풀어 볼 라고 하다 이렇게 되었다.”
흐르는 피를 수건으로 감싸고 하는 내말에 다들 어이가 없는 표정이었다.
병원에 가서 치료를 하고 약을 받아왔다. 동내 소문은 한 술 더 떠서
“저거 아버지 자전거를 고치려하다 손을 많이 다쳐 병원에 갔다 한다.” “기술자네.” 그 상처로 나의 오른쪽 모지는 왼쪽보다 1센티 짧다.
병원을 다녀 온 후 몹시 아팠다. 손을 들고 있으면 통증이작아 손 고락을 들고 하루를 지났다.
그때는 4살쯤 될 때에 빨래 줄 을 바치기 위해 세워놓은 대나무 작대기를 사타구니 사이에 넣어 타고 폴딱 폴딱 뛰며 말 타기 흉내를 내면서 온 동내를 돌아다니고 있다가 “아이고 죽겠다.”하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고함을 질렀다. 마른 대나무 벌어진 사이에 나의 불알 껍질이 끼어 죽을 지경이 되었다.
동내사람들이 뛰어와 대나무를 벌려주어 불알 껍질을 빼냈다. 이것을 보고 있든 아주머니들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씨 할 불알이 터졌나.” 하고 박장 대 소 하였다. 이 일이 있고나서 한동안 동내아주머니들은 나를 보면 “씨 할 불알이 터졌나.”하고 놀렸다.
22. 유일한 아버지친구 가수 고 복수
아버지는 친구가 없었다. 유일하게 찾아온 친구는 가수 고 복수였다. 그와 초등학교 동기 동창으로 친했다고 했다. 읍에는 극장 이 있어 한번 씩 신파연극을 하면 가수가 노래도 한다. 이때에 고복수씨는 부인 이난영씨와 노래공연이 끝난 후 우리 집에 찾아와 아버지와 저녁을 같이 먹는 것을 두 번 봤다.
아버지는 출근하면 일본사람들 사이에서만 생활하다보니 그들에게 동화되어 누구나 그를 일본사람이라 했다. 매너나 일본어 발음도 일본사람과 구별될 수 없었다.
작은 고모 이야기로는 그때에 읍에서는 현금이 제일 많은 부자라고 하며 항상 깨끗한 양복을 입고 다녀 주위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그 당시 일본인이 운영했든 운수회사 중견간부로 부산 대구를 출장 다니며 회사를 사실상 경영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경성전기 지금의 한전 등에 주식을 투자하고 부산진 시장 입구에 2층의 상가건물을 매입하여 임대하고 읍내에는 논과 밭을 사들였다.
그때에 나는 길 가다가 누구의 아들이다 하면 아무 느낌 없이 지나갔으나 혹시 늙은 노인들이 이방집 손자다 하면 부끄럽고 화가 났다. 옛날 의 이방의 잘못된 편견이 노인들에게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23. 반공단체 보도연맹 가입 유혹과 협박
한편 정부가 수립 됐든 1948년을 보내고 49년 초부터 보도연맹이란 광란이 읍을 휩쓸었다. 보도연맹은 해방 후 만연되는 극좌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전향시켜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취지에서 만든 이 승만 정권의 반공기관으로 이에 가입하면 과거의 행적에 대하여 면책특권을 준다고 선전했다.
처음에는 극좌 사상에 물든 자들이 자진 가입했으나 그 후에 반공단체로 바뀌면서 장관들도 가입하고 정권의 압력에 의하여 공무원에게 할당하여 기하급수로 가입시켜 전국에 2십만 명 이상이 가입했다.
보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으면 협박을 하고 가입하는 농부에게는 비료와 고무신을 나누어주고 가입도장을 받기도 했다. 17살 이상 학생들도 가입시켰다.
군청 옆에 있는 보도연맹사무실에는 간판이 없어도 항상 젊은 청년들이 쉴 새 없이 들락거리고 트럭 한대가 서있었다. 죽창을 들고 설치든 민보단은 볼 수 없었고 야경을 돌며 치는 나막신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이때부터 아버지는 보도연맹에 가입하라는 끈질긴 유혹과 협박을 받아 며칠 씩 이들을 피하여 외삼촌 집에서 자고 오기도 했다. 그러나 단연히 거절할 수 있었든 것은 국유회사인 적산회사의 운영자로 보호를 받고 있었고 평소 정치모임에는 가입하지 않는 다는 소신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때에 가입 했다면 6.25직후 잡혀 처형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보도연맹에 전국적으로 30만 명이 가입되었고 이중에 10만 명이상이 6.25이후 몇 일만에 학살되었다고 추정하였다.
