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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녀열전"과 작가 장차현실 인터뷰 - 『색녀열전』의 작가 장차현실
장차현실, 그녀는 일류다. 일류 프로이면서도 아마추어 삼류들에
게 더 인기가 많은 여자! 오월의 끄트머리, 녹음이 우거진 경기도
양수리의 마당 넓은 카페에서 그녀의 전부인 딸 은혜(12)와 함
께 마주한 자리. 테이블 위로 쏟아지는 오월의 햇살이 유난히 맑
아 보이는 까닭이 두 모녀에게 있음을 그들도 알까?
작품집 『색녀열전』에 대한 궁금증 보다 작가가 살아온 삶의 이력이 더 궁금했던 리포터의 어눌한 질문으로 위태롭게 덮어두었던 상처들이 덧나지나 않을지, 그것이 걱정되어 질문들을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굴리다 도로 집어넣기를 반복하는 사이 작가의 핸드폰 소리는 끊임없이 울려댄다.
고 2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 집안 살림을 꾸려나가실 때에서야 비로소 어머니의 존재, 어머니의 경제적 능력이 아버지 보다 월등히 나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작가. 그로 인해 여성이 가장이 될 수 없다는 것이 근거 없는 편견이었음을 알았단다. 어머니 혼자 꾸려나가는 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장학금과 아르바이트로 대학생활을 마쳤다는 그녀는 전형적인 386 세대다.
미대 동양화과를 나와서 왜 만화를 그리느냐는 리포터의 엉뚱한 질문에....
"화실 속의 그림이나 액자 속의 그림처럼 뭘 그렸는지 독자는 도무지 알 수 없는데 알아서 들으라는 식의 척하는 그림보다는 작가의 의도를 정확하게 그려낼 수 있는 순수한 만화가 좋아서" 라고 우문현답을 한다.
원고마감 시간을 넘긴 작품을 그리다가 나와서 내내 그것이 맘에 걸렸었나보다. 장소를 작가의 집으로 옮겨 작품을 마무리하면서 못 다한 질문을 하기로 하고 카페를 나왔다.
아담한 텃밭이 딸린 붉은 벽돌집, 대문대신 나무로 만든 예쁜 편지통이 깜찍하게 반겨주는 동화 속의 그림 같은 집, 집에 도착하자마자 은혜는 마당에 길게 늘어놓은 호수의 물을 틀어 채소밭에 물을 준다. 창창한 햇살을 받다가 갑자기 날아든 찬물에 채소들이 놀라 온몸을 비튼다. 한낮에 물을 주면 안 된다 하면서도 베풀 줄 아는 미덕을 지닌 딸의 모습이 마냥 예쁜 듯, 물이 안 닿는 곳들을 가리키며 여기도 저기도 주라고 한다. 그렇게 한참 두 모녀의 상큼한 시간이 흐른다.
현관엔 채 뜯지 못한 우편물이 수북히 쌓여있다. 서둘러 보내야 할 그림을 마무리하는 사이 이제 전화벨 소리는 더 자주 울린다. 인터뷰 요청과 청탁 등, 핸드폰만이 아니고 집 전화기까지 정신이 없다. 이웃 마을에 사는 주부의 전화가 걸려오자 그 바쁜 와중에도 저녁이나 함께 하자는 따뜻한 여유도 잊지 않는다.
마감 시간을 넘긴 그림이 마무리 되어갈 즈음 한 떼의 이웃들이 들이닥친다. 어른 셋, 아이 넷, 아까 저녁이나 함께 하자고 부른 그 이웃인 것 같다. 작가는 작업이 밀렸다면서 모 칼럼집에 삽화로 들어갈 밑그림 한 뭉치를 내 놓으며, 연필로 그린 그 위에다가 볼펜으로 덧칠해 줄 것을 부탁한다. 그 작업을 은혜도 한 몫 거든다.
