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밀양은 경상남도 북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원래 삼한시대에 변한의 일부로 가락국에 속하였으며, 신라 법흥왕(제 23대왕 제위기간 514~540)때 신라에 병합되어 추화군이 되었다가 757년(경덕왕 16) 밀성군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때 와서는 995년(성종 16)에 밀주로 하였고, 1390년(공양왕 2) 밀양부로 승격, 그후 여러 차례의 변신을 거듭하다가 1895년 밀양군으로 개칭하였다. 밀양 박씨는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의 29세손인 경명왕(제 54대 왕 재위기간 917~924)의 8대군 중 세자인 박언침으로부터 세계가 이어져, 단일본관으로서는 우리나라 최대의 벌족임을 자랑하여 왔다.
박씨 중에서도 가장 뿌리가 굵은 밀양 박씨는 중시조 언침이 밀성대군에 봉해진 연유로 해서 본관을 밀양으로 하게 되었으며, 8세손 언부(문하시중을 지내고 밀성부원군에 봉해짐)를 파조로 하는 문하시중공파를 비롯하여 도평의사공파(8세손 언상), 좌복야공파(8세손 언인), 밀직부사공파(8세손 양언), 판도공파(8세손 천익), 좌윤공파(8세손 을재), 진사공파(108세손 원), 밀성군파(13세손 척), 동정공파(13세손 원광), 밀직부원군파(15세손 중미), 정국공파(15세손 위), 규정공파(168세손 현) 등 크게 12파로 나누어져 아랫대로 내려오면서 다시 여러 파로 분파되었고, 10세손 환이 영암 박씨로 분적하는 등 10여 개 본관으로 갈라졌다.
각 계통별로 두두러진 인맥을 살펴보면, 종파인 8세손 언부가 고려 문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권신 최충과 함께 태사를 지내고 문하시중과 도평의사를 거쳐 밀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그의 후손에서 은산군 영균을 비롯한 13개파가 형성되었다.
밀성부원군 언부의 차남 의신(고려 인종 때 공부상서를 역임)의 후손에서는 사문진사 원(의신의 맏아들)의 계통과 의흥위로 밀성군에 봉해졌던 척(의신의 현손)의 인맥이 두드러진다.
원의 8세손 의중은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장원하고 우왕 때 대사성과 밀지제학을 거쳐 뒤에 공신에 올랐으며. 조선이 개국하자 조준, 정도전 등과 함께 고려사를 수찬했고, 이색의 문인으로 성리학에 밝았으며 우아한 문장으로 문치에 고명하였다. 문종 때 경흥부사로 재직중 야인 토벌에 전공을 세웠던 거겸은 의중의 손자이며 증파서인 경빈의 아들로 성종 때 좌리사등공신으로 밀산구에 봉해졌다.
고려 충목왕 때 문과에 급제한 중미(의신의 7세손)는 공민왕 때 홍건적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우고 보리공신으로 대광보국숭록대부에 올라 밀직부원군에 봉해졌으며, 그의 8세손인 생원 사눌의 아들 성이 한강 정구에게 글을 배우고 선조 때 김성일의 참모로 들어가 임진왜란에 공을 세웠고, 정유재란때는 체찰사 이원익의 막료로 종군, 주왕산성의 대장으로 활약하여 왕자사부에 임명되었으나 불취했으며 후에 공조 좌랑과 안양 현감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 상주 싸움에서 순절한 호의 아들 종남은 선조 때 상주와 광주의 목사를 거쳐 회령부사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영신은 영창대군을 죽이려는 광해군의 뜻을 반대하다가 북관인 위원으로 유배되었으나 장사이기 때문에 반란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 하여 진도로 이배되었다. 인조 반정 후 경원부사를 거쳐 풍천부사로 있을 때 이 괄의 난을 평정하다 포로가 되었는데 그의 용맹을 알고 있던 이괄이 마음을 돌려 협력할 것을 간청했으나 굽히지 않고 달려드니 그의 기절에 적장인 이수백도 감동하여 죽이기 아깝다고 하였으나 살려 두었다가 후환이 있을 것을 두려워하여 참살하자, 피를 뿜으면서까지 욕을 했다고 한다. 조선 정종의 부마로 지돈령부사에 오른 갱의 7세손 정원이 문과에 급제하여 평안도사를 역임했고. 그의 종손 신규는 호조판서를 지낸 후 청백리에 녹선되어 글씨로 이름을 떨쳤다. 목사 율(척의 11세손)의 아들인 이서는 선조 때 알성문관에 급제하여 성균관학유를 거쳐 주서로 사관을 겸했고, 임진왜란 때 병조 좌랑이 되어 분조를 배종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순찰사종사관으로 황해도 지방의 병량을 담당했다. 광해군 때 폐모론이 대두되자 여러 차례 대북파를 탄핵했던 그는 뒤에 무고를 받아 삭직되었다가 영광 군수로 복직되어 전라도 관찰사 이창준의 탐학 행위를 개탄하여 사직했다. 그의 아들 노는 정묘호란 때 순검사 종사관으로 왕을 강화에 호종한 공으로 장악원정에 올랐고, 인조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사신으로 적진에 세 번 걸쳐 들어가 조약을 어기고 불침입한 것을 공박하다가 40여일 간 잡혀있었다.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규정을 역임했던 현은 평장사 효신의 8세손으로 조선 개국과
더불어 집현전 부제학에 등용되어 수원 부사를 거쳐 안변부사로 나가 임지에서 생을 마쳤다.
