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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자사랑방 원문보기 글쓴이: 대태양
목민심서 (牧民心書) |
정조 때의 문신 ·학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1818년 고금(古今)의 여러 책에서 지방 장관의 사적을 가려 뽑아 치민(治民)에 대한 도리(道理)를 논술한 책이다. 필사본으로 48권 16책으로 되어 있으며 〈여유당전서 與猶堂全書〉 권16~29에 실려 있다.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저자의 《경세유표(經世遺表)》가 정부기구의 제도적(制度的) 개혁론을 편 것이라면, 이 책은 지방 관헌의 윤리적(倫理的) 각성과 농민경제의 정상화 문제를 다룬 것이다. 이 책은 저자가 순조 때 천주교(天主敎) 박해로 전남 강진(康津)에서 귀양 생활을 하는 동안에 저술한 것으로, 조선과 중국의 역사서를 비롯하여 여러 책에서 자료를 뽑아 수록하여 지방 관리들의 폐해를 제거하고 지방행정을 쇄신코자 한 것이다. 내용은 모두 12편(篇)으로, 각 편을 6조(條)로 나누어 모두 72조로 엮었다.
① 부임편(赴任篇):제배 (除拜) ·치장(治裝) ·사조(辭朝) ·계행(啓行) ·상관(上官) ·이사(莅事). ② 율기편(律己篇):칙궁(飭躬) ·청심(淸心) ·제가(齊家) ·병객(屛客) ·절용(節用) ·낙시(樂施). ③ 봉공편(奉公篇):선화(宣化) ·수법(守法) ·예제(禮祭) ·문보(文報) ·공납(貢納) ·요역(沓役). ④ 애민편(愛民篇):양로(養老) ·자유(慈幼) ·진궁(振窮) ·애상(哀喪) ·관질(寬疾) ·구재(救災). ⑤ 이전편(吏典篇):속리(束吏) ·어중(馭衆) ·용인(用人) ·거현(擧賢) ·찰물(察物) ·고공(考功). ⑥ 호전편(戶典篇):전정(田政) ·세법(稅法) ·곡부(穀簿) ·호적(戶籍) ·평부(平賦) ·권농(勸農). ⑦ 예전편(禮典篇):제사(祭祀) ·빈객(賓客) ·교민(敎民) ·흥학(興學) ·변등(辨等) ·과예(課藝). ⑧ 병전편(兵典篇):첨정(簽丁) ·연졸(練卒) ·수병(修兵) ·권무(勸武) ·응변(應變) ·어구(禦寇). ⑨ 형전편(刑典篇):청송(聽訟) ·단옥(斷獄) ·신형(愼刑) ·휼수(恤囚) ·금포(禁暴) ·제해(除害). ⑩ 공전편(工典篇):산림(山林) ·천택(川澤) ·선해(繕演) ·수성(修城) ·도로(道路) ·장작(匠作). ⑪ 진황편(賑荒篇):비자(備資) ·권분(勸分) ·규모(規模) ·설시(設施) ·보력(補力) ·준사(竣事). ⑫ 해관편(解官篇):체대(遞代) ·귀장(歸裝) ·원류(願留) ·걸유(乞宥) ·은졸(隱卒) ·유애(遺愛) 등으로 분류되어 있다.
이 책은 농민의 실태, 서리의 부정, 토호의 작폐, 도서민의 생활 상태 등을 낱낱이 파헤치고 있는데, 한국의 사회 ·경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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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丁若鏞 ; 1762~1836) |
조선 후기의 학자 ·문신으로서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자는 미용(美鏞) ·송보(頌甫)이다. 그리고 초자는 귀농(歸農)이며 호는 다산(茶山) ·삼미(三眉) ·여유당(與猶堂) ·사암(俟菴) ·자하도인(紫霞道人) ·탁옹( 翁) ·태수(苔 ) ·문암일인(門巖逸人) ·철마산초(鐵馬山樵)이고 가톨릭 세례명 요안이다. 또 시호는 문도(文度)이며 아버지는 진주목사(晉州牧使) 재원(載遠)이며, 어머니는 해남윤씨(海南尹氏)로 두서(斗緖)의 손녀이다. 경기도 광주시 초부면(草阜面) 마재[馬峴]에서 태어났다.
