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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천 목사의 설교학 강의
설교란 무엇인가?
설교는 3가지 요소를 지니고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조리있게 잘 표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고
셋째는 양떼들의 영혼에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이라 함은 설교의 재료를 말하는 것이고
"조리있게 잘 표현한다"는 것은
설교의 재료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표현하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며,
"양떼들의 영혼에 깊은 감동을 준다"는 것은
설교의 결과를 말하는 것인데,
지금까지는 설교의 첫째 요소인 재료 문제,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논해 왔다.
지금부터는 설교의 둘째 요소인 방법,
즉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하면 조리있게 잘 표현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이 방법에 있어서 3가지가 관계되어 있는데,
첫째는 조직이요,
둘째는 언어이며,
셋째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제 1 장 : 서 론 {말씀(자료)}
이것은 설교의 자료 즉 밑천을 말한다.
"설교자로서 설교의 자료를 어디에서 얻을 수 있겠는가"하는 문제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한 두 번 하다가 마는 설교 이거나,
한 두 달, 아니 일 이 년만 하다가 마는 설교라면 몰라도
까만 머리가 백발이 되도록 평생해야 할 설교이니 문제가 큰 것이다.
더구나 설교의 회수를 계산해 보면 새벽 기도회의 설교는 계산에 안 낳고라도
주일 아침 설교, 저녁 설교, 삼일 저녁 설교만 계산하더라도
한 주간 동안에 최소한 세 번씩은 해야 할 설교를 평생토록 해야 하니
그 많은 설교의 자료를 어디에서 구해 오느냐 하는 문제는
아무리 생각해도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교인들은 설교를 안 좋아하니
최소한도 한 주간에 세 번씩 평생해야 하는 설교를 할 때마다
반복하지 않고 새로운 설교로만 밑천을 삼아야 한다는 사실은
설교자로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기에 설교자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이 설교의 자료를 어디에서 구하느냐에 대하여 심각한 고민들을 하고 있다.
제 1절 : 자료 선택의 일반적인 방법
일반적으로 설교자들이 자료 선택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어디에서 설교의 자료를 얻는 4가지 유형을 알아 보자.
1. 설교집을 통해서 얻는 방법
다른 사람이 쓴 설교집을보고 설교집 그대로 하거나 약간 수정해서 설교한다.
=> 설교자가 설교집을 읽다가 좋은 설교를 만나 자기 자신이 은혜를 받고 감동 되었는데,
자기 혼자 은혜를 받기 너무 아까워서 교인들에게도 설교하여
같은 은혜를 받게 하는 것이 나쁠 이유는 없다.
2. 교인들의 말을 근거로 설교하는 방법
설교자가 목회하는 자기 교회에서 교인들 사이에 최근에 떠 돌고 있는 말을 근거로
설교 하므로서,
최근에 자기의 교회에서 교인들 사이에 오고가는 말이 당장 다음 주일 설교에 반영 되어
나온다.
그래서 눈치 빠른 교인들은 목사의 설교를 들을 때에
최근에 자기 교회 안에 어떤 말이 돌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고,
좀더 눈치 빠른 교인들은 근래에 교회에 돌고 있는 말을 보아
다음 주일 자기 교회 목사님의 설교가 어떤 설교일지를 짐작하며,
또한 그 짐작이 거의 들어맞는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이 어떤이들은 자기 교회 안에 떠돌고 있는 말을 근거로 설교의 자료를 취하기도 한다.
=> 교인들의 말을 근거로 설교 하는 방법을 생각 할 때,
우리는 우리가 누구에게 설교하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설교는 산의 나무나 바위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교회 양떼들에게 설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교회 양떼들의 동정을 잘 살펴서
자기의 교회 양떼들의 형편에 맞게 해야 되는 것이다.
양떼들이 근심을 할 때에는 근심하지 말라는 설교를 하고,
양떼들이 의심할 때에는 "확신"을 주는 설교를,
양떼들이 경제난에 허덕일 때는 "물질 문제에 대해서 걱정하지 말라"는 설교를 해야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양떼들의 동정을 잘 살펴서 그들에게 맞는 설교를 하는 것이 나쁘지 않다.
3. 시사 문제를 통해서 설교하는 방법
최근의 사건이나 되어가는 시사 문제, 즉 국내에서나 세계적으로 되어가는 시사를 배경하여 설교의 자료를 얻는 설교자들도 있다. 어떤 설교자는 설교의 최후 마무리를 주일 새벽 라디오 뉴스까지 듣고 시사에 관한 최신 뉴스를 그 날 설교에 반영 시키기도 한다.
=> 우리가 설교하는 시대의 사람은 17세기나 14세기의 사람들을 향해서가 아니라 21세기의 사람들, 즉 현 시대에 자신과 똑같은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설고 한다. 우리와 똑 같은 시대에 살고 있는 21세기에 살고 있는 교인들에게 요즘의 국내외 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중요한 시국에 대하여 성도가 어떻게 대처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방향을 설교자가 제시해 줄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한다고 하여 나쁠 것이 없다는 것이다.
