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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뇌에서 출발한 행복한 글쓰기
1. 번뇌와 글쓰기
“이 세상에서 레프 톨스토이만이 아닌 많은 사람들이 매일 번민하고 있다”고 한 건 바로 톨스토이 자신이다.
아스타포보 역장 관사에서 죽음을 하루 앞두고 했던 말로
전한다. 번민, 고뇌, 근심, 걱정은 삶 그 자체로 어떤 사상이나 종교, 철학도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생명의 원천이자 존재의 표상이다. 고뇌란 전매특권이 없어 인간 누구나 지닌 존재의 본질임을 일깨우는 지적이다.
세계 문학인 중 고뇌가 많았기로 치자면 금메달급인 톨스토이는 죽음 앞에서 맏딸 타냐에게 자신이 편찬한 <<인생이란 무엇인가>> 중 10월 28일(그가 가출한 날)자의 항목을 읽어달라고 당부했는데, 여기에는 바로 인간의 고통이나 고뇌에 대한 잠언들로 채워져 있다. 이 날자 맨 앞에는 “고통의 감각이 우리 육체의 보전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조건인 것처럼, 마음의 고뇌는 우리 영혼의 보전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조건이다.”는 자신의 말이 나온다. 쇼펜하우어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그럴듯한 충고에 이어 톨스토이는 “고뇌는 활동에 대한 박차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활동 속에서 생명을 느낀다.”는 칸트의 말을 인용한다.
흔히들 문학예술을 ‘행복의 문학’과 ‘구원의 문학’으로 나누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둘 다 어떻게 존재의 고뇌를 벗어나는가를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를 게 없다. 행복의 문학이 고뇌를 벗어난 상태를 그린다면 구원의 문학은 고뇌를 가져오게 만든 여러 요인들을 비판하므로 써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을 설정해주기에 상처와 고뇌는 문학의 원천일 수밖에 없다. 진주조개의 상처가 클수록 진주알이 크듯이 인간도 고뇌와 아픔이 커야 위대한 작품을 창조할 수 있다는 명제가 성립하는데, 그렇다고 근심걱정만 많으면 모두가 위대한 문학예술가가 된다는 뜻은 아니나 고뇌가 창조의 원천임은 부인할 수 없다.
대체 고뇌란 무엇일까. 파스칼은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자기의 비참함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위대한 것이다. 나무는 자신의 비참함을 알지 못 한다.”(<<팡세>> 397)고 말한다. 이어 그는 “그러므로 자신의 비참을 깨닫는 것은 비참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위대한 일이기도 하다.”고 덧 부친다.
비참함을 느끼기, 거기서 고뇌의 단계로 접어드는 과정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으나 108번뇌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그 번뇌, 사단칠정(四端七情)의 인생살이가 엮어진 게 수필임은 더 논의할 필요도 없다. 물론 수필에도 ‘행복한 글쓰기’가 다수를 차지하지만 그 행복조차도 고뇌의 부산물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기에 몽테뉴는 수필을 이렇게 정리해준다.
맨 처음 내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가져본 때는, 몇 년 전 내가 스스로 찾아든 고적한 생활에서 슬픈 심정으로, 따라서 내 천품과는 반대되는 아주 우울한 기분에서 시작한 일입니다. 그리고 어떤 다른 재료라고는 하나도 갖지 않았고 속이 비었기 때문에 나는 내 자신을 논거와 제목으로 스스로에게 제시해 보았습니다.
몽테뉴 <<수상록>>중 <부성애에 대하여>
고적. 슬픔. 우울 등은 고뇌와 한 가족에 다름 아니다. 그런 고뇌들을 씻고자 글을 쓰려 하나
이론적이고 논리적이며 과학적인 어떤 자료나 근거, 혹은 멋진 사례조차 없었기 때문에
“내 자신을 논거와 제목”으로 삼았다는 취지의 이 말은 근대 이후 수필문학의 영역
구획에서 금과옥조처럼 동원되는 정의(定義)로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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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장기의 상처와 문학적 감성
누군들 슬픔이 없으랴만 수필가 임매자의 참담함은 <남루한 내 일기장>이나 <상처가 치유되는 글쓰기> 등을 통해서 느낄 수 있듯이 우리나라의 보통 여자들 보다는 더 짙고 깊다.
