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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책, 잠잠이
뚜쎼 신혜은
사람들이 종종 “인생 책이 도대체 뭐죠?” 라고 물을 때, 나는 “음 그건, 내 인생의 사람 같은 거죠. 다들 있으실거예요. 내 인생의 한 사람,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내가 그 동안 만난 수많은 사람 중에 한 사람을 꼽는 다면 떠오르는 그 사람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런 사람이 없는 사람은 없을 거다. 그것처럼, 세상에 태어나서 내가 읽고 만난 책들 중에서 한 권을 고르시면 됩니다.”라고 대답한다. 인생 책을 찾는 것은 한 순간에 일어나는 일이 아닐 것이다. 인생의 사람도 한 번 잠깐 만나서 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인생의 책이든 인생의 사람이든, 그것은 순간의 강렬한 인상이나 감동 그 이상의 것이다. 인생의 사람 혹은 인생의 책은 오랜 시간 혹은 일정 시간 동안 깊이 꾸준한 반복적인 만남을 통해 알아가게 되는 ‘과정적 인식’의 현상이다.
한 권을 꼽으라면 단연코 나의 인생 책은 [잠잠이](레오 리오니, 1980)이다! 인생 책이 그림책이라니 예전에는 의아해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림책이라 하더라도 나에게는 그 어떤 책보다 가볍지 않은 무게감과 깊이감, 알 수 없는 공간감, 경계의 모호함도 느껴진다. 처음부터 그런 느낌을 가졌던 건 결코 아니다. 책에 대해 이런 느낌을 가질 수 있다는 데에 스스로도 경이로움을 느끼게 된다.
원제목 Frederick
원본출간년도 1967년도
[그림1] 잠잠이(레오 리오니, 1980)
내가 잠잠이를 처음 만 난건 청소년 시절 친구네 집에서였다. 1981년 중3 겨울 방학이었는지, 1982년 고1 겨울이었는지 정확하지는 않다. [잠잠이]는 [꽃들에게 희망을], [아낌없이 주는 나무], [어디로 갔을까 나의 반쪽]과 함께 나온 분도그림 우화 시리즈의 한 권이었다. 나는 어느 겨울밤 친구 방 책상 책꽂이에 있던 [잠잠이]를 꺼낸 읽었다. 해묵은 돌담집에 살고 있던 들쥐 네 마리, 이웃 농부는 이사를 가고 겨울은 멀지 않고, 모두들 밤낮없이 밀이랑 짚을 모으려고 일을 한다. ‘잠잠이’만 빼고. “너는 왜 일을 안 해?” 다른 쥐들의 물음에 잠잠이는 “나도 일하고 있어, 춥고 어두는 겨울날을 위해 햇빛을 모으는 중이야.”라고 대답 한다. 또 잿빛 겨울을 위해 ‘빛깔’을, 얘깃거리마저 없어지는 날을 위해 ‘말’을 모은다고 했다. 드디어 겨울이 되었고 먹을 것이 가득했던 돌담 안에 먹을 것이 다 동이 나고 집안은 썰렁해졌을 때, 잠잠이는 햇빛과 빛깔, 그리고 말을 읊어준다. 잠잠이가 다 읊고 나자 모두들 잠잠이에게 시인이라며 박수를 쳐준다.
그 후 나는 잠잠이를 잊고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잠잠이]를 다시 떠올린 건, 석사 졸업 후 결혼을 하고 일주일에 한두 번씩 모교에 강의를 나가던 무렵이었다. 당시 모교 대학원에 처음으로 아동문학 강의가 개설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는 호기심을 가득안고 열혈 청강생이 되었다. 그리고 그 수업에서 그림책들에 매료되었다. 이후 몇 년 간 어린이문학교육연구회를 거쳐 어린이문학교육학회 활동을 하면서 수많은 그림책들을 만났다.
수많은 그림책 중에 왜 그 책이었을까?