4. 신학 서적 및 종교 잡지를 통해서 설교하는 방법
이것 저것을 읽다가 거기에서 좋은 자료가 생기면 그것을 바로 설교의 자료로 사용하는 설교자들도 있다.
=> 신학 서적 및 종교 잡지를 읽다가 좋은 자료가 생겨서 이를 설교의 자료로 삼는 것은 오히려 너무 좋은 방법이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4가지 방법은 가끔 한 두 번씩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
때론 우연히 설교집을 보다가 좋은 설교가 있어서 나 혼자 은혜 받는 것이 아까워 교인들에게도 같은 은혜를 받게 하려고 한 두 번은 그렇게 할 수 있따는 것이다.
그리고 교인들 사이에 돌고 있는 말이나 교회 안에서 생긴 어떤 중요한 사건을 겨냥해서 한 두 번 거기에 대처하여 설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국내외 적으로 대 사건이 생길 때에 이런 시국에 대하여 우리 성도가 어떻게 대처해 나갈 것인가에 대하여 때로 한 두 번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신학 서적이나 종교 서적의 경우도 그렇다.
그러나 이 4가지 방법은 결코 언제나 그 곳에서만 설교 자료를 취할 수 있는 항구적이요 영구한 근원은 될 수 없다. 다른 어떤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곳에서만 설교 자료를 얻을 수 있는 근본적인 근원, 언제라도 그곳에서만 설교 자료를 얻을 수 있는 항구적이요 영구한 근원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새벽 기도회 외에 한 주간에 최소한 세 번씩 평생토록 해야 하는 설교의 자료가 전부 4가지의 방법에서만 나와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설교가 전부 설교집에서 나오거나, 전부 교인들 사이에서 떠돌고 있는 말이나 사건에서만 나와서는 안 된다. 만일 한 주간 동안에 색다른 화제가 세 번씩 바뀌거나 색다른 사건이 세 번씩 일어나지 않으면 어디에서 설교 자료를 얻을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신학 서적도 그렇다. 신학 서적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한 주간에 세 번씩 평생토록 해야 하는 설교의 자료를 다 공급해 줄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때로 이 4가지의 방법이 때로 한 두 번씩 사용되어질 수 있으나 1년 동안에 한ㄴ번이나, 혹은 수년 동안에 한 번씩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4가지 방법은 결코 다른 어떠한 일이 전혀 없다 하더라도 오직 그곳에서만 설교 자료를 취할 수가 있는 근본적인 근원, 언제나 그 곳에서만 설교 자료를 취할 수 있는 항구적이고 영구한 근원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제 2절?: 설교의 항구적인 근원
다른 어떤 사건이 없어도 설교 자료를 취할 수 있는 근본적이며 항구적인 근원은 오직 성경 뿐이다.
성경이야 말로 다른 어더한 일이 없더라도 오직 그 곳에서만 설교 자료를 취할 수 있는 근본적인 근원이며, 항구적인 근원이 될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 성경책만이 근본적이고, 항구적이며, 영구한 설교 자료의 근원이 될 수 있는가?
인간적인 면에서 설교자 자신이 성경 본문을 수 없이 읽는 일이며, 은혜 면에서는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아무리 성경 본문을 많이 읽는다 하더라도 성령님께서 우리들의 영안을 밝혀 본문 속에 숨어 있는 성령님의 숨은 뜻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지 않는 한 우리에게는 성경 본문에 인쇄된 글자 밖에는 다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우리의 영안을 밝혀 주시는 때에는 까맣게 인쇄된 글자 속에 숨어 있는 성령님의 숨은 뜻, 즉 단 한번이라도 성령님께서 보여 주셔야만 볼 수 있는 성령님의 듯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이것은 설교자가 아무리 고급 안경을 껴도 볼 수 없고, 심지어 레이다 장치를 가지고도 안 된다. 우리가 신, 구약 성경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의 눈을 밝혀 인쇄된 본문의 글자 속에 숨어 있는 성령님의 숨은 뜻을 안 보여 주시는 한 본문을 아무리 읽어도 인쇄된 글자 밖에는 아무것도 안 보인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 눈을 밝혀 주시는 때에는 수 백 번을 읽으면서도 그냥 지나치던 본문인데, 그 본문의 인쇄 된 글자 속에 숨어 있는 성령님의 숨은 뜻이 보인다. 본래 계시의 말씀은 주님께서 은혜로 보여 주셔야만 깨달아 알 수 있도록 되어져 있다. 눅24:16에 보면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저희 중 두 사람이라고 했으니 예수님과는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지내던 사람인 것이 틀림없다. 예수님을 잘 아는 두 사람이 있었든데, 그들이 에루살렘에서 엠마오로 25리 되는 길을 걸어가면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가까이 동행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수님이신 줄을 몰랐다. 그 이유는 그들의 눈이 가리워졌기 때문에 그랬다고 한다. 평소에 잘 알고 있던 예수님인데 25리나 되는 길을 예수님과 더불어 그렇게 가까이에서 동행하면서도 예수님이신줄 알아 보지 못했다고 하니 눈이 가리워진 다는 사실은 참으로 불행한 것이다.
