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원고는 2018년 11월 20일 팟빵 방송용 원고였습니다.
창세기의 핵심 내용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심정과 마음,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 하나님의 가치와 원리를 풍성하게 담아 사람을 지어주셨는데, 그렇게 지음 받은 사람이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떠나 죄인인 됨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의 모든 선한 것을 다 상실했고, 불행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죄인이 되어 불행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의 상황을 너무나 안타까이 여기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을 찾아와 그에게 복을 주고, 땅을 주고, 민족을 이루어주시겠다는 세 가지 약속을 하시고, 그 약속을 이루어나가시는 가운데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과 또 그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관한 모든 것을 하나하나 가르쳐 나가셨다는 내용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이 늘 하나님 곁을 떠났다는 내용이었고, 그런 그들을 다시 또 하나님께서 찾아주셨다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늘 하나님 곁을 떠나려고만 했던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결국 하나님께서 주신 가나안 땅을 뒤로 하고, 멀고 먼 이국 땅 애굽에 정착하는 것으로 창세기의 모든 내용은 끝을 맺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책이 바로 출애굽기입니다.
그런데 창세기와 출애굽기 사이에는 400년이 넘는 시간적 공백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 기간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기록이 없다고 해서 혹시 하나님이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면서 마냥 쉬시고 계셨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떠난 사람을 언제나 다시 또 찾아주시는 하나님이시라고 말씀드렸는데, 400년이 넘는 시간동안 성경에 아무 기록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나 몰라라 방치했다고 생각하시면 큰 오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굽 땅에 이른 칠십 명의 야곱 일가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 중의 하나, 즉 이스라엘이 민족을 이룰 수 있도록 그들을 보호하고 그들을 돕고 계셨습니다. 그 증거가 되는 내용이 [출애굽기 1:7],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라는 내용입니다.
400년이 넘는 오랜 시간 동안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에 대해 다 잊어버렸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약속을 항상 기억하고 계셨고, 이스라엘 민족을 항상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비록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떠나 애굽 땅에 삶의 터전을 꾸렸어도 하나님은 하나도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사람의 행복을 위해 수고하시고 애쓰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가 꼭 한 가지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과 애굽과의 관계입니다. 성경은 애굽과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적대적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이듯이 모든 민족, 모든 국가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선하고, 애굽이 악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고, 애굽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창세기의 요셉 때에는 요셉으로 인하여 애굽이 기근에서 벗어났고, 그 애굽이 이스라엘을 보호하며 민족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이렇게 서로 도와주고 서로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쳐주는 관계,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바람직한 관계입니다.
그러나 이 바람직한 관계가 어떤 한 사람으로 인하여 깨어지기 시작합니다. 그 내용이 [출애굽기 1: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라는 내용입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이라는 내용에서 ‘알지 못하는’이라는 표현의 의미는 ‘모른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알아주고 싶지 않다’라는 의미입니다.
한 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애굽 왕이 요셉을 모를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모를 수가 없습니다. 왕은 한 국가의 왕이 되기까지 참으로 많은 교육을 받습니다. 그 교육 중에는 당연히 역사 교육도 포함이 됩니다. 자신이 다스리는 국가가 언제 형성이 되었고, 이전에 어떤 왕들이 있었으며, 어떤 왕 때에 어떤 위기 상황을 겪었는지 다 배우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교육을 받은 애굽 왕이 요셉을 모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알지 못하는’의 의미는 실제로 ‘모른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알아주고 싶지 않다’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요셉을 ‘알고 있으면’ 요셉의 이름에 어울릴 정도의 적절한 대접을 해 주어야만 합니다. 요셉의 공로를 인정해 주어야만 하고, 요셉의 업적을 인정해 주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요셉의 공로를 인정해 주고 요셉의 업적을 인정해 주면 요셉의 자손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을 역시 인정해 주어야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어야만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배려를 해주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애굽의 새 왕은 그렇게 해주기가 싫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비와 배려를 베풀어주기가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애굽의 새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요셉을 알아주고 싶지 않은 것이고, 요셉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을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라고 성경은 표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애굽 왕 바로가 왜 요셉을 알고 싶어 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왜 요셉을 기억하고 싶지 않아 했고, 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자비와 배려를 베풀어주기를 싫어했느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출애굽기 1:7]이 기록한 바와 같이 이스라엘이 생육하고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즉 애굽의 새 왕 바로가 걱정한 것은 이스라엘 자손의 숫자였던 것입니다.
