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지혜는 헝그리정신의 반대>의 줄거리:
'배부른 소리'를 풀어 말하자면, '배부를 것 같아 보이는 처지에서 배고프다 투정하는 소리' 쯤이 되겠지요. '헝그리 정신'은 '내가 지금 맡은 일을 성공적으로 해내지 못하면 먹고 살 길이 따로 없다'는 배수진을 치는 마음가짐을 말합니다. 그래서 배부른 소리는 하지 말고 헝그리 정신은 가지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진짜 배가 불러서 하는 소리가 꼭 있어야 하고, 굶주림에서 배수진을 치고 사는 헝그리 정신은 반드시 사라져야만 삶은 지혜로 인한 평강으로 채워집니다.
지혜는 헝그리 정신의 반대
(잠언 1:1~33)
1.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2.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3.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4.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니
5.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지략을 얻을 것이라
6. 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달으리라
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8.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9.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 사슬이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지혜는 헝그리 정신의 반대>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지혜는 헝그리 정신의 반대’
우리가 흔히 “배부른 소리 하네”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배가 불러서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부러워할 만한 모든 조건을 갖추고서도 불평한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아들이 대학 졸업하고 군대도 다녀왔는데 5년째 백수로 있습니다. 그런데 5년 전에 삼성에 취직한 아들을 둔 집사님이 아들의 승진이 늦다며 불평을 합니다. 백수 아들을 가진 부모에게는 이 소리가 배부른 소리로 들릴 것입니다. 또 25평 아파트 대출을 갚지 못해 어려운 사람 앞에서 34평 아파트를 가진 사람이 집이 너무 작아서 살 수가 없다고 한다면 배부른 소리라 할 것입니다.
반대로 “헝그리 정신”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배고픈 상태에서 나오는 정신입니다. 배수진을 친다는 것입니다. 70~80년대에 우리나라는 권투 강국이었습니다. 당시에 헝그리 정신으로 무장한 선수들이 세계 챔피언이 되어야만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좋은 결과를 냈던 것입니다. 이러한 헝그리 정신은 권투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전 영역에서 작용했기에 한강의 기적도 이루게 되었다고 이야기들 합니다.
요새는 배부른 소리와 헝그리 정신을 같이 씁니다. 배부른 소리하지 말고 헝그리 정신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연구원에서 최근에 2015년 세계인재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여기서 한국 노동의욕의 정도가 나왔는데 61개국 중에서 54위에 그쳤다고 합니다. 10점 만점에 4.64점이었습니다. 러시아 슬로베니아 아르헨티나 등과 더불어 하위권에 머물렀습니다. 가장 능동적으로 일한다는 평가를 받은 나라는 스위스로서 7.68점이었습니다. 이외에도 북유럽 국가들이 뒤를 이었고 일본은 7.06점으로 11위에 올랐습니다. 그만큼 주도적으로 일하면서 사는 근로자가 적다는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이 노는 것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여도 16위였습니다. 우리보다 못하다고 여기는 중국조차 25위였습니다. 게으르고 나태하다는 평가를 받는 인도도 42위입니다. 이렇게 된 이유를 어떤 사람들은 헝그리 정신이 없어지고 모두가 배부른 소리를 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오늘 잠언을 시작함에 앞서서 결론부터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잠언에는 지혜에 관한 가르침이 가득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곧 헝그리 정신에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배부른 소리와도 다릅니다. 배부른 소리란 배불러 보이는 상황에서 배고픔을 호소하는 상대적 개념입니다. 실제로 배부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잠언에서 말하는 지혜는 배부름을 절대적 개념으로 받아들입니다. 실제로 배부른 정신이기에 헝그리 정신과는 정반대에 서있는 개념이 되는 것입니다.
요새 우리 사회에서 헝그리 정신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아담 이후로 인류가 헝그리 정신을 잃은 적이 없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헝그리 정신으로 살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잘 사는 나라나 못 사는 나라나 다 똑같습니다. 에덴 밖으로 쫓겨나 살게 된 모든 인간은 헝그리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습니다. 한편 진정한 지혜란 이러한 굶주림의 상황을 벗어나 하나님으로 배부른 상태에서 나오는 소리입니다.
