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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7월 4일 주일 메시지
시리즈 제목: 진리의 빛, 사도신경
설교 제목: 1. 나는 믿습니다(Credo)
시편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요한복음 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설교 목적
사도신경을 제대로 공부해보고자 한다. ‘나는 믿습니다’라고 시작하는 이 고백이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그렇게 고백하는 것이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나는 오래 전부터 사도신경을 설교로 다루어보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 고백을 우리는 매주일 예배 시간에 암송함으로 실시한다. 그런데 그 고백의 깊은 의미를 바르게 깨닫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더 깊어지고 견고해질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오늘의 메시지는 총론이 될 것이다. 즉, ‘나는 믿는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신앙고백을 하면서 그 진정한 의미를 바르게 깨닫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가 되기 때문에 세례자에게 필수적으로 가르쳤을 것이다.
설교 개요
1. 빛과 어둠에 담긴 은유
2. 진리는 세상의 빛이다
3. 사도신경, 진리의 빛
4. 나는 믿습니다
1. 빛과 어둠에 담긴 은유
우리는 눈으로 사물을 봅니다. 눈을 감으면 사물을 볼 수 없습니다. 눈을 뜨면 사물이 보입니다. 그런데 눈을 뜨고 있어도 빛이 없으면 우리는 볼 수 없습니다. 결국 우리가 본다는 것은 빛이 사물을 비추어주기 때문입니다. 빛은 사물에 비추고 그 사물이 빛을 반사합니다. 우리가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는 까닭은 사실 빛이 그 사물에 부딪쳤다가 반사되어 우리 눈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본다는 것은 결국 빛이 우리 눈으로 들어온다는 것이며, 그 빛을 우리의 눈에 있는 시신경이 포착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무엇을 볼 수 있으려면 빛이 있어야 합니다.
빛이 어떤 사물에 비출 때 우리는 그 사물의 모양이 어떤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것인지 아니면 남의 것인지도 구분할 수 있습니다. 빛은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하며,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환경과 만물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를 알 수 있게 합니다. 그러므로 빛이 없으면 우리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그 무엇도 볼 수 없고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도 없을 것입니다.
하늘에는 빛나는 것들이 있습니다. 성경 창세기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세기 1:14~15
하늘의 궁창에 있는 광명체는 ‘빛나는 것들’입니다. 그것은 해와 달과 별입니다. 해는 스스로 빛을 발산합니다. 달은 태양의 빛을 반사합니다. 어떤 별은 태양처럼 스스로 빛을 발산하고 어떤 별은 달처럼 태양빛을 반사하여 우리 눈에 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는 것은 사실 발광체에서 나온 빛을 보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빛이 없다면 우리는 볼 수 없으며 우리가 본다는 것은 그 빛을 보는 것입니다. 스스로 빛을 발하는 발광체가 있고, 그 빛이 무엇을 비추고 거기서부터 반사되어 나오는 빛이 있습니다. 그 어떤 경우든지 간에 우리가 본다는 것은 결국 빛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또 다른 종류의 빛이 있습니다.
2. 진리는 세상의 빛이다
우리에게 세상을 보여주는 또 다른 빛이 있습니다. 그 빛은 우리의 눈을 비추지 않지만 우리의 마음을 비춥니다. 때로는 우리의 눈을 감을 때 그 빛이 더욱 선명해지기도 합니다. 그 빛이 마음에 비칠 때 우리는 사물을 새롭게 발견합니다. 그 빛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만물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만물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일깨워줍니다. 그 빛이 없으면 우리는 그저 동물들처럼 보이는 것에 별 의미를 느낄 수 없습니다. 그 특별한 빛이 우리 마음에 비칠 때 우리는 세상 만물이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발견합니다.