어느 날 문득 그림책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중에 몇 권을 골라보기로 했다. 또 한 권을 고른다면 어떤 그림책일까?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그 때 문득 [잠잠이]가 떠올랐다. “아, 그 책!” 하지만 나에게는 잠잠이가 없었다. 학창시절 친구 집에서 잠깐 빌려 본 책이었으니 당연한 터였다. 서점에서 찾아보았는데, [잠잠이]는 절판이 된 상태였다. 얼마 후 다른 출판사에게 [프레드릭](레오 리오니, 1999)이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었다는 걸 알았다. 반가운 마음에 [프레드릭]을 찾아 읽어보았다. 하지만 느낌이 달랐다. 분명히 같은 책인데, 같은 이야기와 그림의 내용인데, 예전에 읽었던 그 잠잠이와 느낌이 너무 달랐다. 너무 오래전 기억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잠잠이]는 작은 판형의 소프트 커버였다. [프레드릭]은 큰 판형의 하드커버였다. 게다가 번역도 달라져 있었다. 기억의 왜곡 때문인지, 판형과 커버와 번역이 달라져서이었는지 아무튼 같은 책인데, 결코 같은 책이 아니었다.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건 맨 마지막 장면 ‘나도 알아’였다. 멋진 시를 읊어서 친구들로부터, “잠잠이 너 시인이구나”라는 찬사를 듣는 장면이었다. 분명 책에는 ‘잠잠이는 얼굴을 붉히며 절을 했습니다. 그리고 수줍은 듯이 말했습니다. “나고 알고 있어” 인데, 나는 그렇게 읽지 않고 있었다. 주먹을 불끈 쥐고 팔에 힘이 주면서 나도 모르게 외치고 있었다. “나도 알고 있어. 알고 있다고!!”
당시 나는 토미 웅거러의 그림책에 대한 연구를 하고 [크릭터](토미 웅거러, 1996) 등 토미 웅거러의 그림책에 푹 빠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잠잠이]를 떠올리며, ‘알고 있어. 알고 있다고! 나 잘살고 있다고!’ 소리쳤다. 그리고 왠지 모를 알 수 없는 감정이 휩싸이곤 했다. 왜 수많은 그림책 중에 굳이 [잠잠이]였을까? 당시에는 알 수 없었다. 이후 나는 만나는 사람에게 마다 물었다. ‘만약 당신이 그림책을 한 권만 고른다면, 어떤 책을 고르시겠냐고, 나는 [잠잠이]라고 말해 주었다. 당시에는 이런 뜬금없는 인생 그림책 질문에 답해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시간이 흘렀고, 그 사이 나는 그림책을 기획하고 그림책의 글을 쓰는 일을 계속 하게 되었다. 그림책 강의가 있을 때마다 나는 나의 그림책 [잠잠이]와 잠잠이의 마지막 장면을 이야기하곤 했다. 그러면서 알게 되었다. 내가 왜 주먹을 불끈 쥐고 힘을 주며, 알고 있다고 외쳤는지. 그 청소년 시절 나는 무척이나 힘이 들었고,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잘하고 있다는 ‘자기암시’의 말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사후해석(post-hoc)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나의 자기 분석이었고, 그로인해 [잠잠이]는 나의 인생 어딘가 삶의 지점에 깊이 연결되었다. 나는 [잠잠이]를 통해 그림책이 사람의 마음을 강하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처음 경험했다. 그런데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첫그림책, 정점관측점
1999년, 2000년부터는 그림책을 본격적으로 치유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독서치료를 시작한 것은 순전히 나 자신을 위해서지 다른 누군가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마음을 치유하는 그림책들을 찾고, 또 기획하고 번역하면서 나의 [잠잠이]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떠올렸다. 그러는 사이 나는 몸의 감각으로 그림책을 읽는 방식의 강력함과 치유적 힘에 대한 확신을 점점 가지게 되었다. 그림책에 반응하는 생생한 나의 몸의 감각은 그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체험의 세계로 나를 데려다 주었다. 마치 이상한 나라 앨리스의 ‘구멍’ 같았다. 그 즈음부터 나는 인생 그림책 [잠잠이]를 첫그림책(priming picturebook)(신혜은, 2011)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나의 삶의 이야기에 닻을 내린 마중물이 되어준 그림책, 다 [잠잠이] 덕분이었다.
