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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혁의 소설 쓰고 앉아 있네
"작가들의 자기소개는 일종의 다짐이나 선언, 결심 같은 것이 들어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소설가'라는 단어에 갇힌 명사가 아닙니다. 이 지구 어딘가에는 더 이상 소설을 쓰지 않는 화석 같은 소설가도 있겠지만, 저는 여전히 끓어오르는 활화산처럼 내면에 뜨거운 용암을 품고 무언가를 '쓰는 사람'입니다....."
좋은 글을 쓰는 작가는 천재나 괴짜나 돌연변이가 아닙니다. 좋은 작가란 긍정적인 의미에서 직장인과 같아요. 매일 정해진 시간과 정해진 장소에서 일정하게 쓰고, 일정하게 좌절하고, 일정하게 고치는 사람만이, 그 길고 건조한 무채색의 지루함을 견딜 수 있는 사람만이 마침내 좋은 글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p29 글쓰기에 있어 장애물과 방해 세력은 기본값입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고상하게 글을 쓰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예전부터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작가들은 어디에서나 씁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쓰고자 했기 때문에 작가가 되었습니다. 역사 속 작가들이, 작가들의 역사가 그 사실을 증명합니다. 그들은 전쟁터에서, 장례식장에서, 신혼여행지에서, 키즈 카페에서, 직장에서, 화장실에서, 지하철과 버스, 비행기에서, 아픈 와중에도 그냥 썼습니다. 쓸 시간이 없다고, 방해하는 사람이 많다고 불평하는 대신 말입니다.
글쓰기 좋은 날은 없습니다. 내가 글을 쓰는 날이 좋은 날입니다.
--- 「작업실 만들기」 중에서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은 ‘작가의 눈으로’ 책을 읽어야 합니다. 꼭 그 책이 유명하거나, 걸작이거나, 권수가 많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독자로서 읽는 것이 아니라 작가로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평범한 계란 프라이를 먹으면서도 셰프의 시선으로 요리를 감상하는 것이죠. ‘이 계란프라이를 만든 사람은 무슨 계란을 썼을까? 크기와 등급은? 프라이팬에 기름을 둘렀을까? 올리브오일일까? 포도씨유일까? 왜 이만큼 구웠을까? 서니 사이드 업, 오버 이지, 오버 미디엄, 오버 하드 중 어떤 타입일까? 소금과 후추가 뿌려져 있나? 있다면 어느 정도의 양일까? 끝을 태우는 건 어떤 맛을 낼까? 결과적으로 이 프라이는 맛있나? 추천하거나 다시 먹을 만한가?’
--- 「작가의 독서」 중에서
"영화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를 생각해 보세요. 빌딩이든 헬기든 비행기든, 언제나 톰 크루즈는 몹시 위급한 상태로 어딘가에 매달려 있지 않던가요? 이런 광경을 보면 누구나 이 장면과 상황 속으로 빠져듭니다. 작가는 독자를 '낚는(hook)' 데 성공한 것이지요. 간혹 보면 첫 장면에 독자를 정중하게 초대하려는 분들이 계세요. 아닙니다. 독자의 멱살을 잡고 끌고 오셔야 합니다."(「서술과 플롯: 이야기의 구슬을 꿰는 법」 중)
바퀴벌레를 두려워하는 주인공을 다시 불러보겠습니다. 맨 처음 주인공은 아마도 바퀴벌레의 흔적만을 볼 것입니다. ‘혹시 이 집에 바퀴벌레가 사는 건 아닐까?’ 하는 질문이 남겠지요. 그 작은 두려움조차도 지금의 주인공에게는 견디기 힘든 고통입니다. 그러다 한 마리를 목격합니다. 큰 충격을 받은 주인공은 집을 살피다가 두 마리, 세 마리를 발견합니다. 나중에는 열 마리 넘는 바퀴벌레들이 모여 있는 광경도 봅니다. 어디까지 갈까요? 갈 수 있는 데까지 가야 합니다. 이를테면 이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은 주인공이 바퀴벌레로 가득 찬 방을 지나가는 모습일지 모릅니다. 아니면 방금 한 입 베어 문 빵 속에서 바퀴벌레 반 마리가 나오게 하는 장면도 좋겠죠.
