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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여름 아래의 항목으로 국제포교사회장으로서의 소감을 여쭈었습니다.
다소 부담스러움도 있으셨을텐데 답변 해 주신 회장님들께 감사드립니다.
회원분들도 수처작주의 마음으로 생각 해 보면 좋을 듯합니다.
1. 국포사 발전을 위해 하고자 했던일
2. 가장 어려웠던 일
3. 가장 기억에 남는 일
4. 가장 아쉬운 일
5. 보람된 일
6. 회장을 맡아본후에 국포사회에대한 생각의 변화
7. 수행인으로서 한말씀
2대 백원기 회장
국제포교사 회장 시 활동 사항
1.국제포교사회의 발전을 위해 하고자 했던 일
-. 국포사 자생력 갖기 위한 발전기금 1억원 조성 목표
-. 국포사의 사무실 마련
- 포교사 해외 진출 기회 마련
2. 당시 가장 어려웠던 일
- 포교사 해외 진출 활성화의 어려움
3. 가장 기억에 남는 일
-동국대 학술문화관 그릴에서 “국포사 후원의 밤”(2002.4.26)개최와 발전기금 조성
-도레미레코드사 박남성 사장으로부터 영문 천수경 수리수리마하수리 기증 받음
-청소년 포교를 위한 “영문 부처님 일대기(Biography of the Buddha for Children)와 카 셋 테이프 제작 배포
-영문 Temple Stay Guide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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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가장 아쉬운 일
- 조계사 근처 “국제포교사 사랑방(지원빌딩 605호)” 마련했으나 회장 퇴임으로 지속적인 운영이 이루어지지 못함
-국포사 발전을 위한 기금 조성 달성치 못함
5. 보람된 기억
-미 8군 외국인을 위한 법회: 현각스님
-월드 컵 당시 Temple Stay 준비와 운영
- 관세음보살(도) 1점 모시기 운동 전개
-국제포교사 홈페이지 개설
- 한 -미얀마 불자친선의 날 개최(암사동 동명불원)
6.회장 소임을 맡아 본 후의 국포사에 대한 생각의 변화
- 무엇보다도 국포사의 장기적인 발전을 위한 발전 기금 조성이 필요
- 본부와 지부의 원활한 교류의 활성화
-종단의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지원 속에 국내외 포교의 활성화 필요.
-국포사 양성을 위해 헌신하신 (고) 원명스님의 높은 뜻 새겨야 할 필요가 있음
7.수행인으로서 한 말씀
“수처작주 입처개진”의 마음으로 하심하고 기도하며 살아감
3대 조우영회장
국제포교사 발전 모색
1. 2, 3-일반사항:
가. 국제포교사가 되기위해 외국어(영어,기타)를 나름데로 할수있수있다고 생각하는 불교신자중에서 지원/선발되어 소정의 교육기간을 거친후 품수를 받아 국제포교사가 된후 실제로 봉사할수있는 기회,봉사장소가 전혀없다는것이 회원들이 황당해하는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품수받은후 어떠한 국포사모임이 있을때 참여를 기피하는것이 오늘날의 국포사들의 현상태입니다.
반면에 국내포교사(본인도 국내포교사 겸임)들 처럼 봉사할수있는 기관으로 수많은 1)군부대 장병포교 2)교도소 3)양노원 4)복지시설 5)학교 등 기타 수많은 대상들이 있어 포교/봉사할수있는 기회가 많아서 활성화가 많이 되있으며 국내포교사회도 독자적으로 잘 운영되며 발전,단합도 잘되고 있습니다.
