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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學捷要
朱履貞
書學捷要弁言
六書*之始는 僅取記言하고 隸篆而上은 不聞書法이나 迨夫楷眞草行之變에 體勢旣殊하여 始崇風格이라 於是에 競攻點畫波撆之巧하고 務窮轉折衂挫之能하여 大則一字徑丈*하고 小則方寸千言하여 漢魏之際에 乃造其極이라 欲擅其長者는 泯其筆法하니 恡之以削書焚札*하고 求之以拊膺破冢*하여 爲學之難이나 幾成絶藝러라
육서를 사용한 처음에는 겨우 말을 기록하는 것만을 취하였고 예서ㆍ전서를 사용하기 전에는 ‘필법’이라는 것을 듣지 못하였으나 해서ㆍ진서ㆍ행서ㆍ초서의 변화에 이르러서는 체세가 이미 달라져 비로소 풍격을 숭상하였다. 이에 점ㆍ획ㆍ파ㆍ별의 공교함을 다투어 익히고 전절ㆍ육좌의 기량을 힘써 궁구하여 큰 것은 한 글자의 크기가 열 길이고, 작은 것은 사방 한 치 안에 일천 자가 되었다. 한ㆍ위나라 즈음에는 이에 그 변화가 극에 이르러 그 장점을 독점하려는 자는 그 필법을 없앴으니 글씨를 깎아 내거나 간찰을 불태워 인색하였고 가슴을 치며 애통해하고 무덤을 파헤쳐 구하여도 배우기 어렵게 되었으나 탁월한 기예는 거의 이루어졌다.
*六書(육서): 육서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조자법’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체’에 관한 것이다. 후한의 허신은 문자의 성립을 여섯 가지로 나누는 ‘육서’로 설명하여 상형(象形)ㆍ지사(指事)ㆍ회의(會意)ㆍ형성(形聲)ㆍ전주(轉注)ㆍ가차(假借)로 분류하였다. 여기에서는 여섯 가지 서체(書體) 즉 육체(六體)로 설명하고 있다. 한서ㆍ예문지에는 ‘고문ㆍ기자ㆍ전서ㆍ예서ㆍ무전ㆍ충서’라고 하였고, 소학감주ㆍ예문류에는 ‘대전ㆍ소전ㆍ팔분ㆍ예서ㆍ행서ㆍ초서’라고 하였다.
*一字徑丈(일자경장): 위항(衛恒, ?-291)은 사체서세(四體書勢)에서 “영제는 글씨를 좋아하여 당시에 글씨를 잘 쓰는 이들이 많았다. 사의관이 가장 뛰어났는데, 큰 것은 한 글자의 지름이 열 길이고, 작은 것은 사방 한 치 안에 일천 자가 되어 그 능력을 자랑하였다[靈帝好書, 時多能者, 而師宜官為最, 大則一字徑丈, 小則方寸千言, 甚矜其能]” 라고 하였다.
*削書焚札(삭서분찰): 위항은 사체서세에서 “사의관은 매번 글씨를 쓰고는 문득 깎아버리거나 그 서찰을 불태웠다. 양곡은 이에 판을 더 만들고 사의관이 술을 마시게 하여 그 취한 것을 살피고서는 그 판을 훔쳤다. 양곡은 마침내 글씨를 잘 써서 벼슬이 선부상서에 이르렀다[師宜官每書輒削而焚其柎. 梁鵠乃益為柎, 而飲之酒, 候其醉而竊其柎. 鵠卒以書至選部尚書”라고 하였다.