--- 「서술과 플롯: 이야기의 구슬을 꿰는 법」 중에서
"플롯은 주인공을 향한 음모입니다. 이 플롯은 주인공이 변할 때까지 그에게 고통을 주어 작가가 의도한 도착 지점으로 몰고 가는 힘이자 전략입니다."
주인공을 성장하게 만들기 위해 다가오는 그 모든 시련이나 어려움을 소설에서 플롯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된다.
"이뤄내기 전 가지 이룬 척해라."
작가가 되려는 사람은 작가처럼 읽어야 합니다./ 작가처럼 써야 합니다.
작가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진짜 작가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재능은 없는 작가였지만 스스로 재능이 있다고 '착각한' 덕분에 오랜 세월을 훈련하고 연습하며 보낼 수 있었습니다.
글쓰기는 노동이고, 작가로 산다는 것은 독자처럼 글을 재밌게 읽는 것이 아니라 뜯고 씹고 맛보고 해야 하는 직업인지라 재밌게 글을 읽을 수 없지만, 그래도 글을 쓰는 작가여서 행복합니다.
어느 날 아기 토끼가 울면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친구들이 자기 귀가 크다고 놀렸다는 거예요. 엄마 토끼는 아이를 달래면서 말합니다. “네 귀가 뭐가 크니? 이렇게 귀엽고 아담한데.” 아기토끼는 금세 기분이 좋아집니다. “엄마, 근데 나 귀가 간지러워.” 그러자 엄마가 말합니다. “그래, 어서 가서 삽 가지고 오거라.” 이 이야기는 엄마 토끼가 지닌 이상적인 이중의 태도(?). 한편으로 아이를 위로하고 이해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메타인지를 놓지 않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우리가 쓴 소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내가 쓴 글이니 당연히 소중하게 보듬어야죠. 하지만 귀지를 파야 할 때 그 귀에는 삽이 필요하다는 객관적 사실도 인정해야 합니다. 내 작품을 사랑하는 일과 그 장단점을 아는 일은 양립 가능합니다. 서로 모순되지 않아요. 분명한 결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떤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처럼요.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오래된 오해를 하나 꼽아보자면 아마도 이 문장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이 말을 한 사람, 정확히는 이 문장을 책에 쓴 사람은 그리스의 학자 히포크라테스입니다. 그가 쓴 [잠언집] 서두에 나와 있지요. 그런데 조금 이상하지 않나요? 의사들이 선서할 때 등장하는 이 그리스 사람이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그것은 여기서의 아트가 예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쟁의 참상을 경험한 히포크라테스는 눈앞에서 수 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는 모습을 의사로서 고통스럽게 보아야만 했습니다. 그의 눈에 비친 인생이란 덧없고 짧은 것이었어요. 소중한 생명들이 너무 쉽게 죽어갔죠. 그러나 이들을 살리기 위해 의사로서 배워야 하는 기술(ART)은 너무 많았습니다.
'아트'가 지닌 두 가지 뜻이 이 오해의 원인입니다. 다시 말해 여기서의 아트는 예술이 아닌 기술, 정확히는 의술인 것이죠.
이걸 글쓰기에 적용해 볼까요?
글쓰기는 아트입니다. 그러나 거기서의 아트는 예술이 아니라 기술이에요. 글쓰기는 예술이기 이전에 기술입니다. 원칙과 규칙을 지니고, 훈련과 연습을 필요로 하며, 처음 하는 사람과 숙달된 사람의 결과물이 현격한 차이를 보입니다.
글쓰기는 노동입니다.
우리가 쓰는 모든 글에는 어떤 노동이 깃들어 있습니다. 어떤 글쓰기는 예술이고, 어떤 글쓰기는 기술이지만, 모든 글쓰기는 노동입니다. 그것 말고 다른 말로 글쓰기 전체를 부를 수는 없을 거예요.