나. 그러나 국제포교사는 *외국인을 상대로 포교*를 해야된다고 정해져있기 때문에 제한성이 있는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제가 회장을 하고있을때 그렇케 외국인을 상대로 포교를 할수없다면 우리 국제포교사라도 단결하고 서로간에 연락을하고 무엇인가 국내포교사 임무와 겹치지않고 부처님 사업을 모색할수있는 방안을 찾기위해 현재 회원들이 살고있는 각지역별로 구역장을 임명해서 정기적으로 모임이라도 만들어서 신행생활과 단체성지순례등 단결이라도 해보고자 해서 한동안 운영을 해왔었는데 회장을 그만둔후 그것이 지금까지 운영되고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 'Temple-stay'. 현재 한국 여러 사찰에서 시행하고있는데 진행자와 책임자는 반드시 그지역 거주 국제포교사(스님포함)만이 이 업무를 할수있도록 조계종 총무원 차원에서 업무규정을 정해놓고 국제포교사의 위상을 높여주고, 활동할수있는 공간을 제공해주는것이 총무원과 포교원의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매년 국제포교사만 양성하면 무엇합니까? 제도적으로 역할을 할수있도록 보장해주어야지! 대책없이 양성만하면 되는것인지? 아마도 총무원과 포교원에서는 국제포교사를 양성하여 요구하고 기대하는것이;
(1) 국포사 각자가 알아서 개인적으로 외국에나가서 불교를 포교하거나,
(2) 서울거리를 걸어가고있는 외국인에 닥아가 불교를 포교한다,?
(3) 불교경전 번역이나 불교행사의 통역요원 양성 목적인지?
앞서 언급한 3개항도 체계적으로 잘 유지하기위해서는 국내에서 국제포교사회 운영의 기본 뿌리가 든든하게 잘되있어야 가능한것인데,,, 지금 현싯점에서 총무원과 포교원차원에서 본 "다"항(Temple-stay)을 강력히 검토하여 이문제를 심각하게 고민을 해주어야될 사항이라고 생각되며, 또한 그것이 바로 한국불교의 세계화의 지름길이며 초석이라고도 생각됩니다.
* 4월초파일 외국인을 상대로 등 만들때 옆에서 돕는일과 밤에 연등행진 참가하는것이 전부인 국제포교사의 안타까운 현실. 무언가, 어떠한, 돌파구를 마련해서 활발히 활동하는 우리회원들에대한 앞으로의 모습을 기대합니다.
4. 가장 아쉬운일
저의 친 누님이 비구니스님(法一)이신데, 현재 호주 시드니 근교 관광지로 유명한 Blue mountain 에서 '법보사'라는 절을 운영하고 계십니다, 처음에는 사후에 이절을 저한테 맡겨 운영하도록 하겠다고 영문/한글 유언장(The will)까지 작성까지 해주셔서, 당시에 국포사회원들의 현실태가 생각나서 이것을 인수받아 국제포교사회에 넘겨서 국제포교사소속 품수받은 스님중에 맡겨 우리 국제포교사 회원들 해외연수및 봉사처로 만들어야 겠다고 속으로 다짐을 해왔는데. 어느날 부터인지 그마음이 변해서(변덕) 호주에 수행겸 구경오는 젊고 수행잘된 비구스님만 보면 법보사를 넘길려고 안달복달을 해서 괴로운 입장입니다. 그 문제로 여러번 다투기도하고 호주방문하여 이문제로 말씨름을 하다가 일정을 당겨 한국으로 귀국한적도있었으나 그래도 법일스님과 다시 연락을하며 지내고 있지만 마음은 편치 않으며, 언젠가 스님 마음이 원상복귀/참회? 를해서 우리국제포교사 품으로 법보사가 돌아오는날을 기다릴수밖에 없는것이 현실이 되있는 상태입니다.
(본건은 법인체인 국포사-문화나눔 회장 조현덕님과도 상의가 되었던 사항이기도 합니다).
