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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슬픔의 정확도를 높여가자>의 줄거리:
세상에 한심하고 딱한 일이 바로 슬픔과 기쁨에 정확도가 떨어지는 겁니다. 정확한 슬픔이 아니면 슬퍼서 하는 모든 판단과 생각과 말과 행동은 다 정확하지 않는 것이 되어버리고, 정확하지 않은 기쁨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가 됩니다. 솔직히 말해 예수님 기준으로 보자면 우리들의 슬픔과 기쁨에는 전혀 정확도가 없습니다. 부정확한 기쁨과 슬픔으로 생의 에너지가 무한히 소모만 되고 있습니다. 정확한 기쁨을 향할 수 있기 위해 정확한 슬픔을 살펴봅니다.
슬픔의 정확도를 높여가자
(예레미야 애가 1:1~22)
1. 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이 되었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
2. 밤에는 슬피 우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들 중에 그에게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들도 다 배반하여 원수들이 되었도다
3. 유다는 환난과 많은 고난 가운데에 사로잡혀 갔도다 그가 열국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쉴 곳을 얻지 못함이여 그를 핍박하는 모든 자들이 궁지에서 그를 뒤따라 잡았도다
4. 시온의 도로들이 슬퍼함이여 절기를 지키려 나아가는 사람이 없음이로다 모든 성문들이 적막하며 제사장들이 탄식하며 처녀들이 근심하며 시온도 곤고를 받았도다
5. 그의 대적들이 머리가 되고 그의 원수들이 형통함은 그의 죄가 많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곤고하게 하셨음이라 어린 자녀들이 대적에게 사로잡혔도다
6. 딸 시온의 모든 영광이 떠나감이여 그의 지도자들은 꼴을 찾지 못한 사슴들처럼 뒤쫓는 자 앞에서 힘없이 달아났도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슬픔의 정확도를 높여가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슬픔의 정확도를 높여가자’
정확한 슬픔이 있습니다. 정확한 슬픔이 있기 때문에 기쁨에도 정확도가 문제가 됩니다. 정확한 기쁨을 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슬픔이 정확해야 합니다. 이제는 슬픔의 정확도를 높여가야만 할 것입니다. 슬픔의 정확도가 향상되지 않는다면 슬퍼하면서 생각하고 판단해서 드리는 모든 기도 또한 정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게 슬퍼할 수 있어야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도 정확하게 상달될 수 있습니다.
정확한 슬픔에서 나온 기도가 아니라면 하나님이 들으실 때에 답답하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슬퍼할 일이 아닌데 문제로 삼고 기도를 드리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활력을 잃고 재미가 없습니다. 정확한 슬픔과 정확한 기쁨을 모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저의 고등학교 때 일화를 예로 삼아 슬픔의 정확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저희 아버님 때부터 친구인 집안이 있었습니다. 이미 다 고인이 되셨습니다. 아버님 친구 분께서는 서대문구에 있는 인창중고등학교의 교장선생님이셨고, 저희 아버지께서는 국어선생님이셨습니다. 당시 연희동에 살 때에 앞뒷집에 살았는데 그 집도 자녀가 셋이었고 저희 집도 셋이었습니다. 그 집의 첫째 딸이 저희 첫째 형과 동갑이었고, 둘째 아들도 또 저희 둘째 형과 동갑이었고, 막내는 저보다 한 살이 어렸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3학년을 올라갈 때고 저희 큰 형은 신학대학을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집의 첫째 딸은 이대 4학년을 올라갈 때쯤인데 약혼할 남자가 정해져서 시집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연말에 우이동에 살고 있는 큰 이모 집에 놀러갔다가 새벽녘에 돌아와서 세 자녀가 잠들었습니다. 갑자기 꽝하는 소리가 나서 뛰쳐나가보았더니 그 집 막내가 문을 열고 나오면서 쓰러져 있었다고 합니다. 놀라서 들어갔더니 같은 방에서 자고 있던 둘째는 신음소리를 내며 쓰러져 있었고 첫째 딸은 의식이 없었습니다. 연탄가스 중독이었습니다. 먼저 신음하는 둘째를 밖으로 꺼내놓고 의식이 없는 첫째 딸을 적십자 병원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의사들이 이미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 냉동실로 옮겼다고 합니다. 그나마 둘째와 막내만이 목숨을 건졌던 것입니다.
