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1장 1-3절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신약은 네 개의 복음서로 시작합니다. 이 복음서들은 기록자의 이름을 따라 복음서의 제목을 붙여놓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태복음의 기록자가 마태이며, 마가복음의 기록자가 마가이며, 누가복음의 기록자가 누가이며, 요한복음의 기록자가 요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딤후3:16). 다시 말해 기록자는 마태요, 마가요, 누가요, 요한이지만, 네 복음서의 참된 저자는 오직 하나님 한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날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을 한 눈으로 본다, 혹은 공통된 관점에서 본다는 의미로 공관복음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자칫 인간의 관점을 부각하는 표현이 아닌가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마태의 관점으로, 마가복음은 마가의 관점으로, 누가복음은 누가의 관점으로, 나아가 요한복음은 요한의 관점으로 기록되었다고 말하는 것에 대하여 주의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네 복음서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고,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록되었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네 복음서를 비교해 보면 처음 세 복음서와 요한복음의 경우 어떤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칼빈에 따르면 다른 세 복음서는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을 보다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면, 요한복음은 그리스도의 직분과 그리스도의 죽음, 그리고 부활의 능력이 설명되어 있는 교리적인 면을 더 많이 강조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인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을 보면 어떤 사건을 중심으로 기록한 반면, 요한복음은 사건과 더불어 그 사건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것까지 장황하게 설명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마태 마가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무엇에 비유하기도 하느냐 하면 처음 세 복음서의 경우 예수님의 몸을 나타낸다면,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영혼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때문에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는 내용이라면 무엇보다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칼빈의 경우 요한복음이 나머지 세 복음서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한 예로 오병이어 사건만 비교해 봐도 분명합니다. 이 오병이어 사건은 네 복음서가 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처음 세 복음서의 경우 사건만 기록하고 있다면 요한복음은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매우 길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의 이해를 가지고 나머지 복음서를 보면 좀 더 명확한 이해를 할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의해야 하는 것은 사건만 기록한 마태, 마가, 누가복음의 경우 요한복음에서 설명한 그런 뜻을 담지 않고 기록했느냐 했을 때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사건만 기록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하게 하셨고, 그렇게 기록하게 하셨을 때는 그것을 통해 알리고자 하시는 뜻을 담고 기록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요한복음처럼 기록하지 않았다고 해서 마태, 마가, 누가복음의 경우 요한복음보다 못한 복음서라 할 수 있느냐? 결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들을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이 참된 저자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고 모든 성경을 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이상 모든 성경은 동일한 권위를 가집니다. 이사야의 경우 다른 성경에 비해 분량이 매우 많습니다. 장수로는 육십 여섯 장입니다. 반면 한 장으로 기록된 성경도 있습니다. 그럼 한 장에 비해 육십 여섯 장이나 되는 분량의 성경이 더 권위 있는가? 그렇게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을 대할 때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놓치지 않는 관점에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앞서 칼빈이 요한복음이 나머지 세 복음서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고 말했지만, 세 복음서와 요한복음을 비교하면서 마지막쯤 이렇게 말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네 명의 복음서 기자들에게 각자 쓸 부분을 받아쓰게 하심으로 전체가 하나의 완전한 몸을 형성하도록 섭리하셨다.” 이런 이해는 전 성경과 관련해서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부분입니다. 판명성에 있어서는 보다 더 뚜렷하게 말하는 부분이 있지만, 앞서 말한 대로 사건만 기록하게 하셨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본래 가지고 있던 뜻을 담고서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해 주시는 성령의 조명하심을 간구하면서 모든 말씀을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전체가 하나의 완전함으로 있게 하셨기 때문에 바로 그런 측면에서 좀 더 분명히 말하고 있는 부분을 가지고 그렇지 못한 부분을 살피는 것은 성경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해석의 틀을 가져다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네 복음서의 차이가 있고, 특별히 처음 세 복음서가 다소 비슷하게 기록한 것이 있지만, 모든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알리고자 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예수님에 대해 요한복음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절을 보시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우선 여기 ‘말씀’이 지칭하는 바는 1절 마지막 부분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입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나 앞에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구별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은 하나님이시지만, 그분은 하나님과도 함께 계셨다고 말할 수 있는 분이란 것입니다. 