*拊膺破冢(부응파총): 欽定四庫全書ㆍ六藝之一録卷三百十六에 “종요의 자는 원상이다. 어려서 유덕승(劉德昇)을 따라 포독산에 들어가 글씨공부 삼년에 위 태조[조조(曹操)]ㆍ한단순ㆍ위탄과 함께 용필법을 평론하였다. 종요가 위탄에게 채옹의 필법을 물으니 위탄은 아끼고 알려 주지 않았다. 이에 가슴을 쳐서 피를 토하게 되니 태조가 오령단으로 살렸다. 위탄이 죽자 종요는 사람을 시켜 그 묘를 도굴하여 마침내 얻었다[魏鍾繇字元常. 少隨劉勝入抱犢山, 學書三年, 遂與魏太祖邯鄲淳韋誕議用筆. 繇乃問蔡邕筆法於韋誕, 誕惜不與, 乃搥胸嘔血, 太祖以五靈丹救之得活. 及誕死, 繇令人盗掘其墓, 遂得之]”는 기록이 보인다
然이나 自魏晉而後로 論書寖繁하여 唐宋以來로 靡法不備하고 究之是非互見이 去取不同하니 其或立言太高하여 無裨初學하니 多增條目하여 舍本求末하고 詮釋喩詞하여 穿鑿失指하고 摭拾陳言하여 徒繁簡櫝하고 幾使學者茫無適從이라
그러나 위ㆍ진나라 이후로 글씨를 논하는 것이 점점 번성하여 당ㆍ송나라 이후로는 법을 갖추지 아니한 것이 없었고, 연구하는 자들은 옳고 그르다는 서로의 의견을 버리고 취하는 것이 같지 않았다. 혹자가 이치를 세우는 것은 매우 고상하여 초학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대부분 조목만 증가시켜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구하였으며, 설명하여 풀고 비유만 하여 깊이 연구하는 요지를 잃고 진부한 말만을 주워 모아 한갓 책만 번잡하게 하니 배우는 자들은 아득해서 따라갈 수가 없었다.
夫書學浩瀚하여 攷其大要는 其端有二하니 雅言博辨하여 發揮奧旨者는 書之理也요 量鉤較畫規模執筆者는 書之法也라 理無窮極이나 法有繩墨이니 而法固初學之津梁也라 雖然이나 法簡而書工하여 法備而書微러니 是葢存乎其人이니 顧行之何如耳리오
서학은 넓고 크더라도 큰 요점을 상고하는 단서가 두 가지 있으니 우아하게 말을 하고 널리 변증하여 깊은 뜻을 펼쳐 꺼내는 것은 서예의 이치이다. 점을 헤아리고 획을 비교하여 집필을 법도에 맞게 하는 것은 서예의 법도이다. 서예의 이치는 다함이 없으나 필법은 법도가 있으니 법도는 진실로 처음 배우는 징검다리이다. 그러나 법도는 간단하나 글씨는 공교하고 법도는 갖추어 졌으나 글씨는 미미하다. 이것은 대개 그 사람에게 보존되어 있는 것이니 그 글씨 쓰는 행실을 돌아보는 것이 무엇과 같겠는가.
履貞未閑握管하여 敢言書法이나 特於前賢論書之編에 竊嘗留意하여 爰摘其簡明切要하고 便於爲學者하여 詮綴數言하고 以爲一己私籍하여 用備遺忘이라 管窺蠡測*이 詎堪濫厠編簡而質高明이라 儻原其荒謬하고 謂尙附翼古法於萬一이면 斯更幸甚焉이라 嘉慶庚申八月朱履貞識하노라
나 주이정은 한가하게 붓을 잡지는 아니하여 감히 필법을 말할 수는 없으나 다만 전현들이 필법을 논한 책에서 마음속으로 일찍부터 그 뜻에 머물게 되었다. 이에 간단명료하고 절실한 요점을 가려 쓰고 배우고자 하는 자들이 편리하도록 몇 마디 말을 묶어 설명하여 한 사람의 사사로운 문헌으로 삼아 망각에 대비하였다. 대롱으로 하늘을 엿보고[以管窺天], 소라껍질로 바닷물을 헤아리는 것[以蠡測海]이 어찌 외람되이 책과 간찰에 섞어서 고명한 사람의 질문을 감당하겠는가? 진실로 그 오류를 용서하고 고법에 만분의 일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매우 다행스러울 것이다.
경신(1800)년 팔월에 주이정은 쓰다.
