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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긴글]
글쓴이: ㄱㄱㅏ ㅊㅣ : 02007.08.22 10:58
최초의 선교사 귀츨라프 목사와 고대도 선교
1. 고대도를 찾아서
선교사로서 우리 나라를 방문한 최초로 방문한 이는 중국선교사로 홍콩에 와 있던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ützlaff 1803-1851)라는 독일 출신 루터교 목사이다. 귀츨라프
선교사 일행은 1832년 7월 17일 장산(장산곶)에 도착한 후 22일 녹도(록도) 근처 불모도(불모도)를 거쳐 26일 충남
보령시 오천면에 소재한 고대도(고대도) 정박하였다. 그들은 홍주목사 이민회 등의 관리들을 만나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조선 국왕에게
정식으로 통상을 청원하는 서한과 한문 성경을 비롯한 26종의 책자와 망원경을 비롯한 많은 선물을 순조 임금에게 진상하도록
전달하였다. 그리고 조정의 회답을 기다리는 동안 고대도에 20일을 머무면서 주민들에게 한문 성경과 전도문서와 서적 및 약품을
나눠주고, 감자를 심어주고, 감자와 포도주 재배법을 가르쳐 주었으며,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하여 가르쳐 주고 그리고 한글 자모를
받아 적은 다음 후에 이를 세계에 알리기도 하였다.
이는 시기적으로 보아 토마스
목사가 평양을 방문하여 대동강변에서 주민들에게 성경을 나눠주다 순교한 1866년보다 34년 앞선 일이며, 언더우드와 아펜셀러가
인천에 상륙한 1884년보다 52년 앞선 일이었다. 그리고 최초의 카톨릭 선교사인 불란서 신부 모방(Pierre Maubant)이
내한 한 1836년보다도 4년이나 앞선다.
대전신학교 부설 종교문화연구소에서는 중부권 지역의 교회사 유적지를 발굴 조사하려는 연구 목적에 따라, 최초의 개신교 선교지가 바로 중부권에 속한 고대도라는 사실에 크게 고무되어, 고대도를 방문하고 귀츨라프
선교 사역의 발자취를 답사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본 연구소의 소장인 정행업 학장과 연구위원인 황순환 교수 그리고 필자가
1998년 13일 오후에 대전을 출발하여 대천에서 일박을 하고 7월 14일 고대도를 방문한 것이다. 고대도에는 합동측 교회가 하나
있고 귀츨라프 선교사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바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 이번 답사의 주요 목적이었다.
대
천 선착장에서 여객선을 타고 1시간 30분만에 도착한 곳이 고대도이다. 마을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만난 주민에게 고대도 교회의
위치를 물어 보았다. 마침 그는 김영식 씨인데 고대도 교회의 교인이며, 부인은 홍옥란 집사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 일행을 친절하게
안내하여 주었다. 김영식 씨에게 귀츨라프 선교사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는 그 마을의 원로인 김상곤 옹(1916년생, 83세)이 혹시 알고 있을 지 모른다고 하며, 그분 댁으로 우리를 안내하였다.
김
옹은 고대도가 일제시대 때부터 부유한 섬이었고, 주민들이 항일정신이 강하였으며, 민주적이고 자치적으로 어장을 잘 운영하여온
모범적인 섬이라는 자랑을 늘어놓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 운동을 전개하기 이전에 이미 어민생활 개선 운동을 자치적으로 추진하여
후에 새마을 표창을 받기도 하였다고 한다. 어렸을 적에 혹시 외국 선교사가 고대도를 방문한 것에 대해 옛 어른들에게 들은 것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그런 기억이 없다고 하였다.
고대도
교회에 최근에 부임한 전도사님 댁으로 가는 길에 고대도 교회의 최초의 신자인 하옥희 권사(1920년생, 79세)를 만나게 되었다.
하 권사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졌으나, 그 역시 165년 전의 일에 관해 옛 어른들로부터 들은 바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10
여년 전에 어떤 장로님이 고대도 교회에 오셔서 귀츨라프
선교사라는 분이 예전에 고대도를 방문하여 성경과 전도 문서를 나눠주고 감자도 심어 주고 갔다고 얘기하는 것을 들었다고 하였다.
하옥희 권사는 20세에 고대도로 시집을 왔는데 시집을 오기 전에 교회에 다녔다고 한다. 고대도에는 오랫동안 교회가 없었는데
1950년대 초에 안식교 선교사가 고대도에 방문하여 6-7년 동안 선교활동을 하다가 돌아갔으며, 그후 1982년경에 곽길보 목사가
고대도 교회(합동측 개혁파)를 개척하였다고 한다. 곽 목사가 5년 동안을 목회를 하고 이어서 진희범 목사, 임종관 목사, 이인환
목사들이 목회 하다가 얼마 전에 이진수 전도사가 부임하였다. 우리는 하옥희 권사에게 고대도에 귀츨라프
선교사의 기념비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 위치가 어딘지 아느냐고 물어 보았다. 하 권사는 고대도에는 기념비가 없고 10여년 전에
원산도에 기념비가 세워진 것으로 아는데, 자기가 알기로는 ‘고대도에 세워져야 할 기념비가 원산도에 잘못 세워졌다’는 얘기를 여러 번
강조하였다.
우리 일행은 김영식 씨와 하 권사와 함께
언덕 아래의 고대도 교회를 방문하였다. 마침 유치부 어린이들의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이진수 전도사는 댁에 계시고 사모가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있다고 하였다. 두 분은 모두 중등 교사 생활을 하다가 사명을 받아 고대도에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마을 주민들이 전도사 내외가 교사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어린이집을 운영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고 한다.
이진수 전도사를 만나서 귀츨라프 선교사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고대도가 귀츨라프 선교사의 최초 방문지인지 모르고 부임했다고 한다. 아마 그를 이 교회에 소개한 보령시 청라면 소재 향촌교회를 담임하는 이인환 목사가 그 내용을 잘 알 고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이 목사에게 전화를 하였다. 이 목사와의 통화에서 귀츨라프
선교사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는지 물어 보았다. 그는 고대도를 여러 번 방문한 바 있는 리진호 장로가 저술한 책과 여러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고 하였다. 하옥희 권사가 말한 바 있는 장로가 바로 필자도 잘 아는 리진호 장로인 것이 확인되었다.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리고 그는 귀츨라프 선교사 기념비는 고대도가 아니라, 원산도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여 주었다. 귀가하는 길에 이인환 목사를 방문하여 그가 소장하고 있는 자료를 살펴보기로 약속하였다.