이 빛이 없이 사는 삶은 짐승과 같은 삶입니다. 이 빛을 발견하기 위해 사람은 깊이 생각을 하고 연구하기도 하며 눈을 감고 기도를 드리기도 합니다. 이 빛은 마음으로 볼 수 있으며 그래서 이 빛이 우리 마음에 비칠 때 우리는 깨닫는다고 말합니다. 전에는 별다른 의미를 못 느끼다가 시간이 지나 어느 때 갑자기 그것이 무척 소중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아니면 반대로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것 없이는 못 살 것 같았는데 이제 별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가치 없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세상은 철을 따라 옷을 바꾸어 입고 변화합니다. 그리고 사람도 때를 따라 새로운 깨달음을 얻어 생각과 행동이 성숙하게 되는데, 그것을 가리켜 철이 든다고 합니다. 푸른 나뭇잎이 가을에 빨갛고 노란 물이 들어 단풍(丹楓)이 되는 것처럼 우리 마음도 새로운 깨달음으로 물들었다는 말이겠지요. 철이 든다는 것은 나이가 먹었다는 말이며 성숙해졌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마음에 비치는 이 빛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리켜주는 그 특별한 빛을 연구하기 위해서 인간은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 결과를 글로 기록하고 서당이나 대학을 세워 후대에게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서울대학교는 학교의 모토를 ‘진리는 나의 빛’(Veritas Lux Mea, The truth is my light = The truth enlightens me.)이라고 정했습니다. 그 모토가 담고 있는 의미는 아마, 서울대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이런 마음가짐으로 공부하라는 조언이자 지침일 것입니다: ‘진리가 나의 길을 비추어주는 빛이므로 세상만사를 바르게 보고 바르게 살기 위해서는 진리를 부지런히 탐구해야 한다.’
성경에서 시편의 지혜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는 등불이며 빛이라고 노래했습니다(시 119:105).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고 하셨습니다(요 17:17). 예수님은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6).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소개하기를, 각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라고 했습니다(요 1:9).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8:12
예수님이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소개하신 까닭은 자신이 세상에 오셔서 진리를 가르치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들려줌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세상을 바르게 깨닫게 하고 무엇이 가치 있는 일인지 무엇이 가치 없는 일인지를 구별하게 합니다. 바르게 깨닫고 바르게 분별해야 바르게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을 진리라고 소개하시고 또한 세상의 빛이라고 소개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습니다. 교회는 예배당이자 그의 놀이터와 같았고 청소년 시절에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수련회도 가고 연극도 하고 일일찻집과 같은 행사를 열어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교회는 그에게 배우가 자신의 끼와 재능을 발산하는 무대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지나고 그의 마음에 문득 예수님의 말씀이 새롭게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밤을 새워 이야기를 해도 지루하지 않을 만큼 새로운 깨달음이 그의 마음에 밀려왔습니다. 그동안 들은 성경 이야기들이 자신과 세상을 새롭게 비추어 주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세상의 모든 일들이 설명되고 새롭게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교회 출신의 최철규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최목사님은 우리 교회 청년회장이었고 지금은 강릉에서 포남순복음교회를 이끌고 있습니다.
빛이 비추는 곳에서 우리는 앞길에 무엇이 있는지 발견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게 됩니다. 졸음운전이 위험한 이유는 앞을 분간하지 못하고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돌진하여 사고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을 비추는 진리의 빛에 대하여 눈을 감아버리거나 다른 일에 마음을 빼앗겨 진리의 빛에 대하여 눈을 감고 졸거나 자게 될 때 인생에도 사고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혼돈과 공포 또는 외로움과 절망 같은 어두움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인간은 비정상적인 판단을 하거나 그릇된 선택을 하기 쉽습니다. 그 결과 먼 길을 돌아가거나 다른 사람들과 부딪쳐 불필요한 갈등을 일으키고 주위 사람들을 걱정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마음에 진리의 빛이 비칠 때, 아니 사람이 마음을 열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그에게 일어나는 일은 깨달음입니다. 그 깨달음은 자신과 세상에 대한 새로운 발견입니다. ‘아, 나는 이런 사람이었구나! 나는 이런 존재로구나! 아, 세상은 이런 의미가 있구나! 가장 가치 있는 일은 이것이구나! 나는 남은 인생을 이런 일에 바치고 싶다! 내가 전에 이런 일을 당하고 그런 사람을 만난 것도 이런 의미가 있구나!’ 이런 깨달음이 그의 마음에 밀려옵니다. 그러면서 사람은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의지하게 됩니다. 그는 신앙인이 되었고 신앙인으로 살 것을 결심합니다.