우리가 앞서 보았던 150편 시편 중에는 다윗의 시가 가장 많았기에 다윗을 떠올리게 되고 잠언에서는 절대다수가 솔로몬이 썼기에 솔로몬을 떠올립니다. 솔로몬 이외에도 몇몇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시편과 잠언은 성격에 차이가 있습니다. 시편은 삶의 치열한 현장에서 마음이 하나님을 확보하고자 하는 노래입니다. 삶에는 우여곡절이 있고 절체절명의 위기가 찾아올 수 있습니다. 또한 고통과 환란의 상황이 지속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육체로 만나는 삶의 처지에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빼앗기는 상황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확보하려고 하는 것이 시편의 몸부림이었습니다.
시편을 대표하는 주제어를 골라보라고 한다면 어떤 사람은 ‘할렐루야’라는 단어를 선택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피난처’라는 단어를 선택합니다. 시편이 피난처라는 말을 이토록 많이 사용한 이유는 급물살 같은 세상에서 마음이 하나님께로 도망 나오는 것이 주제였기 때문입니다.
한편 잠언의 주제는 오늘 본문 3절의 말씀에서 잘 드러납니다.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시편과는 다른 잠언의 특색입니다. 시편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확보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면, 잠언은 마주대하는 삶의 현실에 대해 어떤 분별력과 생각을 가지고 대응할 것인가를 문제 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시편은 마음이 하나님을 확보함으로써 생겨나는 배부름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삶의 상황들은 마음을 빼앗아 하나님께로 가지 못하게 합니다. 시편은 그로부터 빠져나오려는 몸부림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잠언은 그러한 삶의 형편과 처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대처해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 보시기에 그릇됨이 없는 행동을 하게하려는 훈계이고 가르침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잠언에서 말하는 지혜입니다.
7절을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는 말씀을 통하여 지혜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경외는 없으면 두려운 마음입니다. 없으면 두려운 대상입니다. 그 대상에 대한 마음가짐입니다. 경외는 히브리어로 ‘이르아’라고 하는데 ‘두려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두려움과 차별되는 이유는 그 속성이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두려움으로써의 공포란 무엇인가가 있을 때 두려워지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7절 말씀을 살펴보면 어법상 어색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이라고 했으면 자연히 뒤에 이어지는 내용은 ‘미련한 자는 여호와 경외를 멸시하는 자다’라는 식으로 나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여호와 경외로부터 나오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고 하면 쉬울 것입니다.
즉 7절에서 말하는 지혜와 훈계는 여호와를 경외함으로부터 생기는 것입니다. 인간은 마음의 공백을 두려움의 근원으로 삼습니다.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육체로 얻는 것들로 마음을 채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돈이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돈으로 마음을 채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전제를 가지고 살펴보면 ‘여호와를 경외함에서 나오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는 것이 어리석고 미련한 자’라고 하였지만 세상의 모든 지혜와 훈계 자체를 모조리 다 멸시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호와 경외로부터 생겨난 지혜와 훈계, 즉 하나님으로 배불러서 배부른 소리하는 것을 멸시한다는 의미입니다. 반대로 돈으로 배부른 사람의 소리라면 듣기를 원합니다. 서울대에 자녀를 입학시킨 부모의 소리라면 듣기를 원합니다. 온 세상은 지혜와 훈계를 찾기에 바쁩니다. 숱한 자기계발서가 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미련한 사람은 모든 지혜와 훈계를 다 멸시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가르치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는 자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으로 인한 배부름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어리석음은 헝그리 정신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에덴에서 쫓겨난 모든 사람은 배고픔 가운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마음의 공백은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도록 지음 받았는데, 에덴 밖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으로 헝그리 정신이 깔려있습니다. 헝그리 정신의 특징은 내 마음의 만족과 기쁨을 위해서 이 세상에서 만나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사용합니다. 만족과 기쁨을 위해서 사람들은 얼마든지 타인의 지혜와 훈계를 수용합니다. 세상의 선생들과 사상가들을 찾아다니며 지혜를 얻고자 몸부림을 칩니다. 심지어 자녀조차도 마음의 공백을 채우기 위한 재료로 삼습니다. 자녀의 형통을 통해 내 마음을 채울 수 있다고 여기기에, 자녀를 형통하게 하기 위해서 지혜와 훈계를 찾아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10절 말씀을 보면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따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헝그리 정신으로 사는 자들을 ‘악한 자’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는 마음은 채울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기에 만나는 것들로 닥치는 대로 마음을 채우려고 하지만 헝그리 정신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 뿐입니다.