*管窺蠡測(관규여측): 이관규천(以管窺天), 이려측해(以蠡測海): 文選ㆍ東方朔ㆍ答客難에 “속담에 이르기를 ‘대롱으로 하늘을 엿보고, 표주박으로 바닷물을 헤아리고, 풀줄기로 종을 친다’고 하니 그래가지고서야 어떻게 하늘의 조리를 관통하여 보고 바다의 이치를 알아내며 종소리를 낼 수가 있겠는가? [語曰, 以筦窺天, 以蠡測海, 以筳撞鍾, 豈能通其條貫, 考其文理, 發其音聲哉]”라고 하였다. 이는 견문이 좁은 것을 비유적으로 하는 말이다. 筦(관)은 管(관)과 통한다.
書學捷要卷下
秀水朱履貞纂述
01-1
書는 有撥鐙法*이라 鐙은 古燈字이니 撥鐙者는 聚大指食指中指撮管杪하여 若執鐙挑而撥鐙이니 卽雙鉤法*也라
서예는 발등법이 있다. 등은 옛날의 등잔 ‘燈’ 자이고, 발등은 엄지ㆍ검지ㆍ중지를 모아 붓끝을 잡는 것이다. 마치 등잔을 잡아 돋우고 등잔을 다스리는 것과 같아 즉 쌍구법이라 한다.
*撥鐙法(발등법): 운필법을 나타내는 용어로 그 뜻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대체로 세 가지 설로 나뉜다. 하나는, 등자(鐙子)를 가볍게 밟고 말을 편하게 몰듯이 붓을 얕게 잡고 편하게 쓰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엄지ㆍ중지ㆍ식지를 필관에 걸쳐서 붓을 잡는 방법으로 쌍구법(雙鉤法)이며, 다른 하나는 등잔의 심지를 돋우듯이 빠르지도 더디지도 않게 침착하게 쓰는 방법을 말한다. 심윤묵(沈尹黙, 1883-1971)은 이를 상세하게 변별하여 “‘등(鐙)’은 옛날에 또한 ‘등(燈)’이라 하였으니, ‘발등(撥鐙)’은 즉 ‘발등(撥燈)’으로 등잔 심지를 돋우는 상태를 일컬었다. 일설에는 손가락으로 붓을 잡음이 모두 곧고 호구(虎口)의 공간이 둥글며 마치 말의 등자와 같아 밟고 뛰어 올라 말 타기가 쉽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발등법에 대해서는 당나라 임온(林蘊)의 발등서(拨镫序), 명나라 동기창(董其昌)의 선화서보(宣和書譜), 송나라 계유공(計有功)의 당시기사(唐詩紀事), 원나라 진역증(陳繹曾)의 한림요결(翰林要訣), 청나라 주이정(朱履貞)의 서학첩요(書學捷要), 왕주(王澍)의 논서승어(論書賸語)를 참고할 수 있다.
*雙鉤法(쌍구법): 집필법의 하나로 ‘쌍포(雙苞)’라고도 하고 단구(單鉤)와 대칭을 이루는 말이다. 주이정은 본 서 01-2조목에서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쌍구법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의미가 있다.
첫째, 붓은 셋째손가락과 넷째손가락 사이에 있으며, 첫째손가락은 밖으로 향해 누르고 둘째와 셋째손가락은 함께 안으로 향해 구부려 잡는 방법을 가리킨다. 둘째, 법서(法書)를 복제하는 기법의 일종이다. 법서가 돌에 새겨지면 그 필획의 흔적을 따라 양 가장자리를 가는 선으로 윤곽을 그려내는 것을 가리킨다. 셋째, 서예공부가 매우 깊어지면 필획마다 중봉을 이루고, 점과 획에 터럭 같은 실이 있게 되며, 실의 양 가장자리에 먹물이 모여 ‘쌍구’의 모양이 드러나는 것을 가리킨다.