교회는 이런 깨달음을 모아서 정리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사도신경’이라고 부르며 매 주일예배에서 고백합니다. 사도신경은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을 비추는 빛입니다. 그것을 잘 살펴보면 우리는 세상과 우리 자신에 대하여 새로운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면 사도신경이 우리에게 어떤 빛을 비추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3. 사도신경, 진리의 빛
사도신경(使徒信經)은 사도들의 신앙고백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이 부르시고 가르치셨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며 배우는 사람들을 제자(弟子, Mathetes, learner, disciple)라고 한다면, 그 제자들이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을 때 사도(使徒, Apostolos, apostle)라고 부릅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만든 사도신경은 결국 예수님의 가르침을 정리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기독교인이 믿는 것을 요약정리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주기도문은 성경(마 6:9~13)에 나와 있는데 사도신경은 성경에 실리지 않았으므로 사람의 가르침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고 연구하여 그 핵심을 간추린 것이 사도신경이므로 우리가 사도신경을 결코 소홀이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도리어 사도신경을 통해서 우리는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더 명확하게 포착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사도신경은 열두명의 사도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만든 것은 아닙니다. 사도신경의 내용은 기독교회가 자신의 믿음을 명확하게 하기 위하여 확정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릇된 신앙을 가르치는 사람들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한 울타리와 같은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양한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들이나 교회가 건전한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사도신경을 공예배에서 고백함으로 자신들이 건전한 교회임을 나타내려고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사도신경이 무슨 내용인지 그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지 않고 고백하기만 하면 그 고백은 의미를 잃은 행동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뜻 없는 행동은 사람에게 감동과 힘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의미를 상실한 행동은 언젠가는 중단되고 말 것입니다. 신앙인으로 산다는 말은 이전에 선배들이 하던 행동과 물려준 가르침을 받아서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통을 이어가는 것이며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창조 없는 모방이나 답습은 마침내 박물관에 자리잡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 새롭게 창조하고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발견하면 새로운 활력을 띠게 될 것입니다. 그런 전통은 박물관이 아니라 시장에서 빛을 발할 것입니다. 오늘의 기독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새롭게 깨닫고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신경은 무엇을 담고 있는 것일까요? 사도신경은 성경을 요약하여 우리에게 들려준다는 점에서 우리가 믿는 바를 핵심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사도신경에 나오는 각 항목은 일곱 빛깔의 무지개처럼 밝게 빛을 내면서 인생과 세상을 비춰줍니다. 사도신경이 비쳐주는 그 빛깔을 살펴보겠습니다. 어떤 분들은 사도신경이 열두개로 이루어진 신앙고백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보았습니다. 즉, 사도신경을 통해 우리는 이것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1)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2)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3)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
(4) 나는 교회를 믿습니다.
(5) 나는 성도의 교통을 믿습니다.
(6) 나는 죄 용서를 믿습니다.
(7) 나는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
(8) 나는 영생을 믿습니다.
앞으로 설교를 통해서 각 항목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은 ‘나는 믿습니다’라는 말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4. 나는 믿습니다
사도신경은 본래 라틴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말로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로 시작하는 사도신경의 첫 문장은 라틴어로는 ‘크레도 인 데움 파뜨렘 옴니포뗀뗌~’(Credo in Deum Patrem omnipotentem~)입니다. ‘크레도!’는 ‘나는 믿습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나는 믿는다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믿는다’는 말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믿는다는 말에 대하여 성경을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히 11:1)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느냐?’(롬 8:24)고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에 나오는 고백은 모두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입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거룩한 공교회와 죄사함과 부활과 영생은 모두 눈에 보이지 않는 개념입니다.
