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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 강상규
「奉朝賀公行狀」
봉조하공 행장
崇祿大夫行工曹判書兼五衛都摠府都摠管致仕奉朝賀梧泉洪公行狀
숭록대부행공조판서겸오위도총부도총관치사봉조하오천홍공행장
公諱重徵 字錫余 初諱重欽 惟洪氏系出豐山 鼻祖諱之慶事高麗 官至國學直學 生諱侃知制誥 仍父子通顯 號洪厓有詩集行于世 厥後代襲圭組逮 我鮮有諱履祥 以經術事穆廟 名德服一世 官大司憲 贈領議政 號慕堂 後配享文峯書院 寔公之高祖也 曾祖諱𩆸通政府使贈左參贊 祖 諱柱天縣監贈左贊成 考諱萬朝判敦寧府事以公原從勞贈領議政 賜諡貞翼公 世稱完名全德 妣安東權氏敦寧府奉事贈吏曹參議瑱之女 宣祖朝駙馬吉城尉大任之孫也 淑懿溫厚有女士風 宗尙咸則之後 封貞敬夫人 以壬戌十二月十四日生 公公兄弟四人並有謝家寶樹之譽 公於次居第四 自幼容貌儁爽擧止凝 重見之者 咸推國器 貞翼公奇愛之 稱之爲老龍嘗置脥言曰 大吾門者 必此兒也
공의 휘諱는 중징重徵이고 자는 석여錫余 초명은 중흠重欽이다. 오직 홍씨는 풍산에서 나와 세계世系가 이어졌는데 시조의 휘는 지경之慶이며 고려조를 섬기어 벼슬은 국학직학이며 지제고를 지낸 아들 휘는 홍간洪侃이 있다. 홍간의 호는 홍애이며 시집을 내어 세상에 알려졌으며 그 후 대를 이어 벼슬자리를 이어왔다. 내가 사는 조선에는 휘는 이상履祥이란 분이 계신데 경서를 통한 학문을 익혀 선조宣祖, 1567∼1608 임금을 섬겼으며 명성과 덕으로 일세를 풍미하였고 벼슬은 대사헌과 사후엔 영의정으로 증직이 되었고 호는 모당慕堂이며 후에 문봉서원文峯書院에 배향되었으니 이는 양효공良孝公의 고조가 되신다. 증조의 휘는 탁𩆸이며 통정부사通政府使이며 사후엔 좌참찬左叅贊에 증직되었고, 할아버지는 휘가 주천柱天으로 현감縣監을 지냈고 사후엔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되셨으며, 아버지는 휘가 만조萬朝이며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로 원종공신으로 사후엔 영의정으로 증직이 되셨으며 정익공貞翼公이라는 시호를 임금이 내렸으니 명성에 부합하고 덕을 온전히 갖추었다고 세간에서 칭송하고 있다. 어머니는 안동 권씨 돈녕부봉사로서 사후에 이조참의로 증직된 진瑱의 따님으로 선조 때의 부마인 길성위吉城尉 대임大任의 자손이다. 공의 어머니께선 성정이 선하며 아름다웠으며 온후하여 여성이면서도 선비다운 풍모가 있어 종통宗通으로써 모두 받들었으며 정경부인에 봉해졌다. 임술년(1682년) 12월 14일에 양효공을 낳았으며 공과 형제 4명이 모두 훌륭한 자제라는 기림을 받았다. 양효공은 4형제 중 넷째로 어려서부터 용모가 뛰어나고 씩씩하고 행동거지가 엄숙하였으며 공을 거듭해서 본 이들은 모두 나라의 그릇이 될 것이라고 받들었으며 정익공께서 유별나게 아끼며 노룡老龍이라 일컬으며 기분이 좋아 늘 말하기를 “우리 집안을 크게 일으킬 이는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 길성위吉城尉 대임大任 : 권대임權大任, 1595~1645을 말한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자는 홍보弘輔, 본관은 안동이다. 선조의 딸 정선옹주와 결혼했으며 글씨를 잘 썼다. 권대임의 맏아들이자 정선옹주가 나은 유일한 아들이 권진權瑱, 1613-1659이다.
* 여성이면서도 선비다운 풍모女士 : 其僕維何 釐爾女士기복유하 리이여사. “그 뒤따름은 무인가? 너에게 현숙한 여인을 줌이로다.” 여사女士는 곧 현숙한 여인이며 여성이면서도 선비다운 풍모가 있음을 말한다. 『시경詩經』 「기취旣醉」
* 정경부인 : 조선시대 외명부 가운데 정·종 1품 문관·무관의 부인에게 주던 작호.
* 훌륭한 자제 : 사가보수謝家寶樹라는 말이 있는데 집안의 훌륭한 아들이라는 뜻. 진晉나라의 사안謝安이 여러 자제들에게 “왜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자제가 출중하기를 바라는가?” 하고 묻자, 조카 사현謝玄이 “이것은 마치 지란芝蘭과 옥수玉樹가 자기 집 정원에서 자라나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하였다. 『진서晉書』 권79 「사현열전謝玄列傳」.
* 노룡老龍 : 송宋 나라의 고사故事에, ‘용도각 학사龍圖閣學士를 말한다. 노老는 노성老成한 것을 말한다. 이 학사로 선발된 자는 반드시 모두 노성하고 숙달하며 문장을 잘 짓고 명망이 있으므로 엄연히 조정이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말한다.
公少時 夢一仙人乘黃鶴來問公名 公以初名對 仙人曰 何不以某字爲名 他日子必大顯 仍忽不見 旣覺心異之 告于貞翼公 遂命改 今名因字之 及長大肆力於文章 凡有述作汪洋滂沛 不事雕飾 一時之以文自號者 皆推其筆力 文氣之不可及 辛卯成進士 癸巳已擢增廣文科殿試又占甲科第三名 例付軍資監直長 國典也
공이 어렸을 때 꿈에 신선이 누런 학을 타고 내려와 공의 이름을 묻기에 공이 초명初名으로 신선에게 대답을 하니 신선이 말하기를 “어째서 어떤 자字로 이름을 삼지 않는가? 훗날 그대는 반드시 크게 현달할 것이네.”라고 하였다. 홀연히 신선은 사라지고 꿈에서 깨어나 이를 이상히 여겨 정익공에게 말하니 곧 이름을 바꾸었다. 지금의 이름은 신선의 말로 고쳐 지은 것이다. 공이 장성하여서는 문장 익히기에 큰 힘 쏟으니 공이 지은 저술이 끝없이 넓은 바다와 같고 시원스러웠으며 문장을 꾸미지 않고 한 번에 글을 지었으니 모두 그 필력을 미루어보던 사람들이 공의 글 기운에 미치지 못하였다. 신묘년(1711년)에 진사시에 급제하고 계사년(1713년) 증광문과 전시에서 갑과로 급제하여 군자감직장軍資監直長에 제수되어 나라의 은전을 입었다.
* 군자감직장 : 종 7품. 조선시대 군수품의 저장과 출납(出納)에 관한 일을 맡아본 관청.
俄而換授掌樂院直長 乙未陞典籍 旋拜兵曹佐郞 又於其日 政擬望持平 卽世所稱通淸也 秋丁太夫人憂皇皇 有赤子慕毁幾滅性 丁酉服闋時 貞翼公春秋高 公爲便養計出 宰龍仁縣 以視民如傷 四字書座觀省而深懲俗吏要譽之習 崔相國奎瑞寓居境內對人 輒稱道曰 自吾居此境 屢閱邑宰而其任 眞不求譽爲士大夫之治者 獨於此人見之矣 庚子棄官歸養 壬寅除兵曹正郞被選知製敎 曺吏有售奸於文簿者 公摘發而將治其罪 吏乃判書之傔從也 判書必欲庇護之 公呈旬請遆 判書始慚悔謝 公不少貸 重治其吏 衆皆快之 癸卯蒞任朔寧郡 翌年遆歸 乙巳秋除掌令辭遞 移拜司僕正
얼마 안 있어 장악원직장으로 옮겨갔으며 을미년(1715년)에 전적에 오르고 이어서 병조좌랑에 제수되었고 또 그날 바로 지평이란 직책 인선人選의 물망에 올랐으니 이는 세간에서 말하는 통청通淸이라 한다. 중추仲秋에 공의 어머니께 우환이 닥쳐 불안한 상태에서 아들로써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에 몸이 망가지고 거의 실성을 할 지경이었다. 정유년(1717년)에 탈상脫喪을 할 때 정익공의 춘추가 높아 정익공을 편히 모시기 위한 계를 내어 용인 현감이 되어 백성의 실정을 보고 자신의 처지처럼 마음 아파하였다. 네 글자의 좌우명을 써서 보며 자신을 성찰하고 속된 아전들을 혼내며 기려야 할 요체로 익히게 하였다. 영의정 최규서崔奎瑞가 같은 지역에 살며 사람들을 대하여 도에 관하여 말하기를 “내가 이 지역에 살며 여러 번 수령들과 그 맡은 바 직무를 보건대 참으로 사대부가 되어 명예를 바라지 않고 백성을 다스리는 이는 오로지 이 사람 뿐이다.”라고 하였다. 경자년(1720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 정익공을 봉양하였다. 임인년(1722년)에 병조정랑에 제수되고 지제교가 되었으며 병조의 벼슬아치 중에 장부를 가지고 농간을 부리는 자가 있어 공이 이들을 적발하여 죄를 다스리려 하니 이들은 병조의 벼슬아치들과 판서의 청지기 노릇을 하는 자들이었다. 병조판서가 반드시 이들을 비호하려 할 것인지라 공은 열흘 간 물러나기를 청하였는데 병조판서가 비로소 부끄러워 후회를 하며 사죄를 하였다. 공은 조금도 아량을 베풀지 않고 거들 농간을 부린 벼슬아치들을 다스렸으니 모두가 이를 잘한 일이라고 하였다. 계묘년(1723년)에 삭녕 군수에 부임하고 다음해(1724년)에 삭녕 군수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을사년(1725년) 가을에 장령掌令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고 사복정司僕正에 제수되었다.
* 통청通淸 : 청요직淸要職이 되는 자격을 얻던 일을 말한다. 이비吏批의 청요직인 양사兩司, 전랑銓郞, 경연經筵, 춘방春坊 등의 망통望筒에 후보로 올릴지를 심사하는 일로, 통청通淸이라 하였다.
* 추정秋丁 : 중추仲秋 즉 8월의 첫째 정일丁日을 가리키는데, 중춘仲春 즉 2월의 첫째 정일과 함께 1년에 두 차례씩 공자의 문묘文廟에 석전釋奠을 올렸다.
* 최규서崔奎瑞, 1650∼1735 : 조선후기 대제학,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公釋褐十餘年 潦倒郞署 至於直掌令 卽素乏地 望者所宜居而掌銓者以是處公 人無不憤歎而公則一付於人無所忻慽 冬丁貞翼公憂廬墓三年 晨夕號泣 哀動隣里 鬚髮盡白 毁疾轉谻而上墓之禮 不以病爲解 雖甚風雨大寒暑 亦不廢
공이 석갈釋褐한지 10여 년 만년晩年까지 낭서에 있었고 직장령直掌令에 이르렀으니 평소에도 궁핍한 생활을 하는 처지였다. 낭서郞署의 벼슬을 바라는 자는 마땅히 그 자리에 있어야 하나 그 직책을 맡은 자는 공정해야 하니 사람들은 성을 내거나 탄식을 하였으나 공은 한쪽으로 쏠리어 기뻐하거나 근심하는 바가 없었다. 1725년 겨울 정일丁日에 정익공이 돌아가셔서 여묘 살이를 3년간 하며 아침저녁으로 울부짖고 그 슬픔이 인근 마을을 진동시켰다 수염과 머리털이 모두 새었으며 몸이 상하고 병에 걸려 지쳐도 묘에 올리는 예를 병을 핑계 삼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모진 비바람과 큰 추위와 더위에도 또한 망자亡者에 대한 예를 거두지 않았다.
* 석갈釋褐 :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아감을 말함. 진사進士 급제하여 벼슬을 제수 받은 자에게 쓰는 말임. 『송조회요宋朝會要』.
* 만년晩年까지 낭서에 : 한 무제漢武帝가 낭서에 와서 백발의 낭관郞官인 안사顔駟를 보고 불쌍하게 생각하며 언제 낭관이 되었느냐고 묻자, 안사가 문제文帝 때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무제가 늙도록 불우하게 된 이유를 묻자, 안사가 “문제는 문文을 좋아했는데 나는 무武를 숭상했고, 경제景帝는 노인을 좋아했는데 나는 그때 아직 젊었고, 폐하는 젊은이를 좋아하는데 나는 이미 늙었습니다. 그래서 삼세三世에 걸쳐서 불우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문선文選』 「사현부思玄賦」·한무고사漢武故事.
戊申春制畢除掌令 公時在鄕廬 猝聞莛亂之報 卽發奔問之行 間關迤路得進 輦下直入闕中 肅命以道路所聞陳疏有曰 臣於今行到溫陽郡 聞本郡吏有爲兵營吏者 目見淸州賊變言于其所親曰 賊徒作變之後 觀其翌朝分糧之狀 卒徒是二百七名而淸州束伍八哨 按簿招集凶徒又各自募入漸次增演云 雖未知其後添加之數而盖二百餘名之外 皆是一時誘脅之輩也 且聞其軍初無統領 自得淸州將校之後 始乃略倣行伍云 彼將校輩與愚氓少別 其中亦必有得當以自效者 豈盡甘心於爲賊驅使乎 誠使此輩革面歸心 其魁可致首於麾下 其卒可不戰而星散矣 今若密勅巡討使依聊城約矢之事 諭之以延順禍福 如有斬將歸化者則當受一等勳千金賞云 而以金重萬事爲證 仍送重萬於陣上 侈其服飾以爲誇耀之資則城裏觀瞻 必將聳動欽艶爭先縋城而下 此亦兵家一奇也 營吏又有一說賊徒聲言 湖南後援當 自沃川文義入來云 此或出於賊徒張大之說 雖未可準
무신년(1728년) 봄 예를 다해 장령에 제수되었으나 공은 이때 시골집에 있었는데 갑자기 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난리를 당한 임금에게 달려가며 문후를 여쭙고자 꾸불꾸불한 길을 나아가 수레에서 내려 곧장 대궐로 들어가는 가운데 길에서 들은 바로 상소를 올려 말하기를 “신이 지금 온양군에 이르러 들으니 온양군의 아전들이 병영의 군사가 되었고 청주성의 적들이 그들과 친한 이들에게 적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말하는 바를 눈으로 보았는데 적의 무리가 반란을 일으킨 뒤에 다음 날 아침에 군량을 나누는 상황을 보니 온양군의 병사의 무리가 207명이며 청주성의 병사가 속오군束伍軍 8초(720명)이라고 합니다. 불러 모은 흉도凶徒와 각기 스스로 모인 숫자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고들 합니다. 비록 그 뒤에 더해 모이는 흉도의 숫자는 알지 못하겠으나 아마도 200여 명이 넘을 듯 하나 모두가 한 때에 꾐에 빠지거나 을러대어 모은 무리일 것입니다. 또한 이들 군사들은 애초에 통솔할 자아 없다고 합니다. 청주성의 장교들을 얻은 뒤로는 대충 속오군을 본뜨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 장교들과 백성들은 다소 구별을 할 수 있고 그들 가운데 반드시 마땅히 본받으려는 이들이 있을 것이니 어찌 달갑게 적을 몰아내는데 마음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진실로 이 역도 무리들의 마음을 바꾸어 항복할 수 있게 하면 역도의 괴수를 휘하에 둘 수 있으며 그 아래의 무리들은 싸우지 않고도 별처럼 흩어지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만일 순토사巡討使에게 조서를 보내어 “요성聊城에 웅거하는 적을 약시約矢의 일로 적의 괴수를 깨우치게 하여 화를 복으로 돌리게 하십시오. 만일 적의 장수를 목 베어 귀화한다면 1등의 상훈을 주십시오. 이는 김중만의 일이 그 증거가 될 것입니다. 이에 김중만을 진영 위로 보내어 그 옷차림을 요란히 치장하여 번지르르한 자태를 뽐내게 한다면 성안의 적들이 보고 반드시 크게 동요되어 마음으로 흠모·추종하여 앞 다투어 줄줄이 성을 내려올 것이니 이 또한 병법가兵法家의 하나의 기발한 계책이 아닙니까. 병영의 관리 또한 한마디 소리 내어 적도들에게 말하기를 ‘호남에서 후원함은 당연한 것이고 옥천·문의 등지에서 들어올 것이라.’라는 등등. 이는 적도들의 과장된 말에서 나왔을 것이니 근거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 초哨 : 1초는 병사 90명을 말한다. 10명이 1隊로, 3대가 1旗로, 3기가 1哨이다.
* 난리를 당한 임금에게 달려가며 문후를 여쭙고자(奔問) : 주周나라 양왕襄王이 난리를 피해 정鄭나라 시골 마을인 범氾에 머물면서 노魯나라에 그 사실을 알리자, 장문중臧文仲이 “천자께서 도성 밖의 땅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계시니, 어찌 감히 달려가서 관수에게 문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天子蒙塵于外 敢不奔問官守〕”라고 하였다. 『춘추좌씨전』 희공僖公 24년.
* 요성聊城에 웅거하는 적을 약시約矢의 일로 : 연燕 나라 장수가 제齊 나라 요성聊城을 함락시킨 뒤, 참소에 걸린 나머지 본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요성에 웅거하며 죽음으로 저항을 하였는데, 노중련魯仲連이 화살에 묶어 쏘아 보낸 편지 한 통을 읽어 보고는 사흘 동안 눈물을 흘린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사가 있다. 『사기史記』 권83 「노중련열전魯仲連列傳」.
* 김중만金重萬 : 영조 4년(1728년) 이인좌李麟佐 등이 주도한 ‘무신변란戊申變亂’을 고변告變한 공로로 언성군彦城君에 봉해졌었다. 「영조실록英祖實錄」 4年 3月 16日, 4月 29日.
