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 갈 길 제1절 사람의 생애 1. 인생문제
1) 인생이 무엇이냐
① 지금까지 인생문제는 미로
오늘날까지 철학은 역사시대를 통해서 인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심해 왔습니다. 참된 인간의 가치, 인간이 어떻게 완성할 수 있으며 인간 자체로부터 승리를 해 가지고 만우주에 자랑할 수 있는 승리의 완성격을 어떻게 이루느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고 수많은 철인들이 나와 가지고 고심하면서 별의별 주장을 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지금에 와서는 인간을 통해서 사상체계를 세워 놓았던 모든 주의 주장들이 이미 실험을 필하고, 이미 낙제해 버렸다는 거예요. 다 탈락해 버렸습니다. (141-125)
왜 인간이 이렇게 어영부영 살면서 죽기를 싫어하고, 왜 살아야 돼? 근원이 어떻게 돼서? 여러분, 의문이 많지요? 그 모든 의문은 인간의 철학 서적을 통해서 해결 못 해요. 철학이라는 건 지금까지 하나님을 찾아 나가는 길을 개발한 거예요. 종교라는 건 그렇습니다. 종교는 뭐냐? 하나님을 알아 가지고 더불어 사는 생활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종교생활입니다. (186-12)
흔히 세상에서는 '아 ! 인생이 무엇이냐, 인생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인간에게는 인생관의 확립, 국가관의 확립, 세계관의 확립, 더 나아가서는 우주관의 확립, 신관(神觀)의 확립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된 것이냐 이겁니다. 계통적 단계의 질서를 어디에다 둘 것이며 그 차원적 계열(次元的 系列)을 어떻게 연결시키느냐 하는 문제는 가장 심각한 문제인 것입니다. (75-324)
통일교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다릅니다. 우리는 뜻을 중심삼고 죽음 후의 세계, 즉 미래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으며 이것을 세포에 직접 체감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 세계를 거쳐간 수많은 인간들이나, 역사상에 뜻을 품고 왔다 간 수많은 성인현철들은 인간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필생 동안 전력을 다해 노력했지만 그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갔습니다. (33-7)
② 동기와 목적을 모르는 인생
사람들은 흔히 말하기를, 인간은 왔다가 간다고 합니다. 자고이래로 아무리 훌륭한 성현군자도 왔다가 갔습니다. 이런 역사의 움직임, 이런 천륜의 움직임은 이 순간 나에게도 연속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왔다가 가야 할 우리 자신들입니다. 무슨 인연과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지만 이 땅에 와서 이 만상과 혹은 어떠한 이념적인 형태 속에서 뒤넘이치다 가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은 무엇을 위해 왔으며 무슨 목적을 위하여 가는가? 이것을 수많은 철인들, 혹은 수많은 종교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해결지으려 하였으나 해결짓지 못한 채, 인류역사는 그로 인한 서러움과 더불어 지금까지 움직여 나왔습니다. 또 지금도 계속 움직여 나가고 있습니다.
이런 긴장된 순간에 있는 우리입니다.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는 인생행로를 걷고 있는 우리임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부모의 혈통을 통하여 태어나고 보니 생각지도 않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또 살다가 보면 노쇠하여서 가야 할 운명에 놓이게 됩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꽃다운 청춘시절이 지나가 버리는 것을 막을 수가 없는 것이요, 자기 모습이 노쇠하는 것을 방비하고자 하되 방비할 수가 없는 서글픈 사실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생각하면 안타깝고, 생각하면 클클하고, 생각하면 무엇인지 모르게 사방을 휘저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남을 여러분은 생애노정에서 몇 번씩 느꼈을 것입니다.
내가 왜 왔으며, 내가 왜 살아야 하며, 어디로 가야 하느냐? 태어난 것을 여러분 스스로 태어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태어나기는 했으되 무슨 동기로 태어났으며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지, 나를 낳게 한 동기와 목적을 알지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나기는 났으되 내가 나고자 해서 난 것이 아니요, 살기는 살되 내가 살고자 해서 사는 것이 아니요, 죽기는 죽되 내가 죽고자 하여 죽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들어 무엇을 자랑할 것이냐? 자기 자신이 나고 싶어 나지도 못하고 자기 자신의 그 무엇을 갖고 살지도 못하고, 죽음길을 피할 수도 없는 자신을 가지고 무엇을 자랑해 보아야 처량할 뿐입니다. 났으니 살아야 할 운명이요, 또 그렇게 살다 가야 할 운명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살다 가는 목적은 무엇인가? 여러분은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동기가 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었으니 목적도 나만의 것이 아님에 틀림없습니다. 사는 데 있어서 행복한 자리를 싫어하는 자가 어디 있으며, 호화찬란한 자리에서 살고 싶지 않은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나입니다. 그렇지만 또 자신을 자랑하고 싶고, 마음대로 살고 싶고, 마음대로 남아지고 싶은 나입니다. 이런 심정의 교차점을 지닌 나라는 것입니다.