2. 고대도가 아닌 원산도에 세워진 선교사 귀츨라프 기념비
귀츨라프 선교사 기념비가 고대도가 아닌 원산도에 있다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우리가 고대도를 방문하기 전에 사전에 예비 조사한 자료 중에서, 김양선의 「한국기독교회사연구」와 민경배의 「한국기독교회사」에는 분명히 귀츨라프 선교사의 방문지가 고대도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정행업 학장은 ‘중부권에 속하는 고대도가 개신교 선교 성지인데 그 곳에 귀츨라프
선교사를 기념할 만한 기념비나 사표(사표)가 없다면, 중부권에 속한 우리 대전신학교가 주축이 되어 기념비라도 세워야 할 것이
아닌가’하는 희망을 여러 번 피력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기념비가 고대도가 아닌 원산도에 세워진 연유가 너무나 궁금하였고 귀츨라프 선교사의 기념비를 답사하는 것이 이번 여행의 중요 목적이었므로, 우리는 서둘러 원산도로 가기로 하였다. .
원
산도는 고대도에 비해 꾀 큰 섬이라고 한다. 그래서 섬 어느 곳에 기념비가 있는지 알아보아야만 하였다. 이인환 목사도 그 기념비가
원산도의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는 모른다고 하였다. 이진수 전도사가 원산도에서 목회 하는 몇 분 목사들에게 수소문하여 기념비의
소재지가 원산해수욕장 언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혹시 원산도에 장로교 통합측 교회가 있는지 알아보아 달라고 하였다.
초정교회를 담임하는 박석기 전도사의 연락처를 알게 되었다. 박전도사에게 연락하여 원산도를 방문할 예정이라고 알리고, 안내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박전도사도 귀츨라프 선교사의 기념비에 가 본 적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수소문하여 그 곳 위치를 알아보겠다고 하였다.
벌
써 점심 때가 다 되었다. 고대도에서 보면 원산도는 바로 건너 보이는 섬이지만, 여객선이 다니지 않아 사선(사선)을 구하기로
하였다. 마침 김영식 씨가 자신의 배로 우리 일행을 원산도로 건네주겠다고 하였다. 그랬더니 고대도교회의 김진수 전도사 내외와
하옥희 권사가 따라 나선 것이다. 그들도 귀츨라프
선교사의 기념비를 이번 기회에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도 그것이 왜 고대도가 아닌 원산도에 있는지 궁금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일행의 수가 배나 늘어났고, 모두들 마치 무슨 큰 비밀을 파 해치러 가는 사람들처럼 흥분에 들떠 있었다.
원산도에 도착하여 박석기 전도사에게 연락하니, 우리가 도착한 선착장에서 귀츨라프
선교사 기념비가 있는 곳까지는 걸어서 가기에 힘든 10리가 넘는 길이라고 한다. 그래서 차편을 구해달라고 부탁하였다. 한 참
만에 박전도사는 타이탄 트럭 하나를 구하여 직접 몰고 와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우리 일행은 타이탄 짐칸에 올라타고, 험한
길을 30여분 달려가면서 길을 묻고 물어 마침내 귀츨라프
선교사 기념비가 있는 언덕에 토착하였다. 기념비 앞에 서니 감회가 새로웠다. 160여년전 프러시아 시골의 한 가난한 혁대
제조공이 선교의 열망을 가지고 극동의 작은 섬 이곳까지 왔다니. 하나님의 섭리와 선교의 위대한 열정에 숙연하였다.
정행업 학장의 인도로 간단한 예배를 드리고, 기념비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선교사 카알 귀츨라프(M. D) 기념비
(화란선교협의회 소속, 독일신교 선교사)
1803년 피릿즈 / 포다라니에서 출생
1851년 홍콩에서 소천
카알 귀츨라프(의
사) 선교사는 1832년 7월 17일 이곳에 도착하여 한문으로 된 전도지와 주기도문 그리고 감자 종자를 이곳 도민에게 전함. 그의
전기에는 그는 확신을 가지고 “보다 훌륭한 여명의 날이 한국에 빨리 오기를 바람”이라고 언급함.
-그가 오셨든 150주년을 기념하여 1982년 7월 17일 이를 세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한국기독교의료선교협의회(KCMEA)
주한서독대사관
주한화란대사관
학교법인 송죽학원
지역사회개발위원회
귀츨라프 선교사가 방한 한지 150년이 되는 1982년 7월 17일 이를 기념하여 고대도 건너편에 있는 원산도(원산도) 남쪽 해수욕장 동편 언덕에 역사적인 “선교사 카알 귀츨라프
기념비”가 세워진 것이다. 기념비 뒷면에는 영문과 독문으로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기념비를 보더니 하옥희 권사는 연신
고대도에 세워져야 할 비가 이곳 원산도에 세워졌다고 푸념하였다. 우리는 기념비에 세겨진 송죽학원의 설립자나 이사장이 누구인지
궁금하여 박석기 전도사에게 물어 보았다. 남장(남장) 여인으로 유명한 전 국회의원 김옥선 였다고 한다. 김옥선 씨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원산도에 여러 교회를 개척하였고 학교도 세 곳이나 세웠으며,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해 애를 쓴 분으로 주민들의 신망이
높다고 하였다. 원산도에 세워져야할 기념비가 이곳에 세워진 것을 확인하고 놀라고, 그것이 원산도의 유지 국회의원 김옥선 씨의
주도로 세워졌다는 데 다시 한번 놀라게 되었다. 기념비를 꼼꼼히 살피고 비문과 기단(기단)과 둘레를 실측(실측)하고 몇 장의
사진도 찰영하였다.
다시 한번 비문을 살펴보니 기념비를
세운 이들의 실명(실명)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제까지 보아온 기념비에는 반듯이 그것을 세운 사람의
실명(실명)이 적혀 있었던 것 같은 데, 이 비에는 실명이 전혀 없다는 데에는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
정도의 기념비를 세우려고 해도 그 경비가 수월찮을 터인데, 그만한 경비를 들여세우고 실명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세운 이들이 너무 겸손하여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기 싫어서 그랬을까?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의심스러운 것은 비문의 내용이었다. 비문의 내용처럼 귀츨라프
선교사가 정말 이곳 원산도도 방문하였는지 그리고, 그날이 1832년 7월 17일이 맞는지, “이곳에 도착하여 한문으로 된
전도지와 주기도문 그리고 감자 종자를 이곳 도민에게 전”한 것이 역사적 사실인지 여부를 학문적으로 고증해야 할 어려운 숙제를 안게
되었다.
원산도에서 다시 사선(사선)을 빌려 타고 오후
3시가 넘어서 고대도롤 돌아 왔다. 대천으로 가는 배가 4시 30분이어서 김진수 전도사 내외가 급히 점심을 마련하여 대접하여
주었다. 시장하던 차라 늦은 점심이 꿀맛 같았다. 고대도를 떠나기 전에 김종익 이장을 만났다. 고대도 주민들이 지금도 감자를
재배하느냐고 물어 보았다. 이장은 고대도가 어촌마을이며 예로부터 부도(부도)이어서 감자를 제배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어렸을
적에 뒷동산에 돼지감자가 자생(자생)하는 것을 보았지만, 지금은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우리는 귀츨라프가 심어 두고 간 감자가 항해 중 식용으로 쓰던 것이었으므로 돼지감자는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하였다.