凡事有偹則無患 此一路各別防遏之意 申飭帥臣亦宜 下詢于大臣 從長裁處焉 且臣嘗待罪 龍仁縣令粗知其邑地形處仁倉所在處 乃是平原曠野 都無遮限 前臨素沙坪且陽安二邑邇連境 自淸州取路鎭川而出 則此是捷徑而地勢濶大 非孤軍所可守也 卽今大軍連營於水原振威而至於龍仁則只使南陽鎭防守云 此甚危道也 亦望下臣疏于廟堂 或以他一鎭加定而別遣武臣之有聲望者 並力恊守則庶無疎虞之慮矣
무릇 만일의 일에 대비하면 근심이 없습니다. 이처럼 한 가지 방책으로 각별히 적을 막아 방어할 뜻이 있다면 장수와 신하들을 타일러 경계함이 마땅한 일입니다. 아래로는 대신들에게 자문을 구하여 좋은 의견에 따라 처신하여야 할 것입니다. 또한 신은 일찍이 죄를 지어 용인 현령으로써 읍의 지형이나 처인성의 창고의 위치를 대략 알고 있으며 이곳은 땅이 편평하고 확 트여 있어 도시 적을 막을 수 없습니다. 전에 소사평과 양안성 두 읍의 경계가 이어진 곳에 이르렀으며 청주에서 길을 잡아 진천으로 나와 보니 이게 지름길이며 지세가 넓게 트여 커서 도움을 받지 못한 군사도 지킬 수 있는 곳입니다. 지금 대군을 수원과 진위에서 움직여 용인에 이르면 단지 남양진에서도 적을 막아 지켜낼 수 있다고 합니다. 이는 매우 위험한 방도입니다. 바라건대 묘당조정에서 신이 올린 소를 내려주셨으면 합니다. 혹은 다른 진영을 더 지정하여 별도로 명망이 있는 무신武臣을 보내어 병사들과 화합하여 적을 막아낸다면 소홀하여 잘못을 저지를까 염려할 것은 없습니다.
臣在鄕時 聞賊徒戕害節帥在於十五夜 自十六日以後 數日之間 飛行列邑者 惟是凶關而監營無一言 各鎭無一言 守宰又不敢擅便發兵 湖西一道有若無人之境 哀彼小民 何恃而不爲奔竄乎 國綱之解弛極矣 今聞前監司已有罪罷之 命臣謂各鎭營將亦不可不責罰以礪他將士也云云 自上頗嘉約其言 是時鞫獄 方張諸賊多已被拿而夢顯兩賊相繼亡命
신이 시골에 있을 때 적도들이 절도사를 죽인 게 보름날밤이었다고 들었습니다. 16일 이후 몇 일간 나는 듯이 여러 고을을 돌아다닌 게 이 흉흉한 관문關文이었는데 감영이나 각 진에서는 한마디 말도 없었고 고을 수령 또한 멋대로 병사들을 동원할 수 없었다고 하니 호서지방(충청도)은 마치 사람이 없는 듯 하였습니다. 저 백성들을 불쌍히 여겼는데 무엇을 믿고 도망가지 않겠습니까? 나라의 기강이 느슨해진 게 극에 달했습니다. 요즘 들으니 전 감사監司는 죄가 있어 파직되었다고 합니다. 신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각 진의 영장營將 또한 책임과 죄를 물어서 다른 장수들과 병사들을 다스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주상께서는 그 말이 좋다고 하였으며 이때에 죄인들을 추국推鞫하여 바야흐로 적도들이 많이 잡혀 적들이 서로 망명해 오기를 꿈꾸었습니다.”
* 적도들이 절도사를 죽인 게 : 1728년 3월 15일 충청병사 이봉상李鳳祥을 죽인 일을 말한다.
* 관문關文 : 동등한 관서 상호간이나 상급관서에서 하급관서로 보내는 문서.
公與諸臺陳章請於罪人 未斯得之 前先施破瀦孥籍之律 且論夢賊方在謫中守土之官 任其潜遁 亦宜拿治 上並令依施又論閔允昌以湖邑守令騰傳賊關略 無忌憚 宜治其遺君負國之罪 四月上下哀痛詔辭旨懇惻 公上疏略曰 良役變通一事前後 筵對發言盈庭終未得其一定之策 因循姑息一任 吾民之塡壑 平日流離轉徙以避隣族侵懲者 一有變故 相率投入於賊藪 思之寧不寒心 願殿下使二品以上三司諸臣會于朝堂 各陳謀猷如天章故事 殿下與二三大臣折衷而裁擇之則其中豈無無 可行之策耶 然論其安民之本 莫先於擇守令 守令非其人則雖殿下日降德音 若保之仁 終無以下究於蔀屋矣 試以近日事言之 畿湖數十州之間 曾無一人能任官守之責者如是而可謂擇人乎 爲今之道 莫如一祛舊習 使廟堂及侍從諸臣各擇公廉 愷悌者數人揭名殿壁隨卽塡補而若有貪汚發覺者則並薦主而同其罪 然後掄選之法 嚴黜陟之方 明矣
공과 여러 대간臺諫들이 소장疏章을 올려 죄를 청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전의 선례에 따라 대역죄인의 집을 허물고 처자를 노비로 삼는 법을 시행하고 적도가 되려는 자가 유배 중인 지방의 수령 곁에 숨으려는 것 또한 잡아 죄를 다스려야 함을 논의하였다. 주상은 아울러 영을 그대로 시행하고 또한 민윤창閔允昌을 호서의 수령으로 삼아 적관賊關, 적의 본거지을 떠들썩하게 교란시킬 것을 논의하였고 거리낌 없이 임금과 나라를 저버린 죄를 합당하게 다스렸다. 4월엔 임금이 내린 조사詔辭가 간절하고 진실 되니 공이 상소를 올려 대략 이르기를 “일반백성이 부담하는 모든 요역徭役이 형편과 경우에 따라 융통성 있게 일사천리로 처리되어야 하나 경연에 임하여 꺼낸 말이 결국에는 하나도 대책이 마련되지 않으니 임시방편일 뿐입니다. 백성들은 구렁텅이에 빠지고 늘 뿔뿔이 흩어져 헤어져 이웃과 친척 간에도 서로 응징을 하니 하나의 변고가 아닐 수 없고 서로를 적도의 소굴로 빠져드니 이를 생각하면 어찌 한심스럽지 않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 2품 이상 삼사三司와 여러 신하들을 조정에 모이게 하여 각자 천장고사天章故事와 같은 문장으로 묘책을 진언케 하십시오. 전하와 삼정승께서 의견을 절충하여 채택하면 그 중 어찌 시행할 계책이 없겠는지요? 그리하여 백성을 편안케 하는 근본을 논의하시고 먼저 수령을 고르는 일은 하지 마십시오. 수령될만한 자가 아니면 비록 전하께서 당일로 임금의 교서를 내림에 있어 어짊을 보태면 끝내 오두막에 사는 산림처사에게서 의견을 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시험 삼아 최근의 일을 가지고 말씀드리자면 경기와 호서 지역의 열 고을에서도 일찍이 지방 수령을 맡을만한 이가 없는 게 이와 같은데 적절한 수령을 고를 수 있다고 하시겠습니까? 지금 시행할 방도는 오래된 관습을 한 번에 없애는 것만 못합니다. 조정과 시종하는 사람 그리고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공정하고 청렴한 이를 채택케 하시면 됩니다. 화목한 자 몇 명의 이름을 뽑아 대궐 벽에 걸고 따르게 하여 자리를 메우면 탐관오리가 발각되어 이를 임금에게 천거를 하더라도 그 죄가 같을 것입니다. 그런 뒤에 관리를 선발하는 법을 따라 엄히 공이 있는 자는 뽑아 쓰고 공이 없는 자는 내치는 방도가 명확해질 것입니다.
* 민윤창閔允昌 : 자는 여유汝猷이다. 명재明齋 윤증尹拯의 문인 민이승閔以升의 장남이다.
* 천장고사天章故事 “공은 옛날에 용을 타고 흰 구름이 떠도는 제향帝鄕에 노닐면서, 손으로 은하수를 퍼 담아 하늘의 문장을 분담했다(公昔騎龍白雲鄕 手抉雲漢分天章).”라고 하여 한유韓愈의 문장을 칭찬했다는 고사이다. 소식蘇軾이 「조주한문공묘비潮州韓文公廟碑」.
時良民之避亂者 爲把守軍卒之所枉殺 至於十二名之多 自上特下備忘深加慘傷 公疏中以爲此盖由於將校輩 以希功望賞之 心專尙首級 有此毒及平民之事 此輩若不痛 繩以法則 雖有收瘞之令 顧恤之典不足以慰其枉死之魂 且言嶺南一路素稱鄒魯之鄕 不幸凶逆之徒蘖茅其間 使七十州禮樂之藪咸被羞累 宜聖明之必欲愛惜而全安之也 第念脅從見惑寬治勿論之 敎用之於無知小民則固不害 爲天網之恢恢而惟彼士族之類不可不一番拿鞫以分玉石也
지금 일반 백성으로 난을 피하려 한 이들이 파수꾼에게 하릴없이 죽은 자가 12명인데 많은 숫자입니다. 위로부터 특히 아래로 참상이 심하였습니다. 공소公疏 가운데 이는 장교로부터 비롯된 게 있는데 공을 바라 상을 받기를 원한 것이니 마음속으로 오로지 적도의 수급을 높이 쳐준 것이니 이러한 폐단이 일반 백성에게 미쳐도 장교 무리들은 가슴 아픈 줄 모르는 듯합니다. 반듯이 먹줄로 재듯 법을 세우고 죽이라는 명령을 있어도 백성을 불쌍히 여겨 임금의 은혜가 내려도 하릴없이 죽은 이들의 영혼을 위로하기에는 부족합니다. 또 말씀드리건대 영남의 한 지역은 평소 유학儒學을 숭상하는 곳이라고 하지만 불행하게도 흉악한 역적의 무리들이 그 틈에서 싹트고 있어 예악禮樂의 본거지인 70여 고을 모두가 수모를 겪고 있으니 마땅히 성상의 밝은 덕이 그들을 아끼고 아까워하여 모두 그들을 편안케 하였으면 합니다. 다만 협박에 못 이겨 따른 자들이거나 의혹을 품은 자들은 너그러이 다스림은 물론이라는 게 신의 생각입니다. 교화를 시켜 사람을 씀에 무지한 백성에게는 진실로 해를 끼치면 안 되는 것이니 하늘 그물이 드넓어 오직 저 선비 무리만은 한 번 잡아들여 추국推鞫을 하여 옥석을 가려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 협박에 못 이겨 따른 자脅從 : ‘우두머리는 섬멸하되 협박에 못 이겨 따른 자들은 다스리지 말라(殲厥渠魁 罔治).’ 『서경書經』 「윤정胤征」.
* 교화를 시켜 사람을 씀에敎用 : 옛날의 성스런 임금은 어진이를 높이고 선한 이를 등용하여 교화시켜 등용하였다(昔聖王崇賢 擧善而敎用)라는 말이 있다.
抑臣又敢以推溯源之論爲殿下加勉(억지) 臣聞天下之事 本於人主之一心 天理人慾分於毫釐而國家之存亡係焉 可不懼哉 試以近日殿下發於政施於事者觀之宮家折受之罷 諸道物膳之減與夫乘輿服飾之費 又將次第蠲省 是心之發 卽天理之所發也 殿下誠能恒持此心 擴而充之 勿謂寇亂之旣平 生民之粗集而動靜施措之間 必皆裁之以義理則古所謂殷憂啓聖多難興邦者在今日 卽其大機也 願殿下懋哉 批旨中歷擧所陳之事稱是者三以示獎許之 聖意至於二品以上會于朝堂 獻議一款 令政院依此 擧行爲敎
혹여 신이 또 소급하여 논의를 하여 전하께 억지를 부립니다. 신이 듣기에 천하의 일은 임금 된 이의 한결같은 마음을 근본으로 하고 하늘의 섭리와 사람의 욕심은 터럭만한 차이에서 나뉘어져 이는 나라의 존망과 이어진다고 하였으니 두렵지 않겠습니까? 요즘 전하께서 정사를 베푼 바를 보면 절수折受를 없애고 여러 도에서 올라오는 물산과 진상품이 줄이며 아울러 임금의 옷감에 드는 비용 또한 점차 줄여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이 발하면 곧 하늘의 섭리가 발하게 됩니다. 전하께서 진실로 이러한 마음을 늘 지녀야 합니다.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역적의 무리들의 난이 이미 평정되었다고 하지 마십시오. 백성이 사방에서 모이면 그 움직임을 사람으로서 지켜야할 도리를 한 번에 베풀어야 합니다. 옛날에 나라가 혼미하거나 밝은 시대를 맞거나 많은 어려움이 있거나 나라를 흥하게 함은 오늘에 달려 있으니 이는 곧 나라를 굳건히 하는 기틀이 되는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이에 힘쓰소서! 다만 전하가 내리신 교지 내용 중에 상소를 올린 내용의 일을 일일이 열거하여 옳다고 한 것이 세 가지인데 이는 드러내어 그 일을 장려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성상의 뜻은 2품 이상 대신들이 조정에 모여 한 조목씩 올려 논의하고자 함이었고 승정원으로 하여금 이에 의거 거행하라는 교지敎旨였습니다.
* 절수折受 : 임금으로부터 땅이나 결세結稅를 자기 몫으로 잘라 받는 것. 결세는 토지에 대하여 단위를 매겨 이에서 세금을 거두는 것을 말한다.
大聖人如傷之念 若決之量 藹然可見其後 會朝堂 講究救民之策 公以數条變通之道獻議
대성인은 다른 이들의 아픔을 자기가 아픈 것처럼 하고 마음을 툭 터놓는 아량이 있어 그 뒤가 아름다웠다. 조정에 모여 백성을 구제하는 대책을 강구함에 공은 몇 가지 조목으로 융통성 있는 방도를 제시하여 논의할 사항을 올렸다.
一曰 兩南之匠布兩西北關之除畨錢及各道監兵營新選牙兵等色目 令道臣成冊啓聞量其歲入之數均減物故之額 如鄕校書院吏奴各廳募入之類一倂汰出移充軍役 此後則私賤之外 切勿以良人許屬各處募入之意 各別定式以防投入之弊
첫째, 영남과 호남의 장인들이 만드는 장포와 평안도 제번전除畨錢 및 도 감사·병영에서 새로이 병사를 뽑는 등 군수 물자의 종류와 명목 등에 관해서는 관찰사들에게 계를 올리게 하여 세입 수치를 헤아려 줄어든 물산만큼 액수를 균일하게 맞추었다고 들었습니다. 만일 향교나 서원 그리고 관아의 아전이나 노비나 각 청에서 모집한 이들로 한꺼번에 대거 군역에 충당하고 이후엔 사노비를 제외하고는 절대 일반백성을 각 기관에 소속시켜 모집하지 말고 각기 별도로 정한 법에 따라 군역에 충당하는 폐단을 막으십시오.
* 제번전除番錢 : 번상番上을 면제하는 댓가로 받는 돈. 번상은 부역을 진 사람이 역役을 수행하기 위해 근무처에 가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二曰 各衙門設屯處 稱以屯衙兵募入民 丁甚無謂也 臣謂旣設之屯 雖不可猝罷冒屬牙兵 汰定於良役之代則所得不貲矣
둘째, 각 아문에서 병사들이 주둔할 곳을 설치하여 둔병이란 명칭으로 백성들을 모집하는데 정녕 참으로 할 말이 없습니다. 신이 이미 설치된 둔을 말했는데 비록 갑자기 이들을 없애고 병사로 삼는다 하더라도 일반 백성이 지는 부역을 태정(汰定, 선비로서 시강侍講에 떨어진 자를 도태하여 군사로 정하는 것)에게 지워도 재화로 대속代贖할 수 없을 것입니다.
三曰 各邑閑散不入於儒案鄕案而冒稱幼學之徒 其麗不億 如忠贊衛忠順衛校生院生之冒入投屬巧避身役者 又不知其數 此輩若別立美號待之如將校軍官之類而團束作隊屬之兵營使之 自別於諸軍而只收一疋布 又擇各其邑出身有望於自中者 或曾經武職之人定爲領將 每年春秋兵使巡歷時 試射於都會 官優等入格者隨 卽啓聞或除邊將或許直赴別爲定式施行 有若北關之親騎衛 如有材力絶異者 又抄入於別軍職 其領將亦以勤慢賞罰則彼懷才而未能自拔之類 必將鼓舞聳動 雖無才之人 亦不敢厭避者 以其役歇而且無降定之慮故也
셋째, 각 읍의 한산인閑散人들이 유안儒案과 향안鄕案에 들지 않고 유학幼學의 무리라고 하니 그 수가 억뿐이 아니지만 충찬위忠贊衛·충순위忠順衛·교생校生·원생院生들이 관가에 자수를 하여 교묘하게 신역身役을 피하는 자가 있어 또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으며 이러한 무리들을 별도로 좋게 불러 장군 내지 군관의 무리처럼 대우하고 단속하여 대오隊伍를 만들어 어느 부서에 속하게 하여 이들을 부리십시오. 병영에 이들 무리를 다른 군사와 구별하여 단지 1필의 군포軍布를 거두십시오. 또 각각 그 고을의 출신 가운데 명망 있는 이나 혹 일찍이 무관직을 지낸 이를 영장을 삼았고 매년 봄·가을에 병마절도사가 각 병영을 시찰할 때 도회都會에서 활쏘기를 시험하여 관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입격入格한 이를 따르게 하여 곧 임금에게 계啓를 올려 알리거나 혹은 변방의 장수로 제수하거나 혹은 바로 최종 시험에 응하게 하기 위한 직부直赴를 별도로 정해진 법에 따라 시행하게 하십시오. 관서지방에 근왕병勤王兵인 친기위親騎衛가 있어 만일 자질과 용력勇力이 남보다 뛰어난 자가 있다면 또한 별군직別軍職으로 뽑고 이를 지휘하는 영장領將 또한 근태勤怠에 따라 상을 주거나 벌을 내리고 재능을 갖고서도 이를 발휘하지 못하는 무리가 있다면 반드시 이들을 고무시키거나 분발시켜야 합니다. 이는 비록 재능이 없는 이라도 또한 감히 군역軍役이 싫어서 피하려는 자를 쉬게 하거나 또한 강정降定을 당할 우려를 없애려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 한산인閑散人 : 무과 출신出身으로서 소속된 곳이 없는 사람을 말한다.