1776년(정조 즉위) 남인 시파가 등용될 때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상경, 이듬해 이가환(李家煥) 및 자신의 매부인 이승훈(李昇薰)을 통해 이익(李瀷)의 유고를 얻어보고 그 학문에 감동되었다. 1783년 회시에 합격, 경의진사(經義進土)가 되어 어전에서 《중용》을 강의하고, 1784년 이벽(李蘗)에게서 서학(西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책자를 본 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78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가주서(假注書)를 거쳐 검열(檢閱)이 되었으나, 가톨릭교인이라 하여 같은 남인인 공서파(功西派)의 탄핵을 받고 해미(海美)에 유배되었다.(=신유박해) 10일 만에 풀려나와 지평(持平)으로 등용되고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城制)와 기중가설(起重架說)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인 수원성(水原城) 수축에 기여하였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연천현감 서용보(徐龍輔)를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이듬해 병조참의로 있을 때 주문모(周文謨)사건에 둘째 형 약전(若銓)과 함께 연루되어 금정도찰방(金井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가 규장각의 부사직(副司直)을 맡고 97년 승지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자 자명소(自明疏)를 올려 사의를 표명하였다. 그 후 곡산부사(谷山府使)로 있으면서 치적을 올렸고, 1799년 다시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다시 모함을 받아 사직하였다. 이 때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응지진농서 應旨進農書〉의 검토를 통해 토지문제를 농업체제 전반과 연결시켜 구상할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되었는데, 이후 기본 생산수단인 토지 문제의 해결이 곧 사회정치적인 문제 해결의 근본이라고 인식하고 현 농업체제를 철저히 부정한 위에 경제적으로 평등화를 지향하는 개혁론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1799년에 저술한 《전론(田論)》의 여전제(閭田制)는 이같은 논리가 가장 강렬하게 반영된 것이었다. 여전제의 내용은 토지 사유를 기반으로 하는 지주제를 부정하고 토지 국유를 원칙으로 하는 기초 위에, 향촌을 30가구의 여(閭) 단위로 재편성한 다음 여장(閭長)의 통솔하에 공동노동을 통해 경작하고 농민의 투하노동력을 기준으로 생산물을 분배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관련된 조세제도 개혁책으로서 정액제(定額制)를 취하고, 역제(役制)의 경우 재편성된 향촌제도와 관련시켜 병농일치(兵農一致)를 원칙으로 하면서 호포제(戶布制)로의 개혁을 고려했다. 이러한 여전제의 보급을 위해서 여내(閭內) 농민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고 무위도식하는 선비들에게 실생활에 필요한 직업으로의 전환을 유도하고자 했다. 이처럼 여전제는 농민경제의 균산화(均産化)와 안정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동시에 생산성 향상을 통한 사회적 부의 증대를 위해 노동력의 기능을 강조한 공동농장·협동농장적 경영론이다. 이는 종전의 한전론(限田論)·균전론(均田論) 등 토지분배에만 초점을 맞춘 개혁론에 비해 농업생산의 사회화 문제 등 농업생산이나 농업경영 전반의 변혁까지도 포괄하는 논리였다. 그러나 시행의 전제가 되는 국유화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당장 실현될 수 없었던 토지개혁방안이었다.