[잠잠이]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먹을 불끈 쥔 내 몸의 감각느낌을 시작으로 2000년대 중반부터 ‘그림책, 몸으로 읽기’를 새로운 그림책 읽기 접근으로 제안하고 이를 강조했다(신혜은, 2012). 굳이 왜 그렇게 읽어야 하느냐는 동료도 있었고, 너무 모호하고 알 수 없다며 고개를 젓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말로는 표현하지는 못해도 각자의 몸 안에서 경험되는 ‘그 모호하고 불분명함의 분명함’에 열렬히 반응하는 사람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빨간 나무]와 [짖어봐 조지야]를 몸의 반응을 따라가며 읽었고, 몸의 감각 읽기를 중심으로 한 그림책 나눔은 다른 데서는 경험하지 못한 ‘주관적 체험’의 새로움과 경이로움을 제공했다. 나는 그것을 그림책을 통한 ‘자기 인식의 시작점’이자 초석으로 삼았다.
2010년 4월 파주 그림책 강연에서 여전히 [잠잠이] 이야기를 또 하게 되었다. 강연이 끝나고 청중 한 분이 자기 집에 [잠잠이]가 있는데, 그렇게 중요한 책이라면 자기가 기꺼이 나에게 선물로 주시겠다고 했다. 일주일 후 나는 오랜 세월에 손때 묻고 낡은 [잠잠이]를 선물로 받았다. 처음 만난 것이 81년 이었다면 19년 만에, 82년 이라면 실로 18년 만의 재회였다. 정말 ‘선물‘이었다. 그리고 그 후 [잠잠이]를 다시 읽게 되면서 전혀 예측할 수 없던 경험을 하게 되었다. 주먹을 불끈 쥐고 ‘알고 있어. 알고 있다고! 나 잘하고 있다고!’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어찌 보면 섬뜩하기도 한 뜻밖의 체험이었다. 나는 그 날도 사람들에게 [잠잠이]를 읽어 주고 있었다. ‘나도 알고 있어!’ 가 나오기 바로 전 장면, 잠잠이가 여름 내 모은 ‘말’들로 아름다운 시를 읊어주는 장면이었다.
‘...하늘에 살고 있는 들쥐 네 마리
너처럼 나처럼.... 들쥐 네 마리
맨 처음 봄쥐는 빗물에 흠뻑
그 다음 여름 쥐는 꽃으로 단장
그리고 가을 쥐는 호도밀 듬뿍
마지막 겨울 쥐는 네 발이 꽁꽁
한해가 네 철이니 좋지 않아요?
세 철? 다섯 철?...아유 안되요...’
[그림 2] 잠잠이가 시를 읊어주는 장면
‘한해가 네 철이니 좋지 않아요? 세 철? 다섯 철?...아유 안되요...’이 구절을 읽는데, 갑자기 알 수 없는 슬픔이 쓰나미 처럼 나를 덮쳤다. 배 부분을 일본 무사 칼이 사선으로 베는 듯 아픔이 느껴졌다. ‘뭐? 네 철이 좋지 않냐고? 난 싫어. 왜 꼭 네 철이어야 해. 세 철이나 다섯 철이면 안 되는 거였어? 왜 나에게는 네 철 이었냐고!!!’ 나는 들리지 않는 속외침으로 고함을 치고 있었다. 난 일본 무사 칼에 베여 본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 사선으로 베이는 몸의 느낌과 이미지가 떠올랐다. 나중에 유진 젠들린의 포커싱(focusing)(Gendlline, 2000)을 접하면서 알게 된 것이지만 그때 내가 경험했던 것이 몸의 감각느낌(felt sense)과 몸의 감각이었다. 눈물이 솟구쳤다. 그 이전에는 그 장면에서 한 번도 그렇게 느껴보지 못한 몸의 반응과 감각, 이미지와 침묵의 외침이었다.