그분이 누구냐? 우리가 요한복음 1장을 전체적으로 읽지는 않았지만 요한복음 1장 14절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표현을 합니다. 그러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분이 곧 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말씀이신데, 그분은 성부, 성자, 성령 가운데 성자 밖에 없기 때문에 지금 요한복음 1장에서 말하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으로 불리는 이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인가?” 지금 요한은 여기에 초점을 두고 1절과 2절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1절을 보시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으로 불리는 예수님은 언제부터 계셨는가? 요한은 ‘태초’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태초라는 말을 시간의 개념에서 풀게 되면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간 안에서 존재하는, 달리 말하면 피조물처럼 여겨질 수 있기 때문에 결코 시간의 개념에서 풀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1장에 보면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골1:15)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1:17)고도 말씀합니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 만물보다 먼저 계신 분, 달리 말하면 피조세계가 있기 전부터 계신 분이 바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얼핏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말하니까 태초라는 말에 시간의 개념이 들어 있는 것처럼 여기기 쉽지만, 요한복음 1장 1절의 이해를 가진다면 창세기 1장 1절은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뜻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그분은 태초부터 계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은 창조주라는 사실입니다. 피조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아니라는 것은 지음 받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도 다 지음 받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간 전에도 계셨고 공간이 없을 때도 계신 분,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태초라는 말은 단순히 시간이나 공간의 개념이 들어간 시작을 의미하는 단어라기보다는 그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태초부터 계셨는데, 그분은 시간을 초월하신 분이요 공간을 초월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은 시간이 만들어 지기도 전에 계셨고, 공간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이신 예수님도 그런 분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예수님은 시간을 초월하시고 공간을 초월하신 분이신데, 그분이 누구와 함께 계시느냐?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해서 하나님과 다른 분으로 계시느냐? 그렇지 않다는 측면에서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도 덧붙입니다. 쉽게 말해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하나님이시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구별되신 분, 그분이 바로 말씀이신 예수님이신 겁니다.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다소 어렵게 들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차분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하나님이 한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신6:4). 그러나 한 분이라고 할 때 우리가 주의해야 될 것은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요4:24) 물질적인 존재로 이해하거나 우리처럼 육체를 가진 분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보이는 어떤 대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분으로 존재하신다는 겁니다. 특히 성경은 한 분 하나님이시지만 삼위로 존재하신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역사를 보면 성경에 ‘삼위일체’라는 말 자체가 나오지는 않지만 한 분 하나님이 계시지만 삼위로 존재하신다고 해서 하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표현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의 단순한 하나님의 본질(esence) 안에 세 위격(persons) 또는 세 실체(hypostases)가 계시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할 때는 삼위의 구별됨에서 표현한 말이고, 이후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는 말은 한 분 하나님, 즉 삼위 하나님은 본질이 같다는 의미에서 표현되고 있는 말입니다.
따라서 지금 1절을 통해 요한이 알리고자 하는 사실은 무엇인가? 말씀이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란 사실을 알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분이시며, 말씀이신 예수님은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결코 피조 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동일본질로 계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별된 분으로 계시다는 겁니다.