이 작가에게 전 생애에 걸쳐서 떠나지 않는 상채기는 “20대에 수해로 인해 많은 가족”을 잃은
참사였다며 이렇게 그 아픔을 토로한다.
나에게 다가온 주검들은 여린 감수성을 할퀴고 짓밟고 지나갔다. 그것은 암울한 상처가 되어
의식의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늘 속울음을 삼키며 끝 모를 어둠을 견디었다.
이겨낼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지만, 지금도 과거는 나에게 아련한 향수가 아닌 흉기가 되어
끊임없이 찔러댄다.
<상처가 치유되는 글쓰기>
당시의 정황은 참담 그 자체였다.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하여 어머니가 “아홉 식구의 생계와
교육을 혼자 책임졌다. 그러다가 수해로 인해 가족 여럿이 우리 곁을 떠났다.
남편과 네 자식을 보낸 여인”(<모리교수와 내 등짐>)인 어머니의 맏딸인 작가 임매자는
그날 이후 가장노릇을 겸해야 했다.
좀 더 자세한 정황을 알고 싶으면 <시시콜콜 옐로카드를 흔들다>를 읽을 필요가 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 아버지의 사업 번창으로 인해 궁핍함을 모르고
자랐다.”는 이 작가의 아버지는 극장을 운영했다.
위 글에서 아버지의 사업 실패란 그 뒤를 말한다.
이때의 참담함을 회고한 글 <혼자 가는 숲>은 “지방 유지인 분이 나를 며느리로 삼고
싶다면서 내가 받을 수 있는 경제적 지원을 조목조목 구체적으로 열거했다. 그 목록에는
우리 가족이 살 수 있는 집과 우리 가족을 살릴 수 있는 가게도 들어있었다.”고 쓴다.
그런 조건이건만 고집불통 임매자 작가는 “그의 아들은 나와 같은 직장에 근무하는, 운동을
좋아하는 건장한 청년이었다.”고 하면서도 굳이 거절하고 자신의 인생을 설계했다.
이 상처를 떠안고 영혼의 아픔을 달래지 못한 채 살아남는 건 곧 육신의 아픔까지로 번질
고통이 아닐 수 없다.
이 상처를 작가는 “문학과 소통하기 시작하니 앙다물고 뭉쳐있는 마음의 응어리를 풀고
여물지 못한 생각을 방생하는 능력”이 생겨 “마음에 얼룩이 들었을 때 흔적 없이 자국을
지우는 지혜와 오염을 걸러내는 자정능력”까지 가지게 되었다고 진솔한 속내를 드러낸다.
그래서 수필가란 임매자에게는 아래와 같이 정의된다.
글을 쓰면서 내가 발 담그고 있는 세상이 오염되어 비틀대고 있는 것도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가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지를 인식하는 일의 중요성을 느낀다.
우리는 한 시대를 같이 공유하고 있는 존재들이 아닌가.
내 온 몸이 그렇게 글을 낚아채는 촉수가 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래서 작은 글이나마 혼을 울리는 글을 써서 오염되어 가는 세상이 맑아지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남은 생은 얼마나 밝고 찬란하겠는가.
<상처가 치유되는 글쓰기>
이 작가의 유소녀 시절의 기억은 <아름다운 기억의 갈피>에 차분하게 점묘(點描)되어 나타난다. 그중 “중학교 때 시골에서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녔던 삼 년이 나에겐 참으로 소중한 재산이다.”는 회고처럼 자연과 함께했던 시절의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은 이 작가에게 중요한 예술적
감성의 급성장기로 부각된다. 이 시절의 경험이 누적되어 작가 임매자는 유독 자연예찬자가 된 것인지 모른다.