대전으로 오는 길에, 오전에 약속한 대로 청라면 향촌교회의 이인환 목사를 방문하였다. 그는 서제에서 리진호 장로가 지은 “귀츨라프와 고대도-최초로 내한한 선교사와 고대도 전도”라는 책을 보여 주었다. 고대도를 네 차례나 방문한 리진호 장로가 책이름을 “귀츨라프와 원산도”라고 하지 않은데서 큰 안심이 되었다. 원산도에 관한 사항이 제일 궁금하여 책을 이리 저리 살펴보니 81-83 쪽에 이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귀츨라프의 “조선서해안 항해기”를 번역한 리 장로 역시 8월 10일자 일기와 고증을 통해, 귀츨라프가
원산도를 둘러 본 것으로 추측 할 수 있지만, 기념비 내용처럼 전도지와 주기도문 그리고 감자 종자를 이곳 도민에게 전한 기록은
없다고 하였다. 원산도의 기념비에 대한 의구심의 일단이 드러난 것 같았다. 어쨌든 이번 답사는 우여곡절이 많았으나 아주 중요한
연구 과제 즉, “원산도 소재 선교사 귀츠라프기념비의 역사적 고증 문제”를 발견하게 되었다는 큰 소득이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소득도 있었다. 동행한 황순환 교수의 고향이 대천이어서 오는 길에 부모님이 손수 재배한 감자 한 상자를 선물로 받았기 때문이다. 귀츨라프 선교사가 고대도의 좋은 땅을 골라 100개가 넘는 감자를 심어 주고 그 재배법을 한문으로 종이에 써 주었다는 데, 그 감자가 후손(?)이 이 감자는 아닐까 생각 하니, 그 감자들이 모두 귀해 보였다.
고대도와 원산도를 답사하고 돌아 온 후 필자는 귀츨라프에 관한 자료를 찾기 시작하였다. 리진호 장로가 보내준 책과 자료들이 큰 도움이 되었다.
3,. 귀츨라프의 생애
칼 귀츨라프(Karl
Friedrick August Gützlaff, 1803-1851)는 1803년 7월 8일 프러시아
포메라니아(Pomerania)의 피리츠(Prytz)라는 작은 마을의 마구상의 외아들로 테어 났다. 국적은 독일이지만 폴란드계
유대인 혼혈아였다. 네 살때 어머니가 죽고 계모에 손에서 자랐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려 했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14살에 스테틴시에 있는 혁대제조공장의 공원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는 개혁파 목사의 아들
하이덴라이히(Heidenreich)를 만나 목사가 되려는 희망을 함께 나누었다.
1820년 17살이 되었을 때 그의 인생을 바꿔 놓은 사건이 있었다. 프러시아왕 프리데릭 빌헬름 3세(Friedrich Wilhelm III)가 스테틴 시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은 귀츨라프와
하이덴라이히는 공동 작성한 장문의 시(시)를 광장 중앙 환영 행사장에서 왕에게 잽싸게 전해 드린 것이다. 이 행동은 굉장한
결례이지만, 그 시를 읽은 왕은 그들의 경건함과 애국심에 감격하여 두 청년을 불러 칭찬하고 친히 각의를 열어 청년들의 소청을
들어주도록 결의하였다. 그는 귀츨라프는
과학을 공부하여 해외선교사로 가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821년 베를린에 있는 야니케 선교학교(die
Missioons Schule Janiches)의 왕립장학생으로 입학하였다. 야니케(Janiche)가 교장으로 있는 이 루터교
학교에서 넘치는 학구열과 지칠 줄 모르는 정렬로 6개국어를 습득하였다고 한다.
1823년 네덜란드선교회(Netherland Missionary Society)로부터 선교사 지원 요청을 받은 예니케 학교는 교수회의를 열러 귀츨라프를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동남아 선교사로 파송받기 위해 네델란드 로테르담에 가서 말레이어(Maley)를 공부하면서 파리와
런던을 방문하여 선교사역을 위한 자료를 수집하였다. 그가 파리에 머무는 동안 때마침 그가 흠모하던 중국 선교사 모리슨(Robert
Morrison, 1782-1834)이 런던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런던으로 달려가 그를 만나, 20년간의 중국 선교사역에
관한 얘기를 직접 듣고 큰 감명을 받는다.
1826년 루터교 목사로 안수를 받은 후, 정식 선교사로 파송받아 말래카를 거쳐 인도네시아 바타비아(Batavia, 지금의 자카르타)로 도착한 해는 1927년 1월 6일 그의 나이 24세 되던 해이다.
바타비아에서 귀츨라프는
런던선교회 소속 선교사 메드허스트(W. H. Medhurst, 1976-1857) 함께 1년간 준비한 후 동남아시아에 여러
지역(수마트라, 자바, 빈탕섬, 말라카, 싱가폴, 사이암)에 흩어져 있는 화교들을 순방하며 선교할 계획을 세운다.
1828년 초 귀츨라프는
준비가 채 되지 않았지만 혼자서 사이암 선교에 떠났으나 선교가 여의치 않자 네델란드선교회와의 관계를 끊고 싱가포르를 떠나 8월
23일 런던선교회의 톰린목사와 함께 최초의 사이암 선교사로 그곳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두 사람은 복음서와 로마서를
사이암어로 번역하였다.
1830년 2월 11일 런던선교외에서 일하는 뉴웰(Maria Newell)과 결혼한 후 이들은 필생의 사업으로 신구약성서를 사이암으로 완역하였다. 1831년 2월 16일 귀츨라프 부인은 쌍둥이 딸을 출산하다가 아이 하나와 함께 죽고 만다. 이 충격과 건강의 악화로 귀츨라프는 그해 6월 중국으로 떠나며 딸 아이를 싱가포르에 있는 친구에게 보내 달라고 부탁하였는데 그 아이 마저 죽게 된다.
이런 가정적인 비극의 계속되는 상황에서도 귀츨라프는
1831년부터 1833년 사이에 중국 연안을 따라 세 차례의 선교 여행을 떠난다. 1차는 방콕을 떠난 텐진(천진)까지의
선교여행이고, 2차 선교여행은 모리슨의 소개로 영국 동인도회사의 통상 교역지 탐사선에 동승한 것이었다. 이때에 한국 서해안을
1개월간(1832.7.17-8.17) 방문하면서 20일 가까이 고대도에 머물렀다. 3차는 무장한 영국국적의 아편 밀수선을 타고
수행하였다.
1834년 재혼 한 후 마카오에 정착하여 12월 모리슨 박사가 별세하자 귀츨라프는 주중 영국대사의 비서 겸 통역관으로 있으면서, 그의 선교활동에 관한 기사와 논저를 저술하였다. 그리고 모리슨이 번역한 한문성경을 개역하고 중국어 문법책과 한영사전을 발간하였다.
