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천후의 신앙(옵 1:19)
19 그들이 네겝과 에서의 산과 평지와 블레셋을 얻을 것이요 또 그들이 에브라임의 들과 사마리아의 들을 얻을 것이며 베냐민은 길르앗을 얻을 것이며
이 시간에는 “전천후의 신앙”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전천후’라는 말이 있지요? 전천후가 무슨 뜻일까요? 전천후[全天候]란 어떠한 상황에도 제 기능을 다할 수 있는 것을 전천후라고 합니다. 우리 믿음도 전천후가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어느 때를 막론하고 문제가 되지 않고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누리고 믿음으로 승리하면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육신 중심이 아니라 영 중심 믿음 중심일 때 가능합니다.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축복 속에 자기 지경을 넓혀가고 기업을 누리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얻는다는 말씀이 반복됩니다. 얻고, 얻고 또 얻고,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이처럼 성경의 약속을 믿고 어떤 환경에서든지 우리가 승리하고 누리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전천후의 믿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실보다 더 강한 믿음으로 맞서고 전진해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동서남북 사방에서 누립니다. 19절을 함께 보십시다. “그들이 네겝과 에서의 산과 평지와 블레셋을 얻을 것이요 또 그들이 에브라임의 들과 사마리아의 들을 얻을 것이며 베냐민은 길르앗을 얻을 것이며” 우리들도 하나님이 주신 복을 한 면만이 아니라 사면팔방에서 다 누려야 합니다. 즉 전천후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가질 전천후 신앙은 어떤 것일까요?
1. 곤고할 때도 잘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네겝과 에서의 산과” 먼저 남쪽을 기업으로 주시는 이야기입니다. 개역성경에는 네겝이 남방이라 되어 있는데 남방이 ‘네게브’지방입니다. 네게브는 서해 남서쪽 삼각형 모양의 지대로 물이 없는 사막지대입니다. 아주 마르고 간고한 땅입니다. 위치적으로 유다의 남쪽입니다. 그리고 에서의 산은 사해 남쪽의 에돔을 가리킵니다. 이곳은 아주 튼튼한 요새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사람들이 남쪽으로 지경을 넓혀가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남편 네겝과 같이 살다보면 답답하고 어려운 일을 당합니다. 혹은 에서의 산과 같이 위협적인 시험도 다가옵니다. 이때는 다 질식할 수밖에 없지요. 심령이 그렇게 고달플 때도 있습니다. 시 63:1을 보면 다윗이 이런 기도를 드린 적이 있었지요.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이처럼 우리 성도들은 영육 간에 고달플 때도 낙심하지 말고 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상태나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예수 안의 은혜와 복과 내게 주신 새 자화상을 바라보며 믿음과 평안과 승리를 얻어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핍박과 가난 가운데서도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옥에 갇혔을 때도 기뻐하고 감사하며 핍박 받기에 합당한 자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어려울 때 더 감사하고 더 하나님 앞에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그래도 나는 복 받은 자다. 나는 예수 안에서 승리자라고 강하게 믿음으로 맞서시기 바랍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믿음도 가지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진정한 게겝 점령자입니다. 어떤 가운데서도 시험 들지 않고 믿음에 승리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2. 풍부에 처했을 때도 잘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서쪽입니다. “평지와 블레셋을 얻을 것이요” 유대 산지와 블레셋 사이 평지입니다. 평지는 ‘쉐펠라’라 하는데 서편 지중해 쪽에 있습니다. 이곳은 남방 네게브와는 정반대입니다. 강우량이 많고 계곡이 많고 물이 흐르는 울창한 삼림지대입니다. 대단히 좋은 곳입니다. 방향으로 말하면 블레셋 사이 서쪽입니다.
이처럼 평안하고 승승장구할 때도 처할 줄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사울처럼 처음에는 겸손했지만 나중에는 교만하여 말씀을 버리고 제 맘대로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내 주관대로 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또 자기를 위해 기념비를 만들었습니다. 자기를 자랑하고 나타내려는 것이 또 교만입니다.