예술이 되려면 기본적인 노동과 기술에 어떤 특별한 상상력과 고유성이 더해져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썼기 때문에, 쓰기를 선택했기 때문에 내가 속한 시간과 공간을 변화시켰고, 그 변화가 나를 다시 한번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이보다 더 확실한 물리적 결산이 있을까? (P.78)
- 작가 지망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20여 년 동안 글을 써왔지만, 그는 자신이 쓴 글이 세상을 변화시키지 않았다는 걸 안다. 그러나 그 자신이 변화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우리가 쓰는 이야기는 우리의 평범함이 실은 위장된 비범함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p.100)
- 글쓰기의 소재는 평범함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평범한 것을 드러내거나 찬양하라는 의미가 아니라고 작가는 말한다. 평범한 이야기를 맛깔나게 하는 작가들의 글을 보면 한없이 부럽다. 이 작업에서 필요한 것은 바로 ‘감정’이다. 소설이란, 주인공 안에서 바깥을 바라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p.101)
*좋은 플롯의 조건 (p.155~168)
1. 독자를 끌어당기는(hook) 첫 장면이 있어야
2. 주인공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거나 어떤 것을 몹시 두려워해야 한다
3. 주인공의 아픈 곳 때리기. 주인공이 변화할 때까지
4. 주인공의 시련을 점점 더 키우기
5. 막판에 뒤집기. 반전의 결말은 기분 좋은 뒤통수
6. 플롯 안 쓰기
7. 옛것을 새것으로. 오래된 플롯에 현대적인 해석, 트위스트, 디테일 부여하기
8. 레퍼런스와 선행 연구. 잘 살피고, 잘 공부하고, 잘 분석해서 조금 더 나아간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태도 갖기
좋은 플롯이 되려면, 먼저 주인공은 무엇인가를 간절히 갈구하는 인물이어야 한다. 동시에 그 주인공은 그런 꿈을 이루기에는 치명적 결함(fatal flaw)을 가지고 있다. 이런 갈등은 갈수록 고조되며, 마지막에 뒤집는 반전을 마련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반전이 너무 구태의연하면 안 된다 조언한다. 또한 깊이 있는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인공의 내면적 목표와 외면적 목표를 엇갈리게 배치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방식이야말로 서사적 카타르시스를 주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감각적 디테일을 잘 사용하라 (P.192)
내가 쓴 소설에서 시각, 촉각, 후각, 미각, 청각이 각각 몇 번씩 나오는지 체크해 보기. 단순히 자세히 묘사하기 위함이 아니라 디테일을 주인공이 어떻게 ‘감각’하는지가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필터링(filtering)이다.
디테일도 중요하다. 하지만 과유불급이다. 초보에게는 일단 세밀한 디테일을 묘사하고 나중에 이야기에 포커스와 맞지 않는 것을 과감히 삭제한다. 저자는 이야기에 명확한 포커싱을 이루는 것이 첫 번째 핵심이요, 초점에 필요 없는 것을 과감히 삭제하는 것이 두 번째 핵심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현대적 소설의 표현은 '돈 텔, 벗 쇼 don't tell, but show' 방식의 묘사가 중요하다. 꼭 말로 하거나 결과를 직접 서술하지 않아도, 주인공의 행동을 통해 주인공의 심리 상태를 독자에게 에둘러 전달해 주는 묘사가 현대 소설에서는 더 중요하다. 물리적 배경은 숨겨져 있는 서사, 즉 의미가 있는 배경으로 묘사되는 것이 중요하다. 배경의 사실만 전한다면 평범한 문장이 되기 때문이다.
대사는 의미를 농축하고 대화는 의미를 희석한다. 대화는 글의 밀도를 낮추는 작용도 한다. 좋은 대화는 화자가 누구인지의 정체성과 표면 밑에 깔려있는 의미를 주어야 하고, 갈등을 드러내며, 정보 전달과 함께 사건을 진행시켜야 한다. 대화는 공허한 말이나, 감정이 과장된 말이나 현학적인 표현들을 지양해야 한다.