1837년에는 마카오에 표류한 일본인을 통해 일본어를 배워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을 일본어로 번역하고 표류 어부 7인을 송환하는 기회를 일본 선교의 계기로 삼으려고 오키나와를 방문하나 상륙하지 못하고 돌아온다.
1839
년 아편전쟁이 발발하자 영국정부의 통역관으로 종사하고, 43년부터 1851년 8월 9일 죽을 때까지 홍콩정청에 근무하면서 목회자
양성학교를 개교하여 4년동안 47명의 중국인 목회자를 배출하고, 중국인 협회(the Chinese Union)를 결성하여 약
천명의 권서인과 백명의 설교자를 파송하여 중국오지 선교를 지원하였다. 그의 선교 방법은 영국선교사 허드슨 테일러에 의해 채택되어
중국내지선교회가 생겨나게 되었다.
4. 귀츨라프 목사의 조선 선교(1832.7.17-8.17)
1832
년 동인도회사에서는 극동의 새로운 통상지를 개척 탐사하려는 목적으로 타이완을 거처 조선 서해안과 제주도 그리고 일본 오키나와에
이르는 항해를 계획하고 그 책임자로 린제이를 임명하였다. 린제이(Hugh Hamilton Lindsay)는 중국 선교사
모리슨(R. Morrison)의 추천으로 중국어에 능통한 의사요 선교사인 귀츨라프(Karl
F. A. Gützlaff 1803-1851) 목사를 선의(선의) 겸 통역관(통역관)으로 동승시켰다. 동인도회사가 준비한
함허스트경호(Sir. S. Lord Amhest)는 1천 톤 급의 군함으로 선장 리(Rees) 외에 67명의 승무원을 승선시켰다.
이 행해의 목적은 통상에 적당한 항구를 조사하고 그 지방관의 통상 개시에 관한 관심을 살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귀츠라프 목사는
이를 극동의 조그마한 나라 조선에 복음의 씨앗을 뿌릴 수 있는 절호의 선교기회로 여긴 분명하다. 모리슨도 그가 번역한 많은 한문
한문성경을 지원하였고, 귀츨라프
자신도 선교에 필요한 책자와 선물을 많이 준비하였기 때문이다. 이 여행기간 동안 1832년 7월 17일부터 8월 17일까지
백령도 앞 바다에서 제주도까지 항해하면서, 고대도에 20일 이상을 머물게 되었는데, 이 기간 동안의 조선선교활동을 살펴보려고
한다.
귀츨라프에 의하면 1832년 2월 27일 중국 꽝뚱(광동)을 출발한 후 타이완을 거쳐, 7월 17일 “바실만 북쪽의 Chawang-shan이라는 섬”에 닻을 내렸다고 한다. 귀츨라프 일행은 오랫동안 중국에 거주하면서 조선 사정에 밝아 조선의 쇄국정책과 카톨릭에 대한 박해를 알고 있었으므로 위험을 무릅쓰고 해변에 올라가 두 조선인을 만나 어떤 한 노인에게 책 몇 권과 단추(lion buttons)를 주었다.
린
제이의 항해기에는 7월 17일 정박한 곳이 대청군도(대청군도, Sir James Hall's Group) 북쪽
‘Chang-Shan Pungsang'이라 하였다. 이 날 린제이는 조선 국왕에게 보낼 통상을 청원하는 편지를 작성하였는데,
자신의 이름을 “Hoo Hea-me"(호하미)라 적고 날짜를 양력과 음력으로 ‘주후 1832년 7월 17일, 도광 12년 6월
20일’ 이라고 병기하였다. 이튿날(18일) 일행 8명 중 귀츨라프를 제외하고 모두 단검과 권총으로 무장한 뒤 상륙하니, 조선인 200명이 모여들었는데 그들이 불친절하고 식량을 팔지도 않고 서신도 받지도 않고 방문자들을 떠나도록 요구하여서 아무 유익이 없었다고 한다.
이
튿날인 18(음력 6월 21일)일 지역 관리를 만나 국왕에게 보낼 청원서를 전달할 고관을 찾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세히
알려 주지 않고 피하였다. 어떤 사람은 당장 물러가지 않으면 군병을 불러 몰아 내겠다고 위협하였다. 몇몇 주민에게 책과 단추를
선물로 주었더니 손으로 목을 베는 시늉을 하면서, 책은 도로 돌려주고 갔다. 그래서 ‘책을 직접 전달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이틀동안 ‘Chawang-shan island'에 머물면서 처음 만난 조선인에 대한 첫 인상을 귀츨라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조
선인은 세상에서 가장 사람을 싫어하는(misanthropical) 민족이라 하지만, 협박과 상처를 입혀서라도 침략자를 충분히
물리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민족이라고 말해 주고 싶다. 처음 조선인을 면담할 때부터 매우 의아하게 생각한 점인데, 그들이 겁이
많으며 무엇이든지 강하게 요구하면 불평없이 굴복한다는 나의 선입관을 입증할 만한 어떤 충분한 근거를 찾지 못하였다. 조선인들이
우리에게 냉담한 감정을 나타낸 것은 분명하지만, 악의 없는 외국인을 겉으로 원수같이 대접할 때 마음속에 갈등을 일으키고 있음을
알아 차렸다. 모든 인간의 가슴속에 있는 인간의 타고난 감정을 없앨 수 는 없기 때문이다.”
동양사정에 밝은 귀츨라프는 조선에서의 천주교의 박해 사실과 쇄국정책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선입관과 달리 조선인들이 매우 용감하고 인정이 많다는 좋은 인상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린제이의 기록에 의하면 이 날(18일) 일행 8명 중 귀츨라프를 제외하고 모두 단검과 권총으로 무장한 뒤 상륙하니, 조선인 200명이 모여들었는데 그들이 불친절하고 식량을 팔지도 않고 서신도 받지도 않고 방문자들을 떠나도록 요구하여서 아무 유익이 없었다고 한다.
7월 17-18 양일간 귀츨라프 일행의 ‘Chawang-shan 또는 Chang-shan이라는 섬' 방문에 관한 순조실록 32년 8월 11일자(양력 9월 6일) 황해감사(황해감사) 김난순(김난순)의 보고는 이러하다.
“지
난 6월 21일[양력 7월1 8일] 이양선 한 척이 장연의 조이진에 와 정박하자, 관내의 어부들이 생선과 서책을 바꾸고 그 진의
이교 역시 필찰로 문답한 적이 있었는데,…… 추후에 들은 즉 배의 제작과 인물 언어 복색 등이 홍주에 정박한 영길리배와
다름없었으나”
이에 근거하여 진단학회의 「한국사-최근세사후편」(1956)에는 귀츨라프 일행이 “음력 육월 이십일일[양력 7월 18일]에 먼저 황해도 창선도(마연현 조이진 몽금포 전양)에 들러 현지 이교와 필답을 교환”하였다고 한다. 귀츨라프 일행이 7월 18일 도착한 곳을 황해도 몽금포 앞 바다 창선도(창선도)로 확인하였다. 그러나 「일성록」(일성록)은 귀츨라프 일행이 거쳐온 조선 지역을 문정(문정)하니 그들이 장산(장산)과 녹도(녹도)라고 대답한 것으로 적고 있다. .