나를 연유하여 나지 않은 내가 보다 큰 무엇을 요구하고, 보다 더 잘살기를 바라고, 더 큰 목적의 가치를 요구하는 것이 나 때문이냐, 그렇지 않으면 어떤 상대적인 목적 때문이냐 하는 것을 여러분 자신들은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손을 들어 나 때문이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부모의 혈육을 받고 태어날 때 스스로 나고 싶어서 났어요? 부모가 나를 낳기는 했어도 나는 부모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생명체요, 마음대로 이끌 수 없는 생명체요, 마음대로 죽일 수도 없고 살릴 수도 없는 생명체인 것입니다.
그러한 권한은 누가 갖고 있는가? 그 권한의 소유자를 해명하는 날, 자기를 중심삼고 즐거워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인간들은 이 기준을 넘지 못하고 허덕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이 우리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으로 더 큰 무엇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또 일생을 통해 사망의 권한을 밀고 나가 실제로 더 큰 놀라운 생명의 세계와 인연을 맺고 싶어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어떠한 정적인 사랑의 심정이 있어 인간의 정적인 세계를 넘어 영원불변의 정적인 세계와 접하고자 합니다. 해명하고 증명할 수는 없으되 그런 느낌에 내가 수시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그 무엇이 모순된 세상을 저버리도록 재촉하고 있는 것을 양심이 맑으면 맑을수록 느낄 것입니다. (7-178)
우리는 어차피 가고 있습니다. 가고 있는데 목적 없이 간다면 그건 지극히 비참한 것입니다. 여러분, 사막지대를 갈 때는 암만 곧추 간다 해도 먼 거리로 돌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돌아가고…. 먼 거리로 돈다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발이 이렇게 가기는 가지만 똑같이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금 틀려도 오래 가게 되면 벌써 돈다는 거예요. 왼발이 조금이라도 더 가면 그렇게 해서 돈다는 거예요.
여러분 바다에서나 호수에서 보트를 저어 보라구요. 보트를 저어 보면 반드시 삼각형…. 내가 여기서 저기까지 간다 하게 되면, 반드시 3점을 맞춰야 돼요. 이 자리에서 저기까지 가려면 반드시 이거와 맞추어야 됩니다. 그런데 노를 저어 보면 꼬불꼬불 간다구요.
이렇게 볼 때에, '나'라는 존재가 지금 살고 있고 가긴 가는데, 이게 어디로 가는지 안심이 안 된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출발점과 목적점을 바라보면서 이 3점을 조정하여 맞출 수 있는 놀음을 해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직선에 가까운 거리로 지나갈 것입니다. 이것은 이론적으로 타당한 것입니다. (89-164)
③ 잃어버린 자신을 되찾아야
마음은 자연의 이치에 부합되는 것입니다. 선을 향해 무한히 움직이고자 합니다. 그것은 자석이 남과 북을 가리키는 것과 같습니다. 자연의 이치는 방향을 잃고 선을 피해 가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 현상이 없어요. 인간의 마음도 역시 어떤 목적을 향하여 움직이고자 합니다. 생명을 향하여 움직이는 마음, 심정을 통하여 움직이는 마음, 진리를 분별하는 마음, 전체와 화합하고 싶은 마음, 전체의 어떤 이념에 화하여 살고 싶은 마음, 이 마음이 하늘이 도피의 방향을 지시할 수 있는 터전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되찾아야 되겠습니다. 오늘 여기에 참석한 여러분들은 어떠한 처지에서 어떠한 모습을 갖고 있는지 마음의 기준을 잡아서 자신을 분석해야 되겠습니다. 마음은 자꾸 재촉하는데 무엇인지 모르게 클클하고, 무엇인지 모르게 공포의 위압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런 자리에 있어 가지고는 안 되겠다는 것이 자연적인 현상으로도 느껴져 들어올 뿐만 아니라 보여지는 모든 물상을 통해서라도 작용되어 들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이런 것을 통해서라도 자신이 어떠한 모습으로 어떠한 처지에 놓여 있는가를 알아야만 될 것입니다.