* 유안·향안 : 서원書院ㆍ향소鄕所ㆍ향교鄕校 등 이른바 삼소三所의 유안儒案에 이름이 기록되는 것을 말하는데, 유안을 향안 또는 청금록靑衿錄이라고도 하였다.
* 그 수가 억뿐이 아니지만 : 억은 아니라도 꽤 많다는 뜻. “상나라의 손자가, 그 수가 억뿐이 아니지마는, 상제가 이미 명한지라, 주나라에 복종하였도다(商之孫子 其麗不億 上帝旣命 侯于周服)”라고 하였다. 『시경』 「문왕지십文王之什」.
* 충찬위忠贊衛·충순위忠順衛 : 궁궐의 숙위宿衛와 근시近侍를 맡아보던 관원. 조선조에 들어와 내금위內禁衛ㆍ충의위忠義衛ㆍ충찬위忠贊衛ㆍ충순위忠順衛ㆍ별시위別侍衛 등에 소속되었다.
* 교생校生·원생院生 : 향교에 소속된 유생儒生을 교생이라 하고, 서원에 소속된 유생을 원생이라고 한다.
* 영장領將 : 영장은 유군(遊軍, 기습 및 복병을 주로 하는 부대)와 동급임. 조선시대에는 실제 전투 시에 위장衛將 - 부장部將 - 영장領將 - 통장統將 - 여수旅帥 등 전투편성직책을 부여했다.
* 도회都會 : 지방에서 행하는 향시鄕試.
* 별군직別軍職 : 별초군別抄軍과 같은 말. 조선시대 임금의 거둥 때에 어가御駕를 호위하기 위해 특별히 뽑은 군사.
* 강정降定 : 무관武官에 대한 징벌의 하나로 벼슬을 낮추어 군역을 치르게 함을 이른다.
此三件變通 旣無大段撓民之事 摠計所得良丁足充 迯故之代而有餘裕矣 又於親鞫時 公偹論凶逆根柢源委而陳啓曰 做出凶言則自維賢 其祖述鏡賊敎諭 天海密布潜煽誆惑 人心互相傳襲 一串貫來之狀 至于賊環之招而彰露無餘矣 到今觀之則做出凶言者 維賢也 爲其羽翼者 輦轂則有有翼 觀孝嶺南則有弼顯世弘 湖南則有弼夢 諸羅廢族 怨國之徒避 方愚悍之輩 靡然附麗 轉相唱和之不足又從 以掛書而流布中外 以至兵連湖嶺禍伏 都下者無非此賊 所主張而逆招中 維賢所謂渠家寂寞之說 實是逆腸凶肚之畢露處也 雖斬 作萬段不足以泄神人之憤而徑斃杖下已 是失刑之大者 至於應施之律關而不行此 雖出於聖意之有在而王章之廢壞 莫此爲甚 逆魁維賢請施破瀦之律云云
이 세 가지 조목은 융통성이 있으며 크게 보아 민심을 소란케 할 일은 아니다. 모두 역役을 부담할 양정良丁을 충족시킬 계책이다. 신역을 피해 달아난 양정이 있는 경우 이를 대속代贖할 수 있을 만큼 넉넉한 것이 된다. 또 임금이 직접 죄를 묻는 친국親鞫을 할 때에도 공은 이에 대비하여 흉악한 반역이 일어난 근원과 본말을 거론하여 임금께 소를 올려 말하기를 “역모를 일으키겠다는 말은 심유현沈維賢으로부터 나왔으니 그 근원을 밝혀 역도들에게 교서를 내려 깨우치게 하십시오. 하늘과 바다가 빽빽하다가도 펴지고, 잠잠하다가도 요동치고, 미친 말에 혹함이 사람의 마음에 서로 전하여져 이어져 한 꿰미로 된 모습입니다. 역도의 본거지에 나아가보니 그 형세가 드러난 게 없습니다. 지금에 이르러 역도들을 보니 흉악한 역모의 말을 꺼낸 자는 심유현입니다. 그를 보호하려는 자들은 한양에는 이유익李有翼과 민관효閔觀孝가 있고, 영남에는 박필현朴弼顯과 정세홍鄭世弘이 있고, 호남에는 박필몽朴弼夢이 있는데 전라 지역의 폐족입니다. 나라에서 받아주지 않음을 원망하는 어리석고 성질이 사나운 무리이며 병력兵力이 많은 곳으로 빌붙고 서로 이끌어 부응함이 부족하다 싶으면 벽에 붙은 흉악한 괘서掛書를 사방으로 퍼트려 호남과 영남에 연이어 화가 미치게 하였습니다. 지방에 숨어있는 자들이 바로 이 역모를 꾀한 자들이 주장한 것이며 역초(逆招, 반역자의 진술) 내용 중에 심유현의 집은 텅비어있다는 얘기 등은 실제로 역심逆心과 흉악한 속셈을 모두 드러낸 것입니다. 비록 목을 베어 죽이더라도 온통 신의 분노를 씻어 몽둥이로 쳐 죽여 없애도 시원찮을 것입니다. 형벌을 가하지 않은 큰 실수는 응당 관련 법률을 시행하여야 마땅함에도 이를 시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비록 성상의 뜻에서 나왔을지라도 왕장王章의 직언直言이 먹혀들지 않았으니 이보다 심한 일은 없습니다.” 역적의 우두머리에 심유현에 대해서는 ‘대역죄인의 집을 헐어 연못을 만드는 파저破瀦’의 법을 집행해한다고 하였다.
* 심유현沈維賢?~1728 : 1728(영조 4년)년 이른바 무신란戊申亂인 이인좌의 난에 호남을 대표하던 역모를 꾀한 인물이다.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경종의 첫 번째 왕비인 단의왕후端懿王后의 동생으로, 그는 담양부사潭陽府使 재직 당시에 박필현朴弼顯 등과 호남에서 난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어 조사받던 중 물고物故되었다.
* 민관효閔觀孝, ?~1728 : 민종도의 서자.
* 박필현朴弼顯, 1680~1728 : 1728년 3월에 최규서崔奎瑞의 고변告變으로 역모의 윤곽이 드러나게 되어 이인좌가 청주에서 난을 일으키자, 중앙에서는 박필현을 태인현감의 자리에서 몰아내려 했으나 곧이어 반란에 가담하였다.
* 박필몽朴弼夢, 1668~1728 : 1728년(영조 4) 이인좌가 난을 일으키자 유배지에서 빠져나와 반란파인 태인현감 박필현朴弼顯의 군대에 몰래 들어가 서울로 진격하고자 했다. 그러나 반란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죽도에 숨었다. 이어 검모포로 가서 잔여세력과 합세하여 다시 거병을 시도하려다가 잡혀 서울로 압송된 뒤 능지처참 당했다.
* 왕장王章의 직언直言 : 나뭇가지를 모으고 나뭇잎을 덮어서 이불로 삼고 소 덕석을 쓰고 누워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던 왕장을 말한다. 벼슬이 경조윤京兆尹에까지 올랐으나 직언을 서슴지 않아 대역죄로 옥중에서 죽은 한漢나라 왕장王章, B.C1~B.C24이 벼슬에 오르기 전에 집에서 궁핍하게 지냈다고 한다. 『한서漢書』 권 76 「왕장열전王章列傳」.
上曰雖別作文字 無以加此 可見憲臣之意矣 然予意已諭於昨日爲敎先是 御將趙文命以鞫招中 凶言來 歷別作文字 頒示八方事達請故也 臺職遆後 拜宗簿正 仍差問事 卽連叅鞫坐 是歲七月 除順天府使 人皆以左遷下邑爲惜而公無幾微見於言面 下車之初 馭猾吏有轡策 救窮民如焚溺 凡有邑弊 輒皆釐革 闔境稱誦 邑稱瘴癘之鄕 數年疾患連 仍庚戌遂解緩 歸溫陽墓下 因卜居于梧村 自號以梧泉 書史自娛 若將終身
임금이 이르기를 “비록 별도로 글을 짓는다더라도 이에 더할 수 없지만 법을 집행하는 신하의 뜻을 볼 수가 있구나. 그러나 나의 뜻은 이미 어제 내린 교서敎書를 우선으로 하며 어영대장 조문명趙文命이 역적들을 심문하여 받아낸 진술 중에 역적모의 사실이 나와 별도로 글을 지어 일어난 일을 사방에 널리 알리고자 청한 연유이다.”라고 하였다. 대직臺職에서 물러난 뒤에 종부정宗簿正에 제수되고, 곧이어 차례로 반란의 상황을 물어 곧 연이어 국좌鞫坐에 참여하였다. 이 해 7월 순천 부사에 제수되었는데 사람들은 모두 직급이 낮은 고을로 좌천된 것을 애석하게 여겼으나 공은 말을 하거나 사람을 만날 때에 어떠한 기미도 나타내지 않았다. 지방으로 좌천되어 그 고을에 당도하여서 수레에서 내린 처음부터 교활한 아전들을 다루는데 고삐와 채찍(비책)을 썼으며 불에 타는 듯하고 물에 빠진 듯이 심한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였다. 무릇 고을의 폐해를 문득 모두 바로잡으니 온 고을이 칭송하였다. 장독(瘴癘, 장려_습하고 더운 지방에서 생기는 풍토병)의 고을이라 불리며 수년 간 질환이 이어졌으나 곧 경술년(1730년)에 드디어 완화되었다. 온양의 정익공 산소 아래에 오촌梧村에 터를 잡아 살았으므로 오천梧泉이라고 스스로 호를 지었고 경서와 역사서를 읽는 것을 스스로 즐기며 생을 마감할 듯하였다.
* 조문명趙文命, 1680~1732 :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 진압에 공이 있다 하여 수충갈성결기효력분무공신輸忠竭誠決機效力奮武功臣 2등에 녹훈, 풍릉군豐陵君에 책봉되고 병조판서가 되었다. 이후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 국좌鞫坐 : 당상관에게 무슨 변고가 생기면 낭관郎官에게 물어 왕에게 뜻을 아뢰어 융통성 있게 처리하며, 의금부도사에게 탈이 생기면 초기草記를 작성하여 일을 융통성 있게 처리하였다(堂上有故 則問郞以委官意啓稟變通 都事有頉 則堂上草記變通). 초기草記는 조선 중·후기 중앙 관서에서 왕에게 보고할 때 사용한 문서 가운데 하나로서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높지 않은 사안을 신속히 처리할 때 사용하였다. 처음에는 중앙 관서 가운데서도 도제조都提調가 있는 관서에서만 사용하다가 후대로 가면서 차츰 그 사용 범위가 확대되어 도제조가 없는 관서에서도 초기를 사용하여 왕에게 보고하였다.
公之第三兄都正公亦居天安之花嶺 時時還往 有韋蘇州 風雨對床之樂 丁巳除司成 以病未卽趍 朝置對例罷 戊午除掌樂院正 未幾除濟州牧使 濟之爲邑處於重溟之外 公屢以病辭 終未得請 時公年已迫六旬矣 平日之愛公者 多來唁而公夷然 就道視層波如夷庚 無慽慽之色 前此名官之宰 是邑者 多不留意於民事 公則以爲海外遐裔之氓異於陸地民人之樂 生而安業 益軫撫摩 安集之道 察其幽隱 剔其弊瘼 俾得以安其所 且其風俗貿貿 無上下之別 公命置靑衿案 擇其凡民中稍秀出者 館置校宮 繼其廩 料程督勸課大振文風 以是亦多有成就其才者 皆曰吾屬之得齒儒籍者 繄公之力而若公興起敎導之功 雖文翁儒化亦何以加玆云
공의 셋째 형인 도정공 홍중인洪重寅1677~1752 또한 천안의 고재(꽃재, 花嶺)에 살며 때때로 왕래하며 지냈고 위소주韋蘇州와 같은 풍風이 있었고 비바람 소리를 들으며 형제가 나란히 침상에 자는 즐거움을 누렸다. 정사년(1737년)에 사성司成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으니 조정에서 관례에 따라 파직을 하였다. 무오년(1738년)에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안 있어 제주목사에 제수되었다. 제주 고을은 깊은 바다 밖에 위치하여 있고 공은 병을 핑계로 여러 차례 사직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때 공은 이미 예순 살에 가까웠다. 평소 공을 아끼는 자들이 많이 와서 위로의 말을 하였으나 공은 태연하였다. 도道를 좇아 층진 파도를 평탄한 길로 여겼으며 근심하는 기색을 띠지 않았다. 이전에 이름난 제주의 많은 수령들은 백성의 일에는 마음을 쓰지 않았으나 공은 바다 밖의 백성이 뭍에 사는 백성의 즐거움과 다름을 알고 생활함에 본업을 편히 여기게 하고 이들을 어루만지기에 전념하였다. 백성을 편안히 모여 살기 위한 방도로 숨어서 보이지 않은 바를 살피고 없애버리기 어려운 폐단을 척결하니 백성이 그들이 사는 곳을 편히 여겼다. 또한 제주의 풍속이 무지몽매하여 상하의 구별이 없었다. 공이 청금안靑衿案을 마련하여 백성 중에 조금 뛰어난 자를 뽑아 교궁校宮, 향교을 두고 곳간을 마련하여 강학講學의 과정을 헤아려 공부하기를 독려하여 문풍文風을 크게 진작시켰다. 이로써 많은 이들이 그들의 재능을 이루어냈으니 모두가 말하기를 “우리가 청금안에 들어 사람 노릇을 하게 된 것이 공이 힘쓴 덕분이니 공이 가르치고 이끌어준 덕분이라 하였으니 비록 문옹文翁이 백성을 교화한 게 이보다 더할까?” 라고 하였다.
* 위소주韋蘇州와 같은 풍風 : 당나라 위응물韋應物, 737~791의 “몸에 질병이 많으니 고향 생각이 나고, 들에 유리하는 백성들 있으니 봉록 받기 부끄럽네(身多疾病思田里 野有流亡愧俸錢).”라는 시를 써서 자신의 심정을 드러낸 바 있다.
* 비바람 소리를 들으며 형제가 나란히 침상에서 자는 즐거움 : 풍우대상風雨對床이란 고상성어이다. 백거이白居易의 「우중초장사업숙雨中招張司業宿」란 시에, “이곳에 와서 함께 묵을 수 있겠소. 빗소리를 들으며 나란히 침상에 누워 잡시다(能來同宿否 聽雨對牀眠).”라고 하였다. 벗 또는 형제가 한 침상에 나란히 누워 자는 즐거움이란 뜻이다.
* 청금안靑衿案 : 사원이나 향교에서 마련한 유생儒生의 명부를 말한다.
* 문옹文翁이 백성을 교화한 게 : 문옹화촉文翁化蜀이란 고사를 말한다. 한나라 때 문옹文翁, B.C187∼B.C110이 촉蜀 땅의 군수가 되어 이 지방에 학교를 널리 세워 교육에 힘썼는데, 한나라가 지방까지 널리 학교 교육을 실시하게 된 것은 문옹에 힘입었다는 말이다. 『한서漢書』 권89 「문옹전文翁傳」.
島饒物産 素稱脂膏 公惟恐其點汚於氷蘖之操 漁戶應捧之物 亦多 蠲減庫儲 充裕民物 蘇息一島之民 咸稱公淸德近古所未有也 有浙江商販船人吳書申等漂到旋義정의地方 舊例以陸路裝送而漂人之數 多至於一百五十餘名 且其所載之物 幾至三百餘駄 有非從前若干人 漂到之比 公慮其五道津遣煩動民力之弊 且採漂人等 情願必欲由海路直還枚擧事情連續馳
제주도는 생산물이 풍부하여 노력하여 얻은 수익이 많다고 하였다. 공은 오로지 청빈한 절조가 더러움에 물들까 저어하였다. 고기잡이를 하는 가구가 받치는 물품은 또한 많았으나 눈에 띄게 곳간에 쌓아놓은 물품은 줄어들었다. 백성이 수확하는 물산物産을 충족하여 여유롭게 하고 제주의 백성들을 살려내려 애쓰니 모두가 공의 청빈한 덕은 예나 지금이나 없었던 일이라고 칭송하였다. 청나라의 절강 지역에서 온 상선의 선장인 오서신吳書申 등이 표류를 하여 정의旋義 지역에 이르렀는데 예전의 방식대로 육로를 통하여 보내니 표류하는 사람들이 많게는 150여명이었으며 배에 실린 물품은 300여 짐이었고 종전에 표류했던 배보다 약간의 사람이 아닌 많은 사람들이 배에 타고 있었던 것이었다. 표류하여 제주에 이른 사람들에 비례하여 공은 그들을 5도의 포구에 보내어 백성들을 번잡하게 하여 동요시키는 폐단을 우려하였다. 또한 표류해 온 사람들을 뽑아 바닷길을 경유하여 곧바로 돌려보내고 매사 돌아가는 상황을 연이어 조정에 신속히 알렸다.
* 청빈한 절조 : 빙얼氷蘖은 음빙식얼飮氷食蘖, 즉 얼음을 마시고 나무의 움을 먹는다는 뜻이니 청빈한 생활을 하면서 깨끗하게 절조를 지킨다는 뜻이다.
啓請得水營及本州所管舡二隻白布數百疋沿海邑儲置米一百石宣布 朝家德意而給送之 漂人莫不叩頭稱謝 至有涕泣者 初漂人等留館旣久 感公委曲振施之德 屢以藥物什器 修呈禮單 公一切揮却 且使舌人諭止之 漂人等益服公之簡操 相與聚首嗟歎云
조정에 장계狀啓를 올려 수영水營과 본주本州가 관리하던 배 두 척, 베 수백 필, 읍에 저장된 쌀 1백석을 내주었으며 임금의 덕성에 표류해 온 이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고맙다고 하였으며 눈물을 흘리며 우는 자가 꽤 많았다. 애초에 표류해 온 사람들이 관아 객사에 머문 지 오래되다 보니 공이 완곡하게 어루만지며 덕을 베푼데 대하여 감사히 생각하였다. 여러 차례 표류해온 이들이 약과 집기 등 예를 갖추어 올렸으나 공은 일제히 손사래를 쳤으며 또한 말로써 타일러 그만하도록 하였다. 표류해온 이들은 더욱 공의 간소함에 탄복하며 서러 머리를 맞대어 찬탄을 하였다고 한다.