그 날 이후, 나는 ‘한 해가 네 철이니 좋지 않아요? 세 철? 다섯 철?... 아유 안되요’ 장면에서 항상 멈추었다. 칼로 베이는 듯 몸의 반응과 이미지와 침묵의 말도 계속 듣게 되었다. 어떤 때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고, 또 어떤 때는 떨리는 목소리로 목매임을 참고 넘어가기도 했다. 슬펐지만 신기했고, 당황스러웠지만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지 몹시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자꾸 그 지점으로 가서 내 몸의 반응을 다시 읽고 또 읽었다. 읽을 때마다 몸의 감각느낌이 비슷하기는 했지만 똑같지 않았다. 그래서 또 신기했다. [잠잠이]는 나의 삶에 정적관측점이 되어 주었다.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 현재 내가 어떠한지를 그대로 반영해 주는 거울이었다.
한 번은 부모와의 관계에서 힘들어 하는 청소년을 상담하던 때였다. 함께 힘든 장면을 이미지화 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나는 내담자의 작업을 지켜보기보다는 나도 동일한 지점의 내 작업을 같이 하곤 한다. 이런 방식이 전통적인 상담이나 치료적 접근에서는 적합하지 않다고 볼 수도 있지만, 나의 경우에는 오히려 내담자와 같은 위치에서 서로 소통하고 나누는 지점을 찾는 효과적인 방안이었다.
[잠잠이]의 ‘한 해가 네 철이니 좋지 않아요?’에서 나는 어두운 동굴 속 깊은 낭떠러지에서 내가 떨어지고 있는 느낌과 이미지가 떠올랐다. 낭떠러지가 얼마나 깊은지 아무리 내려가고 내려가도, 떨어지고 떨어져도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 끝없는 내려감과 떨어짐이었다. 내가 아무리해도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helplessness)이었다. ‘네 철’은 내 삶에 주어진 것들이었다. 결코 바꿀 수 없는 선택할 수도 없었던 나에게 부여된 가족과 그 속에서 살아야 했던 나의 어린 시절의 삶이었다. 내가 느꼈던 나약함과 결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감, 그리고 나도 모른 채 나에게 깔려있던 배경정서(background emotion)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나의 빛과 그림자를 발견하다
그렇다. 나에게는 두 가지 삶의 이야기하기 방식, 내러티브가 있었다. 하나는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무한 긍정 낙천성’이다. 정말로 나는 ‘하면 안 되는 일 있어? 뭐든 하면 되지. 난 다할 수 있어’라고 하는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또 다른 정반대의 내러티브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가 있다. ‘한쪽은 뭐든 다 할 수 있고, 다른 한쪽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음 이라니 이런 아이러니가 있나?’ 그것도 바로 그림책 한 페이지를 사이에 두고 앞 뒤 장면에서 내 삶의 전반을 차지해온 ‘중심 내러티브(core narratives)’를 찾아내다니, 그건 그야말로 놀라움과 경이로움 자체였다. 그 둘은 내 삶의 ‘빛과 그림자’였다.
나는 스스로를 ‘생각이 없는 사람, 생각별로 안하는 사람’이라 소개하기도 하고, 정말 그렇다고 느끼기도 한다. 그런데 생각이 별로 없어서, 생각 하지 않아서 뭐든 다 할 수 있고 웬만하면 다 한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해나가다가 어느 지점에선가 반응이 없거나 변화가 감지되지 않으면 ‘아무리해도 안 되는 건가? 이제 내가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는 건가?’라는 느낌이 들게 되면, 지금껏 해왔던 일을 미련 없이 그냥 멈추어 버린다. 그리고 더 이상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마치 손으로 잡고 있던 끈을 ‘탁’놓는 것처럼 말이다. 그 대상이 일이든, 사람이든, 관계든 마찬가지였다. 되돌아보면서 나는 어린 시절부터 오랫동안 반복적으로 그렇게 반응해 왔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게 나의 ‘이야기하기 방식’, 삶의 내러티브였다.
