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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01
로마서 14장 7-9절
오늘부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살피겠는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팔츠의 선제후인 프리드리히 3세(1515-1576)가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그리고 개혁신앙으로 개종하면서 자신의 영내의 교회들과 학교들에서 사용할 수 있는 신앙의 기본 진리를 문답으로 만들도록 지시함으로 1563년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1534-1583)와 카스파르 올레비아누스(1536-1587)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우르시누스는 요리문답에 대한 해설까지 내놓았는데, 현재 한글로 번역되어 있기 때문에 주로 해설을 중심으로 요리문답의 내용을 살피고자 합니다.
우선 서론적으로 교회가 가르쳐온 교의에 대해 조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교회가 가르쳐온 교의는 무엇인가? 우르시누스는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교회가 가르쳐온 교의는 참되신 하나님과 그의 뜻과 역사하심, 그리고 예배에 관한 율법과 복음의 부패하지 않은 순전한 교의로서, 신적으로 영감 되었고,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글 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또한 많은 이적들과 신적인 증거들로써 확증되는 것이다.” 이때 교회가 가르쳐온 교의란 요리문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요리문답이 순전한 교의로만 되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순전한 교의란 반드시 성경으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가르쳐온 교의란 무엇인가 할 때 신적으로 영감 되었고,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글 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또한 많은 이적들과 신적인 증거들로써 확증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의 권위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 이해와 해석은 교회 역사 속에서 볼 때 항상 순전한 교의로서만 가르쳐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참된 진리의 가르침과 교훈은 점과 흠과 결여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지상의 교회 안에서조차 주의 은혜를 따라 참된 성도의 양식과 꼴로서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동시에 거짓 가르침과 이단적 사설들도 그런 방식으로 교회의 삯군과 이리의 무기로서 자리해 왔습니다. 때문에 교회의 역사와 우리의 씨름은 후자를 물리치고 전자를 취하고 누리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역사는 그런 과정 속에서 성경 이해와 해석에 근거하여 신앙고백 및 요리문답과 같은 내용을 내놓았던 겁니다. 다만 신앙고백과 요리문답의 모든 내용이 성경과 일치하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는 데 있습니다. 성경의 경우 무오하다고 할 수 있지만, 무오하기 때문에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다고 할 수 있지만, 성경 이해와 해석의 산물인 신앙고백과 요리문답 등은 절대적인 권위 앞에 상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가르쳐온 교의라고 할 때 요리문답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그럼 성경의 가르침, 다시 말해 교회가 가르쳐온 교의에는 어떤 부분들이 있는가? 교회가 가르쳐온 교의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율법이고 다른 하나는 복음입니다. 어떤 이들은 율법과 복음을 대조시키지만 율법과 복음은 결코 반대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단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가 골자입니다. 요한복음 5장 3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예수님 당시 성경을 연구한다고 할 때 구약을 의미하는데, 구약의 핵심이 무엇인가? ‘내게 대하여’, 다시 말해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언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만이 아니라 구약도 그리스도를 골자로 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가 성경 전체의 골자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와 그가 베푸시는 은택들을 알기 위해서는 율법과 복음에 포함되어 있는 교의가 필수적으로 있어야 합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합니다. 또한 그에게로 나아가도록 우리를 강권합니다. 또한 그가 이루사 이제 우리에게 베푸시는 바 그 의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복음은 그리스도의 위격과 직분, 은택들을 다룹니다. 만약 율법과 복음을 대조적으로 놓는다면 한쪽은 필요가 없어야 하지만 교회가 가르쳐온 교의는 율법도 필요하고 복음도 필요합니다.
다만 율법과 복음의 차이점이 있다면 율법의 형식은 완전한 순종을 조건을 생명을 약속한다면 복음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이 믿음조차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함으로 생명을 거저 주신다고 말하는 데 있습니다. 이 외에도 몇 가지가 있지만 각설하도록 하겠습니다.