만일 어쩌다가 여러분이 영의 눈이 열려서 보게 되면, 수천년 전에 왔다 갔던 수많은 도인들이 만인 앞에 외치고 있음을 알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의 옆에는 수많은 영인들이 달음질쳐 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야, 같이 가자, 원수가 온다'고 하며 깨우쳐 주려 하고 있으나 여러분의 귀는 그런 소리를 들을 줄 모르고, 눈은 볼 줄 모르며, 몸은 감각할 줄 모르는 처량한 모습입니다. 탄식하자면 이 이상 탄식할 일이 없습니다. 이것은 자기 일신만의 탄식할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은 존재의 가치를 전체의 이념세계와 연결시키려는 천륜 앞에 용납할 수 없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7-182)
④ 하늘이계시다면 지도방법이 나와야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은 어느누구도 선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고 보니 선한 종자가 아니라 악한 종자입니다. 태어나고 보니 재창조의 이념 앞에 설 수 있는, 어떤 가치를 노래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자기의 모습이 불초한 모습, 미비한 모습, 불완전한 모습, 부족한 모습임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을 기독교에서는 타락한 모습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의 본심은 타락세계에서 즐기면서 살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6천년 동안 이 길을 피하고 피해 나왔으나 아직까지 완전히 피했다 하는 기준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악을 피하고 선을 지향하면서 그 무슨 목적을 향하여 나가는 것이 왈 인생행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죽어서라도 악을 제거시키고 선을 붙들어야 할 목적 밑에서 악의 환경을 피해 나가는 노정이 인생행로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은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마음의 본향을 향하여 움직일 때는 그렇지 않지만, 악에 치우치는 자리에 서게 될 때는 그 무엇이 나를 잡고 있는 듯한 두려움을 느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죄악사, 혹은 사망의 권한, 흑암권세를 향하여 본심을 피해 가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똑똑히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도피노정에 있습니다. 하늘이 계시다 할진대 이 도피자들을 어떻게 하실 것인고? 악을 도피해 가야 할 세계 인류를 어떻게 지도하실 것인고? 하늘이 계시다면 그 지도방법이 나와야 할 것입니다. (7-180)
2)사람은 원인되는 존재가 아니다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복을 받기를 바랍니다. 그 무엇인가는 모르지만 어떠한 절대적인 힘에 기여해서 축복된 길을 가고 싶고 갖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은 개인도 그렇고, 어떤 단체도 마찬가지이고, 나라면 나라, 세계면 세계도 그러한 것입니다. 사람은 본래 원인 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188-250)
우리는 누구냐? 하나님은 누구냐? 창조주다. 창조주는 누구냐? 종교 세계에서 개념을 잡기를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이러는 거예요. 그래, 아버지는 무슨 아버지예요? 어떻게 된 아버지예요? 이게 막연하다는 거예요. 빌려 온 아버지예요, 이웃 동네 아버지예요, 뭐 양아버지예요? 무슨 부모예요? 그렇지 않으면 처갓집 부모예요, 시집 부모예요? 아버지라는 말이 많아요. 근본을 해결 못 하고는 아무리 환경이 확대된 그 세계에서 해결하려 했댔자 그것은 해결이 안 나는 거예요. 아무리 천만 년을 가도 해결이 안 나는 거라구요.
그러면 인간과 하나님 문제예요, 이게. 인간과 하나님. 진짜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냐 할 때, 여러분은 하나님이 아버지라고 느껴져요? 나보다도, 내가 있기 전에 더 확실한 것이 어머니 아버지의 일신이예요. 어머니 아버지가 나보다 먼저 있기 때문에 내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게 될 때는, 내가 있다는 것을 주장하기 전에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있다고 주장해야 되는 거예요. 그게 올바른 정의예요. 어머니 아버지를 따 버리고 내가 있다고 하는 주장은 어리석은 주장이예요.