이러면 하나님의 복을 다 엎지르는 것입니다. 평안할 때는 믿음의 투사처럼 담대하던 사람들이 평안하고 잘되면 믿음의 잠을 잡니다. 이것은 모두 다 은혜를 잘못 누리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큰 복과 능력을 주셔도 왜 유지 못합니까? 근신을 풀고 자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4:12) 어려울 때도 낙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잘될 때도 자만하지 말고 더 잘하시기 바랍니다.
3. 바쁠 때도 이겨야 합니다.
다음에는 북쪽으로 넓혀집니다. “또 그들이 에브라임의 들과 사마리아의 들을 얻을 것이며” 유대 북쪽에 에브라임과 사마리아가 있습니다. 옛날 북 이스라엘 땅입니다. 에브라임은 강한 지파이고 에브라임에서 여호수아 같은 지도자가 많이 나와서 상당히 교만한 지파입니다. 사마리아 역시 북 이스라엘의 수도로서 정통성이 없는 정권이 대대로 지배했던 곳입니다.
그런데 들을 얻는다 했습니다. 평야지대였습니다. 그러니까 농사도 많이 했고요. 무척 바빴습니다. 땅이 많으면 수고가 많아요. 논은 대개 기계로 하지만 밭이 많으면 일이 더 많습니다. 이스라엘이야 다 밭입니다. 그들이 추수를 다 마치고 예루살렘에 올라와 초막절 행사라든가 여러 절기에 참여하려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습니다. 오죽했으면 여로보암이 절기를 한 달을 늦추었을까요? 그러나 그것은 이단입니다.
분주하고 바빠도 믿음을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무 바쁘고 분주하면 ‘하나님 우선 저 쪽에 계십시오.’ 하면서 제쳐놓을 때가 있습니다. 너무 바쁘고 분주해서 믿음을 다 잃어버립니다. 이건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그러나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바쁠수록 더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고든 장군(Charles George Gorden)에 대한 일화입니다. 고든 장군은 자신이 홀로 하나님을 만나는 아침시간을 방해하는 어떤 사람도 결코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막사밖에 하얀 손수건이 걸려있을 때는 그에게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긴급한 메시지라도 생사에 관계된 것이더라도 손수건이 내려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장군의 일상사가 얼마나 바쁘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분주한 일상사에도 그는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4. 혼자 있을 때에도 이겨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동쪽을 회복합니다. “베냐민은 길르앗을 얻을 것이며” 길르앗은 요단강 동쪽입니다. 이곳은 양치는 곳입니다. 루우벤 갓 므낫새 반 지파가 이곳에서 기업을 얻었습니다. 요단강이 경계를 만들어 예루살렘과 마음의 거리가 멀고 사람들은 들판에서 양을 칩니다. 몽고를 연상하면 되겠습니다. 아무 시선도 감시도 없고 혼자만의 세계입니다.
이런 곳에서도 믿음 지켜야 합니다. 사람의 시선이 없다고 범죄해서는 안 됩니다. 고독함에서도 승리해야 합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 중의 하나가 우울증입니다. 이 때는 영의 문제인가, 육신의 문제인가, 장기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잘못 먹은 음식은 없는가 살펴야지 안정제만 쓰면 되는 줄 알면 이기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이지하고 여주면 지혜를 주십니다.
혼자 있을 때도 믿음 생활 잘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여럿 있을 때는 무언가 의미를 갖고 신앙 생활하는데 혼자 있을 때는 의미조차 잃어버립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다윗처럼 살아야 합니다. 다윗이 아버지 이새의 양을 칠 때 푸른 목장이 신앙의 훈련장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장차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 속에 동서남북으로 모두 회복될 것이라는 오바댜 선지자의 예언입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아버지께서 예수 안에 주신 온갖 승리와 형통과 사랑을 확신하면서 곤고할 때나 풍성할 때나 바쁠 때나 슬플 때나 혼자 있을 때나 여럿 있을 때도 어떤 상황에서도 전천후의 온전한 믿음 가지고 신앙생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