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휘(南暉) 충경공(忠景公) 의산위공(宜山慰公) - 7세
남휘(南暉, ? ~1454년)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소간(昭簡)의 시호를 받으셨다. 본관은 의령(宜靈)이며 의산위공(宜山慰公)파 파조이다. 증조부는 고려 밀직부사를 지냈으며 조선개국으로 익대보조찬화공신으로 보국숭록대부 문하시중(門下侍中)에 특진되었다. 의령부원군(宜寧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경렬(敬烈)의 시호를 받으신 남을번(南乙番)이다. 조부는 조선개국 1등공신이며 영의정을 지냈고 충경(忠景)의 시호를 받으신 남재(南在)이다. 부친은 병조 의랑(議郞) 남경문(南景文)이며 형 좌의정 남지, 예문관직제학 남간이다. 모친은 온양방씨(溫陽方氏) 참의(參議) 방순(方恂)의 딸이다. 부인은 태종대왕의 4녀 정선공주(貞善公主, 전주이씨 이방원의 딸)이다. 1415년(태종 15년) 남경문(南景文)의 아들 남휘(南暉)가 정선공주의 부마로 결정되었고, 이듬해 1416년(태종 16년) 2월 두 사람의 혼인 후 남휘(南暉)는 의산군(宜山君)에 봉해졌다.
의산위(宜山慰) 남휘(南暉)와 정선공주(貞善公主)의 묘소
1418년(태종 18년) 의용위 절제사(義勇衛節制使)로 삼았으며 그 해(세종 즉위년) 동지총제(同知摠制), 1419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임명되었다. 1419년(세종 1년) 12월 14일 남휘의 조부 의령 부원군 남재가 타계 하였다. 1420년(세종 2년) 8월 5일 4월에 북경으로 간 사은사(謝恩使) 남휘(南暉)가 돌아왔으며 세종 5년에는 황주 선위사(黃州宣慰使)에 임명되었다. 1424년(세종 6년) 1월 25일 정선 공주(貞善公主)가 졸(卒)하였다. 임금의 동모(同母)인 제매(弟妹)로서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에게 하가(下嫁)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나이 21세로 돌아가니, 임금이 슬퍼하여 찬수를 거두고 조회를 3일 동안 정지하였다.
1425년(세종 7년) 평양선위사(平壤宣慰使)가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후 3차례의 선위사를 역임하였다. 1452년(문종 2년) 사사로이 불상(佛像)을 만들었다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으나 왕이 허락지 않아 처벌을 받지 않았다. 남휘는 세종때 4차례의 선우사와 7차례의 유후사로 활동하였으며 세종 18년에는 보국 승록대부 의산군에 제수되었고 1454년(단종 2년)에는 의산위(宜山尉) 남휘(南暉)가 졸(卒)하였으며 소간(昭簡)이란 시호를 받았다.
정선공주는 태종과 세종에게서 제일 귀여움을 받았으며 태종은 상왕이되어 사위집에서 거쳐하셨고 세종중전은 세자(문종)을 데리고 시매(媤妹)인 정선공주댁에 거처를 옮겨 지내기도 하며 의산위와 공주는 두 왕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공주는 성품이 정숙(靜淑)하고 곧으며, 행실은 공손하고 착하였다. 중곤(中壼)에 있을 때로부터 극진한 효성이 숙성하였고, 집을 가지기에 이르러서 근검함이 더욱 나타났다. 바로 규문(閨門)의 화목함을 이루었고, 이로써 척리(戚里)의 규범을 보여 주었다.
현재 묘역은 그와 공주의 묘가 쌍분으로 되어 있으며, 봉분 아랫부분에 둘레석이 둘러져 있다. 주위에는 묘비와 망주석 등 기타 석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1974년 3월에 현재의 장소로 이장하면서 당시 묘역에 설치되어 있던 석물은 함께 배치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장서리에서 1974년에 의산위공 후손의 세거지인 경상남도 창녕군 부곡면 구산리 산1-2로 천묘 하였으며 경상남도 도문화재자료 제 236호로 지정되었다. 시향(時享)은 음력 10월 15일이다.
◆ 의산위 남휘(南暉)의 가계도
영의정 재(在) 충경공 | 5세 |
경문(景文) 의랑공 | 6세 |
휘(暉) 의산위공 | 간(簡) 직제학공 | 지(智) 충간공 | 7세 |
흡(翕) | 동(仝) | 붕(倗) | 빈(份) | | | 8세 |
| | 소간공 | 부사공 | | | 파 |
◼ 증조부 : 남을번(南乙蕃, 1320년(?)~1395년 2월 13일), 검교시중(檢校侍中)
◼ 조부 : 남재(南在, 1351년~1419년)-조선의 개국공신, 영의정
◼ 조모 : 변한국대부인 파평 윤씨(坡平 尹氏)정후공 윤호(尹虎)의 딸(차녀)
윤호(尹虎) 조선 개국공신
◼ 부 : 남경문 (南景文, 1370년~1395년/1403년) - 병조의랑, 영의정부사에 추증
◼ 모 : 숙녕택주(淑寧宅主) 온양 방씨(溫陽 方氏)
- 방순(方恂)의 딸, 판전교시사(判典校侍事), 참의(參議) 고려의 문신,
정치인 본관 온양(溫陽) 호 만송당(晩松堂) 초명 방득주(方得珠)
장남 : 남지(南智) 1392년~1454년 좌의정
차남 : 남간(南簡) 1400년~1440년 예문관직제학
3남 : 남휘(南暉), ?~1454년, 의산위(宜山慰) 부마<태종 정선공주>
부인 : 정선공주(貞善公主)- 전주 이씨(全州 李氏) 태종의 딸(적4녀)1404년~1425년
∙ 장남 : 남빈(南份) 부사공 1421년~?