5. 보람된 일:
당시 회장 재임중 현재 독일에 계시는 현각스님을 주한미군사령부에 초청하여 법회를 개최한것이 의미있는일이었다 생각이듭니다. 주한미군사령관과 인사교환하고 법회장소가 미8군종교회관(개신교,천주교,유대교,이슬람교등,각 종교신자들 이용) 에서 있었는데 유대교 랍비(미군중령)이 불교에 큰관심을 가지고 현각스님과 많은 대화를 가졌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이법회가 내심 만족하지는 못했는데, 이유로는 그들이 유년기부터 내심깊이 자리 잡고있는 기독교사상 즉, 타종교에대한 배타적인점(1,나<야훼> 이외 다른신을 두지말라. 2.우상숭배를 말라) 때문에 백인 참여자가 별로많치 않았었다는 아쉬운점이 있기도 했었습니다만 한/미연합사소속 불교신도및 KATUSA 장병들이 다수참여하여 성황리에 마쳤던점입니다 그외 국제포교사 발전과 단결을위해 재임중 잘했어야 하는데 활동역량이 많이 부족했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6. 국포사에대한 생각:
단합/단결해서 모임이라도 활성화하길 바람(연수,성지순례, 단체수행정진,국포사 단합위한 모임의 정례화, 기타)
*따라서 국제포교사들의 발전과 단합을 실현/구현키 위해서 수도권 가까운곳에 국포사회원들이 서로 모여서 수행,정진도하고, 토론/담소도하며 쉴수도있는 전용공간으로서의 '국제포교사를위한 전용사찰'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7, 수행인으로 할말씀: 수행을 해본적이 없어서 부끄러운 심정임.
2017. 8.10
4대 김봉래회장
1. 어려웠던 일/기억에 남는 일/아쉬운 일/보람된 기억
(어려웠던 일)
국제포교사 창립에 참여한 이후 초대 사무총장과 부회장 홍보부장 등을 맡으며 나름 조직발전에 기여해 왔지만, 감회가 교차합니다.
무엇보다 어려웠던 일은 제4대 회장에 취임과 관련한 사항입니다. 제3대 회장 소임이 마무리 되는 시점에 차기 회장을 선출해야 하는데, 공고기간이 두차례 지나고도 아무도 지원하지 않아 불가피하게 주위의 권고로 제가 단독입후보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국제포교사회의 명맥을 유지하고 차기 회장에게 바통을 넘겨주는 소임이라 맡게 되었습니다.
회장 재임시에 어려웠 던 일은 사무실이 몇 차례 바뀌고 간사가 여러 차례 바뀌는 등 조직 안정을 기하기 어려웠던 점입니다. 당시 김윤희 간사가 출산 휴가를 가면서 벌어진 상황에서 여러 포교사님들이 릴레이로 어려운 간사 소임을 맡아 고생해 주셨습니다. 감사를 드립니다. 특히 심해경 포교사님은 추운 겨울 손이 시려워 피부에 손상이 올 정도였는데 미쳐 챙겨드리지 못해 죄송스럽습니다. 부족한 회장과 함께 보조를 맞추느라 고생하신 분들 모두 건강하시고 행복하기길 기원드립니다.
당시 총무원장 법장스님께서 입적하시는 등 일정기간 분위기가 어수선했던 점도 아쉽니다.
(기억에 남는 일)
그래도 기억에 남는 일은 국제포교사회 창립에 2기 출신들이 1996년 배출되고 1년을 더 기다려 1998년 마침내 단체를 창립하게 된 점입니다. 초대 사무총장으로서 부족한 점이 많지만 정관 초안을 기초하고 포교사님들의 재가를 얻어 포교원 산하 단체로 자임을 했습니다. 종단의 정치적인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조계종 종지종풍을 선양하는 의미에서 명실상부한 ‘포교단체’가 되기 위해 포교원 산하단체로 한 것이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됩니다. 당시만 해도 종단의 불안정한 상황이 조금 걱정되던 시대였거든요.
또한 국제포교사 회장 임기를 2년 단임으로 못박은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단체에 따라서는 회장 임기를 오래 끌면서 이권에 개입하는 등 부정적인 요소가 많아서 아예 우리는 단임만 하는 것으로 했는데, 그것도 오늘날에 와서는 좀 장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창립 당시의 취지가 있었다는 것을 밝히고 싶군요.
