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곡과 초연
오페라 <로엔그린 Lohengrin>은 <탄호이저>(1845)에 이어 바그너가 작곡한 가극이며, 그 자신은 이 작품을 앞의 것과 마찬가지로 ‘3막의 낭만적 오페라’라고 불렀다. 바그너는 1845년 11월에 대본을 완성하고 이듬해 가을부터 작곡을 시작하여 1848년(35세) 4월에 전곡의 악보를 탈고했다.
대본의 원전으로는 많은 시집과 동화집이 거론되는데, 바그너가 독서광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볼프람 폰 에센바흐의 <파르지팔 Parzival>및<티투렐 Titurel>두 가지 전설집과 콘라트 폰 뷔르츠부르크가 쓴 <백조의 기사 Der Schwanritter>, 작자 미상의 중세 음유시인이 쓴 서사시 <로엔그린>, 그림 형제의 <독일 전설>중에 나오는 <로엔그린>전설 등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것들을 하나의 보편성을 가진 이야기로 다듬어낸 것은 문필력이 뛰어난 바그너가 아니면 불가능 한 작업이었다.
바그너가 <로엔그린>의 초연 준비를 서두르고 있을 무렵에 갑자기 파리에 2월혁명이 일어났다. 그것은 그가 악보를 완성시킨 바로 그해인 1848년에 서구 역사에 일대 변혁을 일으킨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이 발표되고, 1848년 2월 말 런던에서 인쇄된 불과 23페이지의 소책자가 재빨리 프랑스와 독일로 흘러들어, 사회당과 공산당에 의한 시민 봉기로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을 선포한 프랑스의 제2공화국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 혁명의 여파는 이듬해인 1849년(36세) 5월에 드레스덴에까지 밀어닥쳤다. 이 ‘드레스덴 5월 봉기’로 처음에는 국왕이 도망쳤지만 곧 정부군에 의해 혁명이 진압되면서, 혁명 운동 지도자의 한 사람인 바그너에게 체포령이 내리자, 그는 스위스로 망명한다.
초연은 1850년(37세) 8월 28일에 바이마르에서 이 어려운 시기에 그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준 사람들 중 바그너의 친구이자 훗날 장인이 되는 프란츠 리스트(F. Liszt 1811~1896)의 총지휘로 거행되었다. 바그너는 그 초연에 물론 참석할 수 없었지만 리스트의 호의와 우정에는 감사를 보냈다. 리스트는 초연의 성과를 “비교적 만족할 만한 정도”라고 말했으나 청중은 별로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1861년 5월에 독일 일부 입국이 허용되어 빈의 가극장에서 그는 자기 작품을 비로소 처음 구경을 할 수 있었는데, 그때의 인상을 “황홀했다”,“눈물이 나올 정도로 감격했다”고 적고 있다.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2세가 세운 <백조의 성(Schloss Neuschwanstein)
이 성의 건너편에 젊은 시절에 루트비히가 어린 시절을 보낸 <호엔슈방가우 성
Hoenschwangau>있다.
이 성의 위치는 뮌헨에서 남쪽을 기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알프스 산록에 있는
퓌센(Füssen) 근처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