악한 자들의 삶의 결과가 19절에 나타납니다. “이익을 탐하는 모든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익’은 히브리어로 ‘베차’라고 하는데 ‘조각, 끊어진 단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19절 말씀을 직역해보면 ‘끊어진 단편을 탐하는 모든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끊어진 조각을 탐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마음의 공백에는 하나님만이 들어오셔야만 채워질 수 있는데 세상에서 추구할 수 있는 가치들은 조각이고 파편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재벌처럼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 재산은 조각이고 끊어진 단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재산에 연연하는 이유는 헝그리 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배부름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단편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배부른 소리하고 있네.’라는 비꼬는 말 자체에 이러한 성향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볼 때에는 배부른 소리이겠지만, 그 사람은 배고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못 갖춘 모든 세상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지만 그것은 조각에 불과합니다. 부러워할만한 조건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배고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인이라면 정말로 배부른 소리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잠언은 이러한 지혜를 여러 가지 말을 통해 가르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하나님 경외로 인해 생긴다면 단순히 하나님 경외를 가르치면 될 텐데 왜 복잡한 방식을 취하는 것일까요?
젊은이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쉽게 경외할 수 있다면 잠언은 필요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경외해야한다는 것을 깨닫고 인정하고 받아들인 사람조차도 하나님으로 배불러서 유지하는 삶은 쉽지가 않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으로만 배부를 수 있다는 진리를 인정하는 단계에 이르는 것조차도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이 시간을 헝그리 정신으로 살도록 내버려둘 수 없기에 잠언이 쓰인 것입니다. 젊은이들은 물론이고 헝그리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을 향해 잠언은 쓰였습니다. 하나님 경외를 성공적으로 한 사람들이 삶에 대해 깨달은 분별과 통찰로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아직 헝그리 정신을 벗어나지 못했을지라도 이러한 훈계를 따름으로써 하나님을 경외하는 방향에서 크게 어긋나거나 잘못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초등학생 때나 중고등학생 때부터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실질적으로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지침으로써의 교훈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10~19절에서 ‘악인과 함께하지 말라’는 것은 좁은 범위에서 범죄자과 어울리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헝그리 정신으로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는 삶을 멈추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솔로몬은 하나님 경외를 체험한 자로서의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20~33절을 보면 심지어 그 지혜를 의인화해서 표현합니다. 20절을 보면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라고 하였습니다.
잠언을 읽는 이들을 통해서 지혜가 나타나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 자신으로 나를 배부르게 해주시기를 간절하게 원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으로 배부른 소리를 하신 원조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지혜의 근본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하나님 아버지를 마음에 모신 배부른 자이셨기 때문입니다. 입만 여시면 배부른 소리를 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신이신 두드러진 속성 중에 하나는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배부르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과 일체이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나님의 지혜이자 말씀 자체이십니다. 그러하신 예수님께서 육체를 입으시고 세상에 오심으로써 예수님과 똑같이 되는 길을 여신 것입니다. 그 길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2~25절을 보면 십자가의 길이 무엇인지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돈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럴 때에 헝그리 정신을 가진 세상 사람들은 돈을 벌어서 만족하고 기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악인의 삶입니다. 부정부패하지 않고 정직하게 돈을 벌었어도 돈을 벌어야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에는 이 헝그리 정신에 붙잡힌 상태입니다. 이 헝그리 정신을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죽이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단편들을 붙잡고 만족하려했던 헝그리 정신을 십자가에서 죽이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마음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으로 배부르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 배부름이 잘 안 된다는 말씀들을 하십니다.
우리가 특정한 사건들이 있을 때마다 십자가에서 간헐적으로 죽는다면 그 순간에 대해서는 그릇된 분별과 행동과 응답을 할 가능성이 줄어드는 것은 분명하지만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간헐적으로 죽는 순간 이외의 시간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하나님으로 배부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으로 인한 배부름은 마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봄이 지속될 때에 가능합니다. 마음의 시선이 하나님께 연결된 파이프라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와계십니다. 우리 자녀들이 사고를 당하면 모든 신경이 자녀에게 집중되는 것처럼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독생자가 죽으신 십자가 사건에 하나님의 모든 마음이 다 와계십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시선이 십자가에 머무는 것이 유지되면 하나님으로 배불러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으로 배부른 소리가 바로 잠언이 말하고자 하는 지혜입니다.
잠언을 읽으면서 배부른 소리를 듣는 중에 나의 생각과 분별력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음을 느낀다면, 내가 여전히 헝그리 정신에 의해 끌려가고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혹은 십자가 생활화가 지속적으로 유지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잠언은 십자가 생활화를 지속하기 위한 거울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가 지속됨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로 배부르게 하여 주셔서 어떤 사건 앞에서든지 배부른 소리를 내는 지혜자의 삶을 통하여 헝그리 정신을 말끔히 청산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