귀츨라프는 장산에서 성경이나 전도문서를 직접 전해 줄 기회가 전혀 없었기에 이틀만에 그곳을 떠난다.
7
월 23일 남쪽으로 계속 항해 한 끝에 여러 섬과 암초 사이에 닻을 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린제이는 22일 바실만에 정박하였고,
23일 여러 조선인이 배에 찾아 왔으나 필담을 나누지 못했고 23일 ‘Teng-no'라는 한문에 능한 조선인의 방문을 받고 필담을
통해 그들의 방문 목적을 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를 통해 그들이 정박한 곳이 ‘Lok-tao'(녹도) 동쪽의 조그마한
불모도(불모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7월
24일 ‘Teng-no'가 다시 찾아와 지금 정박한 곳이 대단히 위험하므로, ‘Gan-Keang'이라는 항만으로 가면 안전히 닻을
내릴 수 있고 고관을 만나 무역상담을 하고 식량도 구할 수 있다고 권고하였다. 린제이는 그에게 그곳의 관리에게 자신들의 방문
목적을 적은 편지를 전했다.
7월 25일(음력 6월
28일) ‘Gan-Keang이라는 항’에 도착하여 정박하기 알맞고 바람막이가 잘된 곳에 닻을 내렸다. 그리고 ‘Teng-no'와
함께 온 고관의 비서(서생) ‘Yang-chih'라는 홍주목사의 서생(서생)의 방문을 받는다. 그들은 여러 가지 질문을 하고
돌아갔다.
7월 26일에는 나이가 지긋하고 위엄이 있는 “Kin이라는 성의 군관과 Le라는 성의 문관”의 방문을 받는다. 귀츨라프
일행은 그들이 조선을 방문한 목적이 국왕에게 통상을 정식으로 청원하는 서한과 함께 선물을 전하려는 것임을 밝히고, 조선관리들이
어느 정도의 호의를 보이자 한 나절 넘게 선물을 포장하였다. 그는 조선 국왕에게 성경책을 진상하므로 복음을 전한다는 감격을 이렇게
적고 있다.
“린제이 선장은 성서 한 질과 내가
가지고 있는 전도 문서 각 한 부씩을 포장하여 국왕에게 선물하라고 정중하게 요청하였다. 갑판 위에 찾아 온 사람들이 성서를
기쁘게 받는 것을 보고 아주 만족하였는데, 이제는 은둔국의 통치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유익을 얻기를 갈망하게 된 것이다.
국왕이라 하여도 죄 많은 인생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말씀보다 더 귀한 선물을 받을 수
있겠는가?”
귀츨라프가 국왕에게 보낼 선물 목록에는 성서 한 질과 전도문서 그리고 “유리 그릇, 옥양목(calicoes), 모직물(camlet), 담요 등과 한문으로 쓴 서한” 등이었다. 이 서한은 붉은 비단에 싼 통상청원서이다. 귀츨라프 일행은 마을에 상륙하여 서한과 헌상품을 두 고관에게 전달하였다. 그들은 위탁받은 물품을 빨리 진상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 일에 관한 한국 측의 최초의 기록은 귀츨라프가
고대도에 도착한 지 10여일이 지난 순조 32년 7월 8일(양력 8월 4일)자의 보고이다. 홍주목사(홍주 목사)
이민회(이민회)와 수군우후(수군우후) 김형수(김영수)의 장계(장계)를 올려 이양선의 출현은 비변사에 보고하였고, 그 내용은 같은
날짜의 「비변사등록」(비변사등록)과 「일성록」(일성록)에 기록되었다.
“관내에 고대도에 표류한 사람이 있어 정박시킨 후 그곳에서 말이 통하지 않아 필 담으로 어느 나라 어느 지방 출신인지 물으니, 영길리국이라 하였다.”.
이
보고를 받은 비변사는 다음 날인 7월 9일(양력 8월 5일) 이를 승정원에 보고한 것이다. 승정원에서는 통역관인 역학(역학)
오계순(오계순)을 파견하여 이양선의 동정을 자세히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조치한다. 그리고 승정원의 지침에 따라 이 사건을 처리한 후
귀츨라프
일행이 고대도를 떠나도록 처리한 후 이 사안이 마무리되자 7월 21일(양력 8월 17일)자로 공충감사(공충감사)
홍희근(홍희근)으로 하여금 이 사건 전모를 정리하여 임금께 보고하도록 하였고, 이 날짜의 순조실록은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6
월 25[양력 7월 22일] 어느 나라 배인지 이상한 모양의 삼범 죽선(삼범죽선) 1척이 홍주(홍주) 고대도(고대도) 뒷
바다[후양]에 와서 정박하였는데, 영길리국(영길리국)의 배라고 말하기 때문에 지방관인 홍주목사(홍주 목사) 이민회(이민회)와
수군우후(수군우후) 김형수(김영수)로 하여금 달려가 문정(문정)하게 하였더니…”
그리고 이 사건을 정리하여 예부(예부)에 발송한 자문(자문)은 다음과 같다.
“본
년 6월 26일 유시(유시) 경에 이양선(이양선) 1척이 본주(본주) 고대도(고대도) 안항(안항)에 정박하였는데, 듣기에 매우
놀라운 일이라서 역학(역학) 오계순(오계순)을 차송하고 본 지방관 홍주목사 이민회와 수군우후 김형수로 하여금 배가 정박한 곳으로
달려가서 합동으로 문정(문정)하게 하였더니….”
따라서 귀츨라프의 조선 방문에 대한 1차사료인 린제이 보고서와 귀츨라프의 항해기 그리고 비변사등록(비변사등록) 등 조정의 여러 기록을 비교해 보면 다음의 내용들이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첫째로 이양선이 서해안에 나타난 순조 32년 음력 6월 25(충청도 감사 홍희근의 보고)또는 26일(예부에 보낸 자문)은 암허스트경호가 서해안에 도착한 서기 1832년 7월 22일(린제이 보고서) 또는 23일(귀츨라프 항해기)과 일치한다.
둘째로 귀츨라프와 린제이가 정박지로 기록한 Gan-Keang'이라는 항구 이름은 홍주목사 이민회 등의 보고에 의해 충청도 홍주(홍주) ‘고대도 후양 또는 안항’이라고 밝혀졌다.
