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윤(南倫) - 충경공 충간공 감사공파 8세
▲ 충간공(忠簡公) 남지(南智)의 장남 – 남윤(南倫)
남윤(南倫, ?~1467년) 조선 전기 문신으로 본관은 의령(宜寜)이며 감사공(監司公)파 파조이다. 증조부는 조선개국 1등 공신이며, 영의정을 지냈고 충경(忠景)의 시호를 받은 남재(南在)이시다. 조부는 병조의랑 남경문(南景文)이고, 부친은 좌의정 지냈고, 충간(忠簡)의 시호를 받은 남지(南智)이다. 모친은 전의 이씨(全義 李氏) 이문간(李文幹)의 딸이다. 부인은 교하노씨(交河盧氏)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노물재(盧物載)의 딸이다. 노씨의 조부는 우의정 공숙공 노한(右議政 恭肅公 盧閈, 1376~1443)이며 외조부는 심온(沈溫)이시다. 의령군(宜寧君)의 봉호를 받으셨다.
남윤의 출생년도는 기록이 없으며 1450년(문종 즉위년) 형조정랑의 관직에 올랐으며 단종 1년 경창부 소윤(慶昌府少尹)에 임명되었으나 영상(領相) 남지(南智)의 아들이이라는 이유만으로 김종서의 시기가 심하여 남윤을 배척하였다. 그 후 1460년(세조 6년)에 파주 목사(坡州牧使)를 세조 7년에는 행사헌집의(行司憲執義)를 지냈으며 1465년(세조 11년) 5월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임명되었다. 1467년(세조 13년) 12월 17일 명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간 남윤(南倫)이 10월 30일에 병(病)으로 회동관(會同館)에서 급서(急逝) 하였다. 임금은 그 아들 남흔(南忻)에게 명하여 그 아우 형조 정랑(刑曹正郞) 남칭(南偁)과 더불어 역마(驛馬)를 달려 의주(義州)로 가서 영구(靈柩)를 맞이하게 하였다.
1553년(명종 8년) 9월 11일 남재의“적장자(嫡長子) 남조원의 아들이 절손되어 남필원의 차남 남국정(11세)을 양자로 들였다.
◆ 남윤(南倫)의 가계도 - 충경공 충간공 감사공파 8세
영의정 재(在) 충경공 | 5세 |
경문(景文) 의랑공 | 6세 |
휘(暉) 의산위공 | 간(簡) 직제학공 | 지(智) 충간공 | 7세 |
| | 동 | 의(儀) | 휴(休) | 구(俅) | 칭(偁) | 윤(倫) | 8세 |
| | | 참판공 | 별좌공 | 간성공 | 부정공 | 감사공 | 파 |
◼ 증조부 : 남재(南在, 1351년~1419년)-조선의 개국공신, 영의정
◼ 조부 : 남경문 (南景文, 1370년~1395년/1403년) - 병조의랑, 영의정부사에 추증
◼ 조모 : 숙녕택주(淑寧宅主) 온양 방씨(溫陽 方氏) 방순(方恂)의 딸,
판전교시사(判典校侍事), 참의(參議) 고려의 문신, 호 만송당(晩松堂)
◼ 부 : 남지(南智) 1392년~1454년 좌의정
◼ 모 : 전의 이씨(全義 李氏) 이문간(李文幹)의 딸
장남 : 남윤(南倫) ?~1467년 황해감사
부인 : 교하노씨(交河盧氏)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노물재(盧物載)의 딸
- 장남 : 남흔(南炘) 우승지
- 며느리 : 전주 이씨(全州 李氏) 춘양군 이내(春陽君 李徠)의 차녀
- 차남 : 남경(南憬) 선산부사
- 며느리 : 거창 신씨(居昌 慎氏) - 신승선의 딸, 폐비 신씨의 언니
- 3남 : 남(南情) 정랑
- 4남 : 남(南愼)
◆ 문종, 단종, 세조, 명종실록의 기록 - 남윤(南倫)
- 1450년(문종 즉위년) 8월 형조정랑(刑曹正郞)을 거쳐 돈녕부 판관(敦寧府判官)에 임명되었다.