서론적으로 한 부분만 더 언급하자면 이 교의를 가르치고 공부하는 방법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이 부분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맨 첫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기에 대해 우르시누스는 세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는 요리문답 교육의 체계, 혹은 요리문답이라 불리는 것으로 기독교 신앙의 주된 교의들을 간략하게 정리하며 단순하게 해명하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일반적이며 좀 더 난해한 성격을 띠는 주제들을 논의하고 토론하는 것인데, 예를 들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처럼 ‘성경에 대하여’, ‘하나님과 삼위일체에 대하여’라는 특정한 주제에 따라 공부하는 방법입니다. 이것을 총론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방법이 성경 본문을 조심스럽게 부지런히 읽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성경으로 곧바로 가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요리문답이나 신앙고백과 같은 내용들은 앞서도 말했지만 성경의 권위와 같지 않습니다. 성경만이 무오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으로 곧바로 가는 것은 지혜로운 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교회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동일한 성경을 가지고 수없이 많은 점과 흠, 오류를 낳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과 흠과 오류를 피하기 위해 우리는 성경으로 가되 정통주의라는 정거장을 거쳐서 가는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을 대하는 인간 자신의 근본적인 한계를 인정하고, 또 교회 역사의 실수와 실패를 피하고 진리로 남은 것을 한 교회의 한 믿음과 한 교리로 받기 위해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성경으로 가되 어거스틴, 특별히 후기 어거스틴을 통해서 가야 합니다. 후기 어거스틴으로 가되 칼빈을 통해서 가야 합니다. 칼빈으로 가되 도르트 신조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등을 산출한 17세기 개혁신학을 통해서 가야 합니다. 바로 그런 측면에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배운 것이고, 이제 하이델베르코 요리문답을 배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배우는 과정 속에서 성경에 일치되지 않는다면 올바르게 고쳐 이해해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 순전한 교의만 남도록 해야 합니다.
이제 하이델베르코 요리문답 내용으로 들어가겠는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총 129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문답에 번호가 붙여진 것은 1573년 판부터이고, 이것을 52주 분량으로 나눠 매주 공부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전체 구조는 2문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 번째는 죄와 비참함에 대한 것이고, 두 번째는 죄와 비참함에서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구원 받은 것에 대하여 우리가 얼마나 감사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이런 구조에 앞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문은 유일한 위로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1문. 사나 죽으나 그대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답. 사나 죽으나(롬14:7-8) 나의 몸도 영혼도 나의 것이 아니요(고전6:19)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고전3:23). 그는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죗값을 다 치르셨고(벧전1:18-19, 요일1:7, 2:2,12)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구원해 내셨으며(히2:14, 요일3:8, 요8:34-36),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고서는 머리털 하나도 떨어질 수 없도록(마10:29-31, 눅21:18), 과연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롬8:28), 그렇게 나를 보존시켜 주십니다(요6:39, 10:28, 살후3:3, 벧전1:5). 그러므로 그는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로 하여금 영생을 확신하게 하시며(고후1:20-22, 5:5, 엡1:13-14, 롬8:16), 이제부터 그를 위하여 살기를 진정으로 바라도록 만드시고 또한 그렇게 살 준비를 갖추도록 만드십니다(롬8:14, 요일3:3).
우선 위로란 무엇인가? 우리말로 위로란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괴로움을 덜어 주거나 슬픔을 달래 준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위로가 있기 위해서는 괴로움 혹은 슬픔을 전제로 하는데, 인생에 있어 괴로움과 슬픔은 굉장히 많습니다.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괴로워하거나 슬퍼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환경으로 인해 괴로워하거나 슬퍼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고 있는 가장 괴로운 일 그리고 가장 슬픈 일은 인간이 죄인이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본래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실 때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고 말씀하실 수 있는 그런 상태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았고(엡4:24),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도 가지고 있었습니다(골3:10). 