결국 딸을 경기도 현리에 묻고 이 어머니가 하루도 빠짐없이 딸의 무덤에 가서 손으로 무덤을 긁으며 통곡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맏딸을 잃은 온 가족들이 통탄해하는 가운데 이 어머니에게 소문이 들려옵니다. 연탄가스를 마신 사람은 동치미국물을 먹여서 맨땅에 엎어두면 삼일 만에도 깨어난다는 소리를 듣게 된 것입니다. 이런 소리를 듣고 구할 수 있었던 딸을 포기한 것 같은 심정이 들어서 더 괴로워하셨습니다. 어머니가 더 이상 집안을 돌보지 않고 죽은 딸만 찾아다니게 되었으니 집안이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저 또한 이런 모습을 보다보다 마음이 아파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는데 꿈에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온 세상이 녹색으로 가득 차 있는 낙원과 같은 곳이 보이는데 그 한 가운데 경기장 같은 곳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경기장 가운데 맨홀 뚜껑 같은 것이 있었는데 천사 둘이 그 누나를 맨홀 안으로 집어넣으려고 하였습니다. 누나는 안 가겠다고 버티며 울고불고 통곡을 하는데 어찌나 단호한지 죽이지 않고서는 내려 보낼 수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꿈에서 깨어나 그 길로 누나 어머니에게로 달려가서 “누나는 이 세상으로 내려오기를 원치 않습니다. 발버둥을 치며 낙원에 남아있고자 하는 것을 제가 보았습니다. 누나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은 누나에게 가장 큰 저주인 것 같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꿈 이야기를 들으신 어머니께서는 마음을 돌이키셨습니다. 얼굴이 확 펴지시더니 제 손을 붙잡고 고맙다고 하시며 펑펑 우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천국에 가신 분들에게 최고의 저주이자 모욕은 이 땅에서 좀 더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일 것입니다. 같은 의미에서 죽은 사람만 불쌍하다는 등의 말이 또 그러할 것입니다. 모두가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니지만 천국에 간 것이 분명하다면 이 세상의 삶은 더 이상 아쉬워할 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천국에 간 사람에게 “더 살아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잘 살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말만큼 심한 모욕은 없습니다. 저는 그 꿈을 꾸고 난 뒤에 천국에 대한 생각이 분명해졌습니다.
이미 천국에 간 자녀를 세상으로 돌아오게 할 수도 없습니다만, 그렇게라도 자녀를 살려내서 세상에 살게 하려는 마음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이보다 더 악하고 어리석은 짓은 없습니다. 완전히 정확도를 상실한 슬픔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삶의 모습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 기본 재료는 평안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느끼는 모든 슬픔의 기본 재료는 육체의 죽음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게 다 마귀에게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2장 15절에서는 이를 두고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땅을 살면서 정확하지 않은 슬픔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기쁨의 정확도 또한 상실합니다. 진짜 슬퍼할 일이 아닌데도 슬퍼하고 전혀 기뻐할 일이 아닌데도 기뻐하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기쁨과 슬픔이 부정확한 상태에서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온전할 수도 없으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실제로 만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로마 식민지 아래 있는 상황에서 이방인 로마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는 기뻐하시며 칭찬하셨습니다. 또 이방인이었던 수로보니게 여인을 만났을 때에도 그 믿음을 보시고 기뻐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방인이었던 수가성 여인이 회심하였을 때도 기뻐하셨습니다. 반대로 누가복음 23장 28절에서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는 예수님을 보며 울고 있는 여인들을 향해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삶에서 느끼는 슬픔과 기쁨은 예수님의 기준으로 볼 때는 전혀 정확하지 않습니다. 하루 장사가 안 됐다고 해서 슬퍼하는 것이 정확한 슬픔일까요? 자녀가 서울대에 들어갔다고 해서 기뻐하는 것이 정확한 기쁨일까요? 가족이 죽었을 때에 슬퍼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정말로 육체가 죽었다고 해서 슬퍼하는 것이 합당한 일일까요? 죽은 사람이 믿음이 없었기에 천국에 갈 기회를 잃게 된 것을 슬퍼해야 하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천국행이 확실하다면 세상에서 오래 살라고 붙잡는 것처럼 욕된 일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모른 채 평생 동안 마음을 낭비하며 살아가는데 우리는 이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레미야의 애가(哀歌)입니다. 바벨론의 광기어린 살육과 파괴가 지나간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어서 처처에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고 곳곳에서 거민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직접 목격한 예레미야가 슬퍼하며 노래한 것이 바로 본서입니다.