公在島周年 傷於水土病難理劇 連呈辭狀 己未五月 宋公寅明陳於筵中曰 絶島守令遆易有弊而洪某事有可言者 洪某少時以曉事有幹才稱 戊申年以掌令入侍時 見之則有似篤老之人故 其後洪州晉州兩邑 皆首擬而臣以衰病枳之及拜濟牧來 見小臣以病辭不欲赴 臣言於某曰 今姑赴任則當於來秋前 許遆云矣 及到任連見狀啓則區畫得宜才諝 誠可用 近聞實病加劇 許遆似好矣 上曰 予見御史書啓亦知其如此 依所達 許遆可矣 先是御史李度遠書啓有曰 濟牧洪某稟性寬厚 飾躬醇謹 自奉之節以省約爲主治民之政 以祛弊爲心素多病 病而强力 臨民不至廢務 若能終始不懈則來效可期云云 上敎中 亦知其如此者 槩指此也
공이 제주에 있은 지 1년 동안 풍토병에 시달려 번잡한 정사政事의 처리가 어려워 잇달아 사직 상소를 올렸다. 기미년(1739년) 5월 송인명宋寅明이 경연 중에 상소를 올려 말하기를 “제주의 수령은 쉬이 물러나는 폐해가 있으나 홍모의 일은 말할 만한 게 있습니다. 홍모는 젊은 시절에 일에 밝아 일을 처리하는 수완이 있다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무신년(1728년)에 장령掌令으로 전하를 모실 때 보니 70세 이상의 노인과 같은 노련함이 보이는 연유로 그 뒤에 홍주(충남 홍성)과 진주 두 고을 수의首擬에 올랐으나 신은 기력이 쇠하고 병으로 인해 물러난 것과 제주 목사에 제수되어 왔고 소신을 보자 병 때문에 사직을 하고 부임치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신이 누군가에게 이를 말하기를 ‘오늘 잠시 부임하고 오는 가을 전에 물러나기를 허락해 달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임지에 가서 잇달아 올린 장계를 보니 업무를 조처措處한 게 마땅하게 처리를 하였고 또한 재능과 식견이 있으니 참으로 쓸 만한 인재입니다. 근래에 실로 병이 더 심해져서 사직을 허락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주상이 말하기를 “내가 어사가 올린 장계를 보니 또한 이와 같음을 알겠노라. 장계에 올린 내용대로 사직을 허락하니 그리해도 좋다.”라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어사 이도원李度遠이 장계를 써 올려 말하기를 “제주 목사 홍모는 품성이 너그럽고 마음씀씀이가 두터우며, 자신을 다스리며 성질이 변하지 않고 삼가 조심합니다. 스스로 절제하여 간소하게 일을 처리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일에 주력을 하고, 폐단을 없애고자 하여 마음에 병이 생겼는데도 애써 힘을 기울여 백성을 대함에 본연의 업무를 다하였으니 시종일관 나태하지 않아 애쓴 만큼 보람이 나타날 것이라고 합니다. 주상께서 내리신 교서 중에 ‘이와 같음을 알겠노라.’는 아마도 이를 이르는 말일 것입니다.”
* 송인명宋寅明, 1689~1746 : 동부승지, 이조판서,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사람됨이 기지와 정략이 풍부하였다고 한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 70세 이상의 노인 : 이를 독로篤老라고 한다.
* 수의首擬 : 의망擬望의 삼망三望 중 맨 첫 망에 쓴 것을 말함. 세 명의 관직 보임에서 첫 번째 사람을 말함.
* 이도원李度遠, 1684~1742 : 인물 정보 미상. 어사御使를 지냄.
九月遆歸時 登舡至中流 逆風簸海舟搖搖飄蕩 雖黃頭楫師之慣於水者 亦魂戄服栗 公穩臥鼾睡 不問安危事 夜深後僅泊楸子島 又自楸島發船 忽挂冒於水底大巖石 幾不能動 幸轉危而安 公兩日在船中 連値風濤之震蕩 舟楫之傾仄而端坐恬然 若在齋閣 呂正惠公之檣折讀書 可以比方之矣 庚申拜刑曹參議 辛酉出守江陵府見忤於方伯 在官僅月餘 狀罷置對例勘 癸亥拜兵曹參議 在鄕見遆 甲子出補鳳山郡 以罪囚越獄因方伯啓聞例罷 朝堂以失一善治守宰 可惜之意陳達 仍任莅郡二載 膏澤之及於民者 亦多矣 新方伯素不恊於公 無端貶罷 人訝之
1739년 9월 사직을 하고 물러날 때 배에 올라 바다 가운데에 이르러 역풍逆風에 까불려 배가 흔들흔들 바다에 떠돌았다. 물에 익숙한 뱃사람일지라도 혼이 달아나고 떨었을 테인데 공은 평온하게 누워 코를 골며 자고 있었으며 안위安危를 묻지도 않았다. 밤이 깊어 겨우 추자도楸子島에 배를 대었고 다시 추자도에서 배가 출항을 하였는데 문득 바다 속의 큰 암초에 걸려 배가 거의 움직일 수 없게 되었으나 다행히 위험스런 상황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공이 이틀 간 배에 있으면서 잇달아 태풍과 파도에 배가 요동치고 흔들리고 배와 노가 기울었음에도 공은 가지런히 앉아 평온하게 마치 집안에 있는 듯하였다. 여정혜공呂正惠公이 돛대가 부러져도 책을 읽은 게 공과 견줄 만 하였다. 경신년(1740년)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제수되고 신유년(1741년)에 원님이 되어 강릉에 갔으나 관찰사의 뜻을 거슬러 1개월여 만에 장계에 의해 파직되고 전례에 따라 조사하여 처리되었다. 계해년(1743년)에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제수되었으나 고향에 머물러 있는 관계로 사직하였다. 갑자년(1744년)에 지방 관직으로 보임補任되어 봉산군鳳山 군수로 나갔으나 죄수가 탈옥을 한 이유로 관찰사가 장계를 올려 법에 따라 파직되었다. 조정에서 한 때 선정善政을 편 군수를 잃음을 아깝다는 뜻을 상소를 통해 올려 봉산군에 2년 재직하여 백성에게 기름진 은택이 미친 게 많았다. 새로 부임한 관찰사가 공과 화합하지 못하여 까닭 없이 폄하되어 파직을 당하였으니 사람들이 공을 위로하였다.
* 여정혜공呂正惠公 : 여단呂端935~1000을 말한다. 여단은 북송 때 명재상이며 얼굴에 좋고 나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송나라 태종이 여단을 재상으로 삼으려고 그 사람됨을 물었는데 어떤 이가 말하기를 “여단은 사람이 흐리마리합니다.”라고 하였으나 태종이 되받아치길 “여단은 작은 일에는 흐리마리하나, 큰일을 처리함에는 흐리마리하지 않다(小事糊涂 大事不糊涂).”라고 하였다. 『송사宋史』 「여단전呂端傳」
丁卯夏 入銀臺以病遆 其後連除長淵寧海府使 皆辭不赴 戊辰冬又入銀臺 陞拜右副承旨 以該房參鞫坐 應製居魁有貂帽頒賜之典 己巳夏左相趙顯命陳達筵席曰 吳光運洪景輔死後 宜授其自中可爲標準者 獎用似好 上曰 可用者 卿必知之指名以達 左相曰 前冬以承旨使令於前天鑑 想已知其人矣 上曰 果如卿言此人乃故判書洪某之子也 左相曰 聖敎然矣 旣知其人則特爲陞擢以爲自中標準 可矣
정묘년(1747년) 여름 승정원銀臺에 들어간 뒤에 잇달아 장연長淵과 영해寧海 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무진년(1748년) 겨울 다시 승정원에 들어가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어 승지承旨로써 국좌鞫坐에 참여하였다. 응제시應製試에서 수석을 하여 임금이 내리는 담비 가죽으로 만든 모자를 받는 은전恩典이 있었다. 기사년(1749년) 여름에 좌상左相 조현명趙顯命이 경연에서 상소를 올려 말하기를 “오광운吳光運·홍경보洪景輔가 죽은 뒤에 표준이 될 만한 이들이니 장려하여 등용하였으면 합니다.”라고 하니 주상께서 말씀하시길 “등용할 만한 이는 경이 필시 알고 있을 터이니 지명하여 알려 달라.”하였다. 좌상 조현명이 말하기를 “지난 해 겨울 전하가 보시는 앞에서 명을 내리게 하였으니 이미 그 사람을 알고 계시리라 생각 됩니다.”하니 주상께서 말씀하시기를 “과연 경의 말처럼 이 사람이 옛날의 판서를 지낸 홍모의 아들이구려.”라고 하였다. 좌상이 말하기를 “주상이 내리신 교서대로이고 이미 그 사람을 알고 있으니 특별히 승진 발탁하여 표준으로 삼음이 옳습니다.”라고 하였다.
* 조현명趙顯命, 1690~1752 :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치회稚晦, 호는 귀록歸鹿·녹옹鹿翁. 경상도관찰사,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당색을 초월하여 벼슬살이 하는 사람들 사이에 교유가 넓었다. 저서로 『귀록집歸鹿集』이 있고, 『해동가요』에 시조 1수가 전하고 있다. 시호는 충효忠孝이다.
* 오광운吳光運, 1689~1745 : 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영백永伯, 호는 약산藥山. 어려서부터 문장에 뛰어났으며, 유형원柳馨遠의 저서인 『반계수록磻溪隨錄』의 서문을 썼다. 저서로는 『약산만고藥山漫稿』가 있다. 1728년 3월에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변을 아뢰고 대비하도록 하였다. 이 날 저녁 청주에서 이봉상李鳳祥·남정년南廷年 등이 적에게 살해되자, 사람들이 오광윤의 선견先見에 탄복하였다. 대사헌, 대사간, 예조참판 등을 역임하였고 사후에 이조판서와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장忠章이다.
* 홍경보洪景輔, 1692~1745 :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대이大而, 호는 창애蒼厓. 홍주문洪柱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만종洪萬鍾이고, 아버지는 홍중하洪重夏이며, 어머니는 정정양鄭正陽의 딸이다. 인물보다는 당색을 앞세우는 조정의 작태와 무능을 강력히 비난하는 소를 올려 여러 대신들의 노여움을 샀다. 공조참판·병조참판·형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1740년 한성부우윤이 되었다. 이듬해에는 지의금부사·대사헌·경기감사를 거쳐 1743년 대사간이 되었다. 그 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吏判鄭公羽良 亦稱其人忠實 至秋 上親政特擢爲漢城右尹 俄又兼帶摠管 庚午呈遆 辛未除刑曹參判 臺臣有以年老 不堪詞訟爲言者 卽許遆 癸酉秋以末擬授戶曹參判 十一月入參初覆 上曰 卿年幾何等第於何年 公對曰 今年七十二 癸巳登增廣科矣 上曰 曾於癸巳 予倍御眞進江都時 洪萬朝以京畿監司陪行 得見其人 今尙記得 盖於其年 登科爾 命都承旨進前書傳敎曰 戶曹參判洪重徵以癸巳榜 年過七十 依故知事任埅例 特除知中樞府事 仍下敎曰 昔在先朝每於耆老老臣洪萬朝姜鋧李善溥入侍時 敎曰 卿等來乎 聖意眷眷 每念此敎 不勝感愴 今日有此命矣 仍行肅謝以國朝 故事入耆老所 翌日奉審靈壽閣御帖
이조판서 정우량鄭羽良 또한 공을 일러 충직하고 성실하다고 하였다. 1749년 가을 주상께서 친정親政을 하며 특별히 한성우윤漢城右尹으로 발탁하였다. 아울러 총관摠管을 겸직시켰다. 경오년(1750년)에 벼슬에서 물러난다는 장계를 올렸다. 신미년(1751년)에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제수되었으나 대신臺臣, 사헌부들이 공이 연로하여 민사 사건이나 민사 소송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하여 곧 물러나게 되었다. 계유년(1753년) 가을 삼망三望 중 세 번째로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제수되었고 11월에 초복初覆에 참여하였는데 주상께서 말씀하시기를 “경의 나이는 얼마이고 어느 해에 과거에 급제를 하였는가?”하니 공이 답하기를 “올해 72세이며 계사년(1713년)에 증광문과를 통해 급제를 하였습니다.”라고 하니 주상께서 “계사년이라. 짐이 어진御眞을 모시고 강도江都에 갔을 때 홍만조洪萬朝가 경기 감사로 같이 어진을 모시고 갈 때 본 사람이 아직도 기억이 나니 아마도 그해(1713년)에 급제를 하였는가 보구나.”하였다. 도승지를 앞으로 오게 하여 전교傳敎를 내리시기를 “호조참판 홍중징洪重徵은 계사년에 등제하였고 나이가 70세가 넘었으니 옛날 지사知事 임방任埅의 예에 따라 특별히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제수하라.”하였다. 이어 주상이 교서를 내리시기를 “선왕숙종 때 매번 기로 노신인 홍만조洪萬朝·강현姜鋧·이선부李善溥가 조정에 입시入侍하였을 때 선왕께서 교서를 내리면서 말씀하시기를 ‘경들이여, 왔는가?’라고 하셨다. 성상의 마음이 정성스러웠으니 매번 이 말씀을 마음에 두고 애달픔을 이기지 못하였다. 오늘 명을 받았으니 국조고사國朝故事의 예에 따라 사은숙배謝恩肅拜를 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다음 날 영수각에 걸린 어진御眞을 봉심奉審하였다.
* 정우량鄭羽良, 1692~1754 :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자휘子翬, 호는 학남鶴南. 병조판서, 우의정, 판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 초복初覆 : 초복은 삼복주三覆奏의 첫 심리 단계인데 사형死刑에 해당하는 죄인의 심리審理를 신중히 할 목적으로, 초복初覆, 재복再覆, 삼복三覆 등으로 반복하여 조사를 해서 임금에게 보고하는 것을 말한다.
* 짐이 어진御眞을 모시고 강도江都에 : 영조가 숙종의 어진을 모시고 임시 수도인 강화도 장녕전長寧殿에 간 것을 말한다. 장녕전이 나중에 만녕전萬寧殿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숙종 39년(1713)에 새로 그린 어진을 봉안한 뒤 매년 1월, 4월, 7월, 10월에 봉심하도록 하였다. 만녕전은 숙종 39년에 창건하고 별전別殿이라 하였는데, 처음에는 장녕전의 가마를 보관하다가 영조 21년(1745)에 어용御容을 봉안하고 이 전호殿號로 정하였다. 「영조실록英祖實錄」 21년 1월 9일.
* 임방任埅, 1640년 ~ 1724의 예에 따라 : 1719년에는 나이 80이 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고,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갔다.
* 홍만조洪萬朝, 1645~1725 :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종지宗之, 호는 만퇴晩退. 대사헌 홍이상洪履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부사 홍탁洪𩆸이고, 아버지는 현감 홍주천洪柱天이며, 어머니는 증 영의정 김광찬金光燦의 딸이다. 형조참판, 한성부판윤, 좌참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 강현姜鋧, 1650~1733 :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자정子精. 호는 백각白閣ㆍ경암敬庵. 도승지, 예조판서, 대제학, 의금부판사, 좌참찬 등을 지냈다.
* 이선부李善溥, ?~? : 인물 정보가 자세하지 않다. 함경 감사를 지냈으며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는데 관여한 일만 보일 뿐이다.
* 영수각靈壽閣 : 정2품의 대신이 70세가 넘으면 기로소에 들어가는데 이에 더하여 영수각에 초상肖像을 걸게 된다. 아울러 노비와 전답田畓을 받는다.