셋째로 귀츨라프가 만난 “Kin이라는 성의 군관과 Le라는 성의 문관”은 순조실록에 의해 수군우후(수군우후) 김형수(김영수)와 홍주목사(홍주 목사) 이민회(이민회)로 확인되었다.
7월 27일에 다시 ‘Ten-no와 Yang-chih'가 와서 “모든 선원의 이름과 나이를 다시 세밀하게 적어 갔다”고 한다. 일성록에는 조사 결과 선원 67명의 명단이 한문으로 자세히 보고되어 있다.
“선주(선주)는 사품(사품) 자작(자작) 호하미(호하미)이고, 6품 거인(거인)인 의생(의생)은 갑리(갑리)이고, 출해(출해)는 이사(이사)이며, 제1과장(제일과장)은 파록(파록)이고 제2과장(제이과장)은 심손(심손)이고…”
린
제이가 12년 7월 15일에 작성한 국왕에게 보낸 문서 말미에는 “Hoo Hea-me"와 ”Kea-le"'라는 서명(Sign)이
적혀있다. 일성록과 순조실록 등에 기록된 ‘호하미’가 바로 린제이의 이름 “Hugh Hamilton"의 한역이다. 함께 서명한
“Kea-le"는 귀츨라프의 이름 “Karl"의 중국식 음역이며, 한문으로는 ‘갑리’로 표기하였다. 그러므로 ‘의생갑리’는 수행 의사 귀츨라프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출해이사’는 항해를 관장하는 선장 “Rees"를 지칭한다.
27일 귀츨라프
일행은 고대도에 상륙하여 섬 전체를 돌아 보았다. 단골 조사관인 ‘Yang Ghih'와 ‘Teng-no'의 방문을 받고 그들에게
처음으로 필담(필담)으로 복음을 전하였다. 그러나 또한 조선인들이 비종교적인 민족이어서 생사간에 위로를 주는 구원의 도리를
구테어 알려고 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인류의 구세주에 관하여 이야기할 기회를 자주 가졌고, 기독교가 시작한 시대에 대해 설명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와 전능하신
하나님이 또한 그들의 구세주라는 것을 여러 번 들려주고 읽어 주었지만 별 관심을 보이지 아니 하였다.”
그리고 받겠다는 사람에게는 전도문서와 복음서를 주었으며, 성서를 줄 때에는 역사와 지리책도 함께 주었다. 한국땅 최초의 선교사역에 대해 귀츨라프는 이렇게 기대하였다.
“이
모든 일들은 내가 늘 기도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를 간구한 결과 이뤄진 하나님의 역사이다. 조선에 파종된 하나님의 진리는
사라져 버릴 것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머잖아 주님께서 예정하신 때가 되면 많은 결실이 있을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쇄국정책을 제거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이 약속된 땅에 들어가도록 허락할 것이다.”
그는 가장 계층의 서민들도 글을 읽을 수 있고, 글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 것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귀츨라프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린제이의 항해기에는 이날 양이(Yang-yih)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고 번역하도록 시도한 기록이 있다.
“27일 오랜 설득 끝에 우리는 양이에게 한글 자모 일체를 쓰도록 하는 데 성공하였다. 귀츨라프가
한문으로 주기도문을 쓰자, 그는 그것을 한글로 읽는 동시 한글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나서는 그의 손으로 목 자르는 표시를
반복하면서, 만약 고관들이 알면 목이 달아 날 것이라는 경고하였다. 그는 그 종이를 없애버리기를 애걸하였다. 그의 염려를
진정시키기 위하여 그가 보는 앞에서 그 종이를 상자 속에 넣어 잠그고 누구도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확인시켰다.”
김양선은 “양씨(양씨, Yang Chih)의 도움으로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한 것은 성서 한글 역의 효시가 되는 의의 깊은 일이다”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6개국어 이상에 능통하였던 귀츨라프가
이 날 받아 적은 한글 자모를 그해 11월의 “The China Repository"에 발표하여 한글을 세계에 알리는 데에도 큰
공을 세웠다. 그는 조선 사람의 고유한 글인 한글이 완전한 표음문자이며, “글자의 짜임세가 매우 간단하면서도 착상이 교묘하다”고
하였다. 그는 한글 책자를 구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였다.
7월 30일 오후 귀츨라프는 해변에 감자를 심으로 갔으며 감자를 성공적으로 재배하는 법을 글로 써서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린제이는 이 일 더욱 자세히 기록하였다.
“우리는 가장 좋은 땅을 찾고 골라서 100개가 넘는 감자를 심었다. 수백 명의 주민이 둘러서서 놀란 표정으로 이를 지켜보았다. 재배법을 설명한 종이는 땅 주인에게 주었고, 그는 잘 가꾸겠다고 약속하였다.”
7월 31일에는 며칠 전에 섬을 돌아보면서 야생 포도를 발견한 것을 기억하고 주민들에게 포도주와 포도즙 재배법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8월 2일(음력 7월 6일)은 고관에게 서신과 진상품을 전달한 지 8일째 되는 날이다. 귀츨라프는 늘 하던 데로 귀츨라프는 약을 주었는 데, 이 날은 감기 환자 노인 60명분의 약을 처방하여 나눠주었다. 그리고 이날에는 조정에서 파견한 우(Woo)라는 3등급 문관의 방문을 받은 것으로 기록하였다.
한
편 7월 8일(양력 8월 4일) 홍주목사 등으로부터 영길리(영길리) 선박의 고대도 인박(인박)에 관한 최초의 보고를 받은 다음
날인 7월 9일, 승정원에서는 문정역관(문정역관) 오계순(오계순)을 파견하여 이양선을 자세히 문정하도록 결정한다. 그리고 우의정
김이교(김리교)의 지시와 승정원의 지침이 따라 홍주목사 등이 조정의 사전 허락을 받기도 전에 외국인의 통상 청원서와 진상품(주문과
예물)을 받은 것은 외교관계가 없는 나라와 사적(사적)으로 통상한 부당한 처사이므로 차후 엄히 문책하기로 한다. 그리고 사사로이
받은 주문과 예물은 전례도 없는 일이므로 귀츨라프 일행에게 환급 조치할 것을 지시한다.
8월 5일(음력 7월 9일) 오계순은 암허스트 경호에 승선하여 화물을 자세히 조사한다. 그리고 그 내용이 7월 11일자로 조정에 보고된다.
8월 7일(음력 7월 11일)에는 오계순의 지시로 김대인(수군우후 김영수)이 서한과 진상품을 도로 가지고 오자, 귀츨라프는 그것을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김노인은 이 선물을 임금에게 전달하겠다고 약속한 일로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고 근심하였다.
이 날 귀츨라프
일행은 작은 배로 큰 항만을 탐사하기 위해 서북쪽의 어느 섬에 상륙하여 주민들에게 책을 전해 주고 그 이튿날 새벽에 돌아 왔다.