다만 이 슬픔이 유다 나라의 멸망에 대한 슬픔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어색할 정도로 시온 즉 예루살렘 성과 성전에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8절 이하를 보면 이러한 멸망의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유다가 맞이한 멸망의 범위를 계속 좁혀서 예루살렘 성으로 좁히고 성전으로 집중시키는 모습이 마치 슬픔의 정확도를 높여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슬픔의 대상이 성전으로 좁혀졌으니 이제 슬픔의 이유가 중요하게 다가옵니다. 예레미야는 멸망당한 예루살렘의 상태를 생리로 인해 불결해진 여인의 상태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불결함은 곧 성결치 못하여 예배에 참석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부터 나오는 평안의 단절이고 선하신 뜻의 단절이고 모든 교제의 단절입니다.
다시 정리해봅니다. 예레미야가 선민의 나라가 완전히 망하게 되었음을 체감한 부분은 예루살렘 성이고 그중에서도 성전의 파괴였습니다. 성과 왕궁 그 안에 있던 가옥들이 불타고 파괴되는 것에 슬픔을 느끼기에 앞서서 성전이 이방인들에게 유린당하고 파괴되는 것에서 우선적인 슬픔을 느꼈던 것입니다. 슬픔의 과녁이 유다에서 예루살렘 성으로 좁혀지고 다시 성 안에 있던 성전의 성소로 좁혀집니다. 성전의 성소가 이방인들에 의해서 짓밟히는 것을 슬픔의 원인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토록 성소의 파괴가 예레미야의 슬픔의 이유가 되었던 이유는 유다가 마지막 남은 선민의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선민의 나라는 이방나라들처럼 번영과 발전을 목적으로 존재하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내려오는 착륙 지점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하루에도 수많은 비행기가 오고 가지만 착륙하는 곳은 특별히 정해져있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 유다의 멸망은 국토를 점령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내려오는 착륙 지점을 잃게 됨으로써 확정 된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삶에 적용해봅니다. 장사를 하는 사람이 오늘 장사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이때에 두 가지 사실이 존재하게 됩니다. 하나는 오늘 장사가 안 됐다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내 곁에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 중에서 내 마음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한 가지 뿐입니다. 장사가 안 된다는 사실을 우선적으로 받아들이느냐,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우선적으로 받아 들이냐의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습니다. 장사가 안 된다는 현실을 마음에서 슬픔으로 여기며 받아들이는 동안에는 하나님 나라는 임하실 수 없습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을 찾을지라도 하나님과의 연결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슬픔의 정확도가 떨어진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내 곁에 계시다는 것을 마음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선택을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장사가 안 되는 사실과 상황에 대해서 슬퍼할 일이 아니라는 정확한 판단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하나님의 뜻대로 이끌어 가실 것이고 삶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독도 문제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일본의 독도 망언으로 인해 마음에서 분함이 느껴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만약 일본이 실제로 독도를 강탈한다면 대한민국 5,500만 인구에 더해 이북의 2,500만 인구까지 한 마음이 되어서 분노를 표출할 것입니다. 설령 8,000만 인구가 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일본과 싸우자고 주장하는 사람들마저 나타날 것입니다. 독도 문제를 마음의 슬픔과 분노의 이유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레미야는 이와 다른 이유로 슬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임하는 장소가 사라지게 되었음을 슬픔의 이유로 삼고 있습니다. 유다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임하시게 하시려는 계획이 중단 된 것입니다. 선민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께는 독도와 같이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또 하나님의 뜻의 착륙지점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성전이 파괴되어 선민들이 다 사라지게 되었음을 두고 예레미야는 슬퍼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슬퍼해야 할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장사가 안 되거나 건강이 안 좋다는 것은 슬퍼할 이유가 안 됩니다. 내 마음이 장사나 건강을 우선적으로 받아들이는 바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수 없게 되었음을 슬퍼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슬픔의 정확도를 상실한 채 살아갑니다. 장사가 안 되고 몸에 병이 난 것을 슬퍼합니다.
설령 가족이 죽은 경우에도 다르지 않습니다. 가짜 슬픔으로 아무리 하나님께 부르짖더라도 하나님의 나라는 임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수가 없습니다. 진짜 슬픈 것은 마음이 가족을 슬픔의 대상으로 여기는 동안 하나님은 버려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무서워하고 슬퍼해야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가짜 이유로 슬퍼하며 살아갑니다. 슬픔의 원인이 정확하지 않으니 기쁨의 원인도 정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육체와 마음이 결별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이 조국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훈련입니다. 우리는 천국을 조국으로 하여 대한민국에 파견 나온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또 외모가 잘 생겼거나 못 생겼거나 기뻐하거나 슬퍼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은 전혀 정확하지 않은 기쁨과 슬픔의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육체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육체가 죽는다는 것은 고기를 재질로 하는 섬유의 옷을 입고 있다가 벗어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처럼 영화로운 모습이 되기 위한 준비 작업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오래 살라는 말보다 더 큰 저주는 없습니다. 이것이 정확한 슬픔과 기쁨의 이유가 되어야만 합니다.