∙ 부인(며느리) : 남양 홍씨(南陽 洪氏) 홍여공(洪汝恭)의 딸
- 장남(손자) : 남이(南怡)장군, 충무공(忠武公) 1441년~1468년 10월 27일
- 부인(며느리) : 안동 권씨(安東 權氏) 길창군 권람의 딸(4녀)사별
- 1녀(증손녀) : 남구올금(간신 유자광의 모함(남이의 옥)으로 홍형생의 첩)
- 차남(손자) : 남초(南怊) : 군수공
- 3남(손자) : 남개(南愾)
∙ 장녀 : 평산 신씨 대사성(大司成) 신자승(申自繩)에게 출가
남휘, 정선공주는 신사임당의 외고조부(모)가 되신다.
∙ 차남 : 남붕(南倗) 소간공
∙ 3남 : 남동(南仝) 절손
∙ 4남 : 남흡(南翕) 절손
◆ 의산위 남휘(南暉) 신사임당의 외고조할아버지
의산위 남휘는 남이장군의 조부이고 신사임당의 외고조부이다. 남휘(南暉)와 정선공주의 소생에는 1남 1녀가 있었다. 장남 남빈(南份)은 남이장군의 부친이고 장녀는 평산 신(申)씨 신자승(申自繩)에게 출가하였다. 신자승은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한 평산 신씨의 시조 신숭겸의 17대손으로, 세종 27년에 좌의정을 지낸 신개(申槪) (1374년~1446년) 의 둘째 아들로 1469년(예종1년)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낸 명문대가 집안이다.
남휘의 딸(장녀)과 신자승에게서 난 자녀는 8남 5녀이다. 장남 숙정(叔楨))은 평산 신씨 장령공 종중을 이루고 있으며, 그중 4남 영월군수를 지낸 숙권(叔權)으로 군수공 종중을 이루고 있으며, 그의 아들 신명화(申命和) (1476년∼1522년)의 딸이 신사임당(申師任堂)이다.
◆ 평산신씨의 가계도
평 산 신 씨 | 세 |
고려 신숭겸 | 시조 |
: | : |
신안(종부시령) | 15세 |
신개 (좌의정) 배위 선산김씨 김가명의 딸 | 16세 |
차남 신자승(성균관 대사성) 배위 의령남씨 의산위 남휘의 딸(장녀) | 17세 |
4남 신숙권 (영월군수) | 18세 |
신명화 배위 용인이씨 이사온의 딸 | 19세 |
신사임당 (차녀) | 20세 |
◆ 의령남씨의 부마(駙馬)
조선시대 왕실가와 사대부가의 혼인은 가문의 영광으로 왕의 사위에게는 부마(駙馬)의 봉작을 내린다. 의령남씨 선조로는 태종의 부마 의산위(宜山慰) 남휘(南暉), 성종의 부마 의천위(宜川尉) 남섭원(南燮元), 의성위(宜城尉) 남치원(南致元)을 부마로 봉해졌다.
1416년에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 사이의 적4녀인 정선공주(貞善公主)와 남휘의 혼인으로 종1품 부마 의산위(宜山慰)에 봉해졌다. 그리고 1510년 전후로 성종과 명빈김씨 사이의 10녀인 휘정옹주(徽靜翁主)와 남섭원의 혼인으로 종2품 부마 의천위(宜川尉)에 봉해졌으며 1495년 전후로 성종과 숙용심씨 사이의 5녀인 경순옹주(慶順翁主)와 남치원의 혼인으로 종2품 부마 의성위(宜城尉)에 봉해졌다.
■ 의산위(宜山慰) 남휘(南暉) : 충경공 의산위공 7세
■ 의천위(宜川尉) 남섭원(南燮元) : 충경공 충간공 감사공파 10세
■ 의성위(宜城尉) 남치원(南致元) : 충경공 충간공 감사공파 10세
◆ 의산위 남휘(南暉) 정선공주의 묘소위치
• 경상남도 창녕군 부곡면 구산리 산1-2
◆ 의산위공(宜山慰公) 남휘 정선공주의 묘소 전경
의령남씨 남휘, 부마도위, 태종 부마 남휘, 정선공주, 세종대왕, 남재, 남이장군, 충무공, 평산씨시 대사성 신자승, 신사임당,
남휘 정선공주 외증조부(모), 창녕군 부곡리, 의산위 남휘, 태종상왕, 문종, 시매, 선위사 남휘, 유후사 남휘, 남경문, 안동권씨 권람
사은사, 황주, 평양선위사
<참고문헌>
의령남씨 족보
태종실록
세종실록
문종실록
단종실록
위키백과
의령남씨 의산위파 화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