‘네 철’은 나를 꼼짝 못하게 했다. 밑이 없는 끝없는 낭떠러지로 계속 떨어지게 했다. 발 딛을 땅이 밑에 없는 느낌이 들면 나는 곧장 무력해 졌다. 그런데 그 무력감이 나의 무한긍정 낙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게 하는 근원이자 출처라는 걸 알게 되었다. ‘뭐든지 다할 수 있음’과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은 나에게 둘이 아닌 하나였으며, 그게 바로 나였다. 그림책 두 장면에서 내 삶의 내러티브를 고스란히 볼 수 있었다. 그것도 아주 선명하게 내게 보여주었다. [잠잠이]가 나의 인생 책, 첫그림책이 된 이유이다.
그러자 감사가 절로 나왔다. 작가 레오 리오니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레오 리오니가 60 대 중반이 넘어서도 작가가 되기를 포기하지 않고 [잠잠이] 그림책 작업을 한 것을, 1980년에 [잠잠이]를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한 출판사를, 겨울밤 친구네 집에 가게 된 것을, 잠잠이를 책꽂이에 꽂아둔 그 친구를, 그리고 대학원에서 아동문학을 청강하게 된 것을, 다시 [프레드릭]으로 재출간된 것을, 그리고 파주에서 [잠잠이]를 나에게 선물로 주신 그 분을... 그 모든 것이 감사였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계속 새롭게 구성되어 가는 이야기
인생 책을 찾은 나는 그림책을 사랑하는 분들이 각자의 삶을 반영하는 인생 그림책, ‘첫 그림책’을 찾기를 바랬다. 인생 책, 첫그림책을 통해 각자의 고유한 내러티브를 찾으시기를 원했다. ‘그림책심리학, 몸의 감각으로 그림책 읽기’는 함께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점점 더 퍼져나갔다. 많은 분들이 자신의 인생그림책, 첫그림책을 찾았고, 그 그림책을 통로로 해서, 자신이 지금까지 어떤 반복되는 내러티브로 살아왔는지, 또 현재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발견했다. 그리고 앞으로 자신이 어떤 이야기로 재구성하고 살아갈 것인지의 방향을 찾아 나가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다.
기뻤다. 내 삶의 내러티브가 타인의 삶의 내러티브로 그렇게 연결되고 또 계속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굳이 그림책 치료나 그림책 테라피라는 이름으로 강조하지도 않았다. [잠잠이]는 유치원 아이들과도 함께 했고, 초등생부터 청소년 성인, 노년층과도 함께 나누고 즐기고 그 속에서 깊이 자신의 지점을 찾게 하는 그림책이 되었다. 예술, 교육, 치료에서 모두 작동하는 책이 되었다. 그건 책만의 힘이 아니라 독자와 그 책이 만나서 서로를 새로이 구성해 내는 과정 속에서 발현되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나도 알아”를 훨씬 더 가볍게 말한다. 주먹 불끈 힘주어 “나도 알고 있어. 알고 있다니까. 잘 할 수 있다니까!!” 그렇게 외치지 않는다.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응, 나도 알아~”라고 미소지으며 말한다. 그리고 시를 읊어주던 앞 장면의 “한 해가 네 철 이니 좋지 않아요?”에서는 “응, 네 철..그래 네 철 이었지. 그 네 철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준거지...”하며 받아들이고 자조한다. 일본 무사 칼에 베이는 느낌도 훨씬 무뎌 졌다. 끝없이 떨어지던 낭떠러지 이미지도 두 해 전 쯤 오른쪽 엄지발가락이 땅에 닿는 느낌으로 바뀌었다. 지금은 발바닥 앞부분이 반쯤 닿은 느낌이다. 그리고 손으로 잡고 있던 끈을 ‘탁’ 놓고 싶은 순간이 올 때 마다, ‘아, 이거 반복되는 내러티브지!’ 자각하면서, ‘그래, 지금 딱 놓고 싶지만 조금 더 잡고 있어 보자! 조금만 더’하게 되었다. 삶의 변화 이야기임에 분명하다.
두 번째, 세 번째 인생 그림책
2008년 4월 볼로냐 도서전 마지막 날, 부스를 철거하기 직전의 프랑스 memo 출판사 부스에서 Dans Moi 내 안에(Cousseau & Crowther, 2007)를 만났다.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는데도, Dans Moi는 한 눈에 쑤욱 들어왔다. 달려가다시피 다가가 책을 집어 들었다. 내 눈에는 너무나 편안해 보이는 표지 이미지였다, 면지를 열면 더 상상할 수 없는 장면이 펼쳐진다. 그리고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고, 또 끝이 난다.