특히 《전론》에서 농업생산의 사회화 문제와 연결하여 공상(工商)을 농업에서 완전 분리시켜 독립적 사회분업으로 발전시키고자 한 점이 주목되는데, 이는 당시 상품화폐경제와 수공업 발전의 현실을 염두에 둔 견해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농업생산에 주력하는 중농정책(重農政策)이 견지되어 사족의 상업·공업에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전개한 것은 아니었다. 이상의 사회개혁론과 궤를 같이하여 혁신적 정치개혁론으로 제시된 것이 《원정 (原政)》·《원목 (原牧)》이다. 여기에서 그는 아래로부터의 정치개혁 이념을 표방하고 있다. 《원정》에서 "토지의 균등한 분배를 왕정의 제일책으로 삼고 물화의 유통과 교환을 촉진하며 지방생산력의 불균등 발전을 완화하고 정치적 권리를 균등하게 해야 한다"고 하여 파격적인 체제개혁론을 주장했으며 이는 만년에 저술한 정치권력론·역성혁명론으로서의 《탕론 (湯論)》과 이념적 기초를 같이한다. 그는 《원목》에서 태고 이래 민(民)의 자유의사와 선거에 의해 이장(里長)·면정(面正)·주장(州長)·제후(諸候)·천자(天子) 등 각 계층의 통치자들이 발생했음을 지적하고 이들이 만약 민의 이익에 부합되는 일을 하지 않고 자기들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하여 행동하는 경우, 민은 자신들의 자유의사로써 통치자를 교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국가발생에 관한 학설을 담고 있는 것으로 자본주의 발생 초기 유럽의 사회계약설과 유사한 논리가 되며 해석에 따라서는 정치의 민주주의적 합의제, 선거제, 법치주의를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유럽의 경우와 달리 당시의 역사발전 사실과 부합되지 않으며, 다만 극도로 부패한 봉건사회에 대한 반기로서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이같은 정치개혁론은 그의 사회 경제개혁론과 함께 당시의 현실 속에서 혁명을 수반하지 않고는 실현불가능한 이상론이며 궁극적인 지향점은 밝혔으나 상호 유기적인 관련을 지니면서 체제 전반에 대한 개혁론으로 체계화되기는 어려웠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순조 1) 2월 천주교도들이 청나라 신부 주문모를 끌어들이고 역모를 꾀했다는 죄명을 내세워 일으킨 신유교난(辛酉敎難) 때 이가환·이승훈·권철신(權哲身)·최필공(崔必恭)·홍교만(洪敎萬)·홍낙민(洪樂敏), 그리고 형인 약전(若銓)·약종(若鍾) 등과 함께 체포되었으며, 2월 27일 출옥과 동시에 경상북도 포항의 장기(長 )에 유배, 뒤에 황사영 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에 연루되어 강진(康津)으로 이배되었다.
그 곳 다산(茶山) 기슭에 있는 윤박(尹博)의 산정을 중심으로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균점과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의 폐기 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학문체계는 유형원(柳馨遠)과 이익을 잇는 실학의 중농주의적 학풍을 계승한 것이며, 또한 박지원(朴趾源)을 대표로 하는 북학파(北學派)의 기술도입론을 받아들여 실학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즉, 그는 이곳에서의 유배기간 동안 독서와 저술에 힘을 기울여 그의 학문체계를 완성했다. 특히 1808년 봄부터 머무른 다산초당은 바로 다산학의 산실이었다. 1818년 이태순(李泰淳)의 상소로 유배에서 풀렸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을 연마했다. 61세 때에는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지어 자서전적 기록으로 정리했다. 그는 유배생활에서 향촌현장의 실정과 봉건지배층의 횡포를 몸소 체험하여 사회적 모순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정확한 인식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유배의 처참한 현실 속에서 개혁의 대상인 사회와 학리(學理)를 연계하여 현실성있는 학문을 완성하고자 했다. 〈주례 周禮〉 등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독자적인 경학체계의 확립과 '일표이서'(一表二書)를 중심으로 한 사회전반에 걸친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사회개혁론이 이때 결실을 맺었다.