이어 20대 때는 “군인 부대가 주둔했던 곳”에서 작은 책방을 열었던 적이 있는데,
“살벌한 병영 생활에서 여성의 섬세함에 굶주렸던 군인들에게 나는 나름대로
아름다운 존재”였다고 회고한다. 가히 짐작할만한 백설 공주 시절이겠기에
“지금도 삶이 나른할 때마다 습관처럼 일기장을 펼치면 그들의 이니셜에서 잊고 있던
기억조각들이 오래된 말린 낙엽처럼 툭 떨어져 새삼 가슴이 설레곤 한다. 분홍색 이니셜을
타고 지난 시간 속으로 돌돌돌 밀려들어가 초콜릿처럼 달콤해진다.”고 회고할 지경이다.
그러나 한 번 잘못 소문이 나면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은 위기감으로 “그들의 스포트라이트가
두렵기만 해 20대를 꽃피울 아릿한 추억 하나 만들지 못한 곳”이라는 결말에 이르면 독자들은 허전해지는데, 그래도 “애물단지 일기장에는 상처 입은 짐승모양의 울부짖는 감성들이 곳곳에 배어있다.”는 대목에서 행여나 하고 기대를 걸면서 다시 글을 펼치게 만들지만 ‘혹시나’는 ‘역시나’로 끝난다. 그러나 이때의 경험이 이 작가로 하여금 <헌 책방에 빠지다>에서 보듯이 전문가 수준의 독서가로 만들었을 성 싶다. 특히 미술관련 서적 독서에서는 가히 수준 이상인데, 그건 아마 중학생 대의 자연미 예찬과 책방 시절의 독서 열풍이 합쳐져서 형성된 예술가 기질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설익은 흔적들이 풋과일처럼 떫고 시어 부끄럽지만, 출구를 찾지 못했던 그 당시의
자아를 적어놓은 백지 칠판이기도 했다. 무엇을 끼적거려도 무슨 짓을 해도 자기 방임이
용서가 되는 그곳은 어둡긴 하지만 앞으로 달려가는 강한 흐름을 느낄 수 있는 꿈이
탁본되어 있었다.
(중략)
아직도 나의 애물단지를 누가 보게 될까봐 태워버리려 꺼내었다가 다시 넣어 두기를 반복한다. 탁본되었던 꿈이 찌꺼기가 되어 너덜너덜해진 남루한 일기장, 지금껏 몸담았던 그 허물을
벗고 이별 연습을 해야 한다. 나에게 중요했던 것이지만 나의 소멸과 함께 가족에겐 짐만 될 뿐인 것을.
<남루한 내 일기장>
그녀에게 삶이란 고뇌와 상처 때문에 “아무리 젊음이 좋아도 10대나 20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현실에 대한 방황과 미래에 대한 불안과 혼동의 그 시절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렇다고 다시 30대나 40대로 돌아가기는 더욱 싫다. 치열한 삶 속에서
욕심의 틀에 끼어 호흡하기도 곤란했던 그곳엔 곳곳에 나를 혹독하게 다그치며
야단치는 것이 특기인 양 상처를 그은 흔적만 남아 있다. 그래서 흡사 전쟁을 치룬 것
같아 다시 돌아보기 싫다.”고 할 지경이다. 오죽하면 “풋내 나던 비린 생보다 지금
이곳에 서 있는 세월이 내 안의 감옥을 서서히 벗어던지고 여유로운 삶을 관망할 수
있어 편안하다. 작은 풀잎에도 입 맞추고 싶고 길거리의 아무하고라도 어깨 걸고 싶은
주체할 수 없는 이 헤픈 사랑이 좋다.”(위와 같은 글)고 할까.
3. 결핍된 삶과 구원의식
왜 젊음조차도 이처럼 처절하게 상처로만 얼룩져 있을까를 물을 겨를도 없다. 그녀의 문학세계는 생래적인 외로움과 애정결핍과 고뇌들로 그득 차있다. <결핍으로 굳어진 자아>는 임매자의 작품 중 작가의 황량한 인간 존재의 고뇌를 가장 처절하게 파헤친 단편소설 같은 작품이다.