물론 숫자가 많은 것 자체를 두려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로는 이스라엘이 적군과 연합하는 것을 걱정했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갈까봐 걱정했고 두려워했습니다. 지금 애굽의 새로운 왕은 이 숫자 많은 민족이 적군과 합세하여 쿠데타를 일으키고, 자기를 왕위에서 내쫓고, 혹시라도 애굽을 떠날까봐 걱정하고 있는 것이고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출애굽기 1:9-10], ‘그가 그 백성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 하고’라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이 한 일이라고는 생육하고 번성하고 온 땅에 가득하게 된 일뿐이기 때문입니다. 애굽 왕 바로에게 어떤 위협도 될 만한 일을 행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애굽 왕 바로 스스로 이스라엘을 두려워하고, 바로 스스로 이스라엘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애굽 왕 바로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애굽 왕 바로가 오직 죄의 원리로만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유익과 이익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일도 서슴지 않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 죄의 원리에 사로잡힌 애굽 왕 바로가 하는 말이 ‘지혜롭게 하자’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명령이 아니라 애굽의 모든 백성들을 향한 청원입니다. 10절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라고 애굽 백성들에게 청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애굽 왕 바로가 애굽의 모든 백성들을 선동해서 애굽 백성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이스라엘을 대적자로 몰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왕은 언제나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이는 것처럼 묘사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왕과 백성 중 이런 제안을 하는 게 왕입니다. 왕이 ‘두렵건대’라는 표현으로 말을 시작하며 애굽 백성들을 선동합니다. 바로가 이런 표현으로 시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통치자가 하는 말은 언제나 ‘백성을 위하여’입니다. 숫자가 많아진 이스라엘 민족, 온 땅에 가득해진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 왕에게 위협이 된다고 말하면 도무지 명분이 서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 나라를,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 백성을 지배하려고 한다고 말하며 애굽 백성들을 선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는 일이 애굽의 자기 백성들을 이스라엘 자손들의 감독관으로 세워주는 일입니다. 그 내용이 [출애굽기 1:11],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라는 내용입니다.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고 한 것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 위에 애굽 백성들을 감독관으로 앉혀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에 온 애굽 백성이 일치단결해서 헌신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이스라엘이 위축되고 이스라엘이 약화되리라고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납니다. 그 내용이 [출애굽기 1:12],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가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여’라는 내용입니다. 애굽은 자신들의 계획대로 진행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애굽 백성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죄의 원리에 사로잡힌 애굽의 새 왕 한 사람의 공연한 염려로 시작된 이스라엘의 존재가 이제는 정말로 애굽 온 백성들에게 두려운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아무것도 행한 것이 없는데, 죄인들 스스로 걱정하고, 죄인들 스스로 염려하고, 죄인들 스스로 불행해 지는 것입니다.
바로와 애굽이 이런 사실을 깨닫고 죄로부터 돌아설까요, 그렇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죄인은 그렇게 쉽게 돌아서는 존재가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등장하는 내용이 [출애굽기 1:13-14],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을 엄하게 시켜 어려운 노동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일이 모두 엄하였더라’라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과 애굽은 서로 도우며 서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관계였는데 죄의 원리에 굳세게 사로잡힌 애굽의 새 왕 하나로 인하여 한쪽은 괴롭히는 존재, 한쪽은 괴롭힘을 당하는 존재가 되어 이제 양자의 관계는 서로 원수의 관계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애굽 왕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얼마나 원수처럼 대하는지, 또 이처럼 원수 취급을 받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어떻게 도우시는지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댓글 할렐루야!! 은사목사님 카페에서 만나니 더욱 반갑습니다..앞으로도 기대됩니다 ^^