인형 눈알 붙이기, 봉투 붙이기 등 어려웠던 시절 식구들의 부업거리였던 그 일감들을 화제로 올리며 마치 지금 그 작업을 하는 것 같다는 둥 풋풋한 수다로 작가의 그림을 본뜨는 이웃들. 일순 작가의 집에 웃음꽃이 핀다. 아이들은 하얀 종이와 연필을 들고 이 방 저 방 왔다갔다 정신이 없고 추억의 부업거리를 들먹이며 이어지던 수다는 아이 키우기 등 좀더 현실적인 이야기에서 정점으로 치닫는다.
어느 날 오랜 친구가 찾아와서 그녀 주변에 들끓는 사람들을 보고 사람 좀 가려서 만나라는 말을 했었는데 그 친구의 말에 대뜸 이렇게 말해줬단다.
"왜 가려? 가려서 만나야 할 사람은 너인 것 같다"
『색녀열전(索女列傳)』, 그 짙은 삶의 철학
『색녀열전』의 색은 "色" 이 아니고 찾을 "索" 자를 쓰는 "索女列傳" 이다. "色" 자로만 착각해서 이 책을 사보려고 했던 독자라면 헛물 켜가면서 꼭 사보라고 권하고 싶다. 음산한 도시 후미진 뒷골목에서 음성적으로 판매하는 포르노 만화를 사보았던 독자들에게도 권하고 싶고, 이제 막 사춘기를 지난 파릇한 총각들과 말초신경을 자극 받아 싸구려 쾌락에 젖고 싶어하는 뭇 사내들에게도 더더욱 권하고 싶은 책이다. 첫 장을 넘기고, 쪽수가 뒤로 넘어갈수록 그들은 알게 될 것이다. 그대들이, 이 땅의 수많은 남성들이, 우리들이 얼마나 그릇된 성 의식과 못난 남성 우월주의에 사로잡혀 살아왔는가를.
작업 하다가 그림이 안되고 답답할 때면 텃밭에 나가 물을 주거나 잡초를 뽑는다. 전에는 어쩌면 쓴 소주로 한없는 날들을 보냈을 것 같은 사람, 그러한 아픈 날들을 홀로 버텨온 이력으로 그녀는 행복한 사람들 보다 아픈 사람들의 아픈 구석을 먼저 들여다볼 줄을 안다. 4.3 항쟁의 그 진저리치는 현장에서 화사하게 웃고 떠들며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는 젊은 신혼부부 들을 보면서 느껴야했다는 이질감.
딸 은혜가 어느덧 벌써 사춘기가 되어 브레지어를 착용하고 다닐 나이가 되었단다. 은혜가 클 때쯤이면 이 사회도 많이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던 작가에게 요즘 부쩍 자주 일어나는 장애여성에 대한 성폭력 사건 등은 작가의 마음을 한없이 짓눌러왔을 것이다. 은혜와 같은 장애아들이 마음 편히 자신의 소중한 삶의 권리를 누리며 살아가게 될 날이 오기를 간곡히 바라는 일념으로 그려왔던 그림들.
그녀의 만화엔 철학이 있다. 살아온 날들의 아픈 이력을 버물려 한 폭의 그림으로 빚어내는 그 짙은 삶의 철학, 끝이 없을 것만 같았던 아픔과 좌절들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치며 일궈낸 그녀의 포근한 마음 밭에 그녀만큼이나 아름다운 딸 은혜가 매일매일 맑은 물을 주며 깡마른 세상에 예쁜 꽃송이들을 피워낼 것을 믿는다.
♣장차현실
1964년 출생/선화예고를 거쳐 1988년 홍익대학교 동양화과 졸업/이후 일러스트레이터와 만화가로 활동/1990년 다운증후군이 있는 딸 은혜가 태어남/페미니스트저널 <이프>에 "색녀열전"/인터넷한겨레에 "장차현실의 현실을 봐"/장애인복지신문에 "만평"/우먼타임즈에 "덕소부인"/스카이라이프에 "스카이 장"/인권잡지 보이스에 "색녀 이야기"/열린 사람들, 작은 책, 기아자동차 사보 등에 만화를 연재하는 등 왕성한 창작활동을 펴고 있으며 최근 이프에 5년 간 연재했던 "색녀열전"을 모아 작품집 『색녀열전(索女列傳)』을 출간했다.
임희구 / imbop@hanmail.net
편집시각 2002년05월25일11시49분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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