“아들을 원하는 집안의 다섯째 딸로 척박한 땅에 굴러 떨어지듯 태어나 차별 대우”로 자란 한 여인(작가의 친구)은 “엄마를 잃은 뒤 새엄마 아래서 겪었던 모진 고생”으로 더욱 딱딱한 내면의 옹이를 안게 되었다. 그러나 외면적으로는 “똑똑하고 씩씩한 사업가의 기질을 타고 난 그녀는 하는 일마다 승승장구였다.” 하지만 “가끔씩 일주일 이상 밥을 하지 않고 거리를 헤매며 정신적인 공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여인. 이런 여인에게 남편은 어떤 존재일까.
“남편과 둘만 있을 때면, 새엄마가 옷을 벗기고 방에 가두던 그 캄캄한 절망이 떠올라 견딜 수 없다.”는 호소처럼 그녀의 남편은 모임에서 자주 보았던 것처럼 “잘 웃던 다정한 신사”가
아니라 가여운 한 여인이 “전 생애를 걸고 남편의 사랑을 갈구했지만, 그는 얼음처럼
냉담”한 사나이였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성장기야 어쨌든 어른이 된 이후의 인생은
자기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강변할 수도 있다. 여기에 대하여 작가 임매자는 이렇게 반론한다.
정신과 의사 정혜신은 “정신과에서는 환자들의 개인력을 기술하는 난의 첫 줄에 출생 시
환영받지 못한 아이였는지, 환영받는 아기였는지의 여부를 기록하게 되어 있다.
존재 자체가 거부되는 상황에서 세상에 태어난 사람인지 아닌지의 여부가 정신과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고려 요소인 것이다. 출생을 거부당한 사람은 살아가는 내내 이러한
감정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우며 어릴 때의 애정결핍으로 인하여 자라면서 내면에
분노가 쌓인다.”고 했다.
<결핍으로 굳어진 자아>
작가의 이런 객관적인 진단과는 달리 정작 “동네 친구들은 그녀 주위에 두껍고 단단한 비난의
벽을 쌓는 반면 그녀의 남편에게는 연민과 존경의 시선을 보냈다.”는데 세상의 묘미가 있다.
또 하나의 진실이 허위에게 패배하는 모양새다.
이만하면 깔끔한 수필작품이 될 법 한데, 작가는 여기서 끝맺지 않고 다시 파고든다. “그녀의
남편은 몇 달 전 세상을 떠났다.” 그럼 여기서 끝인가?
아니다. 이제 그녀는 해방될 수 있을까. 오히려 더 고적할 수도 있다. 사랑을 갈구했던 대상이
애정을 충족시켜주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나버린 건 또 하나의 한을 누적시킨 결과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홀로된 그녀에게 무책임하게 새로운 사랑을 찾아 나서라고 충고할 확신이나 자신이 있는가? 그리 간단하지 않을 것 같다.
작가는 이런 여인상을 유독 성실하게 부각시키는데, 그건 작가 자신의 내면적인 고뇌를 상충시켜 위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은 이 작가에게 가장 큰 고뇌의 촉진제로 <갈색 장갑과 파에 대한 어두운 기억>은 작가의
감수성과 친인척에 대한 각별한 애정의 감성이 돋아나는 작품이다. 제부의 죽음을 다룬 이 글의 백미는 아래 구절이다.
잠이 오지 않아 무릎을 모으고 웅크리고 있는데 작은 소리가 내 귀를 세운다. 베란다의
까만 봉지에 들어있는 파의 마른 몸끼리 부딪는 사그락대는 소리였다.
파는 물만 주면 잘 자란다. 그러나 눕혀놓으면 태양 빛을 받지 못하여 똑바로 서 있으려고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다. 서 있기를 완강히 고집하여 세워두면 더 오래 싱싱해진다.