그러나 31절에 보니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았다는 말이 나온다. 25리를 가까이 동행하면서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두 사람이 눈이 밝아질 때에 비로소 예수님이신 줄 알게 되었으니 우리의 눈을 밝혀 주신다는 사실은 너무나 감사한 일인 것이다.
우리들이 성경 본문을 아무리 많이 읽는다고 하여도 우리의 눈이 가리워져 있는 한 본문 속에 숨어 있는 성령님의 숨은 뜻은 볼 수가 없다. 언제건 간에 성령님게서 우리의 눈을 밝혀 주시는 그 시간에라야 비로소 본문 속에 숨어 있는 성령님의 뜻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성경 본문을 수 없이 읽어 나가다가 성령님께서 우리의 영안을 밝혀 보여 주시는 말씀, 즉 본문의 인쇄된 글자 속에 숨어 있는 성령님의 쑴은 뜻이 바로 우리 설교의 자료가 되어지는 것이다.
필자는 이 자료를 일컬어 "기초 자료"라고 한다. 그 이유는 나중에 설교를 작성 할 때에는 이 기초 자료를 토대로 주석이나 신학서적을 참고하여 살을 붙일 수 있으나 설교의 기초가 되는 기초 자료, 마치 건물에 비하면 골조 공사에 해당되는 기초 자료는 성경 본문에서 나와야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경 본문을 보다가 성령님께서 우리의 영안을 밝혀 보여 주시는 이 기초 자료가 나올 때마다 노트에 차례로 적어 놓는다. 그러다가 후에 설교를 작성할 때에는 과거에 적어 놓은 것 가운데서 마음에 드는 어느 하나를 골라서 살을 붙여 설교를 작성 한다.
호랑이를 설명하는 사람들 가운데, 어떤이는 그림책 속에서 호랑이를 보고 설명하는 사람도 있겠고, 어떤 동물원에 가서 실제로 살아 움직이는 호랑이를 보고 설명하는 사람도 있을 것인데, 후자는 전자보다 좀더 실감나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심심 산골 험한 골짜기에 가다가 호랑이와 더불어 일대 일로 맞딱뜨려 구사 일생으로 살아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호랑이에 대한 설명을 가장 실감나게 설명할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설교집을 보고 하는 설교는 그림책이나 동물원에서 호랑이를 보고 설명하는 사람에다 비 할 수 있으나, 성경 본문을 읽다가 성령님께서 우리의 영안을 밝혀 보여 주신 자료로 외치는 설교는 험한 산에서 호랑이와 더불어 일대일로 맞닥뜨린 사람의 설명 같이 가장 생생하고 실감나는 설교가 된다.
잠 17:24에 "지혜는 명철한 자의 앞에 있거늘 미련한 자는 눈을 땅 끝에 두느니라"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의 뜻은 사람이 무엇을 얻으려면 얻을 수 있는 자리에 가서 얻으라는 말씀이다. 지혜는 명철한 자의 앞에 있으니 지혜를 얻으려면 명철한 자에게 가야 하는데, 미련한 자는 지혜를 찾을 수 없는 땅 끝에 가서 지혜를 찾는 헛수고를 한다는 말이다.
학용품을 사려면 문방구에 가야지 채소 가게에 가서 학용품을 사려는 사람은 얼마나 미련한가? 지혜를 얻으려면 명철한 자에게 가야 하는데, 거기에 안 가고 엉뚱한 땅 끝에 가서 지혜를 찾으려는 자가 얼마나 미련한가?
설교 자료는 성경 본문에서 찾을 수 있다. 성경 본문은 "설교 자료"라는 학용품을 파는 문바욱이다. "성경 본문"이라는 문방구에 가서 "설교 자료"라는 학용품을 구하지 않고 엉뚱한 곳에 다니며 설교 자료를 찾으려고 헛수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불쌍한가? 우리는 설교 자료는 성경 본문에 있다는 것을 밝히 알자. 우리는 우리가 설교 자료를 구할 수 있는 성경 본문에 오지 않고 설교 자료를 줄 수 없는 엉뚱한 곳을 헤메는 불쌍한 사람이 되지 말자.
지혜는 명철한 자 앞에 있다. 지혜를 얻으려면 명철한 자에게 가야 한다. 설교 자료는 성경 본문에 있다. 설교 자료를 얻으려면 성경 본문에 가야 한다. 성경 본문이 아닌 엉뚱한 곳에서 설교 자료를 찾으려고 하다가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시간은 시간대로 보내고 허탕치는 불쌍한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한다.
앞서간 우리 믿음의 조상들은 그들이 외치던 메시지의 자료를 어디에서 얻었는지 알고 보면 그들도 역시 하나님께서 주신 자료를 받아서 외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의 메시지의 자료는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았다.