초대 양장운 회장을 모시고 종단 영문소식지 ‘Lotus Lantern'을 발간하기 시작한 점이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이기석 포교사가 적극 참여했고, 저는 기자출신으로 뉴스부분 원고작성과 영역을 전담했습니다. 전체 감수는 유명한 브라이언 배리 선생님께서 해주셨고요.
또한 우리 국포사회의 로고를 만든 것도 당시 일입니다. 저를 비롯해 여러 포교사들이 의견을 냈고, 그것을 종합해서 브라이언 선생님이 멋지게 디자인해 주셨습니다. IDIA의 영문글자를 잘 반영하면서 도안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쉬운 일)
아쉬운 일은 회장 재임시 좀 더 조직을 튼튼히 하고 단합된 힘을 일궈내지 못했던 한계를 느낍니다.
특히 WFBY 활동과 관련해 종단을 대표하는 청년단체로서 국제포교사회가 WFBY KRC(Korea Regionl Center) 자격으로 활동을 했는데, 특정 스님(국제포교사 출신)의 자의적인 힘으로 국제포교사회와 무관한 조직으로 되어버린 점이 무엇보다 아쉽니다. 그 스님은 그 후 국제포교사회가 별도로 WFBY 가입단체로 등록하는 것조차 막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단히 잘못된 것이고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보람된 기억)
그래도 기억에 남는 일은 회장 재임 시절 기초불교영어 강좌를 시작해 지금까지 꾸준히 이어져 오고 있는 일과 영문 자타카 암송대회를 추진키로 하고 임기 직후인 이듬해 여법하게 시작한 것이 오늘날까지 훌륭하게 이어어고 있는 일입니다.
외국에 계신 무진스님을 모시고 회원들을 위한 단기 교육을 했었던 일, 현각스님을 모시고 조계사 대웅전에서 영어법문을 개설했던 일도 기억에 남습니다.
저는 참석을 많이 못했지만 백하현 포교사님이 등산모임을 만들어 회원들과 유대를 나눴던 일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히 후원의 밤 행사를 당시 국제포교사회 당연직 총재이시던 포교원장 도영스님을 모시고 한국일보 송현클럽에서 한 일이 기억에 남습니다. 도영스님 비롯해 선묵혜자스님(당시 도선사 주지) 등 외부 관계자와 우리 국제포교사 회원들의 적극 동참으로 오늘날 사무실 마련의 종자돈을 조금이나마 보탤 수 있었다는 점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국제포교사 양성과정이 처음에 연등국제불교회관 원명스님의 지도로 이뤄지다가 한때 종단 포교원에서 맡다가 결국 국제포교사회로 이관되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아마도 회장 임기 첫해인 제10기 양성과정부터 본격화된 것으로 기억합니다. 프로그램 과정을 직접 짜고 강사진을 섭외하고 등등. 앞으로 더욱 발전되길 기원합니다.
또한 기초불교영어 코스는 국제포교사회 자체 코스였던 것이 지금은 종단에서 인증받은 코스가 됐다고 알고 있습니다. 자랑스럽습니다. 강사진도 더 풍부하게 만들고 코스도 다양하게 개발해 더 많은 인원들에게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게끔 제공했으면 좋겠습니다.