이유는 남침하는 인민군의 수족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가입 여부를 따지지 않고 가입 된 자는 무조건 집단 학살되었다.
후 에 사실을 알았지만 아버지에게 가입하라고 독촉한 보도연맹 간부 대부분이 학살 된 것을 소문으로 듣고 아버지는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나는 집단 학살하러가는 현장을 볼 수 있었다. 6월 28일 경 피난길에 손을 뒤로 묶고 용수(가늘게 쪼갠 대나무로 엮은 둥글고 긴 원통)를 씌운 50여 명의 죄수를 꿇어앉힌 트럭에 총을 들은 경찰이 타고 가고 그 뒤 20여명의 경찰이 타고 가는 2대의 트럭을 봤다.
6.25 군경의 후퇴직전에 10만 명으로 추산되는 보도연맹 학살현장의 일부를 본 것 이다. 이러한 비극은 남의 일만 아닌 것 이다.
6.25 이후 그 빨갱이 때문에 외 삼춘집이 풍지 박산 되었다는 소식을 몇 년후 에야 들을 수 있었다.
24. 고등학교 축구부장 한준이 형
다시 우리외갓집 이야기로 돌아간다. 1950년 남침 전 까지 작은 외삼촌의 외동아들 한준이 형은 대구 K 고등학교 축구부장으로 전국적으로 그 명성을 일으켰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그는 우리 읍 우리아이들의 우상의 대상으로 노부리 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나는 그를 형으로 생각하였고 그도 나를 동생으로 생각하며 어깨를 툭 친다든지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방학 때에 그가 오면 아이들이 줄줄이 따라다녔다.
큰 외삼촌 아들도 있었다. 병준이다. 같은 나이로 친구가 되지만 몇 달사이로 동생이 되며 무엇인가 경쟁적 사이인 것 같았다.
그러나 6.25 이후 사촌 형들 한사람은 육군대위 헌병이 되었고 다른 한사람은 지리산 빨갱이의 지대장이 된 것이다. 서로 총구를 겨누는 비극은 없었으나 읍내 군민들의 소문으로 모른 사람이 없었다했다.
보도연맹 학살사건을 주도한 것은 헌병과 전투경찰이라는 것을 그 후 우리는 알게 되었다.
6.25남침 후 낙동강전선으로 대구부근에서 큰 싸움이 벌어졌을 때에 한준이 형이 납북 되었다 는 것과 자진 월북했다는 소문이 나돌았지만 53년 휴전 이후까지 소식이 없었다가 그 후 포로로 잡혀 투항한 한준이 형의 부관에 의하여 그의 행적이 소문으로 밝혀졌다.
6.25 그는 7월초 전국축구시합을 앞두고 여관에서 합숙을 하며 훈련을 하고 있었다. 시끄러운 소란에 일어나 나가니 몇 사람이 모여 라디오를 들어 면서 이북이 쳐들어와 전쟁이 났다고 야단들이다.
그래도 아침을 먹고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다른 선수들과 막 나갈려는 참에 코치 선생님이 뛰는 듯 달려왔다. 운동장으로 갈 필요 없다. 오늘 여기서 기다려라 하시면서 금세 돌아나갔다.
불안한 마음으로 라디오만 듣고 있는데 해질 무렵에 돌아온 선생님의 얼굴은 사색 이였다. 한준이 형 가리키며 급히 말했다. 너 보도연맹에 도장 찍었나? 되묻는 형을 두고 옆 친구에게도 같이 물었다 너도? 고개를 끄떡이는 그를 보고 긴 한숨을 쉰 후 “피해라 잡히면” 다 죽는 다.
아님 밤중에 홍두깨냐. 어안이 벙벙한 한준이형은 선생님의 말을 선 듯 이해할 수 가없었다. 보도연맹에 가입한다고 잡아 죽이나? 1948년 좌익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전향시키기 위한 정부조직 이였으나 그 후 반공단체로 형태가 바뀌면서 가입 회원수가 30만 명이 넘어섰다.
공무원들은 머리수를 채우기 위해 반강제적으로 가입시키면서 10대의 중고등학생들을 대거 가입시키기도 했다.