뽑혀 와서도 완강히 서 있으려고 버티는 파의 왕성한 생명력이 나는 눈물 나게 부럽다.
돈황의 검객들이 / 玉碎한 그 자리에 / 무수한 칼날이 올라왔다 // 칼끝에 방울꽃을 달고 / 피 냄새를 숨긴 채, // 땡볕을 견디고 있는 / 저 고요한 칼 밭
-정병근 「파 밭」-
씨받이 파는 머리에 하얀 왕관을 쓰고 한 판 일을 벌이려는 듯 시퍼렇게 날을 세우고
정렬해있다. 칼을 든 내 손끝에서 무의식적으로 생과 사가 잘려나가는 파를 심거나
자르는 것도 나 자신이다. 차라리 처음 사오면서 바로 잘라버릴 것을.
그에게 왕성한 삶의 희망을 주었다가 필요에 의해 자르기도 하는 내게 화분에 살아서
남아있는 그들은 무엇이라고 할까. 심을 때는 언제이고 잘라내는 것은 또 뭐야 하며
저희들끼리 어깨 부딪치며 웅얼대고 있겠지. 완강히 저항하는 파가 잘리면서 내는
그 지독한 반항의 냄새가 눈물을 끌어낸다. 조카아이는 그들의 시퍼런 저항을 모르는데도 파를 못 먹는다.
<갈색 장갑과 파에 대한 어두운 기억>
“늦은 밤 나와 함께 잠들지 못하는, 파를 흔드는 바람의 속닥거림이 신경을 건드린다.
30대의 젊은 제부를 솎아 갈 때 남아있는 우리는 얼마나 애통해 했던가.”라는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때 아닌 죽음 앞에서 이 작가는 그 슬픔을 파의 생명력에 빗대어 투정을
한껏 부린다. 참 맛깔스런 작품이다.
4. 열린 시각으로 세상 바라보기
임매자 수필의 매력 중 빠트릴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건전한 인문학적인 비판의식이다.
자녀를 독일 유학생으로 보냈던 탓에 유럽적 인문학의 상식과 교양이 익혀진 것인지
아니면 한국적인 인문학의 불모지에서 작가 나름대로 터득해낸 결과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수필문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1950년대의 냉전체제적인 가치관을 극복한 점이
유난히 소중해 보인다.
예컨대 <그녀의 유연한 모성애>는 1980년대 후반기의 학생운동으로 투옥 당한 아들을
면회하러 갔다가 만난, 역시 아들을 면회 온 “키 작은 그녀”를 그린 대목은 매우 신선하다.
“꼬불꼬불한 파마머리에 화장기 없는 평범한 얼굴이었으나 유난히 맑은 그녀의 눈길에서
직관적으로 끌림이 왔다. 그녀는 자기 아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나직하고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의연하게 대처하라.’ 고 용기를 주고 있었다.”
행여 아들에게 불이익이라도 당할까 전전긍긍하던 작가는 “순간 정신이 퍼뜩 들었다. 난 내 아이가 이 상황에서 속히 벗어나기만을 안타깝게 기원할 뿐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던 것이 부끄러웠다.”고 솔직히 시인한다. 이어 작가는 “나는 역사의 획을 긋는 중요한 시기를 한 번도 참여해 본 적이 없이 무심하게 지나쳤다.”며, 기억에도 없는 일본에게 침략 당했던 시대, 부유한 부모님 따라 부산 어느 산골에서 안온한 날을 보냈던 6‧25, “4‧19 혁명도, 5‧16 쿠데타도, 6‧3 데모도 관심이 없었던 시대의 방관자”로 지냈던 걸 털어놓는다.
당연히 “큰 아이가 대학생이 되어서야 군사정권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내 앞에 와 우뚝” 섰지만 “학생운동에 민주화의 기대를 걸면서도 내 아이만은 데모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랬다. 내 몸
한 군데도 시대로 인하여 상처 난 곳 없이 이렇게 이중 잣대의 끝을 잡고 있었다.”고 속내를
가감 없이 드러내며, 유연하고 탄력 있는 그녀의 모성애와 “나의 동물적인 모성애는 극과
극으로 대비” 된다고 절감한다.
