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반, 지, 축, 마, 골, 피씨에 대한 잘못된 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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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 성씨별 과거 급제자, 한국학중앙연구원
2.↑ 성씨에 관한 잘못된 상식
천방지축마골피는 성씨와 관련된 잘못된 유언비어이다.
이들 성씨 중 일부는 실제 존재하지 않거나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이고, 조선시대 명문가로서 다수가 관직에 임용되었기 때문에, 천한 성씨라는 것은 근거 없는 낭설이다.
이 성씨들은 인구는 적지만, 천만리(임진왜란에서 전공을 세운 명나라 장수․조선 귀화), 방유령(대사헌․이조참판․경상도 관찰사), 지용수(고려 일등공신․충무공), 마천목(조선 개국공신․영의정), 피득창(조선 개국공신․병조판서․전라도 감사) 등 높은 관직에 오른 인물이 많고, 인구 대비 과거 급제자도 많았다.[1] 조선시대에 성씨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양반 명문가 집안이었음을 뜻한다.
천민은 기본적으로 성씨에 대한 기록이 없다.
천민이 성씨를 가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특정 성씨를 가진 사람의 조상은 천민이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
[2] 이러한 낭설은 신분제가 폐지되고 1909년 민적법이 시행됨에 따라 김이박최정 등 흔한 성씨로 위장할 수 있게 된 노비와 천민들이 '천방지축'(天方地軸․허둥지둥 함부로 날뜀)에 착안하여 입지보전책으로 퍼트린 유언비어이다.
조선시대에 성씨는 양반만이 가질 있었고, 성씨가 있는 인구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천민들은 양반들의 전유물이었던 성씨를 가질 수 없었으나, 병자호란 이후 공명첩(空名帖)․족보위조 등을 통하여 흔한 성씨를 갖게 되면서 양반의 수가 급격하게 증가했다.
대부분 천민들은 김(金)씨 등과 같은 흔한 성씨들로 족보를 위조했는데, 이러한 현상은 조선 후기 일부 성씨와 본관에 인구가 집중되는 현상을 초래하였다. 인구가 적은 희귀 성씨일수록, 인구가 많은 성씨에 비해서 양반의 혈통이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우선 천민이 무엇인지부터 알아보겠습니다.
천민이란 양인 밑의 신분, 즉 노비 등의 사람을 말했으며 실제로 천민은 성씨 자체가 없었으며 과거(문과)에 응시마저 불가능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위의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천민이 아니였다는 것을 증명해드리겠습니다.
1. 지씨를 보겠습니다.
지가(池家)는 고려 때에 平章事(수상급) 36명을 배출한 명문 거족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10명 이상의 문과급제자를 배출해 내었습니다.
여기서 '고려 때에 수상급 36명을 배출한 가문이 왜 조선시대에는 10명 대의
급제자만 나왔을까' 하시는 분이 계실텝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지가(池家)는 고려 때 번영했던 가문이었던 만큼, 이성계가 반란을 일으켜(이조혁명)왕조가 바뀌고나서도 충심으로 지조와 절개를 지키며 모두 정권에 손도 대지 않고 다만 무신의 길로 나아가 나라를 지키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 예로 17代 池 湧奇 공은 고려왕조에서 보기 드문 훌륭한 지도자였으며
이성계와 지극히 가까운 사이시면서도, 지조와 절개를 지키시다가 밀려나게 되셨으며,
* 포은 정몽주 선생이 참살됨을 통분하게 생각하시고, 말도 않고, 먹지도 않고, 눕지도 않고, 잠자지 않으시고, 13일 만에 앉아서 절명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조선시대에는 무과에서도 매우 훌륭한 공신들이 대거 나오게되었습니다.
2. 천씨를 보겠습니다.
천씨는 "하늘 천(天)"자와 "일천 천(千)"자를 쓰는 두 경우가 있습니다.
천(天)씨는 5개의 본관에있는데, 조선 정조 때 천명익이 진사시에 합격한 것으로 봐서 천계는 아닙니다.
영양 천씨(潁陽 千氏)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구원군으로 온 귀화 성씨로서 중시조 천만리가 자헌대부와 화산군에 책봉 받았으니 이 또한 천계가 아닙니다.
3. 방씨를 보겠습니다.
방씨도 대표격인 온양 방씨(溫陽 方氏)의 경우 중간 시조로 알려진 방운이 고려 성종 때 온수(온양)군(君)에 봉해지자 온양을 본관으로 삼은 것입니다.
* 남양 방씨(南陽 房氏)는 고려 때 벽상공신 삼중대광보국을 역임한 방계홍을 1세 조상으로 하고 있으며,
* 개성 방씨(開城 龐氏)도 고려 때 원나라 노국대장 공주를 따라 온 원나라 벼슬아치 방두현을 시조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모두 천계는 아닙니다.
이상으로 대표적인 성씨 3개를 예로 보여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통설이 생겨났을까?' 하는 의문이 생겨납니다.
가장 큰 이유는 그간 일제하에서 일제 고등경찰이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근거없이 지어내 주민들에게 퍼트린 말들이 그럴듯하게 들리자 일부 유식한듯한 몰지각한 식자층에서 인용한 말이 천방지축 마골피 등등입니다.
다시말해 이런 말은 듣고 말할 가치조차 없으며 일본인들이 한민족 이간책으로 지어낸 말임을 다시한번 되새기면서 민족의 단결을 해치려는 술책에 현대에 와서까지 넘어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1] 천( 千 )씨 - 정유재란때 귀화한 중국계성씨
우리 나라 족보를 보면 70%가 자신의 시조를 중국인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중국에서 귀화한 중국계는 많지 않습니다.