인민군들이 밀고 들어오면 이들이 곧 앞잡이가 된다는 것이다. 가입여부를 묻지 말고 전부 죽이라는 정부의 지침이 전달된 것으로 이것이 보도연맹의 학살사건이라 헸다.
한준이형은 그의 친구3명과 밤이 되어 어두움이 짓을 때 도망 칠 듯이 여관을 빠져나와 팔공산 쪽으로 올라갔다. 계곡을 따라 몇 시간을 해매 다가 나무 밑 수풀 속에 주저앉았다.
부산 쪽으로 가는 피난민들 속에 섞여 가다가는 순경이나 헌병들에 잡히면 구속되어 바로 총살 될 것이고 위쪽 경산으로 가다는 빨갱이나 인민군에 잡혀 죽을 것 아닌가?
25.팔공산 빨치산
해가 떠오르는 아침 냇물을 마시고 세수를 하는 중 5-6명의 빨갱이를 만났다. 총부리를 겨누지 않고 우리의 등을 두드리며 “동무들 어디서 왔소? 우리는 적이 아니 오.” “우리는 여기사는 빨치산이오.”
빨치산은 유격대원을 의미하는 프랑스어의 파르티잔으로 이에 따라 우리는 빨갱이라고도 불러왔다. 그들은 낡은 군복에 검은 배낭을 메고 99식 일본 소총을 들고 있었으며 모자 밑 터부룩한 머리가 귀 위를 덮고 있었으며 심한 악취가 풍겼다.
우리를 앉게 하고 배낭을 열어 포장된 빵을 하나씩 주며 먹으라 하면서 한명이 일어서 훈시를 했다. “동무들 우리는 압박하는 부르주아를 제거하고 우리 모두 평등하게 살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 세상을 만드는 전사요.” “이제 동무들은 우리와 함께 투쟁하는 전사가 됐소.”
부르주아는 귀족 자본가 프롤레타리아 노동자의 뜻으로 마르크스가 쓰든 말이다.
그들은 팔공산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인민 유격대로 대구주둔 6연대 출신 극좌파 군인과 자생 빨갱이, 그리고 6.25이전 이북에서 남파한 무장유격대로 구성되어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침묵으로 동조하며 그들을 따라갔다. 오히려 경찰에 의하여 사살되기보다 그들의 구조를 바라고 있었든 것이다.
그들 일행은 팔공산 거점에 도착 즉시 각각 다른 부대로 예속되어 낡은 군복과 99식 소총을 받았다.
팔공산 빨치산은 인민유격대 경북병단으로 46년 10월 항쟁 후 48년 좌익성향군인들이 자생적으로 팔공산을 배경하여 무장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같이 간 친구는 그 후 한번 도 만난 적이 없는 빨치산의 철저한 인사배치에 경외감을 느끼게 했다. 부부간이라도 같이 입산하면 서로 다른 부대에 배치하여 만나볼 수 없게 하여 상호 감시체계를 철저히 지 컸으며 특히 다수의 여성으로 구성된 그들 사이에서 남녀의 육체적관계가 발각되면 남녀 둘 다 자아비판 후 공개 처형되었다.
50. 6.28. 보도연맹의 무차별한 학살을 피해 팔공산의 비트에 도착한 이 한준 일행은 각각 다른 삼삼세포 조직으로 편입되었다. 삼삼조직은 빨갱이의 최하조직으로 조장한명에 2명의 조원으로 구성된다.
30개 조직이 1개 소대로 편성되고 3개 소대가 1개 중대로 구성된다.
조장은 40대로 전직은 선생님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그이상은 모른다.
우리는 동무라고 부르지 않고 선생이라고 부르며 소대장등 상관을 부를 때는 동무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만일 체포되었을 때에 조원의 신원이 밝혀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조원 간 에도 선생이라는 것 이외 그의 경력이나 이력을 말할 수 없고 이야기할 수 도 없으며 조원의 경력 등의 신상정보는 소대장급 간부만 알 고 있다. 나와 함께하는 조원은 4십대 초반의 농부인 것만 알고 있었다.
입소 후 다음날부터 조장에게 총을 다루는 것부터 교육을 받게 되었다. 99식 총을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는 과정에 총은 내 몸과 같이 생각하라고 몇 번이나 주위를 주었다.
수차래 분해 조립 후에 눈을 감고 조립할 수 있을 때에 수류탄을 들고 와서 설명을 하고 던지는 방법을 설명 할 때에 소름이 끼치도록 긴장이 되었다.