- 1453년(단종 1년) 조산대부(朝散大夫)를 가자(加資)하고 수 한성소윤(守漢城少尹)에 임명되며 그해 10월 경창부 소윤(慶昌府少尹)으로 다시 임명되었는데 단지 영상(領相) 남지(南智)의 아들이이라는 이유로 김종서의 시기가 심하여 남윤을 배척하여 허물을 가리고자 한다고 하였다.
- 1460년(세조 6년) 파주 목사(坡州牧使)를 세조 7년에 행사헌집의(行司憲執義)를 지냈으며 1465년(세조 11년) 5월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임명되었는데 10월에 처가 병을 얻었으니 빨리 오라는 유지(有旨)를 받았다.
- 1467년(세조 13년) 8월 28일 공조 참판(工曹參判) 남윤(南倫)을 보내어 명(明)나라에 가서 채단 표리(綵段表裏)를 하사한 것에 대하여 사은(謝恩)하고, 겸하여 해청(海靑)을 바치지 말라는 것도 사례(謝禮)하였다.
-1467년(세조 13년) 12월 17일 사은사가 통사를 보내 사신 남윤이 회동관에서 졸하다.
사은사(謝恩事)가 먼저 통사(通事)를 보내 와서 아뢰기를,
"사신(使臣) 남윤(南倫)이 10월 30일에 병(病)으로 회동관(會同館)에서 졸(卒)하였습니다. 황제(皇帝)께서 예부 주사(禮部主事) 이내(李來)를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오로지 그대 왕은 중국 조정을 높이 섬겨 때때로 조빙(朝聘)하는데, 그대를 뽑아서 명령을 맡기니, 먼 길을 발섭(跋涉)하여 이미 북경[京師]에 이르렀으나, 어찌 병에 걸려서 갑자기 관사(館舍)를 버리는가? 부음(訃音)이 홀연(忽然)히 들리니, 진실로 슬퍼하고 탄식하는 마음이 더하다. 특별히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관(棺)으로 염(斂)하고 치제(致祭)하니, 그대 영혼이 앎이 있으면 능히 흠승(欽承)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즉시 임금이 그 아들 남흔(南忻)에게 명하여 그 아우 형조 정랑(刑曹正郞) 남칭(南偁)과 더불어 역마(驛馬)를 달려 의주(義州)로 가서 영구(靈柩)를 맞이하게 하였다. 또 승정원(承政院)으로 하여금 평안도(平安道)·황해도(黃海道)·경기(京畿)의 관찰사(觀察使)에게 치서(馳書)하여 시체(屍體)의 영구를 호송(護送)하게 하였다.
-1553년(명종 8년) 9월 11일 사헌부가 남정국·남해의 분쟁 문제에 대해 논하다
조원은 바로 개국 공신인 남재(南在)의 적장손(嫡長孫)입니다. 조원이 이미 아들이 없으니, 이는 남재의 제사가 끊기게 된 것입니다. 윤씨만이 양자 세우기를 구할 뿐 아니라, 국가에서도 조원의 후사를 세워 남재의 제사를 받들게 하여야 될 것입니다. 조원이 이미 아들이 없고 그 동생 역시 아들이 없으며, 조원의 사촌인 남치원(南致元)과 남숭원(南崇元)이 단지 아들 하나씩만 있고, 준원(俊元)은 아들이 없으며, 오직 필원만이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 차자(次子)가 바로 정국입니다. 그러므로 남재의 적장손과 남윤의 봉사손(奉祀孫)을 세움에 있어 윤씨는 정국으로 계후(繼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중략)
의령남씨 남윤, 남윤, 감사공파 남윤, 남지의 장남 남윤, 노물재, 노한, 심온, 문종, 세종, 명종, 파주목사, 황해도관찰사,
세조 사은사 남윤, 회동관 남윤, 남흔, 형조정랑 남칭, 교하노씨 노물재
<참고문헌>
의령남씨 족보
문종실록
단종실록
세조실록
예종실록
명종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