모세를 보면, 행7:38에서 말하기를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고 하였다. 모세가 광야 교회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생명의 도를 주었는데,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던 생명의 도의 근원은 설교집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주었던 것이다.
출25:21,22은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거기에 말씀하시기를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내게 명할 모든 일을 내게 이르리라"고 하셨다. 곧 법궤에서 하나님이 모세와 만나고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그에게 명할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해 주시겠다고 하였으니 모세는 법궤 앞에 엎드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는 모든 말씀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기에 유대인들도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요9:29) 하면서 모세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을 이스라엘에게 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들까지도 인정하고 있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어떠했던가?
렘 1:2,3에 보면 "요시야의 다스린지 13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요시야의 아들 유다 왕 여호야김 시대부터 요시야의 아들 유다 왕 시드기아의 제 11년 말까지 임하니라. 이 해 5월에 예루살렘이 사로잡히니라"고 하였다.
요시야의 다스린 13년은 하나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처음 임하신 때요, 시드기야의 제11년은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마지막으로 임하신 때인데, 예레미야는 그가 선지자 생활을 시작하던 맨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내내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받아서 예언하였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일 없이 다른 곳에서 받아 예언한 적이 없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 사실을 렘25:3에서 재 강조하면서 이렇게 말씀을 전한다. " 유다 왕 시몬의 아들 요시야 13년 부터 오늘 까지 23년 동안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기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되 부지런히 일렀으나......." 선지자 예레미야가 선지자 생활을 시작할 때는 요시야 왕 13년인데, 예레미야 25장 당시에는 그가 처음 선지자 생활을 시작한 때로부터 23년 동안의 그의 예언을 밑천을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받는데서 말미암았던 것이다.
렘 39;15에는 말하기를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갇혔을 때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니라"고 하였는데,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의 밑천은 여호와의 말씀을 받는데 있었다는 사실을 여기에서도 또 보여준다.
선지자 에스겔은 어떠하였던가?
겔1:3에는 말하기를 "갈대아 땅 그발 강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라고 하였고, 겔 3:16에는 "7일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가로 말 하였으니 선지자 에스겔도 역시 그 예언의 밑천이 여호와의 말씀을 받는데 있었다.
반면에 거짓 선지자들은 어떠하였던가?
거짓 선지자의 특색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고 자기들 멋대로 예언하였다. 렘14:14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복술과 허탄한 것과 자기 마음의 속임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도다"라고 하였으며, 렘 23:16에는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고 하였고, 겔 13:1~3에는 말하기를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의 예언하는 선지자를 쳐서 예언 하되 자기 마음에서 나는 대로 예언하는 자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본 것이 없이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하는 우매한 선지자에게 화가 있을진저..."라고 하였고, 겔13:17에는 "너 인자야, 너는 백성 중 자기 마음에서 나는 대로 예언하는 부녀들을 대면하여 쳐서 예언하여..."라고 하였으니 이 모든 구절들은 다 거짓 선지자의 특색은 여호와의 말씀을 받아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네 마음 내키는 대로 적당하게 예언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제 3절 : 성경 본문 말씀 만을 전 할 때의 결과
이렇게 설교자가 성경 본문을 수 없이 읽어 나가다가 성령님께서 보여주시는 본문 말씀만을 전할 때에 어던 결과가 나타나는가? 설교자가 다른 내용을 전하지 않고 본문 말씀만을 전할 때에 두가지 결과가 나타나는데, 하나는 설교자 자신에게 대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말씀을 듣는 청중들에게 미치는 면에서 나타나는 결과이다.
1. 자신에게 대해서 나타나는 결과
(1) 받아서 전하는 자가 되어진다.
행7:38에 보면 모세는 광야 교회에서 생명의 도를 받아 전하였다고 한다. 모세가 광야 교회에서 40년이나 되는 긴 세월을 두고 그들에게 전하던 생명의 도의 밑천은 설교집이나,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떠 돌아 다니던 말에서가 아니며, 그 당시에 일어났던 국내외적인 시사 문제도 아니었다. 또한 어떤 종교 서적에 의한 것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전했다. 40년 동안이나 모세가 그들에게 주던 생명의 도의 근원은 오직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데서 근거되었던 것이다.
모세가 생명의 도를 받아 전했다는데, 어디서 어떻게 받았던가를 알아보면, 출 25:21,22에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내게 이르리라"고 하였으니 모세가 법궤 앞에 가서 엎드리는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명할 모든 말씀을 그에게 주셨고, 모세는 거기에서 이스라엘에게 명할 말씀을 받았던 것이다.
선지자 예례미야가 이스라엘에게 전한 말씀의 밑천은 렘1:2,3에 말하기를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다스린지 13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요시야의 아들 유다 왕 여호야김 시대부터 요시야의 아들 유다왕 시드기야의 제 11년 말까지 임하니라"고 하였다. 즉 예레미야가 선지자 생활을 시작하는 첫 날뿌터 끝날 까지 예레미야가 전한 예언의 말씀은 전부 여호와께로부터 받아서 전했던 것이다. 그는 렘 25:3에서 다시 말하기를 "유다 왕 아몬의 아들 요시야의 13년부터 오늘까지 23년 동안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기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되 부지런히 일렀으나..."라고 하면서 자기가 선지자 생활하던 23년 동안의 예언의 밑천이 전부 여호와께로부터 받는데서 기인되었다고 한다.