비트란 빨갱이들이 쓰는 용어로 비밀 아지트를 말한다. 그들의 비트에는 백여 명이 산재해있었는데 놀라운 것은 많은 여자 빨갱이가 있었다. 취사는 물론이고 환자의 간호를 맡으면서 보급 투쟁 등 어려운 일도 같이 하는 남녀동등을 지키고 있다.
대부분 부부가 같이 입산한 경우가 많은데 인사배치를 할 때 서로 다른 부대로 소속시켜 만날 수 없게 하는 것이 그들만의 규율이다.
총을 다루는 것을 습득한 후에 사격연습을 시작했다.
총알을 장전하지 않고 사격자세부터 시작했다. 엎드려 쏘아, 앉아서 쏘아, 서서쏘아를 계속하면 팔다리가 굳어오고 심한 고통이 왔다. 서서쏘아 자세에서 무거운 총을 들고 버티고 서있으면 나도 모르게 총구가 내려가면 조장은 다시 하라 고 고함친다.
사격자세가 숙달 된 후 실제사격연습을 하여야하나 비트에 숨어사는 그들은 총알을 사용하지 않고 연습을 한다. 총이 고정되는 엎드려 쏘아자세에서 방아쇠를 당기면 그 힘에 의하여 총구는 위로 올라가고 조준된 목표에 빗나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연습으로 바로 잡는 것이다. 사격을 할 때에는 반드시 숨을 멈추고 방아쇠를 자신도 모를 정도로 천천히 당기는 것이다. 어느 정도 숙달이 되고 나서 조장은 총구에 있는 조준장치 위에 콩알만 한 돌을 얹고 방아쇠를 당겨보라 지시한다.
방아쇠를 당기는 힘에 의하여 쉽게 돌은 떨어진다. 다시 조장은 돌을 얹고 “숨을 멈추고 나도 모르게 천천히 방아쇠를 당 긴다” 수 십 번의 시행착오 끝에 돌이 떨어지지 않는다.
“김 선생 총 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몰랐습니다.” 라고 말하니 조장은 “이 선생은 그래도 빨리 배웠소.” 수고 많았다고 칭찬했다.
빨치산 일차 관문인 총 쏘는 법을 3일 만에 훈련을 마쳤다. 총알을 넣고 쏘는 것은 이제 전투에서 실제 사격을 할 것 이다.
50.7월초 김일성의 메시지에 따라 지역 빨갱이들은 국군과 교전을 벌이거나 지역을 일시 점령하는 활동에 나섰다.
소수인원으로 치고 빠지는 게릴라전을 시작하는 것 이였다. 팔공산 비트도 시작하였다. 조장으로부터 저녁 식사 후 전투준비를 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그이상의 사항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전투준비에 대한 것은 일체 비밀에 붙이고 그때그때 마다 소대장이 직접 설명했다.
저녁식사 후 10발의 총알과 전투식량인 손바닥 만 한 백설기 2개를 받았다. 백설기는 흰떡으로 비트에 보관하였다가 전투에 갈 때에 1일 1개를 지급한다.
이때에 인민군은 이미 50. 6.28에 서울을 점령하고 물 밑 듯이 밀고 내려올 때이다. 우리의 임무는 낙동강을 도하 하여 게릴라전으로 적을 혼란에 빠트리는 것이다. 밤새 산 능선을 타고 행군하여 먼동이 틀 무렵에 낙동강을 볼 수 있었다.
소대장의 상황설명은 적은 후퇴하여 낙동강을 방어선으로 구축 하고 있다. 우리는 낙동강을 넘어가 그들을 혼란하게 하고 트럭이나 장비를 파괴하는 것이다. 수위는 어른 키를 넘지 않을 것이지만 그래도 깊은 곳은 피하라고 했다. 1950년 당시 심한 가뭄으로 도하하기 쉬운 상태였다.
낯 동안 나무 밑 수풀 속에 숨어 있다가 어두움이 내릴 때에 강을 건너기 시작 했다. 깊은 곳은 어깨까지 올랐지만 대부분은 정강이 까지였다.
일단 물가에 집결하여 소대장의 지시에 따라 흩어져 목표물인 국군 부대에 허리 굽혀 가까이 접근할 즈음 총성이 울리며 우리들에게 기관총이 불을 뿜으며 서치 라이터가 우리 근처를 비추기 시작했다.