이 정도로라도 열린 가치관을 가진 글이 우리 수필계에서는 얼마나 보기 어려운가는 굳이 말 할 필요도 없다.
열린 사고의 지평은 언제나 새로움을 수용하는 자세로 나타나는데, <트랜스젠더, 동성애 그리고 현기증> 같은 글은 동성애를 편견 없이 바라볼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한 글이다.
“2003년 4월 1일, TV에서 장국영이 호텔에서 투신자살했다는 뉴스”를 화두 삼은 작가는 트랜스젠더(trans-gender)를 거론하면서 중국의 현대무용가인 진싱(金星), “한국사회의 굳은 통념의 벽을 단 한 번에 깨고 나온 하리수” 등을 거론하면서 “지나치게 섹시함만을 무기로 들고 나오지 않고 어떤 용기 있는 진보적인 이슈를 들고 나왔다면 나는 좀 더 그녀를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그러나 다른 한편 이런 생각 역시 마음 밑바닥에 짙게 깔린 유교적인 통념에서 헤어나지 못한 것 같아 서글프다.”고 조심스럽게 수렴해낸다.
자유주의적인 열린 사고란 한가지만이 아니라 모든 분야, 모든 방향에서 진취적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 작가 역시 허례의식이 넘쳐나는 한국의 결혼 풍속도를 비판한 <소박한 결혼식>,
가정에서의 남녀불평등의 극복을 추구한 <아름다운 부부로 사는 길>, 청소년 교육의 불모화
현상을 고발한 <욕설은 해방구인가>, 자녀교육의 바람직한 방법론을 모색한 <시시콜콜 옐로카드를 흔들다>나 <축구선수 꿈을 접은 조카> 등 많은 작품들이 세계화란 구호만 난무하는
한국사회가 얼마나 보수적인 고리타분 일색인가를 여성적인 섬세한 감각의 붓놀림으로 가볍게 비판해준다.
독일 청년을 사위로 맞고자 올렸던 독일에서의 질박하고 사랑 넘치는 낭만풍의 결혼식을 그린 <아름다운 부부로 사는 길>은 주인공인 따님이 이제는 저세상으로 가버려 가슴 아픈 글로 변해버렸지만 잊지 못할 추억이 스며있다. 따님에 관해서는 <이승에 신을 고이 벗어두고>, <어디로 가야할까>, <딸의 마음속 옹이> 에서 자상하고 애간장 끊는 모정을 담아내고 있다.
<욕설은 해방구인가>는 젊은 세대의 거친 언어벽(言語癖)을 질타하면서도 그걸 일방적인 설교조로 규탄하지 않고 욕설이 얼마나 통쾌한 불만의 배설구인가를 변호하면서 아름다운 국어운동의 긴박성을 시사한다.
열린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작가들이 필연적으로 다루는 주제에 환경생태계 문제가 있는데, 임매자 역시 이 쟁점을 피하지 않는다. <다시 환생할 수 있었으면>, <나는 위대해! 나는 영원해!>, <물이 부족하다> 등은 이 분야의 글들이다. 이 계열의 글 중 <다람쥐의 건망증>은 환경생태계와 건망증을 결합시킨 재기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우리 속담에 ‘가을 다람쥐처럼 욕심만 낸다.’는 말이 있듯이, 다람쥐는 겨울을 나기 위해 도토리를 열심히 모은다.” 그러나 다람쥐는 기억력이 나빠 도토리를 어디에 묻어 두었는지 잊어버려
그 건망증 덕분에 더 많은 도토리나무를 얻을 수 있게 된다는 줄거리에다 인간들의 건망증을 보탠 이 글은 재미있게 읽힌다.