먼저 《경세유표(經世遺表)》는 "나라를 경영하는 제반 제도에 대하여 현재의 실행 여부에 구애되지 않고 경(經)을 세우고 기(紀)를 나열하여 우리 구방(舊邦)을 새롭게 개혁해보려는 생각에서 저술했다"고 하여 당시 행정기구와 법제 및 경제제도를 대폭적으로 개혁하고자 한 것이다. 《경세유표(經世遺表)》의 구성은 경전에서의 이념적 모델을 제시하고 다음으로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제도의 변천과정을 아울러 참조하여 개혁론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목민심서(牧民心書)》 는 "고금의 이론을 찾아내고 간위(奸僞)를 열어젖혀 목민관에게 주어 백성 한 사람이라도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나의 마음씀이다"라고 하여 현 국가체제를 인정한 위에서 목민관을 중심으로 한 향촌통치의 운영개선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한편 《흠흠신서(欽欽新書)》는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옥사에 대해 "백성의 억울함이 없기를 바라는 뜻"에서 통치자의 인정(仁政)·덕치(德治)의 규범을 명확히 하고자 저술되었다. 제도개혁에 있어서 《경세유표(經世遺表)》가 전국적 범위에서 국왕·국가가 집행할 것을 모색한 데 비해 《목민심서(牧民心書)》는 군현의 범위에서 목민관에 의해 수행되어야 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흠흠신서(欽欽新書)》 는 《목민심서(牧民心書)》의 형전(刑典) 부분을 보충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같이 일표이서는 저술동기와 내용에서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상호 유기적인 관련 속에서 1817~22년에 기초, 완성되어 후기 개혁론의 대계를 보여주고 있다. 한편 일표이서의 개혁론은 경학사상체계와 상호 유기적인 관련을 가지면서 체계화되었다. 정약용은 〈주례〉 속에서 '호천상제'(昊天上帝)의 개념을 원용한 상제관(上帝觀)을 형성하여 전통적인 천명사상(天命思想)을 매개로 이를 군주와 연결하고 있다. 그러나 천명은 한 사람에게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바뀌어 항상 유덕(有德)한 사람에게 옮겨진다는 것이다. 덕의 유무는 민심을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므로 군주권의 근원은 결국 민의에 달려 있는 것이며, 천명 그 자체가 통치권의 궁극적 근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다산은 군주를 정점으로 한 통치질서를 회복하여 치세(治世)의 근본을 확립하고자 했지만 그와 동시에 군주의 우월성은 민의에 의해 한계가 규정된다는 논리를 강조했다. 상제와 직결된 왕권과 상제와 직결된 민의 자주권 회복에 의해 하나의 통일된 통치체계를 수립하려 할 때 그 모습은 중앙집권체제의 확립으로 나타나며 사적 중간지배층의 배제는 필수적인 사안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표이서에서 표방되는 개혁론은 전기에 비해 훨씬 온건한 것인데 이는 역설적으로 그가 조선 후기 사회에 대한 현실을 크게 고려하면서 실현 가능한 점진적인 방안, 단계론적 시행론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경세유표(經世遺表)》의 〈전제 田制〉에서는 우선 토지국유제하 농민의 개별적 점유를 원칙으로 하는 정전제(井田制)를 주장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토지국유의 실현이 불가능한 상태를 전제하여 차선책으로 정전제에서 동시에 시행되었던 구일세제법(九一稅制法)만이라도 원용하려는 방안을 제기했다. 이는 토지제도의 개혁보다는 국가재정과 밀접한 조세제도의 개혁, 일체의 중간수탈 배제를 목적으로 한 운영의 합리화를 통해서 현안을 해결하려고 한 것으로서 점진적이고 과도기적인 개혁방안이라 할 수 있다.