우리는 가까운 근처의 낮은 언덕 밑으로 몸을 숨기며 총을 쏘기 시작했다. 갑자기 당하는 적의 공격에 한동안 어쩔 중 모르는 동안 소대장의 고함이 들렸다. “사격개시” 총알을 장전하고 적의 라이트를 향하여 방아쇠를 당겼다.
어두움 속에 적은 보이지 않았고 우리 머리 위를 비추는 라이트불빛을 따라 총알이 날라 오기 시작했다. “앞으로 전진”소대장의 고함 소리에 우르르 뛰어가는 대원중 3-4명이 앞으로 쓸어 지는 것이 보였다. 적 부대 앞 가까이 까지 간 대원들은 포복의 자세를 취하며 총을 쏘기 시작했다.
“꽝하며 소리가” 나며 잠시 주위가 확 밝아지는 사이 철조망 저쪽에 몇 명의 적이 어두움 속에 잠간 보였다. 조장이 가지고 있든 수류탄을 던진 것 같다. 나는 납작 엎드려 적이 보였든 쪽으로 잠간 동안에 가지고 있든 총알을 장전하여 다 쏘아버렸다.
“숨을 멈추고 정 조준하여 서서히 방아쇠를 당 긴다”는 것은 훈련 때에 쓰는 말이고 이렇게 당 할 때는 거의 무의식속에서 난사하는 것 이다.
기관 총소리, 총소리, 이따금 들리는 수류탄 소리에 나는 넋이 빠져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다가 총구에 대검을 꼽았다. 적이 오면 대검으로 찌르는 도리밖에 없었다.
잠시 후 소대장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전원 후퇴” 돌아서 총을 잡고 죽으라하고 강물 속으로 뛰어 들었다. 이 순간 나의 귀밑으로 총알이 스쳐지나가고 잠시 후 나의 머리위로 유탄이 날아들었다.
한참 후 우리가 모였든 나무 밑 수풀 속에 몸을 던져 쓰러졌을 때에 탈진상태가 되어 한동안 움직일 수 가없었다.
비트로 돌아 왔을 때에 상처가 적은 4명의 대원이 여자대원의 간호를 받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5대의 적의 트럭을 파괴 하였고 10명이상 적을 살상했다는 것을 소대장을 통해 이야기들을 수 있지만 우리대원이 몇 명 죽었다 는 것은 일체의 함구사항이었다.
26. 인민군 소대장 이 한준
첫 교전 후 20여일이지나 비트는 진격해온 인민군 내무서원에게 접수되면서 나는 축구주장이라는 전 경력이 참조되어 소대장으로 현지 임명되었고 대원 30명을 거느리고 7월 24일 인민군4사단 거창공격의 정찰임무를 임명받았다.
30명으로 구성된 정찰대는 대부분 팔공산 출신 거창, 합천, 창녕 등 서부경남출신이며 이중에는 3명의 여자대원도 있어 침투정찰을 위하여 대부분은 일반인 복장을 하고 있었다.
여자대원 한사람은 나와 같은 대구팔공산 빨치산 출신으로 17살의 날씬한 몸매에 눈에 뛰는 예쁜 얼굴 이 엇다.
그는 전라도 H읍에서 면서기 이자 지주인 그의 아버지의 입산 한 후에 그의 가족들은 2년간 경찰에 의하여 숫한 고통을 받아오다가 그의 외척이 있는 대구로 이사를 왔다. 얼마 후 대구에서도 사찰경찰에 의하여 수차례 의 심문에 힘 겨워하다가 가족 몰래 고등학교 2학년 때에 입산하였다.
그는 팔공산 비트에서 취사와 간호 업무 일을 하다가 나와 함께 침투 정찰에 편입되었으며 후일 내가 죽을 때까지 나의 측근 부관으로 근무하다가 총상을 입고 투항하여 3년의 옥고를 치러야했다.
여기서 미전향 장기수 정순덕의 일기를 보면 그들의 철저한 인사배치와 교육방법을 볼 수 있다. 좌익세력이 강한 경난 산청군에서 16살에 결혼한 정순덕은 인공치하 부역 때문에 입산한 남편의 겨울옷을 쌓아들고 지리산에 들어가 남편을 만난 2일후 서로 다른 부대에 예속된다.
그 후 3일 만에 남편이 사살되었다는 통보를 받고 좌절의 상태에 있는 그를 분노의 투사로 만든 것은 빨갱이의 투철한 사상교육 이였다.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는 그를 한글은 물론이고 어려운 한자까지 깨우치게 하여 지리산 호랑이가 되게 하였다.