5. 돋보이는 예술기행
임매자 작가의 글에서 돋보이는 분야로 예술기행이나 행사를 다룬 글들을 빼어놓을 수 없다.
남매가 다 독일 유학생 출신에다 요절한 따님은 미술전공인지라 예술 전만과 미학에 남다른
조예를 지닌 작가인지라 예술기행은 현대 한국 수필문단에서 단연 부각될만한 미시적인
관찰이 평가받을만하다. <베토벤의 데드 마스크>는 제목 그대로 베토벤의 생가를 방문하고서
두리뭉실 쓴 글이 아닌 데드마스크 하나에 초점을 맞춘 글이며, <암스테르담에서 만난 고흐>나 <기억을 불러낸 고갱> 등도 전문성이 돋보이는 예술기행이다.
각종 전시회나 예술행사 관람기 역시 일품이다. 2005년 8월 서울 갤러리에서 열렸던 세바스티앙 살가도의 사진전 관람기인 <넋이 옮겨 붙은 사진전>, 20세기 사진 미학의 거장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전을 다룬 <브레송 사진전에서 사르트르와 사진을 찍다>, 고전미와 대중성을
연계시킨 <박인수의 순수음악과 대중음악의 만남> 등등이 이 계열의 글들이다.
작가는 이렇듯 예술세계에 탐닉해 들어가다가 문화예술 정책이나 교육문제에까지 간심을 갖고 한국의 미술교육과 창작지원 정책이 얼마나 후진적인가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화가들의 작업실>에서 작가는 “2004년 8월 22일 저녁, 평소 즐겨보는 사회 고발 프로인 「시사 매거진 2580」을 통하여 ”딸의 선배로 독일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귀국한 분“이 한국에서 얼마나 열악한 조건에서 미술창작에 임하고 있는가를 소개하면서 독일에서 직접 봤던 막대하고 풍성한 화가들에 대한 창작지원 양상을 부러운 시선으로 그려준다.
<잘못된 미술 교육>은 더욱 참담하다. 독일에서는 “선생님들은 물감을 쏟고 뿌리고 해도 전혀 상관이 없는 장소에 이젤과 도화지와 각종 칠 재료를 배열하고 그림 그릴 수 있는 각종 장비를 마련해놓고 마음대로 그리게 한다. 아이들은 희한한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다. 이러한 교육관의 기초 위에서 미술 교육은 매우 자유스러운 분위기 속에 이루어지고
있으며, 미술이 단순히 사물을 보고 그대로 묘사하는 수공업적 기술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원칙을 잘 지켜나가고 있다.”고 자상하게 소개해주면서 대학입학시험 문제 하나를 알려준다.
독일의 미술대학 입학시험도 우리나라와는 발상 자체가 다르다. 독일의 어느 대학 미대입시
문제는 “책꽂이가 쓰러지면서 꽂혀있던 책들이 마구 떨어지는 상황을 묘사하라.”이었다.
우리나라 유학생들은 대부분 사실적 묘사에 급급했기에 결과는 모두 낙방이었다.
그러나 합격한 독일 학생들은 저마다 다양한 묘사를 했다. 책 한 권이 비상하는 것처럼 그린
사람, 책 속에서 알파벳이 쏟아져 나오는 걸 묘사한 사람, 아예 혼돈의 추상을 그린 사람도
있었다. 미술교육은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미적 감각과 자기 표현력을 기르는 교육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잘못된 미술 교육>
한국은 어떤가. “어떤 모임에서 한 미술교사가 했던 말에 공감을 느낀다. 가르쳐야 하는 학생
수는 무려 8백 70명쯤 되는데 일주일에 한번 있는 수업도 행사나 시험으로 취소되기 일쑤여서 아이들과 한 달에 한번밖에 만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일 년에 20~30회 정도에 불과한 미술 수업을 통해 학생들이 바람직한 미감(美感)을 가지도록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는 고발은 모두가 귀담아 들어야할 것 같다.