사람은 왜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을까요? 사실 사람이 무엇을 믿으려면 눈으로 볼 수 있는 증거를 필요로 합니다. 증거도 없이 믿으라고 말하는 것은 공적인 영역에서는 인정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증거를 내놓을 수 없는 일들이 매우 많습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언제 어떻게 생겨났는지 알 수 없습니다. 나를 낳고 기르신 분은 나의 부모인데 이 세상을 만드시고 주관하시는 분은 누구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이토록 거대한 세상과 우주는 그 끝을 알 수 없습니다. 나도 모르는 무언가가 내 속에서 왜 이렇게 강하게 재촉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이런 것은 우리가 입증할 수도 없고 눈으로 볼 수도 없습니다.
짐승은 이런 것을 알려고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짐승의 관심사는 우선 먹고 자고 자손을 퍼뜨리는 것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이런 것에 더하여 의미를 추구합니다. 사람은 기념관을 만들고 동상을 세웁니다. 사람은 글을 쓰고 노래를 부릅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잘 간직하며 기억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광화문 광장에는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의 동상을 세웁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는 백성을 사랑하여 훈민정음을 만든 왕과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려고 자신을 바친 용감한 장군을 기억합니다.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은 그렇게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의미와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존귀한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준 물건은 다른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으로 가치 있게 여깁니다.
사도신경에 담긴 신앙고백은 우리에게 이런 것들을 가르쳐줍니다. 즉, 이 세상을 다스리는 전능하신 분이 우리의 보호자가 되시며 그분은 이 모든 만물을 지으셨습니다. 또한 그분은 자기 외아들에게 이 모든 것을 다스릴 권세를 주시려고 이 세상에 보내셨고 다시 살리셨으며 지금은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게 하셔서 하늘과 땅을 통치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요청하셨고 그 성령은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살 수 있게 합니다. 성령의 감화에 순종한 온 세상의 교회는 다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며, 믿는 사람은 이생에서든 저생에서든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으며, 우리가 죽으면 몸으로 다시 살 날이 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 우리는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지금은 희미하지만 그 때는 하나님이 우리를 아시듯 우리도 온전히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도신경에 담긴 이 진리는 우리의 마음에 새로운 빛을 비춥니다. 그래서 ‘나는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마음의 눈을 열어 그 빛을 통해 만물을 바라보고 감상하며 평가하고 의미를 깨닫습니다. 그러나 ‘나는 믿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마음의 눈을 닫아 그 빛을 차단한 사람입니다. 그에게 이 세상에서 절대자는 없습니다. 성경이 그를 어떤 존재라고 말하는지 그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에게 이 세상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며 그것을 아는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정성을 바쳐 복종하고 따라야 할 하나님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사람을 가리켜 어두움에 다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둠 가운데 다니는 사람은 볼 수 없고 알 수도 없는 길을 걷는 것입니다.
앞에서 저는 포남순복음교회의 최철규 목사님에게 들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랫동안 교회에 다녔지만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이 신앙 안에서 명확해지고 분명해진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최목사님은 어느 날 꿈을 꾸는데 이런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이사야 52장 12절을 보아라!’ 그랬더니 꿈 속에서 자신이 이렇게 말했답니다: ‘13절도 주십시요!’ 그리고 꿈을 깨고 일어나서 성경을 보니 그 말씀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행하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희 뒤에서 호위하시리니
너희가 황급히 나오지 아니하며 도망하듯 다니지 아니하리라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이사야 52:12~13
이 말씀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최목사님은 이 말씀을 목회자에 대한 부르심으로 이해하고 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마치고 목사 안수를 받아 지금 강원도 강릉에서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이런 체험은 진실한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을 갖는 것은 상식과 이성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 마음과 영혼을 다하여 진리를 추구한 결과입니다. 그리고 그처럼 전심으로 신앙의 길을 걸어간 선배들은 사도신경으로 그 믿음을 압축하고 요약하여 후대에게 가르쳤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사도신경에 담긴 진리의 빛이 어떤 것인지 마음의 눈을 열고 살펴야 할 시간입니다. 그 찬란한 빛이 우리에게 세상과 자신을 새롭고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보여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만큼 우리는 더 큰 확신을 가지고 올바른 푯대를 정하고 인생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첫 번째 고백인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끝>.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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