순박했든 16살의 새댁이 보급투쟁에 나가 입산에 동조하지 않는 주민을 목 졸라학살하고 일장연설을 한 그는 사상교육이 만든 악마의 화신으로 부근 주민들이 아이가 울면 호랑이가 아니고 정순덕 이가 온다고 하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한다. 빨치산의 인사와 사상교육은 아편과 같다는 일화는 이것으로서도 입증되는 것이다.
팔공산 빨갱이 들은 6.25일 밤 김일성의 남반부 빨치산 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받고 인민군침입의 교두보를 마련하기위하여 50년 7월 대구동촌 비행장을 한때에 점령하기도 했으나 다시 대구팔공산을 점령하고 인민군의 남진을 도우라는 명령을 받고 참전했다.
여러 곳에서 활동하든 빨갱이들은 동시다발적으로 인민군의 남진에 호응했다.
대구전투는 6.25초기 유엔군과 인민군의 교전으로 1950.8.5일부터 8.20동안 낙동강을 건너 공격하려는 인군은 6만의 병력과 수 십대의 전차를 집중하였으나 미군 B-29의 대폭격으로 궤멸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한편 50.7.24일 인민군은 영호남을 잇는 교통로인 거창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거창은 낙동강 서부방어를 구축하는 요충지로 인민군의 남침을 저지하기 위하여 국군과 미군이 방어했지만 수적 열세에 패배 하였으며 이 전투에 이 한준은 정찰 임무를 맡은 임민군소대장으로 참전한다.
빨치산 은 대구를 포기하고 50 8.15일 창녕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을 습격하여 수십 대의 차량을 폭파했다.
1950. 7월 25일 전라도에서 퇴각한 국군의 잔존부대와 미8군 사령관 워커중장이 배치한 24단이 거창읍을 가로지는 영호강에 배수의 진을 치고 있는 것을 정찰하였다. 이와 함께 밀려 내려오는 피난민의 대열은 그 끝을 볼 수 가 없었다.
높은 산악지대로 둘러싸인 거창지형은 상세한 지형을 모르고는 인민군도 작전은 어렵다. 우리 정찰대가 제공한 정보에 의하여 그들은 작전을 하고 2일 만에 거창전투를 끝내고 합천으로 밀고 들어갔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이 한준은 지리산 산자락 끝인 언덕위에서 읍내를 둘러보았다. 저 다리를 건너면 한 걸음 안에 내가 살든 집이 나온다. 울컥 솟아오르는 감격의 이 순간 나는 자신을 주체할 수 없었다. 몇 달 전 봄날에 나는 교복을 입고 부모님의 마중을 받으며 저쪽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 내려왔든 신작로도 보인다.
불가 3개 월 전에 나는 함성과 박수를 받으면 공을 몰고 운동장을 질주하든 축구선수인 내가 인민군 장교 복장을 하고 읍내가 훤하게 보이는 이곳언덕에서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신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잘못이 있다면 보도연맹가입서 에 도장을 찍어 준 것 밖에 없다. 장관들과 높은 사람들 다 도장을 찍었는데 운동선수로서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우리는 이를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높은 사람들은 그냥 두고 힘없는 우리들만 끌고 가서 집단 학살을 시킬 것인가?
나는 죽지 않으려고 산으로 도망쳤고 이제 인민군 정찰 장교가 되어 돌아왔다. 줄이어 지나가는 피난민들이 부러웠다. 저 피난민들 속에 우리가족들도 가고 있을 까? 나는 저들 속에 섞여갈 수 도 없다. 가다가 경찰이나 헌병을 만나면 잡혀 총살을 당 할 것이다.
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인민군 정찰장교로 그들의 앞잡이가 되는 것밖에 없다. 옆에 같이 서 있는 우리 대원들은 유심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고 K여고 출신 여대원은 측은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는 나를 잘 알고 있었다. 학교시절 운동장에서 공을 몰고 질주하는 축구부장인 나를 선망의 대상으로 박수를 보냈고 팔공산 비트에서 함께하면서 거창읍이 고향인 나를 알고 있었다.
우리 둘은 정찰대원으로 함께 하며 차츰 애정을 느끼면서 그때마다 웃음을 주고받았다.
다음은 낙동강전선은 살점이찢어지고 피가흐른다. 제2부로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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