그러나 하나님께서 금하신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인해 죄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그의 참 생명 되시는 하나님과 분리되었고, 모든 본성이 부패하여 스스로 육적인 죽음과 영적인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또 사람은 모든 길에서 악해지고 완악해지고 부패해져서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은 모든 탁월한 은사들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류는 죄인으로 시작하여 영원한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자로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살아 있는 동안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을지라도, 심지어 죽음 이후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알릴 정도로 어떤 업적을 남겼다 할지라도 죄인인 이상 하나님의 영원한 저주 아래 놓이기 때문에 이것보다 더 괴롭고 슬픈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큰 위로,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위로는 죄인이 되었다는 이 사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데에 있습니다. 이 위로를 누가 주는가? 성경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실제로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피해 숨어 있는 그들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위로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원복음의 말씀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비록 하와를 유혹한 뱀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아담과 하와에게는 위로의 말씀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구원에 대한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벨직 신앙고백 제17장은 타락한 사람의 회복에 대한 것으로 이 부분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우리는 사람이 스스로 육체적이고 영적인 죽음에 빠져 완전히 비참하게 되었을 때, 은혜로우신 우리 하나님께서 당신의 놀라운 지혜와 선하심으로 사람이 당신 앞에서 두려워 떨며 도망칠 때에 그를 찾으신다는 것을 믿습니다(창3:9).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주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것에 대한 약속으로 사람을 위로하시고, 복을 주셨습니다(창22:18, 사7:14, 요1:14, 5:46, 7:42, 행13:32-33, 롬1:2-3, 갈3:16).” 죄로 말미암아 비참하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죄인을 찾으신다는 것, 여기에 은혜가 있는 것이고, 여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선하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비참하게 된 자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찾아오시는가? 창세기 3장 15절은 여자의 후손에 대한 약속을 주심으로 찾아오시겠다고 하십니다. 이때 여자의 후손이라 함은 가인도 아니요 아벨도 아니요 셋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너희를 비참함 가운데서 건져주겠다는 것입니다. 특히 여자의 후손으로 나게 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뱀을 도구로 한 사탄 혹은 마귀로부터 승리하실 것에 대한 약속입니다. 죄를 지은 후 죄의 지배 아래 있고 사탄의 지배 아래 있게 되지만, 그리스도께서 사탄으로부터 승리하셔서 더 이상 죄의 지배 아래 있지 않게 하시고 사탄의 지배 아래 있지 않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이 위로에 대해 ‘사나 죽으나 나의 몸도 영혼도 나의 것이 아니요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본래 죄 아래 있던 우리를 또한 사탄의 권세 아래 있던 우리를 그리스도의 것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간혹 우리는 나 자신이 나의 것이라는 착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소위 자유의지라는 것을 가지고 있어서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하는 외형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번도 나를 내 것으로 가진 적이 없습니다. 맨 처음 창조된 인간을 생각해 보면 그때도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누구의 명령을 받아야 하는 존재로 있었는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야 하는 존재로 있었습니다. 그 말은 맨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아무리 자유의지를 가지고 임의로 행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해야 할 하나님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했던 겁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의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먹지 말라고 하신 열매를 먹었습니다. 이때 뱀의 말처럼(창3:5) 하나님과 같이 되었는가? 시편 2편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시2:3) 맨 것을 끊고 결박을 벗어 버린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가 우리를 지배하는, 사탄이 우리의 왕으로 있는 그런 자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죄에게 종노릇 한다(롬6:6), 죄의 종이 되었다고 표현하기도 하는 것입니다(롬6:20).
요리문답에서 ‘나의 것이 아니요’라고 할 때, 덧붙여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고 할 때 그리스도의 것이 되기 전에는 나를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와 아담 이후 태어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고 할 때는 죄에게 종노릇하며 죄의 종으로 있었던 것이 인간의 실상입니다. 이런 인간의 실상에 대해 로마서는 다음과 같이 증거 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21-23) 본래 사람이 창조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야 했습니다. 그러나 명령을 어겼을 때 죄가 들어오게 되었고 죄로 말미암아 더 이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수없이 많은 종교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 원인입니다.