이 단계에서 다산은 사민구직(四民九職)의 직업분화와 직업의 전문화를 강조하고 사회분업을 통한 경제발전의 길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먼저 상업의 경우 농업과 완전히 분리시켜 대등하게 발전시키며 상업적 이윤을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조세개혁을 통해 상인들을 보호하며 해외 상업을 발전시키려 했다. 이를 위해 동전의 유통을 촉진시키고 금화·은화와 같은 고액화폐의 발행으로 원격지간 교역에 이바지하고자 했다. 즉 상업을 적극적으로 발전시키되 특권적 대상인은 억제하고 중소상인은 보호하는 방식을 도모했다. 다음으로 수공업에 있어서 적극적으로 기술도입론을 강조했다.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는 지방 차원에서 민간 직물업에 관련된 기술도입을 역설했고 《경세유표(經世遺表)》에서는 토목공사기술 등을 국가 차원의 제도개혁을 통해 적극 도입하고자 했다. 이는 그의 중앙관제 개혁의 일환으로 시행되는 것이다. 즉 기술도입의 주체인 국가기구가 강력하게 민간산업을 보호·통제하고 기간산업을 관장함으로써 대상인의 횡포에서 중소수공업자를 보호하려 했다. 국영광산론 역시 천연의 부에 대한 특권층의 자의적 이용을 배제하여 국가 통제하에 두며 그 이익을 공전(公田) 매입에 돌림으로써 전체적으로 소농민의 이익이 되게 하는 방안이었다. 이밖에 도량형의 전국적 통일, 물화유통을 촉진하기 위한 교통수단의 정비를 제안했다. 이는 18세기말과 19세기초 유통경제의 발전과정을 염두에 둔 논리일 뿐만 아니라 그의 체제 전반에 걸친 개혁론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그가 제기한 개혁론의 철학적 기초에는 주자학과 대비되는 면모가 있었다. 첫째, 주자학이 천인합일(天人合一)에 기초하여 인간과 자연 사이에 일리(一理)로서의 태극이 관통하고 있음을 주장한 데 비해 다산은 천도(天道)와 인간세계를 분리하여 각각 존재의 법칙과 당위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주자학의 계급성과 불평등한 인간관을 비난하고 인간세계의 질서는 변화 가능한 것으로 여기며 요순 3대의 제도에서 그 규범을 찾으려고 했다. 한편 그는 천인분리를 상정하면서도 절대적인 인격적 주재자로서의 천의 존재를 별도로 언급했다. 이때 천은 모든 인간과 개별적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로 인해 인간은 모두 존엄한 존재라는 점을 강조했다. 둘째, 기질에 따른 인간성의 차등설을 비판하고 우수한 능력자는 특정 신분에서만 배출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그의 능력주의는 신분제에 입각한 국가의 교육, 과거, 인사제도에 대한 개혁론으로 연결되었다. 셋째, 욕망관[人心道心說]에서 인간의 욕망을 인정하되 적절한 통제가 병행되어야 함을 말했다. 무제한적으로 욕구를 인정하는 것은 특권층의 입장과 통하는 것이라 본 그는 인간이 기본적으로 외적 환경에 좌우된다고 보아 구체적인 사회제도의 정비를 통해 이를 해결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이는 주관적 심성 문제에 치중한다거나 도덕적인 호소에 의한 해결방안을 내세우는 주자학과 대별되는 주장이다. 그는 전통적 관념론에 몰두하지 않고 다양한 경험론적 세계관을 지향했다. 이에 따라 천문·기상·지리·물리 등 제반 자연현상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이를 적극적으로 규명하고자 했다. 그의 자연과학 사상의 기초는 우주관에서 비롯되는데, 전통적인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을 논박하고 서학과 지리학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지원설(地圓說)에 관해 논증했다. 물리학적인 현상의 본질을 규명하는 데에도 관심을 기울여 볼록 렌즈가 태양광선을 초점에 집중시켜 물건을 태우는 원리, 프리즘의 원리를 이용한 사진기 효과 등을 밝혀냈다. 또한 종두법(種痘法)의 실시와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종두심법요지 種痘深法要旨〉를 저술했고, 각종 약초의 명칭·효능·산지·형태 등을 조사 검토하여 생물학적인 연구 성과를 내기도 했다. 이러한 기초과학에 대한 관심은 구체적인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기술개발로 연결되어 농기계, 관개수리시설 및 도량형기를 발명하고 정비했다. 또한 한강의 배다리[舟橋]를 설계하고, 수원성의 축조시 거중기·고륜(鼓輪)·활차(滑車) 등의 건설기계를 창안했다. 이와 함께 〈기예론 技藝論〉에서는 방직기술·의학·백공(百工)기술을 발전시킬 것을 강조했으며 〈원정〉에서는 수리관개사업·식수(植樹)·목축·수렵·채광기술 및 의학을 깊이 연구해야 농민들이 풍족하게 살 수 있다는 과학정책론을 제시했다.
