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사화(己卯士禍)란?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년)**는 조선 중종(中宗) 때 발생한 사화(士禍, 사림(士林) 세력에 대한 숙청 사건) 중 하나로, 개혁을 추진하던 조광조(趙光祖)와 신진 사림 세력이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숙청된 사건입니다.
1. 기묘사화의 배경
(1) 중종반정(1506) 이후 신진 사림의 성장
연산군(燕山君) 폭정(무오사화·갑자사화) → 중종반정(中宗反正, 1506년)
훈구 세력(정국공신)이 중종을 왕으로 옹립했으나, 신진 사림 세력(조광조 등)이 성장하면서 정치적 갈등 발생.
(2) 조광조의 개혁 정치
조광조와 신진 사림은 유교적 이상 정치를 실현하려 함.
→ 현량과(賢良科, 유능한 인재 등용제도) 실시
→ 위훈 삭제(僞勳削除, 부당한 공신의 공훈 삭제) 추진
→ 향약(鄕約) 보급, 언론 활동 강화
훈구파는 이에 반발하여 조광조의 급진적인 개혁을 위험하게 여김.
2. 기묘사화의 전개 (1519년)
1. 조광조가 개혁을 강하게 추진
부패한 훈구파를 제거하려고 하자 훈구 세력이 반발.
2. 중종이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 사이에서 갈등
3. 훈구파의 모함: "주초위왕(走肖爲王)" 사건 조작
조광조의 개혁에 반대한 훈구 세력(남곤, 심정 등)이
궁궐 담장에 "주초위왕(走肖爲王, 조(趙)씨가 왕이 될 것이다)"라는 글을 써놓고 조광조의 역모로 조작.
4. 중종이 조광조를 사형에 처하고, 신진 사림을 숙청(기묘사화 발생)
---
3. 기묘사화의 결과
1. 조광조 사형(1519년) → 신진 사림 세력 축출
조광조는 유배되었다가 사형당함.
개혁을 추진하던 사림 세력이 대거 제거됨.
2. 훈구 세력의 권력 강화
훈구파가 다시 정권을 장악하고, 개혁 정책 대부분이 폐기됨.
왕권과 훈구파의 협력 체제가 유지됨.
3. 이후 사림 세력의 재기(선조 때 다시 성장)
사림 세력은 이후에도 중앙 정계에서 성장하여
명종·선조 대에 다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
결국 훈구 세력을 몰아내고 사림이 조선을 이끌게 됨(사림 정권 형성).
---
4. 기묘사화의 의의와 평가
✔ 조광조의 개혁이 너무 급진적이었지만, 조선 정치사에 개혁적인 흐름을 만들었음.
✔ 훈구파가 일시적으로 권력을 유지했지만, 결국 사림 세력이 후에 정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됨.
✔ 기묘사화 이후에도 사림의 성리학(성리학적 이상 정치)이 조선 사회의 핵심 이념으로 자리 잡음.
➡ 기묘사화는 조광조의 개혁 실패를 의미하지만, 조선 정치의 흐름이 점차 사림 중심으로 변화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