甲戌正月 特拜工曹判書 方有璿源修改之役 上促令肅謝入侍於殿內役處 上曰 予於癸巳奉往御容 江都 先卿以畿伯陪行來見予於南大門外 卿以其年等第 來參於今日修理 可謂貴矣 予之特除有意矣 是夜宣醞時 上問工判酒量幾何 對曰 僅爲數杯之量矣 酒三行 上又敎曰 工判盡飮乎 筵臣對以連三盃盡飮矣 上曰 能復飮乎 對曰 雖或復飮 天威咫尺恐失儀 宣醞訖命 上階下敎曰 昔年先朝靜攝中 先卿與姜鋧入侍 下敎曰 卿等來耶 予於常訓中言之矣 卿以先卿之子兩世入耆社 豈不貴乎 命賜一盃曰 此則追思昔年卿等來之敎敎而賜之也 又賜一盃曰 此則以卿兩世陪入耆社 別賜之也 公對曰 臣不勝感泣 酒不能下咽矣 後以敦匠勞受錫馬之典 公陳書小朝曰 臣荐荷 大朝不世之眷五年之間 一擢而躋貳卿再超而陞正卿 臣是何人敢當斯寵 前冬知樞之特除以先臣故恩及不肖跂踵耆司榮 動幽明乃者 入侍眞殿 聖諭諄諄歷及昔年御眞陪往時 先臣扈行之事 又以臣今日厠跡於眞殿敦匠之任事屬稀貴 別賜二酌於宣醞之餘 詩所謂周受命 自召祖命者 古稱其榮 乃今近之又於御眞還安時獲叅奉審之列 仰瞻睟容於五雲垂輝之中 舊恩新渥 天高海深 非但臣心之頌祝 無涯使先臣有知亦必飮泣 况此錫馬之典混及於臣尤切惶愧 荅批以今玆賞典 聖意攸在勿辭爲敎 前後判工曹者 視爲閑司漫局 不以曺務經意
갑술년(1754년) 정월에 공조판서로 특진 되었다. 바야흐로 선원전璿源殿 개축 공사를 하려는 때였는데 주상께서 서둘러 사은숙배를 선원전 내 개축 공사 지역에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주상이 말씀하시기를 “짐이 계사년(1713년)에 어진을 받들어 강도江都에 갈 때 공의 아버지가 같이 가면서 남대문 밖에서 만났다. 경이 그 해에 과거에 등제 하였는데 오늘 선원전을 개축하는 참여하니 이는 소중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이날 밤 주상이 술을 내릴 때 주상께서 묻기를 “공조판서는 주량이 얼마인가?”하니 공이 답하기를 “겨우 몇 잔은 마실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술 석 잔이 오고 가니 주상께서 또 말씀하시기를 “공판工判은 다 마셨는가?”라고 하였다. 경연에 참석한 신하들이 잇달아 석 잔을 다 마셨다. 주상께서 말씀하시길 “다시 더 마실 수 있는가?” 하니 공이 답하기를 “비록 더 마실 수는 있습니다만 주상께서 가까이 계시니 실수를 할까 두렵습니다.”라고 하였다. 주상이 다시 술을 내어오라고 하며 말씀하시기를 “지난 번 선왕께서 조용히 쉬시면서 몸을 돌보던 중 공의 아버지와 강현姜鋧이 입시하기에 ‘경들은 왔는가?’라고 하셨네. 이는 선왕이 짐에게 늘 훈교를 하시던 가운데 말씀하셨네. 경은 그 아버지의 자식으로써 두 세대가 기로소에 들었으니 어찌 소중한 일이 아니겠는가?”하였다. 주상께서 한 잔을 더 따르라고 명하시며 “이 술은 옛적에 경들이 와서 짐의 교서를 내려 받은 것을 기려 생각함이다.”라고 하였다. 주상께서 다시 한 잔을 내리시며 “이 술은 경과 경의 아버지가 기로소에 들었기에 별도로 내리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답하기를 “신은 감읍感泣할 따름입니다. 술이 넘어가지 않습니다.”라 하였다. 뒤에 장인匠人 공들여 만든 물품을 임금이 내려주는 총애를 받았다. 공이 소조小朝, 영조에 글을 올려 말하기를 “여러 차례 은덕을 입고, 숙종大朝께서는 세상에 더없는 5년 간 보살핌을 주셨고 한 번에 벼슬을 특진하여 2경卿을 다시 뛰어넘어 정경正卿으로 승진케 하였습니다. 신은 어떠한 사람이기에 이런 은총을 감당하오리까! 지난 해 겨울 신의 아버지의 은택으로 지중추부사로 특진하는 것과 제가 기로소에 들어가는 영예를 얻었으며 유능한 관원은 승진시키고 무능한 관원은 퇴출시켜 어진을 모시는 선원전에 들게 하였습니다. 성상의 깨우쳐주심이 정성스럽고 지난 번 어진을 모시고 갈 때 신의 아버지가 선왕을 호종한 일과 또 신이 지금 선원전 개축 공사에 발을 들여놓은 일은 드물고 귀한 것인데 특별히 신에게 두 잔 술을 내리셨으니 『시경』에서 노래한 ‘기주에 가 하늘의 명을 받아서 소공 할아버지가 명을 받았던 곳으로부터 하노라.’고 한 내용과 같으니 고대에는 그 영예로움을 이리 칭송하였던 것입니다. 요즘에 또 어진을 안전하게 모시고 올 때 봉심奉審의 대열에 참여하였으니 우러러 뵈오니 용안이 다섯 빛깔 구름에 빛을 발산하는 듯합니다. 예전에 내리신 은택이 하늘같이 높고 바다같이 깊습니다. 신의 심정은 주상의 은덕을 기리고 기원하는 것뿐만 아니라 선친께서도 알게 하여 울게 할 듯합니다. 하물며 장인匠人 공들여 만든 물품을 임금이 내려주는 은전에 신은 참으로 황공하고 부끄럽습니다. 신이 올린 상소에 대한 주상의 답이 지금 신에게는 상이요 은전입니다. 성상의 뜻은 물러나지 말고 있으라는 말임을 알겠습니다. 예전이나 앞으로나 공조에 속한 이들은 일이 한가한 관사나 실제 직위는 없이 관품官品만 있거나 자잘한 업무를 담당하는 것으로 여겨 업무에 마음을 쓰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 선원전璿源殿 : 조선 전기에 원묘인 문소전文昭殿 뒤쪽에 있던 전각으로, 선원록과 역대 왕과 왕후의 어진을 보관하던 곳이었다. 조선 후기 숙종의 어진을 봉안하면서 다시 기능이 부활하였고, 이후 영조·정조·순조·익종·헌종의 어진을 차례로 봉안하고 추모하였다.
* 소조小朝 :신하가 임금을 알현하는 보통의 조회 또는 왕세자를 말한다.
* 유능한 관원은 승진시키고 무능한 관원은 퇴출시켜 : 순舜 임금이 행한 출척유명黜陟幽明이라는 뜻이다. 『서경書經』 「순전舜典」.
* 『시경』에서 노래한 : 주나라의 소공召公 석奭이 백성을 교화하여 평온하게 다스린 일을 말한다. “너에게 규찬과 기장 술 한 동이를 내려주며 문인에게 고하여 산천과 토지를 내리노니 기주에 가 명을 받아서 소공 할아버지가 명을 받았던 곳으로부터 하노라. 호虎가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니 천자께서 만세를 누리소서(釐爾圭瓚 秬鬯一卣 告于文人 錫山土田 于周受命 自召祖命 虎拜稽首 天子萬年).” 『시경』 「강한江漢」.
公則以爲無論閑劇 惟其所在職 思其居 然後乃安於心 頻頻赴衙 蕫飾曺務 朝叅時啓曰 工曹各種進上 價不可不繼給而自減削後無以支用 各邑工匠 皆將散亡 合有變通之道 均廳給代分兩等 劃送則庶可支用 厥後上命均廳加給五同木 本曺賴以不乏 且曺中弊端之可釐正者 悉更張之科条秩秩 盛水不漏 卽吏稱頌 是歲夏 上下敎曰 洪某之父 是先朝卿等來之人 非予孰爲洪某擬正卿乎 雖已年老而猶矍鑠矣 校理蔡濟恭曰 筋力尙不衰矣 冬差七陵碑役 都監堂上 至翌年春奔走 各陵盡心蕫役碑役 訖加正憲階貞翼公賜諡 命下已數歲而有故未卽行延諡之禮 公常以爲恨 乙亥春迺與宗孫謀始延諡而設宴以侈之 時公判工曹故 卽官據前例議以若干曺儲助宴 奉禀于公 公辭焉 凡百務從簡略而事亦得以無憾 三月國有大獄 人心波蕩 沐浴之章日數十 上公亦陳章 請討先是 各陵碑刻畢役於二月 故碑面記年月處以二月書塡 光陵顯陵竪碑 在二月西南五陵以碑閣營建之差 遲竪碑未及於二月而至三月乃立 有一相臣以碑石之立在三月而刻以二月爲公之失請以罷職 未幾其相臣又達於小朝以某家延諡時 屛風地衣之具 使工曹所屬貢人定數分納 貢人至今有怨言 請罷其職 盖貢人例以郎官依幕所用 進排鋪陳 故曺吏取用於宴所致 有此傳會之說也 公於蒙叙後陳疏而終不自卞以此 可觀公雅量也
공은 공조工曹의 일이 너무도 한가롭다고 거론하지는 않았으며 오로지 맡은 바 직분에 있어서 그 직위를 생각한 뒤에 마음이 편안함을 느꼈을 것이다. 매우 자주 관아에 나가 업무를 감독하였다. 조정에 나아가 계를 올려 말하기를 “공조에서 각종 물품을 진상함에 값어치 있는 물품을 연이어 진상하지 않을 수 없으니 스스로 진상하는 물품을 줄이거나 없앤 뒤에 지출하여 사용치 말게 하면 각 고을의 공인과 장인들은 모두 흩어져 망할 것입니다. 실정에 맞게 융통성 있는 방도를 마련하여 균역청이 대신 진상하고 양분화 시켜 나누어 보내면 지출하여 사용하게 할 수 있습니다.”하였다. 그 뒤에 전하께서 균역청에 명하여 목면木棉 5동을 더 주라고 하였다. 공조는 이에 힘입어 물자가 부족하지 않았지만 또한 공조 내에 폐단이 있어 바로잡은 것은 모두 폐단을 고치려는 법률이 엄정하였기 때문이었다. 공의 말이나 문장이 치밀해서 빈틈이 없다고 공조의 벼슬아치들이 칭송하였다. 1754년 여름 주상이 교서를 내려 말씀하시기를 ”홍모의 아버지는 선왕인 숙종 때 사람으로 내 어찌 홍모를 정경正卿으로 삼지 않겠는가? 비록 이미 늙었으나 기력이 정정하여 재빠르구나.”라고 하였다. 교리校理 채제공蔡濟恭이 말하기를 “공의 근력이 여전히 쇠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다. 겨울에 7릉의 비석을 개수改修하는 일에 차출되어 도감당상都監堂上이 되어 1755년 봄까지 분주하게 각 능의 비석을 개수하는 일을 마음을 다해 감독하였으며 정2품인 정헌대부正憲大夫에 품계를 올려 가자加資하여 정익공貞翼公이란 시호를 받았다. 임금의 명이 내려진 지 수년이 되었지만 사유가 있어 연시례를 봉행하지 못하여 공은 늘 이를 한스럽게 여겼다. 을해년(1755년) 봄에 비로소 종중의 자손들과 의논하여 연시례를 치루며 성대히 잔치를 열었다. 이때 공은 공조판서였으므로 관의 예전의 전례에 따라 의논하여 공조에 비축된 물자를 써서 연시례 잔치에 보탬을 주려고 품의稟議를 공에게 드렸으나 공은 이를 거절하였다. 무릇 모든 업무는 간략함을 따랐으며 일을 처리함에는 또한 서운하지 않도록 하였다. 3월에 나라에 대옥大獄이 일어나 민심이 어지럽고 목욕재계를 날마다 수십 번 하였다. 주상과 공 역시 글을 올려 먼저 역모를 꾀한 자들을 토벌하기를 청하였다. 각 능의 비석을 개수하는 일은 2월에 끝났으므로 비면에 년도와 월을 적어 2월에 서전書塡하였다. 세조와 정희왕후貞熹王后의 능인 광릉光陵과 문종과 그 비의 능인 현릉顯陵에 비석을 세웠다. 2월에 들어서는 서오릉西五陵에 비각을 세우는 일에 차출되었으나 비석 세우는 일이 지연되어 2월에 마치지 못하여 3월이 되어서야 세워졌다. 이때 정1품 어느 상신이 비석을 세우는 일은 3월에 있었는데 2월에 비석에 글씨를 쓰는 일을 2월에 하였다고 하여 공이 주청奏請을 잘못 올렸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얼마 안 있어 그 상신은 또 소조小朝, 영조를 말함에 소를 올려 공의 집안에서 연시례를 행할 때 병풍 및 돗자리와 같은 것을 공조 소속 공인貢人들로 하여금 숫자를 정해 나누어 바치게 하여 공인들이 지금 원망의 말을 한다고 하니 청컨대 공조판서의 자리에서 파직시키라고 하였다. 공인은 법에 의거하여 낭관들이 모집하여 쓰는 것이어서 나라에 물품을 바치고 저자에서 자리를 깔고 물건들을 배치하는 것을 업무로 삼는다. 그러므로 공조의 관리가 연회에 쓰이는 물품을 골라 바치는 것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낭설浪說이다. 공은 죄를 지어 다시 나라에 서용敍用된 뒤에 소를 올려 끝내 이를 스스로 법도로 삼지 않은 것이니 공의 아량을 볼 수 있다.
* 공의 말이나 문장이 치밀해서 빈틈이 없다 : 성수불루盛水不漏를 말한 것이다. 주희朱熹, 1130~1200가 성인聖人의 말씀이나 문장이 치밀해서 빈틈이 없음을 말한다. 『주자어류朱子語類』 卷 19 「논어 1 어맹강령論語1 語孟綱領」.
* 정경正卿 : 육조六曹의 장관인 판서判書와 한성부의 장관인 판윤判尹을 달리 이르는 말.
* 기력이 정정하여 재빠르구나 : 확삭矍鑠이라고 한다. 노인이 정정하여 젊은이처럼 씩씩한 것을 말한다. 동한東漢의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이 62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말에 뛰어올라 용맹을 보이자, 광무제光武帝)가 “이 노인이 참으로 씩씩하기도 하다(矍鑠哉是翁也).”라고 하였다고 한다. 『후한서後漢書』 卷24 「마원열전馬援列傳」.
* 채제공蔡濟恭, 1720~1799 :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巖·번옹樊翁. 우의정 및 좌의정을 지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 연시례延諡禮 : 조상에게 내린 시호諡號를 받고서 경축하기 위해 여는 잔치이다.
* 3월에 나라에 대옥大獄이 일어나 : 1755년에 일어난 을해옥사乙亥獄事를 말한다. 나주괘서 사건羅州掛書事件이다. 경종 2년(1722년) 김일경金一鏡의 옥사에 연좌되어 나주로 귀양 가 있던 소론의 윤지尹志가 노론을 제거할 목적으로 이때 나주 목사 이하징李夏徵 등과 모의하여 나주 객사에 나라를 비방하는 글을 붙였다가 발각되어 처형되기에 이른 반역 사건이다.
* 서전書塡 : 군사를 위해 지출되는 비용과 군대의 식량錢糧ㆍ군사를 동원하는 것發兵ㆍ전쟁 시 말을 내는 것發馬ㆍ시체를 검안하는 일檢屍ㆍ사형 등 주요 공문서 내용의 위조를 막기 위해 발송 공문을 접어서 붙이고, 그 이음새 부분에 글자를 쓰는 것을 말한다.
丙子歲首以慈殿聖壽七十 朝紳七十以上 推恩加資時 公陞崇政階 是歲秋 上承慈聖敎宣饌於耆社諸臣 公亦入叅 自上親製記文面賜諸臣若曰 今者此擧一則揄揚 昔年盛事一則幸値慈聖寶筭七旬之年兼祝崗陵之意也 旣而又命耆社諸臣圖像作帖藏于耆社 誠曠絶之恩數也 戊寅冬引見耆老諸臣 公晩聞命詣闕則諸臣先已入侍 上聞公追到命史官召入 上曰 今日召卿等 無味予讀大學 卿等亦宜次次讀之 上先讀第三大文 耆老七臣以次輪讀 上曰 各陳文義 此亦乞言之意 公釋明德二字而陳之曰 本明之德又明之 勿爲人慾所昏 上曰 本明之本字 好矣 本明之德 明之其可易乎 公曰 雖若未易而若做工夫則豈有不可爲之理 古之聖賢 皆從這箇裡用工矣 上曰 舊讀能不忘而尙有領會者矣
병자년(1756년) 설날에 자전慈殿 인원왕후 김씨仁元王后 金氏가 칠순을 맞아 조정의 70세 이상으 신하들에게 널리 은혜를 베풀어 가자加資를 내림에 공은 종1품의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다. 이 해 가을에 주상께서 대왕대비의 뜻을 받들어 기로소에 든 신하들에게 식사를 내리라 하교를 하였는데 공 또한 참여하였다. 주상께서 친히 기문記文을 짓고 신하들을 대면하여 말씀하시기를 “오늘 이 행사를 함은 대왕대비를 기리려는 것이다. 지난 번 대왕대비의 경사를 한 번 축하를 드렸는데 다행히 대왕대비의 춘추가 70세라 이를 축수祝壽하자는 뜻이었다.” 이미 또한 기로소에 든 신하들의 초상을 그려 그림첩帖으로 만들어 기로소에 간직하라고 명을 내렸으니 참으로 세상에 드문 은총을 받은 것이었다. 무인년(1758년) 겨울에 주상께서 기로소의 신하들을 불렀는데 공은 뒤늦게 주상의 명을 들었으나 다른 신하들은 이미 먼저 입시를 하였다. 주상께서 사관史官을 불러들여 어명을 전하라고 하며 이르기를 “오늘 경들을 부른 것은 짐이 『대학大學』을 읽는데 뜻을 모르겠으니 경들은 또한 마땅히 차차 읽으라.”고 하였다. 주상께서 먼저 차례로 3개의 문장을 읽고 기로소의 일곱 신하들이 차례로 번갈아가며 읽었다. 주상께서 말씀하시길 “각각 문장의 뜻을 말하라.”고 하셨으니 이는 문장의 뜻을 알고자 함이었다. 공이 명덕明德 두 글자를 풀어 그 뜻을 말하기를 “본명지덕本明之德을 또 밝히려는 것이니 사람의 욕심에 가려져 사리에 어둡지 말라는 뜻입니다.”라고 아뢰니 주상께서 이르시기를 “본명지덕이란 글자가 좋구나. 본명지덕을 쉽게 밝힐 수 있는가?”라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비록 쉽지는 않으나 공부를 한다면 어찌 쉽게 이해하여 구분치 못하겠습니까? 옛날의 성현들은 모두 이 이치를 파고들어 그 뜻을 정밀히 따졌습니다.”하였다. 주상께서 말씀하시길 “예전에 읽었어도 잊지를 않았는데 이제야 이해를 하겠구나.”라고 하였다.
* 인원왕후 김씨1687~1757 : 숙빈 최씨 소생인 연잉군을 지지해 왕세제 책봉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연잉군이 역모의 주범으로 용의선상에 오르자 몸소 보호하였다. 경종 원년(1721년)에는 영조를 왕세제로 등극시키고, 양자로 입적했다. 인원왕후는 영조가 임금으로 즉위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인물로 활약하였으며, 그의 방패막이 되어주었다.
* 축수祝壽하자는 뜻 : 축수는 강릉岡陵이라고 표현한다. 또한 보산寶筭은 임금의 수명 또는 나이를 뜻한다. “하늘이 그대를 안정시켜 흥성하지 아니함이 없는지라, 산과 같고 언덕과 같으며 큰 산과 같고 큰 언덕과 같으며 냇물이 흘러오는 것과 같아서 불어나지 아니함이 없도다(天保定爾 以莫不興 如山如阜 如岡如陵 如川之方至 以莫不增).”라고 한 대목이 『시경』 「천보天保」에 보인다.