고전 11:23에서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라고 하면서 자기가 고린도 교회에서 전한 성찬의 규례는 자기에게서 나와진 것이 아니고 주께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한다. 그는 고전 15:3에서 자기가 고린도 교회에 전한 복음을 재천명하면서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라고 하면서 자기가 고린도 교회에 전한 복음의 근원이 다른 어디에서 온 것이 아니라 주께로부터 받는데서 기인되었다고 한다.
고후 2:17에서 그는 또 말하기를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 하면서 자기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다른데서 유래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실을 다시 한번 더 밝힌다.
벧후 3:15에서 베드로는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라고 하면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순전히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전하는 사실을 베드로도 증언하고 있다.
렘 23:28에서는 받지 못하고 전하는 자와 받아서 전하는 자를 비교하여 말하면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몽사를 얻은 선지자는 몽사를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 겨와 밀을 어찌 비교하겠느냐?라고 하였다.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지 못하고 몽사를 얻은 선지자는 꿈 이야기 밖에 말할 밑천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니 꿈 이야기 밖에 할 말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선지자는 받은 그 말씀을 성실하게 전하는데, 몽사를 얻은 선지자의 꿈 이야기는 겨와 같고 하나님께서 받아서 말하는 선지자의 말은 밀과 같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설교자가 성경을 읽다가 성령님께서 보여 주시는 말씀을 전할 때 그는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전하는 자가 된다.
(2) 듣고 전하는 자가 된다.
마10:27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의 뜻은 집 위에서 전파하기 전에 귓 속으로 듣는 순서가 먼저 앞서야 될 것을 말씀한다. 집 위에서 전파하는 자가 먼저 귓 속으로 듣는 일이 없이는 집 위에서 전파 할 수가 없다.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 자신도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듣는 것을 말씀하신다고 여러 곳에서 증언하셨다.
요8:26에서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서 말하노라"고 하셨고, 40절에서는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라고 하셨고, 요15:15에서는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고 하셨으니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하신 말씀들은 다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먼저 들은 사실을 말씀하신다고 하신다.
행 22:14,15에서는 예수님께서 다메섹에서 바울에게 나타나신 목적을 아나니아는 설명하면서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고 하였으니 여기에서도 밖에 나가 전할 증인은 먼저 듣는 순서가 앞서야 될 것을 말씀하신다.
요일 1:5에서 사도 요한은 무어라고 말씀하는가?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즉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 독자들에게 전하는 소식은 예수님께 들은 사실이라고 한다. 성경을 읽다가 성령님께서 보여 주시는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는 듣고 전하는 자가 된다.
(3) 보고 전하는 자가 된다.
위에서 인용한 행22:14,15에서 아나니아는 또 이렇게 말한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예수님께서는 바울을 자기의 증인으로 내세우기 전에 먼저 바울에게 자신을 나타내어 보여 주셨던 것이다 .보지 못한 자가 어떻게 증인이 될 수 있는가?
바울은 증인으로 내세울 때에 먼저 자기 자신을 그에게 보여 주셨던 예수님은 자기 자신도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씀하신다고 하시면서 요 8:38에서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라고 하셨다.
발람이 비록 타락한 선지자이지만 민 24:3,4에서 그가 말한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전능자의 이상을 보는자, 엎드려서 눈을 뜬 자가 말하기를..."라고 한 것에서 보면 그래도 선지자로서의 최소한도의 밑천은 가지고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성경을 읽다가? 성령께서 보여 주시는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는 보고 전하는 설교자가 된다.
제 4?절 : 현대 설교의 문제점
현대 설교의 문제점은 6가지 면에서 고찰 해 볼 수 있다.
1. 본문의 뜻을 바로 이해 못한 설교
위에서 언급한 대로 설교자가 자기 설교의 본문의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설교하는 경우이다.
2. 성구의 곡해와 그릇 인용
설교자가 어떤 성경 구절을 인용할 때에 자기가 인용하는 성경구절의 참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인용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는 위에서 언급한 첫째 문제와 관계되는 문제로서 설교자가 성경 본문에 익숙하지 못하면 자기 설교의 본문의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설교하게 될 뿐만 아니라 설교문 중에서 어떤 성경 구절을 인용 할 때에도 자기가 인용하는 성경 구절의 참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인용하게 된다.
