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이역 - 유인형
가을도 아니고 겨울도 아닌 때가 오면 불현듯 떠난다. 여행이야말로 앞만 보고 쉬지 않고 달리던 덧없는 삶에 쉼표 같은 간이역이다.
재스퍼는 록키휘슬러 산으로 분지를 이룬 곳이다. 시골 역 같은 이국 풍경의 간이역이다. 역에는 높게 버티고 서 있는 토템플이 그대로 있다. 토템플에 조각된 그림엔 재미난 우화가 숨쉬고 있다. 이루지 못한 사랑이야기다. 황금물고기 잡으러 왔다 씨펄! 저걸 새겨 넣은 게 30여년 전이다. 욕이 들어가야 힘이 솟던 초기 창작 시절이다.
별 기술도 없고 종잣돈도 없을 때엔 닥치는 대로 돌격 앞으로였다. 식당 청소, 호텔 청소, 접시 닦기, 목욕탕 변기 닦기……. 조금 적응이되어 길이 보이자 주유소 펌프 일과 선물점 점원이었다. 체면 차릴 것 없으니 어디든 잘 풀렸다. 가끔은 호텔 매니저가 불러 손님들 관광 안내도 시켰다. 아타바스카 폭포, 타워, 미엣 온천, 헬기 투어 장, 때로는 여성단체 안내에 ‘수놈 꽃’이 되기도 한다. 남성이란 동양인 한 사람뿐이니 잔뜩 겁먹은 표정이면서도 ‘수놈 꽃’만 보면 웃는다. 씨펄, 웃지마! 중얼거리며 나도 킬킬거렸다.
단풍이 들면 야생동물들의 성性잔치가 벌어진다. 강변 여기저기에서 뿔이 부러지고, 온몸에 피가 낭자한 수컷들의 뿔싸움이 벌어진다. 이긴 놈 혼자 왕으로 등극해서 수많은 암컷들을 독차지한다. 뒤통수를 긁적이며 격렬하게 유전인자를 주입하고 있는 합궁 장면을 훔쳐본다. 내가 한국인으로 태어난 게 얼마나 멋지냐. 여우 같은 마누라에 토끼 같은 새끼들까지 있으니 일하는 기쁨도 있다.
그러나 인간이 무엇이냐. 더러는 스스로 목숨을 버리기도 한다. 무슨 한이 그리 많은지 그 좋은 관광 다하고 홀연히 목숨을 버리는 사람도 가끔 보았다. 나는 먹고살자고 발버둥을 치는데 어떤 작자는 살 재미가 없다고 먼저 가버린다. 갖고 싶은 거 다 가지고 나면 재미가 없어지는 것일까? 그리하여 사람들은 때로 외지고 초라한 간이역 같은 곳에서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
천천히 재스퍼 역으로 들어갔다. 기억을 더듬어 이곳저곳 기웃거리다가 안내실 앞 유실물계 표지판 앞에서 주춤거렸다.
“메이 아이 헬프 유?”
파란 눈의 안내양이 방긋 웃는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나를 무슨 수로 도와주겠단 말인가.- 나는 기차표를 보여주며 물었다.
“이 기차 언제 떠나나요?”
재스퍼를 넘어 무수초수위로 떠날 기차 시간을 상냥하게 알려주었다. 유실물 안내실 유리창엔 초라한 동양인 할아버지 하나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유인형 ------------------------------------------
캐나다 ,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