庚辰正月 上下敎曰 養老之意 念切之道人君之先務也 耆社諸臣盟府諸宰 當於今二十日 宣饌於明政殿月臺 其各來待 二十日 公承命詣 闕諸耆臣升階 上命掖隸扶腋而上之宣饌訖 上書下御製命懸板於耆閣 仍命圖畵作帖一件內入 諸臣亦宜分執之 公進伏奏達曰 老臣至今生存獲瞻耿光 奉玩御製 今雖退塡丘壑 更無餘憾 第有區區微懇 臣之父子受國厚恩 致位崇班 居常凜凜 先臣屢上休致之疏 未蒙恩許 是爲平生遺恨逮臣之身 繼志述事 歸報先臣於地下者 亦臣耿耿之懷也 臣癃病襲聵致身 無路泯默至今 今日入侍 不但以一覲龍顔爲幸兼有私懇忍死擔曳而咫尺天威顚仆措如此 寧有重入筵席之望乎 因此機會敢陳乞骸之請 倘蒙矜諒而俯從微懇則可以遂先臣未伸之志矣 上曰 所陳之意 媺矣 予當特循卿願 公頓首感祝 上命書許休傳敎訖 上曰 卿行步爲難 姑留謝恩 可也 仍顧謂承旨洪樂性曰 承旨之門 奉朝賀 今始出矣
경진년(1760년) 정월 주상께서 하교하시기를 “노인을 봉양하고자 하는 뜻은 엄밀히 말하자면 임금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라고 하였다. 기로소의 모든 신하, 공신 및 재상들은 20일에 명정전明政政 월대月臺에서 주상께서 내리신 식사를 받으려고 각기 와서 기다렸다. 20일 공은 어명을 받들어 기로소 신하들과 섬돌에 올랐다. 주상께서 액례掖隸로 하여금 기로소 신하들을 부축하여 섬돌을 오르도록 명하여 음식을 내렸다. 주상께서 어제御製 글을 내려 기로소 영수각에 편액을 걸라고 하고 이어 기로소 신하들의 초상을 그려 그림첩 하나를 안으로 들라고 명하여 기로소의 신하들은 각각 그림첩을 나누어 가졌다. 공이 어전에 나아가 주상께 아뢰기를 “신은 지금 살아있으면서 훌륭한 선조의 밝은 덕을 보고 주상께서 지으신 글을 받들어 완상하니 비록 벼슬에 불러나 죽더라도 다시는 여한이 없겠습니다. 다음으로 작은 정성이나마 바쳐 신의 아버지와 아들이 나라의 후한 은혜를 받아 숭정崇政의 반열에 올랐으며 늘 떳떳한 기상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신의 아버지는 여러 번 벼슬을 그만둔다는 상소를 올렸으나 주상의 윤허를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평생의 한으로 남아 신에게까지 미쳤습니다. 그 뜻을 그 일을 이어 지하에 계신 아버지에게 돌아가 보은하려는 것은 또한 신의 애타는 심정입니다. 신이 늙고 병들고 귀머거리가 되어 벼슬을 그만두려고 하나 방도가 없어 지금까지 말없이 침묵할 뿐입니다. 오늘 조정에 입시하여 용안을 한 번 뵈니 다행인데다 제 개인적으로 간절함이 있어 죽음을 무릅쓰고 이 몸을 이끌고 가까이서 성상 앞에 이같이 엎디어 있으니 어찌 다시 경연經筵의 자리에 나아가기를 바라겠나이까? 이번을 기회로 감히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오니 양해를 하여 굽어 저의 작은 간절한 사직의 청을 받아들이셔서 제 아버지가 펴지 못한 뜻을 따를 수 있도록 하시옵소서!”하니 주상이 이르기를 “공이 상소를 올린 뜻이 아름답구나! 짐이 마땅히 경이 원하는 바를 따를 것이니라.”하였다. 공이 이에 머리를 조아리고 감축하였다. 주상께서 사직을 허락하는 글을 써서 교서를 내리기를 “경이 지난 날 나라를 위해 행한 일이 어려웠을 것이니 잠시 사은숙배를 하여도 좋다.”라고 하였으며 이어서 승지 홍낙성洪樂性 돌아보고 이르시기를 “승지의 집안에 봉조하가 오늘 비로소 나오게 되는구나.”라고 하였다.
* 액례掖隸 : 왕과 왕족의 명령 전달, 궐내 각 문의 출입통제 및 문단속, 궐내 각종 행사준비 등의 잡무를 담당하던 관서로 환관전용 부서인 액정서掖庭署에 딸린 사람.
* 홍낙성洪樂性, 1718~1798 :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자안子安, 호는 항재恒齋. 예조판서 상한象漢의 아들이며, 어유봉魚有鳳의 사위이자 문인이다. 형조판서, 병조판서, 좌의정 및 영의정을 지냈다.
上親製四言詩八句曰 昔於癸巳 卿父畿伯 于今庚辰 耆社入侍 幾年之間 蒼顔皓髥 特允其懇 宜謝朝請 仍以御筆書下 公進前擎受 上曰於此之時 亦善步矣 公曰 爲人臣而被此隆恩曠典 古亦未聞 豈料其於臣身親當之乎 仍感極嗚咽 上命公退休 是夜開政下批後謝恩還次 翌日次對時 上曰 洪重徵 可貴矣 其處義有終始 每思故相臣請用其人之言其所奏是矣 自是月致米肉 且命給帶率下人 公遂上箋陳謝受 敎書還家 瞻聆俱聳 公具由祭 告于貞翼公祠宇 言于家人曰 今則吾志願畢矣
주상께서 직접 사언시 8구를 지어 이르기를 “옛날 계사년(1723년) 경의 아버지 홍만조가 경기도 관찰사였네. 지금 경진년(1760년) 경이 기로소에 들었네. 몇 년 사이에 젊던 얼굴엔 흰 수염이 낫구려. 경의 간절한 뜻을 특별히 윤허하니 어버이를 받드는 영광스런 일에 감사해야 하네.”라고 곧 주상이 직접 써서 내려주니 공이 앞으로 나아가 공손히 받았다. 주상이 이때에 이르시길 “역시 공은 벼슬길에 좋은 행보를 하였구나!”하니 공이 이에 말하기를 “신하로써 이같이 융숭하고 전에 없던 은택을 받은 일은 옛날에도 없던 일입니다. 어찌 신하로써 이 은혜를 갚겠습니까?”하였다. 이에 크게 감동하여 오열을 하니 주상께서 물러가 쉬라고 명하셨다. 이날 밤 정사를 보는데 공의 상소에 주상이 내린 비답批答을 본 뒤에 사은숙배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다시 만나니 주상께서 이르시길 “홍중징은 소중한 사람이다. 의로움에 처하여서는 시작과 끝맺음이 있으며 매번 옛 일을 깊이 생각하여 상신相臣들이 그의 말과 그가 상소한 내용이 옳다고 여겨 쓰기를 청하였다.”하였다. 이 달부터 공에게 쌀과 고기를 보내고 또한 하인들을 주어 거느리게 하였다. 공이 이내 공문을 올려 쌀과 고기를 받기를 사양하였는데 주상의 교서가 공의 집으로 오니 사람들이 더욱 공을 공경하였다. 공은 고유제告由祭를 마련하여 정익공의 사당에 고하고 집안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오늘은 나의 뜻과 원하는 바를 마쳤구나.”라고 하였다.
* 어버이를 받드는 영광스런 일에 : 이는 조청朝請이라는 말인데 곧 ‘어버이를 받들어 모시다’라는 뜻이다. “언젠가는 금화의 조서를 보게 될 것이니, 탕목읍湯沐邑을 하사받고 조청을 받들 수 있으리라(會看金花詔 湯沐奉朝請).”는 소식蘇軾의 시 「송정건용送程建用」에 보인다. 『동파시집주東坡詩集註』 卷16.
杜門謝客 寓意於梅龕竹塢以送日月 惟於誕彌之辰 起㞐之班 時時扶病入叅 辛巳元朝以年滿八十 例陞崇祿階 三月始肅謝 四月又受食物衣資賜給之典 七月十九日未時以微恙考終于城西僦舍 享年八十 訃聞停朝市二日 弔祭庀葬如例 以是年十月初一日 葬于龍仁下東村內谷甲坐新卜之原 以卜兆不吉 翌年十月初八日 移葬于溫陽自隱橋貞翼公墓山左崗甲坐之原 公資禀厚重胸襟坦蕩 雖當蒼黃急處之際 憂慽拂亂之境 確然不少動泰然若無事 是以立朝行已 未嘗有經營顧瞻之意 久蹭 蹬宦途而夷然落拓色 及至致位崇顯 皆由上簡 亦出公議不藉當路之吹噓 故閱歷五十年 雌黃之論 未或到焉 毋論知與不知 皆服其恬操雅度 盖公之積於中者如此 故久而世亦皆知之也 對人言笑不設畦畛 自有和氣而其好用權數 專尙功利者不與之交 其巧於俯仰與世浮沈者不與之談 盖其恬淡之性 正大之氣 自與流俗異也 屢典州郡而産業之淸寒 無異匹士之家世襲卿宰而階庭之寂廖 殆同小官之門 其居官居家之規模 務持大體 平心恕物 不加聲色而事 皆自理 嘗謂不肖曰 吾無他長而其於司馬公平生所爲未嘗有不可向人言者或庶幾焉
공은 두문불출하며 손님을 맞지 않으며 매화와 대나무에 취미를 붙이며 세월을 보냈다. 오직 임금의 생일인 날에만 무리를 지어 어울리고 때때로 병든 몸을 이끌고 조정의 일에 참여하였다. 신사년(1761년) 설날에 만 80세에 예에 따라 종1품인 숭록대부에 올랐고 3월에 비로소 사은숙배를 하였다. 4월에 다시 먹을 것과 의복의 재료를 받는 은총을 입었다. 7월 19일 오후 1시 반에서 2시 반인 미시未時 가벼운 병으로 한양의 성 서쪽에 있는 셋집에서 돌아가셨으니 향년 80세였다. 공의 부음에 조회가 이틀간 멈추었고 위문하고 제사를 지냄에 예에 따라 제사에 쓸 물자를 나라에서 대었다. 이 해 10월 초하루에 용인 하동촌下東村 내곡內谷 동북동 방향을 등지고 앉은 좌향인 갑좌甲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자리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이듬해 10월 초파일에 온양溫陽 자은교自隱橋에 있는 정익공의 무덤 동쪽 산세山勢가 금형金形을 띤 용龍 아래에 있는 형국의 신좌申坐의 언덕으로 이장移葬하였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중후하고 품은 뜻이 대범하여 아무리 경황없고 다급한 때라도 근심이 있거나 슬프거나 소란스런 경우에도 조금의 동요도 없이 아무 일 없는 듯 태연하였다. 그렇지만 조정에 선 동안 일을 처리할 때는 곧장 앞으로 달려 나가 꺾이거나 굽히는 일이 없었다. 의정부와 중추부의 현달한 자리에 올랐으니 모두 공이 앞서 말한 대로 일을 처리함이 간략한 때문이었다. 또한 함께 의논할 일을 냄에 있어 입김을 불어 좋은 자리로 올려 줄 힘에 의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50년의 벼슬살이에 높고 넓은 식견을 구한다는 말은 없었고 아느니 모르느니 하는 말도 없었으니 모두 공의 편안한 마음 씀과 고아高雅한 풍모에 감복하였다. 아마도 공께서 마음에 품은 뜻이 이러하였기에 오래도록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리 알았다. 사람을 대할 때에는 격의 없이 웃고 이야기하였다. 공 스스로 화기를 띠고 남을 헤아리는 법을 쓰기를 좋아하였다. 오로지 공적과 이해를 따지는 이와는 사귀지 않았으며 남을 우러르고 굽어보며 영화롭게 살거나 쇠락한 이들과는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으니 아마도 이는 공의 성품이 편안하고 담백하며 매우 바른 기질 때문이니 세속의 사람들과는 다른 탓이었으리라. 여러 차례 고을을 맡아 다스렸지만 가산이 빈한한 것이 여느 선비의 집안과 다를 게 없었다. 대대로 종2품 이상의 관직에 있었으나 집안은 적막하고도 빈 듯 거의 말단 관리의 집과 같았다. 관직에 있으나 집안에 있거나 살림의 규모規模는 큰 줄거리를 견지하는 데에 힘썼으니, 공평한 마음으로 남의 처지를 헤아려 노여운 목소리와 표정으로 꾸짖지 않았고 일을 처리함에는 모두 이치대로 하였다. 일찍이 자신에 대해 말하기를, “내게 다른 장점은 없다. 사마광司馬光이 말한 ‘평생토록 남에게 말하지 못할 일을 한 적이 없다.’라고 한 것에는 혹 가까울 수도 있다.”라고 하였다.
族兄參判公重疇氏嘗謂公曰 君胸次磊落無嫵媚態 其與世齟齬 正坐於此 盖亦識公之言也 公於事親之節 一以怡愉順適爲心 少時從宦 非公故則必在兩親之側 終日娛侍 未嘗有一言一事之少拂親意 常得兩親悅 瀜瀜而洩洩 晩營小屋 稍間貞翼公所而夜則必待就睡後退還 旣退輾轉不能安枕 鷄鳴則輒使僮指進探安否於侍寢之人昧爽而起趣盥省候日以爲常 朔寧除拜之日 以道里稍遠堅欲辭免 貞翼公屢命往赴且贈詩以勉之 公和進曰 始因便養求爲郡 今爲離違 恨更多 若使在家 甘旨足縱 無榮宦 豈須嗟人之吟諷此詩者 皆知其懇篤之誠也 於兄弟友愛 天至次姊早寡特爲貞翼所撫憐而歸寧之日 遘癘忒重 渾舍移避無人救護 公不忍離捨 請于貞翼公 獨留不去親 執藥餌偹盡醫治之方 旣而不幸則哀號奔走 終始治喪旣 殯而後始出 人莫不危之而公則不少撓也
사촌형인 참판공 홍중주洪重疇가 일찍이 공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대는 마음에 품은 뜻이 우뚝하여 유순한 모습이 없으니 세상 사람들과는 어울리지 못할 듯하네.”라며 바르게 앉아 이리 말하니 아마도 공을 성품을 알고 말한 것이리라. 공이 어버이를 섬기는 절도는 어버이를 옆에서 모시며 즐겁게 해드렸고 마음을 순히 하고 어버이의 뜻에 맞추는 것이었다. 젊을 때 벼슬살이를 하며 공적인 일이 아니면 반드시 어버이 곁에 있었다. 종일 어버이를 즐겁게 해드리고 모시면서 말 한마디 하나의 일이라도 조금도 어버이의 뜻에 거스르는 일이 없었다. 늘 어버이를 즐겁게 해드리며 그 즐거움을 무르익게 하고 어버이의 즐거움이 밖으로 드러나게 하였다. 공이 나이가 들어 작은 집을 지었는데 정익공의 처소와는 조금 떨어져 있어 밤에는 반드시 아버지가 주무시기를 기다렸다가 물러 나왔으며 물러 나와서는 전전긍긍하며 편히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새벽닭이 울면 어린 종으로 하여금 가서 아버지가 편안하신지 시침侍寢한 사람에게 물어보게 하였다.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문안드리는 것을 매일 똑 고르게 하였다. 삭녕 군수에 제수되어 가던 날 길이 멀어 굳이 사직하고자 하니 정익공이 여러 번 부임하기를 명하고 시를 써주며 권하였다. 공이 이에 화답하며 나아가 말하기를 “비로소 어버이를 편히 모시려고 군수 직을 바랐는데 지금은 일이 어그러졌으니 매우 한스럽습니다. 만일 제가 집에 있다면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드릴 수 있는데 말입니다. 영예로운 관직도 아닌데 어찌 사람들이 이 시詩를 외워 탄식케 하는지요?”라고 하였다. 모두가 공의 간절함과 독실한 마음을 알았다. 형제 간에는 우애가 있었다. 작은 누님이 일찍 과부가 되자 특별히 어버이의 마음을 생각해서 보살펴 주었다. 누님이 아예 친정으로 돌아왔을 때에 역병에 걸려 증세가 매우 위중하였으므로 집안 식구들을 피해 사람이 없는 다른 곳으로 가서 누님을 구호하였다. 공은 차마 누님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정익공에게 말씀드리고 곁을 떠나지 않고 홀로 남아 몸소 누님의 약시중을 들며 치료를 다했다. 그렇지만 이내 불행히 목숨을 잃으니, 치상治喪의 예를 다하고 염을 마친 뒤에 비로소 나왔는데, 공은 위엄이 바르고 조금도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 홍중주洪重疇, 1672~1749 :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도진道陳이다. 부친은 예조판서 홍만용洪萬容이다. 형은 홍중기洪重箕‧홍중범洪重範‧홍중연洪重衍‧홍중복洪重福이다. 관직은 양주목사楊州牧使‧교하군수交河郡守‧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우윤右尹‧형조참판刑曹參判을 역임하였다.
* 그 즐거움을 무르익게 하고 : 이는 융융기락瀜瀜其樂을 말한다. 정鄭나라 장공莊公이 반란을 일으켰던 동생 공숙단共叔段과 공모하였던 어머니 강씨姜氏를 성영城潁에 가두고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가, 영고숙潁考叔의 진언進言으로 땅속의 굴에서 강씨를 만나고 나서 이런 말로 그 기쁨을 나누었다는 뜻이다. 『춘추좌씨전』 「은공隱公」 원년元年. 이 때 장공이 노래하기를 “대수 안에 그 즐거움이 화락하네(大隧之中 其樂也融融).”라고 하였다.
* 어버이의 즐거움이 밖으로 드러나게 하였다 : 이는 설설기락洩洩其樂을 말한다. 이는 장공이 노래한데 대한 장공의 어머니 강씨가 화답한 내용으로 그 어머니가 나와서 노래하기를 “대수 밖에는 그 즐거움이 펴지도다(大隧之外 其樂也洩洩).”라고 한 것이다.
至於奉先思孝之道 老而彌篤 每當喪餘之日 不計筋力 親自將事而凡於籩豆之實 預先指揮家人 一一照管 必擇其美而旨者薦之 忌祀輪行之次若在 在鄕子孫之家則每慮其不能及期 輒先致書勤飾 俾勿違誤 仍又極力助需 有足以稱愜情禮 然後始安於心
선조에 대한 효도는 나이가 들수록 더욱 독실하였다. 매번 삼 년 상을 마친 뒤 기제忌祭 때에는 대그릇과 나무 그릇으로 된 제기를 진설하는 등의 제사에 관한 일에 관해서는 힘쓰며 친히 제사에 올릴 물품에 관여하여 집안사람들을 지휘해 가며 일일이 점검하고 살펴서 물품이 좋고 맛난 것을 골라 제사상에 올렸다. 기제를 번갈아가며 할 때는 어버이가 곁에 계신 듯 모시고 고향에 자손의 집에 있을 때 늘 제사 날짜를 맞추지 못할까 염려하였다. 번번이 먼저 제사 준비에 관한 글을 올리고 상을 돌보고 미비한 점이 없게 하였다. 이에 온힘을 다해 물품을 구하여 본심으로 예를 다해야 기분이 좋아 비로소 안심을 하였다.