보기를 들어보면, 느4:3에서 산발랏이 느헤미야가 쌓는 성을 보고 비난하기를 "저들의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고 하였는데, 이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는 말은 느헤미야가 쌓는 성벽은 너무 약하여 여우 새끼 한 마리가 올라가도 무너질 정도로 약하다는 뜻으로 사용 되었다는 사실은 상식적으로 쉽게 이해가 되는 구절이다. 그런데 어떤이는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여우는 파괴자란 뜻으로 인용했으나,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진다는 말을 여우가 파괴자란 뜻으로 인용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떤 설교는 시 137:2의 버드나무 가지에 거문고를 건 본문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던 그들의 거문고는 줄이 끊어지고 풀린 채 그발 강 언덕 버드나무 가지에 걸려 있었으니 이것은 포로로 끌려간 유대민족들이 바벨론 나라에 동화된 사실을 뜻한다고 인용함으로서, 정반대의 뜻으로 인용 하였다.
시 137편은 유대 민족이 바벨론 나라에 동화된 것을 보여주는 본문이 아니고 포로로 끌려갔으면서도 끝까지 시온의 백성으로서의 정조를 지키는 뜻을 나타낸 시이다. 우선 1절에서는 우리가 바벨론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 시온을 기억하여 울었다고 하였다. 시온을 기억하고 우는 백성이 바벨론에 동화되었다는 말은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2절에 그들이 거문고를 버드나무에 건 이유를 3절은 설명하기를 자기네들을 사로잡고 황폐케 한 자들이 그들에게 노래를 청하나 이방에 있어서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 수 없다고 하여 거문고를 버드나무에 걸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5절과 6절에서는 내가 예루살렘을 잊었던가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예루살렘을 생각지 않을 진데 거문고 타는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어 버리고 노래 부르는 내 혀가 입천장에 붙기를 바란다고 까지 하였다. 이 모든 일들은 다 포롤 중에 있는 시온의 백성들의 강한 정조 관념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바벨론에 동화된 뜻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어떤 설교는 창세기 40장의 세 죄인을 십자가의 세 사람에다가 비유하여 인용하는데, 즉 요셉은 예수님으로, 떡 맡은 관원은 완악한 강도로, 술 맡은 관원은 회개한 강도로 비유하였으나 이것도 성경을 문자적으로 건전하게 해석하지 않고 풍유적으로 잘못 해석한 인용이다.
어떤 설교는 행1:6~8을 인용하면서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할 때를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때와 기한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고 다만 성령의 권능을 받아 가지고 그리스도를 널리 증거할 때에만 그 나라가 회복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 본문이 위의 인용된 대로의 뜻이 아니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는 이스라엘 나라 회복에 대하여는 신경을 쓰지 말고 다만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만 신경을 쓰라는 뜻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본문의 뜻이 제자들이 성령의 권능을 받고 그리스도를 널리 증거할 때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된다는 뜻으로 인용될 수 있겠는가?
왕하 2:19을 인용한 설교를 소개한다.
"성읍의 터는 아름다우나 물이 좋지 못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이 말씀을 당시 선민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 생활이 형식과 외식은 장엄하지만 내적으로 실권이 없는 바리새인적인 종교임을 영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는데,?어디에 근거를 두고 이런 해석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여리고성의 터는 아름다우나 물이 좋지 못하여 토산물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는 것이 문자 그대로 지질학적인 현상인데, 물이 좋지 못하여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는 일이 어찌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교 생활이 형식과 외식만 가지고 내적 실속이 없는 영적인 상태를 뜻한다고 해석되어질 수 있겠는가?
이 역시 잘못된 풍유적 해석이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간 이유를 설명하는 인용을 그대로 소개한다.
"그것은 그 후손들에게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허락하신 가나안 복지를 물려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들이 광야에서 위대한 죽음, 위대한 희생을 하지 않았다면, 애굽의 물질 문명에 도취해 있었다면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영원히 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인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죽은 죽음을 "위대한 죽음, 위대한 희생"이라고 설명하면서 이 위대한 죽음, 위대한 희생의 공로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영원히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인용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죄 때문에 죽은 것이 위대한 죽음이며 위대한 희생이라는 해석은 어불성설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의 죽음을 성경에서는 "또 하나니이 40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히3:17)라고 되어 있다.
또 다른 인용구를 소개한다.
시편 139:5에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라고 하시는 말씀에서 주님의 창조의 손, 권능의 손, 불의 손으로 우리의 상처와 병적인 요소를 안수해 주실 때 깨끗이 나음을 받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 이 인용시를 이용해 안수를 오늘날 병자에게 안수 기도하여 병을 낮게 하는 안수로 해석했는데, 시 139편의 문맥은 하나님께서 우리 상처에다 안수해 주시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신다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본문이다. 따라서 5절의 말씀도 주님께서 나의 전후를 둘러 모든 것을 세밀하게 아신다는 내용이지 이 말씀이 하나님의 창조의 손, 전능의 손, 불의 손으로 우리의 상처를 안수하여 병을 고쳐주신다는 뜻으로 해석 될 수 없는 것이다.
다른 인용구를 또하나 보겠다.
"기술을 배우라"
기술을 배우면 기술 속에 행복이 숨어 있다. 기술 속에 주는 사람을 살리는 의술도, 날아다닐 수 있는 비행기 조종도, 달나라 갈 수 있는 로케트 제조도, 가지각색 전기 제품, 계산기, 컴퓨터 등은 기술 속에서 움직여 인간에게 많은 행복을 제공하고 있다.