왜? 우리 인간은 제1의 원인적 존재가 아니예요. 제2의 결과적 존재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있다는 것을 말하기 전에 어머니 아버지가 있음을 말해야 되는 거예요. 이렇게 보게 된다면 근본에 들어가 가지고 우주의 근본 되는 하나님이라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맨 최초로 해결지어 놓아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 이겁니다. 어머니 이상, 어머니 이상, 조상 조상 올라가게 되면 하나님이 되지요? 이런 논리를 추구한다면 나를 주장하기 전에 하나님을 결정지어야 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다, 그는 내 아버지다, 그 아버지는 어떠한 아버지다 하는 것을 그래서 우리 통일교회는 간단히 가르쳐 주는 거예요. (188-190)
본연의 출발점을 바로 잡아라, 바로 찾아라 이겁니다. 인간은 결과적 존재이므로 원인의 기점에 갖다 맞춰라 이거예요. 원인의 기점을 맞추되, 그 기점이 맹목적 기점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신이 인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인격을 가진 사람에게 있어서도 지정의의 모든 양심적 작용의 내용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동기도 원인적 내용 이상의 동기여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절대적이어야 돼요. 한번 출발한 것이 그릇됐으면 영원히 시정할 수 없습니다. (172-32)
3)직단 거리는 하나 나침반 없이 항해하는 배의 앞길을 생각해 봅시다. 배는 엔진이 돌아가고 스크루우가 작동하면 가게 되는데, 그 배를 운전하는 항해사는 그저 키만 잡고 가기만 하면 됩니까?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인생살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스크루우가 돌아가듯이 그저 밥 먹고 일어나서 회사와 가정을 왔다갔다하면서 그럭저럭 방향도 잡지 못하고 살면 되는 것입니까? 그러다가 목적지인 항구에 도착해서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목적지에 어떻게 내리겠습니까? 그 이상의 위기일발이 없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언젠가 길을 가다가 나이 많은 할아버지와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할아버지께 '어디 가십니까?'라고 물었더니 '가긴 어딜 가. 내 아들네 집에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요. 가시면 무엇을 하십니까?' 하고 다시 물으니 '주는 밥과 반찬도 먹고 어쩌다 닭 잡아주면 닭도 맛있게 먹지'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또, '그러면 먹고 나서 무엇을 하십니까?' 하고 물으니 '먹고 나면 별것 없지' 이런 식의 대답이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이렇게 보내서야 되겠습니까?
가계의 장부를 정리할 때에도 수입이 얼마이고 지출이 얼마인지를 정확히 결산을 합니다. 이렇게 장부를 정리하는 데에도 수지결산을 철저히 하는데 여러분의 인생은 어떠합니까? 일생 동안 산 것을 수지결산해 보았습니까? 적자입니까, 흑자입니까? 적자라면 땅을 치고 통곡해야 합니다. 사람은 죽는 자리에서 즐겁게 노래를 부르며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죽음 앞에서 살려고 허덕이는 것은 적자 인생이라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절대성을 중심삼고 심정의 세계에 있어서 흑자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 그렇게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해결해 주기 위한 종교가 나와야 됩니다. 그 종교는 점진적이 아니고 폭발적이요, 순간적으로 딱 떼어버릴 수 있는 원동력을 가진 종교이어야 합니다. 이 말이 이해가 됩니까? 그러한 종교가 나오면 얼마나 좋겠어요?
지금까지 기독교 역사는 약 2천년이 되었고, 불교 역사는 2천년이 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2천년을 산 사람이 없습니다. 없기 때문에 점차적으로 역사적인 종교를 세워 가지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소원하는 것은 본향의 나라를 만들자는 것이요,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다리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강원도 인제를 가보면 보기에는 5분 거리도 안 될 것같이 가깝게 보이는 거리이지만 막상 걷다 보면 20리도 더 되는 길이 많습니다. '차를 타고도 넘을 수 없는 길을 왜 내가 걷는다고 했던가?' 하면서 걷다 보면 다리가 아파 죽을 지경이 됩니다. 여러분도 가다 보면 그러한 날이 오게 됩니다. 그러면 그때에 여러분은 돌아가는 길을 원하겠습니까, 아니면 직행하는 길을 원하겠습니까? 여기에 헬리콥터가 필요하고, 로케트 같은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무엇인가 달라야 합니다. 비상 대책을 취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에 이 지구상에는 그런 종교가 나와야 합니다. (19-289)
여러분들은 뭐 하러 새벽같이 여기에 왔어요? 뭘하러 여기 와 앉아 있어요? 배가 고파서 여기에 와 앉아 있어요? 더워서 여기 찬데 와 앉아 있어요?「아닙니다」 그러면 추워서 여기에 와 앉아 있어요?「아닙니다」무엇 때문에 와서 앉아 있어요? 어느 것이 참의 방향인지 모르고, 높이 가야 할지, 내려가야 할지 이리 가야 할지 저리 가야 할지 이걸 모르겠다구요. 교회도 많고, 종교 같은 것들이 참 많다구요. 참 같은 것이 많다구요. 진짜는 하나인데 말이예요, 가짜는 수두룩하다는 거예요.