2. 회장 또는 소임을 맡아 본 후에 국제포교사회에 대한 생각의 변화
제4대 회장 선출 당시 두 번이나 출마하는 후보가 안계시는 바람에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회장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한분의 기권을 제외하고 참석자 전원의 지지로 임기를 시작했는데 의외로 조직을 원활히 이끌어 나가기에 역부족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우리 국포사 회원들이 더욱 더 자발성을 갖고 참여할 수 있도록 하지 못한 점이 생각납니다. 그런 점에서 국제포교사회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이냐에 대한 숙제를 남기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후원의 밤 행사는 집행부 임원 전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게 회장으로서 밀어붙인 것입니다. 회장으로 취임할 때, 이것 하나만큼은 조직을 위해서 하겠다, 즉 재정에 도움이 되도록 하고 싶다는 원력이 있었기에 그렇게 한 것인데요, 평가는 여러분께 맡깁니다. 하지만 조직의 기반은 재정이기도 하니까, 포교사로서의 소중한 전법도생 원력과 더불어 21세기에 잘 살아남을 수 있는 방안을 함께 지혜를 모아 추진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습니다.
한편, 역대 회장님을 비롯한 임원들이 많은데, 그 분들이 조직 내에서 보다 융화될 수 있고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조건들을 만들어 나가는 일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너무 역량을 소진해서 쉬고 싶은 것이 사실입니다만, 또한 인연에 따라 적절한 역할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함께 지혜를 모았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오고 가는 인연들을 소중히 여기는 단체가 되길 바랍니다.
3. 수행인으로서 한 말씀
우리 조직이 외부에서 듣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는 포교사단에 비해 신심이 부족하다는 이야기입니다. 2년간의 불교대학 이수를 하고 품수받는 포교사들에 비해 3-4개월 연수로 품수받는 국제포교사 간에 차이는 분명 있을 것입니다.
포교사의 생명은 수행과 전법입니다. 우리 국제포교사들도 매월, 매주, 매일 현장에서 혹은 법당 공간에서 수행과 전법에 매진해야 합니다. 각자 생업이 계신 분들은 그 사정에 맞게, 또한 생업에서 벗어나신 분들은 더욱 더 좋은 기회를 가지기를 바랍니다.
저는 대학생 시절부터 염불 수행과 담선 법회 참여, 단기출가 참여 등 경험이 있습니다. 가장 핵심은 아상을 내려놓은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꾸준히 절차탁마가 필요합니다. 특히 도반들과 함께 하는 수행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4. 발전을 위한 제언 등
국제포교사회를 창립하던 당시 조그마한 원력들이 쌓여 오늘날과 같은 발전을 이뤘습니다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할 수 있겠지요.
현재 박홍우 회장님께서 원력이 크시고 회원들도 좋은 분들이 예전보다 많이 보강되었기에 서로 존중하고 활기차게 활동해 나간다면 비전이 많다고 사료됩니다. 어느 단체나 자칫 혼자의 주장을 강하게 하시는 분들이 문제를 일으키기도 합니다만, 국포사회는 그렇지 않고 화합할 수 있도록 서로서로 노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단법인 문화나눔은 제2의 도약을 위한 발판입니다. 여러모로 어려운 점이 많으신데 도움을 못드려 죄송스럽습니다. 잘 운영되길 뒤에서 나마 미력을 보태고자 합니다.
포교사님들 모두 수고들 많으세요. 성불하세요()
김봉래 합장
(국제포교사 2기, 제4대 회장)
5대 회장 현오 강영성
1. 국제포교사회의 발전을 위해 하고자 했던 일
제가 소임을 맡았던 1997년은 국제포교사회가 창립 9주년을 맞았지만 사무처 직원이 안정적으로 업무를 볼 수 있는 사무공간이 안정되지 못하고 이리 저리 옮겨 다니던 시기였습니다. 또한 원명스님께서 관장하시던 국제포교사 양성과정 운영도 6기부터는 포교원이 직접 운영하다가 다시 우리 국제포교사회로 이관하는 등 혼란스러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는 ‘사무공간의 안정적 확보와 국제포교사 양성과정 교육체계 정비, 국제포교사의 역할 규정과 결속력 강화’을 중요한 과제로 삼았습니다.
2. 가장 어려웠던 일
전법회관 건물에 국제포교사회 사무실 확보를 위한 관련단체와의 협의 및 입주보증금 확보를 위한 준비과정이었는데 전 회원님들의 성원과 지원 덕분에 무사히 해결되었습니다.