이처럼 어릴 때부터 시재(詩才)에 뛰어나 사실적이며 애국적인 많은 작품을 남겼고, 한국의 역사 ·지리 등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여 주체적 사관을 제시했으며, 합리주의적 과학정신은 서학을 통해 서양의 과학지식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1910년(융희 4) 규장각제학(提學)에 추증되었고, 1959년 정다산기념사업회에 의해 마현(馬峴) 묘전(墓前)에 비가 건립되었다. 저서에 《정다산전서(丁茶山全書)》가 있고, 그 속에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마과회통(麻科會通)》 《모시강의(毛詩講義)》 《매씨서평(梅氏書平)》 《상서고훈(尙書古訓)》 《상서지원록(尙書知遠錄)》 《상례사전(喪禮四箋)》 《사례가식(四禮家式)》 《악서고존(樂書孤存)》 《주역심전(周易心箋)》 《역학제언(易學諸言)》 《춘추고징(春秋考徵)》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 《맹자요의(孟子要義)》 등이 실려 있다. <두산대백과사전> 참고 |
목민심서 서(牧民心書序) |
牧民心書序 昔舜紹堯。咨十有二牧。俾之牧民。文王立政。乃立司牧。以爲牧夫。孟子之平陸。以芻牧喩牧民。養民之謂牧者。聖賢之遺義也。聖賢之敎。原有二途。司徒敎萬民。使各修身。大學敎國子。使各修身而治民。治民者牧民也。然則君子之學。修身爲半。其半牧民也。聖遠言堙。其道寢晦。今之司牧者。唯征利是急。而不知所以牧之。於是下民嬴편001困。乃瘰乃瘯。相顚連以實溝壑。而爲牧者方且鮮衣美食以自肥。豈不悲哉。聖朝監二縣守一郡護一府牧一州。咸有成績。雖以鏞之不肖。從以學之。竊有聞焉。從以見之。竊有悟焉。退而試之。竊有驗焉。旣而流落無所用焉。窮居絶徼十有八年。執五經四書。反復研究。講修己之學。旣而曰學學半。 乃取二十三史及吾東諸史及子集諸書。選古司牧牧民之遺跡。上下紬繹。彙分類聚。以次成編。而南徼之地。田賦所出。吏奸胥猾。弊瘼棼興。所處旣卑。所聞頗詳。因亦以類疏錄。用著膚見。共十有二篇。一曰赴任。二曰律己。三曰奉公。四曰愛民。次以六典。十一曰賑荒。十二曰解官。十有二篇。各攝六條。共七十二條。或以數條合之爲一卷。或以一條分之爲數卷。通共四十八卷。以爲一部。雖因時順俗。不能上合乎先王之憲章。然於牧民之事。條例具矣。高麗之季。始以五事。考課守令。國朝因之。後增爲七事。所謂責其大指而已。然牧之爲職。靡所不典。歷擧衆條。猶懼不職。矧冀其自考而自行哉。是書也。首尾二篇之外。其十篇所列。尙爲六十。誠有良牧。思盡其職。庶乎其不迷矣。昔傅琰作理縣譜。劉彝作法範。王素有獨斷。張詠有戒民集。眞德秀作政經。胡大初作緖言。鄭漢奉作宦澤篇。皆所謂牧民之書也。今其書多不傳。唯淫辭奇句。霸行一世。雖吾書惡能傳矣。雖然易曰多識前言往行。以畜其德。是固所以畜吾之 德。何必於牧民哉。其謂之心書者何。有牧民之心。而不可以行於躬也。是以名之。 當宁二十一年辛巳暮春。洌水丁鏞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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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심서 서(牧民心書序) 옛날 중국의 순(舜) 임금은 요(堯) 임금의 뒤를 이어 12목(牧)에게 물어, 그들로 하여금 백성을 다스리게[牧民] 하였고, 주(周) 나라 문왕(文王)이 정치를 할 때는 사목(司牧 지방 장관)을 세워 수령으로 삼았으며, 맹자(孟子)는 평륙(平陸)에 가서 가축 사육하는 것을 백성 다스리는 데 비유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보면 백성 다스리는 것을 목(牧)이라 하는 것은 성현이 남긴 뜻이다. 성현의 가르침에는 원래 두 가지 길이 있는데, 하나는 사도(司徒)가 백성들을 가르쳐 각각 수신(修身)하도록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태학(太學)에서 국자(國子 공경대부의 자제)를 가르쳐 각각 몸을 닦고 백성을 다스리도록 하는 것이니,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바로 목민인 것이다. 그렇다면 군자의 학문은 수신이 그 반이요, 반은 백성 다스리는 것이다. 성인의 시대가 이미 오래되었고 성인의 말도 없어져서 그 도(道)가 점점 어두워졌다. 요즈음의 지방 장관이란 자들은 이익을 추구하는 데만 급급하고 어떻게 백성을 다스려야 할 것인지는 모르고 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곤궁하고 피폐하여 서로 떠돌다가 굶어죽은 시체가 구렁텅이에 가득한데도 지방 장관이 된 자들은 한창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으로 자기만 살찌우고 있으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나의 아버지께서는 성조(聖朝)의 인정을 받아, 연천 현감(漣川縣監)ㆍ화순 현감(和順縣監)ㆍ예천 군수(醴泉郡守)ㆍ울산도호 부사(蔚山都護府使)ㆍ진주 목사(晉州牧使)를 지냈는데, 모두 치적이 있었다. 비록 나는 불초하지만 그때 따라다니면서 보고 배워서 다소 듣고 깨달은 바가 있었으며, 뒤에 수령이 되어 이를 시험해 보아서 다소 증험도 있었다. 그러나 뒤에 떠도는 몸이 되어서는 이를 쓸 곳이 없게 되었다.