爲文婉曲紆餘 絶無艱難辛苦態 詩亦平淡圓暢 惟以情到理勝爲事 盖公文體得於歐陽子者爲多 晩年硏精於易學微辭奧旨 靡不思索而發揮之所著有玩樂編三卷則盖取傳義要訣以爲常目之資者也 窺斑錄一卷則間以自得之妙 隨筆於涵玩之際者也 經史證易三卷則以彖象爲綱 經史爲目 包括義類對同戡合以見易 道之散在萬事萬物者也 左易叅證二卷則自爲小識曰 易之爲書 懸空駕說廣大 悉偹不可爲典要者也 其言皆非見今所有之事 而預將天下後世無窮事變包罩在這裏及其事物之來 應有若燭照數計 又曰聖茟如畵袞鉞隨加而叅之以憂患 後世之旨則自有隨事發見者存焉 今之所證 特取明白易見者 堇爲什之一耳 由是而廣之 則將見龍繇之辭麟經之旨 同歸一轍云云 又有史評二卷詩文若干卷藏于家
문장은 완곡하고 넉넉하여 고심해 가며 어렵게 지은 티를 보이지 않았고 시문 또한 평이하고도 담백하며 원숙한 맛을 내었으니 오로지 정情이 빈틈없이 찬찬히 내면을 이루면서도 이理를 더욱 드러내는 것을 일삼았다. 공의 문체는 구양자歐陽子, 구양수歐陽脩로부터 얻은 것이 많았다. 만년에는 『주역』의 숨어있는 내용과 오묘한 뜻에 대한 연구가 정밀하여 사색하며 그 뜻을 드러낸 저술로 『완락편玩樂編』 3권이 있는데 이는 『주역』의 「계사전」의 요점을 늘 눈여겨 두어 이를 자료로 삼으려 한 것이다. 『규반록窺斑錄』 1권은 공이 『주역』에서 절로 깊이 깨달은 묘리妙理를 붓 가는대로 적은 것이다. 『경사증역經史證易』 2권은 단상彖象을 벼리로 삼고 경서와 역사를 목目으로 삼고 뜻을 포괄하여 부합하게 함으로써 『주역』의 도는 만사와 만물에 흩어져 있다는 것을 보게 함이었다. 『좌역참증左易參證』 2권은 스스로 조금 알게 된 것을 말하기를 “역易이 글이 된 것은 허공에 매달린 듯 터무니없는 말을 얽어서 크게 넓힌 것이니 모두 불변의 법칙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지금 보이는 모든 것이 가질 수 게 아니다, 라는 것이니 장차 천하의 후세 사람이나 사물이 끊임없는 변화 속에 들어서게 되는 와중에 사물이 생겨나는 게 촛불에 비추어 헤아릴 수 있음과 같다는 것이다.” 또 말하기를 “성인의 글은 그림과 같은데 곤월袞鉞이 따르니 여기에 관여를 하면 우환이 따른다. 후세에 깊고 심원한 뜻을 지니고 보면 사물의 정황을 따라 나타날 것이다. 지금 증명해보니 특히 명백하여 쉽게 볼 수 있는 게 겨우 10분의 1이다. 이로써 미루어 장차 괘사卦辭와 『춘추春秋』에서 그 뜻을 볼 수 있으니 하나로 귀결된다.”라고 하였다. 또 『사평史評』 2권과 시문詩文 몇 권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 불변의 법칙이 될 수 없다 :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 8장에 “역易은 오르내림에 일정함이 없고, 강양剛陽과 유음柔陰이 서로 바뀌어, 전요典要로 삼을 수 없고, 오직 변화하여 나아갈 뿐이다(上下无常 剛柔相易 不可以典要 唯變所適).”라는 말이다.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
* 성인의 글은 그림과 같은데 곤월袞鉞이 따르니 : 공자가 실제로 정치할 수 없게 되자 『춘추春秋』를 지었는데, 한 글자로 드러낸 것이 임금이 입은 곤룡포袞보다 영광스럽고 한 자로 깎은 것이 도끼鉞보다 무섭다 하였다.
配東萊鄭氏 學生諱琱之女 通德郞諱羽祥之孫 通政郡守諱何之曾孫 懶庵相國彦信之後也 生於己未八月十三日 先公十九年而終壽六十五 追封貞敬夫人 生男女各一 純輔生員 女適士人睦聖履 純輔生三男一女 男長桂漢生二女幼 次梯漢有文行早夭 取再從兄授漢之第三子樂叟爲後 次旭漢有男女幼 女適士人李趾漢生一子百崧 百崧生一子幼 睦聖履生一男一女 男祖興生男女幼 女適士人姜允謙生男女幼 內外孫曾玄凡若干人 窃念先人平日言行大略如右而若其隱德幽光 終無以形容 萬一亦不敢一毫飾美 自犯禮經之所恥 倘蒙大君子立言 以偹太常氏採擇獲蒙節惠之典則幽明感泣爲當 如何不肖孤洪純輔泣血拜手奉獻于領議政閤下
부인 동래 정씨東萊鄭氏는 학생學生 조琱의 따님이며 통덕랑 우상羽祥의 손녀이고 통정대부 하何의 증손녀요, 나암懶菴 상국相國 언신彥信의 후손이다. 기미년(1679년) 8월 13일에 태어나 계해년(1743년, 영조19) 4월 6일에 65세에 별세하였다. 정경부인에 추봉追封되었다. 남녀 각 1명을 낳았으며 순보純輔는 생원을 지냈고 딸은 사인士人 목성리睦聖履에게 시집갔다. 순보는 3남 1녀를 낳았다. 장남 계한桂漢은 딸 둘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차남 제한梯漢은 문장과 행실이 있었으나 요절하여 재종형再從兄 수한授漢의 셋째 아들 낙수樂叟로 후사를 이었다. 막내 욱한旭漢은 아들과 딸을 두었는데 어리다. 딸은 사인 이지한李趾漢에게 시집가서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이백숭李百崧이다. 백숭은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어리다. 목성리는 1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목조흥睦祖興이다. 목조흥은 딸 하나를 낳았는데 어리다. 딸은 사인 강윤겸姜允謙에게 시집갔다. 강윤겸은 남녀 둘을 낳았는데 어리다. 내외손·증·현손 몇 명이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평소 공의 언행이 대략 이와 같으며 그 숨은덕이 그윽이 빛나는 듯하다. 끝내 공의 덕을 형용하지 못하지만 만 분지 일이라도 또는 감히 터럭만큼이라도 아름답게 치레를 못하겠다. 예법을 범하는 부끄러움만 인다. 느닷없이 대군자인 공이 말한 바를 들어 태상씨太常氏, 봉상시奉常寺에 올려 절혜지전節惠之典을 받으면 이승과 저승의 사람들도 울음을 울 것이다. 어찌 불초하며 어버이를 잃은 홍순보洪純輔가 피눈물을 흘리며 영의정 합하께 인사를 하며 봉헌奉獻을 하지 않을 수 있으리까!
* 정언신鄭彥信, 1527~1591 : 정언신이 기축년 정여립의 옥사에 억울하게 죽음.
* 절혜지전節惠之典 : 정2품 이상을 지낸 인물의 사후死後에 생존 시의 행적을 바탕으로 하여 임금으로부터 받게 되는 시호諡號를 말한다. 역명지전易名之典이라고도 한다.
「良孝公墓誌銘」
양효공 묘지명
* 양효良孝 : ‘양良’은 ‘따뜻하고 어질어 좋아할 만하고 즐거워할 만하다(溫良好樂曰良)’는 뜻이고, ‘효孝’는 ‘자혜로워 어버이를 사랑하다(慈惠愛親曰孝)’라는 뜻이다. 『일주서逸周書』 「시법諡法」.
* 정익貞翼 : 참고로 정익공의 시호를 여기에 풀어둔다. ‘貞’은 ‘크게 사려하여 능히 다스림(大慮克就)’이란 뜻이며, ‘翼’은 ‘사려가 깊고 뜻이 원대함(思慮深遠)’이란 뜻이다. 『일주서逸周書』 「시법諡法」.
崇祿大夫行工曹判書兼五衛都摠府都摠管致仕奉朝賀贈諡良孝洪公墓誌銘 幷序
숭록대부행공조판서겸오위도총부도총관치사봉조하증시양효홍공묘지명 병서
聖上卽位之三十八年庚辰正月丙寅 上出御明政殿月臺 召見耆社諸臣 宣饌訖 前判書洪公進伏下前曰 老臣不死 獲瞻耿光 今雖退塡溝壑 更無餘憾 臣之父子受國厚恩 致位崇班 常懷懍懍之憂 惟先臣休致之請 終爲未遂之恨 臣若乞骸以退則亦可以卒 先臣志事而歸報於地下矣 上曰 意甚媺矣 予當時循卿願 遂命致仕奉朝賀 親製四言詩八句以御筆書下 公進前擎受 感極嗚咽 仍命月致米肉 公上箋陳謝 先是上以貞翼公受知明陵未及大用 累下敎於筵中 不數年擢公上卿 至是又許其休致 俾述遺志 殊恩異渥曠絶臣潾 是豈無所以而然哉 昔宋臣王素以文正季子受知仁宗 又以工書致仕 今公遭遇與之相類 亦安知聖意之隆 摯不出於追念 世舊別有相感而然耶 盛世君臣之會 可以匹休於百世之下 嗚呼 休哉
성상(영조)이 즉위한 지 38년째인 경진년(1760년) 정월 병인 날에 주상께서 직접 명정전明政殿 월대月臺에서 기로소의 모든 신하들을 불러 모아 음식을 내렸다. 전 공조판서 홍공이 주상 앞에 나아가 엎드려 말하기를 “노신이 죽지 않고 우러러 훌륭한 선조의 덕을 받았으니 지금 비록 물러나 죽어도 다시는 여한이 없겠습니다. 신의 부자父子가 나라의 후한 은덕을 받아 존숭 받는 반열에 올랐으니 늘 위태위태한 근심을 품었습니다. 오직 제 아버지는 사직을 청하였으나 끝내 이를 이루지 못한 한이 있었습니다. 신이 사직을 청하여 물러나 또한 생을 마감할 수 있다면 제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저승에 돌아가 보답하고자 합니다.”하였다. 주상이 말씀하시기를 “공의 뜻이 매우 아름답구나. 짐이 때에 맞춰 공이 원하는 바를 따라 벼슬에서 물러나 봉조하를 삼을 것을 명하노라.”하였다. 주상이 직접 사언시 8구를 지어 어필御筆로 써서 내려주시니 공이 앞으로 나아가 공손히 받아 매우 감격하며 오열을 하였다. 이어 달마다 쌀과 고기를 내려주기를 명하였는데 공이 이에 공문을 올려 사양하였다. 이보다 앞서 정익공은 숙종이 알아주었으나 크게 등용되지는 못하였지만 경연 중에 여러 번 하교를 하여 몇 년이 안 되어 정익공을 상경上卿으로 발탁하였다. 이에 이르러 또 사직함을 허락하였으니 더하여 정익공이 남긴 뜻을 적는다. 주상의 특별하고도 유례가 없는 은총에 신은 마음이 맑고 밝으니 이 어찌 까닭이 없겠는가? 옛날 송나라의 신하 왕소王素는 문정계자文正季子로 인종仁宗에게 인정을 받았다. 또 공조판서의 직을 물러난다고 하니 오늘 공은 왕소와 같은 이를 만나는 것이니 어찌 성상의 큰 뜻을 알아 공경히 추념함을 드러내지 않고 대대로 오래된 각별한 감정임을 알겠는가? 태평성대에 임금과 신하의 만남은 백세百世 이후에도 훌륭한 짝이다. 아아, 훌륭하도다!
* 왕소王素, 417~471 : 송나라 인종 때 사람으로 청렴하고 검소하였으며 성품이 꾸밈이 없었다. 곧은 지조와 담박한 마음으로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 이해를 다투지 않았고, 농사짓는 가운데서 즐거움을 찾았다고 한다. 벼슬은 태자사인太子舍人에 이르렀다.
公諱重徵字錫予號梧泉 我洪籍豐山始祖諱之慶麗朝魁文科官國學直學 其後軒冕蟬聯 高祖諱履祥大司憲贈領議政號慕堂以經術德行爲穆陵名臣 曾祖諱탁通政府使贈左參贊 祖諡柱天縣監贈左贊成 考諱萬朝判敦寧府使贈領議政諡貞翼號晩退堂世稱淸德完名妣安東權氏贈吏議瑱之女吉城尉大任之孫以壬戌十二月生 公幼而儁偉器度異凡兒 貞翼公常曰 大吾門者 必此兒也
공의 휘諱는 중징重徵이요 자는 석여錫予이며 호는 오천梧泉이다. 우리 풍산 홍문의 시조 휘 지경之慶은 고려조에 문과 장원으로 벼슬은 국학직학國學直學을 지냈으며, 그 뒤에 조정의 관원을 잇달아 배출하였다. 고조 휘 이상履祥은 대사헌大司憲으로 영의정으로 추봉되었고 호는 모당慕堂으로 경서의 학문으로 선조宣祖때 명신이었다. 증조 휘 탁𩆸은 통정부사通政府使로 사후에 좌참찬左參贊으로 추봉되었고, 할아버지 휘 주천柱天은 현감으로 사후에 좌찬성左贊成으로 추봉되었다. 아버지 휘 만조萬朝는 판돈령부사判敦寧府使를 지냈고 사후에 영의정으로 시호는 정익공貞翼으로 호는 만퇴당晩退堂이니 세상 사람에게 맑은 덕으로 칭송 받았다. 어머니는 안동 권씨로 이조참의로 추봉된 진瑱의 따님이며 길성위吉城尉 대임大任의 후손이다. 임술년(1682년) 12월 태어난 공은 어려서 용모가 뛰어나고 헌걸차 보통의 아이들과는 달랐으니 정익공은 늘 말하기를 “우리 집안을 크게 일으킬 이는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自少立心行己一於誠實 無一毫虛僞 常以司馬公平生所爲未嘗有不可 對人言者爲法 辛卯登進士 癸巳擢增廣甲科例付直長 乙未陞典籍通持憲 內則騎郞知製敎掌令司成司僕正宗簿正掌樂正刑議兵議承旨右尹副摠管刑曹參判戶曹參判知中樞工曹判書入耆社外則龍仁朔寧順天濟州江陵鳳山 掌令時當戊申逆變 自鄕奔問疏陳設防制治之策營鎭疎虞之弊 上嘉納之 亂稍平 上下哀痛 詔公疏論良役變通之宜 請今朝臣會議朝堂 如天章故事 因請擇守令嚴選法 又曰 天理人欲之分 國家存亡之機 無一本於殿下之一心 宮房折受之罷 諸道物産之減 次第命下 是心之發 卽天理之所發也 願殿下恒持此心 擴而充之 勿謂寇亂之已平生 民之粗集而動靜施措一裁以義理則古所謂殷憂啓聖 多難興邦 此其機也 責勉君德 言多激切 上優批嘉獎 公夙負儁望 朝夕騰顯而剛方 自持不與世推移爲當路者 所忌 故榮途華貫一不及焉
어려서부터 마음가짐을 오롯이 하고 몸을 단속하기를 진실하고 헛되이 하지 않아 한 터럭도 허망하거나 거짓이 없었으니 늘 사마광司馬光이 말한 것처럼 ‘평생토록 남에게 말하지 못할 일을 한 적이 없다.’라고 하여 사람들에게 말하여 모범이 되었다. 신묘년(1711년)에 진사에 급제하고 계사년(1713년)에 증광시增廣試 갑과에 등제하여 직장直長이 주어졌다. 을미년(1715년)에 전적典籍에 올라 내직으로는 지평持平·병조의 낭청騎郞·지제교知製敎·장령掌令·사성司成·사복정司僕正·종부정宗簿正·장악정掌樂正·형조참의刑議·병조참의兵議·승지承旨·우윤右尹·부총관副摠管·형조참판刑曹參判·호조참판戶曹參判·지중추知中樞·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내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외직으로는 용인·삭녕·순천·제주·강릉·봉산 등지의 수령을 지냈다. 장령掌令으로 있을 때인 1728년 이인좌의 난인 ‘무신역변戊申逆變’을 맞아 시골에서 달려가 성상의 문후를 여쭙는 상소를 올리며 역적의 무리를 막아 제압하여 다스리는 계책과 군영과 군진의 방어가 소홀한 폐단을 지적하여 말하니 주상이 가상히 여겨 이를 받아들였다. 난이 조금은 평정되니 상하의 사람들이 애통해 하였다. 주상이 공의 상소에 조서를 내려 양역良役을 융통성 있게 하는 방안을 논의케 하니 공이 오늘 아침 신하들을 조정에 모이기를 청하여 하늘이 내린 문장처럼 달변으로 의논하였다. 이로써 수령을 엄정하게 선출하는 법을 세우길 청하였다. 또 말하기를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을 구분하는 일은 나라의 존망存亡의 기틀이니 전하의 한 마음에 하나의 근본을 둔 게 아닙니다. 임금으로부터 땅이나 논밭의 넓이에 따라 매기던 곳에서 나온 세금을 자기 몫으로 잘라 받는 것折受을 없애고 각 도에서 올리는 진상품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을 차례차례 하도록 어명을 내리십시오. 이러한 마음이 이는 것은 곧 천리가 이는 것이니 원컨대 전하께서는 늘 이러한 마음을 지니소서. 더 부연하여 말씀드리면 역적의 무리들이 일으킨 난이 이미 평정되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백성이 사방에서 모이면 그 움직임을 사람으로서 지켜야할 도리로써 한 번에 마무리 지어야 하니 옛날에 나라가 혼미하거나 밝은 시대를 맞거나 많은 어려움이 있거나 나라를 흥하게 함은 오늘에 달려 있으니 이는 곧 나라를 굳건히 하는 기틀이 되는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이에 힘쓰소서! 주상께서 덕을 쌓아야 한다는 게 저의 간절한 심정입니다.”라고 하였다. 주상께서 공의 상소에 가상하다는 비답을 내려 장려하였다, 공은 일찍부터 뛰어난 인물이어서 조석으로 벼슬길에 오르기를 바랐으나 성품이 강직하고 방정하여 스스로 세상과 어울리지 않고자 함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 기피를 하였으니 영화榮華가 공에게 미치지 않았다.