이날은 양력 8월 8일(음력 7월 12일)인데 순조실록과 일성록의 충청감사 홍희근(홍희근)의 보고에는 “7월 12일 모양이
이상한 배 한 척이 서산의 간월도 앞 바다로부터 태안의 주사창리 앞 포구에 와서” 책자 4권을 주고 갔다고 한다.
8월 9(음력 7월 13일)일 조정에서 보낸 특사인 오계순이 다시 와서 귀츨라프에
게 ww가서국ㄱ wnn 1111112 “당신의 서한과 선물을 받는 것은 불법이오. 우리는 당신과 이일을 성사시킨 나이 많은 두
관리의 잘못을 물을 것이오. 이는 불법이므로 우리는 당신의 청한 대로 국왕에게 올릴 수 없으므로 모두 당신께 되돌려 주는
것이오”라고 하였다. 귀츨라프와
린제이는 필담을 통해 외국의 통상 사례를 들어 그들을 설득하였으나 소득이 없었다. 통상청원서와 진상품에 대한 조정의 회답을
기다리라고 하고선 이제는 국왕에게 알리지도 않았다고 하는 조선 관리들의 변덕을 비난하고,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하고 시간만
낭비하였다고 후회하였다.
8월 10일에는 이곳을 떠날 계획이 필요한 물품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관리들은 주민들이 암허스트 경호에 접근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귀츨라프 일행은 정박지 근처의 가장 큰 섬에 상륙하여 잠시 둘러보았다. 이 섬은 인구가 조밀하고 지금까지 둘러본 섬 중에서 경작지가 제일 많다고 하였다.
8월 11일(음력 7월 15일) 귀츨라프일행이 요구한 물품이 공급되었다. 그리고 김대인(김영수)이 서한과 진상품을 되돌려 주려는 마지막 시도를 하였지만, 귀츨라프는
한 번 준 것을 도로 받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 하여 그것을 거절하였다. 그리고 넓고 안전한 항구가 있는 ‘Gan-Keang'을
떠나며, 이해력은 많으나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주민들과 울면서 작별하는 심사를 이렇게 적어 놓았다.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큰 섭리로 자비로운 방문의 날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영광스러운 십자가의 진리를 전파하도록 서둘러야겠다.
조
선 국왕이 처음에는 거절하였던 성서를 지금 갖고 있는지 또한 읽고 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Gan-Keang'의 관리와
주민들은 성서를 받았다. 이 첫 전도는 보잘 것 없지만 하나님께서 축복하여 주실 것을 확신한다. 조선에 어두움이 가고 속히
새벽이 와서 밝은 날이 오기를 다같이 바랄 뿐이다.”
귀츨라프가 홍주목사(홍주 목사) 이민회(이민회)와 수군우후(수군우후) 김형수(김영수)에게 전달한 성서는 한양으로 보내지지 않았고, 그 경위만 보고되었다. 일성록과 순조실록에 의하면 음력 6월 17일 귀츨라프
일행이 떠난 후 그들이 남기고 간 주문(주문)과 예물(예물)은 일일이 수량을 확인하여 궤에 봉하여 홍주 관고(관고)에 보관하게
하고, 충청 수사(수사) 이재형(이재형)과 우후(우후) 김형수와 홍주목사 이민회는 타국과 사적으로 교류하고 문정(문정)을 지연하고
처리를 전착(전착)한 죄를 물어 파직하였다고 한다.
5. 「선교사 카알 귀츨라프 기념비」의 역사적 고증 문제
1. 귀츨라프의 원산도 방문에 대한 달레 기록과 그 문제점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귀츨라프의 조선 서해안 방문에 관한 1차사료들에는 원산도에 대한 언급이 전무하다. 그러나 2차사료이긴 귀츨라프의 원산도 도착을 언급한 역사서 있다. 달레가 처음으로 원산도 도착을 언급하였고 백낙준이 이를 인용하였으며, 리진호는 귀츨라프의 항해기를 통해 그 가능성을 추측하였다. 따라서 그 역사적 진정성을 먼저 따져 보려고 한다.
1) 달레(C. Dallet)는 귀츨라프가 서해안을 방문한지 42년이 지난 1874년에 저술한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원산도를 처음으로 언급하였다.
“그해[1932]) 여름에 조선 해안에는 영국의 국기가 나타났다. 성서협회의 몇몇 간부들이 보낸 듯 싶은 상선 한 척이 충청도 서쪽 해안에 이루어진 만의 어귀 가까이에 있는 원산도에 접근해 왔다.”
이
배는 ‘야소교’라는 깃발을 달고 있어 그곳 주민 중 천주교인들이 몰래 방문하였다가 “어떤 개신교 목사가 ‘지신의 축복을 많이
받으시오’라고 외교인들이 즐겨 쓰는 인사말”을 하자 인사도 받지 않은 채 떠났다고 한다. 그리고 이 배는 1개월 이상 그곳에
정박하면서 종교서적 궤짝을 해변 여러 곳에 내려놓고, 배를 방문한 관리를 들을 통해 한문책과 영어 책을 여러권 임금에게 드렸으나
왕은 그 선물들을 받기를 거부하고 그것을 열지도 못하게 한 채 즉시 그 외국인들에게 환송케 하였다고 들은 것으로 적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상황을 고려하여 상륙을 포기하고 “나라 안에 발을 들여놓지 않는 것이 좋으리라 판단”을 내리고 그곳을 떠났다고
한다.
리진호는 달레(C. Dallet)의 기록이 신빙성이 없다고 하였다. 조선에 한번도 온 적이 없는 그가 귀츨라프가 서해안에 온 지 40년이 지나서 정확한 출처도 없이 기록한 것이 정확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달레의 교회사(1874)에는 귀츨라프의
항해기(1834)나 린제이의 보고서(1833) 조차 직접 읽은 것 같지 않다. 그 개신교 목사의 이름뿐만 아니라, 그들이
서해안에 도착한 날자 모른 것으로 보아 그렇다. 단지 소문으로 들은 것을 출처도 없이, 이름 모를 개신교 목사가 그 해 여름 어느
날 원산도에 왔다고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기록은 더욱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2) 백낙준은 1927년 저술한 「한국개신교사ꡕ에서 1832년 ‘배가 충청도 서해안 원산도에 정박’하였다는 달레(C. Dallet)의 글을 인용하였다. 그러나 귀츨라프
일행이 원산도에 정박한 날자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린제이 보고서만 인용하여 1832년 7월 27일 한자 주기도문을 한글로
베끼게 하였다고 적고 있을 뿐, 그 섬에 상륙하여 감자를 심어 주었다는 사실은 언급하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원산도 소재 귀츨라프 선교사 기념비 내용을 고증해 보면 다음과같은 문제점이 드러난다.