먼 변방에서 귀양살이한 지 18년 동안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을 되풀이 연구하여 수기(修己)의 학을 공부하였다. 다시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학문의 반이라 하여, 이에 중국 역사서인 23사(史)와 우리나라 역사 및 문집 등 여러 서적을 가져다가 옛날 지방 장관이 백성을 다스린 사적을 골라, 세밀히 고찰하여 이를 분류한 다음, 차례로 편집하였다. 남쪽 시골은 전답의 조세(租稅)가 나오는 곳이라, 간악하고 교활한 아전들이 농간을 부려 그에 따른 여러 가지 폐단이 어지럽게 일어났는데, 내 처지가 비천하므로 들은 것이 매우 상세하였다. 이것 또한 그대로 분류하여 대강 기록하고 나의 천박한 소견을 붙였다. 모두 12편으로 되었는데, 1은 부임(赴任), 2는 율기(律己), 3은 봉공(奉公), 4는 애민(愛民)이요, 그 다음은 차례대로 육전(六典)이 있고, 11은 진황(賑荒), 12는 해관(解官)이다. 12편이 각각 6조(條)씩 나뉘었으니, 모두 72조가 된다. 혹 몇 조를 합하여 한 권을 만들기도 하고, 혹 한 조를 나누어 몇 권을 만들기도 하여 통틀어 48권으로 한 부(部)가 되었다. 비록 시대에 따르고 풍습에 순응하여 위로 선왕(先王)의 헌장(憲章)에 부합되지는 못하였지만, 백성 다스리는 일에 있어서는 조례(條例)가 갖추어졌다.
고려 말기에 비로소 오사(五事)로 수령들을 고과(考課)하였고, 조선에서도 그대로 하다가 뒤에 칠사(七事)로 늘렸는데, 이를테면, 수령이 해야 할 일의 대강만을 들었을 뿐이다. 그러나 수령이라는 직책은 관장하지 않는 일이 없으니 여러 조목을 열거하여도 직책을 다하지 못할까 두려운데, 하물며 스스로 고찰하여 스스로 시행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 책은 첫머리의 부임(赴任)과 맨 끝의 해관(解官) 2편을 제외한 나머지 10편에 들어있는 것만도 60조나 되니, 진실로 어진 수령이 제 직분을 다할 것을 생각한다면 아마도 그 방법에 어둡지 않을 것이다. 옛날 부염(傅琰)은 《이현보(理縣譜)》를 지었고, 유이(劉彝)는 《법범(法範》을 지었으며, 왕소(王素)에게는 《독단(獨斷)》이 있고, 장영(張詠)에게는 《계민집(戒民集)》이 있으며, 진덕수(眞德秀)는 《정경(政經)》을, 호태초(胡太初)는 《서언(緖言)》을, 정한봉(鄭漢奉)은 환택편(宦澤篇)을 지었으니, 모두 이른바 목민에 관한 서적인 것이다. 이제 그런 서적들은 거의가 전해 오지 않고 음란한 말과 기괴한 글귀만이 일세를 횡행하니, 내 책인들 어찌 전해질 수 있겠는가. 그러나《주역(周易)》대축괘(大畜卦)에 '옛사람의 말이나 행실을 많이 알아서 자기의 덕을 기른다.' 하였으니, 이는 본디 내 덕을 기르기 위한 것이지, 어찌 반드시 백성을 다스리기 위해서만이겠는가. '심서(心書)'라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백성 다스릴 마음은 있으나 몸소 실행할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당저(當宁 그 당시의 임금. 여기서는 순조임) 21년인 신사년(1821) 늦봄에 열수 정용(丁鏞)은 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