그러나 죄의 종으로 있던 우리를 구원하여 그리스도의 것으로 삼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보다 더 큰 감사의 내용이 어디 있겠습니까? 누가복음 1장에 보면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한 내용이 있는데, 그리스도에 대한 것입니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눅1:68-75)
그럼 어떻게 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는가? 요리문답은 ‘그는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죗값을 다 치르셨고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구원해 내셨다’고 설명합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는 말 안에 그분이 우리를 위해 값을 치르셨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지불해야 할 값은 사망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 죽음이요 영벌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 내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 누가 죽으셨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습니다. 그가 나를 대신하여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증거 합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1:18-19) 사도 요한도 동일하게 증거 합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7) 뿐만 아니라 그가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구원해 내셨습니다. 요한일서 3장에 보면(요일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였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죄의 종은 곧 마귀의 종이요 사탄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신 이유가 무엇인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달리 표현하면 마귀의 종으로 있던 우리를 더 이상 마귀의 종으로 있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란 것입니다. 그 말은 더 이상 죄의 종이 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죗값을 대신하여 지불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죗값을 지불하셨다는 것은 곧 우리를 마귀의 모든 권세로부터 구원해 내셨다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죗값을 다 치르셨고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구원해 내셨다는 것인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요리문답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고서는 머리털 하나도 떨어질 수 없도록, 과연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 그렇게 나를 보존시켜 주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는 것은 앞서도 말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본래 죄 아래 있던 우리를 또한 사탄의 권세 아래 있던 우리를 그리스도의 것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 죄 아래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사탄의 권세 아래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죄가 우리를 지배했고 사탄이 우리를 지배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의 것으로 그리스도가,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인이요,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라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그가 우리를 책임지신다는 것인데, 이런 측면에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고서는 머리털 하나도 떨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은 창조주이실 뿐만 아니라 창조하신 모든 만물과 창조하지 않는 죄에 대해서도 섭리하시는 분이십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1문에서 살펴봤지만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란 그의 모든 피조물들과 그들의 모든 행동들을 하나님께서 지극히 거룩하고(시145:17) 지혜롭고(시104:24, 사28:29) 능력있게 보존하시며(히1:3) 다스리시는 것입니다(시103:19, 마10:29-31). 여기에 우연이 있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 있는가? 없습니다. 조금 전에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창조하지 않은 죄라고 표현했지만, 잠언 16장 4절은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하기까지 하십니다. 원문의 의미를 살려 번역하자면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자신을 위해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을 위해 지으셨느니라”입니다. 잘못 이해하면 하나님께서 죄인을 지으셨다는 것처럼 들릴 수 있지만,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으로 죄를 창조하실 수 없고, 죄의 원인자가 되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죄조차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하나님은 죄와 무관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능력과 지혜로 죄조차 그의 기뻐하시는 뜻 안에서 사용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인데 어떻게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서 머리털 하나라도 떨어질 수 있겠습니까? 만약 머리털 하나라도 떨어지는 일이 있다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이고 거기에는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가 있는 겁니다. 우연이 없습니다. 전도서 3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다고 할 때(전3:2) 그 모든 것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들, 그리고 그들의 모든 행동들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습니다. 때문에 이 땅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그의 뜻과 섭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바로 이런 일들 속에서도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되 바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서 우리를 지켜 보존해 주십니다.
이것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 로마서 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선 28절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이후에 나오는데, 그 가운데 38절과 39절만 보자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것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나아가 요리문답은 ‘그러므로 그는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로 하여금 영생을 확신하게 하시며, 이제부터 그를 위하여 살기를 진정으로 바라도록 만드시고 또한 그렇게 살 준비를 갖추도록 만든다’고 설명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죄 사함과, 그로 인해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해방된 것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해방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보호하시면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신다는 것을 포함합니다. 구원의 완성은 이 땅에서 받는 것은 아니지만 이 땅에서부터 영생을 확신하도록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영생을 확신하기 때문에 더 이상 죄의 종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으로, 그를 위해 살기로 진정 바라게 되고 또한 그렇게 살 준비를 갖추게 합니다. 그런데 이 일을 누가 하시는가? 성령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역으로 말하면 우리 스스로는 영생을 확신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고 해서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로 진정 바라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살 준비를 갖추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것이 되어 더 이상 죄의 종으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본성의 부패함이 여전히 남아 있고, 그런 부패한 본성이 우리에게는 익숙한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그의 성령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영생을 확신하도록 만드십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기를 진정으로 바라도록 만드십니다. 또한 그렇게 살 준비를 갖추도록 만드십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읽은 로마서 14장은 바로 이 사실을 증거 합니다. 7절과 8절을 보시면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주의 것이 되었는가? 이미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상태로 만드셨지만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으로 타락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는 것은 본문이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더 이상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사는 자인가? 주를 위해 사는 자입니다. 사는 것만이 아니라 죽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자, 그가 그리스도의 것이 된 자의 삶입니다.
오늘 본문 9절은 바로 이것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가 다시금 살아나셨다고 증거 합니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 서 부활하신 것은 우리의 의 때문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에 대해서는 죽고,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의에 대해서는 살도록 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모든 삶의 방향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죄가 아니라 의를 향한 방향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로마서 6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6:12-13) 이것을 좀 더 간단히 말하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것과 같습니다(고전10:31).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산다는 것은 곧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