대개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서기 직전 혼란한 시기( 이 시기가 무협지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강호의 세계입니다. ), 명나라가 망하는 시기에 주로 많이 조선으로 들어왔는데 " 충장공 천만리 "라는 분은 바로 정유재란후 조선에 귀화하여 오늘날 한국의 천씨의 시조가 되신 분입니다.
[2] 방( 房 )씨 - 고구려에 귀화한 중국인의 후손 or 고구려인의 후예(?)
시조 방준( 房俊 )이 당나라에서 고구려( 말기 )에 귀하하였다고 전해지며, 실제 시조( 중시조 )는 고려시대 벽상공신의 작위를 받은 방계홍부터라고 합니다.
실제 중국계인지, 아니면 망국( 고구려 )의 백성임을 숨기기위해서 그런 것인지는 저도 의문이 생깁니다.
저는 고구려인의 후예로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 외 통일신라시대 중국에서 귀화하였다는 방( 方 )씨가 있으나 이도 신라인으로서 중국의 성을 빌린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극소수이지만 방( 龐 )씨와 방( 邦 )씨도 있는데 모두 각각 명나라 건국기와 멸망기에 귀화한 중국계라고 합니다.
[3] 지( 池 )씨 - 천년 무인( 武人 ) 명문세족인 이중( 二重 )성씨
태조왕건시대에 시조 지중익이 어( 魚 )씨성을 하사받아 지씨와 어씨 두 개성씨로 고려, 조선을 이어온 성씨입니다.
지씨와 어씨는 문반보다는 무관쪽으로 고려와 조선을 이어 천년세도를 누린 성씨입니다.
특히 세조시대 만주의 호랑이로 불린 어유소장군이 유명하지요.
[4] 마( 馬 )씨 - 고구려 동명성왕의 후손
물론 동명성왕의 직계손이 아니라 동명성왕과 같이 남하한 신하 마려( 馬黎 )의 직계손입니다.
마려는 후에 온조왕과 함께 서울로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하기에 이릅니다.
아마 고구려, 백제의 실질적인 건국자이며, 이 두나라의 " 정도전 "인 셈이지요. 물론 중국 한대( 漢代 ) 전설적인 명장인 복파장군 마원( 馬援 )의 후손임을 자체하는 성씨도 소수이지만 있다고 합니다.
문헌상으로는 목천(木川)․ 장흥(長興)․ 개성․ 하음․ 수원 등 33본이 전한다.
마씨는 우리나라 토착 성씨로, 삼한시대 마한의 첫 임금인 마겸(馬謙)이 원조(遠祖)이다.
한편으로는 중국 은(殷)나라 때 기자(箕子)를 따라 건너온 씨족이라고 하며, 〈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 태조가 건국 후 반란을 자주 일으키던 목천(지금의 천안군 목천면) 고장 사람들에게 우(牛)․ 마(馬)․ 상(象)․ 신(申)․ 돈(豚) 등 짐승 이름을 성씨로 쓰게 했다고 한다.
마씨는 마겸 이후 세계(世系)를 잃어버려 온조(溫祚)를 따라 남으로 내려와 한강변에 백제를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한 여(黎)를 시조로 삼고 있다.
그러나 또다시 계보가 끊겨 나당연합군에 항전하며 백제 부흥운동을 일으킨 육침(陸沈)을 중시조로 받들고 있다.
이후 고려 문종 때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내고 목성군(木城君)에 봉해진 점중(占中)의 두 아들 중 큰아들 현(鉉)은 세거해오던 목천을, 작은아들 혁인(赫仁)은 장흥을 본관으로 삼음으로써 분관되었다
[5] 피( 皮 )씨 - 춘추시대 유명한 협객 번중피의 후손
협객하면 무협지의 섬뜩한 무사를 연상하는데 실제 협객의 시조는 " 공자 "나 손자병법의 " 손자 "처럼 춘추각국을 돌아다니며 사상과 지혜를 파는 국가를 초월한 전략가들입니다.
"번중피"도 당시 " 손자 "만큼이나 유명한 전략가였습니다.
그 분의 이름 맨 뒷글자를 따서 성을 만들었는데 족보에는 송나라 시대 고려에 귀화하였다고 전해지나 아마 " 번중피 "가 워낙 유명한 분이기에 고려의 호족( 귀족 )이 그분의 이름을 빌려와 성을 만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6]추(秋) - 추엽을 시조로 하고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추계리를 본관
으로 하는 성씨.
고려 인종 때 송나라에서 건너온 성씨로 고려 인종 때 문과에 급제한 추엽이 시조가 되었다.
본관은 개성․ 강화․ 파평 등이 문헌에 있으나 오늘날에는 추계추씨와 전주추씨 두 본으로 되어 있다.
추엽의 아들인 추황(秋簧)이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대제학을 지냈고 『명심보감』의 편자로 알려져 있는 아들 추적(秋適)은 고려 충렬왕 때 민부상서와 예문관제학을 거쳐 문하시중에 올랐다.
대표적 인물로는 추적의 6세손이며 세종 때 한성부윤을 지낸 추한복(秋漢復), 추적의 7세손으로 선조 때 명나라에 가서 무강자사가 되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여송의 부장(副將)으로 귀국하여 많은 전공을 세운 추수경(秋水鏡) 등이 있다.
추계는 현재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추계리로 되어 있으나 과거에는 양지현 자체의 옛 이름이기도 하였다.
추계는 추적이 고려 충렬왕 때 받은 사패지(賜牌地)라고 하며 이 때문에 후손들이 본관을 양지 또는 추계로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단종의 영월 귀양 때 시봉했던 추익한(秋益漢)으로 인한 화를 피해 추계에서 다른 곳으로 은둔했다고 한다.
추계리 일대에 있던 선조들의 묘소도 실전되어 전하지 않는다고 한다.
축씨와 골씨는 현재 한국에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