이상은 서론용어소사전 85-86p에서 취하였다. 따라서 위의 내용들은 한방명(韓方明)의 수필요설(授筆要說)과 황정견(黃庭堅)의 논서(論書), 강기(姜夔)의 속서보(續書譜), 양신(楊愼)의 묵지쇄록(墨池瑣錄), 포세신(包世臣)의 예주쌍즙(藝舟雙楫)에 보인다.
【역자주】
당나라의 임온(林韞, 생몰미상, 헌종 연간, 805-820 활동)은 <撥鐙序>에서 “내가 옛날에 한유(韓愈, 768-824)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는데 그 법을 ‘발등’이라 한다. 지금 그대에게 알려주니 그대는 전하는 것을 잊지 말아라. 밀어낸다는 ‘추(推)’, 잡아당겨 늘어뜨린다는 ‘타(拖)’, 비벼 꼰다는 ‘연(撚)’ 끌어당긴다는 ‘예(拽)’가 이것이다. 비결은 이것이 끝이니 그 뜻을 음미하라”라고 하였다.
명나라 양신(楊愼, 1488-1559)은 승암집(升菴集)ㆍ발등법(撥鐙法)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鐙은 옛 燈 자이다. 발등은 추획사ㆍ현침ㆍ수로를 모두 비유하는 말이다. 발등은 등을 돋우는 것과 같이 급하지도 더디지도 않은 것이다” 라고 하였다.
청나라의 강유위(康有爲, 1858-1927)는 광예주쌍즙(廣藝舟雙楫)에서 “혹자는 발등법이 당나라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육조시대는 손가락 힘을 섞지 않음이 없었으니, 필진도(筆陣圖)의 말로 증명할 수 있다. 육조시대에서 두루 찾아보아도 손가락을 운용한 운필의 설은 없다” 라고 하였다.
위의 여러 내용들을 보면 발등법에 대한 논의는 당ㆍ명ㆍ청ㆍ근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각각 서술하였음을 알 수 있다.
01-2
雙鉤者는 食指中指尖鉤筆向下하고 大指拓住하며 名指小指屈하고 而虛懸하여 帮附中指하고 不得著筆이면 則虎口*開하여 掌自虛러니 指自實矣라
쌍구법은 검지ㆍ중지 끝에 붓을 걸어 아래로 향하고 엄지는 밀치듯 머물며 무명지ㆍ소지는 구부리고 비워서 매달리게 하여 중지를 도와 필관에 닿지 않게 하면 호구(엄지와 검지 사이)가 열리고 손바닥이 저절로 비게 되어 손가락이 실하게 된다.
*호구(虎口): 호랑이의 벌린 입을 이르는 말로 매우 위태로운 처지나 형편을 비유하는 뜻이며 의학에서는 경혈(經穴)의 하나로 인체 혈위(血位)인 합곡(合谷)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서론에서는 엄지와 검지의 연결부분을 이르는 말로 집필을 하면 엄지와 검지의 연결부분이 호랑이의 벌린 입처럼 되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용어는 호구가 봉의 눈 모양을 이룬다는 ‘봉안(鳳眼)’과 용의 눈 모양을 이룬다는 ‘용안(龍眼)’ 등이 있다.
01-3
此謂雙鉤러니 依此學書이면 則圓轉勁利*하여 揮運自如라
이것을 쌍구법이라고 하니 이것에 의지하여 글씨를 배운다면 원만하게 전환하거나 강건하고 유려하게 운필하는 것이 자신의 뜻과 같게 된다.
