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보빙사(報聘使), 美대통령께 악수 대신 큰절(肅拜禮)로 禮를 표하다
고종 19년인 1882년 5월 22일, 조선은 구미 열강 가운데 미국과 최초로 조미조약(朝美條約)을 체결했다. 조선이 오랫동안 서양의 세력과 문물을 단절하는 쇄국양이정책을 버리고 문호를 열어 미국과 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이로써 조선은 중국에 대한 사대외교를 청산하고 자주독립국가로 새 출발을 하게 되었다.
일찍이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신흥대국으로 부상하는 일본의 조선 침략을 견제하려는 속셈을 가진 청나라의 실세 이홍장의 권유가 있었으나 ‘조선’이라는 나라가 국제사회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미조약의 체결에 앞서 이를 주선한 이홍장은 미국 측 협상대표 슈벨트(Robert W. Shufeldt, 薛斐爾)와의 양자 간 교섭에서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종주권(宗主權)을 유지하기 위하여 조미조약 제1조에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다’라는 속방론(屬邦論)을 명문화할 것을 주장한 반면 슈벨트는 이 속방론을 단호히 배격하고 ‘독립론’을 주장했다. 속방론 문제로 교섭이 결렬 위기에 봉착하자, 이 두 사람은 일보씩 양보하여 조약문에는 속방론을 삭제하는 대신에 조약 체결 후 조선 국왕이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별도조회문’(別途照會文)에 속방문제를 언급하기로 타결했다.
이렇게 해서 아시아 대륙의 작은 나라 조선이 쇄국정책을 버리고 태평양 건너 미국에게 수호조약을 체결하고 문호를 개방하였다. 이어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 국가와도 차례로 문호를 개방하게 된다.
1883년 1월 9일, 미국은 의회가 조선과 체결한 조미조약을 비준하자 아더(Chester A. Arthur) 대통령은 2월 13일, 이를 최종 비준한 후 3월 9일에 푸트(Lucius H. Foote, 福德)를 조선주재 미국특명전권공사에 임명했다. 미국 정부가 조선주재 미국공사의 지위를 청나라와 일본 공사의 지위와 등등하거나 그 이상의 ‘특명전권공사’(E.E.& M.P.)로 격상한 것은 미국이 조선을 중요하게 여기는 ‘조선 독립국정책’의 일환책으로 취한 조치이다. 미국은 청나라의 조선 간섭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면서 조선을 완전 자주독립국이라는 한 개체로 인정한 것이다. 가령 영국은 북경 주재 청나라공사의 지휘를 받도록 했고, 독일은 외교관 중 가장 낮은 영사를 서울에 파견함으로써 청나라의 입장에 동조했다. 그러나 이처럼 미국은 조미조약 제2조 ‘본 조약을 입약하고 통상화호(通商和好)한 뒤에 양 체약국은 각각 외교대표를 상대국 수도에 주재할 수 있다. 이는 자국의 편의에 따른다’라는 규정에 따라 청나라의 입장을 전면 거부하고 특명전권공사를 서울에 파견했다.
이에 따라 초대 조선주재 미국공사인 푸트는 1883년 5월 19일, 서울에 부임하여 조선과 미국 간 비준문서를 교환하고, 이어 고종에게 국서를 제정한 후 정동(貞洞)에 미국공사관을 개설했다.
외교관의 교환이라는 상호주의 원칙에 따라 조선도 미국 워싱턴에 조선전권공사를 파견 주재해야 했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재정적 부담으로 상주공사관을 개설할 수가 없는 형편이어서 푸트는 그 대안으로 ‘견미사절단’(遣美使節團) 파견을 제의했다.