난 항상 내가 아니었다. 내 자신이 되기 전
난 내안에 없었다
난 다른 곳에 있었다
다른 곳, 나를 제외한 모든 곳....
[그림 3] Dans Moi(2007)
비가 내리자 구름은 사라졌다
내 안에 무지개가 생겼다. 말들, 색깔도 생겨났다
내 안에
그것은 나의 결정이었다.
아마도 이 책을 만난 지 1년 정도 지날 때쯤, 이 책이 두 번째 인생 그림책이 될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림책심리학 점그림책 찾기 과정’(신혜은, 2012) 마지막 시간에 늘 다루는 그림책이었지만, 최근에 와서야 Dans Moi(내 안에) 마지막 장면에서 생겨난 것이 ‘말’과 ‘빛’과 ‘색깔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잠잠이가 모으던 것과 같은 ‘햇빛’과 ‘색깔’과 ‘말’이었다. ‘오, 이런 동시성이라니’, 신기했다. 잠잠이는 밖에서 빛과 색깔과 말을 모으고, Dans moi는 내 안에서 ‘말들’과 ‘빛’과 ‘색깔’을 찾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그렇게 나의 첫 번째 인생그림책과 두 번째 인생 그림책이 연결되었다.
[ 그림 4] 신기한 칼(2016)
세 번째 인생 그림책은 아마 [신기한 칼](나까무라 마키에, 하야시 겐조, 후꾸다 다까요시(2016)이 될 것 같다. 역시 선물로 받은 책이다. 잎새 김건숙 작가님이 일본 서점 여행 중에 발견했고, 곧장 내가 떠올랐다며 선물로 사오신 거다. 표지의 칼은 일본 무사 칼은 아니었지만 근본적으로 칼에 대한 나의 이야기와 연결이 된다. 칼이 꼬이고 비틀어지고, 부러지고, 깨지고, 녹고, 끊어지고, 풀어지고 조각나고 흩어진다. 신기하게 늘어나기도 하고 오그라들어 부풀어 오르기도 한다. ‘아, 칼이 이럴 수가 있는 거구나’ 놀라게 된다. 틀 바꾸기(changing frame)의 진수이다. 이 책을 통해 앞으로 나의 칼 이야기가 또 어떻게 변해 갈지 기대가 된다.
참고문헌
나까무라 마키에, 하야시 겐조, 후꾸다 다까요시(2016). 신기한 칼. 복음관서점.
레오 리오니(1980). 잠잠이 Frederick. 분도출판사(원본출간일 1967).
숀 탠(2012). 빨간나무 The red tree (김경연 역). 풀빛(원본출간일 2001)
신혜은(2012). 그림책 표현치료를 위한 새로운 방법: 점그림책 만들기. 문화예술교육연구, 7권 4호, 171-194.
신혜은(2012). 그림책 치료의 새로운 접근: 그림책 몸으로 읽기와 첫그림책 찾기. 문화예술교육 연구, 7권 1호, 115-137.
신혜은(2011). 그림책심리학, 첫그림책 찾기. 그림책심리학 자료집.
줄스 파이퍼(2000). 짖어봐 조지야 Bark George(조숙은 역). 논장(원본출간일 1999).
토미 웅거러(1996). 크릭터. 시공주니어(원본출간일 1973)
Cousseau, A. & Crowther, K.(2007). Dans Moi, Memo.
Gendlin, E. (2000). 내 마음 내가 안다 Focusing (손혜숙 역). 아름드리미디어(원본출간일 1978).
첫댓글 지금은 베인 곳이 다 아물고 손가락 길이와 굵기 만큼의 흉터로 남아있는듯 한 느낌이다. 굉장히 사선으로 길게 베이는 느낌이었는데..
바닥에 닿은 두 발은 걷고 있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단단한 땅과 부드러운 흙을 느끼면서 걸어가고 있다
2023.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