실제로 요한이 이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요한은 사도들 가운데 가장 오래 산 사람이었고, 그가 밧모 섬으로 유배될 때가 1세기말 도미티안 황제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1세기 말에 에비온이라는 사람이 나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특히 에비온파의 경우 1세기 말 팔레스틴에서 시작되어 후에 소아시아 지방으로 확산되었는데, 대체로 유대적 기독교인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 부류들입니다. 문제는 저들이 어떤 주장을 했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면서, 예수는 메시아이지만 수세 시 성령이 임했던 한 인간에 불과하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사도 요한이 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 가운데 한 가지는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심을 알리기 위해서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은 처음부터 무엇을 밝히고 있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심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이 기록되고 난 뒤에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이단들이 종종 등장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이단이 아리우스주의입니다. 특히 아리우스는 말씀은 성부와 함께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말씀은 영원하지 않고, 피조물 가운데 으뜸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골로새서 1장 15절과 같은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앞서도 잠시 언급했던 말씀인데,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 그렇기 때문에 분명 나지 않았을 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나지 않았을 때가 있었기 때문에 피조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창조된 분으로 창조되지 않았을 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으로 아리우스는 말씀은 신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주장을 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를 따르는 자들도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이런저런 많은 주장을 펼치기도 했지만, 결국 그들은 정죄를 받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하다. 특히 골로새서 1장 15절에서 그가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셨다는 것은 창조와 관련된 표현이 아니라 위격 상호간의 관계를 따라 표현할 때 발생에 대한 부분입니다. 즉 예수님은 피조물이 아니라 성부와 동일본질로 계시며 모든 만물에 대하여 창조하신 분이시지만, 성부와의 관계에 있어서 성부로부터 나셨다고 말할 수 있는 분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셨다고 말하기 때문에 나지 않은 때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계셨다는 의미에서 영원한 발생으로 계신 분, 그가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에서는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는 말씀을 통해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 걸러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에 대해 예수님은 시간 이후에 존재한다든가, 아니면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피조물이라든가 하는 것은 참된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혹 성경에 표현 방식에 있어서 나셨다는 말씀이 있다면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가를 잘 살피셔야 합니다.
심지어 2세기 때는 종속설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나왔는데, 종속설이란 무엇인가 하면 아들은 아버지보다 하위에 속하며, 본성에 있어 열등하다고 말하는 견해입니다. 어디 어디에 종속되어 있다는 개념인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종속되었다거나 열등한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누구신가?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시며, 동일한 본질로 계신 분이십니다. 조금 더 쉽게 설명하자면 성부께서 스스로 계신 분이시듯 성자께서도 스스로 계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속성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부께서 무한하신 분이시듯 성자께서도 무한하신 분이시며, 성부께서 영원하신 분이시듯 성자께서도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성부가 불변하다면 성자 역사 불변한 분으로 계십니다. 성부가 영광스러우시다면 성자 역시 동일하게 영광스러운 분으로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말함으로 성부는 성자가 아니라는 구별을 요하고 있다는 것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다시 말해 복음서에서 증거 되고 있는 것처럼 우리를 위해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은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지, 성부와 성자가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성부가 육신을 입고 오셨다거나 성부가 우리를 대신해 고난을 받으셨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에 대한 이단 중에 양태론이라는 이단이 있는데, 한 분 하나님이 이런 모양, 저런 모양으로 나타나셨다고 말하는 자들입니다. 오늘날 가르치기를 제가 아내에게는 남편, 교회에서는 목사, 우리 아이들에게는 아빠라고 불리는 것처럼 가르치는 것이 양태론인데, 그들이 어떤 주장을 했느냐 하면 성자께서 고난 받으신 것은 성부께서 고난 받는 것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을 성부고난설이라고 말하는데, 요한복음 1장 1절은 바로 이것까지도 걸려내고 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성부는 성자가 아니라는 구별을 분명히 말씀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구별이 있다고 해서 마치 구분하여 따로 떼어놓아서도 안 된다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비록 성부는 성자가 아니시며, 성령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말할 수 있지만 성부, 성자, 성령은 한분 하나님이란 사실입니다. 세 분이 아니십니다. 한 분 하나님 안에 삼위로 존재하신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의 경우 그의 삼위일체론에서 가장 중요하게 정의하고 있는 것이 “성부 성자 성령은 분리할 수 없으며 분리되지 않은 채 역사하신다”는 말이었습니다. 구별은 되지만 구별한다고 해서 분리할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니란 것입니다.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결국 사도 요한이 1절을 통해 드러내고자 한 사실을 요약하면 이것입니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하나님이란 사실입니다. 