조선정부는 이 건의를 수용, ‘조선보빙사’(朝鮮報聘使)를 워싱턴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1883년 7월 16일, 조선정부는 마침내 견미사절인 조성보빙사를 임명했다. 구성원으로는 전권대신에 민영익(閔泳翊), 부대신에 홍영식(洪英植), 종사관에 서광범(徐光範), 수행원에 유길준(兪吉濬) 등 5명, 그리고 외교에 어둡고, 언어장벽으로 인해 미국 사정에 밝은 사람의 안내가 필요하므로 외국참찬관 겸 고문관에 특별채용한 미국인 로우엘(Percival Rowell)과 중국어 통역관 1명을 포함한 모두 10명이다. 일행은 배와 대륙횡단열차 등을 이용해 일본 동경,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시카고를 거친 거쳐 9월 13일 마침내 워싱턴에 도착했다.
♣ 전권대신 민영익을 비롯한 조선보빙사 일행 모습
일행은 영접 업무를 맡은 해군 장교의 안내에 따라 당시 미국 아더 대통령이 머물고 있던 뉴욕으로 다시 이동한 후 1883년 9월 18일 오전 11시에 호텔 대접견실에서 국서제정식(國書提呈式)에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는 전권대신 민영익을 비롯하여 전원이 관복인 사모관대(紗帽冠帶)로 정장하고 일렬종대로 대접견실로 나아갔다. 흉배와 각대를 두른 청홍 색깔의 이 조선의상은 화려하고도 황홀한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대접견실 중앙에 아더 대통령이 국무장관과 함께 서 있었는데, 조선보빙사 일행은 전권대신 민영익을 선두로 차례대로 대통령에게 큰 절을 올렸다. 예상 밖의 동양식 큰 절에 아더 대통령은 서서 허리를 굽혀 답례했다. 1860년의 일본 최초의 견미사절이 선 채로 허리를 굽혀 미국 대통령에게 인사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 보빙사 전권대신 민영익 일행이 미국 아더 대통령에게
큰 절로 예를 표하는 모습.
인사가 끝난 후 민영익은 대통령에게 신임장인 ‘대조선국 국서’(大朝鮮國 國書)를 제정했는데, 국서에는 ‘조선’ 대신에 ‘대조선국’이, ‘왕’ 대신에 ‘대군주’로 최초 사용하고, 중국연호를 버리고 조선의 ‘개국연호’를 사용해 자주독립국가임을 상징하고 있었다.
민영익의 인사말에 이어 아더 대통령이 미국은 다른 나라 영토를 점령 지배할 의도가 없으며 오로지 상호 우호적 관계와 호혜적 교역을 통해 이익을 같이 나누자는 취지의 답사를 했다.
그 후 보빙사 일행은 미국 정부의 배려로 동부지방의 방적공장, 대형 농장, 신문사, 소방서, 육군사관학교 등 여러 곳을 둘러보고, 워싱턴에 와서는 미국 정부의 각 부처를 방문했다. 특히 농림부에는 미국의 영농기술 도입과 함께 각종 농작물 종자와 영농 책자도 얻고, 우체국에는 홍영식이 우편제도의 도입에 열의를 보였다.
보빙사 일행이 머무는 호텔의 옥상에는 새로 제정한 태극기를 휴대하였다가 게양하여 사절단의 위엄을 과시하고 조선의 국위를 선양했다. 시찰여행을 마친 보빙사 일행은 10월 12일 백악관을 방문, 아더 대통령에게 미국의 환대에 대한 감사와 함께 고별인사를 한 후 나누어 귀국길에 올랐다.
전권대신 민영익 일행은 대서양을 건너 6개월간 유럽 각국을 순방하면서 조선인 최초의 세계 일주 항행 후 귀국한 반면, 부대신 홍영식 일행은 바로 귀국 길에 올라 왕에게 미국 방문 결과를 복명했다.
이 때 수행원 신분이었던 유길준은 민영익의 특별 배려로 조선인 최초의 ‘미국 유학생 제1호’로서 상투를 자르고 양복을 입고 미국에 남아 공부하게 되면서 상투를 짜른 ‘단발 제1호’가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