이런 심미안을 가진 작가인지라 기행 역시 절도가 있다. 주마간산격 스침의 글이 아닌 특정
지역에 대한 집중력이 뚜렷해서 독자들에게 신선감을 준다.
“본에서 차로 약 40분 거리인 코블렌츠는 라인 강과 모젤 강의 두 물줄기가 만나는 곳”으로,
“지명의 라틴어 어원 자체가 ‘두 강이 만나는 곳’ 즉 ‘두물머리’라며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하는 양수리(兩水里) 같은 곳”인데 그곳 기행이 <완벽한 평화를 뽑아낸 코블렌츠>이다.
그런데 정작 작가가 이 글에서 주목한 것은 독일의 노인복지 문제이다. 자세한 사항은 여기서
더 논할 필요가 없지만 한국 수필에서 기행문이란 고작해야 명승지의 관광안내 책자 수준에
머문 것에 비하면 이런 글이 얼마나 소중한지 느낄 수 있다.
<와인산지에서 돋는 까칠한 가시 하나>는 독일 중서부 모젤 강변에 있는 포도주 축제로 유명한 작은 마을 베른카스텔 쿠에스(Bernkastel Kues) 기행이다.
6. 황홀한 환희를 위하여
임매자는 <본처와 애첩>에서 “처음 수필과 쉽게 인연을 맺은 것이 내 실수였다. 내 삶에
관계되는 일들은 모두 글감이라 기억 저편에 누워있는 이미지들을 손만 내밀면 쉽게
건져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것은 오해였다. 그는 가까이 할수록 멀어지기 때문이다.”고
요약한다. “그와 동거하는 동안 나는 말이 없어지고 한 공간에 같이 지내는 가족에게
정다운 눈짓도 인색해진다. 그와 사는 몇날 며칠은 허깨비로 살며 남편의 말도 알아듣지
못하기도 하고 무엇을 꺼내려고 냉장고 문을 열다가 머리를 디밀고 뭘 찾으려고 했는지
깜박 잊고 그냥 문을 닫기도 하는 등, 그를 머릿속에 담고 다니는 동안에는 일상의 순서를
잊어버린다.”고 그 글쓰기의 어려움을 실토한다. 그러나 수필은 그녀에게 위안이자 희망이며 삶의 가치임을 아래와 같이 정리한다.
그가 조선 여인들처럼 고고하고 정갈하게 보이는 것은 내 눈에 콩깍지가 낀 탓이 아닐까.
그와 만나고부터 난 넘치는 행복감을 만끽하며 산다. 수필과 만나기 전 내 삶은 햄버거처럼 흔한 싸구려 행복들 속에서 살며 참새 한 마리의 무게로도 휘청댔다.
그를 만나자 난 미세한 촉수로 삶을 넓고 깊게 감지하고 싶은 욕망이 일었고 깊은 지적인 욕구가 생겼다. 결혼하고 맞벌이 하는 동안 책과 멀리했던 나는 닥치는 대로 독서를 멈추지 않았다. 뭔가는 남겠지 하고 무모한 방법으로 탐했다.
(중략)
내가 남자라면, 수필은 본처이고 시는 애첩쯤 되는 걸까.
(중략)
몇날 며칠을 본처에게 시달리다가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깊은 항아리에 잊은 듯 묻어버린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처박아 삭히고 있던 글을 꺼내 환기를 시키면 싱싱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머리에서 파생된 단어들을 앞으로 줄을 세우고 고르고 골라 자신이 있을 자리에 배치시키고 대장간에 공구를 벼르듯이 수도 없이 벼르기 시작한다.
<본처와 애첩>
자신을 남성화시켜서 애첩과 본처로 호칭한 익살과 재치가 돋보이는데, 충분히 작가의 수필관이 반영된 이 글처럼 비록 허우적거릴지라도 “황홀한 환희를 위해” 조강지처를 버리지 않고 보다 좋은 작품을 왕성하게 써나가며 그 위안을 통해 그녀가 오래 행복하기를 간절히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