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안문중(咸安門中)의 유래(由來)
함안에 처음 거주하시게 된 선조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경상도사(慶尙都事)를
지내신 17세 휘(諱) 계운(啓耘) 선조로서 서울 오정(烏井)에서 살고 계셨는데,
1479년 연산군(燕山君) 생모 성종왕비(成宗王妃) 윤씨가 폐출되고 1482년 폐비
(廢妃) 윤씨에게 사약이 내려지고 이듬해 연산군이 왕세자로 책봉되는 소용돌이
속에서 공께서는 정란(政亂)을 예측하여 벼슬을 아낌없이 버리시고 낙향하여 스스로
농부되기를 다짐하고 휘(諱) "예"자(藝字)를 "운"(耘)자로 고쳐 함안 평관(坪館)에
정착하였다.
耕夫帶月歸來晩 績火遙明古洞天
( 경부대월귀래만적화요명고동천)
농부가 밭일을 마치고 밤늦게 돌아올제
길쌈하는 불빛이 멀리 가물거린다
아~ 꿈속의 아름다운 산천이어라.
조선 태종조(太宗朝)에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을 지내시고, 공도의 시효를 받으신 휘(휘) 문화(문화)선조는 공에게는 증조(曾祖) 시고
공도공의 둘째아드님이신 공조판서(工曹判書) 휘(諱) 효의(孝義) 선조는 공의 조고(祖考)
이시며 개성(松京)에 청정비(淸政碑)가 세워져 있는 청백리(淸白吏) 휘(諱) 극명(克明)은
공의 아버님이시다.
공의 묘소는 함안군 가야면 춘곡리에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확인할 수 없어
1873년 본 동 고남산(古南山)에 설단(設壇)을 하고 1955년에 다시 제단을 개축하여
비(碑)를 세웠다.
도사공 선조께서는 성균생원(成均生員) 휘(諱) 주남(周南)과 통덕랑(通德郞) 휘(諱) 소남
(召南) 두분의 아드님을 낳으셨다. 이 두 선조의 후손들이 함안종중을 구성 도천사(道川祠)
를 구심점으로 하여 520여년 동안 타성이 부러워하는 학덕높은 선비, 효자, 열녀,공신,
독립운동가등 많은 현조를 배출하면서 함안, 의령, 창원, 고성 등 경남일원에 분포해
거주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뿌리" 에서 옮겨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