특히 그는 성리학에도 밝은 학자로 명망이 높았고 청백리로 세간의 칭송을 받았으며, 후대에서 훌류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어서 가세를 크게 일으켰다. 규정공 현의 손자 사경(좌랑 문유의 아들)은 고려조에서 전법판서 겸 상장군을 지내고 추성익위공신에 책록되었으며, 그의 아들 침이 공민왕 때 전의판사를 역임하고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71현과 함께 개성 두문동으로 들어가 절의를 지켰다. 침의 둘째 아들 강생은 고려 공양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의정부사를 지냈으며, 조선이 개국한 후 호조전서에 임명되었으나 불취하고 학문에만 정진하다가 태종 때 등용되어 수원부사로 재직중 과천 현감 윤돈의 전별연에서 금천현감 김문이 과음으로 죽자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뒤에 다시 등용되어 세종 때 안변부사를 지냈고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의 아들 심문은 세종조에 김종서가 육진을 개척할 때 종사관으로 야인에 대한 안무책을 건의했고 계유정난으로 김종서가 살해되자 벼슬에서 물러나 사육신과 더불어 단종복위를 모의했으며, 1456년(세조 2년)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다가 의주에 이르러 사육신이 참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음독자결을 했다.
강생의 손자로 세조 때 정나이등공신에 책록되어 응천군에 봉해진 증손(좌찬성 절문의 둘째아들)은 대사헌과 공조를 비롯한 4조의 판서를 거쳐 밀산군에 개봉되었으며, 그의 맏아들 남이 부사를 지냈고, 차남 미는 대사간과 예조 참의를 거쳐 여지승람을 편찬했으며 시문에 현달했고, 막내 건은 세조 때 좌익원종공신으로 5대의 왕조를 거치면서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중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국삼등공신에 책록되어 밀사부원군에 진봉되었다. 찬성공 신생(규정공 현의 현손, 전서공 침의 막내아들)의 현손 영(이조 참판 수종의 아들)은 양녕대군의 외손자로 주역, 천문, 지리, 의술 등에 능통했으며, 무예에 뛰어나 용맹을 떨침으로서 중세의 명인으로 이름났다.
특히 그의 후손들은 대대로 옷차락이 잘린 두루마기 한 벌을 유물로 물려받는 가통이 있었다. 어느 날 저녁 무렵 화려한 옷차림에 준마를 타고 남소문을 지나는데 골목 어귀에서 아름다운 여인이 손짓하며 부르므로 그가 말에서 내려 따라가니 집이 깊숙한 곳에 있었다. 날은 이미 어두웠는데 그 여인은 그를 대하자 홀연히 눈물을 흘렸다. 그 까닭을 물으니 귓속말로 '공의 풍채를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닌데 나로 인하여 비명에 죽겠소' 하였다. 그가 무슨 뜻인가를 따져 물으니 미녀는 '도적의 무리가 나를 미끼로 사람들을 유인하여 죽이고, 입은 옷과 타고 온 말과 안장을 나누어 갖고 살아 온지가 해포가 되었습니다. 내가 매일 이곳에서 탈출할 것을 생각해 왔으나 도둑의 일당이 많으므로 잡혀서 죽을까 두려워 못하고 있었는데, 공이 나를 살릴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는 칼을 빼어 들고서 잠을 자지않고 있었는데, 밤중이 되자 방의 윗쪽 다락으로부터 여인을 부르는 소리가 나면서 큰 밧줄이 내려왔다. 그는 몸을 솟구쳐 벽을 차 무너뜨리고 급히 여자를 업고 몇겹의 담을 뛰어넘어 나와서는 여인이 붙잡는 옷자락을 잘라 버리고 달려 나왔다. 그 이틀날 벼슬을 사직하고 선산으로 돌아와 무인의 노릇을 버리고 학문에만 진력했고, 옷자락이 잘린 옷을 보이면서 항상 손자들에게 경계하였다고 한다. 그는 낙동강변에서 두문불출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몰두하여 아래와 같은 시로 마음을 달랬다.