3) 리진호는 「귀츨라프와 고대도」(1997)라는 책에서 귀츨라프
항해기 등을 역주(역주)하면서, 8월 10일의 일기에 ‘부근에 큰 섬에 올라갔는데 이 섬은 인구가 조밀하고 지금까지 둘러본 섬
중에서 경작지가 제일 많다’고 기록하였는데 이 섬이 원산도가 아닌가 추측된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고대도 근방의 가장 큰 섬은
안면도인데 이 섬은 린제이 선장이 자기 이름을 따서 린제이 섬이라고 하였고, 그 다음으로 큰 섬이 원산도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귀츨라프가 8월 10일 상륙한 ‘근처의 가장 큰 섬’이 원산도라고 추측하여도, 귀츨라프와
린제이의 기록에는 이 큰 섬에서도 감자나 주기도문을 주었다는 기록은 없다. 단지 한 노인에게 책 몇 권과 단추를 전해 주고 그
섬에서 쫓겨난 것이다. 그리고 ‘근처의 가장 큰 섬’은 조선 관리들에 의해 주민 접촉 금지가 내려진 이후 몰래 잠간 방문한
곳이다. 귀츨라프
일행이 8월 7일 야간을 이용하여 관리들 몰래 간월도(간월도)도 앞바다에서 태안의 주사창리(주사창리) 앞 바다까지 접근하여 책자
4권을 주고 이튿날 돌아 온 것을 조선 관리들이 알고 8월 10일부터는 그들에게 주민 접촉을 금하고 조선인들에게도 귀츨라프 일행에게 무엇이든지 받는 자는 엄히 다스린다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러므로 8월 10일에는 원산도에 상륙하여 장기간 머물면서 전도지나 주기도문이나 감자 종자를 나눠 주는 일이 용이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런 기록도 전무하다.
2) 「선교사 카알 귀츨라프 기념비」의 역사적 고증 문제
앞에서 분석한 사료들을 볼 때 “카알 귀츨라프(의사) 선교사는 1832년 7월 17일 이곳에 도착하여 한문으로 된 전도지와 주기도문 그리고 감자 종자를 이곳 도민에게 전함”이라고 기록한 원산도 소재의 「선교사 귀츨라프 기념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역사적 근거가 없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1) 귀츨라프의
원산도 방문은 1874년 달레(C. Dallet)가 정확한 사료가 아닌 풍문을 듣고 1932년 여름 어떤 개신교 목사가 원산도를
방문한 것 같다고 부정확하게 기록한 것이 휘트모어(1920)와 백낙준(1929)에 의해 무비판적으로 인용됨으로서 귀츨라프의 원산도 방문이 와전된 것이다. .
2) 달레는 1832년 여름 ‘어떤 개신교 목사’가 원산도에 왔다고 하였으며, 백낙준도 이를 무비판적으로 인용하여, 그해 여름 원산도에 온 개신교 목사가 귀츨라프라고 했다. 그러나 달레도 백낙준도 귀츨라프가
원산도에 온 날자가 7월 17일이라고 밝힌 적이 없다. 달레를 인용한 휘트모어는 7월 17일 정박한 곳이 장산(장산)이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념비에는 7월 17일 원산도에 도착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는 분명히 아무런 역사적 근거도 없는 틀린
내용이다.
3) 7월 17일 이곳 원산도에 도착하였다고 하나, 귀츨라프나
린제이 모두 7월 17일에 방문한 곳이 바실만(홍주만) 북쪽 또는 대청군도(대청군도) 남쪽에 있는 장산곶(장산곶)이다. 그들이
“Chawang-shan 또는 Chang-shan이라는 섬”으로 오해한 그곳은 장산곶(장산곶)이 분명하다. 황해감사(황해감사)
김난순(김난순)의 보고도 7월 18일(음력 6월 21일) 이양선이 도착한 곳이 “장연의 조이진”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곳을
황해도 몽금포 앞 바다 ‘창선도’(진단학회)이거나 ‘백령도 부근’(김양선)이라 하여도 그보다 훨씬 남쪽에 있는 원산도와는 거리가
멀다.
4) 귀츨라프 일행이 고대도(Gan-Keang)에 머물다가 8월 10일 잠간 방문한 ‘근처의 가장 큰 섬’을 원산도라고 추측할 개연성은 많다. 이에 근거하여 귀츨라프 일행이 원산도도 방문하였다고 인정할 지라도 그 날자가 8월 10일이므로 기념비의 ‘7월 17일 이섬[원산도] 도착’은 날자의 불일치로 인해 사실과 다른 내용임에 틀림없다.
5) 7월 17일 ‘Chawang-shan이라는 섬'에서도. 8월 10일 원산도로 추정되는 ‘근처의 가장 큰 섬’에서도 ‘전도지, 주기도문, 감자 종자를 나눠주었다’는 기록은 전무하다. 귀츨라프
일행이 서해안 여러 섬 중 최소한 네 곳(Chawang-shan, Gan-Keang, 태안의 주사창리 앞 포구,
Gan-Keang 근처의 가장 큰 섬)을 방문 했으며, 상륙한 곳 마다 책자를 나눠준 것도 사실이지만 가는 곳마다 주기도문과 감자
종자를 나눠주었다는 기록은 없다. 주기도문을 번역하고 감자종자를 심어준 곳으로 기록된 곳은 고대도(Gan-Keang) 뿐이기
때문이다.
6) 기념비에는 “전도지, 주기도문, 감자 종자를 나눠 주었다”고 하였지만 귀츨라프의
공헌은 주기도문을 최초를 한글로 번역한 것이며, 감자 종자를 좋은 땅을 골라 직접 심어 주고 재배법을 가르쳐 준 것이며, 한글
자모를 세계에 알린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시의 순조임금에게 한문성서를 전하려고 한 것이 중요한 선교의 시도로 평가되어야
한다. 그러나 원산도의 기념비에는 이처럼 중요한 사실(사실)들이 모두 누락되어 있다.
7) 귀츨라프의 출생지를 ‘포다라니’라고 기록한 것은 포메라니아(Pomerania)의 오기(오기)이며, 귀츨라프가
독일 사람이긴 하지만 1823년부터 내델렌드선교회 소속하다가 1830년부터는 영국선교회로 소속하여 조선 선교에 참여했으므로
영국대사관도 표기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기념비를 세운 이들의 실명(실명)이 모두 빠진 것도 지적하고 싶다.
그러므로 귀츨라프 방한 150주년을 맞이하여 원산도에 귀츨라프
선교사 기념비를 세운 분들의 높은 역사의식과 깊은 정성은 크게 평가하지만, 역사적 고증을 소흘히 한 것에 대하여 큰 아쉬움을
갖게 된다. 이 앞으로 한국교회가 역사적인 사건이나 인물을 기리는 기념비나 사표를 세울 때에는 이와 같은 우(우)가 다시는
없었으면 한다. 그리고 최초의 선교사 귀츨라프의 고대도 선교를 기념하는 기념비나 사표(사표)가 제자리를 찾아 고대도에 바르게 세워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1998. 9.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