우리 인간을 가만히 보면, 그저 여기저기 다니다가 눈도 마비가 됐고, 귀도 마비가 됐고, 냄새 맡는 코도 마비가 됐고, 맛보는 입도 마비가 됐고, 이거 두 팔도 마비가 됐고, 전부 다 마비가 됐다구요. 내 눈이, 내 귀가, 내 모든 감각기가 일치화되어 가지고, 모든 신경선까지 전체를 종합해 가지고 나를 하나로 이끌 수 있는 그 길이 어디냐? 도취하고 기쁨을 느끼며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것이 어느 길이냐? 그것이 내 개인의 인생길로, 내 하나의 길로, 내가 만족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를 따르는 가정이 만족하고, 내가 속해 있는 종족이 만족하고, 내가 속한 나라가 만족하고, 내가 속한 세계가 만족하고, 내가 속한 하늘땅이 만족하고, 하나님까지도 만족할 수 있는 그런 빛의 길이 어디 있느냐?
그 길이 있어야 인류가 행복한 세계로 갈 수 있는 것이고, 인류가 전부다 하나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계급을 초월해 가지고 하나의 목적지로 인도할 수 있는 빛이 아니면 안 됩니다. 그런 빛을 목표로 하는, 그런 빛을 향한 방향이 어떤 길이냐 이겁니다. 거 필요하지요?「예」 그래 그 빛이 도대체 뭐냐 이거예요. 무슨 빛이냐?「진리입니다」(95-181)
세계 정상으로 오르는 제일 직단거리는 하나밖에 없어요. 둘이 아니예요. 하나예요. 그걸 통하지 않고는 하나의 세계에 도착할 수 없는 거예요. 인공위성을 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예요. 타락한 인류에게 복지의 인공위성을 쏘아 그 정착기지를 격파시키려면, 타겟을 격파시키려면 제멋대로 가서 되겠어요? 컴퓨터에, 천년 만년 후에도 컴퓨터에 넣으면 같은 동작으로 궤도를 따라가기 때문에 격파할 수 있는 거예요. 그게 두 길이 아니예요. (135-282)
4) 왜 사느냐 ①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나는 누구를 위하여 살고, 무엇을 위하여 살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걸 생각할 때 나 자신을 문제로 삼아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는가 하고 반성해 봐야 됩니다. 여러분 자신은 지금까지 무엇을 위하여 살았습니까? 땅을 위하여 살았습니까? 하늘을 위하여 살았습니까? 지상에서 창조주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온전히 살았다고 자신하는 사람은 오늘날까지의 역사노정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어찌된 연고이냐? 종교적으로 보나 무엇으로 보나 인간이 타락 하였기 때문입니다. 타락했기 때문에 인간은 선하게 살 수 있는 본연의 이념 동산을 떠나게 되었고, 전체를 위하여 살 수 있는 환경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마음은 그렇게 살고 싶어하되 몸이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것이 이 땅에 살고 있는 타락한 인간이 처한 형편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입장에 처하여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본래 고착적인 이념의 세계에서 살아야 할 인간이지만, 그런 자리에서 떨어짐으로 말미암아 존귀해야 할 인간은 말할 수 없이 형편없는 자리에서 허덕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더 잘 살고 싶은 감정을 느낄 것입니다. 좀더 잘 살고 싶고, 좀더 크고 좀더 넓고 좀더 높고 좀더 무한한 가치를 느끼며 살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살고 싶은 마음은 있으되 정작 그렇게 살 수 있는 생활적인 내용, 생애의 이념이라든가 그런 목적을 향해 움직여 나갈 수 있는 내용이 없는 것입니다. 산다고는 하지만, 여러분이 당당하게 자신을 가지고 '하늘이여, 땅이여, 하나님이여, 협조하시옵소서' 할 수 있습니까? 그러한 여러분이 못 되어 있습니다.