멀고 먼 남쪽 변방에 바닷 기운이 어두워 오는데
투구 쓰고 갑옷 입던 바다를 지키는 늙은 왕손일세.
기린각 위에 이름을 남길 생각은 전혀 없고
낙동강 언덕 마을에 내 집이 있도다. 이 소식을 듣고 찾아온 원근의 학자들이 모두 송당선생이라 일컬어 스승으로 섬겼다고 하며, 의서로 경험방과 활인신방을 저술했다. 존성재 미의 아들 6형제 중에서 연산군 때 대사간으로 문의에 중도부처 되었던 의영과 폐비 윤씨(연산군의 생모)의 추승을 반대하다가 목천에 유배당한 광영(중종 때 형조 참판을 역임) 성종 때 호당에 뽑히고 교리를 지낸 증영 황해도 감사를 지내고 부제학에 올랐던 소영, 승지를 지낸 안영 등이 유명했으며, 증영의 아들 훈은 기묘사화 때 신진사류로 조광조 등과 함께 성주로 유배되었다가 이주에 이배되어 15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밀성군 광영의 손자인 낙촌공 충원(별좌 조의 아들)은 명종 때 단종의 원령으로 잇따라 7명이 죽어가는 영월 군수를 자청하여 부임해 가서 제물을 갖추어 제사지내며 제문에 이르기를 왕실의 맏아들이요, 유충하신 임금으로 마침 비색한 운수를 당하시어 바깥 고을로 손위하시었으나 한 조각 청산이요, 만고의 고혼이라, 바라건대 강림하시어 향기로운 제전에 흠향하소서. 하며 원령을 위로하여 그로부터 변고가 없었다고 한다. 또한 유천차기에 의하면 지금까지 사시행사때마다 이 글을 제문에 쓴다고 한다. 그 뒤 충원은 좌통례로 춘추관편수관을 겸하여 중종실록과 인종실록 편찬에 참여했고, 1556(명종 21) 이퇴계의 뒤를 이어 양관 대제학을 거쳐 선조 때 우찬성 이조판서를 역임한 후 지중추부사로 밀원군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이 세도가인 윤원형이 사위를 삼고자 청하는데 면전에서 거절하여 외임의 벼슬로만 돌았던 계현이며 계현의 손자가 영의정에 오른 승종이다. 광해군의 폭정 속에서 영상에 올랐던 승종은 항상 오리알만한 큰 비상을 차고 다니며 말하기를 '불행한 시대를 만나 조석으로 죽기를 기다리는데 이 물건이 없어서 되겠는가'하며 광해군의 비리적 행동에 항상 진정하지 못하고 방안에 한가히 있으면서 흐느껴 울기도 했으며. 폭주로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인조반정이 일어나던 날 그는 이 반정에 참여하고자 군사를 모으고 있던 아들 자흥(이이첨의 사위 참판을 역임) 불러 마음속에 있는 바를 써 놓고 아들과 함께 목매어 자결했다. 한편 충원이 6대손 성원은 도암 이재의 문인으로 영조 때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간관을 거쳐 참판으로 치사, 봉조하가 되었으며, 문장에 뛰어나 예의류집, 돈녕록, 겸재집 등의 저서를 남겼다. 한편 강계의 3대 유배명인으로 손꼽히는 근원은 시정 빈의 세째 아들로 나는 새도 떨어 뜨린다는 당대의 권신 윤원형과의 암투로 일생을 살았다. 그가 사관인 한림의 벼슬에 있을 때 윤원형의 악행을 사초에 적었더니 동료들이 화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지워버리자 그는 재차 썼다. 다시 지우니까 또 써 끝내 미움을 받게 되었다. 선조 때 동서 분당으로 논쟁이 심해지자 중진으로 송응개, 허봉 등과 함께 병조 판서로 있던 이이를 탄핵하여 강계로 유배되었다가 영의정 노수신의 상소로 풀려나와 청한직을 지내며 청백한 관리로 소문났었다. 기재잡기에 의하면 늙어서 사람들이 그의 청백함을 칭송하자 '나의 청백은 윤원형이 만들어 준 인생의 선물이다.' 하며 웃었다고 한다. 