시간이 존재하기 전에도 계셨고, 공간이 존재하기 전에도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누구로부터 지음을 받은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계신 성부 하나님과 동일본질로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는 구별되신 분이신데, 구별된다고 해서 성부와 본질이 다르다거나 아니면 유사하다거나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하느냐?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본래 영원하신 신성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고 알리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 1절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왜 이 말씀을 하고 있느냐? 인류의 회복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성자만을 통해서 성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음 주에 보게 되겠지만 요한복음 1장 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다시 말해 참 생명은 그리스도 없이는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참 생명을 줄 수 있다. 어떻게 해서 그것이 가능한가? 도대체 그분은 어떤 분으로 계시기에 참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인가? 바로 하나님과 함께 계시면서도 하나님 자신이신 분, 성부와는 구별된 분이시지만 그러나 분리할 수 없는 분으로 계시다는 것을 통해 그분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 아니라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이시기에 그것이 가능하다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심지어 사도 요한은 무엇까지 말씀하느냐 하면 그분이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것까지 말씀합니다. 2절과 3절을 보시면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우선 2절은 1절 말씀을 요약적으로 해서 받습니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런 분이 3절에서는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가 되신다는 것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성부만이 창조주가 아니라 성자 역시 창조주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앞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성부, 성자, 성령은 분리할 수 없고, 분리되지 않은 채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이 이 세상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다면, 그것도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다면, 아니 모든 만물을 만드시고 난 뒤 가장 으뜸인 존재로 사람을 만들되 육신과 더불어 영혼을 가진 존재로 만드셨다면 왜 새로운 생명을 줄 수 없겠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창조주로서 모든 만물을 만드셨기 때문에, 그것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만드신 분이시기 때문에 혹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가운데 죄가 들어왔다곤 하지만, 그래서 모든 인류가 하나님 앞에서는 죽은 자로 있게 되었지만, 그분이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고도 남을 만큼의 능력과 지혜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요한은 그것을 우리에게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모든 만물을 지으신 참 하나님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생명도 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해야 되는 것은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참 생명은 어디 안에만 있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창조주시요, 하나님 동일본질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 그와 동일하게 중생이라는 문제 역시 하나님 자신이 아니고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이하에 보면 이렇게 예수님을 소개하고 그 안에 생명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에게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오셨지만 사람들의 상태는 어떠한가? 5절 말씀을 보시면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말씀합니다. 빛이 와도 빛을 깨닫지 못할 정도로 인간의 죄성이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가망성이 없는 문제, 그것이 바로 구원의 문제요, 생명의 관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는 결코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오신 분이 누구시냐? 바로 참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마치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것처럼 죽은 영혼을 다시금 살리실 수 있는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같은 의미에서 요한복음 14장에서는 예수님 자신이 자신에 대해서도 이렇게 증거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하나님과 우리와의 끊어진 관계를 누구만이 연결시킬 수 있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생명이고, 그분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십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예수님밖에 없고, 하나님 앞에서 참된 생명은 그분 외에는 아무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구원의 길이 열려있지 않음을 다시금 확인하셔야 합니다. 오늘날 시대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 외에도 구원의 길이 열려 있는 것처럼 다원주의라는 이름으로 연합을 하고 있는 분위기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유일한 중보자이십니다. 가톨릭의 경우도 보면 예수 그리스도 외에 성인이나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조차 마치 중보자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단순히 인간으로서만 오신 것이 아니라는 걸 확인해야 합니다. 그분은 누구시냐? 태초부터 계신 분이십니다. 시간 안에서 존재하신 분이 아니라 시간이 존재하기도 전에 존재하신 분이십니다. 육신을 입고 오셨지만 육신을 입고 오시기 전에도 존재하셨던 분이십니다. 존재하지 않을 때가 없으신 분, 그리고 그분은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으로서 곧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는 구별된 하나님, 그러나 하나님 자신이신 분! 바로 신성을 지니고 계신 분이신 겁니다. 인성을 입으셨다고 해서 인성 안에만 매여계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겁니다.