가장 안 좋은 퇴고 방식 중 하나는 피드백이나 합평 이후 지적을 받았던 부분들만 콕 집어 수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여기저기 기운 누더기처럼 나중에는 보기 싫은 원고가 되기 쉽죠. (P.256)
퇴고(推敲)
퇴고는 초고의 표현을 두고 다양한 선택지에서 하나를 고르는 행위다. 고치는 것이 아니다. 초고를 퇴고할 때 유용한 것은 냉각기를 갖는 것이다. 최소 1~2주에서 6주 정도 원고를 생각하지 않는다. 한 번에 하나씩 고친다. 삭제와 추가를 행한다. 자신이 없다면 삭제가 맞다고 조언한다.
글을 다 썼다면, 합평과 퇴고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저자의 합평의 정의는 신랄하다. 합평은 상대방의 영혼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는 시간이라고 설명한다. 합평의 본질은 메타-인지다. 저자가 못 보던 것을 타인이 높은 곳에서 조망하며 보게 해주는 일이 합평이다.
의사나 경찰관이 되는 것은 하나의 ‘진로 결정’이지만, 작가가 되는 것은 다르다. 그것은 선택하는 것이기보다 선택되는 것이다. 글 쓰는 것 말고는 어떤 일도 자기한테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평생 동안 멀고도 험한 길을 걸어갈 각오를 해야 한다. (P.262)
- 폴 오스터가 한 이 말을 읽고 문지혁 작가는 작가로 사는 삶이 자신의 운명임을 확신했는데, 훗날 그게 착각이라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만 12년을 작가 지망생으로 살았는데, 그 긴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에게 재능이 있다고 착각했기 때문이라고. 재능이 있다고 착각하는 건 아주 중요한 재능이라고 그는 말한다.
"매일 밤낮으로 온 마음을 다해 읽고 쓰는 사람을 생각하며 썼다. 글쓰기는 외국어나 운동, 악기를 배우는 일과 다르지 않아서 하루하루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일정하게 쓰고 고치는 사람만이 좋은 글에 도착할 수 있다.
우리에겐 수많은 점과 완결되지 않은 단어들과 부서진 문장들이 있고, 우리는 흩어진 삶의 파편을 모아 빛나는 보석을 만들어낼 것이다. 바로 지금부터.“
퇴고(推敲)
글을 다시 다듬고 고치는 행위로, 글을 여러 번 교정하는 것을 의미하는 고사성어이기도 하다.
당나라 시인 가도(賈島,779~843)가 말을 타고 길을 가다가 문득 좋은 시상(詩想)이 떠올라서 즉시 정리해 보았다. 제목은 '이응(李凝)의 유거(幽居)에 제(題)함'으로 정하고, 다음과 같이 초(草)를 잡았다.
閑居少隣竝(한거소린병) 이웃이 드물어 한적한 집
草徑入荒園(초경입황원) 풀이 자란 좁은 길은 거친 뜰로 이어져 있다.
鳥宿池邊樹(조숙지변수) 새는 못 가의 나무에 깃들고
僧敲月下門(승고월하문) 스님이 달 아래 문을 두드린다.
그런데 초를 잡고 나니 결구(結句)를 민다(推)로 해야 할지, 두드리다(敲)로 해야 할 지를 이리저리 궁리하며 가다가 자신을 향해 오는 고관의 행차와 부딪혔다. 그 고관은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이며 부현지사(副縣知事)인 한유(韓愈, 768~824)였다. 가도는 먼저 길을 피하지 못한 까닭을 말하고 사과했다. 역시 대문장가인 한유는 뜻밖에 만난 시인의 말을 듣고 꾸짖기를 잊어버리고 잠시 생각하더니 이윽고 말했다. "내 생각엔 '두드리다.'가 좋을 듯하네." 이후 이들은 둘도 없는 시우(詩友)가 되었다고 한다. (퇴고 - 위키백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