마태복음 6장 25절 이하에 보면, 의식주에 염려하지 말고 근로하는 새를 보라. 즉 공중의 새를 보라 하셨으니 이는 "공중의 새"라는 말은 근로하는 새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왜 나뭇가지에서 노래하는 새를 보라하지 않고 공주의 나는 새를 보라 했는가 하면 이는 부지런히 일하는 새를 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기술을 배워 가지고 부지런히 일하면 행복을 얻습니다."
=> 이 인용은 예수님께서 마 6: 25 이하에 공중의 새를 보라고 하신 말씀을 "부지런히 일하고 근로하는 새"라는 뜻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과연 그런 뜻으로 공중의 새를 보라고 하셨겠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새"란 것은 보통 상식적으로 공중에 잇으니 일반적인 뜻에서 "공중의 새"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계 19:17,18에 이러한 말씀이 나오는데, "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해에 서서 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왕들의 고기와 장군들의 고기와 장사들의 고기와 말들과 그 탄자들의 고기와 자유한 자들이나 종들이나 무론 대소하고 모든 자의 고기를 먹으라 하더라." 여기 나오는 공중에 나는 모든 새도 "새"란 공중에 날아다니는 동물이니 그 새들의 공간적 상황을 의식한 보편적 상식적 관념에서 그렇게 한 말입니다. "공중에 나는 모든 새"라고 하여 위의 인용구가 해석하듯이 공중에 날아다니며 근로하는 새를 뜻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뜻이 위의 인용구가 해석하는 대로라면 본문이 당장 모순되는데, 이 인용구는 공중의 새를 부지런히 일하는 뜻으로 해석했으나 예수님께서는 공중의 새는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고 하셨다. 더구나 공중의 새가 부지런히 일하는 근로하는 새로 묘사하지 않으셨다.? 더구나 공준의 새가 부지런히 일하듯이 우리도 기술을 배워서 부지런히 일하면 행복하게 산다고 하면서 대지의 제목까지 "기술을 배우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본문의 원 뜻에서 너무 비약한 풍유적 해석이다.
3. 주관적인 대지 가름
현대 설교의 세째 문제점은 설교자가 설교의 대지를 가를 때에 본문에 근거하지 않고 설교자의 주관적인 생각대로 대지를 가르는 일이다.
본래 설교의 대지는 설교자 자신의 주관대로 가를 수 없고 본문이 규정지어 주는 대로 갈라짐을 받아야 한다. 좀더 엄격하게 말한다면 설교의 대지는 설교자 자신이 가른다기 보다 성경 본문이 대지를 갈라주는 대로 설교의 대지가 갈라짐을 받아야 한다. 기독교 사색 방법은 "계시의존 사색"이지 추리사색이 아니다. "추리사색"이란 사람들이 머리에서 이런 저런 일들을 생각해 내는 사색인데, 곧 철학자들이 자기네 주관대로 이렇게 저렇게 추리해낸 생각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사색 방법은 철학자들이 자기네들의 머리에서 이런 저런 일을 추리해서 생각해 내는 추리 사색이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계시의 진리에 의존하여 생각하는 계시 의존 사색이다.
우리가 어떤 일을 생각한다면 그 생각의 근거는 성경에 계시된 진리가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설교의 대지를 가를 때에도 성경 본문을 무시하고 설교자 자신이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자기 머리 속에 추리하여 잘라서는 안 되고 어디까지나 성경 본문에 근거하여 성경 본문이 대지를 갈라주는 대로 갈라짐을 받아야 한다.
성악가가 노래를 부를 때 악보에 있는 대로 불러야지 악보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부를 수 없다. 악보에 근거하고 악보에 기준을 두고 불러야 한다. 성경은 하나의 악보이다. 성경 본문 안에 이미 대지의 악보가 그려져 있다. 설교자는 이 성경 본문에 그려져 있는 대로 갈라야지 성경 본문 속에 이미 그려져 있는 대지의 악보를 무시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적당한 대지를 잡아서 노래를 불러서는 안 된다.
* 설교의 대지를 본문대로 가르지 않고 설교자의 주관대로 가른 설교의 보기를 들어본다.
어떤 설교자가 마4:18~25의 본문을 가지고 "예수님과 갈릴리"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1. 갈릴리는 아름답다. 그와 같이 예수님의 마음은 아름답다.
2. 갈릴리는 주는 바다이다. 그와 같이 예수님은 주시러 오셨다.
3. 갈릴리는 생명이 약동한다. 그와 같이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러 오셨다.
이렇게 3대지로 갈랐는데, 마4:18~25 사이에 첫째 대지인 "갈릴리는 아름답다"라는 본문은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고, 둘째 대지인 "갈릴리는 주는 바다"라는 말도 찾아 볼 수가 없으며, 셋째 대지인 "갈릴리는 약동한다"는 구절을 찾아볼 수가 없다.