나 자신은 창조본연의 삶의 내용을 모르고, 하늘의 뭇 영인과 땅의 피조만물과 창조주 하나님 앞에 자신을 가지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존재는 못 되어 있지만 하늘의 뭇 영인은 이 시간도 여러분을 위하여, 땅도 역시 여러분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그런 하늘이 있고 땅이 있고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는 채 그 세계를 그리워하면서 허덕이는 방황의 역사 노정을 걸어왔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더욱이나 여기에 나온 학생들은 오늘을 기점으로 내가 무엇을 위하여 사는가 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때가 왔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너는 무엇을 위하여 살려고 하느냐?' 할 때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들은 누구를 위하여 있는 것인가 하고 묻는다면, 자기를 위하여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나라는 누구를 위하여 있을 것인고? 그 나라 자체만을 위하여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왜? 대우주의 목적권내에 들어가 있는 국가요 민족이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떠한 것이라 할지라도 존재하는 것은 그 자체만을 위하여 존재하게 되어 있지 않다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8-42)
② 누구를 위해 살 것인가
여러분 개인은 누구를 위해 사느냐? '누구를 위해서 살아? 나를 위해 살지' 하면 그것은 낙방입니다. 자기를 위해 산다는 사람 앞에 가정이 있을 수 있어요? 소망의 가정이 없는 것입니다. 나라가 있을 수 있어요? 나라는 안 나옵니다. 거기에 세계가 있을 수 있어요? 세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세계가 나올 수 있는 자리가 없습니다. 있어요, 없어요? 천지의 공약은 '이 개인주의 악당이여 물러가라' 하고 제지하는 것입니다. 개인을 위주하는데 거기에 가정이 들어갈 수 있어요? 거기에 어떤 이상적인 나라가 들어갈 수 있어요? 송곳 끝같이 좁은 데를 들어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무리 들어가려고 해도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57-66)
③ 사랑 때문에 산다
인생이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사람이 어디로부터, 왜 태어났으며 어떻게 살아가야 되느냐? 간단하다는 거예요. 사랑(하나님 중심한) 때문에, 사랑으로 말미암아 태어났으니 사랑의 길을 찾아서 사랑의 목적지로 가는 것입니다. 이러면 우주의 순환법도상에서 영원히 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영원한 개념이기 때문에 사랑을 찾아서 이 중심에 오는 거예요. 그것은 사랑에서만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125-65)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그걸 알아야 돼요. 모든 것이 이동하는 목적, 존재하는 목적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찾아서 움직이고, 사랑을 찾아서 존재하고 있다는 이 철칙을 여러분은 언제나 갖고 있어야 됩니다, 새들이 서로 좋아하고 짹짹거리며 날아다니는 것도 사랑 때문이며, 지남철의 플러스 마이너스가 서로 향하는 것도 사랑으로 하나되기 위해서라구요. 사람들이 전부 다 누구를 만나고 하는 것도 하나되기 위해서라구요.
그러면 하나되는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 돈, 내 욕심, 뭐 자기 아들딸을 위해…. 거기에 있으면 안 되는 거라구요.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이 성립 안 되는 거라구요. 이걸 알아야 돼요.
또 내 일생 동안 사는 것은 무엇 때문에? 나 때문에 사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사는 거예요. 그 목적 때문에 이동하고 살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얼마나 멋져요. 그 얼마나 멋지냐 이거예요. 그렇게 사는 사람은 절대 망하지 않는다구요. 거기에 힘드는 일이 있고, 눈물이 있고, 혹은 비참함이 있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사랑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비참이 아니요, 비통이 아니요, 슬픔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 원칙을 알겠어요?「예」
존재의 목적이 그러한 내용으로 추구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 가지고 그것만 중심삼아 활용하면 세계적인 모든 것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창조원칙입니다. 그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이만큼 있다면 이 사람들이 미국을 움직일까요, 못 움직일까요?「움직입니다」 단, 시간이 문제라구요, 시간이. 그러면 미국은 움직이게 돼 있다는 거예요. 움직이게 돼 있다구요. (67-159)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사느냐? 절대적인 참사랑, 참사랑을 위해서 살자! 여기에 다 들어 있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내 지갑에 있는 손수건도 사랑을 위해서 있다, 내가 일하는 것도, 땀을 흘리는 것도 사랑을 위해, 참사랑을 위해서 한다 이거예요. 내가 말하는 것도 참사랑을 위하고, 먹는 것도 참사랑을 위하고, 노는 것도 참사랑을 위하고, 전부 다 그러는 것입니다. (107-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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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201-202쪽)
아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주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참부모님 사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