3. 가장 기억에 남는 일
어떤 일이건 결국 구성원들의 단합과 협동이 가장 큰 토대라는 생각으로 양성과정 운영에 가장 공을 들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가능한 모든 교육과정을 모니터하였고 양성과정 참가자들끼리 도반으로서의 일체감을 가지시도록 애썼습니다. 늘 그랬지만 특히 12~13기 국제포교사양성과정 참가자들의 뛰어난 개인적 역량과 단합 의지가 저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열악한 교육여건임에도 많이 이해해 주시고 도와주셨던 도반들께 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4. 가장 아쉬운 일
지금은 여러 부분이 안정되고 활성화되어 있습니다만 2008년까지 배출된 인원은 280여명인데 회비 납부자와 안정적인 활동 참가자는 50여명 정도였으며 품수를 받으면 1년도 안되어 각종 행사 참가자가 절반으로 줄어드는 상황이 반복되었습니다. 각자가 포교 영역을 찾아서 활동하고 실행 결과를 제출하는 국내포교사와는 달리 우리 국제포교사들은 종단이나 국제포교사회에서 어떤 활동 소재와 무대를 마련해주기를 바라는 경향이 컸습니다.
따라서 어떤 사업이나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기 어려웠고 재정적으로도 힘들었습니다. 특히 상근자에게 최소한의 수당으로 봉사를 부탁드리는 상황을 개선할 수 없었던 일이 가장 아쉬웠습니다.
5. 보람된 기억
4대 김봉래 회장님 소임기간에 시작된 ‘기초불교영어과정’을 수강 인원에 관계없이 지속해 옴으로써 국제포교사 양성과정으로 이어지게 했던 일과 ‘어린이 자타카 암송대회’를 시작했던 일, 그리고 지금은 다른 단체로 이관되었지만 외국인 근로자 체육대회인 ‘이주민 어울림 한마당’을 시작했던 일들은 힘들고 어려운 여건이었지만 많은 회원들이 합심해서 정말 열심히 도와주셨던 일들로 기억합니다.
6. 수행인으로서의 한 말씀
隨處作主 立處皆眞(수처작주 입처개진)
9대 신외균회장
수고 많으십니다. 간단하게 작성했습니다.
1. 국포사회의 발전을 위해 하고자 했던 일:
가. 사무실 운영 재정자립,
나. 자발적 포교와 봉사 시스템 구축,
다. 국제포교사들의 자질 함양.
2. 가장 어려웠던 일:
가. 사무실 운영-재정 및 인력,
나. 국제포교사들의 저조한 참여.
3. 가장 기억에 남는 일: 국제포교사회 활성화 방안 확정 및 시행
가. T/F Team 구성 및 활동,
나. 역대회장단 및 기수대표 설명회,
다. 국제포교사 전문화연수-T/F Team 보고 및 토의,
라. 정기총회 의결.
4. 가장 아쉬운 일:
가. 국제포교사들의 포교•봉사 참여율을 제고하지 못한 점.
나 사무처 근무자가 단기 근무로 인해 연속성이 부족한 점.
5. 보람 된 기억:
가. 국제포교사가 자랑스럽다,
나. 회장 소임을 대과없이 마친 것.
6. 회장을 맡아 본 후에 국포사회에 대한 생각의 변화
7.수행인으로서 한 말씀
가. 일반포교사에 비해 국제포교사는 불교의 이해와 수행 수준이 낮다.
나. 개인 수행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포교는 없다.
다. 회원들 각자가 자기 수행을 가지고 정진해야 한다.
일향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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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인터뷰를 진행하신 최지원 홍보부장님 그리고 답을 해주신 회장님들께 감사 드립니다. 역대 회장님들의 의지와 꿈을 반석으로 삼아 국포사회가 더욱 발전하리라 기대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