복야공파 언인이 후손에서는 우리나라 삼대악성으로 손꼽히는 난계 연(언인의 9세손) 뛰어났다. 1378년(우왕 4) 삼사좌윤 천석의 맏아들로 태어나 태종 초에 문과에 급제한 연은 세종이 즉위하자 악학별좌에 임명되어당시 불완전한 악기의 조율정리와 악보차집의 필요성을 상소하여 편경 12매를 제작, 자작한 12율관에 의거한 정확한 음률로 연주케 했고, 조정의 조회 때 사용하던 향악을 폐하고 아악의 사용을 건의하여 실행케하는 등 궁정 음악을 전바넉으로 개혁했다. 1445년(세종 27)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인수부윤과 중추워부사를 역임하고 예문관대제학에 올랐으며, 단종 원년에 일어나 계유정난 때 그의 세째 아들 계우가 수양대군을 반대하던 안평대군과 가까웠다는 이유로 처형되었으나 그는 3조에 걸친 원로로서 죽음을 면하고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하였다. 그밖의 인물로는 조선 세종 초에 좌군 병마사로 대마도 정벌에 나갔다가 전사한 홍신과 돈인의 아들 한주가 유명했다. 특히 한주는 김종직의 문인으로 연산군 때 간관이 되어 직언을 하다가 무오사화에 능지처참을 당했다. 연려실기술 연산조 고사말본에 의하면 그는 말이 곧고 간결하였고, 예천 군수로 나갔다. 치적을 쌓아 연산군이 그를 불러 간관으로 임명하였는데 하루는 왕에게 직언 하기를 '후원에서말을 달리고 공을 치며 용봉장막(용과 봉의 형상을 아로새겨 임시로 꾸며놓은 왕의 의자)을 펼쳐 놓고 잔치 놀음하는 때가 많으니 임금께서 어찌 이러한 정사를 하십니까' 하자 연산군이 노하여 답하기를 '용봉장막이 네 물건이냐' 하였다. 이에 한주는 '이것은 모두 백성의 재력에서 나온 것이니, 신민의 장막이라 해도 옳은 것입니다. 어찌 임금님의 사사로우 물건입니까' 하였다. 이 일로 해서노사신과 임사홍이 아부하여 논하니 마침내 그들에게 무함을 당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인수으 아들 진은 임진왜란 때 이름난 명장으로 임금이 항상 '나는 박 진이 싸움을 가벼이 여겨 죽을까 두렵다.' 또는 '형세를 보아서 진퇴하는 것이 옳을진데 박진은 이것을 헤아리지 못하고 전진만 하는가'하며 걱정을 해주었다고 한다. 한편 사옹원첨정 사동의 아들로 중종 때 우찬성에 오른 열의 증손 효남은 선정으로 가는 곳마다 송덕비가 세워졌고, 대덕은 강동에 유배당한 조호익에게 글을 배우고 임진왜란 때 스승을 따라 의병을 모집하여 전공을 세웠으며, 병자호란에는 70이 넘는 고령으로 양덕에서 독전하여 적을 물리쳐서 관군을 놀라게 했다. 숙종 때 별시문과에 급제한 권은 경상도와 평안도의 관찰사를 거쳐 사은부사로 청나라를 다녀온 후 한성부 우윤에 올라 청나라 사신 목극등으 접반사로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워 청나라와의 국경을 정하는데 공을 세웠다. 조선 실학의 태두 제가는 19세때 박지원의 문하에서 실학을 연구, 이덕무, 류득공, 이서구 등과 더불어 시문4대가로 일컬어졌으며, 실사구시의 사상을 토대로 한 북학의 를 작성하여 그를 바탕으로 기구와 시설의 개편, 불합리한 제도의 모순점을 지적했다. 한말에 와서는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시해되자 문경에서 이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항전했던 세화가 학문과 효행으로 명망이 높았으며, 중빈은 1943년 대법문을 강설하여 한일합방 후 의병을 모아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영철과 함께 명문 밀양 박씨를 빛낸 불굴의 의인으로 손꼽혔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결과에 의하면 밀양 박씨는 남한에 총 641,821 가구, 2,704,617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