01-4
文衡山*曰 李少卿*嘗言하니 我學書四十年에 今始有得이라 然이나 老無益矣라 子其及目力壯時爲之라하니라 因極論書之要訣하여 累數千言이니 葢公雖潛心古跡이나 而所自得者爲多라 其尤妙者는 能三指搦管*하고 懸臂*疾書라
문징명이 이르기를 “이응정은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글씨를 배운지 40년이 되어 지금에서야 비로소 얻은 것이 있다. 그런데 늙어서 이익됨이 없으니 그대는 시력이 좋은 젊을 때에 그것을 하라’고 했다. 그로 인하여 논서의 요결이 지극하여 몇 천 가지 말이 있으니 대개 공이 비록 옛 문헌에 잠심하여 스스로 얻은 바가 많게 되었다. 더욱 묘한 것은 세 손가락으로 필관을 잡고 팔을 들어 글씨를 빨리 쓸 수 있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文衡山(문형산): 문징명(文徵明, 1470-1550)은 원래 이름은 벽(璧)이고 자는 징명(徵明)이며 명나라의 뛰어난 화가ㆍ서예가ㆍ도학가ㆍ문학가이다. 선조의 고향이 형산(衡山)이어서 문형산으로 불린다. 그는 특히 소해를 잘 썼는데, 왕희지(王羲之)의 <황정경(黃庭經)>ㆍ<악의론(樂毅論)>, 종요(鍾繇)의 <선시표(宣示表)> 등과 당나라의 소해서 필법을 융입하여 온화하고 순후하며 매우 정묘[溫純精絶]한 풍모를 형성하였다.
*李少卿(이소경): 이신(李甡, 1431-1493)은 명나라 장주(長州) 사람으로 홍치 연간에 중태복소경(中太僕少卿)을 지낸 서예가이다. 자는 응정(應禎)ㆍ정백(貞伯), 호는 범암(範庵)이다. 구양순과 안진경의 서체를 본받고, 채양의 용필법을 익혀서 스스로 일가를 이루어 전ㆍ예ㆍ해ㆍ행ㆍ초 모든 서체에 능했다. 문징명은 일찍이 그에게서 글씨를 배웠다.
*搦管(닉관): 붓대를 잡는 것을 이른다.
*懸臂(현비): 현(懸)은 허공에 매달려 있는 것이고 굉(肱)을 비(臂)라 한다. 肱은 팔뚝[厷]이다. 그러나 서론에서 이르는 ‘현비법’은 완법(腕法)ㆍ운완(運腕)ㆍ현주(懸肘)ㆍ침완(枕腕)ㆍ착완(着腕)ㆍ제완(提腕) 등과 같이 팔과 손목의 운용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서론용어소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현완’에 대해 말하였다.
글씨를 쓸 때 팔꿈치와 팔을 들어 공중에서 붓을 운용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대부분 큰 글자를 쓸 때 사용한다. 공중에서 형세를 취하기 때문에 운필에 힘이 있고, 제어함이 자유롭다. 그러므로 골력을 거두고 이르게 하기가 쉽고, 글자의 형세에 무한한 효과가 나타난다.
01-5
按此卽撥鐙雙鉤法也이라 後人目爲三指立異者는 大謬也라 葢書法의 精勁圓活은 全在三指之尖이라 然이나 三指尖은 最難結實하고 更難活動하니 尤須臂腕指三者功夫齊到라야 方能成書라 所謂指運筆而腕不知라하여 旣入化境하고 乃悟妙理이니 此古人不言之祕라
이것을 살펴보면 발등은 쌍구법이다. 후인들이 보고 세 손가락을 기이하게 세웠다고 하는 것은 큰 오류이다. 대개 필법의 정교하고 힘차며 원만하고 활기 있는 것은 온전히 세 손가락의 끝에 있다. 그러나 세 손가락의 끝은 아주 건실하기가 어렵고 더욱 운필하기가 어려우니 모름지기 팔ㆍ손목ㆍ손가락의 공부가 모두 갖추어져야 비로소 글씨의 성취가 있을 것이다. 이른바 ‘손가락으로 운필하여도 손목은 알지 못하게 해야 한다’라고 하여 이미 변화의 경지에 들고 묘한 이치를 깨달은 것이니 이것은 고인들이 말하지 않은 비법이다.
01-6
單鉤者는 食指中指參差不齊하여 食指鉤向大指하고 中指鉤向名指하니 此是單鉤라
단구는 검지와 중지가 들쭉날쭉 가지런하지 않게 하고 검지는 구부려 엄지를 향하고 중지는 구부려 무명지를 향하게 해야 한다. 이것이 단구이다.