그런 분이 무엇을 위해 오셨는가? 바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맨 처음 모든 만물을 만드신 것을 창조라 한다면, 죽은 영혼을 살리기 위해 오신 것, 바로 재창조, 새 창조를 위해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사도 요한 왜 ‘말씀’이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그분을 나타내고 있는가? 요한복음 3장 31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요3:31-34) 여기 보면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한다고 말합니다. 즉 예수님은 위로부터 오신 분이시고, 땅에서 난 자가 아니기 때문에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오시는 분으로서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할 수 있는 분, 그러나 자기 마음대로 증언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시는 분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한다는 측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이라 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나타내기 위해 오셨다는 측면에서 말씀이라고 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창조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이 이르시되’라는 반복되는 말씀들이 창세기 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말씀하시자 말씀하신 그대로 됩니다. 비록 물질적인 존재는 아니시지만, 그리고 우리처럼 육체를 지니고 계시지도 않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존재를 그분의 말씀으로 증명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존재하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보이는 방식으로 이 땅에 오셨는데, 그분은 다름 아닌 구약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지금 사도 요한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을 말씀으로 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만 유대인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그들이지만, 정작 메시아가 왔을 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장 5절에서 증거 하는 것처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약에서 말씀하신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십니다. 그런 그가 인성을 취하여 오셨습니다. 신성으로서는 동등하시지만 인성을 취하심으로 낮아지신 것입니다. 그러나 낮아지셨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자로서 하늘에 속한 가르침을 가르치는 분이신 겁니다. 그래서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차원에서 말씀으로 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두에 말했지만 마태복음은 마태가 기록했습니다. 마가복음은 마가가 기록했고, 누가복음은 누가가 기록했습니다. 요한복음 역시 요한이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이상 이 말씀들은 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가 차매 성자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인간의 육체를 입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늘의 뜻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복음서는 바로 그 말씀을 기록해 놓은 책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보면 그런 측면을 강조하는 것처럼 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일반 검정색이 아니라 빨간색으로 표시하기도 하는데, 빨간색으로 표시된 것만이 예수님의 말씀이고 검정색으로 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아닌가? 좀 더 나아가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빨간색으로 표시된 것만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검정색으로 표시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가?
여러분, 구약의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이고 신약의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이상 성경 66권 전체가 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만 유독 빨간색으로 구별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으로 예수님을 통해 말씀하도록 하셨다면, 구약에서는 선지자를 통하여, 예수님 이후로는 사도들을 통하여 동일하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자 하십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기에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지만,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방편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자 하신다는 것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의 말씀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생명을 줍니다. 이것을 요한복음 10장 10절에서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기도 하십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에 대하여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유대인들처럼 노골적으로 거절하는 분은 없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하면서도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말씀을 취사선택하는 것처럼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형편이 좋을 때는 말씀을 받는 것처럼 하고, 반대로 내 형편이 좋지 못할 때는 말씀을 버리는 것처럼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복음의 말씀 앞에서는 받는 자로 있지만 율법의 말씀 앞에서는 버리는 자로 있는 것은 아닙니까?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구약이나 신약이나 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해서 특별한 말씀이 아니라, 사실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어느 말씀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취사선택할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말씀에 대한 분별이 있어야 합니다. 이단들의 경우도 보면 많은 부분 말씀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출발했습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는 말씀에 대한 분별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생명을 위해 주신 말씀에 대하여 어떤 것은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받아들이지 않는 자세는 결코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앞서 주께서 온 것이 생명을 주고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는데, 복음이 우리에게 생명을 준다면 율법은 그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한다는 차원에서 우리는 결코 율법을 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면, 그래서 복음서를 통해 친히 말씀하신 바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면, 심지어 동일한 말씀을 복음서 기자들뿐만 아니라 사도들을 통해, 앞서 구약에서는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다면 우리는 그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겨야 합니다. 무엇보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도록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다면(딤후3:16)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교훈과 책망을 받아야 할 것이고 결국 그런 과정을 통해 바르고 의로운 자로 자라갈 수 있다는 확신을 분명히 가져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을 통하여,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통하여 생명을 얻고 더욱 풍성하게 얻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