요새 2019 아시안컵이 열리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8강전에서 카타르에게 1:0으로 패했습니다. 한편 일본은 4강전에서 이번 대회에서 강력한 우승후보로 주목받던 이란을 3:0으로 이겼습니다. 이렇게 한국이 기대이하의 성적을 거두자 저희 아들이 세상 살 맛을 잃었습니다. 한국이 떨어졌으니 적어도 이란이 일본을 이겨야 기분이 좋은데 이제 일본이 이겨서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가 되었습니다. 아들 말에 의하면 패배하기만을 바라는 일본의 플레이가 그렇게 깔끔하더랍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들어주다가 “이제부터 대한민국이 외국과 경기를 할 때는 절대 대한민국을 응원하지 말라.”고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응원도 안 하고 무슨 재미로 축구를 보겠느냐고 합니다. 그래서 “응원을 하자. 그러나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조차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우리는 축구경기를 보면서도 하나님을 응원하자.”라고 대답을 해주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이 말의 의미를 알거나 말거나 일단 그렇게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참새 한 마리 떨어지는 것조차 하나님의 뜻에 의해 결정된다면 축구경기 또한 하나님의 뜻에 의해 결정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응원하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도 이러한 연습은 이루어져야 합니다. 지지하는 정치세력이 있으시다면 결별하세요. 진보적 사고방식이든 보수적 사고방식이든 결별하세요. 우리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이셔야만 합니다. 인격적으로 판단하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사물과 사람과 상황들 앞에서 하나님 나라를 우선시해야 할 것입니다.
정말로 슬퍼해야 되는 것은 독도를 빼앗기는 것도 아니고 축구경기에서 지는 것도 아닙니다. 가족 중에 누군가 죽더라도 정말로 슬퍼해야 될 이유는 되지 않습니다. 설령 내가 죽더라도 그것은 정확하지 못한 슬픔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첫 번째로 가장 급박하게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슬퍼해야 할 이유입니다. 그 결과 내가 관계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하나님의 나라가 몰살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애가가 갖는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슬픔의 정확도를 높이자는 것입니다. 유다가 망했기 때문이 아니라 유다가 없어짐으로써 하나님 나라가 내려올 착륙지가 없어진 것이 슬픈 것입니다.
직장에 가면 위로는 상사들이 있고 아래로는 부하직원들이 있습니다. 이 직장에서 내가 우선시해야 하는 것은 사장도 아니고 내가 맡은 업무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우선적인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 회사에 하나님 나라가 착륙할 지점이 사라져버립니다.
문제는 이것을 깨닫고 슬퍼하는 교인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기독교가 시들시들해지고 고사상태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정확한 슬픔이 없기 때문에 정확한 기쁨도 없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정확하신 하나님과 관계할 수는 없습니다.
예레미야 애가가 갖는 중요성은 바로 슬픔의 정확도를 높이자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성전의 지성소와 성소가 이방인들의 말발굽 아래에 짓밟히고 약탈의 대상이 된 것을 슬퍼한 것처럼 우리도 이 정확한 슬픔을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슬퍼해야 할 것은 교인들이 십자가를 생활화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예레미야가 애가를 불렀듯이 애가를 불러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하지 않는 한 마음에서 하나님을 우선적인 현실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삶에도 하나님 나라가 임할 길이 없게 됩니다. 이것을 슬퍼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십자가 생활화가 되지 않는 것을 슬퍼하는 사람이 없으니 하나님 나라가 내려올 수도 없습니다. 슬픔이 정확하지 않기에 십자가를 생활화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세상을 우선적으로 여기는 마음이 죽지 않으면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사실은 첫 번째 현실이 될 수 없고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내려올 수도 없습니다.
마치 동전의 앞뒷면과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할 수 없음을 슬퍼할 수 없다면 하나님 나라로 기뻐할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신앙의 생명력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정확도를 올려서 정확한 슬픔과 정확한 기쁨에 대해 깨닫는 것이 이토록 중요합니다. 정확히 슬퍼하는 자가 반드시 십자가를 생활화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내려오지 않는 것을 슬퍼할 수 있기 때문에 십자가 생활화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한 번 슬퍼하고 한 조각 기쁨을 누려도 정확한 슬픔과 정확한 기쁨을 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를 생활화하지 않으면 못 견딜 정도로 하나님 나라가 착륙 지점을 찾지 못하는 상황을 슬퍼하는 정확한 슬픔의 소유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