이 3 대지는 전혀 본문에 근거 없는 대지로, 설교자 자신의 머리에서 주관적으로, 제 멋대로 생각해낸 추리 사색적인 대지이다. 설교의 대지가 이러한 방법으로 전개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설교자는 암8:11~14의 본문으로 "기근"이라는 제목으로 설교 하였다.
1. 사랑의 기근
2. 행위의 기근
3. 말씀의 기근
이렇게 3대지를 갈랐는데, 암 8:11~14 사이에 "사랑으 기근"과 "행위의 기근"이라는 말이 어디에도 없다. 거기에서 말씀하는 기근은 말씀하는 기근 뿐이지 사랑과 행위의 기근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이 "사랑의 기근"과 "행위의 기근"이란 2 대지는 전혀 본문에 근거하지 않은 설교자 자신의 머리에서 나름대로 추리되어 나온 대지이다. 다시 언급하지만 설교의 대지는 어디까지나 성경 본문에 근거해야지 성경 본문의 근거 없이 설교자의 머리 속에서 적당하게 추리되서 나오는 대지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4. 본문에 근거하지 않은 설교
현대 설교의 네 번째 문제점은 설교하는 분들이 성경 본문은 인사로나 인사로나 한 번 본 후에 설교 내용은 설교자가 봉독한 본문에 근거하지 않고 설교자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거나, 이러한 말 저러한 말을 소개하면서 마치 공중의 구름을 타고 다니는 것과 같은 하나의 연설이나 강연에 그치지 않는 일이다.
"설교"란 무엇인가? "설교"란 성경 본문의 뜻은 그대로 소개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말로 한다면 그 설교는 하나의 강연이나 연설, 또는 하나의 강의는 될 수 있어도 결코 설교는 하나의 강연이나 연설, 또는 하나의 강의는 돌 수 있어도 결코 설교는 될 수 없다. 제아무리 유식하고 고상한 말, 제아무리 구수하고 재미있는 말을 할지라도 그 설교가 성경 본문의 뜻을 그대로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면 유식하고 고상한 강의나 연설은 될 수 있어도 결코 하나의 설교라고는 할 수 없다. 설교는 어디까지나 성경 본문의 듯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5. 본문을 떠난 추리 설교
현대 설교의 다섯째 문제점은 설교자가 성경 본문에서 근거 없는 사실을 추리하여 말하는 것이다.
보기를 들면, 어떤 설교자는 말하기를 모세가 십계명 돌판을 들고 내려 올 때 그의 오른 손에는 1~4계명이 기록된 돌판을, 그의 왼손에는 5~10계명이 기록된 돌판을 들고 내려왔다고 한다. 출32:15은 모세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증거의 두 판이 그 손에 있었다고 했지 양손에 하나씩 들었다고 하지 않았으며, 더구나 히브리 성경은 모세의 손이 단수로 되어 있지 복수로 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성경 본문은 모세가 산에서 내려 올 때 오른손과 왼손에 하나씩 들고 내려왔다는 기록이 없으며 더구나 오른손에 든 돌에는 1~4계명이 기록된 돌판이라는 말은 근거가 없다.
어떤 설교자는 열왕기하 5장에서 선지자 엘리사가 나아만 장군의 선물을 거절한 이유를 아람 나라의 재침을 막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나아만 장군이 드리는 선물을 엘리사가 안 받으면 그것이 미안해서 나아만 장군이 다시 이스라엘을 침범하지 못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그러나 성경 본문에는 엘리사가 나아만 장군의 선물을 안 받는 것이 아람나라의 재침을 막기 위함이라는 근거가 없다.
어떤 설교자는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예수님의 이 말씀이 복음서 가운데 전혀 나타나지 않는 전혀 본문에 근거가 없는 추리이다.
6. 비 합리적인 예화
현대 설교의 여섯번째 문제점은 설교자가 비유나 예화를 들 때 비 현실적이요, 비 역사적이요, 비 과학적인 맹랑한 예화를 드는 경우이다.
보기를 들면 어떤 설교자는 이런 예화를 들었는데, 옛날에 대전 근방에 어떤 효성 깊은 며느리가 있었는데 시집 오자마자 남편이 죽고 청상 과부가 되었다. 게다가 시어머니도 안 계시는 홀아비 된 시아버지를 모시고 살아야 했는데, 생활이 가난한지라 청상 과부된 며느리가 날마다 이 동네, 저 동네 다니면서 밥을 얻어다 시아버지를 공경하고 살아갔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밥을 얻어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난데없이 벼락이 발 밑에 떨어지는 바람에 이 효성 깊은 며느리는 혼절하여 손에 들었던 밥을 던지고 넘여져서 몇 시간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나 다시 정신이 들어 깨어보니 아까 벼락이 떨어진 바로 그자리에서 뜨거운 물이 솟아나기에 가보니 그 뜨거운 물이 오늘의 대전 근방의 유성 온천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얼마나 비 현실적이고, 비 역사적이며, 비 과학적인 허무 맹랑한 예화 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