01-7
黃山谷*與人書云 公書字는 已佳이나 但疑是單鉤라 臂肘著紙하면 故尚有拘局이며 不敢浪意態耳라하니라
황정견은 다른 사람에게 주는 글에서 이르기를 “공이 쓴 글씨는 아름다우나 다만 단구인가 의심스럽다. 팔과 팔꿈치가 종이에 닿으면 오히려 구속됨이 있어서 의태가 자유롭지 못하다”라고 하였다.
*黃山谷(황산곡): 황정견(黃庭堅, 1045-1105)의 자가 노직(魯直)이고 호는 산곡(山谷)이며 북송의 유명한 문학가ㆍ서예가로 장뢰(張耒)ㆍ조보지(晁補之)ㆍ진관(秦觀)과 함께 소식(蘇軾) 문하에서 공부하여 ‘소문사학사(蘇門四學士)’라 일컫는다.
01-8
故로 學書第一執筆이라 執筆欲高이나 低則拘攣*이라 執筆高則臂懸이요 懸則骨力兼到하여 字勢無限이라 雖小字라도 亦不令臂肘著案이라야 方成書法也라
그러므로 서예를 배움에 첫 번째는 집필이다. 집필은 높게 해야 하고 낮으면 궁핍하고 어렵게 된다. 집필이 높으면 팔이 매달리게 되고, 매달리면 골기를 함께 이루어 글씨 형세의 한계가 없다. 비록 작은 글씨라도 또한 팔이 책상에 닿지 않게 하여야 비로소 필법이 이루어진다.
*拘攣(구련): 궁핍하고 어려움을 이른다,
01-9
米元章이 授陳伯脩父子*提筆之法曰 以腕著紙하면 則筆端有指力無臂力也라하니 曰 提筆亦可作小字乎아 元章笑顧小史索紙하고 書其所作進黼扆*贊表러니 筆畫端謹하고 字如蠅頭하여 而位置規模一如大字라
미불이 진백수 부자에게 제필법(붓을 드는 방법)을 전수해주며 말하기를 “손목이 종이에 닿으면 붓끝에 손가락의 힘은 있으나 팔뚝의 힘은 없다”라고 하였다. 묻기를 “제필법 또한 작은 글씨를 쓸 수 있다는 것입니까” 하니 미불이 웃으며 시중드는 아이에게 종이를 가져오라하여 <진보의찬표>를 써 보이니 필과 획은 단정ㆍ근엄하고 글씨는 아주 작아도 배열과 형태가 마치 큰 글씨와 같았다.
*陳伯脩(진백수): 진사석(陳師錫, 1057-1125)은 자가 백수(伯脩)이고, 건양(建陽) 사람이다. 송나라 철종은 소식의 의견으로 진백수를 교서랑(校書郎)에 임명하였다.
*黼扆(보의): 도끼를 그린 빨간 비단으로 만든 병풍으로 천자가 제후를 대할 때 어좌(御座)의 뒤에 세웠다. 보의(黼依)ㆍ부의(斧扆)ㆍ부의(斧衣)라고도 한다.
*蠅頭(승두): 파리의 대가리만큼 작은 글씨를 비유하는 말이다. 승두세서(蠅頭細書)ㆍ승두소해(蠅頭小楷)라고도 한다.
01-10
伯脩父子相顧歎服하고 因請其法하니 元章曰 此無他라 但自今以後에 每作字時에 無一字不提筆하여 久久當自熟矣라하니라 故로 撥鐙懸臂之法은 造詣無窮하고 古之能書者는 無不皆然也라하니라
진백수 부자는 서로 돌아보며 탄복하고 그 필법을 물으니 미불이 말하기를 “이는 다른 것이 없고 다만 지금부터 매번 글씨를 쓸 때에 한 글자라도 붓을 들지 않음이 없게 하여 오래도록 하면 절로 익숙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발등과 현비의 집필법은 조예가 무궁하였고 옛날의 서예가들은 모두 그렇지 않음이 없었다.
첫댓글 ^^훌륭하십니다.
고맙습니다.
한번 더 읽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