* 하늘이 내린 문장처럼 : “공은 옛날에 용을 타고 백운의 제향帝鄕에 노닐면서, 손으로 은하수를 퍼 담아 하늘의 문장을 분담했다(公昔騎龍白雲鄕 手抉雲漢分天章).”라고 하여 한유韓愈의 문장을 기렸다. 소식蘇軾이 지은 「조주한문공묘비潮州韓文公廟碑」.
公議莫不嗟惜而公則泊然不以爲芥 庚戌自順天解歸 卜居溫陽先墓下 書史自娛爲終老計 公居郡 輒有來暮之誦 在耽羅多異政 至於浙江漂人 亦皆感歎頌德而服公淸操 周年治化大行 御史褒聞大臣薦公才諝 請召用 上曰 予見繡啓 已知其如此矣 秋遆歸中流遇風 船幾危 舟人服栗而公夷然端坐 若在齋閣 人比之呂正惠之檣折讀書 己巳左相趙顯命筵白吳光運洪景輔 死後宜拔其自中 可爲標準者別爲擢用 上問 誰也 相臣對曰 天鑑想已知其人矣 上曰 然則故判書洪某之子也 吏判鄭羽良 亦稱其人甚忠實 秋上親政擢爲亞尹
조정에서의 신하들 간의 공의公議는 아쉬움과 탄식을 자아냈고 공은 무심해져 지푸라기라도 잡을 수 없는 처지였다. 경술년(1730년) 순천 부사에서 돌아와 온양의 정익공 산소 아래에 터를 잡고 경서와 역사서를 즐겨 읽으며 노년을 마치려고 하였다. 공이 온양에 있을 때 문득 내모來暮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제주도에 있을 때는 괴이한 정사가 있었으니 청나라 상선이 좌초되어 표류하여 온 상인들이 이르렀는데 또한 이들 모두가 공의 덕에 감탄하여 칭송하였고 공의 맑은 지조에 감복하였다. 1년 사이에 백성을 다스려 교화함이 크게 행해지니 어사御史 가 이를 기리고 조정의 대신들이 공의 재주와 지혜를 보아 천거하여 쓰기를 청하니 주상이 말씀하시기를 “짐이 어사의 논계論啓를 보니 이러한 줄 알았노라.”라고 하였다. 이 해 가을에 제주목사에서 물러나 돌아오던 중 태풍을 만나 배가 기울 지경이었는데 뱃사람들은 두려워 떠는데 공은 마음 편히 다소곳이 앉아 있는 게 집안에 있는 듯하였다. 사람들은 이를 여정혜呂正惠가 돛대가 부러졌는데도 글을 읽은 것에 견주었다. 기사년(1749년) 좌상左相 조현명趙顯命이 경연에서 오광운吳光運과 홍경보洪景輔에게 사후에 마땅히 그 가운데 표준이 될 만한 사람이 있으니 각별히 발탁하여 쓰라고 하였다. 주상께서 묻기를 “누구냐?”라고 하니 상신相臣들이 답하기를 “주상께서는 이미 그 사람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하니 주상이 말씀하시기를 “그렇다면 예전의 판서 홍만조의 아들이구나.”라고 하였다. 이조판서 정우량鄭羽良 또한 그 사람은 매우 충실忠實하다고 칭찬하였다. 가을에 주상이 친히 곧 공을 발탁하여 한성부의 종2품인 우윤右尹으로 삼았다.
* 내모來暮의 노랫소리 : 백성들이 어진 정치에 감복하여 부르는 노래이다. 동한東漢의 염범廉范이 촉군 태수蜀郡太守로 부임하여, 산에 불을 놓아 화전을 일구는 것과 야간 통행금지 등의 옛 법규를 고쳐 백성을 편케 하고자하자 백성들이 “우리 염숙도여 왜 이리 늦게 오셨는가. 불을 금하지 않으시어 백성 편하게 되었나니, 평생토록 저고리 하나 없다가 지금은 바지가 다섯 벌이라네(廉叔度 來何暮 不禁火 民安作 平生無襦今五袴).”라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고 한다. 『후한서後漢書』 卷31 「염범열전廉范列傳」.
自是上深知公忠藎可仗不次超遷 五年中至正卿 甲戌特拜工曹判書 引見璿源殿役所宣醞 以公兩世陪兩朝入耆社 聖敎眷眷 別賜二酌以侈之 公不勝感泣陳書小朝以申謝意兼辭敦匠錫馬之典 冬差七陵碑役都監堂上役訖 陞正憲階 丙子以慈聖七旬 推恩加崇政階 仍命圖像作帖 藏于靈壽閣西樓 亦異數也
이로부터 주상께서는 공의 충성심을 알아 의지할 만 하였기에 관등을 뛰어넘어 공을 발탁하였다. 5년 안에 판서와 한성부의 장관인 판윤에 해당하는 정경正卿에 이르렀다. 갑술년(1754년)에 특별히 공조판서를 제수하였고 선원전璿源殿을 개수하는 자리에서 직접 공을 만나 음식을 내렸다. 이로써 공의 아버지와 공은 숙종과 영조를 모시는 기로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주상이 잘 보살피라는 교서를 내리고 특별히 술 두 잔을 가득 채워 내리니 공은 이를 이기지 못하여 눈물을 흘리며 소조小朝, 영조를 말함에게 글을 올려 “신은 고마움을 표하며 아울러 장인匠人들이 공들여 만든 물품을 임금이 내려주는 은전은 사양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겨울에 7능의 비석을 개수하는 일에 차출되어 도감당상都監堂上을 맡아 일을 마친 뒤 정2품인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다. 병자년(1756년)에 인원왕후의 칠순에 주상의 은전이 베풀어져 종1품인 숭정대부崇政大夫로 품계가 높여졌으며, 이어 공의 초상을 그려 그림첩을 만들고 이를 영수각靈壽閣 서루西樓에 보관케 하였으니 또한 남들이 누리지 못한 운세였다.
戊寅冬引見 上讀大學第一章使陳文義曰 此亦乞言之意也 公釋明明德三字曰 本明之德又明之從 古聖賢皆從這裏用工 上嘉納 庚申春 承命入對陳懇 有許休之命 翌日上謂筵臣曰 洪某可貴 其處義有終始矣 時公精力尙强 上眷日隆而卽日乞骸 不復低佪 可見公執手之嚴不以衰老而或改 辛巳以年滿八十 階崇祿 七月十九日考終于正寢 訃聞停朝市二日 賜弔祭庀葬如例 初葬龍仁地 移定于溫陽自隱橋貞翼公墓東甲坐之原後 贈諡良孝公 公天資厚重識量弘深 群居寡言 笑喜怒不形 氣像磊落 雖當憂慼拂亂之境 泰然若無事 立朝遇事毅然 守正不以利害爲趍捨 性好廉儉 累典州郡 家無甔石 或至屢空而處之宴如孝友篤
무인년(1758년) 겨울에 주상의 부름에 가니 주상이 『대학』 제1장을 읽고서 그 뜻을 공에게 말하라고 하면서 “이 또한 좋은 의견을 들으라는 뜻이다.”라고 하니 공이 『대학』의 명명덕明明德이란 세 글자를 풀기를 “본명지덕本明之德이 있는데 또 이를 밝히어 따르는데 옛날의 성현들이 모두 이를 자세히 살펴 따랐습니다.”라고 하였다. 주상께서 이를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경신년(1740년) 봄에 주상의 명을 받들어 입대하여 공의 간절함을 장계로 올리니 주상께서 이를 허락한다는 명을 내렸다. 다음 날 주상께서 경연에 참석한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홍모는 소중한 사람이다 의義를 행함에 처음과 끝이 분명하다.”라고 하였다. 이때 공은 여전히 근력과 기운이 굳세어서 주상께서 공을 보살핌이 날로 극진하고 바로 그날 공이 사직을 하려하니 되돌릴 수 없었다. 공의 고집이 엄정하여 몸이 약하고 늙어도 바꿀 수 없었다. 신사년(1761년) 공의 나이 만 80세에 종1품인 숭록대부崇祿大夫로 품계에 올랐다. 이 해 7월 19일 공은 거처하는 방에서 돌아가시니 부음을 듣고 조정의 조회가 2일이나 멈추었다. 이에 나라에서 공을 기리는 제사를 받들고 장례에 소모되는 물자를 예에 따라 내렸다. 처음에는 용인 땅에 장사지냈으나 나중에 온양의 정익공 묘의 동쪽 동북동 방향을 등지고 앉은 좌향인 갑좌甲坐 언덕 뒤에 이장을 하였다, 양효공良孝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중후하였으며 견식이 매우 깊고 넓었다. 무리들과 있을 때는 말수가 적었고 웃고 즐거움과 노여움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으며, 기상이 우뚝하여 비록 근심과 슬픔에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도 아무 일 없는 듯 태연하였다. 조정의 일은 굳센 의지로 처리하였고 바름을 지켜 이해관계를 따져서 나서거나 물러나지를 않았다. 성품은 청렴함과 검소함을 좋아하여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냈으면서도 집안엔 한 두 섬의 곡식도 없었다. 혹 집에 자주 쌀독이 비더라도 이를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를 지극히 돈독하게 하는 편안한 것으로 여겼다.
至事貞翼公怡愉侍側 父子間許爲知己 甚愛諸兄 有春津之風 寡妹嘗遘癘 公操湯藥不去 竟不幸則哀號治喪旣殯而出人以爲難 世之知公者 或高其行誼 或推其文學 或多其政事 若其忠義之性 堅確之操可以臨大節而不可奪者 則當求之古人世未必盡知之 文學汪洋 有氣力一時以文名者 皆自以爲不及 晩喜廬陵 紆餘婉曲 硏精易學 所著有玩樂編三卷窺斑錄一卷經史證易二卷左易叅證二卷 皆發揮微奧 讀之可以見公之學有本源 又有史評二卷詩文若干卷藏于家
정익공을 지극한 정성으로 곁에서 모시면서 기쁘고 즐겁게 해드렸다. 부자간에 서로 벗을 삼는 것을 허락하고 형들을 매우 아끼어 형제간에 우애가 매우 좋았다. 과부가 된 작은 누님이 일찍이 역병에 거려 공이 약을 다려 간호하며 곁을 떠나지 않았으나 불행히도 죽어 상을 치르고 염을 한 뒤 밖으로 나오니 사람들이 공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세상에 공을 아는 이들 중에 어떤 사람은 공의 바른 행동을 높이고, 어떤 사람은 공의 문장과 학문을 추켜올리고, 어떤 사람은 공의 나랏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도량이 넓다고 하였다. 충의忠義의 성정을 말할 것 같으면 확고부동한 지조는 큰일을 당해도 절개를 빼앗을 수 없는 사람이니 옛사람에게서나 구할수 있을지 세상 사람들은 이를 잘 모를 것이다. 글과 학문은 바다와 같이 넓고 깊어 한 번에 힘을 써서 문명文名을 날렸으니 모두 공에 미치지 못하였다. 만년에는 여릉廬陵을 좋아하여 문장의 내용이 넉넉하면서도 완곡하였다. 『주역』을 정밀히 연구하여 펴낸 글이 『완락편玩樂編』 3권·『규반록窺斑錄』 1권·『경사증역經史證易』 2권·『좌역참증左易叅證』 2권이 있는데 모두 『주역』의 오묘한 이치를 드러내어 읽어보면 공의 학문의 근본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사평史評』 2권이 있으며 시문을 모은 약간의 책이 집안에 보관되어 있다.
* 형제간에 우애가 매우 좋았다 : 춘진春津을 이른다. 또는 춘진椿津으로도 쓴다. 남북조 시대 후위後魏의 양춘楊椿과 양진楊津 형제를 이르는 말인데, 두 형제는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양진이 자사刺史로 있을 때 사시사철 좋은 음식이 있으면 매번 서울에 있는 형인 양춘에게 사람을 통해 음식을 보냈으며 만약 보내지 못했으면 먼저 입에 넣지 않았다고 한다. 『북사北史』 卷41 「양파열전楊播列傳」.
* 여릉廬陵 : 여릉은 구양수歐陽脩, 1007~1072를 말한다. 자는 영숙永叔, 호는 취옹醉翁 또는 육일거사六一居士,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길주吉州 여릉廬陵 사람이다. 한유韓愈에게 깊이 영향을 받았으며 매요신梅堯臣과 문장으로 천하에 이름이 났다. 저서에 『집고록集古錄』이 있다.
配東萊鄭氏學生琱之女右議政彦信之後也 婦德甚偹 事舅姑以孝 相君子以淸儉 先公十九年 卒於癸亥四月初六日 追封貞敬夫人 初葬溫陽梧村 後移祔公墓左 男純輔生員魯城縣監 女適士人睦聖履 孫男克浩生員文科叅議生一女幼 梯漢早卒 取再從兄授漢之子羲一爲後 旭浩蔭戶曹參判生三子一女幼 孫女適李趾漢生一子基崧文科翰林 睦聖履子祖興女姜允謙 縣監君以重一於羣第中事公最久 稔知事行屬以誌幽之文 不敢辭謹叙而系以銘曰
부인은 동래 정씨 학생學生 조琱의 따님이며 우의정을 지낸 언신彦信의 후손이다. 부덕婦德을 온전히 갖추어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효로서 섬기고 공을 맑고도 검소함으로 도왔다. 공보다 19년 먼저 계해년(1743년) 4월 초엿새에 가셨다.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추봉되어 처음엔 온양의 오촌梧村에 장사지냈으나 뒤에 공의 묘 왼쪽에 옮겨 합장하였다. 아들 순보純輔는 생원生員으로 노성현감魯城縣監, 충남 논산 지역을 지냈고, 따님은 사인士人 목성리睦聖履에게 시집을 갔고, 손자 극호克浩는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참의를 지냈으며 따님이 있으나 어렸다. 제한梯漢은 어려서 죽어 재종형 수한授漢의 아들 희일羲一을 입양하여 후사를 이었다. 욱호旭浩는 음직蔭職으로 호조참판이 되고 3남 1녀를 두었으나 어리고 손녀는 이지한李趾漢에게 시집을 가서 아들 하나를 낳으니 기숭基崧인데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을 지냈다, 목성리睦聖履의 아들 조흥祖興의 딸은 강윤겸姜允謙에게 시집을 갔다. 현감군縣監君, 홍순보이 중일重一을 여럿 중에 공을 제일 오래 모셨다고 하였다. 지사 임기 1년에 떠나갈 즈음에 묘지명을 써달라고 하니 사양할 수 없어 삼가 지어 공의 뜻과 업적을 묘지명에 남긴다.
* 정언신鄭彦信, 1527~1591 : 자는 입부立夫, 호는 나암懶庵이다. 우의정을 지냈다. 1589년 정여립의 옥사 때 갑산에 유배되어 그 곳에서 죽었다. 1599년에 복관이 되었다.
猗昔貞翼 邦之楨 公濟厥美振顯聲 學博材鉅器又宏 而阨于時淹晉程 全我素履歸于耕 亢志陶陶遠利名 實德彰外輿望傾 相君曰都世忠貞 躋之上卿我后明 臣老請骸述先章 王曰 媺哉 予其成有爛雲章垂百齡 諡在太常 像耆英 維古賢儁困乃亨 有如不信考斯銘
三從弟嘉善大夫漢城府右尹兼同知義禁府事 重一撰
아, 옛날 정익공貞翼公이 나라의 기둥이었던 것처럼! 양효공은 명성을 아름답게 널리 드러내어 세상에 떨치었고 널리 배운 큰 인재로 도량이 넓었네. 당시에 나라에 어려움이 닥쳐도 진정晉程에 머물렀네. 평소에도 자신을 온전히 하여 전원으로 돌아갔네. 높은 뜻 도도하여 이해와 명성을 멀리하고 참으로 덕성을 밖으로 드러내어 백성이 우러렀네. 임금을 도와 말하기를 “한낱 마음을 다하고 곧아야 한다.”라고 하였네. 상경上卿의 자리에 오르니 나의 후손들이 밝게 되나 늙은 신하가 먼저 사직을 청하는 간략한 상소를 올리니 주상이 이르시길 “공의 뜻이 아름답구나! 짐이 찬란한 빛을 받은 구름을 드리워 백세까지 살게 하리라.” 하였네. 봉상시奉常寺를 통해 시호를 내리고 기로소의 영수각에 공의 초상을 그려 기렸네. 옛날의 어질고 빼어난 이들은 처음엔 곤궁하다가도 운수가 펴졌으니 이 묘지명을 살펴보면 곤궁했던 어질고 빼어난 이들의 운수가 펴지는 일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삼종제 가선대부한성부우윤겸동지의금부사 중일 짓다.
* 진정晉程 : 백성을 어질게 다스려야 함을 말한다. 진晉나라 정정程鄭이 죽으니, 정나라 명재상인 자산子産은 비로소 연명然明을 알아보고서 그에게 정사를 묻자, 연명이 대답하기를 “백성을 자식처럼 보고 어질지 못한 자를 보거든 목을 베어 죽이기를 새매가 참새를 채듯이 하라(視民如子 見不仁者 誅之 如鷹鸇之逐鳥雀也).”고 하니, 이에 자산은 기뻐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노·양공魯·襄公 25년. 기원전 548년.
* 중일重一 : 홍중일洪重一, 1700~?을 말한다.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수이壽爾. 홍영洪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예조참의 홍주국洪柱國이고, 아버지는 홍만적洪萬迪이며, 어머니는 이경억李慶億의 딸이다. 좌윤, 대사헌, 예조참판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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